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06화>
206화. 값은 해야 하니까
안시현은 김희숙의 페르소나다.
이제 와서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언론과 대중들 또한 인정하는 부분이라고 봐야 한다.
『VVIP』를 기점으로 김희숙 작가의 작품에는 안시현이 출연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안시현이 출연한다고 할 때도 대중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김희숙 작가의 작품에 안시현이라는 배우는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존재가 됐다.
김희숙은 그것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 안시현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님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줄 알았어요.”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시현 씨는 제가 아는 한 가장 믿음직한 배우예요. 어떤 배역을 맡겨도 완벽하게 소화해 줄 거라 확신해요. 다만…….”
“작가님의 작품에는 무조건 제가 출연한다는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싫으신 거겠죠.”
“네. 정확해요.”
김희숙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고정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실제로 로맨스 말고는 할 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돌 때 로맨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VVIP』를 집필했고, 집필한 작품들의 스토리 라인이 진부하다는 평가가 나오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집필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정 관념을 선호하지 않는 김희숙 작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안시현이라는 배우는 딜레마였다.
까다로운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줄 수 있는 히든카드인 건 맞지만, 자신의 작품에는 안시현이 출연한다는 고정 관념을 심어 줄 테니까.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촬영하면서 이런 김희숙 작가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안시현 없이 작품 활동을 해 보겠다고 말이다.
안시현은 그런 김희숙 작가의 선택을 이해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자신을 계속해서 찾은 게 김희숙 작가와 어울리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필요할 때마다 찾아와 놓고 이제 와서 같이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미안해요.”
“아뇨. 이해해요. 김 작가님께서 말씀해 주시 않으셨다면 제가 먼저 이야기했을 거예요.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더라도, 한동안은 그러는 게 옳다고 봐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현 씨가 아니면 안 될 거 같은 캐릭터가 있으면…… 그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전 작가님의 페르소나니까요.”
안시현과 김희숙이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맞잡았다.
아마 최소 몇 년 동안 김희숙 작가가 안시현을 찾는 일은 없을 거다. 거리를 두기로 결심한 이상 안시현을 머릿속에서 철저하게 지운 채 작품을 구상할 테니까.
하지만…….
그 시간이 한없이 이어지지는 못할 터였다.
김희숙 작가라면 어느 순간 안시현이 아니면 연기하기가 어려운 캐릭터를 구상할 거고, 그때가 되면 안시현은 흔쾌히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까.
* * *
포상 휴가 이후.
안시현의 하루 일과는 아침 식사를 차리고 정혜영의 출근을 도운 뒤, 라온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에는 주로 장을 보러 가거나, 집에 와서 쌓여 있는 집안일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집에서 홀로 TV를 보며 유치원이 끝날 시간을 기다렸다.
그랬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종영과 포상 휴가를 기점으로 안시현은 다시 전업주부로 돌아온 것이다.
다만 이전과는 달리 연기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주말마다 꾸준히 JM액터스 연습실을 방문해 감각이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최한수 감독과 『위장취업』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연습은 잘되고 있냐?”
포상 휴가 이후 지인들에게조차 연락을 하지 않은 채 두문불출하던 김진모가 간만에 JM액터스 연습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진모가 건네준 커피를 받아들며 안시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되고 말고 할 게 뭐 있겠냐. 감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름칠 좀 하는 거지. 너는? 벌써 다 쉰 거야?”
“기름칠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하지 않겠냐. 오디션이 6월이라 시간이 빠듯하잖아.”
“엄살은. 한 달만 주어도 잘 준비할 녀석이 말이야.”
“솔직히 한 달만 있어도 어떻게든 준비는 하겠다만, 이왕이면 여유를 가지고 준비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도 할리우드 진출작이잖냐.”
“그래서 오늘부터 연습 시작하려고?”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 나 오디션 연습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많이는 아니고 일주일에 한두 번, 너 연습실 나올 때만 좀 도와주라.”
“맨입으로?”
“그럴 리가 있겠냐.”
김진모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방영을 앞두고 홍보를 위해 개설했던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을 안시현에게 보여 줬다. 사진에는 김진모의 집 진열장에 넣어 놓은 커다란 곰 인형이 찍혀 있었다.
“이거 줄게.”
“이거 한정판 아니야?”
“응. 100세트 한정판이지. 이 정도면 연습 도와주는 대가로 괜찮지 않아?”
사실 딱히 대가가 없더라도 김진모가 부탁한다면 연습을 얼마든지 도와줄 생각이었다. 김진모의 연습을 도와주는 김에 자신 또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김진모는 연습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엄청난 대가를 제시했다.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곰 캐릭터의 한정판 대형 인형을 내건 것이다.
이는 최근 들어 라온이가 푹 빠져 있는 애니메이션의 핵심 캐릭터였다.
김진모는 취미가 많은 배우 중 한 명이다.
연예인 야구단, 볼링, 스키 등 다양한 취미가 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인형과 피규어 수집이다.
한정판 곰 인형은 김진모가 수소문 끝에 어렵게 구한 거였고, 너무 기쁜 나머지 SNS에 올려 팬들에게 자랑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걸 연습의 대가로 안시현에게 주겠다는 거였다.
안시현은 그 의도를 유추해보려 노력했다.
‘작정하고 준비하겠다는 건가?’
박의준 감독은『90일』에서 안시현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캐릭터를 준비했던 것처럼, 할리우드 진출작은 김진모를 주연 배우로 생각하고서 캐릭터를 구상했다.
따라서 오디션 때 김진모가 건강 악화로 인한 지독한 컨디션 난조라도 겪지 않는 한 배역을 따내지 못할 일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김진모는 안시현에게 소중한 수집품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까지 연습 파트너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단순히 오디션에서 배역을 따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할리우드에 진출할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한다고 보는 게 맞았다.
『Timeless』 당시 안시현이 이 악물고 오디션을 준비했던 것처럼 말이다.
안시현은 피식 웃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도와줘야지. 오늘부터 바로 시작할까?”
“그럼 나야 좋지. 연습 끝나고 집에 와서 인형 받아 가. 라온이가 좋아하겠네.”
“네가 라온이의 꿈을 위해 도와주는구나.”
“꿈이 뭔데?”
“자기 방을 인형으로 꽉 채우는 거. 세상에서 인형을 많이 가지고 싶다나 뭐라나.”
“참 아이다운 목표네.”
“그치?”
안시현과 김진모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푹 빠져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대형 인형을 선물받고 행복해할 라온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한참 웃은 뒤, 김진모는 안시현에게 여분으로 준비해 온 오디션용 시나리오를 건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첫 연습이 시작됐다.
안시현은 김진모와 맡을 배역과 라이벌 역할을 하게 될 배역의 캐릭터를 차분히 살펴보았다.
이내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캐릭터네.”
“그치? 『90일』 때는 너한테 몰빵을 해서 잘 몰랐는데, 박 감독님이 캐릭터를 제법 잘 살리시더라고. 쉬는 동안 공부 엄청 하셨나 봐.”
“그러니까 공모전을 통해서 할리우드 진출을 확정시킬 수 있었겠지.”
『90일』을 통해 박의준 감독과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안시현은, 그가 흔히 말하는 천재 과 감독이라는 걸 수차례 느꼈다.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조차 없다.
경력이 전무한 감독의 데뷔작이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주연 배우는 한국인 최초로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는 안시현이 연기를 잘했기에 달성한 성과지만, 박의준 감독이 한노을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낸 것 또한 적잖은 영향이 있었다.
아무리 배우가 연기를 잘해도 스토리 라인이 개판이고 캐릭터가 매력이 떨어졌다면 황금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없었을 거다.
『90일』이 황금영화제에서 성과를 낸 이후 박의준 감독의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집중됐다.
데뷔작을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시킨 감독이니만큼 차기작에서 어떤 행보를 보여 줄지 기대가 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박의준 감독은 몇 년 동안 두문불출했다.
최정수를 통해 해외에서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 정도만이 간간이 들려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자 언론들은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종종 흘러나왔다. 데뷔작 이후 공백이 워낙 길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대중들의 기억에서 박의준이라는 감독이 조금씩 잊혀 가려던 찰나.
박의준 감독은 JP스튜디오가 진행한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할리우드 데뷔가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려주며 다시 한번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라이프』.
박의준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은 한국인 감독이 한국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할리우드 스타일의 예술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김진모의 연습을 도와주기 위해 처음으로 『라이프』의 시나리오를 접하게 된 안시현은 못 보는 사이 부쩍 발전한 박의준 감독의 역량에 수차례 감탄을 터트렸다.
주연과 조연 캐릭터들의 매력이 살아 있었고, 단역 하나하나까지 허투루 쓰지 않고 스토리 라인이나 주연과 조연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 용도로 사용됐다.
물론 할리우드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시나리오가 좋은 작품이 기대 이하의 결과가 나온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하지만 시나리오만 놓고 보면 안시현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좋은 작품인 건 확실했다.
‘아무리 봐도 나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야. 억지로 꾸며본다고 한들, 진모에 비해서는 부족하겠지. 이 옷은 진모에게 맞춤 제작된 거니까.’
다만 안시현은 『라이프』의 오디션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한국에서 오디션을 통해 뽑는 배역 중 자신에게 맞는 옷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억지로 끼워 맞춘다면 김진모가 오디션을 준비하는 캐릭터를 탐낼 수도 있지만, 굳이 김진모로부터 맞춤 정장을 뺏으려고 경쟁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 감독님이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니까.’
안시현에게는 『위장취업』이 있다. 언제 일을 마무리하고 귀국할지 모르는 최한수 감독을 기다리기 위해서라도 다른 작품에 눈독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위장취업』은 내 연기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도전이 될 거야.’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통해 회귀 전 한 배우의 인생 연기를 뛰어넘는 것에 도전했다면, 위장취업은 회귀 전 첫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 준 자신의 연기와 경쟁해야 한다.
타인이 아닌 자신과의 경쟁이다.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실제로 안시현은 김진모를 도와줄 때를 제외하면 회귀 전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연습을 진행하고 있었다.
최한수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기 위해 말이다.
‘뭐…… 내 연습도 연습이지만 일단은 진모부터 확실하게 도와주는 게 맞겠지? 인형값은 해야 하니까.’
안시현은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최한수 감독을 잠시 머리에서 지우기로 했다. 지금은 김진모의 오디션을 도와주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오디션까지 남은 시간은 약 네 달.
김진모가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연기력을 오디션에서 뽐내는 것이 두 사람의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