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06화 (20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07화>

207화. 스파링 파트너

『내 아내의 처녀귀신』의 종영 이후 네 달이 삽시간에 지나갔다. 해외 수출 및 할리우드 리메이크 결정 등의 긍정적이 소식이 들려올 즈음, 마침내 『라이프』의 공개 오디션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디션 전날.

최종적으로 연습을 도와준 뒤 안시현이 물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했지?”

“응. 그것도 뒤에서 두 번째야. 어쩌다 보니 순번이 이렇게 됐네.”

“사흘 동안 뭐 할 거야?”

“푹 쉬어야지. 연습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여기서 연습을 더 한다고 결과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라이프』의 한국 오디션

『브레이킹 월드』의 오디션 때와 달리 김진모는 뒤에서 두 번째로 늦게 오디션을 보게 됐다.

덕분에 나흘로 예정된 오디션에서 사흘 동안은 오디션장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기에, 휴식을 취하며 컨디션을 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컨디션에 문제만 없다면 오디션에서 합격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진모는 오디션 전까지 안시현의 도움을 받아 지겹도록 연습을 했다. 내일 당장 크랭크인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였다.

『라이프』의 공개 오디션은 다른 배우와의 경쟁이 아닌, 자기 자신의 컨디션 관리와 집중력 문제라 생각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칠 법도 했다.

안시현 또한 오디션을 앞둔 김진모를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오디션 끝나고 나래랑 별장에 놀러 와. 연말 전에 크랭크인이면 당분간 얼굴 보기 힘들 거 아냐.”

“오냐. 라온이 데리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   *   *

『라이프』의 오디션 나흘째 아침.

박의준 감독이 특별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기욤 뒤자르댕과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뒤자르댕 감독님의 눈에 띄는 배우가 있었습니까?”

“주연인 대런 킴 배역을 놓고 말하는 거라면…… 괜찮은 연기를 보여 준 배우가 몇 명 있었지만 아직까진 판단이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진모 배우님 때문인가요?”

“네. 진모에 대한 기대치를 감안해 보면, 지금까지 연기한 배우들보다는 최소 한 수 위일 테니까요.”

“역시 저와 생각이 같으시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오디션 순번을 랜덤으로 하지 말았어야 하나 싶습니다. 설마 김진모 배우님이 뒤에서 두 번째로 오디션을 보게 될 줄이야…….”

“허허허. 애가 탈 정도로 기다리다가 진미를 맛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맛은 있겠네요.”

오디션 기간 동안 좋은 연기를 보여 준 배우는 제법 있었다. 그중 몇 명은 박의준과 기욤 뒤자르댕에게 눈도장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합격점을 받은 배우는 없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어느 배우도 김진모라는 배우에게 가지는 기대치 이상의 연기를 보여 주지 못해서였다.

오디션이 진행될수록 박의준 감독과 기욤 뒤자르댕은 공정하게 평가하겠다는 이유로 오디션 순서를 랜덤으로 정한 걸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나흘 내내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김진모가 어떤 연기를 보여 줄지 갈수록 궁금해졌으니까.

『라이프』의 오디션 나흘째 저녁.

마침내 김진모가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왔다.

가벼운 목례한 뒤 김진모가 입을 열었다.

“바로 시작하면 될까요?”

“네. 바로 시작해 주시면 됩니다.”

김진모는 거두절미하고서 연기를 시작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안시현을 귀찮게 해 가면서 준비한 자신의 대런 킴 캐릭터를 두 심사위원 앞에서 마음껏 보여 줬다.

오디션이 모두 끝난 뒤.

뒷정리를 하며 박의준 감독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으음…… 굳이 표현하자면, 오디션이 아니라 크랭크인을 준비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제가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생각한 대런 킴 그 자체였습니다.”

“캐스팅에 이견은 없겠군요.”

“네. 저희뿐만 아니라 대중들도요.”

오디션 결과 발표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박의준 감독은 김진모를 생각하고서 대런 킴 캐릭터를 만들었다. 김진모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연기해 주기를 바라며 말이다.

그리고 김진모는 오디션에서 박의준 감독의 기대치를 100% 충족시켜 줬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고민이 필요하겠는가?

문제는 대중들을 납득시키는 거였다.

『라이프』의 공개 오디션이 열리게 된 이유가 김진모의 부탁 때문이라는 건 박의준 감독의 인터뷰로 인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김진모가 대중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연기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비난이 따라올 테지만…….

박의준 감독은 눈곱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오디션 영상을 보게 되면 다들 김진모 배우님을 대런 킴 배역에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번에 납득하게 될 거야.’

오디션 결과 발표 직후.

박의준 감독은 기욤 뒤자르댕이 『Timeless』에서 그러했던 것과 비슷하게, 자신의 개인 SNS에 김진모의 오디션 무편집 영상을 공개하는 결단을 내렸다.

김진모가 대런 킴 역에 캐스팅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크랭크인 전에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영상 공개 이후.

대런 킴 배역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김진모의 연기에 대한 극찬이 쏟아졌다.

심지어는 함께 대런 킴 배역을 놓고 경쟁했던 배우들마저도 흔쾌히 인정하기까지 했다.

김진모에게 완패했다고 말이다.

그렇게 김진모의 할리우드 진출이 확정됐다.

*   *   *

“축하한다. 너도 이제 성웅 선배처럼 월드 스타가 되는 건가?”

“월드 스타는 무슨. 난 그런 거에 관심 없다. 아마 성웅 선배도 관심 없을 걸?”

“정상 형 말 들어보니까 파파라치까지 달라붙을 정도로 관심이 쏟아져서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다더라고. 『브레이킹 월드』가 좀 대박 났어야 말이지.”

“그럼 나도 파파라치 붙는 건가? 그건 좀 싫은데.”

“대박나면 붙겠지. 지금은 파파라치 걱정보다는, 이따 낚시 가서 몇 마리나 잡을지나 걱정하는 게 어떨까?”

“그거 좋네.”

『라이프』의 공개 오디션 이후, 김진모는 며칠 동안 안시현의 별장에서 신세를 졌다.

그리고 이후 곧장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내이자 좋은 배우인 한나래가 연습 파트너로서 김진모와 함께하며 그의 성공적인 할리우드 데뷔를 도울 예정이었다.

김진모가 미국으로 떠난 뒤.

안시현은 정혜영과 상의해 캠핑카 한 대를 구입했다.

방학 시즌을 맞아 라온이와 함께 캠핑카를 타고 전국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의 경험이 평생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내가 그랬듯이 말이야.’

안시현은 라온이가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Timeless』의 촬영 당시에 굳이 뉴욕까지 함께 갔던 것이고, 캠핑카를 구입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그렇게 안시현 가족의 전국 여행이 시작됐다.

서해안을 타고 내려가 남해안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다시 올라오는 계획을 세웠고, 한 달 정도 전국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로 향했다.

딱히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틀이 갖춰진 여행보다는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판단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떠난 여행은, 25일 차가 됐을 때 어느덧 동해안을 따라 올라와 속초에 도착해 있었다.

“닭강정 32인분 주세요. 2인분은 가져갈 거고, 나머지는 택배 가능하죠?”

“물론입니다.”

“주소 적어드릴게요.”

안시현은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내 줄 닭강정을 주문하고서 조리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안시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안시현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네, 감독님.”

최한수 감독.

안시현에게 『위장취업』을 함께 만들자고 이야기했던 그가 간만에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안 배우. 연락이 뜸했죠? 동민이 뒤치다꺼리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지인들에게 연락 한 통을 제대로 못했네요.

“지금은 여유가 좀 생기셨나요?”

-겨우 숨통 트인 정도죠. 오늘 연락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귀국 일정이 잡혀서입니다.

안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종영 이후로는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한수 감독과 『위장취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걸로 따지면 기다림이 꽤나 길었다.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알게 모르게 최한수 감독의 연락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김진모의 『라이프』 오디션 준비를 도와주며 꾸준히 감각을 유지할수록, 최한수 감독에게 언제 연락이 올까 기대감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다행히 기다림의 시간이 그리 길어지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최한수 감독이 귀국하는 건 아니다.

다만 명확한 일정을 전달받고서 준비하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의 차이가 큰 게 사실이다. 주연 배우된 입장에서는 이왕이면 일정이 확정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올해 말에 동민이가 한 갤러리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규모는 평범하지만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역사 있는 갤러리에요. 내년 봄에는 갤러리 소속의 다른 화가들과 합동으로 전시회를 열기로 했고요.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바라시던 대로 동민이가 화가로서 자리를 잡겠네요.”

-아내가 고생해 준 덕분이지요. 귀국은 전시회가 마무리되는 내년 4월 중순에 할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바쁘게 준비하면, 2016년 초에는 크랭크인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7년 초 개봉을 목표로 내달리려고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하지요.”

2017년 초.

회귀 전보다 2년 가까이 빠르게 개봉 일정이 잡히는 거지만, 안시현은 개봉 일정이 앞당겨지는 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좋은 작품은 언제 어느 시기에 개봉하건 성공한다는 믿음이 존재했으니까.

-추석 연휴가 끝날 즈음, 탈고를 끝마치고 시나리오 보내 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최한수 감독과의 통화를 끝낸 뒤.

안시현이 휴대폰 달력 어플에 추석 연휴 다음 날을 기념일로 지정해 놓았다. 최한수 감독으로부터 받을 『위장취업』의 시나리오 완성본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아, 이건 연습을 안 하고 배길 수가 없다.’

군침을 자극하는 닭튀김 냄새를 맡으며 안시현이 하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 번을 채 가기 전에 하정남이 전화를 받았다.

-네, 형님. 여행 잘하고 계십니까?

“지금 속초야. 며칠 내로 서울 돌아갈 거 같은데, 이번 주 중으로 성웅 선배한테 연락 한번만 해 주라.”

-류성웅 배우님께 말씀이십니까? 뭐라고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스파링 파트너 필요하지 않느냐고 해.”

-네, 알겠습니다.

안시현은 매니저인 하정남을 통해서 류성웅에게 함께 연습을 할 것을 제안했다.

류성웅은 내년 초에 『브레이킹 월드』의 두 번째 작품의 촬영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이고, 휴식과 연습을 병행하고 있는 중이다.

류성웅의 입장에서도 안시현과 함께 연습한다는 게 결코 나쁜 제안은 아니다. 거기에 자신이 직접 연락하는 게 아니라 매니저를 통해서 연락하며 예의까지 갖췄다.

원래는 직접 연락하려고 했지만…….

‘혹시 모르지. 『브레이킹 월드』 이후로 사람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브레이킹 월드』를 통해 할리우드에서 인지도를 얻은 류성웅이 회귀 전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까 걱정되기도 했고, 그동안 통 연락을 못했기에 직접 연습을 함께하자고 연락하는 게 민망하기도 했다.

닭강정을 구매해 캠핑카로 돌아가던 찰나.

류성웅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연습 같이할 거면 직접 연락하지 뭘 굳이 매니저 통해서 하고 난리야? 번거롭잖아.

-할리우드 대배우님이시잖아요. 예의를 갖춰야 할 거 아닙니까.

-똥 싸고 앉아 있네. 너 여행 중이라며. 언제 서울 오냐?

-이번 주 주말 즈음에 갈 것 같아요.

-그럼 다음 주 평일 중에 밥이나 한 끼 하자. 간만에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자.

-네. 일정 잡아서 말해 주면 제가 맞출게요.

류성웅과의 연락을 끝낸 뒤, 안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류성웅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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