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09화>
209화. 이렇게 된 이상
-귀국 전까지 부지런히 연습하고 있겠습니다.
최한수 감독에게 답장을 보낸 뒤, 안시현은 곧장 JM액터스 사옥으로 올라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표 이사실의 문을 노크했다.
“형, 나 들어가도 돼?”
“어허. 형이라니. 대표님이라고 해 봐.”
“대표님, 나 들어가도 돼?”
“거 대표님이라고 호칭할 거면 반존대라도 해 주면 안 되냐? 들어와.”
안시현이 대표 이사실에 들어갔다.
이제는 제법 대표 이사 티가 나기 시작한 박정상이 미소로 안시현을 반겨 줬다.
“웬일이냐? 일하는 데 방해된다고 사옥 와도 연습실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차 한 잔 주랴?”
“나야 좋지. 볼일 있어서 왔어.”
“볼일?”
“응. 시나리오 좀 인쇄하려고. 컴퓨터 좀 써도 돼?”
“아아, 그거 왔나 보구나. 써.”
박정상은 JM액터스의 대표 이사이니만큼 소속 연예인들의 주요 이슈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고, 때로는 직접 스케줄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안시현이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휴식기임에도 굳이 류성웅의 연습 파트너를 자청하며 감각 유지에 힘쓸 정도로, 안시현이 『위장취업』에 거는 기대감은 엄청났다.
이에 JM액터스는 안시현의 연습 및 『위장취업』의 제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기다리던 『위장취업』의 시나리오가 안시현에게 도착한 것이다.
안시현이 박정상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신의 이메일에 로그인하고서 최한수 감독이 보내준 『위장취업』의 시나리오 파일을 오픈하고 인쇄 버튼을 눌렀다.
위이이이잉.
프린트기 작동하는 소리가 대표 이사실 안에 울려 퍼졌다. 몇 백 페이지에 달하는 『위장취업』의 시나리오가 한 장 한 장 인쇄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자연스럽게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어서 빨리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확인하고,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싶어 자연스럽게 감정이 고조됐다.
그 모습을 보며 박정상이 피식 웃었다.
“기대되나 보다?”
“티 많이 나?”
“야. 내가 네 매니저 한 게 몇 년인데 표정만 보면 딱 알지. 지금 너, 연습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잖아.”
“크흐흐. 맞아. 몸이 달아서 미칠 것 같아.”
회귀 전.
배우 안시현에게 가장 빛나는 순간을 꼽으라면 누가 뭐라 해도『위장취업』으로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바로 그 순간이다.
따라서 안시현은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와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물론 상황을 회피할 수도 있었다. 최한수 감독이 캐스팅을 제안했을 때, 선택권은 전적으로 안시현에게 존재했으니까.
그럼에도 안시현은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였다.
회귀 전 자신이 배우로서 최고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던 작품에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자신이 배우로서 많은 발전을 이뤘음을 회귀 전의 자신과 경쟁하며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안시현은 마침내 완성된『위장취업』의 시나리오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성웅 선배 연습 도와주면서 지긋지긋하게 몸 풀었으니, 이제 발동 걸어야지.’
류성웅의 연습을 도와주며 안시현은 감각을 유지하는 데에 집중했다. 『위장취업』의 시나리오가 도착하는 대로 언제든지 연습에 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몸이 근질거렸다. 지금 당장 연습실로 뛰어가서 시나리오를 붙든 채 푹 빠지고 싶었다.
시나리오의 인쇄가 끝난 뒤.
박정상이 건네준 차를 모두 마신 안시현이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 볼게.”
“벌써? 매정한 놈. 네 볼일만 보고 가기 있냐? 간만에 얼굴 본 옛 매니저랑 수다 좀 떨다 가면 어디가 덧나?”
“수다는 내일 점심에 밥 먹으면서 하자. 나 당분간 연습실에 매일같이 출근 도장 찍을 거야.”
“그럼 간만에 우리 팔색조 배우님이 사 주는 밥 한 끼 먹어 볼까?”
“그러시던지. 아 참, 형.”
“응?”
“그 자리, 잘 어울린다.”
회귀 전.
박정상은 담당 배우였던 김진모의 성공에 능력을 인정받고 부사장까지 승진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끝내 전문 CEO가 김진석의 뒤를 이어 JM액터스를 운영하는 걸 지켜보며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이번 생에는 달랐다.
김진모뿐만 아니라 안시현까지 배우로서 큰 성공을 거뒀고, 성공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며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JM액터스 2대 대표 이사가 될 수 있었다.
안시현은 박정상이 이제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았다고 느꼈다.
* * *
“오. 이게 바로 시현이 네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시나리오야?”
“네.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선배가 제 연습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딱 한 달 만요.”
“한 달로 되겠어?”
“선배 연말에 출국해야 하잖아요. 저 때문에 작품 준비를 방해받으면 안 되죠. 한 달이면 틀을 잡을 수는 있을 테니, 그 정도면 충분해요.”
“잔뜩 도움받고 눈곱만큼 갚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아, 일단 시나리오 좀 읽어봐도 될까?”
“네. 오늘은 시나리오 읽어 보고, 내일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연습 시작하자고요.”
“오케이.”
류성웅은 그 즉시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연습을 도와주는 내내 안시현이 애타게 기다리던 모습을 봤기에,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시나리오일까 내심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시나리오 앞부분을 어느 정도 읽은 류성웅이 굳은 표정으로 말문을 땠다.
“이 시나리오…….”
“별로예요?”
“아니, 좋아. 시나리오는 좋은데…… 지금껏 네가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네.”
『위장취업』은 회귀 전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안시현에게 생에 첫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 줬다.
따라서 시나리오 자체는 좋다고 보는 게 맞았다.
실제로 류성웅은 『위장취업』의 시나리오가 완성도 높다고 느꼈다.
문제가 있다면 『위장취업』의 장르였다.
『위장취업』은 코미디 영화다. 지금껏 안시현이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았던 장르이기에, 류성웅은 과연 안시현이 이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시현이 코미디 영화에서 주연을 맡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확실히 선배 말대로 제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는 게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정수 선배님이 저에게 지겹도록 하는 말이 있어요. 배우는 연기를 통해 모든 걸 말하는 직업이다. 항상 편견과 맞서 싸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배우로서 이미지가 굳어지는 걸 두려워하고 맞서지 못하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회귀 후.
안시현은 단 한 번도 코미디 장르에 도전하지 않았다.
이는 안시현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안시현이라는 배우가 코믹 연기를 하는 걸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흔한 말로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다.
지금껏 안시현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강렬한 인상을 선사해 줬다. 가장 최근에 연기한 이현만 하더라도 조연임에도 주연과 대등한 존재감을 뽐내며 센세이션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안시현이 코믹 연기를 하는 게 상상이 안 될 법도 했다.
안시현은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코믹 연기와의 접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류성웅이 『위장취업』에 대해 우려하는 것 또한 예상 범주 내였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여유가 넘쳤다.
류성웅이 생각하는 문제가, 자신에게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했으니까.
“연습을 통해 증명할게요. 코믹 연기가 제게 잘 맞는 연기라는 걸 말이에요.”
안시현은 배우답게 연기를 통해 『위장취업』의 박철우 캐릭터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이라는 걸 증명해보이기로 결심했다.
참으로 안시현다운 발상이었다.
류성웅은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의 문제지, 안시현이라면 결국 연기를 통해 증명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다른 배우라면 모를까, 너라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해결 방법을 찾아내겠지. 항상 그래 왔듯이.”
다만 류성웅은 알지 못했다.
안시현이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해답을 제시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 * *
추석 연휴 전까지 안시현이 류성웅의 연습을 도와줬던 것처럼, 『위장취업』의 시나리오가 완성된 이후에야는 류성웅이 안시현의 연기를 도와줬다.
한 달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긴 했지만, 안시현에게는 그 정도 시간이면 차고 넘쳤다.
‘성웅 선배의 도움을 받아 기본 틀만 잡아 놓으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일 거야.’
안시현이 류성웅에게 바라는 건 안시현이 연기해야 할 박철우 캐릭터의 틀을 잡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류성웅은 시나리오 전체가 아닌, 안시현이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다섯 신만을 선택해서 숙지했다.
박철우의 캐릭터성이 물씬 드러내는 일부 신만을 반복해서 연습하며 기초 공사를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위장취업』의 연습.
첫날 연습을 순조롭게 끝마치고서, 류성웅은 연습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와…… 시현이 너, 왜 그렇게 잘해? 누가 보면 코믹 연기 베테랑인 줄 알겠다.”
회귀 전.
몇 차례 코미디 영화에서 감초 역할을 맡았고, 이는 곧 『위장취업』에서 박철우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이 정도면 선배가 던졌던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되기에 충분하겠죠?”
류성웅은 안시현의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코믹 연기에 대한 의문 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다 생각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게 『위장취업』을 성공시키기 위한 숙제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첫 연습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해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회귀 전 명품 조연으로서 다양한 배역을 맡아 본 경험이 있는 안시현에게는 코믹 연기 또한 맞춤 정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모습에 류성웅은 혀를 내둘렀다.
다른 배우도 아닌 안시현이다. 의문 부호가 붙더라도 멋들어지게 해결하며 좋은 연기를 보여 줄 거라는 기대감이 전제될 수밖에 없는 배우다.
촬영 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아낼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설사 연습 첫날부터 완벽한 연기를 보여 줄 줄이야.
연습 과정에서 안시현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려고 했던 류성웅의 계획이 삽시간에 망가졌다.
“야. 이건 내가 도와주고 말고 할 것도 없겠는데? 너무 깔끔하잖아.”
“에이, 그럴 리가요. 선배가 도와주는 거랑 그렇지 않은 차이가 얼마나 큰데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까 고맙네.”
류성웅은 첫 연습부터 완벽한 연기를 보여 준 안시현에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까 걱정했지만, 안시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선 굵은 연기를 하는 류성웅보다 좋은 연습 파트너는 없다 생각했다. 실제로 류성웅과의 첫 연습부터 안시현은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음에도 수준급 연기를 보여 주며 연습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물론 류성웅에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시현이가 날 도와준 만큼, 나도 시현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연습 첫날부터 안시현의 엄청난 연기를 보여 주자 류성웅은 낙담했다.
비록 한 달 뿐이기는 하지만, 안시현이 자신에게 도움을 준 것 이상으로 보답을 하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처음부터 꼬인 느낌이 들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낙담은 잠시뿐.
이내 류성웅이 의욕을 불태웠다. 시나리오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다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연습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 작품을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매달려 주겠어. 후배의 연습에 도움이 못 되는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뭘 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