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97화>
197화. 그게 오늘이었구나
김진모는 대본을 손에 쥔 채 촬영이 시작되기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분주하게 소품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에게 일절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준비됐어요, 진모 씨?”
“5초 안에 눈물 쥐어짤 수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바로 들어가도록 하죠.”
최종적으로 동선을 체크한 이후, 최창국이 카메라 감독의 옆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액션!”
최창국의 사인과 함께 김진모의 연기가 시작됐다.
쏴아아아.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환이 건물 옥상에 홀로 무릎을 꿇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자신이 나장미에게 선물해 줬던 목걸이를 손에 쥔 채로 말이다.
“장미…….”
이환은 한참 동안 넋을 놓은 채 나장미를 부르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불과 몇 분 전.
자신의 눈앞에서 나장미가 성불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목걸이를 손에 쥔 채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자신을 안아 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장미는 이현과 이환 형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없어져야 악귀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스스로 성불을 결정했다.
나장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환이 그 사실을 받아들인 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펜던트를 열었을 때였다.
팬던트 안에는 사진 하나가 곱게 접힌 채 들어 있었다. 목걸이를 선물해 줄 당시 같이 줬던 이환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이환이 접힌 사진을 폈다.
“아아…….”
사진 뒤에 영기로 적어 놓은 문구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의식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
영기로 적힌 글씨는 이환이 확인한 직후 천천히 흐릿해져 갔다. 글씨를 적어 놓았던 나장미가 성불했기에 영기를 불어넣을 수 없어서였다.
“아, 안 돼. 안 된다고!”
이환이 사진을 나장미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어떻게든지 글씨가 사라지지 않게 막고 싶었지만, 나장미를 제외한 귀신들은 보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이환에게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돌려줘, 제발.”
이내 이환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진심을 다해 읊조렸다.
“어떻게든지 의식을 되찾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어. 의식을 되찾으면 진짜로 결혼하자고, 함께 미래를 그려 나가자고 약속했어. 내 도화지는 장미가 있어야지만 채울 수 있는데, 이젠…… 장미가 없네.”
이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이환은 나장미가 성불했음을, 자신과 형을 지키기 위해 나장미가 희생을 했음을 받아들이게 됐다.
“뭐든지 다 할게. 팔다리를 가져가도 좋고, 눈이 멀거나 듣지 못하게 되도 좋아. 장미만 돌아올 수 있다면 뭐든지 다 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자신이 형처럼 퇴마사의 길을 걸었다면,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장미가 희생하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나장미와 연관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수많은 선택이 후회로 다가왔다. 지독한 무기력함을 느끼며 끝끝내 이환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제발…… 장미를 돌려줘. 돌려달라고!”
이환이 오열했다.
서글픈 울음소리가 빗소리에 희석됐다. 나장미를 떠나보낸 이환은, 울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감정을 토해 내는 걸 멈추지 못했다.
* * *
김진모는 데뷔 후 두 번의 연기대상과 한 번의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안시현과 더불어 동년배의 배우 중에서는 연기력과 커리어 모두 최고라고 평가받는다. 스타일이 전혀 다른 안시현만이 그의 유일한 비교 대상이다.
안시현의 가장 큰 장점이 어떤 배역이건 대본과 시나리오에서 튀어 나온 것처럼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 데에 있다면, 김진모의 경우는 감정 표현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김진모는 여러 감정을 효율적으로 잘 표현하는 배우다.
그리고 그중 오열은 전매특허이자 가장 선호하는 표현 방식이다. 오열만큼 쉽게 시청자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법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안시현은 김진모의 오열 연기를 많이 봤다. 심지어는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연기하면서도 몇 차례 눈앞에서 오열 연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안시현은 매번 같은 생각을 했다.
‘아, 저건 진짜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 하겠다.’
김진모와 안시현의 서로의 연기 스타일을 참고하면서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지만, 상극에 가까운 스타일을 완전히 흡수하는 건 불가능했다.
안시현 또한 감정 표현이 다른 배우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고 자신하지만, 김진모의 오열 연기만큼은 따라 하기 힘들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곤 했다.
그만큼 김진모의 오열 연기는 단연 일품이었다.
일단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오열한다. 콧물은 물론이거니와 상황에 따라 침을 흘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지저분하지 않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방금 보여 준 오열 신이 딱 그러했다.
그냥 오열을 했어도 괜찮았을 테지만, 빗속에서 온갖 분비물을 다 쏟아 내며 오열하니 분위기가 예술이었다.
김진모의 폭우 속 오열을 보며 안시현은 생각했다.
‘시청자들에게 이걸 보고도 안 울 거냐고 물어보는 듯이 연기하네. 하여간 대단하다니까.’
잠시 후.
안시현이 속으로 수 차례 감탄하는 사이, 김진모의 오열 연기가 마무리됐다.
“OK.”
김진모의 연기를 유심히 치켜보던 최창국은 망설이지 않고 OK사인을 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의 NG도 발생하지 않았다.
중요한 신에서 김진모가 원 테이크를 해낸 것이다.
OK 사인과 함께 살수기의 작동이 멈췄다.
수건을 가지고 자신에게 달려온 매니저를 바라보며 김진모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괜찮았어?”
“저 눈물 흘린 거 안 보입니까, 형님.”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
“작정하고 할 때는 버티기 힘듭니다. 형님, 가서 옷 갈아입으시죠.”
“응. 그래야겠다. 본부장님, 저 오늘은 더 촬영 없죠?”
“네. 오늘은 끝입니다.”
“그럼 이제 마음 편하게 다음 촬영 구경해야겠네요.”
김진모가 안시현과 시선을 마주하며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말이 아닌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내가 잘했으니 너도 잘하라는 듯한 눈빛에, 안시현 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모가 현장을 떠난 뒤.
안시현은 자신의 옆에서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써 눈물을 참으려 노력하는 하정남을 바라보았다.
“장난 아니지?”
“전 여전히 형님이 가장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열만큼은 김진모 배우님이 최고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응. 저 자식 오열은 명품이지.”
안시현은 흔쾌히 김진모의 연기를 인정했다.
방금 전 보여 준 오열 연기는,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히리라.
다만…….
“그렇다고 밀릴 생각은 없지만.”
김진모의 연기를 인정한다는 말이, 자신이 곧이어 촬영할 신에서 그보다 못한 연기를 보여줄 거라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최소한 어깨는 나란히 해야지.’
* * *
김진모 다음은 안시현의 차례였다.
촬영이 시작하기 전, 안시현은 최창국에게 딱 10분 동안만 현장에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10분이요?”
“네. 집중할 시간이 좀 필요해서요. 그 후에 바로 촬영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최창국의 지시에 의해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를 끝마치고서 현장을 벗어났다. 촬영이 진행될 현장에는 안시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됐다.
10분 동안 안시현은 대본을 눈을 감고 있거나,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스태프와 배우들이 현장에 다시 나타낫다.
‘분위기가 달라졌어.’
그사이 옷을 갈아 입고 온 김진모는 안시현의 변화를 대번에 눈치챘다.
‘한두 번 작정하고 몰입도를 끌어올리겠다고 하더니, 역시나 그게 오늘이었구나. 하긴, 이현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신 중 하나니까.’
지금까지 이현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안시현은 과하게 몰입을 하지 않았다.
기존처럼 적정선을 유지하면서도 캐릭터의 매력을 모두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해기 때문이다.
다만 몇몇 신은 예외였다.
‘인생 연기를 뛰어넘으려면, 핵심 신들을 촬영할 땐 몰입도를 끌어올려야만 해.’
몰입도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머릿속에 그려 둔 이미지대로 이현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최대한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이었다.
안시현은 회귀 전 이현 배역을 연기한 배우의 인생 연기를 뛰어넘기 위해, 새로운 명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과감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김진모가 낚시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구경하는 맛이 나겠어. 내가 연기할 때 시현이가 이런 기분으로 지켜봤겠지? 자. 빨리 날 좀 만족시켜 봐.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한 연기를 보여 달라고!’
안시현이 얼마나 좋은 연기를 보여줄지, 연습할 때와는 무엇이 다를지, 간혹 보여주는 소름 끼치는 몰입도를 이번에도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김진모는 한시라도 빨리 촬영이 시작되기를 바랐다. 안시현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해서 몸이 한껏 달아올랐다.
다행히 촬영이 시작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진모의 등장으로부터 몇 분 후.
“액션.”
최창국의 사인과 함께 촬영이 시작됐다.
“나장미…….”
한 병원의 특실.
이현이 굳은 표정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한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나장미였다.
사고 이후 몇 년 동안 나장미는 혼수상태였다.
이현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문자 그대로 우연이었다. 악귀에 대해 쫓다가 대외적인 발표와 달리 나장미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래서 성불을 하지 못한 거였구나. 아니,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나장미는 성불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육신은 죽지 않았고, 그녀의 영혼은 그저 유체이탈을 한 상태로 구천을 떠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너를 살릴 수 있다.”
이현은 퇴마사다. 그것도 부모님의 재능을 온전히 물려받은 최고의 퇴마사다.
그는 혼수상태로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몸에 집어넣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이유야 어쨌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인 건 분명하고, 상황이 어쨌건 간에 귀신은 모두 소멸시켜야 한다는 게 퇴마사로서 이현의 신념이었으니까.
그런 이현의 신념이 나장미를 앞에 두고서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싫지 않다. 환이와 제법 잘 어울리는 반려라고 생각한다.”
지난 1년.
이환과 함께 지내는 나장미를 바라보며 귀신에 대해 극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던 이현은 많이 변했다.
적어도 나장미와 관련해서만큼은 말이다.
그녀를 소멸시킬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성불을 시켜 주기 위해서 노력하게 됐다.
그러던 중.
나장미가 혼수상태라는 걸 알고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악귀의 정체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네가 살아남으면 악귀를 소멸시킬 수 없다. 너만 없으면 악귀를 소멸시킬 수 있다. 그래. 너만 없다면…….”
이현이 나장미의 산소 호흡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대로 산소 호흡기를 떼면 나장미는 죽는다. 육신을 잃은 나장미가 없어지면, 악귀를 소멸시킬 수 있다. 그토록 찾아내면 악귀와의 악연을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현은 끝내 산소 호흡기를 떼지 못했다.
쓴웃음을 흘리며, 고른 호흡을 내뱉고 있는 나장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방문을 열고 나서기 전.
이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난, 어찌해야 되느냐. 네 존재가 악귀를 살려 주고 있으면, 나는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