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19화 (21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20화>

220화. 슬슬 한번

『위장취업』이 혜인원 대표로부터 좋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은 날 초저녁, 혜인원 사옥에 최정수와 안시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한수 감독은 혜인원 대표 다음으로는 무조건 안시현과 손해수가 최종 편집본을 봐야 된다고 대본 리딩 전부터 줄곧 생각해 오고 있었다.

『위장취업』은 안시현과 손해수가 없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영화이니까.

“다 보고 나면 술 한잔하러 가지요.”

“그렇지 않아도 식당 예약해 뒀습니다.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제 단골 식당 중 하나입니다.”

“허허허. 미식가인 손 배우 단골 식당이라니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부디 최종 편집본이 두 사람의 입맛을 돋우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시작된 간이 상영회.

안시현은 주연 배우가 아닌 관객의 관점에서 『위장취업』을 감상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몇 차례나 박장대소했다.

이는 손해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진심으로 즐겁게, 지난 몇 개월 동안 동고동락한 결과물을 감상했다.

간이 상영회가 모두 끝난 뒤.

“아, 진짜 너무 재밌었어요.”

안시현은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웃음에만 집중할 수 있는 영화.

그게 바로 지금의 『위장취업』이었다.

회귀 전에 다소 호불호가 갈렸던 정신 사나운 연출이 모두 사라졌고, 심사숙고 끝에 시도한 배우들의 애드리브가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더해 줬다.

거기에 안시현 개인적으로는 회귀 전보다 박철우를 더욱 잘 연기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배역에 따라 요구하는 연기가 다르다.

박철우는 코미디 핵심 캐릭터인 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유머러스한 대사를 툭툭 내뱉는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여 줘야 했다.

카메오로 출연했을 당시 최정수가 잠시 보여 줬던 그런 모습을 말이다.

안시현은 박철우에게 요구하는 연기를 완벽하게 보여줬다. 지금까지 보여 준 스타일과 다른 능청스러운 연기는 마치 김진모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이 정도면 됐어.’

안시현은 스스로의 연기에 만족했다.

더 잘할 수 있었다거나, 몇몇 부분이 아쉽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더라도 최종 편집본을 통해 확인한 박철우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지금의 박철우는 배우로서 안시현의 모든 걸 다 드러내며 연기한 것이었으니까.

“감독님. 저희 영화, 대박 날 거 같아요.”

“허허허. 혜인원 대표님도 그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확실히 제가 봐도 결과물이 잘 빠지긴 했습니다.”

“1000만 관객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정말로 100만 관객들 돌파한다면, 제가 두 사람을 업고 충무로 한 바퀴 돌겠습니다.”

“운동 좀 미리 하셔야겠네요.”

“허허허. 개봉 전까지 같이 운동 좀 할까요?”

“저야 좋죠.”

농담처럼 말했지만 안시현은 1000만 관객 돌파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회귀 전 8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했던 영화가 바로 『위장취업』이다. 문제점과 별개로 재미만큼은 확실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문제점을 해결하고 더욱 재밌어졌다. 송위 말하는 대박 영화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식사 중에 나온 최한수 감독의 발언은 이런 안시현의 예감을 확신으로 바꿔졌다.

“개봉 일정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2017년 3월 말로 정해질 것 같습니다. 앞당기려면 더 앞당길 수도 있는데, 혜인원 대표님께서 3월이 가장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1월과 2월에는 제법 강한 작품들과 경쟁해야 할 수도 있다면서요.”

개봉 일자가 2017년 3월 말로 잠정 확정된 것이다.

안시현이 생각했을 때, 혜인원 대표의 개봉 일자 선택은 『위장취업』의 흥행에 있어 신의 한 수로 작용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2017년에는 5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무려 10작품이나 나왔지만, 4월과 5월에 개봉한 작품 중에서는 5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없었다.

2017년 영화 흥행 순위와 개봉 일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4월과 5월이 그나마 비수기였다는 것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안시현이 준조연 역을 맡았던 영화가 4월에 빈집털이를 하려다가 실패하고, 어렵사리 손익 분기점을 넘기는 데에 그쳤었으니까.

손익 분기점을 넘는 것만으로도 성과를 낸 것이라고 보는 게 맞지만, 마땅한 경쟁작이 없는 상황에서 그 이상의 성과를 이뤄 내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남았던 기억이 존재했다.

‘3월 말이면 딱 좋아. 마땅한 경쟁작 없이 한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할 거야. 확실히 혜인원 대표님의 안목이 대단하단 말이야.’

개봉 일정과 관련해서는 안시현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위장취업』의 제작 및 배급을 담당하는 혜인원에서 결정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흥행에 있어 개봉 일정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봉 전만 하더라도 손익 분기점을 가뿐히 넘을 거라고 예상했던 한 영화가 있었다. 실제로 개봉 이후에도 관객들로부터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결국 30만 관객을 더 동원하지 못하며 220만 관객으로 손익 분기점 돌파에 실패했다.

이유는 단 하나.

각각 1200만과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이 난 영화들과 개봉 일정이 겹쳤기 때문이다.

2017년 4월과 5월에 손익 분기점을 돌파한 영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5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당초 800만 관객을 돌파했던 『위장취업』에 200만의 관객을 더해 주기에는 말이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손해수가 슬쩍 안시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현이 너, 개봉 전까지 뭐 할 거냐?”

“흐음. 아직 생각 안 해 봤어요. 집안일 하면서 쉬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럼 나랑 같이 제주도나 한번 다녀오자.”

“제주도요? 진모 보러 가게요?”

『라이프』의 홍보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김진모는 결국 제주도에 집을 구해서 자리를 잡았다.

한 동안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한 한나래와 함께 제주도에서 휴식을 취하며 배우로서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한편, 2세 계획 또한 세우기 위해서였다.

제주도 정착 초반.

김진모는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놀러오라고 권유하고 있었다. 안시현과 손해수 또한 연락을 받은 상황이었다.

“응. 놀러 오라고 계속 연락 오는 게 귀찮아서 한 번 갔다 오려고. 그리고 딸아이가 진모가 보내 준 감귤초콜릿을 엄청 좋아하더라고. 가는 김에 좀 왕창 사 올까 싶어서. 한라봉도 좀 사 오고.”

“흐음. 그럼 같이 갈까요? 언제 가면 좋을까요?”

“내일 당장 어때?”

손해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불구하고 안시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스케줄이 없는 지금 이 시기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요. 역시 여행은 즉흥적인 맛이 있어야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등산화 사러 가야겠네요.”

“짜식 뭘 좀 아는구나?”

그렇게 안시현과 손해수의 제주도 여행이 확정됐다.

*   *   *

다음 날, 제주국제공항.

“여기요, 여기!”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을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는 김진모를 보며 안시현과 손해수는 실소를 흘렸다.

주변을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진심으로 자신들을 반겨주는 모습이 참으로 김진모다웠기 때문이다.

“월드 스타 여기 있다고 소문내려고?”

“아, 월드 스타 별명 지어 준 기자 양반이랑 언제 한번 경찰서에서 만나야 하는데. 선배, 식사 하고 왔어요?”

“아니. 네가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해서 아침도 안 먹고 빈속으로 비행기 탔는데?”

“그럼 밥 먹고 집에 가서 짐 풀어요. 제가 뚫어 놓은 단골 맛집이 있거든요.”

김진모가 안시현과 손해수를 데리고 간 곳은 해물라면과 해물파전, 단 두 가지 메뉴만을 파는 식당이었다.

외관상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식당이었지만…….

“여기 음식 잘하네. 국물도 맛있고, 해물에서 비린내도 거의 안 나. 라면이야 솔직히 거기서 거기일 수도 있지만, 해물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연예계에서 미식가로 소문이 자자한 손해수가 극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라면 맛이 기가 막혔다.

안시현 또한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해물을 넣고 끓인 국물 맛도,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 해물의 맛도 좋았다. 해물이 잔뜩 들어간 해물파전 또한 진미였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김진모의 집으로 이동했다. 넓은 마당이 딸린 2층 전원주택이었고, 안시현과 손해수는 2층의 방에 짐을 풀었다.

“나래는?”

“내가 말 안 했나? 짐 정리할 거 있어서 서울 가 있어. 가는 김에 볼 일 좀 보고 다음 주에 내려온대.”

“이 자식, 그래서 빨리 오라고 난리였구나. 심심하니까.”

“빙고! 선배 내려오면 커피 마시러 가자. 내가 또 기가 막힌 카페를 알고 있지.”

그렇게 김진모가 안시현과 손해수를 데리고 간 곳은 무려 옆집이었다.

“여기가 카페야?”

“응. 난 매일 아침 산책한 뒤에 여기서 커피 마셔. 이 집 커피가 기가 막히거든. 들어가자.”

왈! 왈왈!

옆집으로 들어가자 마당에서 뛰어 다니던 리트리버 한 마리가 세 사람을 반겨 줬다. 김진모는 익숙하다는 듯 리트리버를 쓰다듬어 주고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 왔어요, 감독님. 손님들도 데리고 왔어요.”

“오늘은 어떤 배우분께서 오셨나요?”

“주연 배우랑 우정 출연해 줄 선배님이요.”

2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다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사내가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박 감독님도 함께 내려오셨던 겁니까?”

그랬다.

『라이프』의 상영이 마무리된 이후 두문불출했던 박의준이 김진모의 옆집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진모 씨한테 납치당했어요. 제주도에서 집필하면 시나리오가 쭉쭉 나올 거라나 뭐라나.”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한 것도 잠시.

너무나도 편안해 보이는 박의준 감독의 모습에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고 있나 보네.’

박의준 감독은 집필에 매진할 때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다. 오로지 집필에만 매달리며 지인들과 연락조차 거의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김진모의 옆집에서 살며 제주도를 방문한 배우들과 꾸준히 교류를 하고 있었다.

박의준 감독과 차기작을 같이 해야 하는 김진모가, 여유를 가진 채 작업하자는 이유로 집까지 구해 주면서 거의 억지로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 내려온 이후 집필 스타일이 바뀌었어요. 물론 좋은 방향으로요. 공기 좋은 곳에 있다 보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여유를 가지게 되더라고요.”

“확실히 지금이 더 좋아 보여요. 몸도 좀 더 좋아지신 것 같고요.”

“아침마다 운동 끌려다니고, 주말에는 등산까지 끌려다니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안시현이 박의준 감독과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눴다.

안면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소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박의준 감독은, 이전과 달리 손해수와 초면임에도 편한 분위기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핸드드립 커피를 다 마실 즈음.

“안 그래도 『위장취업』의 촬영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추석 연휴 이후에 시현 씨를 한번 만나러 갈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를요?”

“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올라가서 가지고 내려올게요.”

박의준 감독이 2층으로 올라갔다.

몇 분 후.

계단을 통해 내려온 그의 손에는 두툼한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차기작 시놉시스와 시나리오예요.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방향성에 대해 슬슬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떨까 싶었거든요.”

그것은 바로 박의준 감독의 차기작이자, 안시현과 김진모와 함께 다시 한번 할리우드 시장의 문을 두들기게 될 작품의 시놉시스와 시나리오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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