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4화>
184화. 생각이 있으십니까?
2010년 연말.
안시현은 정혜영과 함께 라온이를 재워 두고 연기대상 시상식을 보며 연말을 즐겼다.
특히나 MBS 연기대상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대상 후보에 김진모가 올라가 있었으니까.
‘회귀 전과 매치업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야. 진모가 원가 연기를 잘했으니까.’
어느 새 회귀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회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제법 나오게 됐고, 이로 인해 2010년 MBS 연기대상 후보도 안시현이 알고 있던 배우 중 2명이 달라지게 됐다.
따라서 김진모의 생애 두 번째 연기대상 수상도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게 됐지만, 그럼에도 안시현은 김진모가 연기대상을 수상할 거라고 확신했다.
연기대상 후보가 달라진 것처럼, 김진모의 연기 또한 회귀 전과 많이 달라졌으니까.
평소 배우로서의 김진모의 행보에 흡족해하면서도 본인에게는 칭찬을 하지 않던 김진석 대표마저도 극찬을 할 만큼, 김진모는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드라마의 흥행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진모가 드라마를 완성시켰다는 표현마저도 지겹도록 나올 정도로 존재감이 엄청났다.
최고 시청률마저도 회귀 전보다 더 높은 33.1%를 기록하면서 2010년 한 해 MBS에서 방송한 드라마 중 시청률 3위를 기록할 정도로 효자 노릇을 제대로 했다.
그 과정에서 김진모는 문자 그대로 혼을 바친 연기를 보여 줬고, MBS 연기대상 후보 중 가장 유력한 수상자로 점쳐지고 있었다.
평소 김진모는 작품에 들어갈 때면 유독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곤 했지만, 이번 작품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이야기마저 나왔다.
오죽하면 한나래가 인터뷰를 통해 애정 어린 디스를 했을 정도였다.
“분명 신혼인데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고 있다니까요. 촬영장 근처에 숙소 구해서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안 하니 원……. 사귈 때보다 연락이 더 안 돼요. 열정적인 모습에 반해서 결혼을 결심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심한 것 같아요. 뭐, 덕분에 오빠의 인생 캐릭터가 탄생했으니 잘된 거라고 봐야죠. 그래도 집에는 자주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평소에도 작품을 할 때면 촬영장 근처에 숙소를 구해 촬영에만 집중하곤 했던 김진모였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지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한나래에게조차 드문드문 연락하며 촬영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2010년 MBS 연기대상 대망의 대상 수상자는…… 축하드립니다! 『엠바고』의 김진모!
2010년 MBS 연기대상 트로피는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김진모의 손에 쥐어졌다.
지독한 연기 열정에 대한 보답을 받은 것이다.
연기대상 시상식 직후.
안시현은 김진모에게 문자를 보냈다.
-놀러 와. 대상 수상 기념 파티 해 줄게.
-라온이 보러 가고 싶은데 촬영 때문에 바빠서 힘들 듯? 나 새벽 촬영 있어서 촬영장 가는 중이야. 축하는 마음만 받고 신혼여행 갔다 와서 들를게.
-신혼여행 갔다 올 때 선물.
-응, 열쇠고리.
안시현은 간만에 김진모와 이야기꽃을 피워 볼까 싶었고, 실제로 김진모 또한 라온이를 보고 싶어 했지만 만남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영화 준비에 들어갔고, 최근 들어 한창 촬영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김진모는 연기대상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새벽 촬영을 위해 촬영장으로 떠났다.
덕분에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하정남이 유일한 손님인 건 1월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1월 말.
안시현이 예정대로 『Timeless』의 미국 언론 시사회 참여를 위해 송강식, 이석재와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Timeless』의 촬영 종료 후 몇 개월 만에, 해가 지나서야 잡힌 간만의 스케줄이었다.
* * *
“후우…….”
언론 시사회가 예정된 영화관으로 향하는 차 안.
조식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다소 여유로워보였던 앞두고 송강식이 심호흡을 하며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 막상 시사회 앞두니까 긴장되네. 통역 있으니까 영어 안 써도 되겠지?”
“그럼요. 편하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그렇게 말해놓고 시현이 넌 영어 쓸 거잖아.”
“저도 영어 안 쓸 건데요?”
송강식의 예상과 달리 안시현은 언론 시사회에서 영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굳이 인터뷰를 영어로 할 필요가 있나 싶네.’
안시현이 영어를 익힌 건 연기를 위해서였다.
굳이 언론 시사회에서까지 영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JP스튜디오에서 전담 통역사를 구해 놓았는데 편하게 한국어로 참여하고 싶었다.
한국 배우도 할리우드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는 안시현의 목표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표면적으로 내건 이유는 달랐지만 말이다.
“알렌과 루카스도 모국어로 이야기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통역까지 있는데 굳이 힘들게 영어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정확한 의미 전달이 중요할 것 같기도 하고요.”
“하긴, 어설프게 이야기했다가 의미 전달이 잘못되는 것보다야 통역을 거치는 게 낫지. 아, 그나저나 왜 이렇게 심장이 나대지. 나 고혈압 있나?”
“청심환 드릴까요?”
“오. 챙겨 왔어?”
“혹시 긴장할까 봐요.”
안시현은 송강식에게 청심환을 건네줬다.
청심환을 먹었음에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던 송강식은, 다행히 막상 언론 시사회가 다가올수록 조금씩 진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언론 시사회 30분 전.
“시현! 우리 놀러왔어요!”
“저녁에 다들 우리 집에서 파티 할래요? 여러분과 함께 먹으려고 비싼 와인도 사 놨어요.”
“파티 좋죠.”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이 대기실을 방문했다. 간만에 만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고, 저녁에는 루카스 헤르만의 집에서 파티를 하기로 약속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송강식의 긴장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언론 시사회 직전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여유로움까지 생겼다.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은 한결 마음을 놓게 됐다.
이석재야 지겹도록 언론 시사회에 참여해 봤기에 눈곱만큼도 걱정되지 않았지만, 송강식이 긴장하는 건 다소 걱정됐던 게 사실이다.
다행히 송강식마저 긴장감을 덜어내며 안시현은 마음 편하게 언론 시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결과물이 어떨까 궁금하네.’
『Timeless』의 언론 시사회에 참여한 배우는 도합 아홉 명으로, 그중 어느 누구도 최종 편집본을 구경해보지 못했다.
알렌 그레이가 편집이 한창 진행되던 중 결과물의 일부를 본 게 전부였다.
일부를 본 알렌 그레이의 반응은 극찬 일색이었다.
“제가 뒤자르댕 감독님과 함께하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의 영상미에 반했기 때문이었어요. 특유의 영상미는 뒤자르댕 감독님이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Timeless』는…… 장담하건데 뒤자르댕 감독님이 만든 작품 중에서 영상미가 가장 뛰어날 거예요.”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전부를 본 게 아니기에 지양했지만, 영상미가 최고라는 말은 흡사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수차례 반복했다.
그 정도로 『Timeless』의 영상미가 인상 깊었던 것이리라.
‘알렌이 말한 대로 영상미가 엄청났으면 좋겠네.’
안시현은 『Timeless』에 대해 기대감을 품었다.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이니만큼 얼마나 뛰어난 결과물이 나왔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데이비드 킴이, 자신의 연기가 작품의 완성도에 큰 역할을 했기를 바랐다.
그렇게 막이 오른 언론 시사회.
‘아…….’
안시현은 넋을 놓은 채 『Timeless』를 감상했다.
『Timeless』는 세 노인이 각기 다른 관점으로 시간여행에 대해 바라보며, 각이 다른 이유로 다섯 번의 시간여행을 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며 방송 중계를 한다는 게 영화의 콘셉트다.
방송의 마지막.
진행자는 세 노인에게 묻는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시간여행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행을 할지 안 할지,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주시면 됩니다. 시청자 투표를 통해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1인에게 100만 달러가 지급될 예정이니, 신중하게 생각해서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세 노인은 독방에서 추가 시간여행에 대한 여부와,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세 노인은 일제히 같은 선택을 했다.
더 이상 시간여행을 필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과거를 되돌아 본 건 좋은 경험이었지만 한 번이면 충분하다,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얼마나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삶에 충실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영화의 마지막.
스튜디오에서의 촬영 이후 세 노인이 일상으로 돌아온 모습이 그려졌다.
여기에서 기욤 뒤자르댕 특유의 영상미가 정점을 찍는 장면이 나왔다.
유독 엔딩에 힘을 주는 스타일인 만큼 어느 정도 예상이 됐던 부분이기도 했다.
“헬렌.”
잘 관리된 무덤 앞.
삐거덕거리는 오래된 나무의자에 앉은 데이비드 킴이, 노을을 등진 채 무덤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허허허. 글쎄 오늘은 말이오, 알버트가…….”
데이비드 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헬렌 킴의 무덤 앞에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하루 두 번.
헬렌 킴을 만나러 오는 건 데이비드 킴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노을이 지는 가운데 혼잣말을 하는 데이비드 킴의 모습을 점차 멀어지는 가운데, 안시현이 부른 OST인 『Timeless』의 간주가 흘러나왔다.
데이비드 킴의 독백과 안시현이 부른 노래가 묘하게 어우러지며 감성을 자극했다.
그리고 올라간 엔딩 크레딧.
“…….”
『Timeless』를 본 안시현의 눈에서는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처음 만났을 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 볼걸. 어쩨서 그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걸까.’
『Timeless』를 보고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이 진심으로 슬펐기에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기욤 뒤자르댕은 이제 은퇴를 한다.
번복은 없다. 『Timeless』는 그의 마지막 작품일 거고, 은퇴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평범한 일상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안시현은 그 사실이 너무 슬펐다.
과거에 대해 후회하지 말고 현실에 충실하자는 주제를 가지고 만든 영화인 『Timeless』에서 주연을 맡았건만, 정작 안시현은 과거의 선택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Timeless』는 잘 만들어졌고, 그럴수록 지나가 버린 기회가 아깝게 느껴졌다.
처음 기욤 뒤자르댕을 만났을 때, 작품을 함께해 보지 않겠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한 작품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으로 인해 마음이 아파 왔다.
이석재는 그런 안시현을 향해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줬고, 송강식은 모른 척해 줬다.
그렇게 언론 시사회가 끝나고 기자 간담회가 시작됐다.
기자들은 초반에 알렌 그레이 위주로 질문을 던졌다.
언론 시사회에 참여한 배우 중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지도가 있는 게 알렌 그레이였기 때문이다.
알렌 그레이는 정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유머러스한 답변으로 몇 번이나 현장에 웃음이 터지게 만들었다.
알렌 그레이 이후는 주연 배우인 루카스 헤르만과 안시현의 차례였다.
“안시현 배우님에게 질문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유명한 배우이지만 할리우드에서는 『Timeless』가 첫 작품입니다.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계속 배우 생활을 이어 나갈 생각이 있으십니까?”
첫 질문부터 예상 범위에 있던 게 나왔다.
할리우드 첫 진출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고, 열연으로 데이비드 킴 캐릭터를 빛내 줬기에 당연한 질문이었다.
이에 안시현은 준비해 놓은 답을 꺼내 들기로 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