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05화>
205화. 그냥
흔히들 배우가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줬을 때, 인생 캐릭터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김진모는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통해 찌질하고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나장미를 만나 점차 변해 가는 이환을 연기하며 인생 캐릭터를 갱신했다.
그렇다면 안시현의 인생 캐릭터는 무엇일까?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방영 후.
조연에게 주연급의 존재감을 부여하며 색다른 해석을 보여 준 이현 캐릭터가 인기를 끌자, 안시현의 팬클럽 카페의 한 게시글이 화제가 됐다.
-안시현의 인생 캐릭터에 투표해 주세요.
안시현이나 김진모나 매 작품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연기를 보여 줬지만, 모든 작품과 캐릭터의 평가가 동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반드시 더 좋은 평가를 받은 캐릭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팬카페에서는 이와 관련된 투표가 진행됐다.
그 결과.
가장 많은 팬들의 지지를 받은 캐릭터는 『형아, 동생』의 주지성이었다. 안시현의 주연 데뷔작으로, 자폐성 장애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기에 상대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안시현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지금껏 연기한 모든 캐릭터에 애착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주지성 쪽으로 팔이 조금 더 굽었다.
인생 캐릭터를 만들어 준 감독과 재회를 앞둔 상황이다. 기사화가 되면 꽤나 이슈가 될 게 분명했다.
안시현이나 김진모나 어떤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슈를 몰고 다닐 만큼 입지가 올라갔으니까.
“이거 단독으로 내보내도 됩니까?”
“네. 대신 오늘 말고 내일이요. 오늘은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으면 좋겠거든요.”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저 그 정도 상도덕은 지킬 줄 아는 놈입니다.”
“네. 그래서 기자님과 단독 인터뷰를 자주 하는 거예요. 기자님과 인터뷰한 내용들은 불편하지가 않거든요. 앞으로도 종종 단독 인터뷰 부탁드릴게요.”
“어휴.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종방연 전의 단독 인터뷰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 질의응답을 이어 가다가 마무리됐다.
* * *
첫 방송부터 대박 조짐을 보이던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인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졌다. 17화가 방영될 즈음에는 한 음원 사이트의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OST로 도배될 정도였다.
2013년 12월부터 2014년 2월 사이, 화제성 1위를 기록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심지어 2위와의 격차마저 압도적인 수준.
한 평론가는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만큼 화제성이 엄청난 드라마가 다시 나오기는 힘들 거라고, 만약 다시 나온다면 김희숙 작가의 손끝에서 나올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설 연휴로 인해 한 주간 휴방이 결정됐을 때, TV Y의 공식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다.
설 연휴 특집 방송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방영해 달라고 항의글을 작성하는 시청자들로 인해서였다.
그만큼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인기는 엄청났다.
사실 TV Y에서는『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최종화가 설 연휴에 방영되기를 바랐다. 설 연휴 특수 효과를 통해 다시 한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해서였다.
또한 터무니없는 목표였던 최고 시청률 30% 달성도 가능할 것 같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의 부탁으로 인해서 이뤄지지 않았다.
“설 연휴에 특집 방송을 편성했으면 합니다. 최종화의 편집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앞당길 수는 없는 겁니까?”
“무리하면 일정을 맞출 수야 있겠지만…… 용두사미가 될 겁니다. 저희는 시청률 때문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찝찝하게 마무리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설 연휴가 대목이긴 한데…… 어쩔 수 없죠.”
TV Y 국장은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이미 기대 이상의 목표를 달성한 상황에서, 시청률에 눈이 멀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희가 부탁드리긴 했지만……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시청자들의 원망 실컷 받고 만수무강할 테니, 유종의 미를 거두는 데에만 초점을 맞춰 주시길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1주일의 시간을 추가로 벌게 된 이후, 최창국은 종방영 전날까지 편집실에서 나오지 않고 최종화의 퀄리티를 끌어올리는 데에 힘썼다.
최종화의 편집을 끝마친 직후.
최창국은 숙직실에서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종방연 1시간 전에야 겨우 눈을 뜨고서 다급하게 종방연이 예정된 한 호텔로 향했다.
“후우…… 늦은 건 아니죠?”
“아슬아슬한데요?”
“알람 맞춰 놨는데 못 듣고 잤어요. 국장님이 깨우러 안 오셨으면 늦었을지도 몰라요.”
“일주일 동안 거의 안 주무셨다면서요?”
“정 피곤하면 쪽잠 조금 자고 계속 작업했죠. 사실 지금도 눈 감으면 잠들 것 같아요.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쉬려고요.”
“본부장님은 그럴 자격이 있으시죠.”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2000년 이후 화제성 1위를 기록하는 드라마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최창국의 역할이 컸다.
촬영장과 편집실을 왔다 갔다 하며 4kg이나 빠질 정도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편집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반사전 제작이라는 이점을 극한으로 활용하며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매달린 최창국은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연출을 도맡았던 여러 드라마의 회차 중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최종화보다 더 완성도 높은 회차는 없을 거라고 말이다.
‘허황된 목표로만 보였던 케이블 채널에서의 최고 시청률 30%…… 반드시 달성한다.’
* * *
최종화의 방영 몇 분 전.
데뷔 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드레스를 입은 김겨울이 잔뜩 들뜬 표정으로 몇 개월 동안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춰 온 김진모에게 물었다.
“선배, 최종화 너무 기대되지 않아요?”
“본부장님이 방영을 1주일 미뤄 가면서까지 영혼을 갈아 넣은 만큼, 어떻게 연출을 했을지 기대가 되네. 적어도 억지 감동을 주려 하지는 않을 거야.”
“저 재회신 보면서 펑펑 울 것 같아요. 촬영 당시에도 엄청 울컥했거든요.”
“시청자분들도 그렇게 반응하셨으면 좋겠네.”
김진모와 김겨울을 비롯한 배우들은 한껏 기대감을 품은 채 최종화의 방영을 기다렸다. 최종화의 내용을 확인한 건 최창국과 김희숙 작가뿐이기에 다들 최종화가 어떻게 연출됐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엔딩을 직접 촬영한 배우들 외에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엔딩의 대본이 지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배우들 또한 최종화에 대해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최종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안시현은 이전 회차들과 다른 이질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OST가 없어. 의도적인 건가?’
최창국과 김희숙 콤비가 시청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OST를 어떻게 사용해야 효과가 극대화되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두 콤비의 드라마와 여타 드라마의 작중 OST 삽입 횟수는 비슷한 수준이다.
횟수는 비슷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적절한 타이밍에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OST의 삽입은 드라마의 평가를 끌어올렸고,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OST를 사용하지 않기도 했다.
이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너와 나의 시간』에서부터 드러났던 장점이다.
하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최종화에서는 10분 동안 OST가 삽입되지 않았다. 30분이 넘어 중간 광고가 한 차례 나올 때까지도 여전히 OST는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OST가 들려온 건 드라마가 끝나가는 시점, 정확히는 이환과 나장미가 감격적힌 재회를 하는 엔딩 때였다.
그 외에는 OST가 삽입되지 않았다.
‘이러려고 설 연휴 특수 효과를 포기하면서까지 일주일이나 더 편집에 매달렸던 건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텐데……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어.’
최창국은 오랜 고민 끝에 최종화에서 OST를 단 한 번만 사용하기로 했다. 이환과 나장미가 오랜 시련 끝에 만나는 감격적인 순간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OST의 사용을 배제했다.
그 결과.
“아…….”
직접 연기한 김겨울마저도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이환과 나장미의 재회 신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비하인드 스토리는 결국 배제하셨구나.’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스위스에서 이환과 나장미가 만난 이후의 내용을 촬영했었다. 상황에 따라 엔딩 이후 쿠기 영상으로 짧게나마 두 사람과 이환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제 방영된 최종화에는 당시 촬영했던 영상이 단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
안시현은 최창국과 김희숙 작가의 의도를 이해했다.
아니, 엔딩을 보고 나니 이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종화 전체를 이환과 나장미의 재회를 위한 장치로 사용했고, 이전부터 뿌려 놓았던 몇몇 복선들을 매끄럽게 회수하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엔딩을 연출했다.
덕분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엔딩을 보며 배우들 중 꽤 많은 인원이 감동해 눈시울을 붉혔다.
만약 비하인드 스토리를 쿠기 영상으로 넣었다면?
이환과 나장미의 재회 이후 어떤 일이 있었을지에 대한 시청자의 호기심은 해결됐겠지만, 엔딩에서의 감동 자체는 많이 퇴색됐을 거다.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두 배제하고 엔딩에만 초점을 맞췄기에, 김진모의 오열 연기와 김겨울과의 키스 신으로 드라마를 끝맺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다들 어떻던가요?”
최창국의 질문에 다들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최종화의 방영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이나 여운이 남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그나마 무덤덤한 김진모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가지만큼은 확실한 것 같아요.”
“한 가지요?”
“네. 최종화의 최고 시청률이 30%를 넘었을 거라는 사실이요. 만약 이게 30%를 돌파하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케이블 채널에서 30%를 넘는 드라마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김진모의 말에 다른 배우들도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청률이 얼마나 나왔을지 정확하게 예상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최고 시청률 30%를 넘을 거라 예상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종화의 연출은 최창국이 방영을 1주일 연기한 이유를 제대로 증명해 보였으니까.
배우들의 예상이 맞았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최종화는 32.5%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오랜 시간 깨지지 않을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 최고 시청률 기록을 작정하는 순간이었다.
최종화의 방영으로부터 일주일 후.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제작진과 배우들이 홀가분하게 괌으로 포상 휴가를 떠났다.
평소 술을 잘 안 마시는 안시현마저도 이번에는 술잔을 기울였다. 오랜 시간 함께 고생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제작진과 배우들과 함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만끽했다.
포상 휴가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습관적으로 해변가를 산책하던 안시현에게 김희숙 작가가 슬쩍 다가왔다.
“해변 참 예쁘죠?”
“……작가님, 혹시 무슨 고민 있으세요?”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 때문일까?
순간 김희숙 작가의 표정이 굳었다. 어울리지 않게 안시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티 많이 났어요?”
“조금요. 포상 휴가 내내 얼굴이 좀 어두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고민이 있나 싶었죠.”
“별건 아니고요. 그냥…….”
김희숙 작가가 말끝을 흐렸다. 몇 번이나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당분간은 제 작품에 시현 씨를 출연시키지 않으려고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