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97화 (197/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98화>

198화. 눈물 나게 고맙네요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가벼운 분위기와 무거운 분위기를 적절하게 오가는 드라마다.

초중반부는 전체적으로 가볍고, 이환과 나장미의 로맨스 위주로 흘러가며 간간이 무거운 분위기가 나오는 반면, 후반부에는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다.

그 분기점이 바로 방금 전 안시현이 연기했던, 이현이 나장미와 악귀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고서 그녀를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신이다.

그동안 귀신이라면 질색을 하고 소멸시켰던 이현이 처음으로 그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

거기에 조연임에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보여 줘야 한다는 조건까지 더해졌다.

부담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OK. 이대로 가겠습니다.”

안시현은 원 테이크로 OK 사인을 받아 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진모에 이어 연속으로 원 테이크를 해냈음에도 안시현은 무덤덤했다. OK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최창국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했고, 자신에게 다가와 물을 건네는 하정남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괜찮았어?”

“최고였습니다, 형님. 전 정말로 겨울 씨 대역 맡은 배우분 목 졸라서 죽이는 줄 알았다니까요.”

“오우. 그거 완전 극찬인데?”

원 테이크를 해냈다고 호들갑을 떨 만한 시기는 지난 지 오래이지만, 주요 신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나치게 반응이 무덤덤한 게 사실이었다.

이는 김진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란히 원 테이크를 해냈음에도 두 사람의 반응은 지켜보는 스태프들이 당황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당연한 결과에 호들갑 떨 이유가 없지.’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촬영 기간 내내, 김진모와 안시현은 함께 숙소에서 동고동락하며 최선의 연기를 위해 쉼 없이 연습을 반복했다.

또한 주요 신의 촬영 전 이틀간의 휴식으로 그동안 쌓인 피로를 해소하며 집중력을 끌어올릴 발판을 마련했다.

철저하게 준비했기에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이는 원 테이크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됐다.

‘나랑 진모는 잘 해냈는데…… 겨울이가 문제네.’

해외 로케이션 전 남은 주요 신은 하나, 김겨울이 단독으로 촬영하는 신이다. 이틀 후에 촬영할 예정이었고, 이를 위해 김겨울에게는 휴식이 주어졌다.

주요 신의 촬영을 위해 디렉팅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고 김희숙 작가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의 퀄리티도 퀄리티지만, 아무쪼록 촬영하면서 멘탈이 안 나갔으면 좋겠네.’

안시현은 이틀 후 있을 촬영에서 김겨울의 멘탈이 나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이틀 후 촬영장.

김겨울은 한 신의 OK 사인을 받아 내기 위해 꼬박 반나절이 넘게 촬영에 임해야 했다.

“컷. 다시 가겠습니다.”

“겨울 씨, 지금 힘 너무 많이 들어갔어요.”

“힘을 빼라는 말이 감정 표현을 대충 하라는 말이 아니잖습니까.”

“자, 자. 잠깐 쉬었다 다시 가겠습니다.”

김겨울이 기대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 준 건 사실이다. 실제로 그 덕분에 김희숙 작가는 촬영 내내 그녀에게 그리 많은 디렉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번 신은 김겨울이 촬영해야 하는 신 중 가장 허들이 높았다.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이 정해 놓은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에 보여 줬던 연기력 수준으로는 부족했다.

촬영 이틀 전에 디렉팅을 하고 시간을 주었음에도 난이도가 높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겨울이가 생각보다 멘탈이 튼튼하네.’

NG가 반복되면 지치거나 정신적으로 흔들릴 법함에도 김겨울이 잘 버텨 냈다는 것이다.

아니, 버티는 걸 넘어 여유마저 있어 보였다.

촬영을 지켜보던 안시현과 김진모에게 간간이 질문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러니까 『내 아내는 처녀귀신』 이후로 출연하는 작품마다 줄줄이 대박 났지.’

김겨울의 연기력이 일취월장한 건 사실이지만, 동년배 배우 중 그녀보다 더 좋은 연기력을 보여 주는 배우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김겨울이 더 좋은 배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연기력이야 쉼 없는 노력을 통해 발전하는 게 가능하지만, 어느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연기에 집중하는 정신력은 타고난 거라고 봐야 한다.

이는 김진모의 장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해 지기 전에 끝나려나?”

“으음. 분위기 봐서는 그럴 것 같은데? 이미 3분의 2는 촬영이 끝났잖아.”

최창국은 한 신을 여러 번 나눠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중요한 신이니만큼 호흡이 길어지면 김겨울로부터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 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나눠서 촬영함에도 NG가 지겹도록 났지만…….

다행히 슬슬 끝이 보이고 있었다.

오후 5시.

“OK.”

김겨울은 마침내 최창국으로부터 OK 사인을 받아 내는 데에 성공했다.

꼬박 32번이나 NG가 난 직후였다.

“수고했어요, 겨울 씨.”

“아…….”

OK 사인이 난 직후, 김겨울은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서 있을 힘조차 없어요.”

“이해해요. NG가 30번이 넘게 났으니까요. 그래도…… 결과물은 기대 이상으로 좋을 거예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개고생해서 촬영한 신의 퀄리티가 기대 이하라면, 본방송 챙겨 보다가 대성통곡할 거 같거든요.”

“장담하는데, 저희 드라마의 명장면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거예요.”

김겨울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촬영 강행군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OK 사인이 나고 긴장이 풀리자 서 있기가 힘들어 주저앉았을 정도다.

그럼에도 김겨울은 성취감을 느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촬영한 이후 처음으로 고난이도 디렉팅을 받았다. 한 신을 촬영하면 두 자릿수 NG가 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게 고생해서 촬영한 결과물이 명장면으로 남을 것 같다고 하니 기분 좋은 게 당연했다.

한편.

안시현과 김진모는 OK 사인이 나자마자 저녁에 있을 촬영 준비를 위해 메이크업에 들어갔다.

한창 메이크업을 하던 중.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거의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게 출국할 수 있겠는데?”

“그러게.”

한국에서 촬영해야 할 주요 신의 촬영이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아직 촬영해야 할 신들은 한참 남았지만, 해외 로케이션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지는 신들이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주요 신의 촬영이 순조롭게 마무리된 상황.

안시현과 김진모는 기분 좋게 해외 로케이션을 준비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   *   *

11월 초.

첫 방영을 정확히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스위스 해외 로테이션을 떠났다.

스위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

김진모가 대본을 검토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한동안 울 거 『내 아내는 처녀귀신』 촬영하면서 다 울게 생겼네.”

드라마 후반부.

이환의 오열 신이 몇 차례 있다. 김진모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후반부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몇몇 오열 신을 배치한 것이다.

김진모는 그동안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오열 연기를 선보이며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한 작품에서 여러 번 오열 연기를 한 적은 없었다.

오열 신은 한 번 보면 감동이지만, 여러 번 보면 처음과 같은 감동을 주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어느 드라마든 한 캐릭터의 오열 신이 여러 번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김희숙 작가는 과감하게 이환이 오열하는 장면을 다수 배치했다. 최창국이 연출을 통해서 보완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이다.

다만 연기를 하는 김진모의 입장에서는 다소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스위스 해외 로케이션에서는 연달아 두 장면이나 있는 터라 더더욱 그러했다.

한 번만 해도 진이 빠지는 게 오열 신인데, 그걸 연속해서 반복하면 실신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될 정도였다.

그에 최창국은 그런 김진모의 걱정을 덜어 줬다.

“걱정하지 마세요. 첫날 촬영하고, 귀국 전에 한 번 더 촬영할 테니까요.”

“하하하. 눈물 나게 고맙네요. 젠장.”

*   *   *

스위스 베른의 한 호텔.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예약해 놓은 방에 짐을 풀었다. 배우들의 경우 기본적으로 1인 1실이었지만, 김진모와 안시현은 방 하나를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짐을 푼 김진모가 침대에 드러누운 채 미소를 지었다.

“아, 이러고 둘이 한방 쓰니까 옥탑방에서 살 때 생각난다. 그때 참 좋았는데 말이야.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창문 쪽 안 보려 난리치고, 옥탑방에 살면서 고소공포증 때문에 전망을 한 번도 못 본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겼어. 그치?”

김진모는 데뷔 전후의 추억을 떠올렸다.

안시현과 옥탑방에서 함께 살 당시를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응, 아니야. 거긴 심심하면 바퀴벌레 나오고, 비 오면 천장이 눈물 흘려 댔고, 방음 안 돼서 연습도 마음대로 못 했거든? 옥탑방이 숙소처럼 좋았으면 너랑 몇 년은 더 살았을 걸?”

안시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추억 보정을 통해 다분히 미화된 김진모의 기억에 제대로 팩트 폭력을 가해준 것이다.

이에 김진모가 혀를 찼다.

“에잉. 추억 보정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매정한 놈.”

“됐고, 연습이나 하자. 저녁 식사 전까지 시간 많이 남았잖아.”

“그럴까?”

김진모와 안시현은 저녁식사 전까지 연습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장 다음 날 오후에 김진모의 오열 신 촬영이 예정되어 있기에 연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창 연습을 하던 중.

똑똑똑.

누군가가 두 사람이 머무는 방에을 노크했다.

“스태프인가?”

“저녁 식사 전에 찾아올 일이 없을 텐데? 아, 겨울이일지도 모르겠다. 해외 로케이션 기간 동안 같이 연습하면 좋겠다고 그랬거든.”

“그래?”

안시현은 노크를 한 사람이 김겨울이라 확신하고서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연 직후.

안시현은 진심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스위스 베른에 있을 리가 없는 사내가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김진모는 사내의 방문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이 왜 여기에…….”

그랬다.

김진모와 안시현이 머무는 방을 찾아온 건, 은퇴 후 프랑스의 별장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어야 할 기욤 뒤자르댕이었다.

“봉쥬르. 깜짝 놀랐어요?”

“당연히 놀랐죠. 아니, 오실 거면 연락이라도 주시지 그랬어요. 저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숨기신 거예요?”

“창국과 진모가 숨기자고 했어요. 이러면 시현의 놀란 표정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요. 놀란 표정, 연기할 때 말고는 보기 어렵잖아요.”

“장난이 짓궂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과 가볍게 포옹하며 간만의 만남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잠시 후.

방 안으로 들어온 기욤 뒤자르댕은 자신이 왜 스위스로 오게 됐는지 그 목적을 밝혔다.

“창국이 저에게 부탁한 게 두 가지가 있었어요. 그거 때문에 오게 된 거예요.”

“두 가지요?”

“네. 하나는 OST를 불러 줄 가수를 섭외해 달라는 거였어요. 스위스에서 촬영한 장면이 나올 때 테마 곡을 불러 줄 가수를 찾아 달라고 해서, 스위스에 있는 지인들과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죠.”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도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스위스에서 촬영한 신들의 테마 OST 녹음을 스위스 현지 가수에게 맡겼다.

청아한 음색이 매력적이었던 해당 가수의 노래는, 음원 공개 후 한동안 음원 차트 최상위권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으며 큰 인기를 누렸었다.

따라서 기욤 뒤자르댕의 말에 놀랄 이유가 없었다.

가수를 섭외하는 방식이 발품을 파는 것에서, 기욤 뒤자르댕에게 부탁하는 걸로 바뀐 것뿐이니까.

“그랬군요. 다른 하나는요?”

“저에게 카메오로 출연해 줄 수 있냐 그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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