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웅- 하는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 또 늦게 일어났나? 데자뷔를 느끼며 핸드폰을 확인하니 수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왜요.”
-지각이에요. 일어나세요.
방에 들어오질 못하니 전화로 깨우려나 보다. 진호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벌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보자, 지금이 아침 6시…….
“6시?”
-해가 중천에 떴다고요.
“8시에 일어나도 안 늦어요. 9시 수업이잖아요.”
코앞에 학교가 있는 덕에 걸어서 20분이면 넉넉히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6시에 일어난다니, 말도 안 되지.
-지금 일어나야 밭이라도 매죠.
“네?”
지금 잘못 들었나.
-계속 누워 있으면 소 돼요.
“그게 아니라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어딘가 틀린 것 같은 말을 고쳐 주려던 진호가 그만두었다. 이래서야 수영의 장단에 휘말리는 꼴이었다.
-이제 잠 다 깼죠? 빨리 나와요. 안 그러면 제 맘대로 주방 기구 쓸 거예요.
“안 돼요.”
와인 잔 위에 쟁반을 올려 두었던 어제의 기억을 떠올린 진호가 다급히 말렸다.
-아침 준비할게요.
진호의 만류에도 수영은 신나는 듯 경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민하던 진호는 일어나서 방문을 열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막는 게 낫지.
“좋은 아침이에요.”
문을 열자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수영이 핸드폰을 든 채 활짝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기는.
“아침 뭐 드세요?”
수영은 이미 옷까지 갈아입은 후였다.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라니. 수영의 패션 센스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전 아침 안 먹어요.”
“아침 안 먹으면 속 망가져요.”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며 수영이 서랍에서 앞치마를 꺼내 허리에 둘렀다.
“냉장고에 계란 있던데 프라이라도 해 줄게요.”
“괜찮아요.”
진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사양했다.
“수영 씨 혼자 드세요. 전 좀 더 잘 거니까.”
“저 계란프라이 엄청나게 잘하는데.”
문을 닫으려던 진호에게 수영이 아쉬운 듯 말했다.
“중국집에서 주방 아르바이트할 때 사장님이 매일 칭찬하셨어요. 저만큼 반숙 잘 만드는 사람 없다고.”
“…….”
“손님분들도 계란 반숙이 최고라고 볶음밥만 사 드셨어요.”
‘이래도 안 드실 거예요?’라는 듯한 수영의 눈망울에 진호가 어쩔 수 없이 문을 다시 열었다. 맛이 어떨지 궁금한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맛만 볼게요. 맛만.”
뒷말을 강조하며 진호가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금방 해 드릴게요.”
수영이 만족한 듯 웃으며 프라이팬을 인덕션 위에 옮겼다.
“프라이팬에 먼지가 쌓여 있어서 제가 좀 씻었어요. 안심하고 드셔도 돼요.”
물어보지도 않은 내용을 주저리 늘어놓으며 버튼 몇 개를 눌러 보던 수영이 진호에게 물었다.
“근데 이건 어떻게 작동하는 거죠?”
* * *
여차여차해서 진호가 가르쳐 준 덕에 수영은 무사히 브런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수영이 만든 계란 반숙이며 샐러드, 구운 빵 등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진호는 속으로 감탄하며 -그러나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이제 출발하죠.”
수영과 실랑이를 벌이고 난 뒤 씻고 옷을 입자 어느새 8시 반이 넘어 있었다. 수영은 진호를 재촉하며 현관 앞으로 이끌었다.
“차 키 안 가져가요?”
진호가 수영에게서 은근슬쩍 떨어지며 키홀더를 흔들었다. 수영이 놀라며 눈을 끔뻑였다.
“여기서 20분 거리인데요? 걸어가요.”
“전 차가 더 편해요.”
“진호 씨 요새 무기력하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물론 요즘 들어 쉽게 지치는 것 같긴 하다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운동을 안 해서 그래요. 밥도 안 챙겨 먹고.”
역시나 수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사람 몸이 재산이라고.”
진호는 질렸다는 듯 손에 든 키를 꽉 쥐었다.
“고용주는 전데요. 수영 씨는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가 아니라고요.”
“하지만 제겐 진호 씨를 챙길 의무가 있죠.”
“각자 생활에 간섭하지 말자고 했을 텐데요.”
더는 못 참을 것 같아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이러다 주도권이 빼앗길라. 수영은 잠시 뚫어져라 진호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차 키 주세요. 제가 운전할게요.”
덩달아 맞설 것으로 예측했던 것과 달리 수영은 순순히 물러났다. 어안이 벙벙한 진호가 얼떨결에 키를 수영에게 건네주었다.
“주차장으로 가죠.”
진호가 신발장에서 구두를 고르는 사이, 수영은 운동화를 신고 기다렸다. 적당히 무난한 디자인으로 고른 뒤 현관으로 가자 수영이 현관문을 열어 주며 진호를 안내했다.
“난나나나나나난난나 난나난나난난나- 함께 가요. D마트- 행복해요. D마트-”
정체를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수영을 뒤따라가던 진호는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제 차가 어떤 건지는 알아요?”
“발레파킹 경력이 몇 년인데 키만 보면 딱 알죠.”
대체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뭘까. 전에 받은 이력서가 열 장은 거뜬히 넘겼던 것을 기억해 낸 진호가 경계심을 거두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이 길은 주차장 가는 길이 아닌데요?”
“맞는데요.”
“여긴 로비로 나가는 통로잖아요.”
눈앞에 보이는 출입구를 보며 진호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러려고 차 키 가져간 거죠? 당장 내놔요.”
“에이. 들켰네.”
수영이 아쉬운 얼굴을 하더니 적반하장으로 진호를 마주 보았다.
“여기까지 온 거, 그냥 걸어서 가죠.”
“키 주세요.”
짜증이 나기 시작한 진호가 엄한 표정으로 수영의 팔을 붙잡았다.
“알았어요. 줄게요.”
수영이 호주머니에서 키를 꺼내는 듯하더니 별안간 출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멍하니 선 진호를 향해.
“잡을 수 있으면요!”
라고 외치며 쌩하니 뛰어가 버렸다.
“진짜 잘리고 싶어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호가 뒤따라 뛰었지만 수영은 이미 닿을 수 없는 거리까지 멀어진 후였다.
“좋아요! 조금만 더요!”
수영은 진호가 가까워질 때까지 멈추었다가 잡히겠다 싶을 때 다시 뛰어가며 약을 올렸다. 악에 받친 진호는 수영에게 한마디 하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차 키를 되찾기 위해 학교까지 쉬지 않고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헉, 헉. 키, 안, 내놔요?”
강의실에 도착한 진호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수영을 쏘아보았다. 간만의 운동에 이마엔 땀이 맺히고 심장은 아플 정도로 날뛰었다. 다행인지 20분 일찍 도착한 탓에 초췌한 몰골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침부터 뛰니까 상쾌하죠?”
수영은 멀쩡한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차 키를 건네주었다. 능청스러운 눈가가 뚫어질 때까지 노려보자 대수롭지 않게 앞자리에 앉는다.
“앞에 앉아요. 우리.”
“우리라뇨.”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진호에게로 다가왔다.
“이번엔 제가 양보할게요.”
양보는 무슨. 진호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싶었지만 이미 기력을 소진해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또 이러면 그땐 진짜 자를 줄 알아요.”
“넵. 명심하겠습니다.”
얘기를 콧구멍으로 알아들은 건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다. 한마디 더 보태려던 진호는 서서히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케팅 관리 수업은 역시나 재미없었다. 김 교수의 딱딱한 설명을 세 시간 내리 들은 진호는 재무 회계 시간에 녹다운 돼 버렸다. 옆에서 열심히 필기하던 수영이 딴짓하는 진호를 여러 번 찔렀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수강 신청을 망해 버린 탓에 점심시간도 없이 세 과목을 연속으로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교양 수업만이 숨통을 틔워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 안 고파요?”
사진의 세계 강의를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는데 수영이 옆에서 익숙한 초콜릿을 내밀었다.
“이거라도 먹을래요?”
대체 초콜릿은 왜 자꾸 권하는지. 습관적으로 됐다고 대답하려던 진호는 마음을 바꾸어 어색하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침을 먹었기에 망정이지. 안 먹었으면 배가 고파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에 이르렀을 거다. 수영에게서 받은 초콜릿의 포장지를 벗겨 한입에 털어 넣자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맛있죠?”
“그냥 그렇네요.”
흡족한 면상이 꼴 보기 싫어 대충 대꾸했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표정이 신기할 정도였다.
사진의 세계를 가르치는 박 교수는 강의실로 들어오자마자 화이트보드에 매직으로 ‘寫眞’이란 글자를 커다랗게 쓰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진이란 건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진짜를 베낀다는 의미입니다. 즉 작가의 주관적인 시선에 따라 같은 피사체도 다르게 담길 수 있다는 거죠.”
축 늘어져 있던 진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노트북에 수업 내용을 기록했다.
“아까랑은 영 딴판이네요.”
수영이 놀리는 투로 진호에게만 들리도록 소곤거렸다. 진호는 언제나처럼 무시하며 강의에 집중했다.
“사진 정말 좋아하나 봐요.”
“…….”
“혹시 사진작가가 꿈이에요?”
“…….”
“어제 잡지 본 것도 사진 때문이에요?”
“저기요.”
“제 이름은 저기가 아니고 수영인데요.”
“흠, 거기 두 사람.”
박 교수가 못마땅한지 헛기침하며 진호와 수영을 지적했다.
“얘기할 거면 저한테 하세요. 둘이서만 속닥거리지 말고.”
진호는 낭패라는 듯 손끝으로 미간을 짚었다. 수영과 있으면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았다. 반면에 수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했다.
“죄송합니다. 안 떠들겠습니다.”
정중하게 사과하는 수영에게 더는 할 말이 없었는지 박 교수는 몇 번이고 두 사람을 힐긋거리더니 다시 수업을 이어 나갔다.
“이 수업은 촬영 과제가 있습니다. 제가 제시하는 주제에 맞게 사진을 촬영해 오면 됩니다.”
수업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설명한 박 교수는 학생들을 쭉 둘러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사진에 관한 수업이지만 이 수업을 통해 여러분 개개인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보는 시야를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첫 주이니 여기서 마치죠.”
와, 하는 학생들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신속하게 가방을 챙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진호가 펼쳐 놓은 노트북으로 카메라를 검색했다. 촬영 과제를 위해서 하나 정도는 사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줄줄이 나오는 제품 목록을 쭉 훑어보다가 제일 좋아 보이는 카메라 하나를 선택해 곧바로 구매하기를 클릭했다.
“그거 바로 사시게요? 가격이 엄청난데.”
지켜보던 수영이 놀란 듯 진호를 말렸다.
“같은 성능에 반값인 카메라가 얼마나 많은데요.”
급기야 수영은 노트북을 가로채 더 싼 제품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여기 보세요. 아까 고른 거에 비하면 헐값이잖아요.”
“제발 제가 하는 일에 신경 좀 꺼 주실래요?”
진호가 못 참겠다는 듯 노트북을 도로 빼앗으며 따졌다.
“저 돈 많아요. 이 정도는 아무런 타격도 없다고요.”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선을 넘는 수영을 보아하니 이대로 뒀다간 도저히 같이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녁으로 한정식 먹게 삼성각이나 예약해 놓으세요.”
명령 투로 말을 던진 진호가 굳은 수영을 보고 너무했나 싶을 때쯤, 어디선가 하얀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수영 오빠?”
체육복을 입은 여학생 한 명이 수영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뒤에 서 있는 남학생 무리를 보니 꽤 인기가 있는 듯했다. 차림은 그래도 얼굴은 뽀얀 게 꼭 연예인 같구먼.
“오빠도 이 수업 들어?”
수영은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물끄러미 여자를 쳐다보았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누구시죠?”
“나야. 정연이.”
“정연이?”
마땅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지 수영이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기억 안 나? 고등학생 때 같은 육상부였던.”
“혹시 최정연?”
그제야 기억이 난 수영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정연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명문대 온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네. 정말 반갑다.”
정연이 환하게 웃으며 수영의 어깨를 툭 쳤다.
“저녁은 먹었어?”
“아니. 이제 먹으려고.”
“그럼 같이 먹을까?”
“아니. 선약이 있어.”
잔뜩 기대한 정연에게 딱 잘라 말하며 수영이 진호를 쳐다봤다. 수영을 따라 시선을 향한 정연이 진호의 존재를 알아채고 놀란 얼굴을 했다.
“일행이 계셨구나. 그럼 셋이서 먹는 건 어때?”
“미안하지만 우린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정연의 제안에도 수영은 가방을 챙기며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정연은 아쉬운 듯 수영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대신 다음에는 꼭 같이 먹자.”
“그래. 시간 되면.”
앞으로도 같이 먹을 생각은 없는 듯 인사치레처럼 에둘러 답한 수영이 진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른 가요. 삼성각인지 사성각인지 가 보자고요.”
수영이 일어나 강의실을 나서자 진호도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풀이 죽은 정연을 지나쳐 뒤따라갔다.
“같이 먹어도 괜찮았는데 저한테 물어보지 그랬어요.”
“지금은 근무 중이잖아요. 진호 씨 안전에 집중해야죠.”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보다. 예상외로 프로다운 모습에 의외라고 느끼던 중에, 수영이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해 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가격이 왜 이래요? 메뉴도 별거 없는데.”
“수영 씨.”
“여기 근처에 진짜 맛있는 한정식집 있어요. 가격도 백반 하나에 5천 원밖에 안 해요. 차라리 거기 가요. 여긴 비싸도 너무 비싸네.”
“아까도 말했지만.”
어휴.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진호가 말을 멈추었다. 조금 전 돈이 많다며 수영에게 짜증 아닌 짜증을 냈던 게 생각나 약간은 미안했다. 그래. 이번은 넘어가 주자.
“그래요. 수영 씨가 말하는 곳으로 가 보죠. 대신 맛없으면 그쪽이 내는 거예요.”
“물론이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수영이 앞장을 섰다. 들뜬 듯 올라간 어깨가 꼴불견이었지만 진호는 묵묵히 따라가기로 했다. 제가 이기면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리라 다짐하면서.
* * *
결과만 말하자면, 진호는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허름한 외관과 기사 식당에서 볼 법한 촌스러운 식탁과 달리, 수영이 주문한 백반은 정말 맛있었다. 어쩌면 삼성각 갈비찜보다 더욱. 제 말이 맞지 않느냐며 의기양양한 수영을 향해 진호는 나쁘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수영의 의도대로 응해 주는 것은 못마땅했지만 그러기에 입맛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나가죠. 잠시 들를 곳이 있어요.”
그릇을 깨끗이 비운 진호가 일어서며 카드를 꺼냈다.
“이건 제가 계산할게요. 졌으니까.”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예의상 거절하는 법이 없다. 진호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수영을 보며 또 한 번 빙구 같다고 생각했다.
“만 원입니다.”
계산을 치른 뒤, 식당을 나가는데 수영이 진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이제 집으로 가는 건가요?”
“지난주에 방문 예약해 둔 백화점이 있어요. 거기서 옷을 좀 사려고요.”
“얼마나 걸리는데요?”
“차로 30분 정도 걸려요. 왜요?”
골똘히 무언가를 고심하던 수영은 팔을 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다.
“여기서 지하철로 15분만 가면 명품들 구할 수 있어요.”
반쯤 포기한 진호는 놓으라는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대신 날 선 눈초리를 할 뿐이었다.
“됐어요. 뭐라 하시든 전 백화점에 갈 겁니다.”
“15분만 타면 되는데도요? 기름값 아낄 수 있고 얼마나 좋아요.”
“택시 타고 갈 건데요?”
“택시라뇨?”
믿을 수 없다는 듯 수영이 팔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균형을 잃은 몸이 휘청였다.
“여기서 택시로 30분이면 2만 원은 들어요. 백반을 네 번이나 먹을 돈이라고요.”
“네네. 알겠어요. 지하철 타요.”
알겠으니까 좀 놔 봐. 말해 봤자 수영은 또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진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쉽게 요구를 승낙했다. 이전의 백반집이 괜찮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쓸데없는 희망도 있었다.
“저만 믿고 따라와요.”
수영의 손힘이 풀린 사이 잽싸게 팔을 빼낸 진호가 터덜터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여기예요.”
잠시 후 수영을 뒤쫓아 내린 곳은 다름 아닌.
“동묘앞역?”
이었다. 진호는 처음 들어 보는 역명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명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죠.”
백화점 같은 건 아무 데도 없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명품을 팔 것 같은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작은 구멍가게와 노점들만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 뿐. 그러나 진호는 백반집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실망스러운 마음을 다독였다. 보기는 이래도 막상 사면 괜찮을 거야. 그래야만 해.
“저 놓치면 안 돼요.”
수영이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모습을 보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진호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손목을 잡고 질주부터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손을 안 잡으면 죽는 귀신이라도 들렸나.
“좋은 거 선점하려면 뛰어야 하거든요.”
수영에게 이끌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노점 거리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잠깐, 만.”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는 수영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옷더미 가장 앞줄에 다다른 진호가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다 뭐죠……?”
“여기서 얼른 골라야 해요. 어떤 거 가지고 싶으세요?”
수영이 쌓인 옷 틈 사이를 샅샅이 누비며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들었다.
“여기 헤르메스, 맥킹, 재냐도 있어요.”
헤르메스야 유명하다지만 맥킹이나 재냐는 일반 백화점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명품 브랜드였다. 그런 브랜드를 이 자식이 어떻게 알지? 그보다, 그런 명품이 이 중에 있다고? 미심쩍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헤르메스?”
“좋은 거 찾으시네요.”
수영은 다시 옷 사이를 누비며 몇 개를 집어 올렸다. 그사이에 뒷줄에 있던 사람들이 옷더미 주변에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 틈을 날쌔게 누비던 수영은 옷가지를 한 아름 안고는 진호에게 다가왔다.
“대충 찾았으니까 나가죠.”
골목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탓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은 옷가지를 어깨에 걸친 채 진호를 감싼 형태로 군중 사이를 헤쳐 나갔다. 그래도 경호원이라고 성실히 임하는구먼. 답답함에 미간을 찡그리며 간신히 수영을 따라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골라 봐요.”
수영이 가져온 옷들을 진호 앞에 잔뜩 펼쳐 놓았다.
“많이도 가져오셨네요.”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요.”
코트, 재킷, 바지, 가방, 구두 등 종류도 다양했다. 조심스럽게 옷을 뒤적거리던 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진품이 아니잖아요.”
여기서 뭐라도 건질 거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진호는 잠시라도 수영을 믿었던 자신을 나무라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면 어때요. 완전 똑같은데.”
회색 체크무늬 재킷을 집어 든 수영이 진호 앞에 들이댔다. 얼핏 보면 지난 S/S 패션 위크에서 본 상품이랑 헷갈릴 정도로 똑같았다.
“비슷하긴 하지만 진짜가 아니면 소용없어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진짜일 수도 있죠. 오늘 박 교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이걸 이렇게 써먹는다고? 진호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었다.
“말장난하지 마시고요. 지금이라도 택시 잡아서 백화점에 가죠.”
“보세요. 이 하얀 팬츠랑 같이 입으면 나름 어울리잖아요.”
색상 조합은 엉망이었지만 겉으로만 보면 진품과 똑같이 생겨서 그럴듯해 보였다. 패션에 엄격한 진호로서도 그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가면 백화점 문 닫을 시간이라고요. 진호 씨도 매일 갔던 곳 가는 것보다 새로운 곳을 경험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수영을 훑었다.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뻔질거리는 미소가 무엇이든 괜찮을 것 같은 착각에 들게 했다. 가만 보니 집에 있는 옷과 같이 입으면 봐 줄 만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진호. 드디어 미쳤구나. 네가.
“이건 제가 들고 있을게요.”
옷가지를 들어 팔에 걸친 수영이 뿌듯한 듯 웃었다.
“백화점에서 발레파킹 알바를 해 봐서 아는데, 거기보다 동묘가 훨씬 재밌어요. 보장할게요.”
뭐가 좋다고 자꾸 웃냐. 그 낯짝에 대고 뭐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수영에게 적응해 버린 진호는 저도 모르게 힘없이 웃고 말았다. 긍정의 의미로 오인한 수영은 더욱 신이 나서 진호를 데리고 골목을 나왔다.
역으로 향하는 길에 줄줄이 늘어선 구멍가게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헌책방과 주방용품점을 지나서 전자 기기를 판매하는 가게 앞에 도착한 수영이 선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진호 씨. 카메라 필요하시죠?”
다양한 크기의 렌즈들을 꼼꼼히 살피며 수영이 물었다.
“여기서 사라고요?”
“네. 운이 좋아요. 시중에서 몇백은 하는 건데 여기 딱 하나 있네요. 마침 바디도 맞는 게 있어요.”
“그것도 아르바이트로 안 건가요?”
“그렇죠.”
안 해 본 알바가 있긴 할까. 진호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촬영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아뇨. 모델 알바를 했는데, 그때 사진사 형이 이것저것 알려 줬어요.”
“아.”
“이걸로 사실래요?”
수영이 신형 카메라 하나를 들어 보였다. 진호는 고민하듯 머뭇거렸다. 수영은 찍는 시늉을 하더니 앞에 서 있던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사장님. 이거 사용한 적 없는 거죠?”
“에이. 아니지. 내가 도매로 바로 떼 온 거여.”
“이걸로 해요. 이참에 렌즈도 하나 장만하고요.”
수영은 괜찮아 보이는 표준 렌즈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러죠. 그럼 이렇게…….”
잠깐.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어느새 수영의 의견에 자연스레 동조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그냥 백화점에서 살까 고민하던 진호는 마음을 굳혔다. 백화점에서 파는 거랑 이거랑 다를 게 뭐지?
“이렇게 살게요.”
수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옆에 놓아둔 옷가지를 챙기며 일어섰다.
“계산하고 우리 집으로 돌아가죠.”
우리 집 아니고 내 집인데. 진호는 수영의 발언을 고쳐 주고 싶었지만, 지레 관두었다. 이상하게도 반항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 * *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인사를 건넨 수영은 들고 온 옷더미를 드레스 룸에 정리했다.
“카메라는 드레스 룸에 옷이랑 같이 넣어 뒀어요.”
온종일 수영에게 끌려다니느라 지친 진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소파에 드러누웠다.
“잘 거면 방에서 자지 왜 여기 누워 있어요.”
반쯤 감은 시야 안으로 수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내버려 두세요…….”
“불편해 보여서요.”
“됐, 어어?”
한사코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수영은 진호를 두 팔로 감싸 안은 채 들어 올렸다. 공중에 붕 뜬 느낌이 어색해 다리를 버둥거리자 안정적으로 무릎 아래를 받쳐 왔다.
“이것 좀 놔주실래요?”
“싫어요.”
수영은 막무가내로 진호를 들어 올린 채 진호의 방으로 향했다.
“계약서 마지막 조항 기억 안 나세요? 제 방 근처에 오면 안 되잖아요.”
“위급 시에는 상관없잖아요?”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 아닌데요.”
“문 여세요.”
문 앞에 다다른 수영이 고갯짓으로 문고리를 가리키자 진호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위급한 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죠.”
진호를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수영이 뻔뻔하게 쏘아붙였다. 어이가 없어서. 진호는 얼떨떨해서 그저 수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전 이제 제 방에서 쉴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수영이 여유롭게 방을 나섰다. 진호는 쿵 하는 문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야. 저건?”
대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황당함에 이마를 짚던 진호가 진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분명한 건 그거다. 남수영은 지독한 짠돌이 새끼라는 것. 그리고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 저도 모르게 끌려다닌 걸 보면 그랬다. 왜 자꾸만 저 태연한 페이스에 휘말리는 건지.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떠올리자 다시금 앞날이 막막해진 진호였다.
* *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의 다음 날도 변함없이 수영과 각종 사유로 티격태격하다 보니, 어느덧 개강 총회가 다가왔다. 필수 참석인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도착한 고깃집 안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바글거렸다.
“먼저 안쪽으로 앉아요.”
수영은 비교적 한산한 테이블로 향하며 진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진호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수영이 권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술 잘 마셔요?”
“못 마시는 건 아니에요.”
진호는 시끌벅적한 주위를 돌아보며 눈앞의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가게 입구가 떠들썩해지더니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어? 정연아. 진짜 왔네.”
입구 쪽에 앉아 있던 과 대표가 반갑게 정연을 맞이했다. 정연은 사진의 세계 수업에서 보았던 체육복 차림 그대로였다.
“헉. 체대 여신 최정연 아니야?”
“체대생이 경영학과 총회에는 왜?”
진호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남학생 두 명이 정연의 등장에 소곤거렸다. 가게 안을 여기저기 살피던 정연은 수영을 발견하곤 기쁜 듯이 달려왔다.
“오빠!”
“여긴 무슨 일이야?”
수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정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영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전에 같이 밥 먹자고 했잖아. 근데 생각해 보니까 연락처 교환도 안 했더라고. 그래서 오빠 있는 곳에 직접 찾아왔지.”
정연이 칭찬해 달라는 듯이 수영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수영은 무심했다.
“수업 시간에 보면 되잖아.”
“수업 시간엔 대화할 일도 별로 없으니까.”
누가 보면 연인인 줄 알겠네. 진호는 왠지 모를 패배감에 눈앞의 소주병을 들어 자기 잔을 채웠다. 저 짠돌이 새끼도 좋다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따를게요.”
진호를 보고 놀란 수영이 소주병을 빼앗으려 했다.
“됐어요. 이미 다 채운 거.”
진호는 팔꿈치로 수영의 손을 밀치며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잔을 들어 가득한 액체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건배라도 하고 마시지 그래요.”
“전 원래 혼자 마시는 거 좋아해요.”
수영이 옆에서 나무라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걸 보던 정연이 진호가 내려놓은 소주병을 가져갔다.
“내 건 오빠가 따라 주면 안 될까?”
수영에게 병을 빼꼼히 내밀며 귀엽게 말하는 자태에 맞은편의 남학생 두 명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제가 따라도 될까요?”
“아뇨. 제가 따르겠습니다.”
서로 앞다투어 술을 따르려는 남학생들 덕에 당황한 정연이 다급히 수영을 쳐다보았다.
“난 오빠가 따라 줬으면 하는데.”
“저분들이 따라도 괜찮을 거 같은데.”
쯧쯧. 눈치가 지지리도 없네. 방청객 모드로 상황을 지켜보던 진호가 눈앞의 새 병을 땄다. 난 모르겠다. 술이나 마셔야지.
“페이스가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언제 봤는지 수영이 진호의 손에 들린 것을 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줘 봐요.”
수영은 손수 병을 들어 진호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혼자서 계속 마시지 말아요. 그러다 훅 가요.”
업무에 성실한 건 좋지만 눈치도 적당히 챙기라고. 정연의 손에 쓸쓸히 들린 빈 잔을 보던 진호가 손사래를 쳤다.
“자. 제가 왔습니다.”
이쪽은 됐고 옆이나 신경 쓰라고 하려던 찰나, 테이블 사이를 돌던 과 대표가 정연의 옆자리에 의자를 옮기며 앉았다.
“여기는 분위기가 조용하네? 아직 덜 마셔서 그런가.”
멀쩡한 안색들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 과대가 손에 들고 있던 나무젓가락을 빈 맥주잔에 꽂았다.
“이럴 땐 왕 게임이 최고지.”
그러면서 정연에게만 보이도록 윙크를 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수영을 흘끔거리며 쑥스러운 듯 두 손을 만지작대던 정연이 과대를 부추겼다.
“왕 게임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해 봐요.”
“그래요.”
“한번 해 보죠.”
남학생 둘의 동조에 왕 게임을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수영이랑 진호 선배도 괜찮으시죠?”
달갑지는 않았으나 분위기상 따라 줘야 할 거 같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새내기 적 처음 참석했던 개강 총회가 떠오른 탓이었다.
「너 3번이야? 저 여자랑 키스하기 싫으면 마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바래다줄까?」
「잠시 모텔에서 쉬었다 가자.」
그렇게 현우와의 두 번째 관계도 필름이 끊긴 상태로 치러졌다. 그때는 신현우가 저를 좋아하는 줄 알았기에 섹스를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도 용서했다. 미련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잔에 담겨 있던 술을 벌컥 들이켰다. 이제 신현우도 없으니 신경 쓰지 말아야지. 진호는 상념에 빠져 있느라 과대의 ‘진호 선배’라는 말을 듣고 눈썹이 치켜 올라간 수영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들 하나씩 뽑아 봐요.”
과대가 나무젓가락이 든 잔을 각자의 앞에 돌아가며 내밀었다.
“제가 왕이네요.”
마지막 남은 젓가락을 들어 보이며 과대가 씩 웃었다. 시선을 돌려 정연의 번호를 슬쩍 본 과대가 정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흐음.”
정연이 헛기침을 한 번 뱉었다. 그러자 과대는 알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1번이랑 4번 러브 샷.”
“저 4번인데 1번 누구예요?”
정연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나 1번.”
수영이 못마땅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정연과 러브 샷을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차 있던 남학생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러브 샷 대신 다른 거 하면 안 돼?”
“안 하면 저거 마셔야 해.”
수영의 물음에 과대가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대접을 가리켰다.
“소주와 맥주, 콜라를 섞은 폭탄주. 주량이 약한 애들은 한 방에 훅 가지.”
어떻게 5년 전이랑 바뀐 게 없냐. 새내기 때와 다를 바 없는 무자비함에 혀를 내두르며 진호가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안 되겠는데.”
무리라는 듯 턱을 까딱인 수영이 병나발을 불고 있는 진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상황이라.”
“그럼 러브 샷 가야지.”
과대가 수영의 잔에 생수를 따르며 싱긋 웃었다.
“내가 특별히 물로 따라 준다.”
“러브 샷! 러브 샷!”
남학생 둘은 풀 죽었던 것도 잊은 채 ‘러브 샷’이라는 말에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정연의 잔에도 물을 따른 과대가 손뼉을 짝, 치며 두 사람을 독촉했다.
“편하게 생각해. 별거 아니라고.”
마뜩잖은지 느릿하게 뻗은 팔에, 정연이 놓치지 않고 제 팔을 안쪽으로 천천히 감았다.
“오오-”
무르익는 분위기에 정연이 민망한 듯 우물쭈물하더니 한 모금 들이켰다. 수영도 따라서 물을 삼켰다.
“둘이 잘 어울린다.”
과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정연을 쿡 찌르자 정연이 부끄러운 듯 뺨을 붉혔다. 좋을 때네. 지켜보던 진호는 괜히 허전한 속을 알코올로 채웠다. 나도 저랬던 적이 있었지.
「나랑 뽀뽀 안 하면 이거 마셔야 해.」
소주 정도야 몇 번이고 마실 수 있었지만 못 하는 척했다. 신현우의 그 말에 괜히 설레서. 이젠 다 덮어 버리고 싶은 흑역사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땐 운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자, 자. 다시 뽑아 봅시다아.”
과대가 각설이 같은 과장된 말투로 나무젓가락을 모아 섞더니 골고루 나눠 주었다. 진호는 심드렁하게 젓가락을 뽑고는 금세 소주병을 입에 댔다. 위장에 들이붓듯이 소주를 흘려 넣었지만 울컥 올라오는 괴로운 추억을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번엔 저네요.”
왕을 집어 든 정연이 과대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에는 키스 가자.”
“오. 키스! 키스!”
과대가 난이도를 높이자 남학생들의 호응이 커졌다. 정연은 수영과 해 보라는 과대의 눈빛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과대에게만 보이도록 입을 오므렸다.
‘키스는 부끄럽잖아요.’
정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명령을 내렸다.
“음……. 3번이랑 5번 뽀뽀.”
“5번은 전데.”
수영이 손을 들었다.
“3번은 누구죠?”
과대의 질문에 남학생 두 명이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아닌데.”
과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러면.”
모두의 시선이 간신히 세운 왼손 위에 머리를 얹고 있는 진호에게 향했다. 수영이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 소주병을 빼앗으며 진호의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진호가 눈꺼풀을 치켜뜨자 수영의 얼굴이 코앞에서 아른거렸다. 얘는 꼭 이렇게 가까이서 봐야 하나? 부담스러운 간격에 진호가 허리를 뒤로 무르며 팔을 내저었다.
“취, 취하긴 누가 취해. 나 멀쩡해.”
수영이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진호의 상태를 살피는 사이, 과대가 바닥에 내팽개쳐진 진호의 나무젓가락을 주워 들었다.
“진호 선배가 3번이네.”
“오-”
남학생 두 명이 낄낄거리며 수영과 진호를 쳐다보았다. 수영이 공중에서 헤매는 진호의 팔을 붙잡으며 산통을 깼다.
“아무래도 집에 가야겠어요. 이러다 쓰러져요.”
“아냐. 나 아직 안 취했어-”
수영이 진호를 일으키려고 허리를 잡자 진호가 힘겹게 밀어내더니 테이블 중앙에 놓인 소맥 한 사발을 가져왔다.
“더 마실 수 있다고-”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그릇을 입가에 가져가서는 쭉 들이켜려는 찰나, 수영이 잡아챘다.
“어?”
말없이 술을 꿀꺽꿀꺽 삼키는 수영을 보며 멍해진 진호가 눈을 비볐다. 저거 내 건데.
“네가 왜 마셔. 그걸.”
괘씸함에 중앙에 남은 사발을 가져오려 했지만 그것마저 수영에 의해 저지되었다.
“제 건 제가 마실게요.”
행여나 진호가 잡아챌세라 대접을 꼭 붙든 채 한숨에 들이마셨다. 진호는 옆에서 울상을 짓더니 테이블 위로 축 늘어졌다.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남김없이 깔끔하게 대접을 비운 수영이 진호를 부축하며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더 있다 가지.”
과대가 덩달아 일어서며 말리자 정연이 같이 가담했다. 수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형을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 보다시피 많이 취해서.”
수영이 진호를 둘러업었다. 정연은 아쉬운 듯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얼른 모셔다드려야겠다. 걸어갈 거지?”
“아니. 택시 타야지.”
“택시라고?”
못 들을 것을 들었는지 가만히 서서 눈만 끔뻑이는 정연에게서 등을 돌린 수영이 자꾸만 몸을 뒤트는 진호를 고쳐 업었다.
“다음에 봬요.”
서둘러 남은 인원에게 인사를 건넨 수영이 놀라서 몸이 굳어 버린 정연을 뒤로한 채 출구로 나섰다. 인도로 나오자 아직 가시지 않은 초봄의 추위가 뜨끈한 공기에 데워진 뺨을 차갑게 때렸다.
“으음. 추워…….”
“추워요?”
수영은 잠시 진호를 등에서 내린 뒤 제가 입던 패딩을 벗어 덮어 주었다.
“이러면 좀 따뜻하죠?”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가 도착했다. 수영은 진호를 먼저 뒷좌석에 앉힌 뒤, 곁에 나란히 앉았다.
“기사님. OO동으로 가주세요.”
목적지를 전한 수영은 진호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삐뚤어진 자세를 고쳐 주었다. 곯아떨어졌는지 살포시 감긴 두 눈이 정갈했다. 취하니까 조용해지네. 수영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뒤척이는 진호의 어깨에 걸친 패딩을 꼭 여며 주었다.
이 얼굴에 형이라니.
기껏해야 동갑일 줄 알았는데 저와 동기인 과대가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형이었다. 그간 수업에서나 학과 행사에서 털끝 하나 본 적이 없으니 군대까지 다녀왔을 확률이 높은데, 어쩐지 진호가 군복을 입은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거기서도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씨’를 붙이고 다녔으려나? 뜬금없이 궁금증이 치밀었다. 투나잇에서 처음 봤을 때도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더라니,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 * *
“진호 씨.”
집에 도착해 진호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수영이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일어나 봐요.”
“으음. 잠시만…….”
“씻고 누워야죠.”
진호는 이미 취할 대로 취해 수영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작게 웅얼거리던 진호가 답답한지 몸을 뒤척였다.
“윽. 더워-”
수영은 목까지 잠긴 셔츠 깃을 한 손으로 잡아 뜯으며 신음하는 진호에게 다가갔다. 꽉 조인 단추를 두어 개 풀어 주자 좁아 들었던 미간이 부드럽게 펴진다.
“진호 씨. 일어나요.”
이번에는 양쪽 팔을 붙잡고 더 세게 흔들었다. 하지만 진호는 깊은 잠에 빠져 뒤로 늘어지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대로 자면 불편할 텐데.”
수영이 꼼지락거리는 진호를 망설이듯 바라보더니 단추를 더 풀기 시작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 끝까지 풀어 셔츠 자락을 걷어 내자, 매끄러운 피부가 하얗게 드러났다.
“미안해요. 갈아입히려면 어쩔 수 없어요.”
속죄하듯 잠든 진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 수영이 진호의 바지 버클을 풀려고 했다.
“신현우……. 이 나쁜 새끼.”
무슨 꿈을 꾸는지 인상을 잔뜩 구긴 진호가 몸부림했다.
“네?”
“너 때문에 힘들잖아…….”
수영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곧 잠꼬대인 것을 알고는 픽 웃었다.
“나도…… 챙겨 주는 사람 있었으면.”
“…….”
“너 따윈 아무렇지 않을 텐데…….”
살포시 감긴 눈꺼풀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촉촉이 떨어지는 얕은 눈물을 수영이 손등으로 조심스레 닦았다.
“형이 아니라 애 같다니까.”
「수영 씨, 동생 있으시죠? 친동생이라 생각하고 잘 챙겨 주세요.」
혜린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을 땐 그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이니까 제대로 뒷바라지해야지. 일이니까 전력을 다해야지. 그래서 고향에 있는 동생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대하듯이 엄하게 대했다. 처음엔 투덜거리다가도 입바른 소리에 거부는 못 하고 이것저것 해 보는 것이 귀여운 동생 하나가 더 생긴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면 잘해 주고만 싶어지잖아. 눈가에 맺힌 물기를 마저 거두어 낸 수영이 바지와 양말을 벗기고는 옷장에 걸린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좀 낫죠?”
“으응…….”
잠결에 대답한 꼴이 되어 버린 진호는 전보다 훨씬 가뿐한 얼굴이었다. 수영은 흡족한 듯 입가에 호선을 그리더니 이불을 목 끝까지 당겨 올렸다.
“잘 자요.”
내일부턴 좀 다를 거예요. 마지막으로, 켜 놓은 조명을 모두 끈 수영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