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9화>
219화. 제 44년이
『위장취업』의 크랭크업 이후 마련된 회식 자리.
“흠흠흠.”
소고기가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동안, 맥주가 가득 찬 술잔을 손에 쥔 최한수 감독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순간.
스태프와 배우들의 시선이 최한수 감독에게 집중됐다.
최한수 감독은 멋쩍었는지 몇 차례 헛기침을 하고서야 어렵사리 말을 이어 나갔다.
“내일부터 촬영장을 TV Y 드라마국에서 사용할 예정이라는 걸 듣고 나서야 제 은퇴작이 마무리됐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리모델링을 위해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된 촬영장은 직장 생활에서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TV Y가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사용하기로 했다.
이에 『위장취업』의 촬영이 마무리되자마자 TV Y 드라마국 PD가 스태프들을 데리고 와서 분주하게 장비를 옮겼다.
촬영 일정이 빡빡하기에 최대한 빨리 촬영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최한수 감독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 이제 정말로 다 끝났구나.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국을 떠나 시간을 보내면서, 딱 한 작품만 더 메가폰을 잡고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하나 남아 있었으니까요. 그게 바로 『위장취업』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다시 메가폰을 잡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최한수 감독이 진심을 담아 배우와 스태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또한 모두에게 손편지를 건네며 촬영 과정에서의 추억을 회상시켰다.
감수성이 풍부한 몇몇 배우와 스태프는 손편지를 읽다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다들 이제야 제대로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장취업』을 마지막으로 최한수 감독이 메가폰을 내려놓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값비싼 선물보다 수십 배는 값어치 있는, 진심이 담긴 최한수 감독의 편지를 읽으며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라고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최한수 작품과는 『형아, 동생』 때부터 인연을 쌓았기에 감정이 남달랐고, 곽상필이 은퇴를 앞뒀을 때만큼이나 울컥한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웃으면서 떠나 보내 줘야 한다는 걸 곽상필과 기욤 뒤자르댕, 그리고 김진석의 은퇴를 겪으며 절실하게 느꼈으니까.
안시현과 손해수가 시선을 교환했다.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짝짝짝.
그리고 이내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안시현과 손해수를 시작으로 배우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쳤다. 은퇴작의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최한수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덩달아 최한수 감독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여러분 덕분에, 지난 몇 개월이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최한수 감독이 메가폰을 내려놓았다.
* * *
크랭크업 이후.
안시현은 곧장 호텔 뷔페식 밥차와 함께『해전』의 촬영장을 방문했다. 약속했던 대로 카메오 출연을 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맡은 역할이 바로 파발꾼이었다.
대사는 단 두 마디.
“장, 장군! 전하께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최정수가 『위장취업』에 출연했던 것과 비교하면 대사나 비중이 적었지만, 애초에 카메오가 존재감을 어필할 필요가 없기에 상관없었다.
관객의 눈길을 잠시 사로잡는 정도면 충분했다.
물론 그 두 마디 대사마저도 안시현은 전력을 다해서 연기해했지만 말이다.
카메오 촬영이 끝난 뒤.
최정수는 커피를 마시며 안시현과 잠시 촬영장 주변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촬영을 잘 마무리했고?”
“네. 회식 자리에서 감독님이 스태프와 배우 전원에게 손편지를 줬는데, 다들 눈물 참느라 혼났어요.”
“감독님이 사람 잘 울리시지. 해수가 최 감독님이랑 세 번째 작품 하는 건데, 첫 작품 하면서 몇 번이나 울었던 거 알아?”
“해수 선배님 주연 데뷔작이요?”
“응. 그때 해수가 무대 경험은 많았지만 스크린 경험은 대사 다섯 마디짜리 단역이 전부라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거든. 그때마다 최 감독님이 항상 같은 말을 했다더라고. 내년에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배우가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되겠냐고.”
“정말로 남우주연상 받았잖아요.”
“응. 주연 데뷔작부터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
안시현은 손해수의 주연 데뷔작에 대해 최정수와 한참 동안이나 대화를 나눴다. 덕분에 손해수가 최한수 감독의 캐스팅 제안에 흔쾌히 응한 것이 이해가 됐다.
주연 데뷔작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준 감독이니 고마운 마음이 컸으리라.
생각해 보면 손해수가 최한수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다. 조연으로 한 작품, 주연으로 무려 세 작품을 함께했으니 말이다.
또한 안시현의 머릿속에 크랭크업 당일 최한수 감독과 손해수가 나눴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안 배우와 손 배우는 연말이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보도록 하죠. 그리고 손 배우는…….”
“괜찮습니다. 말 안 해도 압니다, 감독님.”
“허허허. 그래요, 그래……. 고마워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최정수로부터 과거사를 듣고 나니 두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대화를 나눴는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페르소나이니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통하는 어떤 게 있겠지. 우리가 모르는 게 말이야.’
* * *
한편.
『위장취업』의 크랭크업 이후, 최한수 감독은 충무로에 숙소를 하나 구했다. 혜인원 사옥에 있는 영상 편집실에서 『위장취업』의 편집 작업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배우들이 해 준 좋은 연기를 살리는 방향으로만 생각하자.’
최한수 감독의 방향성은 확실했다.
연출의 미나 특수 효과는 최대한 배제한 채, 배우들의 좋은 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배우들 모두 최한수 감독의 디렉팅을 제대로 따라 줬고, 간간이 나오는 애드리브 중에서는 신의 재미를 배가시킬 것들이 꽤나 많았다.
촬영 자체는 고됐지만 배우들이 즐기며 임해 준 덕분에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당초 30개에 육박할 거라 예상했던 재촬영 신이 12개에 불과했던 것이 그 증거였다.
배우들이 잘해 줬다 보니 재촬영을 통해 보완해야 할 법한 신들이 적었던 것이다.
‘배우들이 차려 준 밥상을 제대로 받아먹지도 못하면 감독 자격이 없지.’
최한수 감독은 욕심을 내지 않았다.
뭔가를 더하려고 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배우들의 연기를 최대한 살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러는 편이 오히려 『위장취업』의 완성도를 높이는 거라고 판단했다.
덕분에 특수 효과가 대폭 줄어들면서 편집 일정을 제법 단축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9월이 됐다.
이른 아침.
최정수 감독이 영상 편집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2시간 동안 퀭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영상의 재생이 모두 끝났을 때.
마침내 최한수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끝났다.”
『위장취업』의 편집이 마무리된 것이다.
이제 최종적으로 세 사람에게만 통과를 받으면 『위장취업』은 개봉 일자를 잡게 될 터였다.
결과물을 확인한 최한수 감독은 숙직실에 들어가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밤을 새며 마무리에 매진한 탓에 잠을 안 자고는 버틸 수 없었다.
다음 날.
최한수 감독은 세 사람 중 한 명을 만났다.
바로 6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 투자를 결정하며 자신의 손을 잡아 준 혜인원의 대표였다.
“이거, 내가 제일 먼저 보는 거야?”
“네. 형님이 1등입니다. 안 배우와 손 배우에게는 저녁에 보여 주려고 연락해 놨거든요.”
“대한민국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감독의 은퇴작 최종 편집본을 가장 먼저 보게 되다니, 영광인걸?”
“형님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시기에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입니다. 아마 지금까지도 투자사 구하느라 진땀 흘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네 은퇴작이니만큼 내가 전액 투자하는 게 맞지. 너라면 무조건 손익 분기점은 넘어 줄 거라 믿기도 했고.”
최한수 감독이 귀국 후 최대한 빨리 『위장취업』의 촬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혜인원의 대표가 전액 투자를 결정해 준 덕분이다.
이는 안시현과 손해수라는 배우가 주연을 맡고 최한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상, 손익 분기점만큼은 무조건 넘어 줄 거란 믿음이 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손익 분기점은 무조건 넘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연기를 워낙 잘해 줘서요.”
“그래. 그거면 된 거야. 100억 넘게 제작비 들여서 손익 분기점 못 넘은 영화가 은퇴작이면 속상하잖냐. 나 같으면 서러워도 잠도 못 잘 거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익 분기점은 마지노선이다.
마지막 작품인데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한다면 어디 마음 편하게 메가폰을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최한수 감독 개인적으로는 흥행 여부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상태였지만…….
‘지금은 주관이 아닌 객관이 필요한 시점이지.’
관계자의 판단이 어긋나는 경우가 어디 한둘이던가.
모든 영화가 감독의 기대치만큼의 성적을 낸다면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작품은 없었을 거다.
따라서 지금은 투자사 대표의 냉정한 평가를 필요로 하는 시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만의 조촐한 상영이 시작됐다.
2시간 뒤.
『위장취업』의 최종 편집본을 본 혜인원의 대표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진짜 좋은 거 맞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형님 표정이 너무 굳어 있는 거 같은데요?”
“아냐. 진짜로 좋아. 그냥 좀 아쉬워서 그래.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 은퇴한다니 말이야. 한두 작품은 더 해도 될 것 같은데.”
혜인원 대표의 말에 최한수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 또한 곽상필이 은퇴할 때 좀 더 하다가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며 아쉬움을 드러냈으니까.
혜인원 대표의 입장에서는 함께 늙어 가는 관계자가 점점 줄어드는 게 아쉬웠으리라.
하지만…….
“형님, 전 이제 아이디어가 고갈 났어요. 18살에 조명 스태프로 시작해서 무려 44년을 이 바닥에 있었어요. 이제는 후배들을 위해서 자리 하나를 비워 줄 때인 것 같아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최한수 감독의 결정을 변할 일은 없었다.
『위장취업』을 통해서 남아 있던 미련을 모두 해소했다. 이제는 메가폰을 잡더라도 더 이상 동기 부여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에 혜인원 대표는 아쉽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유라면 어떻게든지 설득해 보겠지만, 더 이상 메가폰을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감독을 설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쩝. 네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종종 놀러 올게요. 아니면 형님이 프랑스에 놀러 오는 건 어때요? 온 김에 동민이 그림도 하나 사 주면 좋고.”
“어쭈. 나한테 그림 팔아먹으려고? DC는 되냐?”
“허허허. 형님인데 당연히 해 드려야죠.”
“그럼 큰맘 먹고 한번 가야겠네.”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기도 잠시, 이내 혜인원 대표가 진지한 표정으로 『위장취업』과 관련해서 재차 이야기를 꺼냈다.
“영화 진짜 좋더라. 내가 최대한 경쟁 작품 없는 시기에 개봉 일정 잡아 보마. 타이밍 잘 잡고 마케팅만 제대로 하면, 대박 날 거 같다.”
“대박 나면 좋죠. 부족한 절 믿고 함께해 준 배우들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더도 덜도 말고 1000만 넘기자. 은퇴작이니만큼 1000만 관객 돌파하면서 한국 영화사에 이름 한 줄 더 남기는 것도 괜찮잖아?”
“1000만이라…….”
『위장취업』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걸 상상한 최한수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 아마 대성통곡할 겁니다. 제 44년이 헛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게 되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