<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76화>
176화. 완성했나 보네요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Timeless』의 시나리오를 손에 쥔 송강식이 안시현을 향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맙다, 시현아.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선뜻 들어줘서. 혼자 오기에는 좀 그렇더라고.”
“괜찮아요. 저도 미리 와서 준비하려고 했었어요. 다른 배우들하고 미리 호흡을 맞춰 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고요. 기욤 감독님도 동의하셨고요.”
“한 달이면 준비하기에는 충분하겠지. 시현이 넌 준비 잘했다면서? 연말에 이석재 선생님 뵀는데 칭찬이 자자하시더라고.”
“아직 부족해요. 연습하면서 가다듬을 만한 부분이 좀 보이더라고요.”
“독한 놈. 그래, 한 달 동안 죽어가 가다듬어 보자.”
안시현이 2009년의 마지막 날 미국행을 택한 건, 함께 미국에서 연습을 하자는 송강식의 제안 덕분이었다.
『Timeless』는 대본 리딩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안시현과 송강식은 배우들과 크랭크인 전에 연습하기 위해서 만나기로 했다.
배우들과의 만남을 주선한 건 송강식이었다.
공교롭게도 황금영화제에서 안면을 익힌 배우들이 『Timeless』의 주연으로 낙점됐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함께 연습을 하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할리우드 진출작이니만큼 철저하게 준비해서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강했다.
다른 배우들 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욤 뒤자르댕은 수준급 연기력이 필요한 캐릭터를 선호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가 항상 좋은 평가를 받아 온 것도,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Timeless』의 난이도가 유독 높다는 데에서 발생했다.
안시현뿐만 아니라 주연을 맡은 다른 두 배우 또한 노인의 시선에서 젊은 시절을 표현해야 하는데, 이게 웬만큼 연습한다고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두 주연 배우들 또한 함께 연습하면서 아쉬운 부분을 보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크랭크인에 맞춰 제대로 준비를 끝내기 힘들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뉴욕.
안시현과 송강식이 향한 곳은 JP스튜디오라는 이름의 영화 제작사였다.
주로 소규모 영화에 투자해서 대박을 내는 스타일의 영화 제작사로, 지금껏 가장 큰 제작비를 투자한 영화가 『Timeless』다.
그만큼 『Timeless』에 거는 기대가 컸다.
JP스튜디오의 기대감은 배우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났다.
계약 조건에 포함되지 않는 방문임에도 흔쾌히 스튜디오 내부의 연습 공간을 제공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즈니스 석과 숙소 및 통역까지 지원해 줬다.
배우들은 JP스튜디오의 배려에 감사해했다.
또한.
크랭크인 준비로 인해 한창 바쁠 텐데도 굳이 연습을 지켜보러 와 준 기욤 뒤자르댕 감독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감독님.”
“자발적으로 모여서 연습을 한다는데, 자주는 아니더라도 시간 날 때마다 와 보는 게 당연하죠. 제가 도움이 될 만한 부분도 분명 있을 거고요.”
“이러니까 꼭 대본 리딩을 하는 기분이네요.”
안시현과 송강식은 기욤 뒤자르댕이 연습에 참관하자 마치 대본 리딩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대본 리딩과는 임하는 감정이 사뭇 달랐다.
보통 대본 리딩은 어느 정도 캐릭터 구축을 끝내 놓고 점검을 하는 차원에서 하는 반면, 연습에 참여한 배우들 모두 캐릭터 구축에 애를 먹고 있는 부분이 하나둘씩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안시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첫 번째 연습을 지켜본 뒤.
기욤 뒤자르댕이 안시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현 씨는 벌써 완성했나 보네요. 이석재 배우의 사소한 습관마저도 따라 하는 걸 보니 말이죠.”
“이석재 선생님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요.”
안시현의 경우 이석재와 함께한 연습 덕분에 단 하나의 아쉬운 부분조차 없이 데이비드 킴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었다.
기욤 뒤자르댕 또한 인정했다.
안시현이 구축한 데이비드 킴 캐릭터에는 자신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첫 연습이 끝난 직후.
안시현과 함께 『Timeless』의 주연을 맡은 두 배우,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이 안시현에게 다가왔다.
“방금 전 당신은 안시현이 아닌 데이비드 킴이었어요. 어떤 방법을 쓴 건가요?”
“노인의 시선으로 젊은 시절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해결했는데, 상대 배우를 따라 하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두 배우 모두 노인의 시선에서 젊은 시절을 바라보는 캐릭터 구축은 어느 정도 해결한 상태였다.
문제는 현재의 주인공을 연기할 노년의 배우를 완벽하게 따라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노인이 젊은 시절로 돌아와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야 하는데, 말처럼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안시현은 두 배우의 고민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데이비드 킴 캐릭터를 구축하면서 같은 고민을 했었기에 절로 공감이 됐다.
“저 같은 경우는 거의 한 달 정도, 저와 호흡을 맞출 이석재 선생님이 출연했던 모든 작품을 분석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말투는 물론이거니와 사소한 습관까지도 모두 따라 하기 위해서요. 그 과정이 끝난 뒤에 캐릭터를 구축하니까 한결 수월하더라고요.”
“음. 역시 분석하는 게 정답인가 보네요. 저도 뉴욕에 오기 전까지 계속 영상을 보고 있었고, 여기서도 보기 위해 노트북에다가 잔뜩 저장해 왔거든요.”
“제 노트북도 그래요. 다행히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더 철저하게 분석해 봐야겠네요. 연습보다는 일단 분석부터 하는 게 나으려나요?”
“저라면 그렇게 할 거 같아요.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연습하면 답답할 것 같거든요.”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
두 배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안시현이 데이비드 킴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두 사람의 방법과 거기서 거기였다.
다른 게 있다면 안시현은 이석재라는 배우에 대해 회귀 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덕분에 분석이 보다 원활했다는 것 정도였다.
‘두 사람 다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경험이 있을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만큼, 조금만 더 분석에 공을 들인다면 곧 캐릭터를 완성할 게 분명해.’
안시현의 예상이 맞았다.
다음 날.
안시현과 함께 『Timeless』을 이끌어 나갈 두 주연 배우는 연습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꼬박 열흘 동안 말이다.
다시 연습실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두 사람의 캐릭터 구축은 완벽하게 마무리된 상태였다.
* * *
안시현이 뉴욕 JP스튜디오에서 『Timeless』의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사이.
박정상은 면접에 한창이었다.
안시현과 김진모를 담당할 매니저를 포함해 도합 5명의 매니저를 추가로 모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시현이와 진모를 확실하게 케어해 줄 만한 배우를 찾아야만 해.’
안시현과 김진모는 JM액터스의 간판 배우들이고, 두 사람의 옆을 지킬 매니저의 채용은 회사 입장에서 봤을 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박정상과 최봉팔이 희생한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각각 실장과 팀장으로서 다수의 배우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기에, 필연적으로 두 사람과 함께 할 새 매니저를 뽑을 필요가 있었다.
신입인지, 경력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시현과 김진모가 오롯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지가 핵심이었다.
김진모를 맡을 매니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 인상적인 경력직 매니저가 김진모와 함께하기를 바랐으니까.
외향적이지만 다소 덤벙대는 성격의 김진모와 호흡을 맞추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안시현의 새 매니저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도통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고,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지원자까지 오고 말았다.
마지막 지원자가 입장하기 전.
“후우…….”
이력서를 손에 쥔 박정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자가 제법 많았기에 손쉽게 인재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마지막 지원자까지 오게 되자 피로가 확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일단 진모의 새 매니저를 제외하고 채용할 4명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긴 하는데…… 시현이가 문제네.’
합격자 5명을 추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중 안시현의 담당을 맡길 적합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쩔 수 없지. 정 안 되면 영어 좀 되는 매니저 한 명 임시로 붙여 줄 수밖에.’
결국 박정상은 차선책까지 고민하고서 마지막 지원자를 마주했다.
이력서를 뒤적이던 박정상의 두 눈이 커졌다.
“영어랑 프랑스어를 잘한다고요?”
“아, 네. 부모님의 일로 인해서 중학교 때까지 프랑스와 미국에서 살았거든요. 전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도 3개 국어 가능하니 해외 공연을 다닐 때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정작 해외 공연을 해 보기도 전에 사장이 야반도주하면서 그룹이 공중분해됐지만요.”
마지막 참가자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능력자이자, 중소 연예기획사에서 2년 동안 아이돌 그룹의 매니저를 한 경험이 있는 사내였다.
지원 사유는 사장이 야반도주를 해서 새 직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박정상이 사내의 이력서를 꼼꼼히 살폈다.
“으음. 이 회사…… 아, 기억나네요. 거기에 황 실장님 계시지 않습니까?”
“네. 지금은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단맛, 쓴맛, 똥맛까지 다 봤으니 더 이상 미련 없다고, 물려받는 땅 많으니 뭐라도 키우면 먹고살지 않겠냐면서 말이죠.”
“능력 있는 분이셨는데 안타깝네요. 저 잠깐, 통화 좀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면접, 5분 후에 다시 재개하겠습니다.”
박정상이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는 휴대폰 연락처를 쭉 뒤진 끝에 한 사람의 연락처를 찾아내고서 전화를 걸었다.
“황 실장님? JM의 박정상 실장입니다. 귀농하셨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
박정상은 면접을 온 사내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잠시 후.
황 실장이란 사람은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서 긍정적인 평가를 늘어놓았다.
-성실하게 묵묵히 자기 할 일 하는 친구입니다. 눈치도 제법 빠른 편이고, 혹여나 실수를 하더라도 변명 한 번 하지 않고 깔끔하게 사과하곤 했죠.
“정직한 스타일이군요.”
-밥값은 할 겁니다. 듣기로는 여자 친구가 얼마 전에 임신을 해서 결혼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 와중에 사장 새끼가 야반도주를 해 버려서 난리가 났죠. 구인구직 열심히 하고 다니는 거 같더니, JM액터스까지 갔나 보군요.
“속도 위반이라……. 간절해 보이는 이유가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언제 그쪽에 내려갈 일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술 한잔하시죠.”
통화를 끝내고 다시 면집실로 돌아온 박정상이, 마지막 지원자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JM액터스 소속 연예인 중 함께 일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있다면 이유는요?”
“없습니다. 업무에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을 담당하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해외 출장이 부담되지는 않나요?”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지겹게 타서 괜찮습니다. 해외 출장을 가면 추가 수당도 나오는데 오히려 대환영이죠.”
“그래요. 그러면…….”
형식적으로 몇몇 질문을 던진 뒤.
박정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널브러져 있던 이력서들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일주일 후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전 내일 당장 출근할 수 있습니다.”
“아뇨. 일주일이 필요할 겁니다. 마포가 아니라 뉴욕으로 출근해야 할 테니까요.”
“……네?”
“하정남 씨가 담당해야 할 배우가, 지금 뉴욕에 있거든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안시현을 담당하게 될 새 매니저가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