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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76화 (17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77화>

177화. 나야 좋지

출국 며칠 전.

안시현은 박정상이 2010년 2월에 있을 인사이동을 통해 사장으로 승진할 것임을 전해 들었다.

실로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아직 마흔이 되지 않은 박정상이 실장인 것만으로도 업계의 성공 사례인데, 이제는 실장을 넘어 사장으로 승진하는 것이니까.

심지어 사장으로 승진하는 목적이 무려 김진석 대표의 뒤를 잇기 위한 준비 과정이란다.

‘대표님이야 회귀 전에도 2016년에 일선에서 물러나셨으니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만…… 설마 그 뒤를 잇는 게 정상 형이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어.’

회귀 전.

김진석 대표는 JM액터스를 전문 CEO에게 맡겼다. 내부 인사 중에는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는 부사장까지 올라갔던 박정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내부 평가에서 최고점을 받긴 했지만, JM액터스를 이끌어 나가기엔 부족하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물론 이번 생에서는 달랐다.

일찌감치 김진석 대표의 눈에 든 박정상은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안목을 넓혔고, 그 결과 부사장을 건너뛰고 대번에 사장으로까지 승진하게 됐다.

덩달아 박정상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최봉팔 또한 팀장에서 실장으로 승진할 예정이었기에, 사실상 두 사람 다 더 이상 안시현의 매니저 업무를 보는 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이에 안시현은 비교적 흔쾌히 변화를 납득했다.

‘지금까지 케어해 준 것만 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지.’

애초에 승진을 한 이후에도 개인 업무와 병행하면서까지 수년 동안 매니저 역할을 자처해 준 게 고마운 일이다. 이제는 박정상과 최봉팔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매니저로서의 두 사람을 놓아줄 때였다.

‘새 매니저는 진득하게 몇 년 동안 함께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동안.

박정상과 최봉팔의 빈자리를 대신할 몇 명의 매니저가 안시현을 거쳐 갔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안시현과 1년 이상 일하지 못했다. 다들 경력을 쌓기 위해 안시현의 옆에 머물다가 떠나갈 뿐이었다.

물론 이는 안시현이 지나칠 정도로 연기에 올인을 하고, 의외로 고지식한 스타일이기에 웬만한 매니저로는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JM액터스에서도 심사숙고해서 매니저를 뽑으려 하는 거였고 말이다.

뉴욕에 도착하고 11일째 되던 날.

안시현은 박정상으로부터 새 매니저가 뉴욕으로 첫 출근을 할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첫 출근이 해외 출장이라니 너무 잔인한데요?

-해외 출장 수당 나온다고 좋아하던데? 출장 준비 기간까지도 수당을 적용시켜 준다고 했거든. 출근 안 하는데 돈 들어오는 거니까 뉴욕에 뼈를 묻겠다고 하더라.

“돈 좋아하는 스타일?”

-속도위반 때문에 3월 결혼 예정이래.

“가장이구나. 그럼 그럴 만하네요. 저 때문에 고생해서 출장 오는 건데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세요. 비용은 제가 지불할게요.”

-오냐. 그렇게 처리하마.

다음 날.

JFK 국제공항 마중 나가는 길.

안시현이 생각에 잠겼다.

‘돌이켜 보면 참 많이 바뀌긴 했단 말이지.’

매니저의 변경으로 다시 한번 회귀 전과 지금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입지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박정상과 최봉팔만 하더라도 그렇다.

부사장까지는 승진했지만 그 이상을 노려 보지 못했던 박정상이, 김진석 대표에게 정식으로 인정받고 사장으로 승진해 대표가 될 준비를 하게 됐다.

우직한 성격의 평범한 매니저였던 최봉팔은 2월 인사이동에서 팀장을 넘어 실장까지 승진할 예정이다.

안시현 본인만 하더라도 회사에서 매니저의 배정을 놓고 심사숙고를 할 정도로 톱배우가 되지 않았던가.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생긴 상황.

안시현은 새 매니저와의 첫 만남이 기분 좋기를, 앞으로 걸어갈 자신의 앞길에만 더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공항에서 피켓을 들고 기다리길 몇 십 분.

한 사내가 안시현을 향해 다가왔다.

“안시현 배우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입국 심사 때문에 시간이 좀 더 걸렸습니다.”

“하정남 대리님? 반가워요.”

안시현이 은퇴할 때까지 쭉 함께하게 될 새 매니저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하정남과 함께 지낸 하루.

안시현은 박정상이 어째서 자신의 새 매니저로 하정남을 선택했는지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건 완전 내가 매니저가 된 것 같잖아. 정상 형이 사람 잘 뽑았네. 확실히 JM액터스 사람 복이 있다니까.’

하정남은 안시현과 성격이 비슷했다.

자신의 업무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아이돌 매니저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한 성격이었으며, 이제 곧 아내가 될 여자 친구에게 하루에 몇 번씩 연락하며 일과를 보고할 정도로 애처가였다.

마치 안시현 자신이 매니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성격과 행동 패턴이 비슷했다.

덕분에 의견 충돌이 일어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먼저 의견 제시를 하기보다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스타일이지만, 질문을 하면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영어를 잘하고, 미국 문화에 능통한 것 또한 안시현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시나리오에는 완벽히 표현되지 못한 7, 80년대 미국에서 사용됐던 은어와 관련된 정보를 하정남의 부모님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고맙다, 정남아. 덕분에 연습이 더 수월해지겠어.”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부모님이 형님 팬이라 통화만 시켜드린 게 전부인걸요. 그리고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야죠.”

“한국 가면 식사 부모님께 식사 한번 대접해야겠다. 시간 한번 잡아보자.”

“그럼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며칠 사이 안시현은 하정남과 말을 놓았다. 그만큼 하정남과 잘 맞는 부분이 많았다.

‘정남이 덕분에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겠어.’

하정남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안시현이 오롯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다는 거였다. 안시현이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이돌 그룹을 맡아 왔기에 배우를 케어하는 건 상대적으로 낯선 일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을 하면서 서툰 부분들을 몇 차례 노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묵묵히 성실하게 할 일을 하는 모습이 오히려 안시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하정남이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안시현은 뉴욕에서 철저하게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1월 마지막 주.

안시현이 송강식과 뉴욕을 떠나 텍사스로 향했다.

『Timeless』는 미국 4개 주와 캐나다에서 촬영을 할 예정인데, 가장 먼저 데이비드 킴 분량의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안시현이 세 주연 배우 중 가장 먼저 캐릭터 구축을 완료한 영향이 컸다.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이 기욤 뒤자르에게 먼저 촬영을 뒤로 미뤄 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일정이야 조율하면 되는 거니 상관없어요. 그보다……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된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제대로 준비해서 촬영에 들어가려고요.”

“시현이 연습하는 거 보는데,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더라고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확보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어요.”

두 배우가 촬영을 뒤로 미뤄달라고 부탁한 건 안시현의 연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석대로 호흡을 맞출 노년 배우의 연기 영상을 분석해서 말투와 행동, 사소한 습관들을 분석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그것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연기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크랭크인 시점에 맞춰 촬영에 들어간다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고, 데이비드 킴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안시현을 지켜보다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시현에게 양해를 구한 끝에 데이비드 킴의 촬영 분량을 초반에 몰아서 촬영하기로 했다.

“미안해요, 시현. 두 배우의 보다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미안해하지 마요, 감독님. 전 일정이 앞당겨진다고 하니 오히려 좋은걸요?”

기욤 뒤자르댕은 데이비드 킴의 촬영 분량을 초반에 몰아서 촬영하게 된 것에 미안함을 느꼈지만, 정작 안시현은 일정 조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초반에 몰아서 촬영하면 나야 좋지.’

『Timeless』의 촬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현재 시점에서 세 주인공의 삶을 보여 주고 시간여행을 제안받는 장면, 다섯 번의 과거 여행, 그리고 세 주인공이 스튜디오에서 시간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선택의 기로에 서는 장면이다.

이 중 안시현은 데이비드 킴의 시간여행만 촬영하면 사실상 촬영 분량이 끝난다. 스케줄만 놓고 보면 오히려 주임에도 각각 조연과 단역인 송강식과 이석재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편이라고 봐야 한다.

텍사스에서 대부분의 신을 촬영하고 캐나다에서 추가 촬영만 하면 일정이 마무리된다.

따라서 안시현의 입장에서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초반에 촬영을 몰아서 마무리하고 귀국을 하면, 개봉 전까지 다시 미국을 방문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따라서 안시현의 입장에서 보면 촬영을 앞당기는 걸 거절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겸사겸사 정남이도 결혼식 전에 촬영 끝마치고 귀국할 수 있을 테니 다행이네.’

그 와중에 마음에 쏙 든 새 매니저 하정남을 배려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텍사스.

안시현은 송강식과 함께 매니저들과 맛집을 돌아다니며 미식을 즐겼다. 온갖 고기 요리를 배불리 먹으며 크랭크인 전의 여유를 만끽했다.

크랭크인 이틀 전.

이석재가 텍사스 숙소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선생님.”

“허허허. 살다 보니 촬영 때문에 미국을 오는 날이 다 있네. 하여간 오래 살고 볼일이야.”

“여기 고기가 참 맛있습니다. 저희가 미리 탐방해 놨으니, 선생님도 함께 가시죠.”

“좋지. 이왕 미국에서 촬영하는 거, 맛있는 거 원없이 먹고 가야 하지 않겠어?”

“저희가 풀 코스로 대접하겠습니다, 선생님.”

“오냐. 기대하고 있으마.”

안시현과 송강식의 맛집 투어에 이석재까지 추가됐다. 세 사람은 하루 종일 촬영 장소 인근 지역의 맛집을 돌아다니며 배불리 식사를 즐겼다.

크랭크인 하루 전.

세 배우는 식사 때를 제외하면 숙소에서 나오지 않으며 막바지 연습에 매진했다.

특히나 홀로 연기해야 하는 안시현과 달리, 호흡을 맞춰야 하는 송강식과 이석재는 서로 의견을 조율하며 촬영을 준비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은 새삼 감탄을 했다.

‘선생님 영어 발음 장난 아니네. 연습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정말 대단하셔. 선생님 연세에 외국어를 습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이석재는 촬영 때문에 해외에 몇 번 나가본 걸 제외하면 해외여행 경험이 전무하다. 지금껏 연기를 하며 외국어 습득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랬던 이석재가 크랭크인을 하루 앞두고서 원어민 못지않은 유창한 발음으로 대사를 내뱉고 있었다.

뜻이야 번역을 통해 이해하며 되니 상관없고, 철저하게 발음에만 집중하며 연습을 한 결과였다.

감독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배우, 어떤 역할을 맡겨도 기대감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배우.

그게 바로 이석재다.

카리스마 있는 역할도, 망가지는 역할도, 눈물샘을 쥐어짜는 감정 신도 완벽하게 수행해 낸다.

원로 배우의 존재감이 필요할 때 캐스팅 1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배우다. 기욤 뒤자르댕 또한 데이비드 킴의 현재를 표현해 줄 배우로 한 치의 고민을 하지 않고 이석재를 선택했을 정도다.

영어가 가능한 후보군을 제쳐두고 캐스팅을 한 이유를, 이석재는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안시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과 함께 연기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동기 부여가 됐다.

‘나도 선생님처럼 나이가 들어도 한결같이 연기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배우가 될 수 있기를.’

다음 날.

2010년 2월 8일.

텍사스의 한 소규모 목장에서 예정대로 『Timeless』가 크랭크인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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