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20화 (220/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21화>

221화. 그래 주면 최고죠

김진모가 『라이프』의 해외 홍보 스케줄을 위해 출국한 뒤, 안시현은 박의준 감독에게 시놉시스가 완성되는 대로 보내 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

박의준 감독은 시놉시스를 보내지 않았고, 이에 안시현은 그저 생각보다 집필이 더디다 보니 시놉시스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판단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박의준 감독은 집필은 『90일』과 『라이프』 때보다 훨씬 순조로웠다.

다만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시놉시스를 보내는 것을 미룬 채 집필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집필이 끝나 슬슬 안시현에게 연락을 취할까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공교롭게도 그가 먼저 제주도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김진모가 박의준 감독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안시현과 손해수를 데리고 왔고, 덕분에 그는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것도 잠시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함을 되찾은 박의준 감독이 안시현에게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말했다.

“현재 30% 정도까지 집필이 끝났습니다.”

“와, 엄청 빠른데요?”

“진모 씨한테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거 아니면, 하루 종일 집필만 하고 있으니까요.”

“나 없었으면 박 감독님 거의 폐인이었을걸?”

“아하하. 동의합니다. 제가 원래 좀 집필할 때 주위를 돌아보지 않다 보니……. 진모 씨가 잘 챙겨 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김진모와 박의준 감독의 대화를 들으며 안시현이 시나리오 마지막 장을 보았다. 신 35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의 대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확인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러라고 가지고 온걸요.”

“그럼…….”

안시현이 잠시 자리를 피했다.

마당에 설치해 놓은 벤치에 앉아 아직 타이틀조차 정해지지 않은 미완성 시나리오를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리트리버가 초면임에도 배를 까뒤집은 채 애교를 부렸고, 안시현은 시선은 대본을 향한 채 한 손으로는 리트리버의 배를 쓰다듬어 줬다.

급기야 리트리버는 자신이 좋아하는 공을 물고 다가와서 안시현의 옆에 내려놓기까지 했다.

이에 안시현은 자연스럽게 공을 던져주며 리트리버와 놀아 줬다.

‘아, 힐링 된다. 너무 좋아.’

리트리버와의 교감은 안시현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줬다.

예상했던 것보다 배 이상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시간제한이 있는 게 아니기에 느긋하게 검토에 임했다.

한편.

“감독님, 실례가 아니라면 저도 시나리오 같이 봐도 될까요? 부족한 식견이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실내에 있던 손해수는 박의준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안시현이 검토를 끝낼 때까지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겸사겸사 자신도 시나리오를 읽어 보고서 감상평을 남겨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두 작품 연속으로 천재성을 입증해 보인 박의준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 어떤 내용일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배우님이 도와주신다면 저야 고맙죠. 올라가서 한 부 더 인쇄해 오겠습니다.”

박의준 감독은 즉시 시나리오를 한 부 더 인쇄해 왔다. 덕분에 손해수는 안시현과 나란히 시나리오를 검토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검토를 먼저 끝낸 건 손해수였다.

타이틀조차 정해지지 않은 미완의 시나리오를 내려놓으며 손해수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솔직히 좀 놀랍네요.”

“어떤 의미에서요?”

“『90일』과 『라이프』를 보며 감독님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

“다른 사람이 쓴 느낌인가요?”

“네.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감독님 특유의 주제 의식과 의미 부여가 몇몇 부분에서 느껴지는 게 신기하네요. 완성본을 봤으면 대사 한 마디 있는 단역이라도 좋으니 캐스팅해 달라고 했을 거예요.”

“와. 그거 엄청난 극찬인데요?”

박의준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 김진모와 꾸준히 대화를 나누며 방향성을 확인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초면인 손해수가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려 줄 수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냉정한 평가를 받아 보고 싶은 마음에 선뜻 시나리오를 건네줬는데…….

예상 이상으로 극찬이 쏟아졌다.

안시현이 들어올 때까지 박의준 감독과 손해수는 시나리오와 관련해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손해수는 조연으로 캐스팅되기를 바랐고, 필요하다면 오디션을 볼 의향 또한 있다는 걸 내비쳤다.

박의준 감독의 시나리오에 푹 빠진 것이다.

이에 박의준 감독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손해수에게 시나리오를 보여 주면서 예상했던 반응 중에서 단연 최고의 반응이었다.

주연급 배우가 조연을 자청하며 출연 의사를 드러내는 것만큼 극찬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배역을 원하십니까?”

“이름이 정해진 두 배역이 탐나지만 제 것이 아니고, 정해지지 않은 배역 중에서는 기자 A가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배우님이 연기하시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캐릭터네요. 원하신다면 출연료만 비워 놓은 채 지금 당장 계약서를 작성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시죠.”

계약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박의준 감독의 입장에서야 손해수라는 좋은 배우가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준다고 하니 고마웠고, 손해수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홀딱 뺏겨 버린 시나리오를 놓치고 싶지 않아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안시현이 시나리오 검토를 끝마치고 들어왔을 때, 박의준 감독와 손해수가 출연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응? 선배, 이 작품에 출연하려고요?”

“시나리오에 현혹돼 버렸지 뭐야.”

“왠지 선배라면 기자A를 제일 원했을 것 같은데요.”

“빙고. 『위장취업』에서는 새로운 옷도 어울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줬으니, 이번에는 늘 입고 다니는 옷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걸 보여 주려고.”

“선배가 출연해 주면 최고죠.”

시나리오 검토를 끝낸 안시현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연기력 출중한 주연급 배우를 조연으로 캐스팅해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몇몇 조연 캐릭터들이 비중에 비해 존재감을 괘나 어필해야 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박의준 감독은 몇몇 조연을 단순히 신 스틸러에 그치지 않고 안시현이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서 보여 줬던 것처럼, 비중과 별개로 주연급 존재감을 뽐내는 캐릭터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를 손해수가 맡아 준다면 캐스팅 걱정을 한결 덜 수 있지 않겠는가.

안시현은 출연 계약서 작성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박의준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 제게 맡게 될 배역 말인데요. 한성우죠?”

“음. 너무 시현 씨를 생각하고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게 티가 나던가요?”

“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캐릭터를 진모가 연기한다는 게 연상이 되지 않아서요. 할리우드에도 통하는 한국 영화를 만들려면, 저나 진모나 굳이 새 옷을 입으려 하지 않고 가장 잘하는 걸 하는 게 맞을 테니까요.”

“정확한 판단이네요.”

박의준 감독이 집필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범죄 스릴러 영화지만, 전형적인 틀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다.

조작된 증거로 인해 범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한 사내가, 출소 후 진실을 묻기 위해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형사의 지하실에 갇힌 채 영화가 시작된다.

자신을 가둔 형사와 대화를 나눈 뒤에야 사내는 깨닫게 된다. 눈앞에 있는 형사가 20건이 넘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으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심지어는 몇몇 미제 사건의 범인마저도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를 말이다.

바로 형사가 범인이었기 때문이다.

형사는 사내를 죽이려는 찰나, 갑자기 들린 벨소리로 인해서 1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한 언론사의 기자를 만나게 된다.

기자는 형사에게 조심스럽게 취재를 요청한다.

형사가 해결했던 살인 사건의 증거 중에 이상한 게 하나 있다면서 말이다.

이 중 박의준 감독이 안시현에게 원하는 배역은 형사 한성우다. 자신이 직접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조작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형사가 된 연쇄살인마를 연기하기엔 안시현이 제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편지』에서 연기했던 남궁수민 캐릭터와 이미지가 어느 정도 겹치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지가 겹치는 캐릭터를 연기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미지가 일부 겹친다고 해서 캐릭터 자체가 똑같은 건 아니니까.

한성우는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다. 아직 시나리오가 3분의 1 정도밖에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시나리오를 통해 캐릭터의 매력이 확실하게 전달됐다.

이미 박의준 감독과 차기작을 함께하기로 했기에 번복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이 연기해야 할 캐릭터의 매력이 넘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물론 매력 넘치는 캐릭터는 그만큼 연기하기가 어려운 게 대부분이지만…….

이는 안시현에게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캐릭터는 연기하기 어려워야 제 맛이지.’

남파공작원의 두 가지 모습을 이중인격처럼 연기했던 『나는 간첩입니다』의 리수철을 시작으로, 안시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운 캐릭터를 연기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연기하기 쉬운 캐릭터는 진부하거나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안시현이 선호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으니까.

난이도가 얼마만큼 높더라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연기를 통해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여 줄 수 있느냐였고, 박의준 감독의 차기작 시나리오는 안시현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에 차고 넘쳤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일 정도였다.

시나리오가 완성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할 테니 말이다.

“아, 진짜 아쉽네요. 어떻게 내후년까지 기다리죠?”

“『위장취업』 홍보 스케줄 소화하다 보면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가지 않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위장취업』의 개봉 일정 정해졌나요?”

“네. 3월 말로 예정되어 있어요.”

“오. 딱 좋네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4월과 5월에 괜찮은 작품이 마땅히 안 보이다고 하더라고요. 잘하면 경쟁 없이 순항할 수 있겠는데요?”

“그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죠.”

“3월 말 개봉이라……. 그럼 최소 5월 말까지는 바쁘다고 보면 되겠네요. 조금 길어지면 6월일 테고요.”

“이것저것 감안하면 6월까지는 어느 정도 스케줄이 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상영이 마무리되더라도 이후 최소 열흘, 최대 한 달 정도는 간간히 스케줄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특히나 안시현의 경우에는 작품을 진행 중일 때는 외부 스케줄을 일절 잡지 않는 스타일이다 보니, 한동안은 팬들을 위해서라도 얼굴을 내밀 필요가 있었다.

그걸 감안하면 6월까지는 제법 바쁠 거라고 보는 게 맞았다.

“흐음…….”

박의준 감독이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6월이면 조금 빠듯하긴 한데 얼추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네요. 시현 씨의 스케줄이 끝낼 때까지 시나리오 완성시켜 놓겠습니다. 완성 후에도 퇴고를 몇 번 하긴 해야겠지만, 대화를 나누려면 완성된 놈이 있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 주면 최고죠.”

“이왕 전형적인 한국 스타일의 영화로 할리우드의 문을 두들겨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작정하고 준비해야죠. 죽어라 준비해 보겠습니다.”

기간을 정해 두고 시나리오 집필을 하다 보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꽤 있지만, 박의준 감독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손해수와 안시현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집필 방향성이 옳다고 확신을 품게 된 덕분이다.

막힘없이 집필을 하면 되는 상황이고, 초고를 완성한 뒤 다시 대화를 나누며 퇴고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하게 손 배우님의 합류까지……. 상황이 이러한데 어떻게 의욕적으로 집필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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