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02화 (20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03화>

203화. 고생 많았습니다

한 신의 촬영만을 남겨 둔 당일.

안시현은 이른 새벽에 숙소를 빠져나왔다.

평소와 달리 대본조차 손에 쥐지 않은 채 촬영장 주위의 산책로를 거닐다가, 동이 틀 무렵이 돼서야 다시 숙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때마침 잠에서 깬 김진모와 마주쳤다.

“산책 갔다 와?”

“어. 잠이 안 와서 좀 걷다 왔어.”

“심란해?”

“어. 한 신만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좀 싱숭생숭하네.”

“그럴 만도 하지. 너나 나나, 이번 작품에 대한 애착이 유독 강했잖아. 난 오죽하면 김 작가님한테 대하 드라마 수준으로 연장하면 안 되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른 적까지 있다니까.”

김진모와 안시현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유독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강한 애착을 보여 줬다.

김진모는 이환이 자신의 인생 캐릭터가 되어 줄 거라고 확신했기에, 안시현은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회귀 전 이현 캐릭터의 잔상을 지우기 위해 말이다.

결과적으로 안시현은 회귀 전의 잔상을 지워 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회귀 전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이현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한 안시현의 열연이 존재했다.

조연임에도 주연과 대등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게 컸다.

색다른 스타일의 조연 활용법과 이를 돋보이게 해 주는 안시현의 연기력에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다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안시현의 배우 인생 처음으로 촬영장 근처에 숙소를 구했다.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이 간간이 휴식을 취하라고 배려해 주지 않았다면, 촬영 기간 내내 연습에만 매진했을지도 모른다.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라는 작품이, 이현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소중하고 간절했다.

그래서일까?

마무리를 앞둔 안시현의 감정은 복잡했다.

김진모가 말한 것처럼 연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물론 연장을 할 리는 없고, 해서 안 된다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완성도를 포기하면서까지 연장을 하는 건 작품을 망치는 길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 작품 끝나면 한동안 또 쉬려고. 이현을 내려놓는 데에 시간 좀 걸릴 거 같아.”

김진모가 실소를 흘리며 안시현의 어깨를 두들겼다.

“푹 쉬어. 아, 부럽다. 나도 오디션만 아니라면 이환의 잔상을 남겨 둔 채 계속해서 연기를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진모 넌 데뷔하고 나서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 같네. 길어야 4달 정도인가?”

“딱 그 정도 쉬어 본 거 같아.”

“캐릭터가 머릿속에 남는 경우 없었어? 난 여러 번 있었는데 말이야.”

“거의 매 작품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상태로 다작을 하는 게 가능해?”

“가능하지. 나만의 비법 가르쳐 줄까? 간단해. 새 캐릭터와 정분나면 돼.”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기가 길어지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표현한 김진모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됐다.

“너무 길지는 않을 거야.”

*   *   *

“후우…….”

촬영에 임하기 전, 안시현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평소와 달리 몰입까지 걸리는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안시현이 눈을 떴다.

“액션.”

그와 동시에 촬영이 시작됐다.

이현이 각종 퇴마 도구들을 꺼내 들었다. 그 상태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숨 쉬고 있는 나장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20년을 기다렸다. 부모님을 죽인 악귀를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악귀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있었지만…….”

조금씩,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장미의 바이탈 사인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몇 시간이 지나면 나장미는 그대로 숨이 끊어지게 될 터였다.

영혼이 없는 상태의 육신이 맞이하게 될 결말은 단 하나, 죽음뿐이다.

“그 대가로 널 희생시키고야 말았구나.”

이현은 결국 악귀를 소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나장미가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했기에, 악귀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성불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실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혼수상태였던 나장미는 영혼과의 연결 고리가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몇 시간 내로 사망할 터였다

목적은 이뤘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이환은 육신을 찾으면 평생 함께하기로 결심한 반려의 승천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고, 이현은 퇴마사로서의 능력을 사실상 상실하고 말았다.

“미안하다.”

이현이 나장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귀신이라면 질색하고 소멸시키기 급급했던 이현이, 이제는 자신과 동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귀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감정이 복받치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너에게 진 빚은 꼭 갚으마.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반드시 갚으마. 네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이현이 나장미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무엇인가를 그녀의 손에 쥐여 준 뒤, 몸을 돌렸다.

“나나 환이나,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다.”

이현이 문을 열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OK! 이대로 가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최창국이 OK 사인을 냈다.

안시현이 촬영한 마지막 신은 이현이 나장미의 성불 이후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 아파하는 신으로서, 회상이 제법 있다 보니 촬영 분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촬영 분량과 별개로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신이었다.

엔딩의 복선을 까는 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현의 성격이 드라마 초반부와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신이기도 하기에, 나장미를 향한 이현의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관건이었다.

물론 최창국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고,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원 테이크로 끝날 것임을 확신하게 됐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상황에서 안시현의 모습은 이현 그 자체였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안시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새벽 촬영까지 있다고 밥차 불렀습니다. 간식이랑 커피 위주로 준비했으니까, 다들 힘내서 촬영해 주세요. 회포는 촬영을 모두 마무리하고, 포상 휴가 떠나서 마음껏 풀도록 하고요.”

“역시 안 배우님, 센스 있으시다니까.”

“포상휴가 가서는 한잔 같이하실 거죠?”

“네. 당연히 한잔해야죠.”

안시현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이현의 잔상이 머릿속에 계속 남을 것 같았고,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OST만 들어도 왠지 모르게 울컥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후회는 없으니까 된 거겠지?’

다만 후회는 눈곱만큼도 남지 않았다.

회귀 전의 이현을 자신을 뛰어넘었는지는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기에 냉정하게 비교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저『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촬영하는 내내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연기에 대한 호평과 회귀 전보다 더 나은 시청률로서 보답을 받고 있다.

시간이 흘러 이 시간을 돌아봤을 때,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출연한 걸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안시현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시현이『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모든 촬영을 마무리했다.

*   *   *

안시현이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촬영을 마무리하고 열흘 남짓 후.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16화가 최고 시청률 27.7%를 기록했다. 막연한 목표로만 보였던 30% 돌파가 막연한 목표가 아닌 눈앞으로까지 다가온 가운데.

기욤 뒤자르댕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현역 때처럼 취재 열기가 뜨거운 건 아니었지만, 이름값이 있다 보니 제법 관심을 받았다.

게다가 은퇴 후 적극적으로 제자들의 활동을 돕고 있는 것 또한 눈에 띄는 상황이고 말이다.

“어떤 용무로 방한을 하셨습니까? 혹시, 또다시 공개 오디션이 열립니까?”

기자들은 레이첼 스타이너 때처럼 할리우드 작품의 공개 오디션이 진행되고, 그 일정으로 인해 기욤 뒤자르댕이 방한을 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에 기욤 뒤자르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션 열립니다. 제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합니다. 자세한 건 JM액터스에서 조만간 공식적으로 발표할 겁니다. 단, 이번 입국과 오디션은 무관합니다.”

“개인적인 일정이 아니라면 방한 이유를 밝혀 주실 수 있나요? 한국에 있는 기욤 뒤자르댕 감독님의 팬들이 궁금해할 겁니다.”

“한창 열기 왕성했던 시절, 함께 작품을 하지 못해 아쉬웠던 배우가 이제 백수가 될 거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상필과 셋이서 낚시 가기로 했습니다. 아, 시현의 딸에게 선물도 줄 거고요. 공식 일정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개인 일정입니다.”

기욤 뒤자르댕의 방한 목적은 여러 가지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곽상필과 김진석 대표와 함께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는 것이었다.

2014년 1월 초.

JM액터스는 보도 자료를 통해 2월 1일부로 김진석 대표가 대표 이사 자리에서 물러나며, 사장인 박정상이 승진해서 2대 대표 이사가 될 거라고 발표했다.

JM액터스 내부에서는 이미 소문이 꽤나 돈 상황이었고, 인맥이 두터운 연예부 기자들 또한 대부분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럼에도 보도 자료 배포 전까지 JM액터스의 2대 대표이사 선임 건과 관련해서 그 어떤 기사도 나지 않은 채 조용했다.

기자들이 김진석 대표를 배려한 덕분이었다.

김진석 대표는 배우 생활부터 시작해 JM액터스 대표가 되고 오랜 시간 연예계의 질적 성장에 힘써 왔다. 그가 배출한 연기파 배우의 수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합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를 감안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기자들이 자체적으로 엠바고를 한 것이다.

정작 김진석 대표는 언론이 뭐라 하건 말건, 기욤 뒤자르댕과 곽상필과 셋이서 지겹도록 낚시를 하며 여유를 만끽할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말이다.

입국 당일 저녁.

김진석 대표와 곽상필과 기욤 뒤자르댕이 티타임을 가졌다. 허브티를 한 모금 마신 김진석 대표가 피식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옛일이 떠오르는군. 처음 만났을 때는 다들 젊었는데 말이야.”

“이제는 술도 마음대로 못 마실 정도가 됐지만요.”

“그래도 낚시는 즉석에서 회 떠 먹는 재미고, 회에는 소주가 빠질 수 없잖습니까?”

“간간이 반주나 하자고. 주치의가 되도록 술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야. 쯧.”

“프랑스에 있는 와인을 다 거덜 낼 기세였던 형님이 절주라니, 세상 참 무상합니다.”

기욤 뒤자르댕이 입봉 후 네 작품 연속으로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고, 생애 최초로 황금뿌리상을 수상했을 당시.

곽상필 또한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그리고 그 작품은, 김진석이 배우로서 마지막으로 출연한 작품이기도 했다.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고, 출연 분량을 다 합쳐 봐야 5분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적었다.

하지만 존재감만큼은 엄청났다.

신 스틸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며 영화의 긴장감을 높여 줬고, 황금영화제에 그 모습을 본 기욤 뒤자르댕이 곽상필과 김진석 대표에게 먼저 접근했다.

그때부터 기욤 뒤자르댕과 곽상필, 그리고 김진석 대표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흘렀다.

곽상필과 기욤 뒤자르댕은 은퇴했고, 김진석 대표 또한 말이 회장이지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꿈과 목표가 넘쳐났던 두 감독과 한 배우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첫 만남을 떠올리며 김진석 대표가 피식 웃었다.

어느새 백발이 성한 곽상필과 풍성했던 금발이 탈모로 인해 죄다 빠진 기욤 뒤자르댕을 보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절감했다.

“그러게. 시간 참 많이 지났네. 그래도 좋지 않냐?”

“뭐가 말입니까?”

“일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셋이서 그 좋아하는 낚시 원 없이 할 수 있잖냐.”

김진석 대표의 말에 곽상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면 공식적으로 JM액터스의 대표 이사에서 물러나게 될 김진석 대표가 어떤 생각일지, 먼저 은퇴한 경험이 있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곽상필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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