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5화>
185화. 스코어 나왔습니다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Timeless』가 기욤 뒤자르댕 감독님의 마지막 작품이니까요.”
언론 시사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지가 존재했다. 실제로 안시현은 좋은 기회만 있다면 다시 한번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뒀었다.
하지만…….
언론 시사회를 통해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이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한들 만족할 것 같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자된 블록버스터 영화나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영화일지라도 출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제작비의 규모와 작품의 흥행은 안시현의 작품 선택에 있어 1순위 고려 사항이 아니다.
기욤 뒤자르댕 같은 감독과 다시 작품을 할 게 아니라면, 할리우드는 안시현에게 있어 좋은 선택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기자들은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다시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할리우드와 타국의 영화 시장은 산업 규모 자체가 다르다. 배우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릴 수 있다.
괜히 배우들이 한 번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으면 떠나지 않는 게 아니다.
안시현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는 게 기자들의 시선이었지만…….
안시현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송강식과 이석재, 기욤 뒤자르댕은 안시현이 정말로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챘다.
이후에도 안시현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받았다.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하진 않았지만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이기에, 생각보다 많은 질문을 받게 됐다.
물론 그중에는 자극적인 질문 또한 있었다.
“공교롭게도 세 주연 배우가 각각 연기한 주인공들의 테마 OST를 부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킴의 OST가 엔딩을 장식했고, 제목마저 타이틀과 동일한 『Timeless』입니다. 유독 데이비드 킴이 주목을 받게 됐는데 연기하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기자 나름대로는 자극적이라 생각하고 질문을 했겠지만…….
‘이 정도야 자극적인 수준에도 못 들지.’
일부 한국 기자들의 자극적이고 특정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에 단련된 안시현에게 있어서는 무미건조한 수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송강식과 이석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혹여나 자극적인 질문을 받더라도 논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며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 줬다.
몇몇 배우가 유도성 질문에 답변을 곤란해하거나 노코멘트를 한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언론 시사회와 기자 간담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 배우들이 알렌 그레이의 집에 모였다.
바비큐 파티 이후 탁 트인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며 오늘 있었던 언론 시사회와 기자 간담회, 그리고 앞으로 있을 개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안시현 또한 가볍게 와인을 한잔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니만큼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응 좋겠죠?”
“평론가와 기자들의 눈이 저희와 같다면요.”
“저만 엔딩 보면서 울었어요? 중간중간 울컥한 장면이 몇 번 있었는데, 데이비드 킴이 무덤 앞에서 독백할 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저만 그랬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시현도 울고 있던데요?”
“아, 보는 내내 울컥하더라고요.”
저마다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안시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배우들이 『Timeless』를 보면서 감동을 받은 상태였다.
배우들은 이왕이면 언론 시사회에 참석했던 기자와 평론가들 또한 자신들처럼 감동을 받았길 바랐다.
한창 수다를 떨던 중.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던 알렌 그레이가 미소를 지은 채 거실에 있는 스크린을 작동시켰다.
이내 스크린을 통해 『Timeless』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 유력 언론사 기자들의 기사를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문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시작은 좋은 것 같네요. 아직 반응이 일부만 나와서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지만요.”
알렌 그레이의 말대로 시작은 아주 좋았다.
언론 시사회에 참석했던 평론가들은 5점 만점에 평균 4.5점을 주며 후한 평가를 내렸다.
기사 또한 호평 일색이었다.
그중 안시현의 눈길을 사로잡은 기사 제목이 하나 있었다.
-『Timeless』, 기욤 뒤자르댕의 인생을 담았다.
안시현은 진심으로 바랐다.
많은 사람들이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을 보고서 감동을 받길 말이다.
* * *
미국에서의 언론 시사회로부터 1주일 후.
한국에서도 『Timeless』의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다른 배우들은 미국 현지에서의 홍보 일정을 위해 참석하지 못했고, 주연 배우인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과 기욤 뒤자르댕 셋만 내한을 하게 됐다.
안시현은 내한을 한 세 사람을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오, 시현!”
“드디어 시현의 딸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되겠군요. 너무 설렙니다.”
“아,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네요. 시현과 함께 먹었던 삼겹살이 정말 맛있었는데 말이죠.”
세 사람은 잔뜩 들떴다.
내한 기간 동안 안시현의 별장 2층에서 지내기로 미리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정혜영 또한 흔쾌히 동의한 부분이었다.
할리우드 배우 두 명과 세계적인 명감독이 자신들의 집에 머물 일이 언제 또 있겠냐며, 특히나 기욤 뒤자르댕과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며 진심으로 좋아했다.
워낙 영화를 좋아하는 정혜영이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내한 첫날.
가평에서 번지 점프를 하고 양평으로 이동한 뒤,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저녁 식사를 했다.
이후 안시현은 라온이를 보는 데에 집중했고,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은 라온이를 위해 사 온 선물을 개봉하며 잔뜩 들떴으며, 정혜영은 간만에 와인을 한잔하며 기욤 뒤자르댕과 함께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내한 둘째 날.
한국에서의 언론 시사회가 시작됐다.
언론 시사회 결과는 미국과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쪽의 반응이 더 좋았다.
평론가들은 평점 5점 기준 4.7점을 줬으며, 언론들 또한 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도리가 없는 감동적인 영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나마 아쉬운 점이라고 해 봐야 생각보다 안시현의 비중이 크지 않아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그마저도 조연들의 존재감 또한 중요한 작품이었고, 주연 배우가 셋이나 되는 작품이기에 문자 그대로 아쉬움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언론들은 안시현이 『Timeless』의 주연 중 가장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이야기했다.
엔딩의 마지막을 데이비드 킴이 장식했으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안시현이 부른 OST가 흘러나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실 이는 기욤 뒤자르댕이 심사숙고 끝에 의도적으로 설정한 엔딩이었다.
세 배우가 부른 OST의 퀄리티가 모두 괜찮았다.
다만 안시현이 부른 OST가 세 곡 중 유일하게 심금을 울리는 콘셉트였고, 거기에 라이브를 하는 듯한 느낌으로 녹음이 됐기에 엔딩에 배치하기 좋다는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이었다.
그로 인해서 예상치 못하게 안시현의 존재감이 부각된 것이다.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과 기욤 뒤자르댕은 도합 나흘간의 내한 일정을 끝마치고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는 안시현 또한 함께였다.
미국에서의 홍보 일정을 위해서였다.
‘일정 타이트하게 잡는다더니 정말로 타이트하게 잡아 버렸네. 미국에서 홍보 다 하고 나면 바로 한국으로 와야 하다니 말이야.’
김진석 대표는 안시현에게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Timeless』의 홍보 스케줄을 타이트하게 잡았다.
한국에서의 언론 시사회를 기점으로 개봉 2주 후까지 매일같이 스케줄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스케줄이었다.
영화 개봉 후 홍보 스케줄을 빡빡하게 소화하는 거야 대부분 하는 일이고, 무엇보다 『Timeless』는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상징성이 있기도 하다.
JP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홍보를 통해서 조금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게 당연했다.
덕분에 안시현은 팔자에도 없는 미국 토크쇼와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가벼운 질문들은 직접 대답을 했고, 중요한 질문이라고 판단되면 의미 전달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통역을 거쳤다.
다행히 반응은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
알렌 그레이나 루카스 헤르만처럼 인지도가 있는 건 아니지만,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이력 덕분에 제법 괜찮이 쏠렸다.
게다가 언론 시사회 이후 안시현의 데이비드 킴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면서, 방송국 쪽에서도 안시현의 비중을 제법 높게 잡은 채 녹화를 진행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한국 언론에서는 안시현의 행보에 대해 대서특필을 하며 『Timeless』의 홍보에 일조했다.
한국 언론들은 안시현이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계속 활동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비쳤고, 실제로 분위기가 안시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개봉이 다가오면 올수록 안시현의 인지도가 미국 현지에서 자연스럽게 상승한 것이다.
물론 정작 안시현은 할리우드에서 연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한국 시간으로 2011년 2월 25일.
『Timeless』가 한미 동시 개봉했다.
* * *
개봉 첫날.
안시현은 무대 인사를 위해서 귀국했다.
개봉 이후로는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과 할리우드 출신 배우들이 미국에서의 홍보를, 안시현과 송강식과 이석재가 한국에서의 홍보에 열을 올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후 다른 국가에서 개봉할 때마다 무대 인사를 위해 출국해야 하겠지만, 그 정도야 『Timeless』의 흥행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참고 넘쳤다.
“형님, 바로 이동하시죠.”
“정남이 네가 고생이 많다.”
“저보다는 형이 고생이시죠. 매니저 없이 귀국하게 만들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누가 들으면 미국에 나 버려 둔 줄 알겠네.”
하정남은 개봉 이후의 스케줄 조율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안시현보다 하루 일찍 귀국하게 됐다.
그리고 귀국한 이후 밤새 스케줄 조율을 위해 업무를 보다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안시현을 마중 나온 것이었다.
“내가 운전할 테니까 한숨 자.”
“아닙니다, 형님.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됐으니까 무대 인사 끝날 때까지라도 눈 좀 붙여. 상태 안 좋아 보이니까.”
“끄응…… 감사합니다, 형님.”
안시현은 딱 봐도 밤을 샌 게 눈에 보이는 하정남을 배려해서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하루 종일 무대 인사를 위해 수도권 영화관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후 저녁에는 송강식과 이석재와 함께 토크쇼 녹화에 참여하며 홍보에 열을 올랐다.
‘1000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망했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만 흥행하자.’
안시현은 눈높이를 높게 잡지 않았다.
그저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만 흥행하기를 바랐다. 크게는 500만, 적게는 300만 관객만 동원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봤다.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이,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기억에 남을 명작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를 위해서는 빡빡한 홍보 일정 정도는 얼마든지 감안할 수 있었다.
개봉 둘째 날 오전.
인터뷰를 위해 마포의 한 카페에 방문한 직후, 하정남이 안시현의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형님, 첫날 스코어 나왔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스코어를 못 들었네. 얼마야?”
“한미 박스오피스 1위 했습니다.”
“1위했다니 다행이네. 한국은 관객 몇 명이나 동원했데? 15만 정도 되나? 스케줄 빡빡해가지고 확인할 겨를이 없었네.”
하정남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미소를 지은 채 한껏 들뜬 목소리로 답을 했다.
“『Timeless』, 29만 관객으로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