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8)

댕댕공 냥냥수

1권

01.

[보면 연락해 줘. 이번에 또 그만둔대.]

알림창에 뜬 메시지 내용에 진호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주어는 없었지만 보나 마나 한 달 전 채용했던 경호원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일을 그만둔 건 유감이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드디어 자유다.

호주머니에서 몇 번 진동이 울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다 잊고 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했다. 올해 스물다섯의 나이 서진호는 아끼는 향수를 손목에 뿌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입대 이후 2년 만에 가 보는 단골 게이 바 ‘투나잇’은 여전했다. 대부분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느라 바쁠 평일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하룻밤을 보낼 짝을 찾느라 야단이었다. 급히 입을 놀리며 수작을 부리는 남자들을 보며 진호는 홀 구석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위스키 한 잔을 시켜 입 안에 털어 넣자 쓰디쓴 알코올 향이 코끝을 찔렀다. 지금은 그저 시원한 느낌뿐이지만 처음 술을 접했을 때는 강한 맛에 헛기침을 켈록켈록 터뜨리곤 했다. 스무 살의 진호는 자신을 어른이라 여겼지만 실은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일 뿐이었다.

「술 처음 마셔?」

대학 입시가 끝난 뒤,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참석한 어느 교수 아들의 생일 파티였다. 멋모르고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투명한 음료를 마셨다가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놈이 말을 걸었다. 뻘쭘하게 선 채 그렇다고 끄덕이니 상대는 픽 웃었다.

「이거 마셔 봐. 달아서 먹기 편할걸.」

그가 건넨 것은 투명한 붉은빛이 매력적인 고급 칵테일이었다.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니 달큼한 향이 퍼지며 쓰렸던 속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아버지가 시켜서요.」

짧은 말에 떨떠름히 대답했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나도 그런데’라며 동감했다.

「갑자기 생일 파티를 열었으니 오라고 하더라고. 원한 적도 없는데.」

툭툭 내뱉는 반말은 거슬렸지만 나쁜 의도 같진 않았다. 경계를 풀고 칵테일을 홀짝이며 그를 쳐다보자 뭐가 웃기는지 자꾸 피식거렸다.

「귀엽네. 내가 좋은 거 구경시켜 줄까?」

그놈은 연회장을 벗어나 호텔 꼭대기 층의 루프탑으로 데려갔다.

「여기서도 마실 수 있어.」

술기운 탓인지 아래로 펼쳐지는 서울의 야경 탓인지 기분이 들떴다. 그렇게 주량도 모른 채 한 잔, 두 잔 들이켜다 보니 머리는 알딸딸해졌고, 처음으로 이성을 놓아 버린 입은 필터 없이 속마음을 나불거렸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데 말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면 어떻게 하죠…….

무슨 비밀인데?

음. 그게……. 밝히긴 어려운데.

잠시 뜸을 들이자 상대가 고개를 당겨 왔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을 보자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왜인지 이 사람에게는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어디라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 너무 컸다. 그 상대가 누구든.

제가요. 아무래도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응응. 힘들었겠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방에서 좀 쉴까?

남자는 예상보다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거절당하지 않았어. 그 사실이 기뻐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론 기억이 없었다. 어느새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기회 되면 또 보자.」

얼얼한 뒤를 어루만지며 아픔을 토로하기도 전에 남자는 다음을 기약하며 사라졌다. 그렇게 진호는 이쪽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선배. 저 기억 안 나요?」

운명적이게도 진호는 그 남자를 새내기 MT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조심스레 입을 떼자 남자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기억난다고 답했다.

그 대답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용기를 가진 뒤로는 활발히 그를 따라다녔고, 노력 끝에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선배는 하루가 멀다고 다른 남자와 밤을 보냈고, 진호는 사귀는 내내 울지 않은 날보다 운 날이 더 많을 정도로 마음고생을 톡톡히 했다.

한쪽이 매달려 지속된 관계. 그 관계는 3년이나 이어졌고, 선배의 돌연한 잠수로 막을 내렸다. 석 달째 전화를 받지 않는 선배를 원망하며 여기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게 바로 2년 전. 그 후로 도피하듯 입대하여 군대에서 고생하며 가까스로 미련을 지웠다. 내일이 복학 첫날임에도 굳이 이 게이 바에 들른 것은 간만의 자유가 사라지기 전에 남자라도 낚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랬는데.

“신현우……. 나쁜 새끼…….”

눈 아래에 맺히는 촉촉한 무언가가 뺨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남자는 개뿔. 여전히 타들어 가는 듯한 속을 움켜쥐며 진호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다. 구석구석 과거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곳에 제 발로 들어오다니.

이 게이 바도 그놈이 알려 줘서 알게 된 곳이었다. 신현우 그 자식이 어디가 좋아서 아직도 못 잊었냐. 한심한 서진호. 술로 속을 달래고자 흐린 눈으로 지갑을 열었다.

“저기요. 여기 위스키 한 잔만 더…….”

“수영 씨. 오늘은 어제보다 더 잘생겼네요.”

뒤에 서 있던 노란 머리의 남자가 진호의 말을 자르며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하하. 감사합니다. 손님.”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바텐더에게로 시선을 옮긴 진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에 저런 남자가 있었나.

족히 190은 될 법한 키에 성인 하나는 가뿐히 걸칠 수 있을 듯이 널찍한 어깨. 반듯한 눈매와 깔끔하게 정돈된 갈색의 머리칼이 마치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배우 같았다. 가슴 왼쪽에 달린 금빛 명찰에는 정갈한 글씨로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남수영.

너무나 정직하게 적힌 닉네임에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면 실명인 줄 알겠네. 지명률을 높이기 위해 머리를 꽤 썼는걸.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로 주문하려는데 이번에도 노란 머리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따 끝나고 나랑 다방에서 차 한잔 어때?”

쌍팔년도에도 쓰지 않을 작업 멘트를 날리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남자를 본 진호가 속으로 혀를 찼다.

“좋죠. 근데 일이 새벽 5시에 끝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내일 일이 없어서 기다릴 수 있어. 수영 씨만 괜찮으면.”

“어머. 자기. 나랑 만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노란 머리가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띠기도 전에, 갑자기 달려든 긴 수염의 남자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수영을 쏘아보았다.

“달콤한 목소리로 약속했잖아. 자기, 그 말은 거짓이었어?”

“이봐. 수영 씨는 나랑 보기로 했어.”

노란 머리가 인상을 구기며 긴 수염을 밀치자 긴 수염이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이 아저씨가? 우리 자기는 나랑 먼저 약속했다고요!”

“언제부터 수영 씨가 네놈의 자기가 된 거지? 좋은 분위기 초 치지 말고 썩 꺼져.”

“꺼지라고? 당신 말 다 했어?”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진호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술 한 잔 더 시키려다가 봉변만 당하겠다 싶어 자리를 뜰까 고민하는데, 수영이란 가명의 바텐더가 온화한 미소로 둘을 말렸다.

“싸우지 마세요. 두 분 다 만날 거니까요.”

“우리 둘 다?”

그 말에 노란 머리와 긴 수염이 동작을 멈추며 동시에 수영을 쳐다보았다.

“누구 먼저?”

“누구 먼저라니요. 당연히 셋이서 보는 거죠.”

“수영 씨. 그런 사람이었어?”

노란 머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수영을 보는 반면 긴 수염은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팔을 꼬았다.

“자기. 생각보다 화끈한데? 우선 난 찬성.”

“그런 사람? 화끈? 무슨 말씀이시죠?”

바텐더는 되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셋이서 차 마시면 되는 거잖아요.”

순진한 건지, 아니면 고도의 수법인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진호는 흥미진진한 전개에 몸을 의자로 돌려놓았다.

“수영 씨. 설마 차만 마시자는 뜻으로 알았어?”

“세상에. 너무 귀엽다.”

호들갑을 떨며 긴 수염이 수영의 팔뚝을 꼬집었다.

“차 마시자는 말이 다른 의미도 있나요?”

수영은 능청스럽게 –순전히 진호의 시각에서– 와인 잔을 닦으며 눈을 끔뻑였다. 이때다 싶었던 긴 수염이 선수를 쳤다.

“궁금해요? 내가 알려 줄까요?”

“크흠. 나도 알려 줄 수 있는데.”

뒤늦게 말을 뱉은 노란 머리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훑으며 수영의 손끝을 매만졌다.

“네. 알려 주세요!”

모르는 척이라기엔 너무 갔는데. 진호는 그제야 위화감을 감지했다. 수영은 노골적인 희롱을 눈치채지 못한 채, 두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남자는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모양이었다.

“그럼 수영 씨. 퇴근하고 말이야. 셋이서…….”

“잠시만요.”

노란 머리가 수영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려는 찰나, 진호가 그를 말렸다.

“사람 두고 장난치시면 안 되죠.”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괜한 오지랖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아무것도 모른 채 신현우에게 깜빡 속은 자신이 우습게도 눈앞의 바텐더와 겹쳐 보여서. 아니면 단순한 술주정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건 다 신현우 때문이야.

일제히 바라보는 세 쌍의 눈동자에 하나씩 응수하는 사이, 짧은 정적을 먼저 깬 건 노란 머리였다.

“장난? 우리가 무슨 장난을 쳤는데?”

“처음이라 이곳 룰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관계없으면 신경 끄시죠?”

옆에서 긴 수염이 적반하장으로 거들자 괜스레 열이 올랐다.

내가 왜 술을 마셨더라. 그래. 내일 4학년 1학기 첫 강의가 있었지. 대학에서 운명인 것 같았던 첫사랑을 만나 구질구질한 연애를 했다. 짝사랑과 다를 바 없는 일방적인 연애. 잠수 이별로 끝이 나 버린 비참한 연애.

남아 있는 미련이 무서워 알코올로 잊으려 했는데 잘 안 됐다. 그런데 이놈들은 야속하게도 자꾸 그놈과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상관이 없긴 왜 없어요.”

당신들 때문에 술도 마음대로 못 마시고 이게 뭐야.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상대로 속이고 있잖아요.”

“우리가 언제 우리 자기를 속였다고 그래요?”

긴 수염이 두 눈을 부릅뜨며 팔짱을 끼자 노란 머리가 옆에서 거들었다.

“맞아. 수영 씨가 당신 애인이라도 돼?”

“두 분. 많이 흥분하셨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바텐더가 진호에게 다가서는 두 사람을 말렸다.

“이분은 제가 걱정돼서 말씀하신 것 같아요.”

“걱정할 게 따로 있지.”

노란 머리가 혀를 쯧, 차며 진호를 흘긋 노려보았다.

“수영 씨는 이런 사람 상대하지 마요.”

“나 원 참. 더러워서.”

“저, 잠시만요.”

두 사람이 수영의 팔을 끌고 바 테이블 뒤편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저 불쌍한 사람 한 명 도와주려 한 것뿐인데 나쁜 사람 취급을 당한 게 억울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

“어딜 가시려고요.”

당황한 바텐더를 붙잡으며 테이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수영 씨는 이쪽이야.”

노란 머리와 긴 수염이 같이 수영의 손을 반대쪽으로 잡아당겼다. 이에 질세라 진호가 더욱더 세게 당겼다.

“어물쩍 넘기지 마시죠.”

진호가 왼쪽, 노란 머리와 긴 수염이 오른쪽으로 번갈아 당기며 바텐더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남자의 뒤로 입구를 지키는 가드가 보였다.

“막무가내로 이러시면 경비 부를 겁니다. 직원 괴롭힌다고요.”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경비라는 말에 뜨끔했는지 두 사람은 수영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용건 없으면 그냥 가시죠. 애먼 사람 붙잡지 말고.”

진호의 한마디에 두 사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다만 눈빛은 진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슬금슬금 피했다.

“진짜 수영 씨랑 뭐가 있나 본데.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애인이라니. 실망이에요.”

멋대로 결론짓고는 사라져 버린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영이 진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새벽 5시에 차 마시는 건 무리였어요.”

설상가상으로 이 남자는 아직도 자신이 무슨 상황에 부닥칠 뻔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멍청한 웃음 –적어도 진호 눈에는– 을 짓는 수영을 이상한 듯 쳐다본 진호는 발을 돌렸다.

“됐습니다. 그럼 이만.”

이상한 놈들 때문에 술맛도 버렸겠다.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급히 뒤쫓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빠른 걸음으로 출구로 향했다. 남자를 낚는 건 고사하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 * *

윙- 하는 진동이 허리를 때리자 눈이 절로 떠졌다. 급히 핸드폰 알람을 끄고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반. 지금 당장 출발하면 늦지 않게 학교에 도착할 듯싶었다.

“아, 씨. 그냥 빠질까.”

진호는 얼얼한 뒤통수를 붙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제 게이 바에서 별 수확 없이 돌아온 게 아쉬워 집에 있는 소주를 몇 잔 깠더니 머리가 띵했다.

개강하기도 전에 보강 수업이라니. ‘마케팅 관리’ 과목의 김 교수는 공휴일 때문에 부족한 강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개강 전주부터 강의를 열었다. 지독하기도 하지. 보통은 보강 따윈 없이 휴일로 넘길 텐데. 마음 같아선 강의고 뭐고 늘어지게 자고 싶었지만, 용돈을 줄이겠다며 협박하는 누나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관뒀다.

메뉴를 열어 지난 연락을 살피니 부재중 전화 세 통이 있었다. 전부 친누나 혜린에게서 온 것이었다. 기사 역을 대신했던 경호원이 그만두는 바람에 직접 차를 운전해서 학교로 달리는 길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가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연락 한 번 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

“미안. 잠시 필름이 끊겼어.”

-복학생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내가 알아서 하니까 용건이나 빨리 말해.”

수화기 너머로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보낸 문자 못 봤어? 이번에 또 새로 채용해야 해. 네 경호원.

“…….”

-네가 너무 까다로워서 도저히 못 하겠대. 어떻게 된 게 뽑는 족족 한 달을 못 버티니?

“그러게.”

이미 예상하던 차였기에 덤덤하게 말했다. 일부러 쫓아낸 거니까. 밤중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구해 오면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하고, 어렵사리 복숭아까지 구해 오면 다음엔 수박을 구해 오라고 했다. 백화점 VIP 전용관에 들러 세 시간 넘게 쇼핑을 하며 진을 빼놓는 건 보통이고, 하루에 3개국 넘게 비행한 적도 있으니, 그만두지 않고는 못 배겼을 거다. 그렇게 해서 쫓아낸 게 이번이 열 번째는 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화가 단단히 나셨어. 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본가로 들어오래.

“뭐?”

-이번에 뽑는 경호원이 그만두면 네가 사는 집, 강제로 처분할 거라고.

이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떻게 그 집구석에서 나왔는데 다시 돌아간다니.

열넷의 여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 아버지에게 선물을 전하러 회사로 찾아갔다. 데스크를 늘 지키고 있던 비서가 보이지 않아 곧장 이사실로 들어가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님. 좋아해요…….

아버지와 비서 아줌마가 반라로 탁상 위에서 뒹굴고 있는 장면. 친구들이 보여 준 야한 동영상에서 몇 번 봤었기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툭.

어머니가 아버지께 전해 주라고 했던 꽃꽂이 장식은 바닥에 떨어져 조각으로 흩어졌다. 그 뒤는 무작정 집으로 뛰었기에 알 수 없었다. 다만 바닥에 남긴 흔적으로 인해 아버지가 알았을 거라 짐작할 뿐. 어린 진호는 엄마를 위해 그 일을 마음속에 고이 묻어 두기로 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점점 나아질 거라던 어머니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교복을 입은 채 무덤에서 술을 따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비서 아줌마를 새 아내로 들였다.

그 후로 그 집에서 나가는 것이 내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

“그게 누구 때문인데. 그럴 거면 경호 붙여서 감시하지 말라고 전해. 그러면 나도 그만둘 테니까.”

-네가 직접 전하면 탈이라도 나니?

“나 본가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아줌마와 그 사람 –아버지라 부르기도 아까운– 그 둘과 함께 있는 걸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어떻게 해서 얻은 자취 생활인데.

“누나 선에선 해결 안 되는 거야?”

-어쩔 수 없어. 서 사장님 명령인걸.

현재 AE 제약 상무인 그녀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을 뜻했다. 진호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창의 풍경 너머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들려오는 혜린의 목소리와 함께 진호는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렇게 싫으면 네가 맘에 드는 놈으로 데려와. 신상 조사해 보고 별문제 없으면 허락해 줄게.

* * *

“강공.”

“예.”

“김말이.”

“네.”

성적에 매우 쪼잔하기로 소문난 경영학과 김 교수는 첫날부터 꼼꼼히 출석을 불렀다. 역시 지독하다니까. 하마터면 출석 점수가 깎일 뻔했다. 진호는 늦지 않게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강의실 가장 뒤 구석 자리에 앉았다.

“남수영.”

핸드폰을 만지작대고 있던 진호의 고개가 불쑥 올라갔다. 불현듯 어제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아니겠지. 삼류 소설도 아니고. 게이 바에서 만난 바텐더와 같은 수업을 듣기야 하겠어.

“수영 학생. 안 왔어요?”

“교수님. 저 왔습니다!”

강의실 뒷문이 벌컥 열리더니 낯익은 인영이 얼굴을 내밀었다.

설마가 진짜였다. 앞자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저 자태는 어두운 클럽 조명 아래에서 똑똑히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 진호는 조용히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세상 참 좁다더니, 어제 게이 바에서 우연히 본 사람을 학교에서 볼 줄이야. 더욱 경악할 부분은 응당 가명인 줄 알았던 닉네임이 본명이었다는 것이다.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 얼른 앉으세요.”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첫 줄에 착석한 수영은 책상 앞에 공책을 올려놓았다. 낯선 이름이 수차례 지나가고, 드디어 진호가 걱정하던 순간이 다가왔다.

“다음은 서진호.”

진호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혹시라도 저 바텐더가 시선을 돌렸다가 제 얼굴을 알아본다면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게다가 쓸데없이 목소리가 큰 걸 보면 자신을 알아채는 순간 어제 게이 바에서 보지 않았냐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기세였다. 대답했다가 체면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자니 성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성적에 풍파가 많은데 복학해서도 점수를 제대로 못 받으면 AE 제약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아버지가 호출할 것이 뻔했다.

찰나의 고민 끝에 진호는 대답하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제 이름을 모르니 저만 모르는 척하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누구죠? 못 찾겠는데.”

김 교수가 진호를 바로 찾지 못하고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휘휘 돌렸다. 이러다가 바텐더한테 들키겠어. 수영의 뒤통수가 점점 제 쪽으로 향할 기미가 보이자, 주목받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진호가 재빠르게 손을 올렸다.

“여기요.”

단, 고개는 들지 않고. 성적과 체면을 동시에 지키려는 나름의 묘수였다. 그러나 진호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학생은 왜 그러고 있죠? 얼굴 확인하게 고개 좀 들어 봐요.”

김 교수의 깐깐함을 잠시 잊고 있었다. 진호는 속으로 과격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자기를 봐 달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진호 학생?”

“네.”

더는 버티기 어려워 교수에게만 보이게 살며시 고개를 올렸다가 내렸다. 악운은 동시에 겹쳐서 온다고, 그 순간에 진호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수영의 눈동자와 직선으로 마주했다.

망했다.

어, 하는 모양을 내던 수영의 입이 예상치 못한 단어를 내뱉었다.

“찾았다!”

그 순간 진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터널 속에 있는 것처럼 눈앞이 깜깜했다. 개강 첫날부터 단추를 잘못 끼워도 한참 잘못 끼운 듯했다.

“수영 학생. 내 강의에서 사담은 자제했으면 좋겠군요.”

김 교수의 목소리가 수영의 한마디로 정적에 휩싸인 강의실의 분위기를 깨웠다.

“죄송합니다.”

교수의 언질에 수영은 천연덕스럽게 해맑은 미소로 무마했다. 수영이 입을 다물고, 집중되었던 시선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진호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수업 들어가기 전에 공지가 하나 있습니다. 2주 뒤 월요일에 있을 경영학과 개강 총회는 전원 필참이라고 합니다. 문의 사항은 과 대표에게 연락해서…….”

연례행사처럼 있는 개강 총회를 잊고 있었다. 경영학과에 그다지 애정이 없는 진호로서는 같은 학과생끼리 친해져야 한다며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늘어놓는 그 자리가 매우 고역이었다. 심지어 월요일이라니. 이건 다음 날 강의에 결석해도 할 말이 없는 결정이었다. 어쨌거나 김 교수의 설명을 시작으로 강의는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그렇게 복학 첫날도 평안하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수영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는.

“저기요.”

수업이 마친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나섰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시간 있으세요? 급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머리 하나 크기로 위를 올려다보니 수영이 백팩을 둘러맨 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없어요.”

지금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 당신이야. 진호는 단칼에 거절하고는 도도하게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잠시만요. 진호 씨?”

당황해서 따라오는 발소리를 무시하며 진호가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호 씨!”

돌연 붙잡힌 손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손으로 손목을 꽉 쥐고 있는 수영이 보였다.

“어제와 관련된 일이에요. 잠시만 시간 내주세요.”

뻔뻔스럽게 협박하는 꼴을 보니 어이가 없다. 진호는 손을 빼내려고 팔을 비틀었다. 근데 얘 왜 이렇게 힘이 세.

“이것 좀 놓고 부탁하시죠?”

“아, 죄송합니다.”

힘껏 째려보며 말하자 얼빠진 소리를 내더니 멋쩍은 듯 살며시 손을 내린다.

“그럼 제 얘기 들어 주시는 거죠?”

어째서 그런 얘기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입단속도 시켜야 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만족한 듯 환하게 웃는 게 꼭…… 빙구 같았다.

“따라오세요.”

진호는 수영을 근처의 조용한 룸 카페로 데려갔다. 이런 곳은 처음인지 어색한 자세로 가게 안에 들어선 수영이 놀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중세 귀족들이 사용했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가구와 내부 인테리어는 평범한 룸 카페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카페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방 안에 들어선 수영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메리카노 마실래요?”

그런 수영에게 진호가 메뉴판을 내밀며 물었다. 메뉴판을 되레 밀어내며 수영이 입을 뗐다.

“전 안 마셔요.”

“여기 1인당 메뉴 하나가 기본인데요.”

“돈이 없어요.”

“농담할 시간 없어요.”

“진짜예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지만 진지한 눈빛을 보니 짓궂은 장난도 아닌 듯했다.

“진호 씨 때문에 바에서 잘렸어요, 저. 책임져요.”

“그게 무슨 말이죠?”

진호가 한층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신종 사기인가. 듣도 보도 못한 수법인데.

“진호 씨랑 애인인 걸로 소문이 퍼져서. 저희 가게에서는 손님과 사적인 관계를 맺으면 안 되거든요.”

“사실이 아닌데 문제없잖아요.”

“사장님이 증거가 필요하대요.”

인제 보니 사기가 아니고 수작이었나. 그렇지만 이렇게 작업을 걸 이유가 없을 텐데. 진호가 혼란에 빠져 있거나 말거나 수영은 간절한 듯 진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부탁 하나만 할게요. 저랑 사장님께 가서 연인 사이 아니라고만 증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왜요?”

“그만큼 수입 좋은 알바가 없어요.”

대답이 들을수록 가관이다. 진호는 따라오라고 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중요한 얘기 같아서 데려왔는데 알고 보니 책임 지울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잖아.

“제가 가서 아니라고 한들, 사장님이 믿어 주겠어요? 그리고 당신 말을 어떻게 믿죠?”

진호는 딱 잘라 말하며 테이블에서 몸을 멀리 떨어뜨렸다. 반면 수영은 몸을 앞으로 굽혀 진호의 두 손을 붙잡았다.

“제발 부탁드려요.”

깜짝 놀란 진호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수영은 막무가내였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어요. 이 일 아니면 생활비랑 학비는 어떻게 벌라고요.”

“다른 일 찾아보세요.”

진호가 다시 한번 팔에 힘을 줘 봤지만 수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 놔주실래요?”

“안 돼요. 못 놔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진호가 팔을 흔들어도 수영은 그것이 생명 줄인 양 꼭 잡고는 놓을 생각이 없었다.

“요즘 뉴스도 안 보세요? 고용 불안 때문에 다른 알바 구하기도 힘들단 말이에요.”

“저랑 상관없는 일이라니까요.”

“도와준다고 할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가요.”

수영은 한술 더 떠 진호의 바짓가랑이를 잡더니 붙들어 안았다.

“자꾸 이러시면 매니저 부를 거예요.”

안 되겠다 싶은 진호가 매니저를 부르기 위해 호출 벨을 누르려던 순간,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혜린에게서 온 전화였다. 누나에게서 오는 전화는 긴급한 사안 –예를 들면 사장님의 호출이라든지– 도 더러 있었기 때문에 늦기 전에 받는 게 좋았다.

“여보세요.”

-뭐야, 너. 왜 이렇게 헐떡거려?

“지금 바쁘니까 할 말만 해.”

-알았어. 용건만 말할게.

체념한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늘 내로 경호원 못 구하면 본가행이라는 사장님 말씀이셔.

“오늘?”

수영에게서 발을 떼어 내려던 진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건 본가에 들어가게 하려는 아버지의 술수임이 틀림없었다.

“경호원을 구해 오라는 말을 들은 게 당장 아침인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아버지가 독하게 마음먹으셨나 보지. 그러니까 아무나 데려와 봐. 웬만해선 통과시켜 줄 테니까.

“오늘 안에 일할 사람을 어떻게 구해?”

“여기 있잖아요.”

통화 내용을 어떻게 들었는지 수영이 붙잡은 손을 풀더니 몸을 일으켰다.

“제가 할게요. 그 일.”

“됐…….”

됐어요, 라고 말하려던 진호는 습관처럼 수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잠깐. 키도 크고 덩치도 이만하면 괜찮은데?

“잠시만요.”

아깐 아무리 놓으라고 해도 안 놓더니, 진호의 말 한마디에 얼음처럼 똑바로 섰다. 일이 걸려 있으니 다른 건가.

“혹시 운동 좀 해요?”

“고등학생 때 달리기 선수였습니다.”

“다른 건요?”

“택배 상하차, 경기장 진행 요원 등 몸 쓰는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습니다.”

전보다 반듯한 자세로 막힘없이 응답하는 것이 면접을 여러 차례 받아 본 솜씨였다.

“음.”

잠시 고민하던 진호는 결단을 내렸다. 굳이 고르라면 아무나 고용하는 게 본가에 들어가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들어가서 새어머니라는 사람과 마주 보고 밥을 먹을 생각을 하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진호. 듣고 있어?

혜린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구한 것 같아.”

-응?

“고용할 사람 있으니까 계약서나 보내 줘.”

할 말만 툭 내던진 진호는 혜린의 응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수영에게서 진호가 멀어졌다.

“일단 채용하는 것으로 하죠.”

“감사합니다!”

수영은 몹시 감격하며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커다란 몸이 반으로 접히자 휙 하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웅, 하고 울렸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먹먹한 귀를 막으며 진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돼요.”

“명심하겠습니다.”

깍듯이 답하는 수영을 보며 진호는 한숨을 쉬었다. 전혀 믿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최악은 면했다. 이제는 혜린이 허락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생각보다 결과는 빨랐다. 수영의 핸드폰 번호와 함께 이력서를 보낸 뒤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누나에게서 문자가 왔다.

[통과.]

눈에 띌 만한 흠은 없다는 뜻이다. 진호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감정에 사로잡혔다. 혜린 편에서의 조사도 끝났으니 어쩔 수 없이 수영에게 채용 소식을 알려야 할 차례였다. 영 떨떠름한 진호가 느릿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알림음이 들리기도 전에 수영이 전화를 받았다.

-네. 남수영입니다!

“……채용되셨어요. 내일부터 근무 나오시면 돼요.”

-와.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주소 알려 드릴 테니 저녁 7시까지 짐 챙겨서 오세요.”

필요한 말만 건네고 통화를 끊은 진호는 왠지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경호원 업무를 잘할 수 있을지는 둘째 치고, 오래가야 할 텐데. 핸드폰을 내려놓은 진호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미리 비워 놓은 구석방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남수영인데요.”

수영은 정확히 7시 정각에 벨을 눌렀다. 인터폰 화면 속에서 수영은 짐을 바리바리 싸 든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진호를 불렀다. 정문에서 막혔다며 전화로 도와 달라더니, 이런 꼴이면 경비 아저씨에게 걸릴 만도 하지. 얼굴을 확인한 진호는 아파트 내부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이후로 같은 절차를 한 번 더 반복한 뒤에야 수영은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집은 처음이네요.”

수영은 너스레를 떨며 등에 이고 있던 짐을 현관에 내려놓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금빛 공단 보자기를 바라보는 진호의 눈이 동그랗게 모였다.

“이러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중간에 지하철이 멈춰서 조금 늦었어요. 원래는 일찍 오는 게 예의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보자기 겉에 파란 글씨로 쓰인 ‘경 마포 갈비 개업 축’ 글자와 삐져나온 옷가지를 본 진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에요.”

진호는 얼른 몸을 돌려 보일러실로 수영을 안내했다.

“여기가 수영 씨가 지낼 방이에요.”

이제껏 진호를 경호하는 직원들은 진호의 방에서 가장 멀면서도 가장 작은 보일러실을 이용했다. 그들의 임무가 싫었던 진호가 접촉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물론 경호원을 불편하게 해서 쫓아내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래서 진호는 여느 때처럼 실망스러운 수영의 얼굴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름 부잣집이라는 것에 환상을 가졌던 경호원들은 볼품없는 방을 보고 하나같이 인상을 썼으므로.

“저기.”

아니나 다를까. 입매가 굳어진 수영이 딱딱한 어투로 진호를 불렀다. 진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수영에게 대꾸했다.

“방이 작긴 하죠?”

“제가 감히 이런 방을 써도 괜찮을까요?”

예상과는 다르게 방에 들어선 수영은 신기한 듯 내부를 둘러보며 탄성을 질렀다.

와. 바닥이 따뜻해!

의자 높이를 조절할 수 있어!

화장실이 1m 거리야!

진호는 대체 어떤 집에서 살아온 거냐며 반문하고 싶었다. 이런 진호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수영이 진호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여태 살았던 집과는 차원이 다르네요.”

눈을 반짝이며 내려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후다닥 손을 빼며 거리를 두었다. 이런 걸 기대하진 않았는데.

“방에 짐 푸시고 한 시간 뒤에 계약서 작성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떨떠름하게 말을 내뱉고는 거실로 향했다. 얼마 전에 산 신형 TV의 품질에 만족하며 흐뭇하게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구석방에서 쉴 새 없이 환호성이 들려왔다.

침대가 퀸 사이즈라니. 책도 꽂을 수 있어! 남수영, 짜식. 성공했네.

끊임없이 중얼대는 소리를 듣다가 신경질이 난 진호가 도저히 참지 못해 한 소리 하려고 할 때쯤, 뿌듯한 낯을 한 수영이 거실로 튀어나왔다.

“이제 계약서 쓰면 되나요?”

진호는 소파에 앉은 채 오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맞은편에 풀썩 자리를 잡고 앉는다.

“꼼꼼히 읽어 보시고 궁금한 점 있으면 물어보세요.”

미리 출력해 둔 계약서와 함께 펜을 건네자 수영이 진지한 태도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 부분이요.”

두 번째 조항을 짚은 수영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진호 씨 방에 들어갈 수 없죠?”

“제가 워낙 사생활을 중시해서요. 수영 씨는 웬만하면 본인 방에 머물러 줬으면 해요.”

“위급 시에 제가 대처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이런 질문은 이전의 경호원들에게서도 종종 들었던 것이었다. 진호는 익숙하다는 듯 단호하게 팔짱을 꼈다.

“이름만 경호지 사실은 룸 셰어나 마찬가지예요. 그쪽은 가끔 제가 잘 지내는지만 관찰해서 누나한테 보고하면 되고,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각자 알아서 살면 되는 거죠.”

이렇게 얘기하면 이전의 경호원들은 대부분 쉽게 수긍했다. 그 말은 곧 일을 대충 처리해도 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수영은 전혀 수긍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할 순 없어요. 과분할 만큼 큰 액수를 받는데. 할 일은 제대로 해야죠.”

진호는 룸 카페에서 월급을 알려 주자 깜짝 놀라며 허리를 숙이던 수영을 떠올렸다. 열심히 하겠다며 몇 번이고 다짐하더니 그것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면 제가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제 방에 들어오지 말아 주세요.”

어차피 제가 먼저 수영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 일러두었다.

“그러죠. 진호 씨가 원하시니까.”

잠시 생각하던 수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다른 일로 의문을 표했다.

“학교에서도 아는 척 금지라고요?”

“같은 이유예요. 가능한 한 서로 터치 안 하는 게 좋잖아요?”

“하지만 진호 씨를 지키는 게 제 역할인데.”

“그건 일반적인 경호원이 하는 일이고요. 제 경호원은 달라요.”

진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영을 쳐다보며 손을 앞으로 모았다.

“당신은 절 감시하는 입장이잖아요? 누나한테 들었을 텐데.”

혜린이 가드를 채용하면 늘 거치는 절차가 있었다. 웬만한 일은 진호가 바라는 방식대로 두는 혜린도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는지 경호원에게 꾸준히 보고를 받곤 했다. 누나가 수영의 핸드폰 번호를 제게서 받아 간 것은 제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관찰할 것을 부탁할 겸, 경과보고 연락을 받기 위해서라는 의도도 있었다.

“아니요. 오히려 진호 씨를 잘 챙겨 달라고 하시던데요.”

이건 예상치 못한 답변인데. 진호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경호원 업무는 혜린에게 속해 있었으므로 경호원들은 암묵적으로 진호 앞에서 혜린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그래서 평소에 혜린이 경호원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규칙을 깨 버렸다.

“저한테 그러셨어요. 친동생처럼 잘 봐 달라고.”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누나가 동생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아마 자신이 이럴 것을 예상한 누나가 그렇게 말을 전했나 보다. 역시 똑똑한 서혜린. 동생이 편한 꼴을 못 봐요.

“그럼 이 부분은 일단 삭제하죠.”

테이블 위에서 나뒹구는 볼펜 하나를 집어 든 진호가 나중에 혜린에게 연락해 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아는 척 금지라는 조항에 진하게 취소선을 그었다. 사적 영역을 사수하기 위한 벽이 허물어진 것은 못마땅했지만 현재로서는 계약을 끝내고 방에 들어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다른 부분은 궁금한 거 없죠?”

“잠시만요.”

수영은 기어코 마지막 페이지까지 꼼꼼하게 살핀 후에야 이름 석 자를 아래에 적어 냈다.

“굉장히 세심하시네요.”

수영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계약서를 낚아챈 진호가 비꼬듯이 말하자 수영은 손사래를 쳤다.

“하하. 돈이 걸린 건데 확실해야죠.”

“첫 번째 조항은 유념하셨죠?”

진호는 면접관처럼 다리를 꼬고는 캐물었다. 수영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을 남수영은 갑 서진호에 관한 어떠한 정보라도 이에 관한 비밀을 유지한다. 이를 어길 시 갑은 을에게 해고를 통보할 수 있다.”

“인지가 잘돼서 다행이네요. 저에 관한 정보에는 저희가 게이 바에서 만난 일도 물론 포함되고요.”

근엄한 표정으로 핵심을 짚은 진호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계약서까지 썼으니 오늘은 방에서 쉬시면 돼요. 큰일 아니면 저 찾지 마세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진호가 수영에게서 펜을 가져갔다.

“그런데요.”

수영이 무릎을 세우는 진호를 저지했다. 아직도 질문이 남았나? 무슨 일이냐는 듯 공중에 뜬 허리를 등받이에 얹자 수영이 궁금한 듯 눈을 빛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건 왜 묻는데요?”

“앞으로 같이 지낼 건데 편하게 부르려고요.”

수영이 ‘진호 씨라고 매번 부르는 것도 좀’이라며 불편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하게 왜 불러요? 계속 ‘진호 씨’라고 불러요.”

진호가 강경하게 선을 그었다. 같이 산다지만 친하게 지낼 일도 없고, 언제까지나 일로써만 엮이게 될 사이인데 구태여 편하게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진호 씨요?”

수영이 소름이 돋는 듯 제 팔을 쓱쓱 문지르더니 마지못해 ‘네. 그럴게요’라고 대답했다. 계약상 을이 된 처지에 더는 토를 달지 못하는 듯했다. 만족감이 든 진호가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꼬르륵- 우렁찬 소리가 공허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드니 민망한 듯 수영이 뒷머리를 긁었다.

“저녁을 아직 못 먹어서요.”

천진한 건지 능청스러운 건지 모를 수영을 보며 진호가 이마를 짚었다.

“그럼 밖에서 드시고 오세요.”

“여기서 먹을 수는 없을까요? 계약서에 숙식 제공이라 돼 있던데.”

어쩐지 지나치게 꼼꼼히 본다 했더니 이럴 때 써먹으려고 그랬군. 수영에게 질릴 대로 질린 진호는 귀찮은 듯 부엌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라면 같은 거라도 괜찮다면 꺼내 드세요. 저기 찬장에 있으니까.”

더 있다간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아 말을 끝맺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급히 닫는 방문 틈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는 수영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제 방으로 들어온 진호는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무리 거리를 둔다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현우를 만난 이후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사라져 버린 진호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진호는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을 느끼며 지끈거렸던 머리를 식혔다. 이게 바로 평화지. 수영이 라면을 끓이는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적당한 소음을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 * *

똑똑똑.

막 깊은 잠에 빠져들 때 즈음, 수영이 노크를 했다. 진호는 미간을 구기며 눈을 비볐다.

“무슨 일이죠? 방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들어가진 않을 거예요. 문만 잠시 열어 주실래요?”

다급한 기색에 언짢아진 진호가 되물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식기세척기를 처음 사용해 보는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네요.”

“그거 그냥 싱크대에 두시면 내일 가정부 아줌마가 정리해 주실 거예요.”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네. 허탈해진 진호는 퉁명스럽게 답하곤 다시 베개에 뒤통수를 대었다.

“제가 먹은 건 직접 처리하고 싶어서요. 다른 식기도 같이 설거지할 겸.”

“하아…….”

“잠시만 도와줄 수 있잖아요.”

당당한 말투에서 뻔뻔함이 묻어났다. 무시하려던 진호는 어수선해진 머리를 정리하곤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잠도 다 깼겠다. 마음 같아선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오래 지낼 거면 식기세척기 사용법 정도는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뭐가 어려우시죠?”

벌컥 문을 열자 굳어 있던 수영의 인상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구세주를 발견한 양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누구라도 행복하게 만들 만큼 반짝였다. 이 순간 진호만 제외하고.

“전부 다요.”

해맑은 수영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은 처참했다. 진호는 말없이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신나서 뒤따라오는 인기척이 경쾌했다. 반면 식기세척기 앞에 도착한 진호는 어지럽게 놓여 있는 그릇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면 와인 잔 위에 쟁반을 올릴 수 있는 걸까.

“바스켓에는 식기를 하나씩 엎어서 둬야 해요. 가지런하게.”

진호는 와인 잔과 쟁반을 손수 들어 올바르게 정돈했다. 지켜보던 수영이 놀라며 소리쳤다.

“그거 어떻게 쌓은 건데요!”

“식기세척기에 이렇게 넣으면 세척기든 그릇이든 둘 중 하나는 망가져요.”

제 평온한 정신도 망가질 것 같고요. 내뱉고 싶은 핀잔을 속으로만 되뇌며 진호가 세척기의 도어를 닫았다.

“여기 버튼을 누르면 알아서 세척될 거예요. 건조는 자동으로 해 놨으니까 다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되고요.”

진호는 ‘이제 됐죠?’라는 의미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영은 한결같이 싱글벙글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제 제가 해 볼게요. 들어가서 쉬세요.”

“네. 수영 씨도요.”

수영의 말에 어느 정도 짜증이 풀린 진호가 힘없이 방으로 향했다.

“자세하게 알려 줘서 고마워요.”

고개를 돌리자 수영이 씩 웃었다. 그래도 고마운 줄은 아나 보네. 살포시 접히는 눈웃음이 아무리 생각해도 빙구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진호는 고개를 까딱였다.

수영 덕에 잠도 깼겠다, 방에 들어온 진호는 책상에 앉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잡지 뭉치를 정리했다. 패션 잡지, 자동차 잡지, 여행 잡지 등 종류가 다양했다. 그중 여행 잡지를 집어 든 진호가 페이지를 주르륵 넘겼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한 면을 바르게 펼치더니 수록된 사진을 집중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진호는 어릴 적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를 따라서 간 어느 신인 작가의 사진전에서 소방관이 불길을 잡는 현장을 고스란히 찍어 낸 사진을 봤다. 온몸이 그을린 채로 구출한 갓난아기를 끌어안은 소방관의 모습이 너무나 강렬해서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어린 진호는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을 생생하게 담아낸 그 작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깊은 감명을 받은 진호는 며칠 뒤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적는 시간에 사진작가를 적어 냈다. 그랬더니 옆자리에서 보고 있던 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담임을 불렀다.

「선생님. 얘는 사진작가가 될 거래요!」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 돈 못 버는 거 아냐? 우리 엄마가 적어도 변호사는 돼야 한다고 했는데. 사진작가가 뭐 하는 거야?

「여러분. 조용!」

담임 선생님의 한마디에 교실이 잠잠해졌다.

「친구의 꿈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되죠.」

선생님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조그맣게 쓰인 활동지를 소중한 것인 양 거두어 찬찬히 읽었다.

「진호는 사진작가가 꿈이구나. 아주 멋진 직업이네.」

학원 가는 게 그렇게 즐거웠던 건 처음이었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꿈을 그리며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조용히 서재로 불렀다.

「서진호. 너 사진작가가 될 거라고?」

「네. 사진 많이 찍어서 전시회도 열 거예요.」

「너희 선생이 그런 거 가르쳐 줬어? 작가 같은 거 해도 된다고?」

네? 하고 되묻는 말은 자연스레 묵살되었다. 평소에 무덤덤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그렇게 격렬하게 일그러진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서진호. 너는 이 아빠의 자리를 이어서 AE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야. 고작 작가 따위가 되겠다고 하면 안 되지.」

「그래도 저는…….」

「다시는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하지 말아라. 넌 오직 AE만을 바라봐야 한다. 서씨 집안의 후계는 너뿐이니.」

누나도 있잖아요. 입 안에 맴도는 말은 목구멍으로 쑥 들어갔다. 단호하게 말하는 아버지가 무서워 저도 모르게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알았어요.」

「그래. 얼른 공부하러 가.」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래서 단순하게 판단했다.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의 생각도 달라지겠지, 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옆 반 선생님이 와 계셨다.

「담임 선생님은 오늘부터 안 나오실 거예요. 새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제가 여러분들을 담당하게 됐어요.」

좋은 선생님이었는데, 아쉽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에도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께 비보를 전해 주려고 서재로 들어서는데, 문틈 사이로 말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그런 선생은 애 옆에 두면 안 돼. 나중에 뒷말 안 나오게 몇 푼 쥐여 주고.」

머리가 크지 않아도 그 말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선생님을 내쫓았어. 아버지는 알려면 다 알 수 있고, 하려면 다 할 수 있구나.

그 후로 사진의 시옷 자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낼 수 없었다. 아버지가 또 누군가를 해칠까 봐. 죄책감이 들어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후계자 수업을 받았고, 국내에서 최고 명문으로 알려진 ‘명문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자취 생활의 장점을 꼽으라면 그거다. 내 멋대로 해도 아버지가 모른다는 것. 방 안에서만큼은 온전한 해방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잡지 속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 몇 개를 스크랩한 진호는 만족한 듯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진호 씨.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문을 두드리며 묻는 사람은 보나 마나 수영이었다. 누그러졌던 진호의 눈꼬리는 금세 사나운 형태로 변했다.

“또 뭔데요?”

“드라이기 좀 빌려주실래요? 제가 깜빡 잊고 집에서 안 들고 왔네요.”

“그냥 말리시면 안 될까요?”

“감기 걸리긴 싫어서요.”

이렇게 낯짝이 두터운 사람을 봤나. 진호는 방 안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드라이기 하나를 꺼내 와서는 벌컥 문을 열었다.

“이거 가지고 이만…….”

가세요, 라고 말하려던 진호의 입술이 멈추었다. 눈앞에 수영의 맨가슴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저, 옷이라도 좀.”

“어. 빌려주시는 거예요? 잘 쓸게요.”

진호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수영이 드라이기를 덥석 받아갔다. 그 덕에 가까워진 수영의 복근이 더욱 두드러졌다. 거. 보기에 남사스럽…… 지 않고 좋네. 알찬 근육을 따라 내려가던 진호의 시선이 허리께에서 멈추었다. 철벽처럼 둘러싼 수건이 어쩐지 아쉬웠다.

“진호 씨?”

아차. 너무 대놓고 봤나. 순간 미안해진 진호가 사과를 건네려 할 때였다.

“이거 준 김에 로션도 빌려주시면 안 돼요?”

“안 돼요. 그건.”

아끼는 거라서 안 되는 건 고사하고 미안한 마음마저 싹 사라져 퉁명스러운 말투가 절로 나왔다.

“그럼 이것만 빌리고 돌려 드릴게요.”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으며 손에 쥔 드라이기를 흔드는 수영을 보며 진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냥 그거 가지세요. 저는 많으니까.”

그러니까 그만 불러.

“오. 정말요? 감사합니다.”

진호는 대꾸하는 대신 급히 문고리를 잡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진호의 머리 너머로 책상 위를 본 수영이 문을 밀어 틈을 벌렸다.

“잡지 좋아하시나 봐요?”

“관심 끄세요.”

다시 문을 닫으려 했지만 수영에게 잡힌 문고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종이 잡지 보는 사람 오랜만이네요. 요즘엔 다들 인터넷으로 보잖아요.”

“머리 안 말리세요? 감기 걸릴 텐데.”

인터넷도 있는데 종이 잡지를 구독해서 보는 건 직접 오리고 붙이는 동안 기억에 더 잘 남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경호원이 알 필요는 없었기에 화제를 돌렸다. 제 바람과 다르게 수영이 꼬치꼬치 캐묻긴 했지만.

“이유가 있어요?”

“알아서 어쩌려고요.”

“친해지려면 알아야죠.”

“그쪽이랑 친해지고 싶지 않아요.”

친해져서 뭐 할 건데. 시시콜콜 얘기해 봤자 어차피 누나 통해서 아버지에게 전해질 거 뭐 하러. 진호는 딱 잘라 말하며 수영의 손이 내려간 사이 재빨리 문을 닫았다. 다행히 수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만 문틈 사이로 내뱉을 뿐이었다.

“알았어요. 안 물어볼게요.”

점점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진호는 수영이 포기한 것을 알았다. 지독할 정도로 끈질겼어. 안도한 진호가 책상으로 되돌아왔다. 수영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기운이 빠져 잡지를 정리할 힘도 없었다. 곧바로 욕실에 들어간 진호는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마케팅 관리, 재무 회계, 그리고 사진의 세계…….”

핸드폰으로 내일의 시간표를 보던 진호가 마지막 과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은 교양 학점을 채우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집어넣었지만 실은 가장 듣고 싶은 수업이었다.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끔찍한 경영학과 강의 사이에서 유일한 희망이 되어 줄 이름. 진호는 비로소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이었지만.

똑똑똑.

“진호 씨.”

“…….”

“주무세요?”

“…….”

“진호 씨?”

“이번엔 또 왜요!”

참다못한 진호는 자는 척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자꾸 물어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번엔 따끔하게 언질을 주려고 쉽사리 문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부르시면…….”

“시간표 알려 주시겠어요?”

수영이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버티고 서서 진호를 내려다보았다. 진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말을 뱉었다.

“진짜 화낼 거예요.”

보통의 저였으면 진작에 자르고도 남았지만 수영이 마지막 경호원이었다. 수영마저 자르고 나면 꼼짝없이 본가행이다.

“화내더라도 시간표는 알려 주고 내 주세요.”

“시간표는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맞춰야죠. 스케줄.”

“그런 건 메신저로 물어봐도 되잖아요.”

학교에서 아예 붙어 다닐 속셈인가. 진호가 질렸다는 듯 허리에 손을 짚었다. 도대체 이 자식은 어디까지 나를 시험하는 걸까. 나 몰래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거.

“줄 게 있어서요.”

수영은 진호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동그란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이건 뭐죠?”

진호가 질색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초콜릿이요.”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닌데요.”

“드라이기 주신 답례예요. 제가 지금 가진 게 이것뿐이라.”

“제가 초콜릿 싫어하면 어쩌려고요.”

“초콜릿 싫어하세요?”

“그게 아니라.”

진호는 울컥 치솟는 노기를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말을 뭉개듯 씹었다.

“계약서 가져와 보시겠어요?”

“계약서요? 잠시만요.”

수영은 큰 덩치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종이 뭉치를 들고 왔다. 진호가 수영의 손에 있는 것을 낚아채 책상으로 가져갔다. 수영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계약서의 남은 공간에 떠오른 문구를 적어 넣었다.

[추가 조항. 을 남수영은 갑 서진호의 개인 방에서 3m 이내로 접근할 수 없으며, 노크 또한 금지한다.]

한 번 더 글의 내용을 살핀 진호는 계약서를 다시 수영에게 돌려주었다. 수영은 아래에 추가된 글을 보더니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제가 반대하면요?”

“싫으면 그만두시든가요.”

“제가 왜 반대하겠습니까. 앞으로는 문 앞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강고한 태도에 수영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진호는 그제야 흡족한 듯 허리에 짚은 손을 내렸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가세요.”

“이건 안 드시게요?”

수영은 아쉬운 듯 초콜릿을 재차 권했다. 하지만 일곱 살짜리 코흘리개도 아니고 겨우 초콜릿 하나에 넘어갈 진호가 아니었다.

“이런 건 안 받아도 괜찮으니까 됐어요.”

꿋꿋이 거절한 진호는 수영의 뒷말을 듣지도 않고 문을 닫아 잠갔다. 이제 다시는 열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혹시 다른 거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문 너머로 외치는 수영의 말을 마지막으로 진호는 귀를 막아 버렸다. 도피처라도 되는 듯 침대 한가운데로 파고들며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린은 아직도 업무 중인지 금방 받았다.

-무슨 일이야? 먼저 전화를 하고.

“누나. 새로 들어온 경호원. 제대로 조사한 거 맞아?”

-왜. 무슨 문제 있어?

“이 사람 진짜 이상해. 눈치가 더럽게 없어.”

-딱히 특이 사항은 없었는데. 잠깐만.

잠시 종이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린 뒤, 혜린이 말을 이었다.

-키 189cm, 몸무게 90kg, 나이는 22세. 병역 사항은 아직 미필이네.

“인적 사항 말고 눈에 띄는 건 없어?”

나이나 병역 사항은 누나에게 이력서를 넘길 때 슬쩍 봐서 알고 있었다. 또래로 짐작했는데 나보다 어려서 조금 놀랐었지. 그나저나 체격이 꽤 괜찮다 싶더니 웬만한 운동선수 수준이네. 의도치 않게 마주했던 수영의 맨몸을 떠올린 진호가 머리를 좌우로 휘휘 저었다.

-열 살 때부터 쭉 시골에서 살았는데. 할아버지랑. 그래서 잘 모르는 거 아닐까?

“그래도 그렇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였다. 시골에 살았다고 해서 눈치가 없을 것이란 법은 없었다.

“다른 사항은 없어?”

-딱히 특별한 건 없어. 밑에 동생이 많다는 것 정도?

그냥 이 사람만의 특징인 걸까. 원인을 알 수 없다면 변화를 기대하기도 힘들 텐데.

“그럼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거잖아.”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뿜던 진호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혜린을 불렀다.

“혹시 수영 씨한테 날 챙겨 달라고 했어?”

-그랬는데, 왜?

“왜 그랬어? 번거롭게.”

-넌 소중하니까. 귀염둥이야.

“으엑.”

이 누난 소름 돋게 왜 이래. 평소에 잔소리만 하던 혜린이 난데없이 친근하게 대하자, 진호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황급히 대화를 끝맺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네.”

-뭐가?

“그런 게 있어.”

뭐냐고 추궁하는 혜린에게 진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전화를 끊었다.

“내일은 어떡하냐.”

아침이 오면 대면할 수영과의 하루를 염려하며 지친 육신을 이불로 덮었다. 눈꺼풀을 닫았으나 졸음은 쉬이 오지 않았다. 양을 3백 마리 넘게 세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호는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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