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04화>
204화. 다시 한번
2월 1일.
김진석이 JM액터스의 대표 이사에서 물러나고, 박정상이 2대 대표 이사로 취임했다.
취임식은 있었지만 퇴임식은 없었다.
자신이 아니라 박정상에게 관심이 집중되길 바란다는 김진석의 마지막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진석의 퇴임을 뜻깊게 보내지 않은 건 아니다. 직원과 배우, 그리고 몇몇 외부 인사를 초청해서 조촐하게나마 퇴임식을 가지기로 했다.
안시현의 별장에서 말이다.
마당과 거실, 그리고 2층까지 꽉 들어찬 손님들을 보며 안시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아는 조촐하다는 뜻이 변질됐나?”
“이 정도면 조촐한 거지. 적어도 기자들 눈치 안 보고 우리끼리 즐길 수 있잖냐.”
“흠.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진모 너, 선물 준비했냐? 아버지가 퇴임하는 건데 당연히 했겠지?”
“나? 했지. 했는데 여기 없어. 집으로 배송시켜 놨거든. 들고 오기에는 너무 무겁더라.”
“차라도 한 대 뽑았어?”
“아니.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거. 장담하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선물은 나오지 않을 거야.”
“오. 자신만만한데? 뭔지 나한테만 슬쩍 말해 줘 봐. 참고로 난 낚싯대 세트 샀어. 그 좋아하는 낚시 지겹도록 즐기시려면 좋은 장비가 필요하잖아.”
“좋은데? 내가 준비한 건…….”
김진모가 준비한 선물에 대해 듣자마자 안시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모가 그토록 자신감을 드러낸 이유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의미 있는 선물이네. 너라서 준비할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고.”
김진모이기에 준비할 수 있는, 그리고 김진모가 준비해서 더욱 의미 있는 선물이기도 했다.
오후 1시.
마당에서 김진모와 안시현이 한창 고기를 구웠다. 오전에 사 온 음식들과 더불어 초대된 손님들이 모두 먹을 만큼 넉넉하게 상이 차려졌다.
식사가 끝난 뒤.
본격적인 퇴임식이 진행됐다.
사실 퇴임식이라고 해 봐야 별거 없었다. 배우들이 사비를 들여 제작한 순금 공로패와 준비한 선물을 전달하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김진석이 하지 않겠다는 걸 김진모가 한참 동안 설득한 끝에 자리가 마련된 것이었다.
“허허허.”
박정상으로부터 공로패를 건네받은 김진석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배우부터 시작해 JM액터스의 대표 이사로서의 모든 행보가 공로패에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껏 받은 수많은 트로피보다 이 공로패가 더 값진 것 같군요. 다들 감사합니다. 배우로서 은퇴할 때는 못 받았던 걸 이번에 다 받는 것 같아서 기쁘네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임에도 김진석은 조용히 은퇴했다. 은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 여겼기에, 은퇴 다음 날부터 JM액터스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쓰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도 퇴임식 같은 거 없이 곽상필과 기욤 뒤자르댕과 낚시나 갈 생각이었지만…….
막상 JM액터스가 발굴해 내고 성장시킨 배우들이 주축이 되어 축하해 주니 감회가 남달랐다.
공로패 전달 이후 선물 증정식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거실 한구석에 선물이 잔뜩 쌓였고, 어느새 김진모가 준비한 선물을 증정할 시간이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웃기만 하셨지만, 진모가 준비한 선물을 보시면 분명 눈시울을 붉히고 말 거야.’
안시현은 확신했다.
김진모가 준비한 선물에 대해 듣고 나면 김진석 대표가 눈시울을 붉힐 거라고, 마지막 순간에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감동을 받을 거라고 말이다.
얼마 후.
“허허허. 이거 다 가져가려면 힘들겠는걸?”
“그럴 줄 알고 트럭 한 대 빌려놨지요. 별장으로 가져다 드리면 될까요?”
“그럼 고맙지.”
“자, 이제 마지막 한 명의 선물만이 남았네요.”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김진모에게로 집중됐다.
김진모는 선물을 꺼내 들지 않았다. 그 대신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집으로 배송됐겠네요. 그거 때문에 엄마한테 오늘 하루만 외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해외에서 수입이라도 했냐?”
“아뇨. 제 선물은 아버지 데뷔작부터 은퇴작까지, 그리고 JM액터스와 계약하고 데뷔한 모든 배우들의 출연작 비디오와 DVD예요.”
“……내 작품은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어휴. 말도 마세요. 그거 구하려고 비디오 수집가랑 영화 제작사랑 방송국에 연락 엄청 돌렸어요. 드라마 같은 경우는 방송국 측에 사정사정해서 보관하고 있는 원본 테이프를 복사했고요. 그래도 어찌어찌 다 구하기는 했네요.”
김진모가 준비한 선물은 비디오와 DVD였다.
그것도 김진석이 배우로 출연한 모든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JM액터스 소속 배우들의 출연작까지 구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가지고 오기가 힘들어서 집으로 배송을 시켜 놓은 것이었다.
“…….”
김진석 대표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수많은 배우들이 선물을 줬다. 그리고 그중에는 꽤나 값어치 있는 선물들 또한 존재했다.
하지만…….
그 어떤 선물보다도 김진모가 준비한 선물이 김진석의 마음을 가장 울렸다.
김진석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함축하는 선물을 준비한 게,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의 재능을 온전히 물려받고 배우로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자랑스러운 아들이기에 감동이 배가됐다.
결국 김진석 대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김진모는 미소를 지은 채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살짝 몸을 낮춰 키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가볍게 포옹했다.
“대한민국 연예계에 한 획을 그은 분이신데 흔적을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쉽지는 않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한 것 같아서 뿌듯해요.”
어느새 김진모의 눈시울 또한 붉어져 있었다.
목소리마저 떨리는 것이, 애써 울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 동안 수고하셨어요, 아빠.”
“……고맙구나, 고마워.”
이날.
김진석은 김진모라는 생에 가장 큰 선물로부터 생에 두 번째로 값진 선물을 받았다.
* * *
김진석의 퇴임 이후.
김진모는 한동안 외부 스케줄 소화를 자제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촬영이 마무리된 상황이었고, 종방연과 포상 휴가 정도를 제외하면 공식 스케줄이 없기는 했지만…….
광고와 인터뷰 등의 스케줄을 일주일 가까이 소화하지 않은 건 다소 의외였다.
‘진모 입장에서도 충격이 크겠지. 아버지를 보고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배우가 된 것이니까.’
김진석은 김진모에게 롤 모델이었다.
김진모의 목표가 배우로서 하고 싶은 연기를 모두 한 뒤, 더 이상 연기할 캐릭터가 없다 싶을 때 미련 없이 은퇴하고서 좋은 배우들을 키워 내는 것이라는 것만 봐도 얼마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김진모가 원하는 목표는 김진석이 배우로서, 그리고 연예기획사 대표 이사로서 걸어온 길이니까.
그런 아버지가 퇴임했다.
JM액터스 회장으로서 남아 있긴 하지만, 경영은 박정상에게 맡긴 채 일절 관련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업계에서 은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워낙 정신적으로 강한 녀석이니까 종방연 전까지는 멀쩡하게 회복해서 나오겠지. 그래도 추스를 시간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
안시현은 김진모가 종방연 전후로 다시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회귀 전에도 김진모는 김진석이 퇴임했을 때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고,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지인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중요한 스케줄이 있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김진모라면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종방연 당일 아침, 김진모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자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같이 메이크업 받으러 가자고. 종방연 전에 인터뷰도 해야 할 거 아냐. 네 매니저가 둘이서 인터뷰 잡아 놨다고 하던데?
“아, 단독 인터뷰가 하나 있었지. 까먹고 있었다.”
-백수라고 너무 정신줄 놓고 있는 거 아냐? 얼른 정신 차리고 나와.
아니나 다를까.
김진모는 종방연 당일에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종방연과 포상 휴가 이후, 박의준 감독과 함께할 작품의 오디션을 준비할 터였다.
‘진모가 활동하는 걸 지켜보는 맛으로 휴식기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최 감독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볼까?’
* * *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최종화의 방영만을 앞두고서, 17화에 29.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17화의 마지막에서 나장미의 유산을 받기 위해 스위스로 떠난 이환이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고 만나러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최종화에 대한 호기심을 한껏 부풀려 놓은 채로 예고편도 없이 끝났기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도배할 정도로 관심이 커졌다.
그 상황에서 안시현과 김진모가 한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에 임하게 된 것이다.
“김진모 배우님께서는 『내 아내는 처녀귀신』 이후에 박의준 감독님의 할리우드 진출작 오디션에 참여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이 오디션이 열리게 된 게 김진모 배우님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제가 요청했습니다. 캐스팅이 아니라 오디션을 통해서 배역을 따내고 싶었거든요.”
“안시현 배우님의 영향을 받은 건가요?”
“맞습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할 거라면,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현이 저놈이 선례를 만들어 놓은 덕분에 자연스레 따라 하게 된 거죠.”
인터뷰의 초중반부는 김진모 위주로 진행됐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주연을 맡은 게 김진모이고, 차기작을 위해 박의준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오디션을 볼 거라는 공식 입장이 발표된 상황이라 취재거리가 많아서였다.
또한 김진모가 캐스팅 제안을 받았음에도 거절하고 공개 오디션을 열어달라고 요청한 게 알려진 상황이다.
『Timeless』 당시 안시현과 같은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서 호기심이 증폭되고 있다. 따라서 질문할 거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기자는 김진모에게 꼬박 30분이 넘게 질문을 던졌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모두 취재하겠다는 듯이 집요한 모습을 보였다.
그 다음에야 안시현의 차례가 다가왔다.
“아, 기다리다 잠들 뻔했네요.”
“아하하. 제가 원래 좀 한번 질문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안 배우님 질문은 최대한 핵심만 짚도록 하겠습니다.”
“믿어 볼게요.”
“첫 번째 질문입니다. 안시현 배우님은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서 조연임에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차기작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첫 질문은 안시현이 차기작에 대한 것이었다.
다음 작품까지 한동안 휴식을 취할지, 혹은 느긋하게 차기작을 검토할지를 대답해 달란 뜻이었다.
이에 안시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휴식을 취할 겁니다.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고, 아마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차기작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차기작에 대해 힌트 주실 수 있나요?”
“이번에는 제가 기자님께 역으로 묻겠습니다. 기자님은 제 필모그래피 중 인생 캐릭터로 하나를 뽑으라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인생 캐릭터라…….”
역으로 질문을 받은 기자가 생각에 잠겼다.
미리 주고받았던 질의응답 리스트에 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인터뷰를 하다 보면 자주 발생하는 일이기에 눈곱만큼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하던 기자가 이내 답을 도출했다.
“이현 캐릭터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없었던 조연 활용법 때문에 인상이 컸던 것 같습니다. 연기와 존재감만을 놓고 보면, 『형아, 동생』의 주지성이 인생 캐릭터가 아니었다 싶습니다.”
“제 생각과 같네요.”
“이건 왜 물어보신 건가요? 차기작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혹시…….”
안시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인터뷰를 할 때마다 좋은 기사를 써 준 기자를 통해서 차기작에 대해 최초로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네. 그 혹시가 맞습니다. 최한수 감독님과 다시 한번 손을 잡고 주연을 맡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