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12화 (21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3화>

213화. 하던 대로만

안시현이 아이디어를 절제하자고 의견을 낸 건,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다소 정신 사나웠던 연출만 수정해도 회귀 전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과정에서 최한수 감독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회귀 전, 대본 리딩 때까지 감을 잡지 못하던 최한수 감독은 막상 크랭크인 이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창 메가폰을 잡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의 이야기를 듣고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정리하며 이전과 달리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의욕이 앞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게 아닌, 어떤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어떤 아이디어를 반려할지 확실하게 기준을 잡고 판단을 내렸다.

그 결과.

대다수의 배우들이 최한수 감독의 의견을 듣고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선택이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감독님 덕분에 교통정리가 제대로 된 것 같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아이디어가 넘쳐날 때 깔끔하게 정리를 하는 건 감독의 역할 중 하나다.

다만 지금껏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최한수 감독이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여 준 건 배우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의외였다.

안시현 또한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최한수 감독의 변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한 달 가까이 빨랐으니까.

‘이거…… 생각보다 수월하겠는데? 감독님이 벌써 중심을 잡아 주시면 더할 나위가 없지!’

자고로 추억은 미화되는 법이다.

『위장취업』의 촬영 과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과가 좋아서 그렇지, 촬영 과정에서 꽤나 잡음이 나왔고 고생 또한 제법 한 게 사실이다.

그저 결과가 좋고 안시현에게 생에 첫 남우주연상을 수상해줬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거라고 봐야 했다.

잡음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최한수 감독이 대본 리딩 과정에서 보여 준 우유부단한 태도와 리더십 결여였다.

아이디어는 넘쳐나는데 컨트롤을 해야 할 감독이 중심을 잡아 주지 못하니 잡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최한수 감독이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리게 됐다.

이에 안시현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대본 리딩 때부터 최한수 감독이 중심을 잡아 준다면, 『위장취업』이 회귀 전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더 분발하자. 이제 나와 해수 선배님만 잘하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   *   *

안시현과 손해수.

두 배우는 대본 리딩 내내 치열하게 싸웠다.

손해수는 변화를 시도했던 작품들의 흥행 실패로 인해 굳어진 자신의 이미지와 안시현은 회귀 전 자신이 열연했던 박철우의 잔상과 말이다.

그중에서 안시현의 싸움이 조금 더 치열했다.

손해수의 경우 타인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고민거리지만, 안시현의 경우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기에 혼자서 고민해야만 하는 탓이었다.

그에 대본 리딩을 앞두고 안시현이 JM액터스 사옥 숙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한다고 했을 때 정혜영은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다.

“작품 때문에 이렇게 고민 많이 하는 건 처음 봤어요. 『편지』 때보다도 더 고민하고 준비하는 것 같은데…… 이왕 할 거 뒤를 생각하지 말고 매달려 봐요. 그래야 훗날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열심히 할게요.”

정혜영은 안시현이 한동안『위장취업』에만 집중하기를 바랐다. 일련의 준비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안시현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지지를 해준 것이다.

이에 안시현은 다음 날 아침, 정혜영과 라온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뒤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위장취업』이 크랭크업을 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말이다.

JM액터스 사옥 숙직실에 짐을 푼 날 저녁.

매니저 하정남은 제작진으로부터 전해들은 정보를 안시현에게 말해줬다.

“촬영장은 양평이 될 것 같습니다, 형님. 타 드라마에서 사용했던 세트를 보수해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별장에서 머무시겠습니까?”

“아냐. 숙소 구해 줘. 정남이 넌 불편하면 출퇴근하거나 별장에서 지내도 돼.”

“아닙니다. 크랭크인 하면 주말에만 집에 들어가겠습니다. 매니저가 배우랑 함께해야지 어딜 가겠습니다.”

“덕분에 외롭지는 않겠네.”

매니저인 하정남은 안시현의 옆에서 그를 살뜰하게 챙겼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줬다.

이에 안시현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회귀 전의 내 연기를 뛰어넘는다.’

회귀 전 안시현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위장취업』의 박철우를 연기했을 때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가진 능력 이상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 줬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박철우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었다.

회귀 후 정상급 배우로 발돋움하며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해 온 안시현이지만, 회귀 전의 인생 연기를 넘어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윤곽이 잡혀 갔다.

회귀 전보다 더 탄탄하게 캐릭터를 구축하며, 매 순간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모든 신에서 원 테이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

2016년 2월 18일.

『위장취업』의 크랭크인이 다가왔다.

크랭크인 전날.

하정남과 함께 앙평의 한 모텔에 장기투숙하게 된 안시현은, 저녁 식사를 하고서 촬영장으로 향했다.

“스태프 분들 드릴 음료랑 야식 좀 사갈까요?”

“응. 읍내에 있는 편의점 들려서 좀 사가자. 편의점 싹 다 털어버린다는 생각으로 넉넉하게 사게.”

“넵.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양손 무겁게 촬영장을 찾았을 때.

세트 준비는 모두 끝난 상황이었고, 스태프들이 막바지 점검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다음 날이 되면 이곳에서 안시현과 손해수, 그리고 다음 배우들이 연기 열정을 불태울 예정이다.

촬영장을 둘러본 뒤.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차로 돌아온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한 촬영장에서 박철우를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준비는 끝났다. 다시 이 시간이 찾아오더라도, 지금보다 더 잘 준비할 자신이 없을 정도야.’

오랜 시간 준비를 해 왔다.

지금껏 출연했던 그 어떤 작품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을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안시현의 표정과 행동에서 여유가 느껴지는 이유였다.

덕분에 목표는 아주 단순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던 대로만 하자.’

하던 대로 하는 것.

*   *   *

『위장취업』의 크랭크인 당일.

양평으로 취재를 가던 신입 연예부 기자가, 15년 차 베테랑 선배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촬영장 도착하기 전에 답을 끝낼 수 있는 질문이면 하고, 아니면 하지 마.”

“안시현 배우님과 손해수 배우님 두 분 다 연기파 배우시고, 최한수 감독님은 6년 정도 쉬셨다지만 필모그래피가 탄탄하시잖습니까.”

“그렇지. 이름값만 놓고 보면 장난 아니지.”

“근데 왜 선배님은 아침부터 전혀 기대를 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십니까? 혹시 손해수 배우님의 이미지와 안시현 배우님이 코믹 연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걱정하시는 겁니까?”

안시현이 코믹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과 손해수가 코믹 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위장취업』의 크랭크인 전부터 지속적으로 나온 이야기다.

이는 꽤나 많은 기자들이 『위장취업』의 흥행을 낙관하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팔색조인 안시현이라도 코믹 연기를 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고, 손해수의 고착화된 이미지가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이에 베테랑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야. 내 표정이 국밥 먹을 때부터 썩어 있었던 것과는 관계없지만.”

“혹시 국밥 맛이 없었습니까? 거기가 양평에서 제일 맛있는 국밥집이라고 하던데…….”

“국밥 맛있던데? 아, 이따 갈 때 포장해 가자. 마누라가 국밥 좋아하거든.”

“그럼 이유가 뭔가요?”

“이유? 별거 없어. 코미디 영화의 경우 촬영을 직관하는 게 생각보다 재미없는 경우가 많아서 그래. 재미없는 촬영 지켜보는 거, 생각 이상으로 곤욕이다.”

코미디 영화의 촬영 현장의 경우 생각보다 웃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출이 더해져야 하고, 전체적인 그림을 놓고 봐야 재밌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대한민국 코미디 영화 사상 최다 관객을 기록한 영화의 경우에도, 촬영을 하면서 배우들이 ‘우리 영화 더럽게 재미없는데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다.

또한 예전에는 슬랩스틱이나 유머러스한 대사 등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코미디 영화의 트렌드가 바뀐 것도 촬영이 재미없어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

대놓고 웃기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과 감각적인 대사를 적절하게 조합하며 웃음을 주다 보니, 편집이 더해지지 않으면 재미가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위장취업』은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와 어이없는 상황이 더해지며 나오는 괴리감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걸 목표로 하는 영화다.

따라서 현장에서 촬영을 지켜보는 게 따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나름 일리 있었다.

실제로 많은 기자들이 『위장취업』의 크랭크인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기삿거리가 필요해 오기는 하지만, 딱히 이슈가 될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위장취업』 자체보다는『형아, 동생』의 흥행 주역들이 재결합했다는 걸 타이틀로 잡고서 기사를 작성하려는 기자들이 꽤나 많았다.

게다가…….

‘안시현 배우야 팔색조니까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지만, 손해수 배우의 굳어진 이미지는 어떻게 해결하려나 모르겠단 말이지.’

카리스마 있고 진중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매력이 살아난다는 손해수의 정형화된 이미지는 안시현의 연기보다 걱정이 클 수밖에 없었다.

‘뭐……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최한수 감독이 제대로 된 선택을 했는지, 감이 떨어져서 그릇된 판단을 했는지 말이야.’

오전 11시.

『위장취업』의 크랭크인을 알리는 고사가 진행됐다.

“저희 영화 대박 나게 해주세요.”

“손익분기점 못 넘으면 영화사 대표님 오열 하실지도 모릅니다. 커트라인만 넘게 해주세요.”

“감독님 은퇴작이시니만큼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더도 덜도 말고 1000만 관객만 넘게 해주세요.”

“와. 시현 선배 욕심 장난 아닌데요?”

시대가 바뀌며 크랭크인을 앞두고 고사를 지내는 현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만, 최한수 감독은 여전히 고사를 지내야 무탈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다들 저마다의 바람을 담아 소원을 빌며 고사를 즐겼다.

고사와 점심 식사가 끝난 뒤.

“액션!”

최한수 감독의 사인과 함께 마침내 『위장취업』의 첫 촬영이 시작됐다.

첫 촬영 후보로 여러 신이 물망에 올랐지만, 주연 배우인 안시현과 손해수, 두 사람만이 출연하는 신이 선택됐다.

관심을 끌기 기장 좋은 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선택된 신 21의 촬영이 시작됐다.

그리고…….

“……괜찮은데?”

“손해수 배우가 저런 식으로 연기를 할 줄 알았나?”

“할 줄은 알겠지. 흥행을 못해서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좀 다르긴 하네.”

“안시현 배우야 그렇다 쳐도, 손해수 배우가 저런 느낌을 자아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아, 시놉시스만 알고 있어서 내용 파악이 어려운데도 피식했네. 이 정도면 괜찮다고 봐야겠지?”

예상과 달리, 기자들은 신 31의 촬영을 지켜보면서 연달아 호평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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