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7화>
187화. 그러지 말고
안시현의 미국 방문 1주일 전.
JP스튜디오 대표는 프랑스 귀국을 앞두고 있는 기욤 뒤자르댕과 저녁 식사를 하며, 그날 오전에 들은 제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전에 감독님의 제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안시현 배우님과의 미팅을 원하더군요.”
제대로 된 본론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기욤 뒤자르댕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대번에 이해했다.
“허허허. 그 녀석, 캐스팅 라인 때문에 고민이 많아 보이더니 시현을 원하나 보군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곧장 차선책을 이야기하는 걸 보고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차선책이요?”
“네. 안시현 배우님이 거절할 거라고 하니, 캐스팅할 목적이 아니니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식사 한번, 안 되면 커피 한잔이라도 좋다고 했습니다.”
JP스튜디오 대표는 기욤 뒤자르댕의 제자와 오전 중에 나눴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이에 기욤 뒤자르댕이 미소를 지었다.
굳이 JP스튜디오를 찾아와 안시현과의 미팅을 원하면서, 그렇다고 그를 캐스팅하려는 건 아니라는 제자의 의중을 대번에 파악한 것이다.
“한국 배우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시현을 통해서 추천을 받아 보겠다?”
“아마 그러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JP스튜디오가 작품에 관여하는 부분이 있나요?”
“특수 효과를 저희 쪽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주세요. 물론 시현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녀석의 재량이겠지만요.”
그렇게 JP스튜디오의 대표는 안시현과의 식사 자리에서 1주일 전에 들은 제안을 이야기하게 됐다.
“캐스팅할 생각이 아닌데 만나고 싶다?”
“뒤자르댕 감독님은 안시현 배우님을 통해 한국인 배우를 추천받고 싶은 거라 추측하셨습니다. 제 생각 또한 같고요.”
“추천이라…….”
안시현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고민한 끝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형아, 동생』의 홍보 일정에만 집중하고 싶군요. 만나는 건 그 이후였으면 하는데요.”
“배우님이 편하신 대로 일정을 잡겠습니다. 아쉬운 건 그쪽이니 스케줄을 맞출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언론 시사회 이후에…….”
기욤 뒤자르댕의 제자.
기욤 뒤자르댕의 밑에서 경력을 쌓고 독립한 감독은 여럿이지만, 할리우드에서 제자라고 불리는 건 단 한 명뿐이다.
그는 저예산 영화부터 시작해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았으며, 최근에 메가폰을 잡았던 두 영화가 상업적으로 흥행하며 주목받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월드 박스오피스 1위 기록을 갈아 치우는 영화의 메가폰을 잡기도 한다.
JP스튜디오에서 말한 작품 또한 제작비의 1.5배 수준의 수입을 거둬들이며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다만 회귀 전에는 동양인 주인공 역에 일본인 배우가 캐스팅됐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감독 쪽에서 한국인 배우를 원한다는 차이가 존재했다.
‘흥미가 생기기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안시현은 이에 호기심을 느꼈다.
다만 일단은 『형아, 동생』의 재개봉 관련 스케줄을 소화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스케줄 다 소화하고 나서 만나 보면 알 수 있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말이야.’
* * *
『형아, 동생』과 관련된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안 기욤 뒤자르댕의 제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라져 갔다.
정확히는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난 진짜 할리우드에서 두 번은 활동 못 하겠다. 스케줄 소화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네.’
촬영이야 텍사스에서 머물며 했기에 한국에서와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지만, 스케줄의 경우 미국의 드넓은 주를 돌아다니며 소화해야 하기에 생각 이상으로 피로감이 컸다.
『Timeless』가 개봉했을 당시 한국에서의 스케줄이 배로 많았음에도, 피로도 자체는 『형아, 동생』의 홍보 스케줄이 더 크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예상 이상으로 『형아, 동생』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덕분이다.
일단 언론 시사회부터 반응이 좋았다.
-『형아, 동생』, 안시현의 완벽한 연기로 빚어 낸 감동의 하모니.
-세월이 흘렀지만, 감동은 여전하다.
-데이비드 킴과는 다르면서도 같은 연기,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연기.
감동을 주는 작품은 언어와 상관없이 통한다는 JP스튜디오 대표의 판단이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형아, 동생』은 한국에서도 제법 흥행을 한 작품이었지만, 미국의 경우 시장 규모 자체가 다르다 보니 개봉 13일 만에 한국에서의 총수익을 가뿐하게 뛰어넘을 정도로 성과를 냈다.
이에 박정상의 말에 따르면 혜인원 대표가 김진석 대표를 찾아와 술 한잔하자고 하더니, 정작 술은 안 마시고 몇 시간 동안 웃다가 돌아갔다고 했다.
그만큼 『형아, 동생』의 재개봉 성적은 기대 이상이었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다른 몇몇 국가에서도 재개봉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JP스튜디오가 당초 계획하고 있던 안시현의 주연 영화 수입 또한 탄력을 받게 됐고 말이다.
개봉 15일 차.
『형아, 동생』이 추가 상영관 확보에 성공했다.
당초 JP스튜디오가 확보한 상영관은 재개봉이라는 걸 감안하면 많은 수준이었는데, 워낙 반응이 좋다 보니 추가로 상영관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 정도면 재개봉이 아니라 작정하고 트렌드 맞춰서 나온 영화라 해도 믿겠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축하는 내가 아니라 혜인원과 JP스튜디오에 해야지. 덕분에 돈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을 텐데 말이야.”
“『형아, 동생』 러닝 개런티 아니었습니까? 박 사장님께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아, 맞다. 그랬지.”
하정남이 이야기해 준 덕분에 안시현은 자신이 『형아, 동생』의 출연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 러닝 개런티로 계약했음을 깨달았다.
러닝 개런티의 범위에는 2차 시장과 해외 수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즉, JP스튜디오가 『형아, 동생』의 흥행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안시현의 통장에도 두둑하게 돈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다만 『형아, 동생』의 계약서를 쓰고 10년이 넘게 지났다 보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큰돈이 들어오겠네.’
러닝 개런티 계약으로 인해 거액의 돈이 입금될 걸 알게 됐음에도 안시현은 무덤덤했다.
이미 평생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었고, 애당초 타고나기를 연기에만 미쳐 있었기에 돈 욕심이 크게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그의 생각과 무관하게 몸값은 업계 최고 수준으로 책정된 지 제법 됐지만 말이다.
‘『형아, 동생』을 촬영할 때와 많은 게 변했네.’
안시현은 새삼 회귀 후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많은 것이 변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것이 변하리라 생각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과 『위장취업』.
회귀 전에 출연했던 두 작품에 또다시 출연하게 됐지만, 상황은 꽤나 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반드시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두 작품은 반드시 회귀 전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리라 다시 한번 다짐하며, 안시현이 하정남에게 물었다.
“이제 슬슬 스케줄 확 줄어들지?”
“네. 2, 3일에 하나 꼴입니다. JP스튜디오 측에서는 기존의 스케줄 외에 저예산 영화의 촬영 현장에 방문해 줬으면 하는 눈치던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밥차 불러서 한번 가자. 업체는 JP스튜디오 통해서 섭외하는 걸로 하고.”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JP스튜디오 대표님께 최대한 빨리 약속 잡아 달라고 해. 한숨 돌리고 나니까 무슨 이유로 날 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서 못 참겠네.”
『형아, 동생』과 관련된 스케줄은 초반 보름 동안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후에는 개봉 한 달째까지 2, 3일에 한 번 정도 스케줄이 있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에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의 제자를 만나 미뤄 뒀던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오전.
호텔 피트니스 센터에서 하정남과 함께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안시현이 JP스튜디오 대표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지금 뉴욕에 머물고 있어서 오늘 저녁이라도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는데, 어떠십니까?
“조용히 대화하며 식사할 수 있는 식당 알고 계신가요? 없으면 제 숙소에서 보셔도 됩니다.”
-숙소에서 뵙겠습니다.
그날 저녁.
JP스튜디오 대표가 이제 겨우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한 여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첼 스타이너.
기욤 뒤자르댕의 제자이자,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할 예정인 감독이 안시현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악수를 청했다.
“드디어 뵙네요. 선생님께 이야기 많이 들어서 꼭 한번 뵙고 싶었거든요.”
“직접 보니까 어떤가요?”
“어제 저녁에 『형아, 동생』을 봐서 그런가,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네요. 물론 대번에 거절당할 거 잘 알고 있어요.”
역시나 레이첼 스타이너는 안시현이 주연 배역 제안을 거절할 걸 알고서 찾아온 것이었다.
룸서비스로 주문한 와인을 따고 안주를 테이블 위에 세팅하며, 안시현이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레이첼 스타이너에게 물었다.
“메가폰을 잡으신 작품의 주연 배역 중에 동양인 캐릭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해당 배역을 캐스팅을 위해 절 만나겠다고 하신 건가요?”
“네. 원래는 일본인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하다가 생각이 바뀌었어요.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는 후보는 송강식 배우이고, 그 외에 몇몇 배우도 필모그래피를 검토하고 있는데 자료가 부족해서 도움을 청하려고요.”
안시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욤 뒤자르댕의 제자이기도 하고, 장차 할리우드를 주름잡게 될 거물 감독으로 성장할 여인이다.
인연을 만들어 둬서 나쁠 건 없다고 봤다.
“주연 한 명만 캐스팅하면 됩니까?”
“주연 한 명, 조연 한 명을 캐스팅해야 합니다. 일단은 주연 쪽이 더 급해요.”
“촬영은요?”
“올해 12월, 혹은 내년 1월이에요.”
“그렇군요. 그렇다고 강식 선배를 캐스팅하는 건 어려울 거예요. 출연 예정인 작품의 촬영 기간과 겹칠 거거든요.”
송강식이 기다리고 있던 영화의 촬영이 2011년 겨울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러 문제들로 인해 2013년이 돼서야 개봉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송강식을 국민배우 반열에 올려 주게 된다.
문제는 그 작품과 레이첼 스타이너가 메가폰을 잡은 작품의 촬영 기간이 겹친다는 것.
이에 레이첼 스타이너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송강식 배우가 안 된다니 아쉽네요. 혹 제가 말씀드리는 캐릭터에 어울릴 만한 배우가 있을까요?”
레이첼 스타이너는 동양인 주연 캐릭터의 콘셉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설명을 모두 들은 뒤.
안시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울리는 배우가 두 명 떠올랐는데, 애석하게도 연말에 스케줄이 있습니다. 다작을 하는 선배님들이라서요.”
“끄응…… 이것 참 곤란하네요. 역시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일본 배우를 캐스팅하는 걸로 가야 하려나요.”
레이첼 스타이너가 고민에 빠진 순간.
안시현이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답변을 꺼내 들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오디션을 여는 건 어떻습니까?”
“오디션을요?”
“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이니만큼 관심을 가지는 배우가 많을 테니, 그중에서 어울릴 만한 배우를 찾는 겁니다.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배우들의 스케줄이 꽉 차 있다면, 직접 연기를 보고서 결정하는 게 정답 아니겠습니까?”
“오디션이라…….”
레이첼 스타이너가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타국에서 오디션을 여는 건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오디션을 통해 어울리는 배우를 찾을지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추가 비용까지 발생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예정대로 이미지에 어울리는 일본인 배우를 캐스팅하면 된다.
레이첼 스타이너의 고민이 끝나기까지는 꼬박 30분이 걸렸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잠시 통화를 하고 나온 이후에야 대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