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93화>
193화. 만들어 내고 말겠어
김희숙 작가는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캐스팅 라인을 놓고 기본적으로 공개 오디션을 지향했지만, 두 배역만큼은 공개 오디션 전에 미리 캐스팅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바로 이현과 이환 형제였다.
이환 캐릭터는 대본 집필 전부터 김진모를 고려했고, 김진모와 출연 계약서를 작성한 뒤에는 대놓고 그를 모티브로 삼아 작업을 했다.
이현의 경우 안시현이 오디션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안시현 혹은 그와 유사하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배우를 원한 게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현은 출연 분량이 조연이라서 그렇지, 주연 배역인 이환과 대등한 존재감을 뽐내야 하고 몇몇 신에서는 흡사 주연인 것처럼 연기해 줘야 하는 캐릭터다.
결과적으로 안시현은 오디션 때부터 주연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 줬다.
캐스팅이 확정된 이후.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에게 자신이 바라는 이현 캐릭터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라 생각하고, 이왕이면 원톱이라 생각하고 연기해 주세요. 신 스틸러 수준으로는 부족해요.”
“원톱이라…… 제가 잘하는 거네요.”
“그래서 시현 씨를 원했던 거죠.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스타일의 연기는 아니잖아요?”
“인정합니다. 난이도가 꽤나 높긴 하죠.”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존재감을 죽이라는 게 마음껏 드러내라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요구였다.
물론 김희숙 작가가 원한다면 이현을 연기하며 존재감을 죽이는 게 가능했지만, 마음껏 드러내라고 판을 깔아 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물론 이 상황을 모르는 최정수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조언을 한 것이고 말이다.
안시현의 상황 설명을 들은 뒤.
최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시현이 배역의 비중에 어울리지 않게 주연 수준으로 존재감을 끌어올리려고 하는 이유를 대번에 납득했다.
“쉽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뭐, 주연이 진모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잘하면 주연이랑 조연이 존재감 경쟁을 할 수도 있겠는데?”
“그게 김 작가님이 바라는 그림일 거예요.”
“제대로만 된다면 괜찮을 수도 있겠어.”
신 스틸러 수준을 넘어 조연이 주연의 존재감과 대등하게 연기해버리면, 자칫 잘못했을 때 주연의 존재감이 묻혀 버릴 수도 있다.
적절한 선을 유지해야 하는데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즉, 선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조연의 존재감이 묻히는 걸 걱정해야 하건만…….
최정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시현의 연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환 역을 맡은 배우가 김진모이기에, 웬만해서는 주연으로서 존재감이 묻힐 일이 없는 배우이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몇 시간 후.
극단에 모습을 드러낸 김진모는 곧장 안시현과 연습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최정수는 확신했다.
‘거참 이상한 드라마네. 투톱에게 비중을 몰아준 게 맞는데, 막상 보면 존재감은 조연인 이현 쪽도 엄청나단 말이야. 이상하긴 한데…… 확실히 재미는 있겠어. 저렇게 연기하는데 시청자들이 안 볼 도리가 있겠어?’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대박을 말이다.
* * *
2013년 9월 1일.
TV Y 사옥의 드라마국 회의실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배우들이 한데 모였다. 기자들이 취재하는 가운데 첫 대본 리딩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대본 리딩 시작 10분 전.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가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이은 자기소개 이후 대본 리딩을 시작하려는 찰나, 김진모가 장난스럽게 손을 들었다.
“작가님. 주연 배우로서 의견 하나만 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대본 리딩의 첫 신은, 간만에 복귀하게 된 시현이를 위한 무대를 깔아 주는 게 어떨까요?”
일순간.
회의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안시현에게로 쏠렸다. 간만에 복귀하게 된 안시현을 위해, 친구인 김진모가 대본 리딩에 쏠릴 관심을 몰아주자고 한 상황.
김희숙 작가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겠네요. 사실 저도 시현 씨가 이현 캐릭터를 어떻게 준비해왔을지 내심 궁금하거든요. 만약 시현 씨가 동의하면 첫 순서로 원하는 신을 리딩하도록 조정할게요. 어때요, 시현 씨. 관심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안시현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재밌겠네요. 어떤 신이건 제가 원하는 걸 골라서 리딩하면 된다는 거죠?”
“네. 대신 대사는 저랑 본부장님이 받아 줄 거예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이현의 대사밖에 없는 신을 고를 생각이거든요.”
“혹시…….”
“네. 생각하시는 그 신이 맞을 거예요.”
김희숙과 시선을 교환한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독백이 많은 드라마다. 특정 장면을 보여 주면서 독백을 통해 캐릭터를 심리를 표현하는 걸 선호하는 김희숙 작가의 성향이 유독 강하게 묻어난 작품인 까닭이다.
독백의 80%는 주인공 이환과 여주인공 나장미에게 몰려 있다. 나머지 20%는 비중이 높은 조연인 이현의 차지인데, 독백이 포함되어 있는 신에는 이환 혹은 나장미가 같이 출연한다.
이현의 독백이 대부분 이환이나 나장미와 관련되어 있어서다.
단 한 신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드라마의 후반부.
나장미의 정체와 오랜 시간 쫓아온 악귀의 행방에 대해 알게 된 이현이, 부모님의 무덤을 찾아 독백을 늘어놓으며 고민을 토로하는 신.
안시현은 그 신을 리딩하기를 바랐다.
“다른 신으로 할까요?”
잘못하면 대본 리딩 때 드라마 후반부의 스포일러를 하게 될 수도 있기에, 안시현은 리딩 전 미리 김희숙 작가의 의견을 물었다.
“괜찮아요. 편하게 보여 줘요.”
이에 김희숙 작가는 흔쾌히 허락을 해 줬다.
안시현이 택한 독백 신이 드라마 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건 맞지만, 신 하나만 놓고 보면 스포일러의 역할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김희숙 작가는 기자들이 해당 신이 방영된 걸 보고 나서야 깨달으리라고 확신했다.
아, 이게 대본 리딩 때 본 그 신이구나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그녀 또한 내심 궁금했다.
‘독백 신을 보면 시현 씨가 이현 캐릭터를 얼마나 잘 준비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어디 한 번…… 마음껏 존재감을 드러내라고 한 결과물이 어떤지 감상해볼까?’
안시현은 오랜만의 복귀이니만큼 대본 리딩임에도 안제대로 힘을 주고서 연기할 것임을 미리 예고했다.
오디션 당시에 보여 준 안시현의 이현 연기 또한 일품이었지만, 아무래도 오디션이다 보니 당시에는 완성도가 조금 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오디션 이후 몇 달의 시간이 흐른 상황.
그사이 안시현의 이현 캐릭터는 얼마나 발전했을까?
회의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을 받으며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이내 특유의 의식을 치르고서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 오랜만에 왔어요.”
* * *
안시현이 휴식을 취하는 2년 동안, 김진모는 두 편의 드라마와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갔다.
그 과정에서 실패 또한 있었다.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 낙방이 그것이다.
알버트 리 배역을 완벽하게 준비해 온 류성웅에게 밀려서 배역을 따내지 못했고, 이는 김진모의 연기 인생에서 처음 겪는 실패였다.
수많은 천재 배우들도 결국에는 실패를 겪는다.
그리고 그때.
실패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무너지거나, 두 번 다시 실패를 하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이를 악물거나.
김진모의 경우는 후자였다.
결과적으로 『브레이킹 월드』 공개 오디션의 낙방은 김진모를 한층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됐다.
팬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김진모의 연기는 『브레이킹 월드』 전과 후로 나뉜다고 평가할 정도로, 첫 실패는 김진모의 연기 인생에 좋은 자양분이 됐다.
때문에 김진모는 자신이 있었다.
조연임에도 작정하고 존재감을 드러내 달라고 부탁받은 안시현에게, 주연 배우로서 존재감이 밀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와. 미친 놈. 진짜 작정하고 준비했네. 이 연기를 보고 누가 2년 만에 복귀하는 배우라고 생각하겠어?’
막상 안시현이 대본 리딩임에도 작정하고 연기를 보여 주자 생각이 달라졌다.
‘시현이 녀석이 저렇게 연기하면, 진짜 존재감이 밀릴 수도 있겠는데?’
안시현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독백 신이라서 더욱 존재감이 부각된 점 또한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현의 감정을 표현하는 선 굵은 연기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조연이 아니라 주연, 그것도 원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불과 전날까지 함께 연습했음에도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안시현의 연기를 보며 김진모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이래야 연기하는 맛이 나지. 이번 작품, 촬영 내내 재밌겠는데?’
내심 안시현이 쉬는 동안 격차를 벌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연습이 아닌 실전에 들어간 안시현의 연기는, 격차가 벌어졌다고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게 할 만큼 완벽했다.
『브레이킹 월드』의 공개 오디션 이후 간만에 김진모는 동기 부여가 되는 걸 느꼈다.
조연인 이현에게 존재감이 밀리면 안 된다. 주연으로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줘야 한다.
김진모가 각오를 다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시현은 속으로 웃었다.
‘짜식, 자극 좀 받았나 보네. 원래는 이럴 계획이 아니었지만…… 주연 배우에게 제대로 동기 부여를 해 줬으니 괜찮은 결과이려나.’
안시현은 대본 리딩 때 자신에게 관심이 쏠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날 연습할 때 김진모가 판을 만들어 줄 테니까 간만에 기자들 앞에서 관심 한 번 제대로 받아 보라는 말을 대놓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안시현은 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대본 리딩 때부터 작정하고 연기를 할 생각이었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최선을 다해 촬영을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희숙 작가가 아무 신이나 리딩해도 된다고 말해 주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왕 선택권한이 주어진 거, 판을 깔아 준 김진모를 한번 자극해 보자고 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김진모는 가만 놔둬도 알아서 연기를 잘하는 배우지만, 자극을 받으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스타일이다.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신 뒤에 이를 악물었던 것처럼 말이다.
안시현은 자신의 존재감을 통해 김진모를 자극하고 싶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서 김진모가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기를 바랐다.
‘회귀 전의 연기로는 만족할 수 없어.’
회귀 전 김진모의 인생작은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다. 찌질한 모습으로 시작했다가 조금씩 변해 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며 극찬을 받았다.
그때처럼만 해도 『내 아내는 처녀귀신』는 좋은 평가를 받을 거고, 김진모 또한 다시 한번 자신의 주가를 끌어올릴 거다.
문제는 안시현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수많은 주연 제안과 거액의 출연료를 거절하고, 심지어는 할리우드에서 들어온 제안조차 모조리 외면한 채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택했다.
주연도 아닌 조연 배역을 말이다.
따라서 좋은 반응 정도로는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회귀 전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둬야만 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라온이의 육아마저도 부모님에게 맡기고 연습에 매진했다. 언제 촬영이 들어가도 상관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 악물고 준비하면서 세운 목표는 단 하나.
‘회귀 전에는 아쉽게 달성하지 못했던 케이블 역사상 최초의 최고 시청률 30% 돌파, 나와 진모의 손으로 만들어 내고 말겠어.’
최고 시청률 30% 돌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