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79화 (17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0화>

180화. 타이틀 좋네요

2000년에 개봉했던 영화를 뜬금없이 미국에서 재개봉을 하겠다고 한다.

당황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긴 했다.

『Timeless』의 개봉에 맞춰 그 화제성을 이용해 적절히 홍보해 주기만 한다면, 안시현이 주연으로 출연한 『형아, 동생』이 최소 본전 이상은 칠 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JP스튜디오가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JP스튜디오의 정확한 제안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Timeless』의 개봉 후 미국 전역에서 『형아, 동생』을 재개봉하고 싶다, 『Timeless』가 흥행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형아, 동생』의 배급을 자신들이 맡아서 처리하고 싶다. 혜인원 측에서는 선택권을 저에게 넘겼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JP스튜디오는 단순한 재개봉을 넘어 『형아, 동생』의 해외 배급을 원했다.

『Timeless』의 개봉을 통한 수익 창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미 영화 관련 굿즈와 감독판 제작과 관련된 논의까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수익 극대화를 위한 발 빠른 움직임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답변은 하셨나요?”

“네. 하겠다고 했습니다. 돈 주면서 팔아 팔라고 하는데 팔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다만 최소한의 계약금만 받고 러닝 개런티로 계약하려 합니다.”

아무래도 돈 냄새를 맡은 건 JP스튜디오만이 아닌 것 같았다. 혜인원과 최한수 감독 또한, 『Timeless』의 흥행으로 『형아, 동생』이 낙수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러닝 개런티 계약으로 위험 부담을 감수할 이유가 없으니까.

‘러닝 개런티라…… 괜찮은 도박이네.’

설사 『형아, 동생』의 재개봉이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손해 볼 건 없고, 만약 성공한다면 러닝 개런티는 신의 한 수가 될 터였다.

“다만 감독판으로 개봉하자는 제안을 하긴 했습니다.”

“감독판이요?”

“네. 기존의 감독판에 안 배우님과 손 배우님의 재개개봉 기념 소감을 쿠기 영상으로 짧게 넣고, 거기에 메이킹 필름을 적절하게 섞어 배치하면서 여운을 주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괜찮은 전략이네요.”

“JP스튜디오에서는 더빙을 제안했지만 그건 저희가 거절했습니다. 『형아, 동생』의 감동을 온전히 느끼려면, 더빙이 아닌 자막이어야 한다고 판단했거든요.”

최한수 감독은 꼬박 1시간 가까이 『형아, 동생』과 관련된 정보를 늘어놓았다. 그만큼 JP스튜디오가 제안한 재개봉 이슈와 관련해서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형아, 동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끝난 뒤.

최한수 감독이 커피를 한 잔 추가로 주문하고서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두 번째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재개봉 말고도 이슈가 또 있나요?”

“네. 이번에는 저와 안 배우님에 관한 이슈입니다. 김희숙 작가님의 차기작에 출연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후에 계획한 작품은 있으십니까?”

“없어요. 김 작가님 차기작 전에는 휴식을 취할 것 같고, 그 이후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좋은 작품이 있으면 출연해야겠다 정도예요.”

현재 안시현은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제외하면 차기작과 관련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좋은 작품이 있으면 검토를 해 보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 놓지 않은 채 되도록 육아와 휴식을 우선시할 예정이었다.

이에 최한수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방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안시현에게 건네며 물었다.

“이것도,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까요?”

타이틀이 적혀 있지 않은 시나리오.

그것을 건네받은 안시현이 첫 페이지를 펼쳤다. 동시에 다시 한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건…….’

아직까지 대사를 기억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당시 보여 줬던 연기를 재연할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긴 무명 시절과 명품 조연 시절을 거쳐, 마침내 목표였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해 준 작품인데 말이다.

안시현이 애써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떨리는 손을 테이블 밑에 숨긴 채 차분하게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

지문 몇 줄을 살펴보았음에도 확신이 섰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작품이라는 걸, 회귀 전 최한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빛났던 그 영화의 시나리오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걸.

‘아직 완성된 게 아닌 것 같은데…….’

다만 시나리오가 완성된 건 아닌 것 같았다.

지문을 유독 꼼꼼하게 적는 최한수 감독의 스타일상 시나리오가 두꺼울 수밖에 없는데, 방금 건네받은 시나리오는 안시현이 기억하고 있는 것에 비해 두께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역시나.

마지막 페이지를 보니 안시현이 기억하고 있는 신의 절반 부분에서 내용이 이어지지 않았다.

꼬박 3시간.

안시현은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미완성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 토시 하나 빼먹지 않고 모조리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회귀 전,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간을 떠올리며 말이다.

시나리오를 모두 살펴본 뒤.

안시현이 무덤덤한 척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실상은 왠지 모르게 울컥해서 억누르지 않으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말이다.

“이 시나리오…… 코미디네요?”

“휴식을 취하면서 차기작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결국 제가 가장 잘하는 걸 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나리오…… 어떤가요?”

“정답이 맞는 것 같네요. 박철우 역, 제게 맡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시현은 고민하지 않고 돌직구를 던졌다.

자신에게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이라는 영광을 안겨 줬던, 좋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게 해 준 박철우 배역을 다시 한번 맡고 싶었다.

회귀 전 연기했던 박철우는 대중들의 극찬을 받았지만, 안시현은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연기력을 입증받은 상황. 한층 업그레이드된 박철우를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또한.

회귀 후 첫 코미디 영화에 도전하는 것 또한 의미가 크다고 판단했다.

“부탁은 안 배우님이 아니라 제가 해야죠. 안 배우님은 어느 배역을 원하건 오디션 프리패스입니다.”

최한수 감독이 안시현의 손을 잡았다.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구두로 명확한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다 확신했다.

박철우를 연기하는 건 안시현이 될 거라고 말이다.

“동민이가 화가로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뒷바라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집필이 느릴 겁니다. 빨라야 2016년, 어쩌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스케줄을 잡을 때 전 고려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감독님이 준비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이 시나리오는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아, 혹시 타이틀은 정하셨나요?”

최한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필을 끝내고 타이틀을 정하는 최한수 감독의 성격상, 고려해 놓은 타이틀이 있더라도 적어 놓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타이틀을 확정해 놓고 집필을 하면, 스토리가 타이틀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감독이니까.

“생각해 놓은 게 있습니다. 『위장취업』입니다.”

“타이틀 좋네요. 800만 관객 정도는 가뿐하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위장취업』.

안시현에게 있어 엄청난 의미가 있는 시나리오가 다시 한번 그의 손에 쥐어졌다.

*   *   *

최한수 감독은 꼬박 일주일을 한국에 머물다가 다시 출국했다. 언제 다시 한국에 들어올지는 모르지만, 틈나는 대로 시나리오를 작업해서 늦지 않게 완성본을 전달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말이다.

최한수 감독이 떠난 이후.

안시현은 5월 말까지 두문불출한 채 지냈다.

아주 가끔 양평 읍내에서 목격담이 나오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장을 보러 나온 거였고 외부 스케줄을 단 하나도 소화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두문불출한 게 당연했다.

『VVIP』를 촬영하기 전부터 『Timeless』의 촬영이 마무리되면 한동안 육아에 전념하며 휴식을 취할 예정이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간간히 들어오는 작품들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작품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안시현에게 제안이 온 작품 중에는 최고 시청률 30%가 넘는 드라마도 있었고,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영화 또한 존재했으니까.

다만 작품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것과 안시현이 그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배우마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안시현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상업적 성공이 아니었다. 상업적 성공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최우선으로 고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안시현은 자신이 작품 내에서 마음껏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라는데, 이를 조율하는 게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괜히 안시현이 한 번 함께 작품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과의 작업을 선호하는 게 아니다.

안시현의 연기 스타일을 경험해 본 이들과의 작업은 조율할 게 상대적으로 적어지니까.

‘참 격세지감이다. 배역을 따내기만 해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이것저것 다 따지면서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니 말이야.’

안시현은 더 좋은 연기를 위해서라면 현장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배우가 되더라도 깐깐하게 굴 생각이었다.

실제로 다소 까탈스러운 대신 연기력만큼은 인정받는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연기 스타일에 변화를 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온갖 걸 다 따진 덕분에 푹 쉬면서 라온이와 이렇게 놀아 줄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안시현은 다작을 하지 않는 배우가 된 덕분에 라온이의 성장을 최대한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라온이의 말문이 트이고 걸음마를 뗀 이후로는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특히나 안시현이 좋아하는 건 마당에서 즐기는 간이 캠핑이었다.

텐트를 쳐 놓고 그 안에서 동화책을 읽어 주고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를 하거나, 라온이가 좋아하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노트북으로 함께 보았다.

그러다가 정혜영이 퇴근할 즈음에 맞춰 저녁 식사로 캠핑 음식을 준비했다.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일이다.

놀이의 장소를 집안에서 텐트로 바꾼 것뿐이고, 캠핑 음식이라 해 봐야 평소 식사를 준비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다만 그것만으로도 집안에서 놀아 주는 것과 색다른 재미를 줄 수가 있기에 즐기는 것이었다.

라온이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 줄 수 있다는 게 안시현의 생각이었다.

‘이제 곧 첫 여행을 갈 건데, 라온이가 얼마나 좋아할지 모르겠네. 뭐…… JP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 관련한 것만 쭉 둘러봐도 좋아할 것 같지만.’

얼마 전.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6월 8월부터 스튜디오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JP스튜디오에서 항공권을 보내 주기로 했으니 가족들과 함께 오라고 말이다.

-JP스튜디오에서 시현의 딸을 위한 특별 선물도 준비했다고 하니 꼭 와요. 스튜디오 촬영을 구경하면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 주고요.

“네. 날짜 맞춰서 비행기 탈게요. 숙소에 짐 풀고 나서 연락드릴게요. 식사라도 같이해요.”

이에 안시현은 흔쾌히 응했다.

당초 사비를 들어서 가려고 했는데, JP스튜디오에서 항공권을 보내 주면서까지 오라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팔불출인 안시현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고서 라온이를 위한 선물까지 준비했다지 않은가.

선물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선물이 라온이의 첫 여행에 있어 좋은 추억거리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6월 5일.

안시현과 정혜영이 라온이를 품에 안은 채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라온이의 탄생 후 첫 가족 여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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