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4화>
214화. 참 힘드네
『위장취업』의 핵심 캐릭터인 박철우와 김현수는 IT 업계 만년 2위 기업의 직원으로, 경쟁 업체를 망하게 하자는 목표를 지닌 채 1위 업체에 산업 스파이로 취업하는 캐릭터다.
김현수가 박철우보다 5년 먼저 입사를 했고, 진척이 없자 박철우가 추가로 입사하게 된다.
신 31은 입사 이후 박철우가 처음으로 낸 기획안이 대박을 친 이후에 두 사람이 만나는 신이었다.
박철우의 집 안.
다수의 컴퓨터에 경쟁 업체와 관련된 자료를 띄워 놓은 채 박철우와 김현수가 대화를 나눴다.
다만 두 사람의 표정이 사뭇 달랐다.
박철우의 표정은 굳어 있는 반면, 김현수는 미소를 지은 만큼 여유가 넘쳤다.
“설마 했는데 철우 너까지 그럴 줄이야.”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팀장님? 혹시 팀장님께서 기획안에 손대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나중에 기획안 적용된 거 보면 알겠지만, 철우 네가 낸 기획안에서 토시 하나 안 바뀌고 적용되어 있을 거야.”
“말이 안 되잖습니까. 기획안이 통과돼서 적용된 건 그렇다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쓰레기 같은 기획안이 왜 대박을 치나고요!”
그랬다.
박철우의 표정이 굳어 있는 건, 경쟁 업체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입사 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던 기획안이 대박 났기 때문이었다.
그럴 듯해 보이는 쓰레기 기획안이 대박 났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반면 김현수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지난 6년.
이미 수차례 겪어 본 일이었으니까.
“철우야,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해서 낸 기획안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 처음에 쓴 기획안은 내 회심의 역작이라 해도 좋을 만큼 겉만 번지르르한 쓰레기였어. 근데 그게 대박이 나더라.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분명 쓰레기인데 대박이 났어. 정신 차려 보니까 팀장이 되어 있더라. 그래서 다섯 번째는 발상의 전환을 해서 멀쩡한 기획안을 만들어 봤지. 그랬더니 어떻게 된 줄 알아?”
“……대박 났나요?”
“그래! 대박이 났어! 너무 대박이 나서 부장으로 승진해 버렸어! 쓰레기도 대박이 나고, 멀쩡한 놈도 대박이 난다고! 이 회사는 미쳤어! 무슨 짓을 해도 망하게 할 수가 없다고!”
김현수가 얼굴을 붉힌 채 목에 핏대를 세웠다. 박철우가 입사하기 전까지 산업 스파이로서 홀로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감정이 격해졌다.
천운이 따르는 회사, 뭘 하더라도 술술 잘 풀려서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회사, 대표가 전생에 나라를 수십 번 구했을 것 같은 회사.
그게 바로 김현수가 박철우가 산업 스파이로 입사한 업계 1위의 IT 업체였다.
김현수는 지난 6년간 별의별 짓을 다 해 봤지만, 무슨 짓을 해도 타격을 입히는 게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가 낸 기획안이 대박을 치며 업체의 주가 상승에 혁혁한 기여를 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김현수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망하게 하지 못할 거라면, 부장까지 승진한 김에 그냥 현실에 순응하면서 사는 건 어떨까?
“이 회사는 미쳤어. 그러니까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해. 난 이미 몇 년 전에 포기했다. 억대 연봉을 받는 업계 1위 IT 업체의 부장, 괜찮잖아?”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너도 겪어 보면 알게 될 거다. 이 회사를 망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야.”
“두고 보십쇼. 제가 반드시 두 번째 기획안으로 이 회사에 큰 타격을 입힐 겁니다.”
“응. 힘내자. 파이팅.”
김현수가 약 올리듯이 박철우를 응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신 31이 마무리됐다.
“OK!”
두 번의 촬영 만에 OK 사인을 낸 최한수 감독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주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이대로만 갑시다! 크랭크업 때까지 진지하게 쭉!”
안시현과 손해수는 신 31을 촬영하며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을 보여 줬다. 김현수가 마지막에 파이팅을 하는 장면 정도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넣은 유일한 장면이었다.
분명 진지한 연기인데, 지켜보던 기자들이 피식 웃었다. 몇몇 기자는 웃음이 터질까 봐 조심스러워 했다.
아이러니한 상황과 진지한 연기의 조화로 웃음을 유발하겠다는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다행히 표정들이 좋네.’
신 31의 촬영이 끝난 뒤, 기자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안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귀 전에는 첫 촬영에 대한 반응이 그저 그랬었다.
넘쳐나는 아이디어로 인해 안시현과 손해수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크랭크업 직전에 추가 촬영을 통해서 아쉬운 부분을 보완한 끝에야 유머러스한 신으로 재탄생될 수 있었다.
반면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대본 리딩 과정에서부터 아이디어를 절제하며 방향성을 확실하게 잡았고, 덕분에 안시현과 손해수가 확실하게 방향을 잡고서 크랭크인을 준비할 수 있었다.
진지하게 연기하면서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준비를 한 게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거기에 신예 배우들은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아끼지 않고 열연을 펼쳤으며, 중견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팠다.
특히나 『위장취업』의 경우 코미디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중견 배우들을 몇 명 캐스팅했고, 그들은 크랭크인 당일부터 능글맞은 코믹 연기로 자신들이 캐스팅된 이유를 몸소 증명해 보였다.
-『위장취업』에서 대박의 향기가 난다.
-안시현과 손해수의 조합, 최한수 감독의 판단은 들리지 않았다.
-손해수의 연기 변신, 첫 시작은 성공적.
-안시현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은 없었다.
크랭크인 당일 저녁부터 호평 일색의 기사들이 제법 나오기 시작했다. 크랭크인을 지켜본 기자들이 『위장취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준 것이다.
이는 『위장취업』의 배우들에게 동기 부여가 됐다.
코미디 장르가 최한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지만, 워낙 오랜 시간 현장을 떠나 있었기에 우려 또한 공존했다.
일단 촬영 첫날은 기대 이상의 선전을 보여 줬다.
남은 촬영 또한 모두 순조로울 거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배우들이 힘을 낼 만한 분위기가 조성된 게 사실이다.
안시현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크랭크인 초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고생했던 회귀 전을 떠올리면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3월까지만 일정 소화하고 이틀 정도 쉴 테니까, 그 전까지는 『위장취업』에 올인 하자고.’
* * *
안시현은 『위장취업』에 올인 했다.
촬영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했으며, 촬영이 없는 날에도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내 연습에 매진하거나 배우들을 격려했다.
또한 배우와 스태프들이 지칠 즈음이면 손해수와 번갈아가며 밥차나 간식차를 불러서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촬영 일정이 길다 보니 적절하게 분위기를 환기시켜 줄 필요가 있어. 잘못하면 분위기가 가라앉고 촬영 후반부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영화 촬영은 드라마 촬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케줄에 대한 부담감이 적다. 방영 일정을 맞출 필요가 없기에 속도보다는 완성도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고 압박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촬영 기간이 길어진다는 건 그만큼 제작비가 많이 투입되고, 이는 배우들이 그만큼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위장취업』이 딱 그런 케이스이다.
주연 배우인 안시현과 손해수는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된 만큼 그게 어울리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데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손익 분기점 돌파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손해수는 최소 500만 관객 이상을, 안시현은 회귀 전 『위장취업』이 기록했던 800만 관객 이상의 성적을 거두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촬영장 분위기를 최대한 띄우고 배우들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솔선수범했다.
압박감을 긍정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물론 촬영 후반부로 갈수록 배우들의 피로감은 커질 테고, 그만큼 분위기가 처지거나 트러블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게 사실이다.
실제로 촬영 기간이 긴 영화들의 경우 현장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경우가 제법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잊을 만하면 밥차와 간식차를 부르고, 간간히 회식을 하자 배우들끼리 의기투합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오케이. 다들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현장 분위기가 좋은 데에는 최한수 감독의 역할 또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했다.
최한수 감독은 배우가 실수를 하면 격려했고,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면 극찬을 했다. 또한 애드리브에 관대해서 배우들이 마음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걱정거리였던 현장 감각의 부재는, 6년이나 현장을 떠나 있었던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 결과.
3월 말까지 『위장취업』은 전체 촬영 분량의 35% 가량을 소화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20일 가까이 일정을 앞당기는 데에 성공했다.
‘이거 잘하면 여름이 지나기 전에 촬영을 모두 마무리할 수도 있겠는데?’
『위장취업』은 2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9월에 촬영을 마무리하는, 8개월간의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었다.
하나 35% 가량의 촬영을 끝마친 시점에서 20일 가까이 일정을 단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재촬영 일정까지 포함하더라도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의 일정을 단축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덕분에 3월이 끝날 즈음이 되자 안시현과 손해수에게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연기 잘되고, 현장 분위기 좋고, 촬영 일정까지 단축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OK. 수고했습니다. 역시나 안 배우는 오늘도 명불허전이었습니다.”
3월의 마지막 날 촬영을 마무리한 뒤, 최한수 감독이 안시현에게 슬쩍 물었다.
“내일부터 이틀 쉴 예정이지요?”
“네. 시사회에 참여했다가 하루 동안 부부 동반으로 별장에서 푹 쉬기로 해서요.”
“두 달 동안 고군분투했으니, 짧은 시간이지만 재충전하고 오세요.”
“네. 그래야죠.”
4월 8일.
김진모가 주연을 맡은 『라이프』가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12개국에서 동시 개봉할 예정이고, 4월 1일에는 한국에서 언론 시사회가 진행된다.
이에 김진모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이 줄지어 입국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언론 시사회를 이틀 간격으로 진행한 뒤, 개봉에 맞춰 한국에서 무대 인사를 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한국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한국 배우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3월 31일 저녁.
“이틀 동안 푹 쉬고 와라, 정남아.”
안시현이 하정남에게 카드를 건넸다. 자신이 쉬는 동안 하정남 또한 편하게 쉬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괜찮습니다, 형님.”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 와이프랑 딸이랑 셋이서 맛있는 것도 먹고. 나 때문에 한동안 집에도 잘 못 들어갔으니까 보답은 해야지.”
“……감사합니다, 형님.”
하정남과 촬영장 주차장에서 헤어진 뒤, 안시현은 간만에 직접 운전대를 잡고 별장으로 향했다.
“아빠아~”
“아이고. 우리 라온이, 아빠 보고 싶었어?”
“네! 너무 보고 싶어서 숙제 다 하고 엄마랑 같이 아빠 나오는 영화 봤어요!”
“우리 라온이가 이제 영화도 볼 줄 알아?”
별장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향해 달려와 안기는 라온이를 보며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연습을 위해 JM액터스 사옥 숙직실에 짐을 푼 이후 간만에 만나는 것이었기에 반가움이 배가됐다.
안시현은 라온이를 품에 안은 채 정혜영과 함께 별장을 청소했다. 촬영 기간 동안 하정남이 가족들과 몇 차례 사용하면서 깨끗이 청소해 놓긴 했지만, 사람이 상주하고 있지 않기에 청소가 필요했다.
청소를 모두 끝내고 소파에 앉았을 때.
거실 창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김진모와 한나래 부부의 차였다.
‘우리 월드 스타님 얼굴 한번 보기 참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