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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07화 (207/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08화>

208화. 잘 부탁할게

며칠 뒤.

전국 여행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안시현이 류성웅의 집 근처로 향했다. 약속했던 식사를 위해서였다.

류성웅이 안시현을 데리고 간 건 집 근처에 있는 기사식당이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어정쩡한 시간대라 그런지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식사를 주문한 뒤.

류성웅이 물을 따라 주며 싱긋 웃었다.

“여기 제육볶음 맛이 기가 막혀.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서인지 다른 데에서는 제육볶음 못 먹겠더라.”

“할리우드 스타가 기사식당에서 제육볶음이라니, 이거 완전 기사거리 아닙니까?”

“너 나 놀리려고 만났냐?”

“티 많이 나요?”

“그래, 이 자식아. 적당히 놀려. 그놈의 할리우드 스타 타령 때문에 부담스러워 죽겠으니까.”

회귀 전의 류성웅이라면 『브레이킹 월드』의 성공으로 인해 얻은 부와 명성으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을 거다.

실제로 천만 배우에 등극한 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기고만장했고, 연기 발전이 없이 도태되자 망가진 이미지로 인해 더 이상 현장에서 찾지 않는 배우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달았고, 상처를 줬던 후배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하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할리우드의 성공은 류성웅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정확히는 변화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한국이건 할리우드건 류성웅에게는 똑같이 연기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저 자본의 규모가 많이 차이 날 뿐이었다.

언론에서는 대한민국에서 할리우드 스타가 탄생했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류성웅에게 월드 스타라는 별명을 붙여 주는 언론들 또한 제법 많았다.

하지만 류성웅은 과하게 띄워 준다며 부담감을 느낄 뿐, 결코 자만하거나 성공에 취하지 않았다.

“어휴. 아직 두 작품 더 남았는데 얼마나 더 이 난리일지 상상이 안 된다. 넌 『Timeless』 때 어떻게 버틴 거야?”

“버티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뭐라고 떠들건 신경을 안 쓰면 그만인걸요. 아님 익숙해지고 즐겨야죠.”

“쩝. 그게 최선이긴 하겠네. 모르겠다. 한 작품 더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나저나 나랑 같이 연습하고 싶다고?”

“선배 출국하기 전까지 일주일에 2, 3일 정도만요. 실은 얼마 전에…….”

안시현은 얼마 전 최한수 감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으며, 내년에 귀국하면 본격적으로 『위장취업』의 제작에 돌입할 거라는 걸 알려 줬다.

『위장취업』의 크랭크인은 빨라야 2015년 연말에서 2015년 초다. 최한수 감독의 귀국 일정을 감안하면 그 이상으로 앞당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1년도 넘게 시간이 남은 상황에서 벌써부터 연습에 임하려 하고 있다.

일주일에 2, 3일만 연습한다고는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빨리 준비를 시작하는 게 맞다.

류성웅은 안시현이 어떤 생각으로 빨리 준비를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 또한 아포칼립스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을 준비하며 비슷한 마음이었으니까.

“작정하고 준비할 생각인가 보네?”

“최 감독님이랑 간만에 작품을 하는 만큼 제대로 준비하려고요. 시놉시스에 푹 빠지기도 했고요.”

“시나리오가 오는 게 추석 연휴 이후라…… 그 전에는 뭐 할 건데?”

“선배 연습 도와줘야죠.”

“흐음…….”

류성웅이 생각에 잠겼다.

안시현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를 놓고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고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좋은 제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지금 내 상황이 부담스러워.”

“『브레이킹 월드』가 너무 대박 나서요?”

“응.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25위야. 제작비를 그렇게 투자했는데 3배를 넘게 벌어들였다고. 이 상황에서 부담을 안 느끼는 게 이상한 거 아니겠어? 그래서 평소보다 더 일찍 캐릭터 구축에 들어갔는데…… 어째 네 상황이랑 내 상황이 비슷해 보이네.”

『브레이킹 월드』는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대박이 났다. 회귀 전보다 제작비가 20% 정도 늘어나긴 했지만, 그만큼 총수입 또한 증가했으니 결과적으로 잘된 거라고 보는 게 맞았다.

문제는 『브레이킹 월드』가 너무 성공한 나머지 류성웅이 입자가 이전과는 180도 달라졌다는 데에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이 싫을 리는 없지만,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언론의 지나친 관심은 다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브레이킹 월드』의 홍보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 류성웅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포칼립스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전처럼 산속에 틀어박힌 것이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여유가 있기에 서울과 산속을 적절히 왕복하는 게 가능했다.

지나친 관심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은 연습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류성웅은, 안시현과 자신의 입장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안시현은 자신의 인생 캐릭터인 주지성을 만들어 준 최한수 감독과의 재회를 앞두고,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찌감치 연습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다.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것.

류성웅이 안시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연말까지 잘 부탁할게.”

“저야말로 잘 부탁할게요. 비록 연습이지만 선배와 간만에 호흡을 맞추게 돼서 기뻐요.”

안시현과 류성웅.

두 사람이 2014년 연말까지 서로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주기로 합의했다.

*   *   *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는 추석 연휴 이후에 도착한다. 그렇기에 안시현은 그 전까지 류성웅의 연습을 도와주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알버트 리.

아포칼립스 3부작에서 류성웅이 맡은 배역은, 두 번째 작품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낸다. 존재감만 놓고 보면 원톱이라도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렇기에 힘을 줘야 할 주요 신이 꽤나 많았다.

이에 류성웅은 주요 신 위주로 연습을 진행하고 있었고, 레이첼 스타이너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다만 진행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알버트 리 캐릭터 자체는 『브레이킹 월드』를 통해 완벽하게 구축했지만, 주요 신의 연습은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것들이 꽤나 많아서였다.

다른 배우들 또한 이를 알게 크랭크인 보름 전부터 모여 막바지 연습에 매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일까?

안시현이 연습을 도와준 이후 류성웅은 조금씩 주요 신의 완성도를 높여 갔다.

물론 실제로 배역을 맡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에 비해서는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안시현이라 해도 연습을 도와주는 선에서는 평소 연기할 때처럼 완성도를 높이는 게 불가능했다.

다만 혼자 연습하는 것과 대사를 받아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의 차이는 컸고, 그 상대가 배우이다 보니 몰입에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안시현은 류성웅의 연습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설렁설렁 하지도 않았다.

연습을 도와주는 게 아닌 자신의 차기작을 준비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시종일관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 결과.

류성웅은 기대 이상으로 연습 결과에 만족했다.

“당장 촬영에 시작해도 되겠는데? 연습 도와주는 건데 이렇게 잘해도 되는 거야?”

“부담스러우니까 너무 띄워 주지 마요.”

“띄어 주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계속 함께 연습하고 싶을 정도라니까.”

“선배만 괜찮으면 시간 맞을 때 자주 같이 연습해요.”

“그래도 괜찮을까?”

“고정적으로 함께 연습할 사람 있으면 서로 좋은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선배랑 함께 연습하다 보면 배울 점이 많아서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류성웅은 『브레이킹 월드』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연습의 효율을 높일 수 있었으며, 안시현은 류성웅의 연습을 도와주며『위장취업』의 대본을 받기 전에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안시현은 류성웅과 연습을 하며 『브레이킹 월드』 전후로 생긴 그의 변화를 대번에 눈치챘다.

‘선이 확실히 굵어졌어.’

원래부터 류성웅은 선 굵은 연기 스타일을 지녔다. 섬세한 감정 표현보다는 캐릭터의 느낌을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다.

중요한 건 『브레이킹 월드』의 출연을 기점으로 그 선이 더욱 굵어졌다는 것이다.

류성웅이라는 배우의 연기 스타일이 무엇인지 연기를 한 번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단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극대화시킨다라……. 좋은 전략이야.’

장점을 극대화한 덕분에 류성웅은 『브레이킹 월드』의 흥행으로 가장 수혜를 본 배우가 됐다. 한국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연기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는 안시현에게도 한 번 주어졌던 기회다.

『브레이킹 월드』가 흥행했지만 『Timeless』에 비할 바는 아니다. 언론의 관심도로만 따지면 안시현이 쪽이 훨씬 더 높았다.

다만 안시현은 스스로가 할리우드에서 배우 생활을 이어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애초에 『Timeless』에 출연한 게 할리우드 진출을 노려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시현은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만약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계속 배우 생활을 할 거였다면, 류성웅처럼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했을 거라는 것에 공감했다.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으려면 단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부각시키는 게 보다 유리할 테니까.

심지어 류성웅의 장점은 『브레이킹 월드』 때보다 더욱 극대화되어 있었다. 단점을 논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장점만이 눈에 띄었다.

부담감을 이겨 내기 위해 류성웅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역시 이 맛에 함께 연습을 하는 거지. 나도 뒤처지지 않게 부지런히 노력해야겠어.’

평소 안시현은 홀로 연습하는 걸 선호하지만, 간혹 자극이나 동기 부여가 필요할 때는 다른 배우와 연습을 할 필요성을 느낀다.

『위장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준비 기간이 긴만큼 적절한 동기 부여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할리우드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류성웅을 연습 파트너로 원한 것이다.

다행히 제대로 동기 부여가 됐다.

이전보다 더욱 발전한 류성웅의 연기를 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됐으니까.

9월 초까지.

안시현은 류성웅의 연습을 꾸준히 도왔다. 비록 일주일에 2, 3회이긴 하지만, 연습하는 순간만큼은 촬영이라 생각하고 몰입해서 최선을 다했다.

“이대로라면 굳이 다른 배우들과 연습을 할 필요도 없이 크랭크인에 들어가도 되겠는데? 시현이 네 덕분에 걱정거리가 하나 줄어들었어. 고맙다.”

“제가 도움이 됐다니까 다행이네요.”

류성웅이 착실히 촬영을 준비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볼수록, 『위장취업』의 시나리오에 대한 안시현의 갈망 또한 커져갔다.

추석 연휴가 끝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지만, 그 시간까지 기다리는 게 안시현에게는 곤욕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손에 쥔 채 연습에 매진하고 싶었다.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 날.

안시현은 집안일을 하는 내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저녁에 류성웅과 연습을 할 예정이었음에도 휴대폰에만 모든 신경이 가 있었다.

저녁 식사 후.

JM액터스 사옥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안시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안시현이 삽시간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최한수 감독으로부터 문자가 온 것을 확인하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시나리오 보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연습하다가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 주세요.

문자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안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차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아서 좀처럼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류성웅의 연습을 도와주기를 두어 달, 마침내 『위장취업』의 시나리오 최종본이 도착했다.

이제.

안시현이 류성웅에게 도움을 받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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