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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14화 (214/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5화>

215화. 생각할 시간이

박의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김진모가 주연을 맡은 『라이프』는 한국에서의 언론 시사회 일주일 전, 뉴욕에서 먼저 언론 시사회를 진행했다.

『Timeless』의 성공으로 규모를 키운 JP스튜디오가 제작비를 전액 투자한 영화이니만큼 언론 시사회 전부터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보내며 홍보에 힘을 썼다.

그래서일까?

예상 이상으로 많은 기자와 연예인, 그리고 평론가들이 언론 시사회에 참석했다.

다만 기자들의 경우는 한국인 감독과 배우가 핵심이 된 영화가 할리우드에 도전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잘하는지 두 눈으로 보려고 참석한 케이스가 제법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망스러운 부분이 보인다면 혹평을 가할 생각이었지만…….

예상과 달리 혹평은 없었다.

언론 시사회에 참석한 기자와 평론가들은 『라이프』에게 5점 만점 기준으로 4.6점의 평점을 부여했다.

평가를 한 줄로 요악하자면, ‘색다른 시선으로 해석한 할리우드 스타일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였다.

또한 주연 배우인 김진모에 대한 극찬도 이어졌다.

사실 김진모의 경우 3인의 주연 중에서 출연 분량이 가장 적었지만, 극중에서 감초 역할을 제대로 한 데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뽐냈다.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배우를 데려오라고 했더니, 실제 마약 중독자를 데리고 와서 촬영을 했다고 말이다.

그만큼 김진모의 연기는 인상 깊었고, 현지에서의 극찬은 한국 언론들에 이해 번역되어 기사화됐다.

그렇게 해서 붙은 별명이 바로 월드 스타였다.

“아이고. 우리 월드 스타님 오셨어? 월드 스타라서 그런지 얼굴 한번 보기 참 힘드네.”

“……그 별명 처음 쓴 기자 찾아내서 고소한다. 반드시 고소하고 만다. 젠장.”

“그만큼 연기를 잘해서 붙은 별명이라고 생각하면 속 편하지 않을까?”

“너라면 그럴 것 같아?”

“미쳤냐. 바로 고소해야지.”

“크흐흐.”

안시현과 김진모가 미소를 지은 채 주먹을 맞댔다. 『라이프』의 촬영을 위해 김진모가 출국한 이후 첫 만남임에도, 어제 얼굴을 봤던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언니, 이거 라온이 선물이에요. 그리고 이건 언니 주려고 사 온 건데, 별건 아니고 귀걸이예요.”

“어머. 너무 예쁘다. 역시 연예인이라서 안목이 다르긴 다르구나. 저번에 선물 받은 귀걸이도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마다 꼭 하고 다니는데, 이것도 그래야겠다.”

“에이, 아끼지 말고 마음껏 차고 다녀요. 제가 또 구해 드릴게요. 앞으로 언니 귀걸이는 제게 맡겨요.”

한편.

한나래와 정혜영 또한 사이가 좋았다.

김진모와 한나래가 결혼한 이후 부부 동반으로 만난 적이 꽤 있었고, 그 전부터 꾸준히 교류를 해 오며 친분을 쌓은 덕분이었다.

특히나 한나래 쪽에서 정혜영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게 가능했다.

김진모와 한나래가 도착한 뒤, 본격적으로 저녁 식사 준비가 시작됐다. 한식이 먹고 싶다는 두 사람의 바람에 따라 저녁 식사는 삼겹살 구이와 된장찌개와 계란찜과 냉면 등을 준비하게 됐다.

푸짐한 저녁 식사 이후.

안시현은 김진모와 마당에서 가볍게 와인을 한잔하며 담소를 나눴다.

“촬영을 잘되고 있냐?”

“지금까지 20일 정도 일정을 앞당겼어. 9월이 아니라 여름이 지나기 전에 크랭크업 할 것 같아.”

“오. 생각보다 빠른데?”

“현장 분위기가 꽤나 좋은 덕분이지 뭐. 너는? 차기작 검토한 거 있어?”

“나? 이미 정했지. 대외비로 할 거면 가르쳐 줄게.”

“콜.”

“박 감독님이랑 할리우드에서 한 작품 더 하기로 했어. 2018년 초에나 촬영 들어갈 것 같은데, 그 전까지는 좀 쉬어 볼까 해. 허니문 베이비는 실패했지만, 이번 기회에 진짜로 아이를 가져 볼까 싶기도 해.”

회귀 전 김진모는 년 단위의 긴 휴식기를 가지지 않은 채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갔다. 또한 여러 연예인들과 염문설을 뿌렸지만 결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에 언젠가 한번 안시현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신과 달리 많은 여자를 만나면서 왜 결혼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당시 김진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결혼을 하면 책임을 져야 할 게 많아지잖아.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사위, 누군가의 아버지, 난 그런 거 너무 싫어. 지금처럼 자유롭게 연애하다가 독신으로 늙어 죽으려고. 세상에 만날 여자는 차고 넘치는데 왜 내 발에 족쇄를 채워?”

그랬던 김진모가 이번 생에는 한나래 외에 다른 여성은 만나지 않았고, 30대 초반에 결혼을 했으며, 이제는 아이를 가지기 위해 2년 가까이 휴식기를 가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너도 많이 변했네. 20대 초반에는 자유롭게 연애하면서 살 거라고 지겹게 말하더니.”

“그때는 그랬었지. 나래랑 연애를 제법 길게 하다 보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어느 순간, 이 사람이라면 평생 함께해도 되겠다 싶어서 결혼하게 됐고. 그나저나 시현이 넌 둘째 계획 없냐?”

“라온이가 동생 없이도 잘 지내서 아직은 없어. 요즘은 유치원에서 사귄 친구들 데리고 집에도 종종 놀러 오는 모양이더라고.”

“이야, 제수씨 힘들겠네.”

“제수씨가 아니고 형수님, 이 자식아.”

“응, 제수씨.”

안시현과 김진모는 한참 동안 일상과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꽤나 오랜 시간 못 봤다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기욤 뒤자르댕과 곽상필이 김진석의 강원도 별장에 아예 눌러 앉다시피 했다는 이야기까지 한 뒤, 김진모가 슬쩍 안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왜 눈치를 봐? 뭐 할 말 있어?”

“박 감독님이랑 차기작 관련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매번 결론이 똑같더라고. 시현아, 나랑 같이 할리우드에서 작품 한 번만 더 하자.”

“할리우드라…….”

김진모의 제안에 안시현이 말끝을 흐렸다.

『Timeless』 이후 할리우드에 일절 눈독을 들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기에 난감했던 것이다.

“네가 할리우드에 관심이 없는 건 알아. 하지만 다음 작품은 좀 다를 거야?”

“어떤 식으로?”

“『라이프』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영화라면, 다음 작품은 우리 스타일로 만들어 볼 생각이거든. 네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로 제법 돈을 만진 덕분에 JP스튜디오 쪽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고 말이야.”

“한국식 영화로 할리우드에 도전하겠다라…….”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할리우드에서 통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도전한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뭐, 널 설득하려고 억지로 끼워 맞춘 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김진모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우드에 관심이 없는 안시현이니만큼 설득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일찌감치 예상했다. 최악의 경우 공개 오디션을 통해 필요한 배우를 찾아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안시현의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김진모의 입장에서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 정도는 되는 결과였다. 적어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할 생각이 아예 없단 뜻은 아니니까.

“천천히 답변해 줘. 『위장취업』 개봉하고 나서 답변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으니까.”

“그래.”

안시현에게 고민거리 하나가 추가됐다.

*   *   *

『라이프』의 언론 시사회 당일.

간만에 박의준 감독을 만났음에도 안시현은 기분 좋게 웃지 못했다. 또한 평소와 달리 『라이프』의 감상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김진모로부터 들은 제안 때문이었다.

‘할리우드라…….’

할리우드에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오면 다시 한번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을 거라고 여지를 남겨 둔 게 사실이다.

박의준 감독의 차기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할리우드 스타일에 맞추지 않고 만든 영화로 할리우드 시장에 도전한다는 것만으로도 구미가 당겼다. 실제로 안시현은『형아, 동생』의 재개봉을 통해 한국 영화가 미국에서도 통한다는 걸 경험하지 않았던가.

다만 섣불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제작까지는 아직 2년이 넘게 남았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라이프』의 언론 시사회가 끝날 즈음.

마침내 안시현은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했다.

‘『위장취업』의 개봉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아.’

김진모의 제안이 매력이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매력이 너무 넘쳐서 문제였다. 지금 제안을 받아들이면 『위장취업』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에 안시현은 『위장취업』의 홍보 스케줄까지 모두 마무리한 뒤에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아, 영화 집중해서 못 봤어. 이게 다 진모 자식 때문이야. 비싼 저녁밥으로 복수한다.’

귀국하자마자 자신을 고민에 빠지게 만든 김진모를 살짝 원망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김진모의 제안으로 안시현이 고민하며 언론 시사회에 집중하지 못한 것과 별개로, 『라이프』의 언론 시사회에 대한 반응은 매우 좋았다.

다만 미국에서의 언론 시사회와는 관점이 달랐다.

미국에서는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하고 그 과중에서 김진모의 감초 연기를 칭찬했다면, 한국에서는 김진모에 초점을 맞추고 영화를 평가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한국인 감독과 주연 배우라는 것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물론 서로 상반된 시선 속에서도 공통점은 존재했다.

『라이프』가 걸작은 못 되더라도 수작은 된다는 것, 아포칼리스 3부작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레이첼 스타이너와는 상반되는 관점으로 해석하며 매력을 살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라는 것이었다.

언론 시사회에서의 호평과 김진모라는 배우의 한국 내 인지도 덕분일까?

『라이프』는 개봉 첫날 무려 34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예고했다. 단순히 관객을 많이 동원한 걸 넘어서 전반적인 평가 또한 좋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포털사이트에서 평점 10점 만점에 9.6점을 받았으니 말 다한 거였다.

개봉 3일째 되는 날.

『라이프』는 도합 130만 관객을 돌파하며 『편지』가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 기록을 소폭 차이로 갈아 치웠다.

일각에서는 대형 유통사의 스크린 독과점이 문제라면서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상영관을 아무리 많이 확보해도 영화가 재미없다면 흥행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기에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혀 예상지 못한 화두 하나가 논란이 됐다.

바로 『라이프』가 대한영화제에서 후보 자격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할리우드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이지만, 한국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감초 역할을 한 주연 배우가 한국인이라면 대한영화제 후보 자격이 주어져야 하지 않냐는 영화 커뮤니티의 베스트 게시글이 논란의 시작이었다.

이 논란은 기자들이 기사화를 하면서 생각보다 커졌다. 심지어 대한영화제의 주최 측에 직접 문의를 하는 이들까지 꽤나 생겨날 정도였다.

한편.

하정남을 통해 논란을 접한 안시현은 어이가 없어서 몇 분 동안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이게 왜 논란이 되는 거야? 당연히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건데 말이야.’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할리우드 영화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에만 후보 자격을 부여하는 대한영화제이니만큼, 애초에 『라이프』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논란이 된 건 『라이프』의 성적이 워낙 좋고, 예외적으로 후보 자격이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꽤나 컸기 때문이다.

결국 주최 측에서는 조항을 검토한 뒤 입장을 발표하겠다는 원론적인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주최 측이 입장을 밝히기 전에 『라이프』의 대한영화제 후보 논란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마무리됐다.

“할리우드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이니 할리우드 작품이 맞습니다. 대한영화제의 후보 자격이 주어진다면 시상식의 권위가 훼손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고민 하지 마시고 후보에서 제외해 주시길 바랍니다.”

박의준 감독이 입장을 밝힌 덕분에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논란이 잠잠해질 거고, 부정적인 이슈가 아니니 흥행에 도움이 될 텐데도 박의준 감독이 입장을 밝힌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했다.

‘상을 수백 번 받아도 흥행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어. 이런 걸로 시끄러워지는 걸 굳이 지켜볼 필요는 없겠지.’

박의준 감독에게는 수상 여부가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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