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91화>
191화. 제가 아니면 누가
지금껏 안시현은 군 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무려 2년 동안이나 연기를 쉬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회귀 전 20대에는 무명 시절을 벗어나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죽자 살자 연기에 매달렸고, 30대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넘쳐나는 스케줄을 진심으로 즐기며 휴식을 등한시했다.
회귀 후에는 조금 쉴 만하면 마음에 드는 작품과 인연이 닿으며 휴식이 생각보다 길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안시현은 2년의 휴식 기간 동안 편안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푹 쉬며 다음 작품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재충전을 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너무 오래 쉬어서 원하는 대로 연기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또한 느꼈다.
휴식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연기 스타일에 많은 변화를 주긴 했지만, 여전히 메소드를 밑바탕에 두고 있다. 다작을 하기에는 썩 바람직한 스타일이 아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적절한 휴식을 병행해 주는 게 좋다.
문제는 휴식기가 길어질수록 공백기에 대한 불안함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배우는 계속해서 나오고, 오랜 시간 쉬다 보면 감이 떨어져 이전처럼 좋은 연기를 보여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으니까.
실제로 긴 공백기 이후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는 배우들의 사례는 굳이 찾아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이에 안시현은 별장에 놀러 왔던 최정수에게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롤 모델이자 휴식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우이니만큼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이에 최정수는 흔쾌히 답을 해 줬다.
“푹 쉬다 와도 막상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대로 연기할 수 있을걸? 방치된 채 녹이 슨 게 아니라, 기름칠 잘해 놓고 언제든 시동을 걸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상태인 거니까. 이해 안 되지?”
“네. 감도 안 잡히네요.”
“크흐흐. 시동 걸어 보면 알게 될 거다.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배우에게는, 공백기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걸 말이야.”
사실 안시현은 최정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백기 이후 재기에 실패한 배우들이 차고 넘쳐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을 어느 배우가 쉽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막상 제대로 연습을 시작하고 나니 최정수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이해가 됐다.
공백기는 안시현에게 문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2년 동안 연기를 쉬었음에도 불과 며칠 전에도 촬영을 했던 것처럼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현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머리가 이해하고 몸이 반응했다.
‘그동안의 경험이 헛된 게 아니었구나.’
회귀 이후 꾸준히 좋은 배우들과 함께 좋은 작품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며 성과를 냈다.
그 경험들이 공백기를 무색하게 만들어 줬다.
‘이현…….’
안시현이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수없이 많은 오디션에 참가하고 고배를 마셨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오디션 두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간첩입니다』와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다.
『나는 간첩입니다』는 데뷔작이기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명품 조연으로 발돋움한 이후 처음으로 실패를 맛본 것이기에 그러했다.
심지어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이현 배역의 경우 최종 2인까지 올라갔고, 심사위원들도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해 캐스팅이 확정된 배우들의 의견까지 묻고 나서야 겨우 결과가 발표됐다.
한 끗 차이로 오디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서일까?
유독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만에 하나 다시 오디션을 본다면, 그때는 반드시 배역을 따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회귀 이후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정확히는 안시현 스스로가 기회를 만들어 냈다. 김희숙 작가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고서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따내겠다고 말했으니까.
첫날 연습 이후.
휴식기 전에 크게 다르지 않은 자신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안시현은 확신을 품게 됐다.
‘이번에는 내가 연기할 거야. 내 손으로 주연만큼 존재감을 뽐내는 조연을 만들 거라고.’
이현을 연기하는 건 자신이 될 거라고 말이다.
* * *
김희숙 작가가『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공개 오디션 일정에 대해 발표하고 JM액터스를 통해 대본을 돌린 이후, 안시현은 팬카페를 통해 이현 배역을 노리고 오디션에 참여할 것임을 알렸다.
2년여 만에 복귀를 시한 것이다.
안시현의 복귀 발표에 대해 평가가 엇갈렸다.
주연이 아닌 조연 배역을 노리는 것을 두고 조연 배우들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불만이 나오기도 했고, 지극히 안시현답다는 이야기 또한 존재했다.
전자보다는 후자 쪽 의견이 더 강세였다.
지금까지 안시현의 행보를 보면 마음에 드는 배역이 있으면 고민하지 않고 도전해 왔다.
『90일』과 『VVIP』가 좋은 예시다.
『90일』은 안시현이 제작비의 절반을 투자하면서까지 출연 의사를 불태웠으며, 『VVIP』는 명목상 주연이지만 분량은 조연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백성훈에게 푹 빠져서 일찌감치 출연을 결정지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안시현의 오디션 참가는 기행이나 밥그릇 뺏기가 아닌, 그저 지금껏 보여 준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안시현의 행보를 두고 밥그릇 뺏기라느니 공백기로 인해 겁을 먹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자, 어이가 없어진 최정수는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주연 배우가 조연 배역을 원한다고 밥그릇 뺏기라는 건 어디서 나온 발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배우라면 마음에 드는 배역을 연기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배우에 대한 평가는 연기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안시현의 행보에 불만을 토로하는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최정수의 인터뷰 이후 쏙 들어갔다.
덕분에 안시현은 여론을 신경쓰지 않은 채 연습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별장 생활은 포기하지 않았다. 육아 또한 여전히 전담하면서 연습을 병행했다.
‘대본 리딩 전까지는 여유를 가져도 되겠지.’
늘 그렇듯 안시현은 오디션에 맞춰 캐릭터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제대로 준비하는 건 오디션이 합격한 이후, 대본 리딩 즈음부터라고 내다봤다.
그전까지는 여유를 가지고 준비할 생각이었다.
이는 2년여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연기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대충 오디션을 준비할 생각은 없었다. 작정하고 준비해서 이견의 여지가 없는 연기력을 통해 이현 배역을 따낼 생각이었다.
* * *
한편.
2013년 4월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공개 오디션이 있을 거라고 발표한 이후, 김희숙 작가는 최창국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담당 PD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김진모와 안시현에게 대본을 전달해 줄 때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었고, 당시에는 최창국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론을 듣기에 앞서 상황 설명부터 드릴게요. 오디션 일정을 발표한 걸 보면 알겠지만 방송사가 확정됐어요.”
“이번에는 3사 중 어디인가요? 꾸준히 러브콜을 보낸 KNC인가요?”
“3사 다 아니에요.”
“……네?”
“TV Y라고 들어보셨죠? 그곳에서 방영하기로 했어요. 이번 달 내로 제작비 편성도 마무리 될 예정이고요.”
“TV Y라면 대기업에서 만든…….”
“네. 원래는 예능 쪽에 집중하다가, 작년부터 드라마 쪽으로도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더라고요. 저희한테도 거액의 제작비를 약속했고요. 사실 그것보다는…… 방송 3사랑 합의가 안 됐어요.”
김희숙 작가는 방송3사와의 협상 과정에서 있었던 문제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퇴마를 비롯한 판타지적인 요소가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수정을 요구하더라고요. 3사 모두요. 전 무슨 단합이라도 한 줄 알았다니까요.”
“TV Y는요?”
“PPL을 제법 많이 넣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사전 제작에 동의했고, 제작 과정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았어요. 제작비도 넉넉하고요. 방송 3사에서 제시한 평균 제작비보다 50억 이상 많아요.”
“그 정도면 TV Y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군요. 최근 들어 드라마 쪽에서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내 아내는 처녀귀신』는 케이블 채널인 TV Y에서 방영이 확정됐다. 1년 전부터 드라마에 큰 투자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온갖 좋은 조건을 내걸며 어렵사리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을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기에 김희숙 작가가 최창국을 찾아온 것이었다.
“현재 TV Y에는 드라마국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에요.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담당 PD를 맡아 줄 만한 인물이 없다고 솔직히 인정하더군요. 그래서 전, 다시 한번 최 본부장님과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생각하는 대로 연출해 줄 수 있는 분이 본부장님 말고는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TV Y가 드라마로 영역을 확정한 건 불과 1년 전이고, 그렇기에 드라마국 인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호평을 받은 드라마 또한 외주 제작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있는 인력들 또한 새 드라마 제작에 한창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김희숙 작가와 함께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만들어 나갈 인물이 없었다.
이에 TV Y 측에서는 김희숙 작가가 원하는 대로 제작진을 구성해도 된다는 뜻을 전했다.
김희숙 작가의 선택은 최창국이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까지 함께한다면 무려 네 번째로 호흡을 맞추게 되는 거다. 이제는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다.
최창국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
고민해 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처음으로 제안을 받았을 때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제가 아니면 누가 까칠한 작가님이 원하는 대로 연출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럼요. 최 본부장님밖에 없죠.”
“특수 효과팀은 구하셨나요?”
최창국이 함께하기로 해서 기쁜 것도 잠시.
특수 효과에 대한 질문을 받자 김희숙 작가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는 판타지 요소가 많이 들어간 드라마이고, 때문에 드라마의 퀄리티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닐 만큼 특수 효과가 중요하다.
문제는 국내에서 특수 효과 쪽으로 손꼽히는 팀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대부분 스케줄이 차 있어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으음. 그 부분 때문에 고민이 많아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특수 효과가 중요한 드라마인데…… 국내에서 실력이 괜찮은 특수 효과팀은 이미 내년까지 스케줄이 다 잡혀 있더라고요. 그래서 해외 쪽을 알아봐야 하나 생각하던 차였어요.”
고민 끝에 김희숙 작가가 내린 결론은 해외의 특수 효과팀을 알아보고 섭외하는 것이었다.
비용이 조금 더 늘긴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애초에 제작비가 넉넉하게 책정된 상황이고, 그중 상당 부분을 특수 효과에 투자할 생각이었으니까.
김희숙 작가의 고민을 들은 최창국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고민을 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미리 준비해 놓은 대답을 꺼내들었다.
“특수 효과라면 제가 도움을 줄 수 있겠네요.”
“정말요?”
“네. 다만 해외에서 미팅을 해야 할 건데 괜찮겠어요? 지금은 집에도 못 갈 정도로 바쁠 거거든요.”
“실력 있는 특수 효과팀을 섭외할 수 있다면 지구 반 바퀴라도 돌아갈 수 있어요.”
최창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통화를 하고 온 뒤, 김희숙 작가를 바라보며 좋은 소식을 전해 줬다.
“미국 갑시다, 작가님.”
“미국이요?”
“네. 『Timeless』와 『브레이킹 월드』의 특수 효과를 담당한 팀과 미팅을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