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2화>
212화. 돌아오셨네
12월 26일.
약속한 첫 연습 날.
안시현과 손해수는 서로가 서로에게 놀랐다.
‘내일 당장 크랭크인에 들어가도 문제없을 정도로 캐릭터가 탄탄한데? 시나리오를 추석 연휴 이후에 받아서 그렇지, 준비는 그전부터 착실하게 했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완성도가 높은데?’
손해수는 안시현의 연기가 내일 당장 크랭크인에 들어가도 문제없을 만큼 완벽해서 진심으로 놀랐다.
물론 이는 안시현이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회귀 전 이미 박철우를 한 번 연기해 본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미 한 번 연기해 봤던 만큼 상대적으로 캐릭터 구축이 용이한 게 당연했다.
다만 당시의 박철우와 지금의 박철우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했다. 별거 아닌 걸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때론 사소한 게 큰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안시현은 긴장을 풀지 않고서 연습에 박차를 가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도 캐릭터의 완성도가 높아. 무엇보다…… 진중한 연기가 오히려 웃음을 줄 수도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이용하고 있어.’
안시현은 손해수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캐릭터 구축을 잘해 와서 놀랐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당시 손해수는 한 영화의 촬영이 막바지였고, 촬영이 끝난 뒤에는 공개 오디션으로 인해 며칠을 추가로 소요해야 했다.
따라서 실제 연습은 기껏해야 보름 남짓 정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손해수의 캐릭터는 인상 깊었다.
손해수가 맡은 김현수 캐릭터는 매사에 진지한 태도로 일관하지만 어이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나며 그 괴리감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다.
어지간한 배우들은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난이도가 높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손해수에게는 그렇기에 더더욱 손쉽게 캐릭터 구축을 할 수 있었다. 진중하고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캐릭터는 손해수가 가장 자신 있는 연기 스타일이니까.
이는 최한수 감독이 김현수 캐릭터에 손해수를 1순위로 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진중함을 통해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수가 제격이었다.
손해수는 첫 연습부터 최한수 감독이 자신을 택한 이유를 제대로 증명해 보였다. 준비 기간에 비해 눈에 띄는 캐릭터 구축을 보여 주며 자신이 캐릭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걸 어필했다.
안시현과 손해수, 『위장취업』의 두 주연 배우는 첫 연습부터 명불허전의 모습을 보여 줬다.
이 자리에 최한수 감독이 있었다면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고 함박웃음을 지었으리라.
첫 연습이 끝난 뒤.
JM액터스 사옥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손해수가 혀를 내둘렀다.
“너 진짜 작정하고 준비했더라? 솔직히 같이 연습해보고 많이 놀랐어. 여기서 더 끌어올릴 생각이라니까 무서울 지경이야. 나라면 그렇게 못 했어.”
“저야 준비를 오래 했다 쳐도, 선배님은 시나리오를 보름도 채 못 봤을 텐데 너무 말도 안 되게 캐릭터가 탄탄하던데요?”
“익숙한 스타일에서 살짝 변화만 주는 거니까. 감독님이 어째서 날 택했는지 시나리오 보자마자 알 것 같더라. 다른 사람에게는 어렵지만 내게는 비교적 쉬운 역할이고, 이미지 변화 또한 꾀할 수 있을 테니까.”
최한수 감독은 손해수에게 과한 이미지 변신을 요구하지 않았다. 기존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약간의 변화만을 통해 대중들의 시선을 180도 바꿀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왔다.
다른 배우에게는 어려운 캐릭터이지만, 손해수에게는 딱 맞는 옷이었다.
그래서일까?
손해수는 매번 연습할 때마다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연기에 몰두했다. 딱 봐도 신이 나서 연기를 한다는 게 티가 났다.
신이 나는 게 당연했다.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고도 이미지 변화를 노려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즐겁겠는가.
실제로 손해수는 상황에 따라 연습이 끝난 저녁 이후에도 홀로 연습실에 남아 연습을 이어 가기도 했다. 심지어는 2015년의 마지막 날을 집이 아니라 연습실에서 보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은 자극을 받았다.
류성웅과 연습을 할 때야 준비 기간이 꽤나 남아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크랭크인이 가시권에 들어온 시점이다.
함께 주연을 맡은 배우의 열연에 덩달아 동기 부여가 되는 게 당연했다.
‘대본 리딩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모든 준비를 마무리한다. 모든 신을 원 테이크로 끝낸다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해야 돼.’
손해수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안시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회귀 전 자신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힘썼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첫 대본 리딩 날이 다가왔다.
* * *
“간만에 메가폰을 잡게 된 최한수입니다.”
『위장취업』의 첫 대본 리딩의 최한수 감독의 인사말로 그 시작을 알리게 됐다.
“현장에서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던 만큼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지만, 영화는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분들이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방향성을 제시할 뿐이고요. 따라서 대본 리딩 때부터 다들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시해 줬으면 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는 촬영 때 적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과 손해수에게도 했던 말을 다른 배우들에게도 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 『위장취업』을 함께 만들어 나가기를 바랐다.
다만 대본 리딩 첫날부터 아이디어가 쏟아지지는 않았다. 적극적인 아이디어 제시가 감독의 권한을 침범한다는 생각을 한 배우들이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단 두 사람.
안시현과 손해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감독님, 방금 전에 말인데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 부분에서는 오버액션을 배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렇게 가는 게 더 웃기지 않을까요?”
“음. 제 생각에는…….”
“선배님, 그 아이디어 좋은 것 같아요.”
“그치? 역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시현이뿐이라니까.”
주연 배우인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아이디어를 내지 않으면 다른 배우들이 눈치만 살필 거라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대본 리딩 첫날부터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며 앞으로 나선 것이다.
다른 배우들이 부담을 가지지 않고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판을 만들기 위해 말이다.
두 사람의 노력 덕분일까?
첫날 이후 배우들은 대본 리딩 과정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이야기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으며 괜찮다고 판단된 아이디어는 실제 촬영 과정에서 적용될 예정이었다.
안시현 또한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냈다.
다만 첫날 이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저 회귀 전 『위장취업』에서 아쉬움이 남았던 부분에 대해서만 간헐적으로 조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박철우 캐릭터는 흠잡을 데가 없다. 일부 방향성의 아쉬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충분할 거야.’
소폭 차이가 발생하긴 했지만, 회귀 전과 후의 『위장취업』 시나리오의 큰 틀은 차이가 없다. 캐스팅 라인 또한 단역 몇 명을 제외하면 회귀 전과 동일하다.
즉, 『위장취업』이 8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던 요소가 모두 살아있다는 뜻이 된다.
이에 안시현은 굳이 아이디어를 많이 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마저 아이디어를 많이 내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걸 『위장취업』 때 제대로 느꼈지. 다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결과물도 좋았는데, 다 더해 놓고 나니 난잡한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좋지만, 너무 많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것저것 집어넣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영화가 어디 한둘이던가.
『위장취업』은 8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한 영화이지만, 초중반부에 다소 정신 사나운 몇몇 연출로 인해서 호불호가 갈린 영화이기도 하다.
재밌게 본 사람들은 코미디 장르에서 모처럼 대박 영화가 나왔다며 극찬했지만, 정신 사나운 연출 때문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며 기대 이하의 영화라고 평가하는 이들 또한 많았다.
귀국한 최한수 감독과 만난 이후, 안시현은 어떤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낼 것인가 고민했다. 권리를 부여받은 만큼 행사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거듭 고민해 봐도 아이디어를 추가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오히려 다른 배우들이 제시한 아이디어 중 몇 개를 과감하게 생략하는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내기로 했다.
회귀 전 『위장취업』에서 유일하게 아쉬움이 나왔던, 초중반부의 정신 산만한 연출을 거세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이디어는 좋아요. 다만…… 조금 과하지 않나 싶어요. 이렇게 가면 조금 정신 사납지 않을까요?”
안시현은 몇몇 아이디어가 너무 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배우들은 자신들이 낸 아이디어를 다시 한번 검토하는 과정을 가졌다. 안시현이 말한 것처럼 몇몇 아이디어가 과한 것일까 차분하게 점검해 보았다.
그 결과.
“확실히 정신 사나울 수도 있겠네요.”
“따로 놓고 보면 좋은 아이디어들인데, 다 합쳐 놓고 보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몇 개는 거르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으음. 아쉽네요. 저희가 머리를 싸매서 짜낸 아이디어를 버려야 한다니…….”
“일단 넣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때 가서 걸러도 되지 않을까요? 크랭크인 전에 버릴지 말지 결정하는 건 너무 급하지 않나 싶은데요.”
배우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안시현이 말한 대로 아이디어가 너무 많으니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는 의견과 기껏 짜낸 아이디어가 아쉬우니 일단 써 보고 생각하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다만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전자 쪽으로 의견이 조금씩 기울어지긴 했다.
결국 배우들은 아이디어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는 데에 공감하고 의견을 모았다.
한편.
“흐음…….”
최한수 감독이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과한 아이디어를 조절하는 건 좋지만, 어떤 아이디어를 선택하고 버릴지는 최한수 감독의 손에 달렸다.
배우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긴 했지만, 어떤 아이디어를 채택할지 결정하는 건 결국 감독의 권한이다.
회귀 전에는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지만, 이번에는 적절하게 고르는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고 있다.
‘확실히 아이디어는 죄다 좋지만…… 다 합쳐 놓고 보면 너무 과한 게 사실이야.’
당초 최한수 감독은 배우들의 아이디어를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안시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좋은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나왔지만 너무 넘쳐났고, 어떤 방향으로 편집을 하더라도 정신 산만한 연출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자신이 배우들에게 과하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안 배우가 아니라면 큰 실수를 할 뻔했어. 결국은 감독이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아야 현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건데 말이야.’
이에 최한수 감독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이디어를 무작정 수용하는 것이 아닌 냉정하게 판단해서 필요한 것들을 고르자고 말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이야기해 줘서 감사합니다. 아쉽게도 모두 다 수용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의 흥행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나흘 동안 대본 리딩은 없습니다. 아이디어를 반영한 시나리오 수정본을 준비해야 하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대본 리딩 내내 수동적이던 최한수 감독이, 긴 회의 이후 갑자기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우들에게 자신의 역할을 일부 떠넘기는 것이 아닌, 당초 목적대로 도움을 받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최한수 감독은 넘쳐나는 아이디어들 중 채택할 것과 버릴 것을 명확하게 선별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은 확신했다.
‘돌아오셨네.’
『형아, 동생』의 메가폰을 잡았던 당시의 최한수 감독이 돌아왔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