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99화>
199화. 조건이 있어요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위스에서 촬영하는 신 중 기욤 뒤자르댕이 카메오로 출연할 만한 신이 있는지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 한 신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영화 촬영 신이 있었지.’
나장미의 성불 이후.
이환은 나장미가 남겨 놓은 유산을 받기 위해서 스위스를 방문한다. 그리고 베른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전에 나장미와 함께 스위스의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를 추억한다.
그러던 중.
이환은 베른의 한 공원에서 저예산 영화가 촬영 중인 걸 보게 된다.
동시에 나장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아저씨는 꿈이 뭐야?”
“꿈? 큰 병 안 걸리고 무탈하게 살다 죽는 거.”
“되게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이루기 어려운 목표네. 난 중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배우가 되고 싶었어.”
“배우?”
“응. 나 연극부였거든. 길거리 캐스팅을 받은 적도 있고, 오디션도 몇 번 봤었어.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싹 다 포기하게 됐지만 말이야. 그래서 그런가? 촬영하는 거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져. 이젠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꿈이 발목을 잡는다랄까.”
이환은 벤치에 앉아 영화 촬영을 지켜본다.
촬영을 지켜보며 나장미를 떠올린다. 당장이라도 뒤에서 나타나 자신을 안아 줄 것 같지만, 다시 돌아올 리가 없는 그녀를 생각하며 숨죽여 오열한다.
최창국은 이 신에서 저예산 영화를 촬영하는 감독 역할로 기욤 뒤자르댕이 출연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림은 괜찮겠네. 기욤 감독님이야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니까 그 자체로도 이슈가 되겠지.’
기욤 뒤자르댕는 『Timeless』를 통해 한국에도 얼굴이 꽤나 알려졌다. 따라서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화제성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 물론 공짜로 출연해주는 건 아닙니다. 출연료는 받지 않기로 했지만, 그 대신 받기로 한 게 좀 있어요.”
물론 조건이 있었다.
레이첼 스타이너.
기욤 뒤자르댕의 제자이자 『브레이킹 월드』에 이은 아포칼립스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의 제작 준비에 한창인 그녀에게 도움을 달라는 게 기욤 뒤자르댕이 내건 조건이었다.
“레이첼이 아역 배우랑 단역 배우가 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JM액터스 쪽에서 이 부분을 해결해 주기로 해서, 제가 이렇게 돕고 있는 거죠.”
“현역일 때는 절대로 안 도와주실 것 같더니, 은퇴하고 나서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레이첼이 부탁하는 게 아니라면 소일거리조차 없으니까요. 가끔씩 노는 게 지겨울 때마다 돕는 거죠.”
기욤 뒤자르댕은 은퇴 후 별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들, 특히나 손녀와 함께 보내는 여유로운 시간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다만 가끔은 그 여유가 지루할 때도 있었다.
이는 기욤 뒤자르댕보다 먼저 은퇴한 곽상필 또한 겪은 문제였다. 항상 바쁘게 살다가 푹 쉬다 보면 지루함을 느낄 때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곽상필은 그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JM액터스의 고문 역할을 자청했다.
자신이 원할 때, 혹은 JM액터스에 자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때만 일손을 거드는 식이다.
기욤 뒤자르댕의 경우 곽상필처럼 어딘가에 묶여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제자인 레이첼 스타이너가 부탁할 때 간혹 일을 도와주기로 한 것 같았다.
안시현이 간만에 만나게 된 기욤 뒤자르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유가 무엇이건,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 이후 오랜만에 보는 것이기에 반가운 감정이 앞섰다.
“간만에 와인 한잔하면서 근황 이야기나 할까요?”
“오, 좋죠. 근데 전 백수인데, 와인은 아직 창창한 현역인 시현이 사는 거죠?”
“하하하. 당연하죠.”
“와인? 나도 갈래!”
와인이라는 말에 김진모가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세 사람은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와인바로 향했다. 베른에서 머무는 동안 기욤 뒤자르댕이 간간이 들르고 있는 장소였다.
“주인장이 제 팬이라서 서비스가 아주 좋아요. 안주 맛이 기가 막힐 거예요.”
와인과 안주를 주문한 뒤.
기욤 뒤자르댕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 진모나 시현 중 한 명이라도, 이왕이면 둘 다 할리우드에 진출하기를 바랐어요. 더 큰 무대에서 두 사람의 연기력을 마음껏 뽐내기를 바랐는데……. 한 명은 전혀 관심이 없고, 한 명은 기껏 진출한 뒤에 온갖 러브콜을 다 거절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네요.”
기욤 뒤자르댕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몇몇 한국 배우의 경우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일곱 명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그중에는 당연히 안시현과 김진모의 이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나 안시현은 『Timeless』를 통해 자신의 연기가 할리우드에서 통한다는 걸 증명해 보였지만, 차기작은 할리우드가 아닌 한국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후에도 할리우드에서 연기할 생각이 없다는 걸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단호하게 밝혔다.
이는 김진모 또한 비슷했다.
두 사람 다 할리우드 진출에 대한 관심이 다른 배우들에 비해 크지 않았고, 정말 마음에 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할리우드에 관심을 둘 생각이 없었다.
기욤 뒤자르댕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기욤 뒤자르댕은 할리우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안시현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간만에 만나 굳이 왜 이야기를 꺼낸 건지 대번에 깨달았다.
“좋은 제안이 있나 보네요.”
“네. 이번에는 시현이 아니라 진모에게 제안을 할 거지만요.”
와인을 마시며 대본에 시선을 두고 있던 김진모는, 기욤 뒤자르댕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본능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저요?”
“네. JP스튜디오에서 투자할 영화가 하나 있는데, 감독이 주인공으로 진모를 원한다고 하더라고요.”
“으음. 할리우드 진출은 아직까지 크게 관심이 없어서요. 그다지 매력적인 제안은 아닌 것 같네요.”
“보통이라면 그렇죠. 하지만 대한민국 국적의 감독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이라면요?”
순간 김진모의 두 눈이 커졌다.
할리우드 영화에 캐스팅되는 것과 한국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에 캐스팅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 작품인가 보네.’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이 말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대번에 깨달았다. 회귀 전에는 워낙 유명세를 탔던 작품이다 보니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김진모와 기욤 뒤자르댕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할리우드 진출은 자신이 왈가왈부할 게 아닌, 김진모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욤 뒤자르댕이 시놉시스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휴식 취할 때 한번 읽어 봐요. 시놉시스가 마음에 들면 귀국 전까지 이야기해 줘요. 감독과의 미팅 자리를 마련할게요.”
“설명보다는 시놉시스라……. 어떤 감독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에 자신이 있으신가 보네요.”
“자신 있고말고요. 개인적으로는 할리우드에서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물론 진모가 캐스팅된다면요.”
김진모가 미소를 지은 채 시놉시스를 손에 쥐었다.
“검토해 보고 귀국 전에 답할게요.”
* * *
베른에서의 촬영은 하루 종일 촬영해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바쁘게 진행됐다.
해외 로케이션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일정도 일정이지만, 비용 문제 때문이라도 마냥 여유롭게 촬영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해외 로케이션 마지노선 기간은 3주.
그 안에 마무리해야 귀국해서 방영 전 최종 예고편에 일부 장면을 포함시키는 게 가능하고, 남은 촬영 일정을 다소 여유롭게 운영하는 게 가능하다.
‘일정이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제작비 부담이 없는 게 어디야.’
TV Y는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고, 실제로 넉넉하게 편성한 제작비를 통해서 대놓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해외 로케이션 일정이 빠듯한 건 사실이지만, 돈 걱정 없이 좋은 환경 속에서 촬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임이 분명했다.
열역한 환경에서 해외 로케이션을 진행하거나, 제작비가 부족해 울며 겨자 먹기로 국내에서 대체할 만한 장소를 찾는 작품들 또한 꽤나 많으니까.
심지어 다소 빡빡해 보였던 일정 또한, 막상 촬영이 끝날 즈음 되자 여유 시간이 남게 됐다.
김진모가 여러 차례 원 테이크를 보여 준 덕분이었다.
김진모의 연기력이야 한국에서도 기복 없이 안정적이었고, 주요 신에서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연기력을 폭발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 집중력을 해외 로케이션 내내 발휘하고 있었다.
다만 한국에서와는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이유가 다소 달랐다.
‘시놉시스를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촬영에 집중하다니, 어지간히 궁금하긴 하나 보네.’
김진모는 촬영을 하는 동안 기욤 뒤자르댕으로부터 건네받은 시놉시스를 단 한 번도 살펴보지 않았다.
괜히 시놉시스로 시선을 돌렸다가 정작 촬영에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다 생각했고, 촬영을 모두 끝낸 뒤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검토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마지노선 3일 전.
“OK! 다들 수고했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OK 사인을 낸 뒤, 최창국이 미소를 지은 채 박수를 치며 예정보다 빨리 해외 로케이션이 마무리됐음을 자축했다.
“귀국 전까지는 각자 자유 시간을 보내도록 하죠. 전 맛집 탐방을 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 분?”
“저요!”
“역시 해외 로케이션은 맛집 탐방이죠!”
스태프와 배우들이 귀국 전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는 사이, 김진모는 안시현과 함께 숙소에 틀어박힌 채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안시현은 가족들과 통화를 하거나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며 느긋하게 휴식을 즐겼고, 김진모는 기욤 뒤자르댕으로부터 건네받은 시놉시스를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김진모는 좀처럼 시놉시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시놉시스, 제법 마음에 드나 보다?”
“귀국 전에 대답해야 하니까 꼼꼼하게 검토해 봐야지.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면…… 완성된 시나리오를 받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
“완성된 시나리오마저 마음에 든다면?”
“고민할 거 있겠어? 내일이라도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 실어야지.”
『브레이킹 월드』의 공개 오디션에서 류성웅에게 밀려 알버트 리 배역을 따내지 못한 뒤, 김진모는 잠정적으로 할리우드에 대한 관심을 껐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면 할리우드에 진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김진모가 지금은 기욤 뒤자르댕이 건네준 시놉시스를 보느라 정신이 팔렸다. 검토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푹 빠져 있고, 간간이 입꼬리도 올라가는 게 눈에 띄었다.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은 김진모가 기욤 뒤자르댕에게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확신했다.
며칠 뒤, 귀국 당일 아침.
김진모가 조식을 먹고 기욤 뒤자르댕과 함께 호텔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온 뒤, 김진모는 지겹도록 많이 본 시놉시스를 꺼냈다.
“시놉시스 좋더라고요.”
“몇 년 동안 할리우드 진출을 고려하고서 작업한 결과물이니까요. 이미 시나리오도 모두 완성되어 있어요. JP스튜디오에서 보내 줘서 봤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다 봤을 정도예요.”
“저에게 시놉시스를 보여 주시면서 자신감이 넘쳤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네요.”
“그래서, 답은 정했나요?”
김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준비해 온 대답을 꺼내 들었다.
“이 작품, 할게요. 귀국하는 대로 감독님과 미팅 자리 만들어 주세요.”
안시현이 말한 대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출연하지 않을 작품의 시놉시스를 이틀 넘게 푹 빠져서 볼 이유가 있겠는가.
“단, 조건이 있어요.”
다만 순순히 캐스팅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