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0화>
210화. 무한정 가능합니다
추석 연휴 이후 한 달 동안 류성웅은 안시현의 『위장취업』 연습을 도왔다. 그것도 흡사 자신의 작품을 준비하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임해 줬다.
이에 안시현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류성웅이 전력을 다해 도와준 덕에 박철우 캐릭터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이 한결 수월했으니까.
류성웅은 안시현의 연습에 필요한 캐릭터를 깔끔하게 소화해 냈다. 급조했다 보니 완성도 자체가 높은 건 아니지만, 특징만을 정확히 짚어 낸 게 인상 깊었다.
그렇게 한 달의 연습이 마무리된 후.
“출국 전에 보자. 그 전까지는 연락이 안 될 거야.”
“또 산에 들어가려고요?”
“응. 아무리 생각해도 알버트 리는 산에서 연습하는 게 제격이야.”
류성웅은 다시 산속에 틀어박혔다. 출국 전 홀로 연습에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안시현이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류성웅은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드러냈다.
“됐네요. 지금까지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네 연습해 집중해.”
안시현이 연습을 도와준다면 류성웅의 입장에서는 보다 수월하게 준비를 하는 게 가능하다.
그럼에도 류성웅은 거절 의사를 드러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안시현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출국 전까지는 안시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준비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다가온 연말.
류성웅이 아포칼립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을 촬영하기 위해 뉴욕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날이 다가왔다.
출국 전날.
안시현은 류성웅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류성웅은 잠시 자리를 떴다. 몇 분 후 돌아온 류성웅의 손에는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 선물.”
“선물이요?”
“응. 연습 도와준 게 고마워서 준비했어. 지금 바로 열어 볼래?”
“네. 그럴게요. 어떤 선물일지 기대되네요.”
“기대 이상일 걸?”
“오. 자신만만하네요? 그럼 어디 한 번 볼까요?”
안시현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았다.
동시에 두 눈이 커졌다. 류성웅이 준비한 선물이 무려 정혜영이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의 신상 핸드백이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와이프 기분 풀어 주려고 백화점 갔다가 제수씨가 이 브랜드 좋아한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더라고. 겸사겸사 샀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엄청 좋아할 거예요. 고마워요, 선배. 진짜 기대 이상의 선물이네요.”
“고맙기는. 네가 내 연습 도와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새 발의 피지. 잘 촬영하고 올 테니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이번 작품도 대박 나기를 바랄게요.”
“크흐흐. 그랬으면 좋겠다.”
다음 날.
류성웅이 가족들과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촬영이 모두 마무리될 때까지는 귀국을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류성웅이 떠난 뒤.
안시현은 홀로 연습에 매진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주말에만 연습실을 방문해서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붙들고 늘어졌다. 크랭크인 일정도 확정되지 않을 정도로 준비 기간이 긴 만큼 급하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감독님이 귀국하시기 전까지 캐릭터를 완성해 놓는 데에 초점을 맞추자. 『편지』 때처럼 준비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목표는 확실했다.
여유를 두고 캐릭터를 구축했던 『편지』 때처럼, 속도보다는 완성도에 초점을 맞춘 채 착실하게 준비를 해 나가는 것이었다.
안시현의 시선은 어느새 귀국하게 될 최한수 감독과 함께할 날로 향해 있었다.
* * *
2015년 4월 말.
마침내 최한수 감독이 입국했다.
비자 문제로 인해 간간히 입국했을 때를 제외하면, 사실상 5년여 만에 귀국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와 아들 최동민은 동행하지 않았다.
최동민은 프랑스의 유서 깊은 갤러리에서 화가 생활을 하기 시작했으며, 아내는 그런 최동민과 함께 있는 것을 택했다.
프랑스 생활에 꽤나 만족하기도 했고 말이다.
‘일단은 짐 풀고 청소 좀 하고, 장 보러 가서…….’
귀국한 최한수 감독이 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며 캐리어를 챙겨 나가려는 찰나.
“최한수 감독님. 실례가 아니라면 인터뷰 좀 부탁드려오 될까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몇몇 기자들이 최한수 감독을 향해 일제히 다가왔다.
이에 최한수 감독의 두 눈이 커졌다.
“의외네요. 전 제가 귀국한다고 해서 관심을 가질 기자는 없을 줄 알았거든요. 공백이 좀 길었잖아요.”
프랑스에서 생활한 지 5년이고, 마지막으로 메가폰을 잡았던 게 무려 6년 전이다.
대중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만한 시간이다.
실제로 최한수 감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안시현이 최한수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할 거라고 인터뷰하여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관심을 가지려고 해도 프랑스에서 머물며 두문불출하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가장 최근에 들린 소식은 곽상필과 기욤 뒤자르댕이 최한수 감독의 아들 최동민의 합동 전시회에 참여해서 그림을 한 점씩 구매했다는 것 정도였다.
작품에 대한 소식이 없었기에 기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 판단한 것과 달리, 무려 10명이나 되는 기자가 최한수 감독의 귀국을 취재하기 위해 왔다.
한창 활동할 때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예상 외로 관심이 큰 건 사실이었다.
이에 한 기자가 최한수 감독에게 관심이 쏠린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다.
“감독님과 함께 비행기를 탄 여성분이 SNS에 감독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더라고요. 그분이 SNS 스타라서 소문이 확 퍼졌죠.”
“그랬군요. 허허허. 덕분에 귀국길이 외롭지 않아 기분이 좋네요. 길어도 되니까 편하게 질문하세요.”
SNS 이야기를 들으며 최한수 감독은 시대가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최근 들어 급격하게 보급되기 시작한 스마트폰으로 인해 많은 게 달라졌다.
영화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최한수 감독이 메가폰을 내려놓은 6년 동안 영화계의 트렌드 또한 몇 차례 달라졌다. 마지막으로 메가폰을 잡았을 때의 감각으로 작품을 만들면 대중들의 혹평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한 기자는 이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공백기가 꽤나 길었는데 차기작에 대한 자신감이 있냐면서 대놓고 물어보았다.
이에 최한수 감독은 솔직하게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신작들은 꾸준히 챙겨 보긴 했지만, 오랜 시간 현장을 떠나 있었던 게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려 6년이다.
현장 감각이 사라지고 남을 만한 시간이다. 실제로 최한수 감독 또한 자신의 현장 감각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그렇기에 최대한 여유를 두고 『위장취업』을 준비할 계획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현장 감각의 부재를 채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제 길었던 공백기와 별개로 『위장취업』은 성공할 거라 자신합니다.”
그럼에도 최한수 감독은 『위장취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완성한 시나리오에 대한 자신이 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주연을 맡아 줬습니다. 흥행하지 못한다면, 제가 더 이상 메가폰을 잡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겠지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안시현이었다.
어떤 옷을 주더라도 완벽하게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배우, 모든 캐릭터가 인상 깊어서 어떤 스타일이라고 정의하기 힘든 팔색조.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을 믿었다.
박철우 역을 연기하게 될 안시현이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아 줄 거라고 확신했고, 이는 곧 『위장취업』의 흥행을 확신하는 근거가 됐다.
또한 안시현이 코믹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기자들의 우려에는 역으로 의문을 드러냈다.
“저는 기자분들이 안시현 배우에 대해 걱정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껏 안시현 배우가 새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제시됐던 문제점들이 단 한 번이라도 적중한 적이 있었던가요? 제 기억으로는 항상 연기를 통해 증명했었던 것 같습니다만.”
늘 연기로 증명해 보인 안시현을 걱정하는 건 사치라고, 연기로 증명해 보일 테니 기다려 보라고 굳건한 믿음을 드러냈다.
며칠 뒤.
“오랜만이에요, 안 배우. 별장이 참 좋네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낚시 좋아하시면 이따 저랑 가시죠.”
“허허허. 저야 좋죠. 간만에 낚시하면서 안 배우와 느긋하게 대화 좀 나눠 볼까요?”
최한수 감독이 안시현의 별장이 초대를 받았다.
2층의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보며 식사를 한 뒤, 별장 근처에 있는 산으로 산책을 다녀왔다. 이후 두 사람은 장비를 챙겨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저수지로 낚시를 떠났다.
일찌감치 와서 자리를 잡은 낚시꾼들을 피해 구석에 자리를 잡은 뒤, 낚싯대를 던진 최한수 감독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제육볶음과 된장국과 계란말이로 점심 식사를 하고, 저수지에 낚시를 하러 오니까 이제야 좀 한국에 온 실감이 나네요. ……안 배우.”
“네, 감독님.”
“일단은 안 배우만 알고 있어요. 저는 『위장취업』을 끝으로 메가폰을 내려놓을 생각이에요.”
“……그렇군요.”
“놀라지 않으시네요.”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최한수 감독의 돌발적인 은퇴 예고에도 안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최한수 감독이 『위장취업』을 마지막으로 메가폰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위장취업』의 제작이 회귀 전보다 1년 남짓 빨라졌기에, 은퇴 시기 또한 그만큼 앞당겨지게 됐다.
최한수에게는 감독으로서의 삶만큼이나 자폐성 장애가 있는 아들 최동민의 삶 또한 중요했다.
최동민이 프랑스에서 화가로 자리를 잡은 만큼,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정착하고 싶은 게 최한수 감독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지금 당장 메가폰을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다.
오래 전부터 제작하고 싶었던 『위장취업』을 성공시킨 뒤에 깔끔하게 메가폰을 내려놓고 프랑스로 떠나는 것, 그게 바로 최한수 감독이 바라는 마무리였다.
“은퇴작이니만큼 『위장취업』을 성공시키고 싶은데, 걱정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투자는 혜인원에서 전액 하기로 했고, 캐스팅 라인은 어느 정도 정해 뒀습니다. 예상대로 캐스팅을 못한 배역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채우려고 합니다. 다만…….”
“현장 감각이 걱정이신가요?”
“네. 6년이나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요.”
입국 당시 기자들이 가장 먼저 우려를 드러냈던 부분을 최한수 감독 또한 걱정하고 있었다.
공백기가 긴 감독은 꽤나 많다. 그리고 긴 공백기에도 차기작을 상업적으로 흥행시킨 감독 또한 꽤 있다.
다만 좋은 선례를 남긴 감독들이 공백기에 영화와 관련된 공부를 한 것과 달리, 최한수 감독은 『위장취업』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간간히 한국 영화를 챙겨 본 게 영화와의 유일한 접점이었다.
그동안 아들 최동민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안시현이라는 배우를 믿고 있음에도 최한수가 『위장취업』의 흥행을 걱정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안시현을 비롯한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를 자신이 망치는 게 아닐까 내심 불안했다.
‘회귀 전에도 그러셨지. 현장 경험의 공백을 걱정하셨고, 결국 대본 리딩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셨고 말이야.’
안시현은 최한수 감독의 걱정에 공감했다. 그리고 최한수 감독이 어떤 결단을 내릴지도 예상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니나 다를까.
최한수 감독은 한참 동안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차분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안 배우가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시해 줬으면 합니다. 정확히는 주연 배우들의 권한을 조금 높이려고 합니다. 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작품을 만들어갔 으면 합니다.”
“선은 어디까지인가요?”
“스토리 라인을 해치지 않는다면 무한정 가능합니다.”
고민 끝에 최한수 감독이 떠올린 정답은, 배우들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