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96화>
196화. 알게 될 거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반응이 좋네요.”
“작정하고 준비했는데 반응이 저조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다들 고생하고 있는 만큼 방영 이후에도 이 반응이 쭉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제작진과 배우들 모두 작정하고 촬영을 준비해 온 드라마다.
당장 김희숙 작가만 하더라도 데뷔작인 『너와 나의 시간』 다음으로 집필이 오래 걸렸다.
덕분에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캐릭터들이 특색이 잘 드러나고, 스토리가 탄탄한 대본이 탄생할 수 있었다.
최창국의 경우 할리우드 특수 효과팀과 일찌감치 접촉해 연출의 방향성에 대해 논의했고, 이를 김희숙 작가와 공유하며 대본 리딩 때부터 효율적으로 촬영을 준비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김진모의 경우 늘 그랬던 것처럼 촬영장 근처에 숙소를 구하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거기에 안시현까지 가세했다.
“이왕이면 같이 숙소 잡는 게 좋지 않겠어? 스파링 파트너가 있어야 연습이 잘되지.”
“오. 네가 웬일이냐? 촬영 끝나면 라온이 보러 가야 한다고 부리나케 도망가더니만.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냥…… 이번에는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라온이야 『내 아내는 처녀귀신』 끝나고 푹 쉬면서 보면 되는 거지.”
안시현에게 중요한 건 세간의 평가가 아니다. 언론에서 안시현과 이현에 대해 뭐라 떠들던 눈곱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지금은 할리우드 진출이 확정된, 회귀 전 이현 배역을 맡았던 배우의 명연기에 향해 있었다.
한 배우가 보여 줬던 인생 연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확고한 목포가 존재했다.
기존에 했던 대로 하더라도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자신이 있었지만, 목표가 목표이니만큼 김진모처럼 연기에 올인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해야 기존에 이현을 연기했던 배우의 인생 연기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마지막으로 김겨울의 경우 회식 자리에서도 대본을 손에 놓는 법이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나 궁금한 게 있으면 선배 배우들에게 거리낌 없이 질문을 하며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첫 번째 촬영에서의 언론 반응이었다.
안시현과 김진모에 대한 호평은 예상된 것이었지만, 김겨울에 대한 호평은 뚜껑을 열어 보기 전까지는 확신하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반응이 더욱 뜻깊었다.
언론들의 반응이 꼭 시청률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캐스팅 라인이 발표되고 가장 말이 많이 나왔던 김겨울 연기력이 호평으로 전환된 것이었으니까.
김희숙 작가가 기분 좋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기분 좋게 마시고, 내일부터는 다시 촬영에 올인 합시다. 목표는 뭐라고요?”
“최고 시청률 25%를 위하여!”
최고 시청률 25%.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확고한 목표를 지닌 채 의기투합을 했다.
* * *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핵심 배역 외에는 연기력이 출중한 중견 배우를 선호하는 김희숙 작가의 특성상, 주요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 준다면 촬영이 수월하게 진행되곤 했다.
사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서 연기력이 아쉽다고 평가받는 건 김겨울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 김겨울의 연기력이 대본 리딩을 거치며 일취월장했으니 촬영이 순조로운 게 당연했다.
촬영본은 최창국의 지휘 아래 편집과 연출이 됐고, 거기에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을 통해서 김희숙 작가가 원하는 그림이 완성되어 갔다.
최창국의 입장에서 보면 지독히도 빡빡한 스케줄이었지만, 지칠 법 함에도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는 날이 없었다. 오히려 스케줄이 빡빡한 걸 즐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최창국의 손에 인해 결과물이 전혀 달라질 만큼 연출이 중요한 드라마이니까.
최창국은 자신의 비중이 늘어난 것에 부담을 느끼기보다는, 좋은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빡빡한 일정을 즐겼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을 때.
김희숙 작가가 배우들에게 편성 일정을 전달했다.
“저희 드라마, 12월 첫째 주 금요일에 첫 방송을 할 예정이에요.”
“금요일과 토요일에 방영하는 건가요?”
“네. 대답하라 시리즈가 방영되었던 그 시간대예요.”
“TV Y가 제대로 이슈를 만들 생각인가 보네요.”
“제가 인터뷰로 불을 지펴 놓았으니 그걸 받아먹겠다는 거죠. 방영 전부터 이슈를 만들어 손해 볼 건 전혀 없으니까요.”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 9시 50분은 대답하라 시리즈가 방영되었던 시간대다.
월화와 수목이라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금요일과 토요일에 편성된 건,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흥행을 확신하고 있는 TV Y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김희숙 작가가 대답하라 시리즈의 최고 시청률을 뛰어넘을 거라고 선언했기에, 아예 대놓고 대결 구도를 만들기로 작정한 것이다.
물론 『내 아내는 처녀귀신』가 정말 그 기록을 넘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화제성이 시청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게 사실이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투자한 거액의 제작비를 회수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TV Y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첫 방영 전에, 해외 로케이션을 진행하려고 해요. 방영이 시작되면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요.”
“방영 전에 다녀오는 게 좋긴 하죠.”
『내 아내는 처녀귀신』는 스위스 해외 로케이션이 촬영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방영 분량으로 따지면 2화 정도로, 촬영 후 드라마 곳곳에 해당 신들을 배치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해외 로케이션이 중요한 건 엔딩을 촬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은 해외 로케이션 일정과 관련해서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방영 직전에 다녀오는 것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엔딩이 대한 확신이 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촬영을 하는 내내 김진모와 안시현은 매 순간 안정적인 연기력을 보여 줬고, 김겨울은 다소 기복이 있긴 해도 기대 이상으로 좋은 모습이 많았다.
덕분에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은 엔딩의 내용을 변경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물론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연출에 변화를 줄 예정인 신 중 일부가 해외 로케이션에 포함되어 있지만, 경우의 수까지 감안해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봤다.
‘해외 로케이션이라…… 드디어 일정이 잡혔네.’
해외 로케이션까지 남은 시간은 약 두 달.
지금이나 그때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할 테지만, 해외 로케이션이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할 엔딩을 촬영할 테니까.
엔딩에서는 이현과 이환이 대사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사실상 안시현과 김진모가 엔딩의 퀄리티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두 사람이 촬영장 근처의 숙소에서 머물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음 날 촬영할 신과 드라마의 핵심이 되는 주요 신들 위주로 연습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연습한 게 바로 엔딩이다.
횟수로 따지면 100번을 넘은 지 오래였다.
그만큼 엔딩에서 연기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외 로케이션 전에도 연기력을 폭발시켜야 할 신이 있긴 한데…… 다다음 주였나? 나랑 진모랑 연속으로 촬영할 예정이라고 했었지?’
김희숙 작가가 작정하고 힘을 준 작품이니만큼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는 인상 깊은 신이 꽤 있다.
그중 엔딩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 깊은 신을 뽑으라고 하면 세 개 정도가 있었다.
나장미가 성불하고 이환이 오열하는 신, 이현이 오랜 시간 쫓아온 악귀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는 신, 나장미가 이환과 이현 형제를 위해 결단을 내리는 신까지.
마지막 신을 제외한 두 신의 촬영이 2주 후에 나란히 예정되어 있었다.
드라마 후반부에 나올 신이지만,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이 배우들의 피로감이 올라가기 전에 미리 촬영을 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디 한번 작정하고 준비해 보자고.’
* * *
2주 후.
안시현과 김진모는 간만에 이틀 동안 촬영이 없었다. 주요 신의 촬영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이 배려해 준 덕분이었다.
덕분에 안시현은 간만에 집에서 라온이와 실컷 놀아 주며 휴식을 만끽했다. 남은 이틀 동안 연습에 매진하기보다는 휴식을 취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연습은 죽어라 했으니까, 이틀 동안 푹 쉬고 촬영 때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게 나을 거야.’
이틀의 휴식 후.
안시현은 일찌감치 촬영장으로 향했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내내 대본을 손에 놓지 않으며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준비해 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형님, 다 왔습니다.”
안시현이 하정남의 거듭된 부름에 대본에서 시선을 때며 중얼거렸다.
“응? 벌써 다 왔어?”
“벌써가 아니라 1시간 반 가까이 지났습니다. 집중하시는 거 같아 계속 기다렸는데, 김진모 배우님에게 전화가 와서 부른 거고요.”
“미안. 나도 모르게 정신줄 놨네.”
안시현은 곧장 휴대폰을 확인했다.
촬영장에 도착한 김진모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여러 차례 찍혀 있었다.
이에 안시현이 지체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촬영장 근처에 있는 산책로로 향하자, 매니저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는 김진모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배우님.”
“일찍 왔어?”
“1시간 전에 왔습니다. 일찍 와서 연습해야 할 것 같고 이야기하셔서요.”
“그래? 나도 슬슬 시동 좀 걸어 볼까?”
안시현이 왔음에도 김진모는 좀처럼 대본에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집중하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시현은 말없이 옆 벤치에 앉아 대본을 살펴보았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함께 연습을 시작했다.
촬영장 근처의 산책로는 이른 아침에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두 사람의 주된 연습 장소였다. 근처에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목청껏 연습해도 문제가 없다는 게 최고의 장점이었다.
그렇게 연습하기를 3시간.
촬영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정남과 김진모의 매니저가 산책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30분 후에 촬영 시작한다고 합니다. 슬슬 준비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진모야, 우리 메이크업 받으러 가야겠다.”
“아, 대본 검토할 시간 얼마 안 남았네. 잘되려나 모르겠다.”
“청심환이라도 주랴?”
“됐네요. 엄살도 못 떨겠네.”
나란히 메이크업을 받는 가운데, 안시현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김진모에게 물었다.
“잘할 수 있어?”
“내 걱정 말고 너나 잘하세요. 눈물 콧물 다 쥐어짜게 해 줄 테니까.”
“이야. 자신감 넘치는데?”
“난 원래 자신감 빼면 시체야. 그리고…… 이렇게 죽어라 연기했는데 자신감 없는 게 말이 되냐.”
“하긴. 우리가 좀 많이 연습하긴 했지?”
지난 이틀간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안시현과 김진모는 주요 신의 촬영이 다가올수록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흔히 말하는 명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절정의 컨디션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습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렇기에 김진모가 당당하게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
메이크업이 끝난 뒤.
안시현과 김진모가 나란히 촬영장으로 향했다.
김진모는 대본을 손에 쥔 채 최창국과 대화를 나누며 동선을 체크했다. 안시현은 낚시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옆으로 다가온 하정남은 들뜬 듯한 기색의 안시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이 촬영을 지켜보며 이렇게 들뜬 거 처음 뵙니다. 김진모 배우님의 오열 연기가 기대되십니까?”
“정남이 너, 진모가 오열하는 거 직접 본 적 없지?”
“네. TV에서만 봤습니다.”
“그래? 그럼 이게 필요할 거야.”
안시현이 하정남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눈물 콧물 질질 짜게 만드는 오열 연기가 어떤 건지 보면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