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89화 (18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90화>

190화. 너무 좋은데?

준비성, 그리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이는 레이첼 스타이너가 류성웅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김진모 배우의 연기는 최고였습니다. 다만…… 류성웅 배우 쪽이 조금 더 처절해 보이더군요. 연기가 아니라 정말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처럼요. 어떤 식으로 오디션을 준비해 왔냐고 물어보니까 그러더군요. 알버트 리의 기분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를 극한 상황에 몰아넣었다고 말이에요.”

“극한 상황이요?”

“오디션을 준비하는 동안 산속에서 전투 식량을 먹으며 살았다고 했어요. 전자 기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고요. 휴대폰도 아주 가끔 매니저와 연락할 때만 쓸 정도로 철저하게 문명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한 거예요.”

그랬다.

류성웅은 『브레이킹 월드』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생존하는 영화인 걸 고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내몬 채 연습에 매진했던 것이다.

식량은 전투 식량에 마실 거라고는 몇 달치 식수가 전부였고, 연락을 위해 휴대폰을 충전할 때 외에는 전기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수돗물 대신 빗물을 받아 사용했으며, 매니저에게 생존 신고를 할 때를 제외하면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차단한 채 스스로를 감금시켰다.

그 결과.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해야 하는 알버트 리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게 가능했고, 이를 통해 보다 현실감 있는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여기서 두 배우의 평가가 갈리게 됐다.

김진모 또한 열심히 준비하고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레이첼 스타이너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지만, 류성웅 쪽이 조금 더 처절해서 알버트 리 캐릭터에 어울린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아포칼립스 3부작에서 알버트 리를 연기하는 건 류성웅 배우로 최종 확정됐습니다.”

레이첼 스타이너의 기자 회견 이후.

김진모는 인터뷰를 통해 시원시원하게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과 관련해 소감을 남겼다.

“성웅 선배가 저보다 더 잘했으니까 알버트 리 배역을 따냈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으니 아쉬움은 없습니다. 그저 성웅 선배가 할리우드에서 성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게도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오겠죠.”

류성웅이 자신보다 잘했음을 인정했고, 아포칼립스 3부작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기를 바란다며 축하를 건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인터뷰 과정에서 아쉬움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디션에서 준비한 걸 모두 보여주지 못했다면 후회했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기에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브레이킹 월드』 공개 오디션은 류성웅의 발탁으로 마무리가 됐다.

*   *   *

안시현에게 있어 2011년 가을과 겨울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연말 연기대상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2010년과 달리 2011년 연기대상은 안시현에게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친분이 있는 배우가 대상 후보에 없어서였다.

2012년 또한 라온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연말이 되어 있었다.

그사이.

안시현은 스케줄을 거의 소화하지 않았다.

그나마 한 거라고는 김진모가 주최한 소아함 환자 기부금 마련을 위한 자선 바자회에 자신의 애장품을 잔뜩 챙겨서 참가한 것 정도였다.

종종 오는 인터뷰 요청 또한 모두 정중히 거절하면서, 철저하게 자신과 가족들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잊은 건 아니었다.

간혹.

홀로 산책을 할 때면 이전에 자신이 주연을 맡았던 작품의 대본을 손에 쥔 채, 자신이 어떤 식으로 연기했는지를 떠올리며 연습을 했다.

푹 쉬는 동안에도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 것이다.

2013년 1월 1일.

떡국을 먹고 난로에 넣을 장작을 패던 중 안시현은 김희숙 작가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근 1년 만에 하는 통화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발리에서 라온이 줄 선물 사 왔는데, 택배로 보내 드릴까요?

“귀국하셨어요, 작가님?”

-연말에요. 부모님이랑 시간 좀 보내느라고 주위에는 연락을 못 돌렸네요. 시집가라는 잔소리 때문에 조만간 청각을 상실할지도 모르겠어요.

지난 1년.

김희숙 작가는 한국에 1달도 채 있지 않았다.

발리에서 머물며 휴양지의 여유를 마음껏 만끽했다. 집필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며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집필이 끝나기 전까지는 귀국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건 보너스였다.

귀국을 해서 연말을 가족과 함께 보냈다는 말을 듣고서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완성된 건가요?”

-완성은 7월에 했는데, 탈고를 하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렸어요. 이제는 더 이상 손댈 게 없어요.

“축하드려요, 작가님.”

회귀 전, 김희숙 작가가 집필한 모든 작품은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뚜렷한 성과를 냈다.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그녀보다 더 상업적으로 성과를 낸 드라마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김희숙 작가의 라이벌은 과거의 김희숙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김희숙 작가와 관련해서 한 가지 이슈가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과연 김희숙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중 최고의 작품은 무엇일까?

한 드라마 리뷰 블로거의 심심풀이로 시작된 투표는,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꽤나 화제가 되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50만 명이 넘게 투표한 가운데.

한 작품이 5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게 바로 지난 1년 동안 김희숙 작가가 발리에서 칩거하며 집필에 매진한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다.

작품성만으로 따지면 김희숙 작가가 연출한 작품 중 단연 최고였다.

톡톡 튀는 캐릭터들의 매력 넘치는 대사, 엔딩까지 흠잡을 부분 없는 깔끔한 스토리 구성과 복선 회수, 드라마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퀄리티의 특수 효과까지.

케이블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시청률 20%를 돌파했고, 최고 시청률 29.1%를 기록하며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던 드라마의 대본 집필이 마침내 끝났다.

이에 안시현은 직감했다.

‘슬슬 준비해야겠네.’

느긋한 휴식을 끝낼 때가 다가왔음을 말이다.

*   *   *

며칠 후.

안시현이 자선 바자회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했다.

김희숙 작가와의 미팅을 위해서였다.

회의실에서 기다리기를 20분, 김진모와 김희숙 작가가 나란히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진모가 건네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받으며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김 작가님. 둘이 어떻게 같이 왔네요?”

“커피 사려고 1층 카페에 있다가 만났어요. 안부는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차차 묻고,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는 게 어때요? 발리에서 지내는 동안 삼겹살에 소맥이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요.”

“좋죠. 간만에 한잔하겠네요.”

“제가 술은 잘 안 마시지만 고기 굽는 거랑 소맥 마는 건 또 기가 막히게 잘하죠.”

세 사람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김희숙 작가가 챙겨 온 USB 두 개를 각각 안시현과 김진모에게 건넸다.『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대본이 저장되어 있는 USB였다.

다만 안시현과 김진모에게 전달된 대본이 달랐다.

김진모의 USB에는 1화부터 최종화까지의 모든 대본이 담겨져 있었고, 안시현의 UBS에는 한 캐릭터의 주요 신 10개 정도만이 담겨져 있었다.

김진모는 주연 배우로서 캐스팅이 확정된 상황이기에, 안시현은 스스로가 캐스팅을 거부하고 오디션을 통해 원하는 배역을 따낼 거라 했기에 발생한 차이였다.

즉, 안시현은 김희숙 작가에게 오디션용 대본을 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김 배우님은 전부 다 보기에는 너무 많으니까 일단은 1화만 확인해 주세요. 내용과 캐릭터 파악에는 그 정도면 차고 넘치지 않겠어요? 검토하시는 사이, 전 최 본부장님과 대화 좀 나누고 올게요.”

두 배우는 회의실에 비치된 노트북을 통해 곧장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대본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하게 대본 검토를 끝냈다.

약 2시간이 걸렸고, 그때까지 김희숙은 최창국과 대화를 나누느라 회의실에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안시현과 김진모가 눈을 마주쳤다.

“어떤 것 같아?”

“마음에 들어. 김 작가님이 어째서 날 원하셨는지 알 것 같아. 이런 찌질한 캐릭터는 나한테 딱 맞는 옷 아니겠냐?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 있었어?”

“너랑 내가 형제로 나오는 거?”

“난 그거 보고 김 작가님이 현실 고증 제대로 했다고 느껴서 감탄했는데? 내가 형이고, 네가 동생이잖아.”

농담을 주고받으며 김진모는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1화 대본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내렸다.

김진모는 대본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무엇보다 김희숙 작가가 자신을 주연 배우로 일찌감치 낙점하고서 대본을 쓴 덕분인지,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캐릭터가 완성되었다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반면 안시현의 평가는 김진모와 관점이 달랐다.

그는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따내야 하는 상황이기에, 오디션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에 초점을 맞추고 대본을 확인했다.

대본은 회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나마 눈에 띄는 차이점이라면…….

‘내가 연기해야 할 이현 캐릭터의 비중이 소폭 늘어났다는 것 정도? 주연보다는 못하고 조연보다는 큰 정도라고 봐야겠네. 감초 역할을 제대로 해 보라는 뜻이겠지?’

안시현이 원하는 캐릭터인 이현의 비중이 회귀 전보다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비중이 늘어났다고 해도 이현은 조연이다.

다만 회귀 전에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뽐냈던 이현 캐릭터이니만큼,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가 조금 더 늘어났다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했다.

김희숙 작가가 최창국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안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가 회식할 때 불러 주세요. 연습하고 있을게요.”

안시현은 캐스팅이 확정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캐스팅이 확정될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가 캐스팅을 거부하고 오디션 참가 의사를 드러냈다.

때문에 김희숙 작가가 주연 배우인 김진모와 대화를 나누는 데에 동석하기보다는, 연습실에서 대본을 검토하는 쪽을 택했다.

안시현이 홍보팀에게 부탁해 이현의 오디션용 대본을 출력한 뒤 연습실에 틀어박혔다.

“후우…….”

연습을 시작하기 전.

안시현이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간만에 하는 연습이니만큼 긴장감을 감추기 어려웠고, 마음먹은 대로 연기가 될지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동안 아예 연기에서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

틈나는 대로 이전에 연기를 했던 대본들을 보며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김희숙 작가로부터 연락을 받은 이후, 며칠 동안 작정하고 연습에만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근 2년 가까이 작품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던 건 사실이다. 연기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솔직히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연습은, 해가 질 무렵 김진모와 김희숙 작가의 대화가 끝나자 마무리됐다.

회식을 위해 근처 고깃집으로 향하는 안시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연습은 잘했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나쁘지 않기는. 딱 봐도 좋았던 것 같은데. 네 성격 상 만족할 만한 성과가 안 나왔으면 웃고 있을 리도 없고, 애초에 회식도 오지 않으려고 했겠지.”

“잘 알고 있네.”

김진모의 말이 맞았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안시현은 연습 결과에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분 좋게 웃으며 회식에 동행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심지어 만족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시험 삼아 무작위로 한 신을 연기해 보자마자, 안시현은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음을 대번에 깨달았다.

‘나, 생각보다 컨디션 너무 좋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