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6화>
216화. 그거 맞아
박의준 감독의 데뷔작인 『90일』은 예술 영화였다. 따라서 상업적인 흥행보다는 철저하게 주제 의식과 예술성을 살리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다.
『90일』이 예상 이상으로 흥행한 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흥행은 우선순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손익 분기점만 넘어도 감지덕지라는 분위기가 강했었다.
하지만 『라이프』는 다르다.
곳곳에 박의준 감독 특유의 예술성과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진 대중 영화다.
따라서 흥행 성적이 최우선 지표였다.
아무리 상을 많이 받아도, 심지어 황금영화제에서 황금뿌리상을 수상하더라도 흥행을 하지 못한다면 박의준 감독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행히 『라이프』는 한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개봉한 모든 국가에서 개봉 초반에 호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대로만 가면 제작비의 2배에 달하는 최종 수입을 거두고서 상영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대한영화제 후보 등록 같은 터무니없는 논란으로 입방아에 오르는 게 반갑지 않았다.
가만히만 있어도 흥행에 성공할 테니까.
‘자고로 잘될 때는 아무 짓도 안 하는 게 최고야.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 없잖아.’
그랬다.
박의준 감독이 먼저 나서 대한영화제 후보 논란에 대해 먼저 입을 열고 매듭을 지은 건, 겸손이나 배려 같은 문제가 아닌 『라이프』의 흥행을 바라서였다.
물론 대한영화제 후보 논란과 별개로 『라이프』는 흥행 가도를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이슈는 지양하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행히 박의준 감독의 입장 발표 이후 대한영화제 주최 측에서도 추가로 입장을 발표하며 더 이상 논란은 지속되지 않았다.
더불어 『라이프』의 흥행 가도는 시간이 흘러도 도통 잠잠해질 기미가 없었다.
영화 자체가 워낙 잘 만들어지기도 했거니와, 마땅한 경쟁작이 없기에 박스오피스 1위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 또한 흥행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맞이한 개봉 8일 차.
300만 관객을 동원한 시점에서 김진모는 박의준 감독 및 내한한 배우들과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올 때 라온이 줄 선물 사 올 테니 기대하고 있어라. 아, 그리고 나래는 휴식기 동안 제주도에서 지낼 집 알아봐야 해서 한국에 남아 있을 거니까 제수씨랑 같이 잘 좀 챙겨 주라.
출국 전 김진모가 남긴 문자를 보며 촬영을 준비하던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제수씨가 아니라 형수님이라니까 그러네.”
『라이프』의 홍보 일정을 마무리하는 대로 김진모는 귀국할 것이다. 그리고 한나래와 한동안 제주도에서 머물며 2세 계획을 세우고 데뷔 후 처음으로 1년 이상의 긴 공백기를 가질 예정이었다.
안시현이 『위장취업』의 개봉 후 홍보 일정을 끝마쳐도 김진모는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안시현은 한시라도 빨리 그때가 오기를 바랐다.
자신에게나 김진모에게나, 그 시기가 앞으로의 배우 인생에 꽤나 중요하게 작용할 거라고 직감했으니까.
* * *
김진모가 떠난 뒤.
안시현은 다시 『위장취업』의 촬영에 매진했다. 간만에 김진모 부부와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라온이와도 실컷 놀아 준 만큼 힘을 내서 촬영에만 매진했다.
‘후반부까지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게만 노력하자.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안시현이 『위장취업』을 촬영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 컨디션 조절이었다.
긴 시간 준비를 한 만큼 박철우 캐릭터의 완성도에는 자신이 있었고, 컨디션만 제대로 조절한다면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안시현은 『위장취업』의 출연 배우 중 가장 NG를 적게 내며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증명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최한수 감독은 혀를 내둘렀다.
‘당연히 잘해 줄 거라 믿고 캐스팅 제안을 한 거지만…… 이 정도까지 잘해 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위장취업』은 코미디 영화이니만큼 대부분의 배우들에게 코믹 연기를 요구했다. 당연히 그에 맞춰 캐스팅이 진행됐다.
다만 주연인 안시현과 손해수만큼은 예외였다.
사실상 두 사람이 영화를 이끌어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중이 높고, 이에 따라 진지함과 코믹 연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김현수가 어이없는 상황에서 한없이 진지한 모습을 보이며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라면, 박철우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꽤나 많았다.
최한수 감독이 안시현을 믿고 캐스팅 한 건 사실이다. 다만, 엄청난 난이도를 요구하는 캐릭터이니만큼 NG가 많이 날 거라 예상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촬영 기간을 비교적 넉넉하게 잡은 거다. 필요하다면 아쉬움이 남는 신들을 재촬영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최한수 감독의 예상과 달리 안시현은 촬영 내내 완벽한 줄타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위트 있는 대사를 애드리브로 심심찮게 만들어 낼 줄이야. 덕분에 분위기가 예상보다 더 살고 있어.’
간간이 요구되는 유머러스한 대사에 애드리브를 첨가하며 분위기를 살렸다는 것이다.
코믹 연기에 도가 튼 사람들도 잦은 시도를 통해 몇 개 건질까 말까 한 애드리브를, 안시현은 매우 높은 확률로 통과받으며 존재감을 뽐냈다.
오죽하면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이 코믹 연기를 처음 해 본 사람이 맞는지 몇 번을 의심했을 정도다.
그만큼 안시현의 연기는 인상 깊었다.
작정하고 『위장취업』을 준비했다는 게 여러 부분에서 느껴졌다. 특히나 촬영에 임할 때마다 보여 주는 특유의 집중력은 단역 일품이었다.
‘다른 배우를 캐스팅했더라도 박철우 캐릭터를 잘 소화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안 배우처럼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했을 거야.’
촬영이 진행되면 될수록 안시현에 대한 최한수 감독의 믿음은 굳건해졌다. 안시현이 어떤 애드리브를 보여 주건 믿고 맡겼다.
덕분에 촬영이 더욱 순조로워졌다.
5월 말.
『라이프』가 1200만 관객을 돌파하고서 상영을 마무리했을 즈음, 『위장취업』은 촬영 스케줄을 80% 이상 소화하며 7월 초로 크랭크업 일정을 앞당겼다.
약 두 달 가까이 일정을 앞당긴 것이다.
그만큼 안시현과 손해수를 필두로 한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해 줬다. 예상했던 것보다 NG가 절반 이상 적다 보니 촬영 일정이 줄어드는 게 당연했다.
6월 초.
고민 끝에 최한수 감독은『위장취업』의 촬영을 일주일 동안 촬영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촬영을 조속히 마무리한 뒤 재촬영까지 진행하기 위한 조치이니 다들 양해 바랍니다. 웬만하면 쉬지 않으려고 했는데, 촬영과 편집을 병행하려다 보니 이게 마음처럼 쉽지 않네요.”
최한수 감독은 『위장취업』의 촬영과 편집을 병행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은퇴작이니만큼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노력해도 편집 일정이 촬영 분량을 따라잡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촬영 시간에 비해 편집 시간은 상대적으로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고민 끝에 최한수 감독은 일주일 동안 편집에 올인 해서 재촬영해야 할 장면들을 추리기로 결정했다.
촬영 일정이 앞당겨진 만큼 재촬영까지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배우들은 최한수 감독의 마음을 이해했다.
우려가 많았던 은퇴작의 촬영이 예상 이상으로 순조로우니 욕심이 생길 법도 했다.
그렇게 맞이하게 된 일주일간의 휴가.
안시현은 무엇을 할까 고민에 빠졌다.
정혜영과 라온이는 유치원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제주도로 여행을 갈 예정이었기에, 거기에 동행할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만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은 아니야. 제대로 쉬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촬영이 순조로운 것과 별개로 일정이 길어질수록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다. 어느 현장이건 크랭크업이 다가올수록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피로감이 커지고, 체력 관리와 집중력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위장취업』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촬영이 순조로운 건 사실이지만, 네 달 가까이 촬영이 진행되다 보니 피로가 쌓인 배우들이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종종 일어났다.
최한수 감독이 촬영을 일주일 동안 중단한 건, 편집 때문만이 아니라 배우들이 휴식을 취하고 크랭크업 때까지 집중력을 유지하길 바라서이기도 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안시현은 촬영을 하며 쌓인 피로를 푸는 데에 일주일을 보내고 싶었다.
게다가 정혜영이 안시현의 여행 동행을 결사반대하고 나선 것 또한 영향을 끼쳤다.
“여행 따라오면 쉬지 못하고 피로만 더 쌓일 거예요. 촬영하면서 쌓인 피로를 풀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해 봐요. 정 없으면 별장에서 일주일 내내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에 빠져 지내는 건 어때요?”
“음. 생각 좀 해 볼게요.”
그렇게 결국 정혜영과 라온이만 제주도로 떠났고, 안시현은 홀로 집에 남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
“뭘 해야 휴식 잘 취했다는 말을 들을지 도통 떠오르는 게 없단 말이지.”
일주일 동안 할 일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절친인 김진모는 6월 말이 되어야 귀국할 예정이고, 말 상대를 해 줄 류성웅은 연초에 귀국했다가 3월에 다시 출국했으며, 가족들도 모두 제주도 여행을 떠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안시현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정수 선배나 만나러 갈까?”
* * *
얼마 전.
최정수의 차기작인 『해전』이 크랭크인을 했다.
크랭크인을 지켜본 기자들의 말에 따르면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는 거 말고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고, 세트장을 보면 제작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최정수는 사극도 잘 어울린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위장취업』과 달리 『해전』에 대한 언론들의 평가는 대체로 박한 편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주변 배우들의 이름값이 최정수를 제외하면 떨어진다는 것,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한 것에 어울리지 않게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 이전 작품들이 모두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했다는 것 등.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물론 안시현은 『해전』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갈아 치우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촬영 현장이 어떨지 기대가 됐지만 말이다.
결국 휴식 둘째 날.
안시현의 이름으로 『해전』의 촬영장에 밥차와 간식차가 도착했다. 그로부터 30분 뒤에는 안시현이 직접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왔어요, 선배.”
자신의 촬영을 끝마치고 밥차를 보며 어이없어하던 최정수는, 안시현이 싱긋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여길 왜 와 있어? 너 촬영 중이잖아. 이게 그 산업스파이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촬영 일주일 동안 쉬기로 했거든요. 최 감독님이 편집에 집중하겠다고 하셔서요.”
“그래? 촬영 기간 길어지니까 한 번 끊어 가려고 그러시나 보네. 오, 밥차 메뉴 죽이는데? 근황은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식사를 하며 안시현은 일주일 동안 뭘 하면 좋을지 최정수에게 물어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다작 안 하는 배우는 휴식일이 주어졌을 때 알차게 보내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주 요즘 기어오르지?”
“아하하.”
“하여간 워커홀릭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휴식을 알뜰하게 사용할 줄을 몰라요. 그럼 너, 내일 할 거 없는 거야?”
“있엇으면 제가 여기 있겠습니까?”
“그래?”
최정수가 먹음직스럽게 익은 스테이크를 썰지도 않은 채 통째로 씹어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생각을 끝마친 최정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럼 너, 나랑 강원도나 가자.”
“강원도요? 혹시 그…….”
“응.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한량 노인네 삼인방과의 오붓한 낚시 데이트!”
강원도에 있는 김진석의 별장.
안시현의 목적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