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88화 (18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9화>

189화. 이유가 무엇인지

“오디션에 참여할 것 같아요.”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진모와의 경쟁은 되도록 피해야겠죠. 그 정신 나간 노력파 연기 천재를 상대로 승산을 장담할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되겠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진모와 경쟁하는 건 피하는 게 상책이다. 타고난 재능이 넘쳐나는데 죽어라 노력까지 하는 천재를 상대로 경쟁하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다.

이성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경쟁을 피하려는 배우가 좋은 배역을 따낼 수 있을까요? 설사 따내더라도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원하는 게 있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부딪쳐야 한다고 봐요. 설사 그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훗날 제 배우 인생에 밑거름이 되어 줄 거라고 믿어요.”

지금껏 안시현은 경쟁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절대로 피하지 않았다.

설사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실패를 자양분 삼아 더 좋은 배우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이는 회귀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100번도 넘게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단역마저 따내지 못할 때도 많은 긴 무명 시절이 이어졌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연기에 매진했다.

그때의 경험이 있기에 안시현은 류성웅이 김진모와의 경쟁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류성웅이 쓴웃음을 흘렸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마음에 든 배역을 발견했으면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죽어라 노력해야 하는 게 배우라고 생각해. 설사 배역을 따내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다만…….”

“진모가 너무 강한 상대라서 망설여졌던 거겠죠. 이해해요. 근데 그거 알아요? 전 『브레이킹 월드』만큼은 선배가 진모랑 맞붙어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감 주려고 사탕발림하는 건 좋은데, 그 정도면 허언증 아닐까?”

“응? 전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요?”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이라면 류성웅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하라고 권유했을 거다. 자신의 가치관을 류성웅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브레이킹 월드』에서만큼은 류성웅이 김진모와의 경쟁에서도 제법 해볼 만하다 생각했기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이다.

누가 얼마나 더 준비를 잘해 오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Timeless』의 공개 오디션 당시, 송강식과 자신의 평가가 한 끗 차이로 갈렸던 것처럼 말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

류성웅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새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알 것 같네.”

“다행이네요. 그래도 진모랑 선배가 경쟁하는 건데, 어느 한쪽 편을 들어 주기가 뭐해서 이 이상 말해 주기가 난감했거든요. 아니면 둘 다 도와줄 걸 그랬나요?”

“이 정도면 충분해. 어쩌면 내게 부족했던 건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류성웅은 몇 시간 동안 안시현과 대화를 나누다가, 해가 질 즈음 오디션 때까지 연락이 안 될 거라는 말을 남기고서 별장을 떠났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안시현은 저녁 식사를 하고 라온이를 재운 뒤 정혜영과 영화 한 편을 보려 했으나, 김진모로부터 걸려 온 전화로 인해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영화 한 편 보려는 타이밍에 전화했네.”

-아직 본 건 아니니까 타이밍 기가 막혔네. 너 오늘 성웅 선배 만났다며?

“뭐야.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퍼졌어?”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봉팔 형이 말해 줬어. 『브레이킹 월드』 오디션 전까지 연락이 안 될 거라 말하고 사라졌다더라. 작정하고 준비할 모양인가 보던데?

“너라도 쉽지는 않을걸?”

-알버트 리, 누가 따낼 것 같아?

김진모의 돌직구 질문에 안시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준비 더 잘하는 사람.”

-와…… 나 조금 서운하려고 하는데? 너는 내 편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아니야. 성웅 선배라서 누가 배역을 따낼지 진짜 모르겠거든. 연락 안 될 거라고 말하는 거 보면 작정하고 준비할 것 같던데, 너도 긴장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악물고 준비해 봐야지. 오디션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두근거리네. 재밌을 것 같아.

통화가 끝난 뒤.

안시현은 정혜영에게 류성웅이 방문했던 것과 김진모와 류성웅이 같은 배역을 놓고서 8월에 있을 오디션에서 경쟁하게 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 줬다.

물론 두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배우들이 『브레이킹 월드』 오디션에 참가할 거고, 알버트 리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 노력할 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김진모와 류성웅 중 한 명이 배역을 따낼 가능성이 높은 게 사실이었다.

이름값과 지금의 위치만 놓고서 안일하게 오디션에 참가한다면 모를까, 두 사람 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할 스타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두 사람 다 좋은 연기를 보여 줄 테지만, 안시현은 류성웅 쪽이 더 기대됐다.

반면 정혜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브레이킹 월드』의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기에, 안시현이 어째서 류성웅을 고평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류성웅 배우가 출연한 작품을 재밌게 봤고 연기력이 좋다는 것도 이해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진모 씨가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엠바고』에서 진모 씨 연기하는 거 보고 소름이 돋았거든요.”

“그 녀석 연기력이 요즘 물오르긴 했죠.”

“근데 왜 류성웅 배우가 우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격차가 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기껏해야 한 끗 차이? 오디션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정도죠. 한 끗만큼 성웅 선배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건, 가선점이 있기 때문이에요.”

“가선점이요?”

알버트 리 배역에 한정해서는 류성웅에게 가산점이 존재한다. 이는 안시현과 통화하면서 김진모 또한 흔쾌히 인정한 부분이었다.

바로 알버트 리 캐릭터가 류성웅이 기존에 연기해 온 캐릭터들과 이미지가 겹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

반면 김진모는 두뇌파이며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생존자들에게 팩트 폭력을 날리는 알버트 리 캐릭터와 접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 본 경험이 없다.

따라서 류성웅이 김진모보다 더 캐릭터 구축을 하기 수월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말 그대로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다만 류성웅의 연기력 또한 어떤 배역이건 믿고 주연을 맡길 수 있을 수준이기에, 김진모의 입장에서도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안시현의 설명을 들은 뒤에야 정혜영은 류성웅에 대한 평가를 납득했다.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진모 씨랑 류성웅 배우 말고도 오디션에 참여하려는 배우들 꽤 있지 않아요?”

“공개적으로 알려진 주연급 배우만 5명이죠. 아마 더 있을 거예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연 배역을 따낼 수 있는 공개 오디션이 한국에서 흔하게 열리는 건 아니잖아요? 심지어 배역 수도 많아서, 대부분은 단역을 따낸 것도 괜찮다 생각할 거예요.”

“언론들 관심 장난 아니겠네요. 누가 알버트 리 배역을 따내건 화제성 하나만큼은 확실하겠어요.”

과연 누가 알버트 리 배역을 따내게 될까?

*   *   *

8월 초가 될 때까지 안시현은 류성웅과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못했다. 다른 배우들 또한 류성웅과 연락을 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류성웅은 정말로 두문불출했다.

매니저와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생존 신고를 하는 걸 제외하면 정말로 잠적해 버린 상황.

언론들이 공개적으로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한 배우들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며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가운데, 류성웅만큼은 뭘 하고 사는지 그 어떤 언론사도 기사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소속사인 JM액터스마저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전부였다.

그러는 사이 다가온 8월 초.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이 다가왔다.

류성웅은 『브레이킹 월드』 오디션 당일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배우와 기자들 중 그 누구와도 인사하지 않은 채 오디션만 보고서 홀연히 사라졌다.

대다수의 배우들이 흔쾌히 인터뷰에 응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한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8월 말.

레이첼 스타이너가 기욤 뒤자르댕과 함께 기자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 결과 발표를 위해서였다.

안시현은 라온이를 품에 안은 채 연예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생중계하는 기자 회견을 지켜보았다.

“이 자리에 모인 기자분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알버트 리 배역에 누가 캐스팅될 것일까겠죠?”

몇몇 기자들이 질문에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 스타이너는 기자들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고 있었다. 기욤 뒤자르댕을 통해 한국 언론들의 반응을 미리 전해 들은 덕분이었다.

알버트 리.

김진모와 류서웅의 경쟁 구도로 인해, 『브레이킹 월드』의 주연 배역 중 하나에 낙점된 배우가 과연 누구일까에 대해 관심이 쏠리는 상황.

기자들이 연이어 플래시 세례를 터트리는 가운데, 레이첼 스타이너는 뜸 들이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알버트 리 배역을 놓고서 그리 큰 고민을 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초반에 오디션을 본 김진모 배우가 워낙 좋은 연기를 보여 줬기 때문입니다.”

오디션 당시 김진모는 지금껏 보여 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알버트 리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레이첼 스타이너의 눈길을 제대로 사로잡았다.

문자 그대로 완벽한 연기 변신이었다.

이에 레이첼 스타이너는 오디션이 끝날 즈음까지 김진모가 알버트 리를 따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었다.

마지막에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단 한 명의 참가자를 남겨 둔 상황까지 저는 김진모 배우를 캐스팅할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배우들을 압도할 만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 줬으니까요. 마지막 참가자, 류성웅 배우의 연기를 보기 전까지는요.”

공교롭게도 류성웅은 참가자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보게 됐다.

그리고 레이첼 스타이너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김진모와 류성웅.

둘 중에 누가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줬는지 판가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라 달라질 정도로, 두 배우 모두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줬다.

지금 당장 촬영에 들어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알버트 리를 제대로 연기해 줄 것 같았지만, 한 명을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상황.

“꼬박 일주일을 고민했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연기를 보여 준 두 배우 중 한 명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지만, 그래도 결과는 나와야 했으니까요. 고민 끝에 전…….”

심사숙고 끝에 레이첼 스타이너는 결단을 내렸다.

“류성웅 배우를 알버트 리 배역에 낙점했습니다.”

류성웅과 아포칼립스 3부작을 함께 만들어 보기로, 그를 알버트 리 배역에 캐스팅하기로 말이다.

레이첼 스타이너의 발표 이후.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결정이 쉽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류성웅 배우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레이첼 스타이너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욤 뒤자르댕이 『Timeless』의 공개 오디션 당시 데이비드 킴 역으로 안시현을 캐스팅하고 관심이 쏠렸던 것처럼, 알버트 리 또한 꽤나 관심을 쏠릴 거라는 걸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다.

덕분에 대답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기자 회견 이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오디션 당시의 영상을 공개하려 합니다. 아마 김진모와 류성웅 배우 중 누가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줬는지 다들 쉽게 판가름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민 끝에 제가 류성웅 배우를 캐스팅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두 사람 다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그래서일까?

레이첼 스타이너는 전혀 다른 부분에서 두 배우를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류성웅 배우가 더 철저하게 알버트 리를 준비하고 이해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준비성과 이해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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