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1화>
181화. 생각 없습니까?
JP스튜디오에서 항공권을 보내 주긴 했지만, 안시현의 뉴욕 방문은 개인적인 일정이었다.
따라서 매니저인 하정남은 동행하지 않았고, JM액터스 측에서도 일정에 대해서 전달받기만 했지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통역이나 가이드 한 명 없었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영어야 유학 덕분에 능숙하게 구사 가능한 정혜영이 있고, 송강식을 따라 뉴욕에 왔을 당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추후 당시 방문할 장소를 모두 외워 놨으니까.
혹시 몰라 주소를 적고 사진까지 찍어 놓았다.
또한 열흘 동안 무엇을 하며 보낼지 정혜영과 계획까지 모두 짜 둔 상태에서 비행기를 탔다.
따라서 뉴욕에서의 여행은 걱정할 게 전혀 없었다.
그저 간만에 여행을 오게 된 정혜영과 생애 첫 여행을 온 라온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라온이 사진 찍으려고 디지털카메라 메모리 카드도 여분으로 몇 개 챙겨 왔고, 스케줄이 꼬일 때를 대비해 차선책까지 준비해 왔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처음 타 보는 비행기에 신기해하며 안시현의 품에 안겨 창밖을 구경하던 라온이는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안시현은 그런 라온이에게 담요를 덮어 주면서 미소를 지었다.
뉴욕 여행 내내 웃을 일만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 * *
여행 첫째 날.
안시현 가족은 숙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짐을 풀고 숙소에서 느긋하게 쉬다가, 미리 조사해 놓은 근처 맛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온 게 전부였다.
둘째 날.
주요 일정 중 하나인 JP스튜디오 사옥을 방문했다.
다만 『Timeless』의 촬영을 지켜보기 위한 방문이 아닌, 라온이에게 좋은 추석을 쌓아 주기 위해서 방문한 것이었다.
안시현은 미리 연락받은 대로 직원의 안내를 받아 JP스튜디오 사옥 2층으로 향했다.
“우와아…….”
2층에 도착하자마자 라온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줬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JP스튜디오 2층은 테마파크였다.
저예산 영화 위주로 제작하던 JP스튜디오의 유일한 히트작인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테마로 해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용 요금이 제법 비쌈에도 매년 흑자를 기록하는, JP스튜디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다.
원래는 이용객이 워낙 많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이지만…….
안시현 가족은 단 한 명의 이용객도 없는 상황에서 여유롭게 테마파크를 이용할 수 있었다. JP스튜디오 측에서 휴관일에 안시현 가족을 초청한 덕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덕분에 처음에는 안시현의 품에 안겨 테마파크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라온이는, 이내 자기가 직접 걸음을 때며 테마파크 곳곳을 누볐다.
물론 신장 제한 때문에 죄다 구경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라온이의 나이까지 감안해서 JP스튜디오가 이벤트를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테마파크의 백미는 연극이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인형탈을 쓴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극에, 라온이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연극이 끝난 뒤.
JP스튜디오 측에서는 라온이를 위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 인형들을 선물해 줬다.
무려 2m짜리 대형 인형들을 말이다.
“우와아아아!”
라온이의 입이 뉴욕에 온 이후 가장 크게 벌어졌다.
하루 종일 봐도 지겹지 않은 애니메이션의 대형 캐릭터 인형을 받았으니 좋은 게 당연했다.
“인형은 가지고 가시기 불편할 테니 저희 쪽에서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절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이에게나 저희에게나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배우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야 당연히 해 드려야죠. 혹여나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JP스튜디오는 영화 제작사 중에서도 그리 규모가 큰 편이라고 보기 어렵다. 애초에 그 시작이 애니메이션 회사고, 영화판에 발을 들인 지는 이제 겨우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마이너 장르의 저예산 영화를 다수 취급하다가, 그중 몇몇 작품들의 성공으로 인해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며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회사의 명운이 걸린 수준의 금액을 『Timeless』의 제작에 투자했다는 데에 있다.
JP스튜디오의 입장에서는 『Timeless』의 흥행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Timeless』가 실패하면 회사 또한 휘청이게 될 테니까.
마지노선은 제작비를 건지는 것이고, 내심 바라는 건 제작비의 1.5배 수준의 월드 박스오피스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Timeless』의 성공을 바탕으로 영화 제작사로서 제대로 자리를 잡는 것.
그것이 JP스튜디오의 목표였다.
연극을 보고 인형을 선물받은 뒤 잠이 든 라온이를 품에 안은 채 안시현이 JP스튜디오의 직원과 다음 일정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내일도 방문하실 건가요?”
“네. 첫 스튜디오 촬영이라니 와야죠. 간만에 감독님이나 배우들과 대화도 나눌 거고요.”
“안시현 배우님의 신이 없다니 아쉽습니다. 텍사스에서 엄청난 연기를 보여 주셨다고 하던데…….”
“내일부터 크랭크업까지는 지겹도록 엄청난 연기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다들 이를 악물고 스튜디오 촬영에 임할 테니까요.”
* * *
『Timeless』의 주연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세 배우인 이유는, 시간여행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사실상 시간여행을 통해 기욤 뒤자르댕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대부분 전한다고 보면 될 정도다.
그렇다고 현재 시점의 주인공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현재와 과거.
두 시점이 영화 내에서 제대로 어우러지려면, 현재 시점을 연기하는 배우와 과거 시점을 연기하는 배우의 궁합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연기력이 부족하면 궁합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때문에 기욤 뒤자르댕이 이석재를 포함하여,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를 현재 시점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내.
현재 시점과 과거 시점의 촬영을 모두 끝내고, 『Timeless』는 스튜디오 촬영만을 앞두게 됐다.
영화의 주요 스토리 라인을 관통하고, 대미를 장식하게 될 신들을 다수 촬영해야 하는 상황.
‘살벌하게. 다들 NG 따윈 절대로 낼 생각이 없다는 듯한 집중력을 보여 주네.’
첫날부터 배우들의 연기력이 제대로 폭발했다.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배우들이, 무려 세 신 연속으로 원테이크를 만들어 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석재가 안시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텍사스에서부터 느낀 건데…… 역시 선생님은 나한테 맞춰서 캐릭터를 구축하셨어.’
데이비드 킴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안시현이 가장 고민했던 건, 어떻게 하면 이석재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할 수 있을까였다.
지독한 분석을 통해 만족스러운 수준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안시현이 데이비드 킴을 수월하게 연기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석재의 은밀한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안시현이 이석재를 분석한 것처럼, 이석재 또한 안시현을 분석해 데이비드 킴 캐릭터를 구축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따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너지가 났고, 이는 다른 두 주인공보다 데이비드 킴의 캐릭터성이 유독 살아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스튜디오 촬영에서 제대로 빛을 보고 있었다.
스튜디오 촬영 내내 이석재의 존재감이 다른 배우들을 압도했다. 주연 배우가 이석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사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엄청났다.
기욤 뒤자르댕 또한 이석재의 연기를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이석재가 세 번째 시간여행 후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한참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첫 스튜디오 촬영이 끝난 뒤.
“다들 저녁에 스케줄 없으시면 바비큐 파티 어떻습니까? 시현도 와 줬겠다, 제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말이죠.”
“오. 저희야 좋죠.”
“감독님의 초대이니 기꺼이 응해야죠.”
도합 11명의 배우가 맨해튼에 있는 기욤 뒤자르댕의 집에 초대됐다.
바비큐와 시원한 맥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 중.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과 간만에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JP스튜디오를 통해 들었습니다. 『형아, 동생』을 미국에서 재개봉 하기로 했다면서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Timeless』가 잘 돼서 겸사겸사 『형아, 동생』도 호성적을 거둘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 시현 씨가 출연한 작품 중 가장 인상적으로 봤던 게 『형아, 동생』입니다. 소름 끼치는 주지성 연기가 아직도 기억나요. 아, JP스튜디오가 시현 씨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 마케팅을 기획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를테면요?”
“시현 씨가 출연한 작품들을 수입해 와서 DVD 시장을 노려 보는 게 있겠네요.”
“DVD 시장이라……. 좋은 선택지네요.”
“거액을 투자했으니 최대한 이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한국에 직원을 보내 판권 문제를 조율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사실 개봉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난 작품들을 수입해 와서 재개봉하는 건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다수의 상영관을 받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흥행 또한 장담하기 힘들다.
그래서 보통은 DVD 시장을 노린다.
실제로 DVD 시장 규모가 큰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검증된 타국의 영화의 수입해 와서 재미를 보는 경우를 제법 자주 볼 수 있다.
JP스튜디오는 안시현이 출연한 영화들을 모두 수입해 와서 DVD 시장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형아, 동생』은 예외였다.
솔직히 안시현은 JP스튜디오에서 『형아, 동생』을 예외로 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편지』가 더 흥행적으로 유리한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따로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미국 시장에 대해 JP스튜디오만큼 모르니까.
‘시장 조사를 철저하게 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판단했기에 시도하는 거겠지. 뭐…… 재개봉이든 DVD든 잘되면 좋은 거 아니겠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바비큐 파티는 마무리가 됐고, 안시현과 송강식과 이석재만이 집 안까지 들어갔다.
이석재와 송강식은 와인을 마시기 위해,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과 좀 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기다려 줘야지.’
식사 내내.
기욤 뒤자르댕은 안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둘이서만 대화할 기회를 잡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이에 안시현이 직접 자리를 만들었다.
안주를 준비하겠다는 핑계로 기욤 뒤자르댕과 함께 주방으로 향한 것이다.
거실에는 TV를 켜 놓았고 주방까지는 거리가 좀 있다 보니, 조용히 대화한다면 송강식과 이석재에게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현, 제안할 게 있습니다.”
기욤 뒤자르댕은 둘이서만 있게 되자마자 분위기를 잡았다. 스튜디오에서부터 줄곧 안시현을 의식하고 있던 이유를 꺼내들 상황이 만들어졌다.
“어떤 제안인가요?”
“아마 시현도 손해 볼 일은 아닐 겁니다.”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안시현은 대답을 뒤로 미루었다.
기욤 뒤자르댕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만한 제안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어떤 제안인지는 들어 보고 나서 결정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제안만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받아 줄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찰나의 뜸을 들인 뒤.
기욤 뒤자르댕이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혹시 OST 불러 볼 생각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