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87화 (187/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8화>

188화. 너라면 어떻게

“허락이 떨어졌어요. 주연 배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덕분에, 한국에서 공개 오디션을 하기로 최종적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일정은 지금부터 잡아야 하겠지만요.”

레이첼 스타이너가 미소를 지었다.

투자사 측에서 생각보다 흔쾌히 한국에서의 공개 오디션을 허가해 주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이에 안시현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공개 오디션을 진행하게 된다는 가정을 하고, 그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생각해 놓았던 답변이었다.

또한 공개 오디션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공개 오디션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레이첼 스타이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압법은 사실상 없었으니까.

“시놉시스, 혹은 시나리오를 번역해서 제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요 연예기획사에 최대한 빨리 돌릴 수 있게 돕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당장 번역이 들어갈 예정이에요. 최대한 빨리, 귀국하시기 전에 전달할 수 있도록 조치할게요. 소속된 연예기획사가 대한민국 최고 규모라고 하니, 그 부분은 부탁드릴게요.”

공개 오디션은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배우가 공개 오디션에 참여해 줘야 한다.

『Timeless』가 작품의 성공 여부와 별개로 단역 배우의 캐스팅까지도 극찬을 받은 건, 공개 오디션 여부가 일찌감치 이목을 집중시키며 수많은 배우가 오디션에 참여한 결과였다.

레이첼 스타이너가 바라는 것 또한 같았다.

최대한 많은 배우들이 오디션에 참여해 줘서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배우를 찾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JM액터스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많은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돌리고 싶었다.

선택지가 많아야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확률 또한 자연스레 높아질 테니까.

안시현은 레이첼 스타이너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앞으로 그녀와 연락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지만, 연락처를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남으로부터 나흘 뒤.

레이첼 스타이너가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소속사를 통해 시나리오 전달했어요. 오디션은 8월에 진행할 것 같고, 선생님도 함께하시기로 했어요.

“기욤 감독님이요? 의외네요. 스타이너 감독님에게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아, 그게…… 절 도와주려고 오는 게 아니라 시현을 보러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바람잡이 역할만 좀 해 주시고 오디션에는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거절하면 기욤 감독님이 방한하지 않는 건가요?

-지금 당장 가서 무릎 꿇고 싹싹 빌면 될까요?

“농담이에요. 한국 오면 저희 집 한번 들르세요. 아내가 최근에 스타이너 감독님 작품을 재밌게 봤다고 하니 좋은 추억 좀 선물해 주게요.”

-오. 그럼 DVD랑 굿즈 좀 챙겨 갈게요.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이 레이첼 스타이너를 도와주기 위해 방한하는 걸 의외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에게 웬만해서는 도움을 주지 않고,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마저도 조심스러워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말로는 자신을 보고 싶어서라는 핑계를 댔지만, 바람잡이 역할을 한다는 걸 보면 공개 오디션에 최대한 많은 배우가 참여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어느 정도의 도움은 주려나 보네. 그러고 보니 곧 은퇴식이구나. 흐음. 선물을 준비해 가는 게 좋겠지?”

안시현의 출국 이틀 전.

JP스튜디오에서 성대하게 준비한 기욤 뒤자르댕의 은퇴식이 열릴 예정이다. 그동안 기욤 뒤자르댕과 작품을 했던 스태프 및 배우들은 물론, 할리우드의 온갖 유명 인사가 참여하는 대규모 은퇴식이다.

안시현 또한 당연히 이 은퇴식에 초대받았다.

감독으로서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자리이니만큼 당연히 참석할 예정이었고, 어떤 선물을 주면 좋을지에 대해서 고민이 됐다.

“역시 그게 좋겠어. 객관적인 가치는 크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선물이 좋지.”

고민 끝에 안시현이 선물을 결정했다.

*   *   *

오랜 시간 메가폰을 잡으며 감독으로서 명성을 쌓은 만큼, 기욤 뒤자르댕은 수많은 시상식에서 수많은 수상 이력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상을 받아도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다. 늘 무덤덤한 표정으로 수상 소감을 말하며 그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과연 기욤 뒤자르댕은 언제쯤 공식 석상에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인가?

은퇴를 앞두고 있기에 보지 못할 것 같았던 기욤 뒤자르댕의 눈물은, 이례적으로 생중계가 되던 은퇴식에서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그동안 함께 작품을 했던 이들이 준비한 수많은 선물, 그리고 진심을 담은 손편지 앞에서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한 것이다.

안시현 또한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안시현이 준비한 선물은 너무 많이 봐서 낡아 떨어질 지경이 된『Timeless』의 대본에 편지를 적어서 전달하는 것이었다.

사람에 따라 별거 아닌 선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Timeless』를 촬영하며 많은 추억을 쌓은 기욤 뒤자르댕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선물이었다.

은퇴식 이틀 후.

안시현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형아, 동생』이 미국에서 한국보다 3배가 넘는 수익을 벌어들인 직후였다.

*   *   *

자유다.

이제 난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대본을 받기 전까지는 자유의 몸이다.

공항에 몰려든 기자들의 질문에 미소를 지은 채 친절하게 답하던 안시현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Timeless』의 홍보 스케줄 이후 『형아, 동생』의 미국 재개봉까지 겹치며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내 아내의 처녀귀신』 전까지 스케줄을 잡지 않고 여유를 즐길 생각이었다.

물론 실제로 안시현이 자유가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미국에서의『형아, 동생』 흥행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국내 언론사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몇몇 방송에 출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스케줄을 다 소화하고 난 뒤에야 진짜 자유가 될 수 있었다.

아니, 자유가 됐다고 생각했다.

-시현아, 휴식 방해해서 미안한데 『브레이킹 월드』 오디션 관련해서 조언을 좀 구하려고 하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강식 선배님은 해외 체류 중이고 이석재 선생님과는 안면이 없어서 부탁할 사람이 없네.

류성웅으로부터 문자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브레이킹 월드』.

레이첼 스타이너가 메가폰을 잡아 한국에서 공개 오디션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영화의 타이틀이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의 생존기를 다루는 3부작 영화의 시작이며, 대미를 장식하는 3부작의 마지막 영화는 월드 박스오피스 1위 기록을 갈아 치울 정도로 엄청난 흥행을 한다.

류성웅이 그 영화에 관심을 보이는 거다.

『브레이킹 월드』에 출연하면 3부작 모두에 출연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

류성웅의 관심과 SOS에 안시현은 고민에 빠졌다.

‘뭐…… 조언 정도야 해 줄 수 있겠지.’

사실 안시현이 류성웅에게 도움을 줄 만한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디션의 성패를 가르는 건 결국 배우의 연기력이니까 말이다.

그저 자신이 『Timeless』의 오디션에서 송강식과 경쟁해 이길 수 있었던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것 정도가 사실상 전부일 거다.

이는 류성웅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안시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진지하게 오디션을 준비하기에 앞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돌아오는 주말.

류성웅이 안시현의 집을 방문했다.

라온이에게 줄 인형 선물과 군것질거리를 양손에 한 가득 든 채로 말이다.

“뭘 그렇게 많이 사 왔어요?”

“쉬는 거 방해하는데 이 정도 정성은 보여야지. 라온아, 안녕? 돌잔치 때 삼촌 봤는데 기억나?”

“라온이는 군것질거리 사다 주는 삼촌은 다 기억해요. 안 사다 주는 삼촌은 기억 못하지만요.”

“올 일 있을 때마다 사 와야겠네.”

“들어가요. 차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하게요. 온 김에 저녁도 먹고 갈래요?”

“그럼 나야 좋지.”

안시현이 류성웅을 2층으로 별장 2층으로 안내했다.

정혜영이 좋아하는 클랙식 음악을 틀어 놓은 채 따뜻한 허브차를 내왔다.

“향 좋네.”

“맛도 좋을 거예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류성웅이 가방에서 『브레이킹 월드』의 시나리오를 꺼내 안시현에게 건넸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받은 이후 생긴 고민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이 작품은 꼭 오디션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최악의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생존자들의 두뇌 역할을 자처하는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다가왔거든.”

“알버트 리 역으로 오디션에 응하게요?”

“응. 조연 쪽은 전혀 관심이 없어. 알버트 리가 아닌 다른 캐릭터에는 매력을 못 느끼겠거든.”

『브레이킹 월드』의 한국 공개 오디션에서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될 배역은 주연 알버트 리를 포함하여 무려 10개나 존재한다.

레이첼 스타이너가 처음 안시현에게 이야기했던 것과는 달리, 동양인 단역 캐릭터들까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일부 캐스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Timeless』때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많은 관심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레이첼 스타이너가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 한국에서 제법 흥행하기도 했거니와, 은퇴식 당시 기욤 뒤자르댕이 직접 그녀에 대해 언급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류성웅은, 일찌감치 『브레이킹 월드』의 대본을 받아 주연인 알버트 리 캐릭터의 오디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근데 경쟁자가 너무 강하더라고.”

“경쟁자요? 스케줄 비어 있는 주연급 배우들이 관심을 보이긴 하겠네요. 무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연 자리를 오디션으로 뽑는 거니까요.”

“응. 그거야 예상하고 있는데 한 명이 문제야. 아직 기사 안 봤나 보네.”

“기사요?”

“진모도 오디션에 참여할 거래.”

“진모가요?”

“응. 『브레이킹 월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고, 나처럼 알버트 리 캐릭터의 매력에 푹 빠져서 절대 놓칠 생각이 없다 그러더라고.”

김진모와 류성웅은 친한 사이까지는 아니지만, 간간히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발전했다. 『나는 간첩입니다』 이후 시간이 제법 지나기도 했거니와, 류성웅이 꾸준히 진심을 드러낸 덕분이었다.

『브레이킹 월드』의 시나리오를 받은 이후.

류성웅은 스케줄을 최소화한 채 연습에 매진했다. 너무나도 매력 넘치는 캐릭터인 알버트 리를 반드시 자신이 차지하고야 말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문제는 김진모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 것이었다.

“진모는 아예 대놓고 기사를 냈더라고. 『브레이킹 월드』의 공개 오디션에 자신도 참여할 거라고 말이야. 그렇게 해서 경쟁자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겠지.”

“확실히 진모가 오디션에 참여한다고 하면 미리 포기하고 다른 작품을 찾아볼 사람들이 꽤 있겠죠. 기껏 오디션에 참여했는데 진모에게 밀려서 배역을 못 따내면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니까요.”

“나도 그게 걱정이야.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알버트 리 말고는 관심이 없단 말이야. 알버트 리 배역을 따내지 못한다면 몇 개월을 낭비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인데…….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이성적으로 보면 너무 강력한 경쟁자가 참여할 거라고 선언한 오디션에는 참여하지 않는 게 맞다. 아무리 배역이 탐나더라도, 합격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류성웅은 그 부분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는데, 강력한 경쟁자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오디션 참여를 포기하고 다른 작품을 바라볼까?

안시현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의 성향을 감안한다면,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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