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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16화 (21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7화>

217화. 잊지 말거라

JM액터스 대표 이사 직함을 내려놓은 이후, 김진석은 회사 운영과 관련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박정상이 정기적으로 보고하려고 할 때도 만류했다.

“보고하지 말고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실적이 안 좋으면 해임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진석은 박정상이 JM액터스를 잘 이끌어 나갈 거라 확신했고, 실제로 박정상이 진두지휘한 이후 JM액터스의 주가는 10% 가까이 상승하며 김진석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박정상의 선전 덕분에 김진석은 마음 편하게 강릉에 있는 별장에서 노후를 즐길 수 있게 됐다.

한동안 JM액터스의 고문을 맡아 도움을 줬던 곽상필이 함께하는 것은 덤이었다.

거기에 기욤 뒤자르댕까지 합류했다.

기욤 뒤자르댕은 레이첼 스타이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출국할 때를 제외하면 두 사람과 함께 지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채 낚시를 하고, 간간이 정선 5일장을 가서 식료품을 구매하는 삶에 매력을 느꼈다.

그렇게 세 사람 모두 한량이 됐다.

별장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김진모는 안시현에게 직설적인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오래 있으면 지루해지긴 하는데, 단기간에 힐링하기는 좋아. 아, 거기 데이터 안 터지니까 혹시 갈 일 있으면 참고해. 텃밭에서는 전화도 안 될 때가 있더라고. 그런 후미진 곳에 별장 지을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니까.”

강릉의 한 산속 깊숙이에 위치한 별장.

최정수와 안시현은 그곳으로 향했다.

안시현은 휴가를 김진석의 별장에서 보내기로 결정했고, 최정수는 길안내를 해 줄 겸 간만에 세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강릉에 진입한 뒤.

안시현이 네비게이션 안내를 들으며 혀를 내둘렀다.

“와. 무슨 놈의 별장 가는 길에 네비게이션이 안 돼요? 목적지에서 20분은 더 들어가야 된다고요?”

“응. 사람 안 사는 산이니 그럴 만도 하지. 별장까지 가는 길도 험해서 고립된 수준이라니까. 실제로 작년에 폭설 왔을 때 한동안 고립됐었잖아.”

“와, 정말요?”

“응.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내려갈 수가 없었대. 그래서 다들 어떻게 한 줄 알아?”

“어떻게 했는데요?”

“고스톱 치다가 질리면 포커 하고, 포커가 질리면 다시 고스톱 치면서 눈 녹을 때가지 기다렸대. 평소에 5일 장 나가면 한 달 이상 지내고 남을 식료품을 사 와서 밖에 안 나가도 됐다더라고.”

“……거기서 살면 전쟁 나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흐흐흐. 그럴지도 모르지. 요즘은 드라마 말고는 TV도 잘 안 본다더라. 뉴스 보면 허구한 날 욕 나오는 일만 있어서 싫으시대.”

최정수의 말만 들으면 별장이 아니라 산골짜기에 우위치한 낡은 오두막일 것 같았지만,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운전한 끝에 도착한 별장은 안시현이 소유한 별장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차이가 있다면 정원 대신 텃밭이 있다는 것, 진돗개를 두 마리 키우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텃밭을 가꾸기 위해 근처에서 물을 계속 길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텃밭 아래쪽에 주차를 한 직후.

담배를 입에 문 채 김진석이 별장에서 나왔다.

“둘 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사 오란 건 사 왔고?”

“어휴. 여부가 있겠습니까?”

차에서 내린 최정수는 족발과 막국수가 든 봉투를, 안시현은 소주가 잔뜩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진석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족발에 소주가 그렇게 당기더라고. 나갔다 와야 하나 고민했는데 때마침 너희가 온다고 해서 이때다 싶었지. 들어가자. 지금 한창 바쁘거든.”

“판 벌리고 있었어요?”

“응. 너희도 껴. 낚시 갈 때 먹을 주전부리값 내기하고 있었거든.”

“재밌겠네요. 저희도 낄게요.”

안시현과 최정수가 김진석을 따라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거실에 담요를 깐 채 곽상필과 기욤 뒤자르댕이 앉아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오, 족발! 시현! 정수!”

“두 사람 다 오랜만이네요. 간만에 얼굴 보는데 이런 말하긴 뭐한데…… 일단 족발부터 줄래요?”

기욤 뒤자르댕과 곽상필은 간만에 본 안시현과 최정수보다 족발이 반가운 눈치였다. 냉동실에 쟁여 놓은 돼지고기가 떨어진 이후 2주 동안 채식만 했다나 뭐라나.

담요를 치우고 그 자리에 좌식 테이블이 자리했다. 족발과 막국수를 먹으며 다섯 사람이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드라마 말고는 잘 안 봐. 막장 드라마가 그렇게 재미있더라고. 시현이 너도 막장 드라마 주인공 한번 해 보는 게 어떠냐? 네가 출생의 비밀 찍으면 대박일 거 같은데 말이야.”

“전에는 막장 드라마 같은 거 왜 보는 줄 모르겠다고 하셨잖아요.”

“너도 은퇴해 봐라. 관계자의 입장이 아니라 시청자의 입장이 되면 달라질 거야. 욕하면서도 보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니까.”

“음. 동의합니다. 막장 드라마의 매력은 시청자로서 봐야 비로소 제대로 느껴지는 법이죠.”

“허허허. 확실히 막장 드라마가 보는 맛이 있어요.”

세 한량들의 막장 드라마 예찬론에 대해 지겹도록 들은 뒤, 족발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본격적으로 포커판이 벌어졌다.

“칩까지 있어요?”

“내기는 하지만 돈은 걸 순 없잖냐. 칩 다 잃은 사람이 내기에서 지는 거야. 심플하지?”

“주전부리만 걸고 하는 거면 재미없으니까, 하나 더 추가하는 거 어때요?”

“그럼 뭘 더 걸까?”

“1등을 한 사람에게 소원권 지급 어때요? 딱 한 사람에게만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걸로요.”

안시현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즉흥적으로 떠올린 아이디어인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1회용 소원권? 나쁘지 않네.”

“시현아, 속초 가서 닭강정 사 올 준비해라.”

“시현에게 시킬 만한 소원이 뭐가 있을까요?”

“제주도 가서 다금바리 살아 있는 놈으로 여기까지 가져오라고 하면 재미있겠네. 아, 그러고 보니 시현이 가족들 제주도 여행 갔다며? 딱이네.”

어째서인지 다들 안시현에게 소원을 사용할 생각인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각각 칩 50개씩을 가진 채 주전부리와 1회용 소원권을 걸고서 포커가 시작됐다.

게임 30분째.

안시현의 칩 중 무려 40개가 사라졌다.

“일단 주전부리는 확정난 거 같은데?”

“시현, 초보인 거 너무 티 나요.”

“허허허. 오늘 처음 해 본다는 최 배우보다 못하면 곤란한데요?”

“내가 한 수 가르쳐 주랴?”

다들 안시현이 꼴찌를 할 거라고 확정적으로 말했다. 칩 보유수가 4위인 최정수와 2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였기에 당연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칩이 5개 남았을 때 올인을 한 것을 시작으로 안시현은 빠르게 칩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칩 보유수 4위였던 최정수의 칩이 가장 먼저 동이 났고, 곽상필과 김진석 또한 족발을 다 먹기도 전에 칩을 모두 소진하고 말았다.

기욤 뒤자르댕과 안시현의 일대일 승부는, 일괄적인 베팅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안시현의 승리였다.

결국 1회용 소원권은 안시현에게 주어졌다.

“시현, 포커 배운 적 있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냥 오늘 운이 좀 좋았네요. 소원권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내일 말씀드릴게요.”

회귀 전.

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에 신 스틸러로서 출연했을 때, 안시현은 짧게나마 실제 타짜에게 도박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다.

물론 기술을 배운 건 아니었다.

연기를 위해 도박판에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방법과 자신의 심리를 드러내지 않는 법에 대해 배웠고, 덕분에 생에 첫 남우조연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칩이 10개가 될 때까지.

안시현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카드가 들어왔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반응, 진짜 좋은 패를 들고 베팅할 때와 블러핑을 할 때의 차이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프로는 없었다.

그리고 안시현은 짧은 시간이지만 타짜에게 심리전에 대해 배웠기에, 사실상 승부는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다음 날.

안시현은 소원권으로 최정수를 지목했다.

“언제 하루 시간 내서『위장취업』에 카메오로 출연해 주세요. 쉽죠?”

“짜식. 다금바리에 비해서는 양호하네.”

정선의 5일장에서 식료품을 잔뜩 구매한 뒤, 바로 옆 산에 있는 저수지로 낚시를 떠났다.

김진석과 안시현이 같은 포인트에서 낚시를 했고, 다른 세 사람은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 힐링되네.’

안시현은 기분 좋게 낚시를 즐겼다.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서로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경쟁하지도 않았다. 그저 낚시대를 던진 채 세월아 네월아 하며 물고기가 잡히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낚시에 임했다.

낚시가 아니라 여유를 즐기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까.

의자에 앉아 물비린내를 맡으며 노을이 지는 걸 구경하는 건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해가 거의 졌을 무렵.

“요즘은 잘 지내냐?”

“저야 뭐 항상 재미없게 사는 거 아시잖습니까.”

“진모가 같이 할리우드 가자고 했다며?”

“대외비라고 하더니 말했네요.”

“널 설득할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마음은 정했어?”

“아뇨.”

“이유는?”

“지금은 『위장취업』의 촬영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요. 차기작 문제 때문에 고민하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흐음…… 그래?”

김진석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김진석이 무언가를 고민할 때에 자주 보여 주는 습관이었다.

안시현은 입을 닫았다. 김진석의 고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10여 분 후.

김진석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는 했나 보구나. 시현아.”

“네.”

“JM액터스의 대표나 진모의 아버지가 연기에 젊을 시절을 바쳤던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말하마. 지금의 넌, 갓 데뷔했을 당시와 비교해 보면 안 좋은 방향으로 너무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안시현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회귀 이후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했다. 단 한순간도 연기를 소홀히 하지 않고, 그 덕분에 이제는 국민배우라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게 됐다.

회귀 직후나 지금이나 안시현의 목표는 똑같았다.

좋은 배우로 대중들에게 기억되는 것.

『위장취업』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는데, 난데없이 김진석으로부터 변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안시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떤 이유로 자신이 변했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어떤 의미로 제가 변했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데뷔 당시의 너는 좋은 작품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도전할 줄 알았어. 주위의 시선 따위나 흥행 여부는 의식하지 않았지. 오로지 네가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느냐만 생각한 거야.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걸 따지는 걸 보고서 변했다고 말한 거란다.”

그 순간.

안시현은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만 같았다. 김진석이 어떤 이유 때문에 자신이 변했다고 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회귀 직후만 하더라도 안시현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흥행 여부와 별개로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다고 확신이 서면 과감하게 도전했고, 성과를 내면서 자신이 좋은 배우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통한다는 걸 증명할 좋은 기회임에도, 『위장취업』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답변을 보류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안시현은 『위장취업』에 집중하고 싶은 게 아니라, 도전을 할지 말지 선택을 하는 게 어려워서 잠정적으로 보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시현아.”

“……네.”

“넌 분명 배우로서 많은 걸 이뤘어. 하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배우로서 기억되고 싶다면, 도전하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 도전을 두려워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거 잊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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