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8화>
218화. 신경 쓰지 마
휴가 3일째 되는 날 저녁.
“형님, 저 왔습니다!”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아닙니다. 딸내미 주려고 속초까지 들려서 닭강정 사온 게 고생이었지, 형님 픽업하러 오는 게 뭐가 고생이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넉넉하게 몇 마리 더 포장해서 왔습니다.”
“짜식, 하여간 센스 있다니까. 안주로 딱이네.”
최정수의 매니저가 그를 데리러 강원도의 별장까지 직접 찾아왔다. 아직 촬영 초반부라 일정이 빡빡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별장에서 느긋하게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곽상필에게 닭강정을 넘겨준 뒤, 최정수는 떠나기 전 안시현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소원권 쓴 거 최대한 빨리 처리하자.”
“괜찮겠어요?”
“어차피 할 거면 빨리 하는 게 낫지. 이제 막 촬영 시작해서 스케줄이 여유롭기도 하고.”
“음. 그럼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게요.”
최정수가 떠난 뒤.
휴가 내내 안시현은 여유를 즐겼다.
연습을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의 촬영 스케줄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위장취업』을 촬영하며 쌓인 피로를 푸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는 김진석으로부터 조언을 들은 이후 고민거리가 하나 사라진 덕분이 컸다. 머리가 복잡하지 않으니 온전히 재충전에만 집중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휴가 마지막 날.
김진석의 별장을 떠나 숙소로 돌아 온 안시현은 김진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었어?”
-아니. 스케줄 늦게 끝나서 지금 막 저녁 식사를 하러 온 참이야. 무슨 일이야? 라온이가 받고 싶은 선물이라도 있대?
“저번에 했던 제안 때문에 전화했어.”
-차기작?
“어. 그거 출연하려고. 시놉시스 완성되는 대로 달라고 박 감독님께 막 문자 보낸 참이야.”
-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위장취업』끝날 때까지 할 생각이 없어 보이더니 말이야.
“그냥……. 내 딴에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 그냥 도전이 두려워서 외면한 거라는 걸 누가 가르쳐 줬거든.”
안시현이 김진모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해 줬다.
설명을 들은 김진모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동안 웃은 뒤에야 어렵사리 말을 이어나갔다.
-그거 알아? 솔직히 이번만큼은 널 설득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지 못한 거. 네 반응이 너무 뜨뜻미지근해서 공개 오디션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고. 근데 이걸 아버지가 해결해 줄 줄이야.
“귀국할 때 뭐라도 사다 드려.”
-안 그래도 비싼 와인 한 병 구해 놓은 참이다. 아무튼 자세한 건 『위장취업』 크랭크업 한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김진모와의 통화를 끝낸 뒤.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앓던 이가 하나 빠진 듯한 기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제는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위장취업』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있긴 했다.
“네, 감독님.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 * *
『위장취업』의 촬영이 재개되는 날.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감독님.”
“허허허. 최 배우를 카메오로 출연시킬 수 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아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최정수가 『위장취업』의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시현과 약속한 대로 『위장취업』에 카메오로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안시현이 촬영 재개되는 당일에 최정수가 카메오로 출연할 수 있도록 최한수 감독에게 이야기를 했고, 최한수 감독이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약속을 이행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스케줄 변경도 없었다.
기존에 촬영할 분량에서 최정수가 출연할 만한 배역을 만드는 것으로 가볍게 해결했다. 애초에 잠깐 얼굴을 비추는 카메오 출연이니만큼 촬영 일정에 변동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 배우가 맡아 줄 건 눈치 없는 바이어 역할입니다. 어떤 캐릭터냐면…….”
최한수 감독은 최정수와 커피를 마시며 급조한 캐릭터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최정수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쉽네요. 바로 투입되면 되는 건가요?”
“두 번째 신이니 안 배우와 함께 대기하면 될 것 같네요. 대사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준비해 봤는데, 영 아니다 싶으면 애드리브를 해도 됩니다.”
“네. 몇 마디이니 한번 연습해 보고 입에 맞는 쪽으로 결정하겠습니다.”
최정수는 진지하게 촬영을 준비했다.
대사라고는 고작 다섯 마디 내외가 전부인 카메오임에도 주연 배우인 것처럼 연습에 임했다. 배역의 비중과 상관없이 모든 연기는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서 임해야 한다는 최정수의 가치관이 여기서도 빛이 났다.
안시현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최정수는 한결같다고 생각하며, 어느 순간 도전을 두려워하게 됐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함께 촬영을 준비해 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신의 촬영.
“오케이! 이대로 가겠습니다!”
촬영은 원테이크로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일주일간의 휴식을 만끽하곤 돌아온 안시현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 줬으며, 카메오로 출연한 최정수 또한 감초 연기가 일품이었다.
“허허허. 최 배우는 코믹 연기도 잘하는군요.”
“연극 무대에서 간간이 해 봐서 그런지 낯설지는 않네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극단인데, 이런 식으로 제게 도움이 되네요.”
“참 아쉽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최 배우와 코미디 영화를 한번 하면 좋을 텐데요.”
“이 참에 은퇴 미루고 저와 한 작품 더 하시죠?”
“어휴.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이제는 몸이 따라 주지 않아요. 더 이상 쥐어짤 시나리오도 없고요.”
최한수 감독은 최정수의 카메오 연기에 만족했다.
코미디 영화에 출연함 경험이 없음에도, 무대 경험만으로 기가 막힌 코믹 연기를 보여 줬으니까.
특히나 최정수 특유의 능글맞은 성격이 제대로 드러난 것 또한 좋았다.
카메로 출연이 마무리됐지만 최정수는 촬영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해가 진 이후에야 자신의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며 구경하고 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선배가 구경한다니까 부담스럽네요.”
“대통령이 와서 보고 있어도 천연덕스럽게 연기할 거면서 똥 싸고 앉아 있네.”
최정수가 구경하는 것과 무관하게 안시현은 일주일 만의 촬영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자신이 오전에 촬영한 두 신 모두 원테이크를 받아 낸 것이다.
안시현의 두 번째 신의 촬영이 끝났을 때.
밥차 한 대가 『위장취업』의 촬영장 주차장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최정수가 부른 밥차였다.
“허허허. 카메오 출연만으로도 고마운데 밥까지 얻어먹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크랭크인 때 『해전』의 촬영장에 쏜 밥차인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오, 선배. 이거 호텔 뷔페식 밥차 아니에요? 밥차 중에 제일 비싼 거잖아요.”
“큰 맘 먹고 지갑 연 거니까 후배들한테 생색 팍팍 내라. 알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밥차는 메뉴와 들어간 식재료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백반집보다 못한 구성이 될 수도 있고, 호텔 뷔페가 부럽지 않은 구성이 될 수도 있다.
최정수가 부른 건 밥차 중에서도 가장 가격이 비싼, 호텔 뷔페식 스타일의 밥차였다. 심지어 요리사가 직접 랍스터를 조리하고 있는 모습까지 보였다.
“와. 무슨 놈의 밥차에 랍스터가 있어? 스테이크도 직접 구워주고 장난 아닌데?”
“시현 선배님이 사줬던 고급 한정식 스타일의 밥차도 장난 아니었는데, 호텔 뷔폐식도 미쳐버렸는데?”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난데없는 고급 밥차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후배 배우들의 모습에 안시현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잘 먹을게요, 선배.”
“배고프니까 밥 먹자. 먹고 촬영장 복귀해야겠다.”
“벌써요? 해 지고 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후배 놈 하나가 연기 좀 봐 달라고 해서 가 보려고. 어휴. 이 자식은 데뷔 몇 년 차인데 아직도 뭐만 하면 나한테 연기 봐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이젠 같은 작품에 출연하니까 대놓고 부려먹고 말이야.”
투덜거리는 것과 달리 최정수는 미소를 지었다.
최정수는 재능의 유무와 관계없이 노력하는 후배를 좋아하고, 후배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며 연기에 매진하길 바라는 마음에 매년 거액의 적자를 흔쾌히 감수하며 극단을 운영하고 있다.
배우로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조언을 부탁하는 후배가 기특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데뷔 당시 안시현과 김진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식사가 끝날 무렵.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안시현이 최정수에게 조심스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선배. 저도 『해전』에 카메오로 한번 출연할까요?”
“오, 상부상조하자고? 그러면 나야 좋지.”
“밥차까지 불러 주니까 너무 미안해서요. 『위장취업』 촬영 마무리되는 대로 저도 밥차 불러서 한번 갈게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안시현이 『해전』에 카메오로 출연하겠다고 약속한 뒤, 최정수는 최한수 감독과 30분 정도 담소를 나눈 뒤『위장취업』의 현장을 떠났다.
‘별생각 없이 흥행에 조금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한 거였는데 생각보다 소득이 많았어.’
최정수의 카메오 출연으로 인해 『위장취업』이 얻은 이득은 여러 가지지만, 굳이 하나를 꼭 집어 고르라면 현장 분위기의 고조였다.
매 작품 기복 없이 정상급 연기를 보여 주며, 후배들을 위해 사비를 털어 극단을 운영하는 최정수를 롤 모델로 삼은 배우는 꽤나 많다.
『위장취업』의 촬영 현장에도 극단 출신 배우들이 몇 명 있었고, 그들은 카메오 출연을 하게 된 최정수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조심스레 조언을 부탁했다.
이에 최정수는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였다.
물론 조언이라고 해 봐야 별거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남의 촬영장에 감 놔라 내 놔라 하는 꼴로 비칠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냉정하게 피드백을 하기보다는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감을 심어 주는 걸로 방향을 잡았다.
덕분에 롤 모델로부터 칭찬을 받은 배우들은 오늘 당장이라도 남은 신의 촬영을 모두 끝마칠 것처럼 의욕이 넘치는 상태가 됐다.
‘선배가 큰맘 먹고 띄워 준 분위기이니 크랭크업 때까지 잘 유지할 수 있게 노력해야지.’
최정수의 도움은 카메오 출연 한 번으로 끝이다.
이제부터는 안시현과 손해수의 몫이었다. 지금껏 촬영장 분위기를 잘 이끌어 왔던 것처럼, 크랭크업 때까지 분위기를 이어 나갈 필요성을 느꼈다.
‘재촬영을 하다 보면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수도 있어. 특히나 『위장취업』이 데뷔작인 배우들은 재촬영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니 잘 다독여 주자고.’
재촬영을 하게 될 경우 자신이 연기를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받아들이는 배우들이 꽤 있다. 특히나 데뷔작에서 재촬영 신이 나오면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6월의 마지막 날.
촬영이 마무리 된 직후, 최한수 감독은 도합 12개의 신을 재촬영 할 것이라고 배우들에게 밝혔다.
이에 재촬영을 하게 된 두 배우가 의기소침해졌다.
무대 경험은 있으나 영화는 처음인 배우,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오디션에 합격해 『위장취업』으로 데뷔를 하게 된 배우였다.
안시현과 손해수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들이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다독여 줬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보완을 하면 더 좋은 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재촬영을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재촬영의 이유가 연기 때문이라면 나랑 해수 선배는 대역 죄인이지. 안 그래요?”
“대역 죄인은 시현이 너 혼자인 것 같은데? 난 재촬영 신이 5개고, 넌 7개잖아.”
“와.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다? 너무하시네.”
다행히 안시현과 손해수가 오버를 하며 장난을 친 덕분에 분위기는 금방 좋아졌다. 더 이상 배우들이 재촬영이 자신 때문이라고 탓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재차 분위기를 다잡은 가운데.
『위장취업』은 12개 신의 재촬영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며 크랭크업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7월 7일 오전.
재촬영을 포함한『위장취업』의 모든 촬영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