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6시죠? 나중에 깨워요.”
핸드폰 진동에 잠에서 깬 진호는 발신인을 확인하지도 않고 짜증부터 냈다. 숙취의 여파로 졸음이 쏟아졌다. 반강제로 개강 총회에 끌려간 것도 억울한데 자체 휴강이나 해 버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8시 반인데요.
“안 속아요.”
-시계 보세요.
그렇게 말하면 안 볼 줄 알고. 진호는 아래로 붙은 눈두덩을 가까스로 올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간을 살폈다.
8시 32분. 까딱하면 지각이라는 생각에, 잠투정을 부릴 새도 없이 정신이 확 깨어났다.
“헉.”
-내 말 맞죠? 집 앞에 차 대기해 놓을 테니 준비하고 내려오세요.
삐- 하고 통화가 끊어졌다. 진호는 얼빠진 채로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데 늘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차 키가 없었다. 차를 대기해 놓는다더니 이런 뜻이었냐. 그러나 진호는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런데 어제 내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잤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돌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갈아입었나 보지.”
혼자 그렇게 단정 지으며 아파트 출입구로 나갔는데 눈에 익은 벤츠가 보였다.
“앞에 타요.”
뒷좌석 문을 열자 수영이 제 옆을 톡톡 치더니 손수 문고리를 당겨 앞문을 열었다.
“왜요?”
“그래야 챙기기 편하잖아요.”
“됐어요. 전 뒤에 탈게요.”
그게 뭔 소리래. 평소처럼 쓸데없는 잔소리로 여긴 진호는 꿋꿋하게 앞문을 닫았다.
“사양하지 말고 앞에 타죠.”
어느새 운전석에서 내려 진호의 뒤까지 온 수영이 가뿐하게 들어서는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억지로 조수석에 구겨 넣었다. 순식간에 벨트까지 채워진 진호가 버릇처럼 짙은 숨을 내었다. 시간도 없는데 괜한 데 신경 쓰지 말자.
“왜 일찍 안 깨웠어요?”
액셀을 밟는 수영의 옆에서 진호가 툴툴거렸다.
“숙취 때문에 많이 피곤할까 봐서요.”
짠돌이 새끼가 웬일이래. 그러고 보니 차로 태워 주는 것도 처음이었다.
“운동해야 한다고 할 땐 언제고 왜 갑자기 태워 준다 그래요?”
“글쎄요. 왜일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빙글빙글 웃으며 핸들을 쥐락펴락하는 본새가 심히 거슬렸다.
“이거 드실래요?”
수영이 뒷좌석에 두었던 햄버거를 내밀었다. 막 샀는지 따끈따끈한 열기가 피부로 전해졌다. 진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수영을 바라보았다.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아파 보여요?”
수영이 차창에 두었던 시선을 잠깐 진호에게 주었다. 아침부터 팔팔한 게 부러울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겉보기로는.
“아니요.”
아싸. 이게 얼마 만의 햄버거냐. 며칠째 건강식만 먹느라 질려 있던 참에 수영이 내민 햄버거는 가뭄의 단비 같았다. 내가 햄버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방금 햄버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생각했죠.”
“아닌데요.”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짠돌이는 말도 짜다. 사람이 물어보면 설명을 해야지. 진호는 햄버거로 짠맛을 지웠다. 짠돌이 때문에 당분간 짠 음식을 멀리 할 것 같았다.
“목마르니까 이것도 드세요.”
수영은 거치대에 꽂아 놓은 따끈따끈한 커피를 진호에게 넘겼다.
“수업 시간에 졸지 말고요.”
“안 졸거든요?”
“보면 맨날 졸고 있던데.”
그럼 그렇지. 잘 나가다가도 기필코 속을 긁고야 만다. 진호가 콧등을 구기며 햄버거를 와그작 씹어 먹었다. 그나저나 아무도 모르게 살짝만 감고 있었는데 언제 본 거야.
“글로브에 휴지 넣어 놨으니까 필요하면 꺼내 써요.”
야무지게 먹고 있는 진호에게서 눈을 돌린 수영이 여유롭게 핸들을 돌렸다.
「진호가 좋아하는 걸 알려 달라고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곧장 혜린에게 연락했다. 혜린은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하나씩 차분하게 알려 주었다.
「걔가 깔끔한 걸 좋아해서 옷도 캐주얼은 잘 안 입어요. 구두나 시계, 향수 같은 거 선물하면 좋아할 거예요.」
현재의 재정 상태로는 턱도 없는 선택지였다. 할 수 없이 수영은 ‘다른 건요?’ 하고 되물었다.
「뭐 좋아하더라. 아. 의외로 애 입맛이라 달고 칼로리 높은 거 좋아해요.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식품. 근데 또 커피는 좋아하더라고요.」
그 대답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패스트푸드점을 찾아가 제일 인기 있는 메뉴를 사 왔다. 이름하여 굿모닝 세트. 혜린에게서 들은 진호의 취향을 꼼꼼히 메모하던 수영은 갑자기 전날의 일이 떠올라 혜린에게 전했다.
「어젯밤에 진호 씨가 악몽을 꾸던데, 혹시 신현우라는 사람 아세요?」
사소한 에피소드로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정적이 흐르더니 혜린이 나지막이 답했다.
「수영 씨는 몰라도 돼요.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처럼 진호 상태만 계속 살펴 주세요.」
혜린의 말과는 반대로 심상치 않은 인물인 듯했지만 그 주제를 피하는 것 같았기에 더 캐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궁금하긴 했으나 별거 아니라고 하니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제 차 키는 왜 물어보지도 않고 가져간 거예요?”
어느새 햄버거를 다 해치운 진호가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톡 쏘듯이 물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안 되는 건 아닌데 앞으론 언질이라도 해 주라고요.”
수영이 능청스럽게 씩 웃자, 진호가 따끔하게 일렀다. 수영은 운전기사 역할도 맡고 있으니 차 키를 가져가는 건 상관없었지만 짚어 두지 않으면 이 짠돌이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 차를 가지고 애먼 짓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놀라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고 하면 화내겠지. 수영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속도를 줄였다.
“도착했으니 내리시죠. 진호 님.”
놀리듯 존칭을 쓰자 미끈한 눈매가 일그러졌다. 진호가 받아치려는 걸 멈추고 묵묵히 차에서 내렸다. 오늘따라 부드러워진 듯한 미소가 그리 밉지만은 않은 탓이었다.
* * *
오전 수업을 무사히 마친 뒤, 간단히 학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진호는 동묘에서 산 카메라를 들고 잔디밭으로 나왔다.
“사진 찍게요?”
수영이 렌즈를 조정하는 진호를 보며 물었다.
“산 김에 많이 써야죠.”
렌즈에 붙은 먼지를 닦아 낸 진호가 뷰파인더를 눈앞에 가져다 댔다. 유독 따뜻한 날씨 덕에 일부 사람들이 자유롭게 잔디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진호는 프레임 안에 그 광경을 가둔 채 셔터를 눌렀다.
“응?”
응당 뒤따라와야 할 소리가 나지 않아, 셔터를 다시 한번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손을 내려 문제를 살피려던 때, 찰칵- 하는 셔터음이 울렸다. 기록을 확인하니 당황한 발이 흔들린 화면 속에 찍혀 있었다.
“이거 이상한데.”
진호가 다시 초점을 맞추어 학교 전경을 촬영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셔터를 누른 지 5초가 지나서야 셔터음이 울리며 사진이 저장되었다.
“백화점에서 사는 거랑 다를 바 없다면서요?”
진호가 수영을 찌릿 쳐다보며 따졌다. 수영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을 끔뻑이며 카메라를 가져갔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수영이 찍어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 덜그럭거리더니 몇 초 지나서야 셔터가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진호는 체념한 듯 카메라를 빼앗았다.
“믿은 내가 잘못이지.”
“미안해요. 전에 아는 형이 산 건 괜찮았거든요. 이건 제가 고쳐 볼게요.”
당황한 수영이 뒷머리를 쓸며 난감한 듯 말했다. 잘 챙겨 주겠다고 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진호는 쓸모없어진 카메라를 가방 안에 넣었다.
“됐어요. 새것을 사고 말지.”
“그거 줘 볼래요? 살 땐 사더라도 고쳐는 봐야죠.”
“그러다 더 망가지면 책임질 거예요?”
“그러겠다면요?”
“그래도 안 돼요.”
수영의 반격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진호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짠돌이가 어련히 비싼 값을 치르려고 하겠다.
“수업 끝나고 백화점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진호는 선포하듯 말을 던지며 다음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만은 안 된다며 결사반대를 외칠 줄 알았던 수영은 아무런 말 없이 순순히 뒤를 따랐다. 오늘 얘 좀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호가 간만의 쇼핑에 들뜬 발을 세차게 놀렸다.
모든 강의가 끝난 뒤, 차로 돌아온 두 사람은 백화점에 갈 준비를 했다. 진호가 핸드폰으로 카메라 기종을 검색하는 동안 수영은 내비게이션에 백화점 이름을 목적지로 등록했다.
딩동-
액셀을 밟으려던 순간, 수영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만요.”
혹여나 중요한 내용일까 봐, 수영은 운전을 멈추고 급히 핸드폰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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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나잇에서 커플 샷 응모를 한다는데요?”
이걸 저한테 왜 보냈을까요. 수영이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는 번호로는 다 뿌렸겠죠.”
진호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얼른 출발하세요.”
딩동-
그때 한 번 더 알림음이 울렸다. 수영은 또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특별상으로 가장 자극적인 사진을 찍은 커플에게는 사장님의 애장품 크리스찬 샬베스타의 카메라를 드립니다……?”
“그거 그냥 살 수는 없어요?”
‘크리스찬 샬베스타’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진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사려고요?”
“네.”
크리스찬 샬베스타라니.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유명 사진작가의 카메라를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고 경호원을 동원해 봐도 찾을 수 없었던 물건이라 얼마가 들더라도 지급할 용의가 있었다.
“잠시만요. 기다려 봐요.”
수영이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치는가 싶더니,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사는 건 어렵겠는데요. 사장님이 돈 받고 팔 생각은 없으시대요.”
어지간한 건 돈으로 매수하면 되던데, 은근히 까다롭네. 아쉬움에 어깨가 처진 진호에게 수영이 대안을 제시했다.
“그까짓 사진, 찍으면 되죠. 돈도 안 들고 시간도 얼마 안 들 텐데.”
맞는 말이지만 수영과 커플 샷을 찍어야 한다는 게 영 탐탁지가 않았다. 그런 진호의 마음을 안다는 듯 수영이 말을 보탰다.
“찍겠다고 하면 빨리 끝낼 수 있도록 저도 최대한 협조할게요. 진호 씨한테 미안한 것도 있으니까.”
고장 난 카메라를 사게 만든 것이 못내 걸리는 모양이지. 어째 간곡해 보이는 수영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살피던 진호가 은근슬쩍 물었다.
“사진은 대외로 공개되는 거예요?”
“아뇨. 밑에 ‘보내 주신 자료는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습니다. 철저히 비밀을 보장해 드리며 이벤트 종료 후 메일은 삭제되니 안심하고 보내세요’라고 쓰여 있네요.”
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진호가 작은 목소리로 ‘찍어요, 그럼’이라며 승낙했다. 짠돌이랑 커플처럼 사진을 찍는 건 언짢지만 제 우상의 카메라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았다.
“호텔로 가죠.”
“백화점 예약은 취소할까요?”
“네.”
왠지 기뻐하는 듯한 수영이 재빨리 가장 가까운 호텔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이왕 찍는 거 제대로 찍어야지. 금전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했던 진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열의를 불태웠다.
* * *
호텔에 도착해 1박으로 스위트룸을 빌린 진호가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관처럼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 수영을 향해 엄숙하게 선언했다.
“우리의 목표는 특별상이에요. 자극적이어야 하니까 수위를 최대한 높여서 연출해야 할 거예요. 이를테면 진짜 섹스하는 것처럼 보이게 촬영하는 거죠. 괜찮겠어요?”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은 수영이 진호의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 들며 끄덕였다.
“당연하죠. 진호 씨가 하자는 대로 따를게요.”
흔쾌히 수긍한 수영이 공손히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얹었다.
“남자끼리는 어떻게 하는데요?”
카메라를 잘못 골라 준 게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는지 적극적인 자세에 도리어 당혹스러웠다. 저야 게이라서 남자끼리의 섹슈얼한 스킨십이 자연스럽다지만 수영은 아니니까. 게이 바에서 일해 봐서 아무렇지 않은 건가? 짠돌이에게 남아 있던 앙금이 누그러졌다.
“여자랑 하는 건 알죠? 그거랑 별 차이는 없어요.”
“여자랑도 해 본 적은 없는데, 야동은 친구들 따라 몇 번 봤어요.”
섹스를 해 본 적이 없다고? 여자들이 가만히 안 뒀을 거 같은데. 탄탄한 수영의 체격을 느릿하게 훑은 진호가 머리를 털더니 제 옆을 툭툭 쳤다. 짠돌이가 동정이든 아니든 나와는 관계없고, 어쨌거나 촬영이 먼저니까.
“앉아 봐요. 예시를 보여 줄게요.”
진호가 핸드폰을 들어 앨범을 뒤지더니 게이 모델들의 사진을 찾아 수영에게 내밀었다. 남자 둘이서 헐벗은 채 이런저런 자세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시각 자료만큼 확실한 게 없지. 인체 구도를 연구한다고 게이 잡지 사진을 찍어 놓은 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이런 느낌으로 찍으려고 하는데.”
화면을 넘기는 진호의 손을 잡아 멈춘 수영이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진호 씨는 이렇게 하는 거 좋아해요?”
안대를 한 채 의자에 묶인 남자가 채찍을 든 남자에게 희롱당하는 장면이었다. 남자는 오랜 시간 당한 듯 배에 빨간 자국을 새기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턱을 젖히고 있었다.
“아, 아뇨.”
아니, 이런 사진이 어느 틈에. 진호가 당황함을 숨기며 단숨에 부정했다. 가벼운 정도면 몰라도 본격적인 BDSM은 절대 취향이 아니다.
“그럼 어떤 거 좋아하는데요?”
“강제로 하는 건 싫어요. 자기 좋을 대로만 하는 거.”
신현우한테 3년 동안 시달리고 나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좋아한다고 해서 싫은 것까지 감당할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그 새끼는 단순히 자기 꼴리는 대로 먹고 버렸을 뿐인데, 미련하게도 어린 자신은 그것 또한 사랑의 방식이라 여겼었다.
“해도 괜찮은지 물어보고 하는 게 좋아요?”
“차라리 그게 낫겠네요.”
“상냥한 거 좋아하시는구나.”
혼자서 중얼거리는 수영을 바라보던 진호가 불현듯 눈매를 뾰족하게 세웠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시죠? 수영 씨랑은 관계없잖아요.”
무의식적으로 쓸데없는 질문에 술술 대답해 버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또 휘말릴 뻔했어.
“그런 관심은 넣어 두시고, 사진이나 찍죠.”
“이것들이랑 비슷하게 찍으면 되죠?”
수영이 알겠다는 듯 진호가 화면에 띄워 놓은 사진들을 유심히 보며 몸을 일으켰다.
“오면서 구상해 둔 게 있어요. 수영 씨는 내 말만 따라요.”
짠돌이 놈. 고생 꽤 하겠군. 진호가 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명령하듯 말했다.
“우선 씻고 오세요.”
아무리 거짓 연인 행세라지만 씻는 게 기분상 더 좋을 것 같았다. 진짜는 아니지만 살을 맞댈 건데 혹시라도 냄새가 나는 건 최악이었다. 수영은 약속대로 군말 없이 욕실에 들어갔다. 수영에 이어 저도 꼼꼼히 몸을 씻고, 가운을 입고 나오자 수영 역시 가운을 두른 채 침대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의 어색함을 느끼며 진호가 카메라를 구도에 맞게 세팅했다.
“일어나세요. 침대는 안 쓸 거니까.”
‘침대=섹스’라는 공식은 식상하다. 진호는 특별상을 위해 평범하지 않은 방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먼저 조명을 끈 뒤, 침대 위의 조그만 전등을 켰다. 오렌지빛이 깜깜한 방을 은은하게 감쌌다. 침대맡 탁자에 놓인 향초에 성냥으로 불까지 붙인 진호는 수영에게 돌아왔다.
“좀 낫네요.”
관능은 자고로 분위기에서 나오는 법. 게다가 얼굴도 잘 안 나올 테니까 일거양득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띤 진호가 얼떨떨한 수영을 구석으로 이끌었다.
“수영 씨는 저를 벽에 모는 거예요.”
등에 닿는 딱딱한 감촉에 걸음을 멈추며 진호가 수영을 앞으로 끌어왔다. 수영이 고분고분하게 따라왔다. 진호가 잡은 손을 당겨 그대로 벽에 닿게 했다.
“두 팔 안에 저를 가둬 봐요.”
“네?”
“양팔 사이에 저를 두고 벽을 짚어 보라고요.”
수영은 왼손으로 진호의 오른쪽 어깨 옆을 짚은 상태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오른손을 뻗었다.
“이렇게요?”
“조금만 더 와 봐요. 이렇게.”
굳어 있는 허리를 붙들어 앞으로 확 당기자 수영이 어, 소리를 내며 앞으로 휘청였다. 그 덕에 두 배가 맞닿으며 수영의 가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 정도면 괜찮…….”
고개를 올린 진호가 말을 멈추었다. 수영의 입술이 바로 이마 위에 있었다.
“……아요.”
“진호 씨.”
바르게 직시해 오는 갈색의 눈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눈동자가 되게 검네요. 신기하다.”
“잡소리 말고 촬영에 집중해요.”
몸을 옆으로 틀자 수영이 팔을 뒤로 거두었다. 곧장 테이블로 걸어가 카메라의 타이머를 10초로 맞추었다.
“셔터 누를 거니까 아까 했던 그 자세 그대로 취하면 돼요.”
“넵.”
수영이 오버하며 한 손을 이마에 올려 경례를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진호가 셔터를 누른 뒤 수영의 앞으로 달려갔다.
“자세 틀리지 마세요.”
벽에 등을 기대자 수영이 손을 뻗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입술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삐끗하면 맞닿을 거리감에 진호가 목을 뻣뻣이 세웠다. 바들거리는 게 보였는지 수영이 설핏 웃었다.
괜스레 열이 올라 수영에게서 눈을 돌렸다. 짠돌이 새끼랑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이야. 10초의 시간이 10분 같았다. 10초 하고도 5초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테이블로 뛰어갔다. 카메라 앨범을 뒤지자 그럴듯한 자세로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어때 보여요?”
진호가 뒤따라온 수영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수영은 슬쩍 보더니 ‘괜찮은 거 같은데, 진호 씨는요?’ 하고 되물었다.
“으음. 야한 느낌이 없어요.”
목소리가 전보다 힘이 없었다. 수영이 진호의 어깨를 돌려 팔을 붙잡았다.
“한 번 더 찍어 보죠.”
수영은 셔터를 누른 뒤 진호를 벽으로 이끌더니, 아까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게 했다. 어느새 적응된 진호가 수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시 찍는다고 없던 느낌이 살아날까요?”
“다르게 하면 되죠. 예를 들면.”
수영이 왼손으로 진호의 오른쪽 허벅지를 잡아 올렸다. 진호는 별안간 다리로 수영의 허리를 감은 자세가 되었다.
“잠깐만.”
진호가 놀랄 겨를도 없이, 수영이 진호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다리를 들어 살짝 벌어졌던 진호의 가운이 어깨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맨살에 수영의 가슴이 고스란히 닿았다.
“읏.”
그때 수영이 입술이 닿을 듯 다가왔다. 진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잠시만 이렇게 있어요.”
입술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뜨자 키스할 듯 고개를 튼 수영이 작게 속삭였다.
“셔터음 울릴 때까지만.”
5초 느린 카메라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수영의 덜 마른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제 맨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거 예상보다 분위기가……. 차가우면서도 묘한 감촉에 꿀꺽, 목울대가 울릴 즈음 셔터음이 터졌다. 찰칵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진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몸을 기댔다. 뭐지, 이건.
“이제 됐을 거예요.”
진호의 다리를 살포시 내려놓은 수영이 어느 틈엔가 테이블로 가서는 카메라를 가져왔다.
“봐요.”
진호는 놀랐던 심장을 진정시키며 저장된 사진을 관찰했다. 반라의 상태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듯한 장면이 꼭 커플 같았다. 그것도 아주 야릇한 공기 속의 연인.
“괜찮네요.”
만족한 진호가 수영을 힐끔 째려보았다.
“그래도 앞으론 제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진호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이 새끼 앞에서 설 뻔했어.
“진호 씨. 손 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수영이 손을 잡아 제 이마에 대자 진호가 움칠거리며 뿌리쳤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수영이 난감한 듯 눈을 끔뻑였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은데 열 좀 재 달라고요.”
“손대지 말라니까요.”
“진호 씨한테 옮으면 큰일이잖아요.”
그럴듯한 대답에 머쓱해진 진호가 헛기침을 뱉었다. 제 말대로 따르라고 으스댈 때는 언제고 이게 무슨 꼴인지.
“크흠. 여, 열은 없어요.”
이상하다. 열나는 것 같은데. 혼자서 중얼거리는 수영에게 호승심이 인 진호가 소리쳤다.
“옷이나 갈아입어요. 집에 가게.”
“지금 가려고요? 라운지도 안 쓰고요?”
“라운지를 왜 써요. 빨리 사진 보내고 집 가서 쉬어야죠.”
진호가 고장 난 카메라를 보란 듯이 쥐고 흔들었다. 수영이 시무룩해지며 조용히 가운을 벗었다.
“그래야죠.”
수영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진호가 노트북을 꺼내 카메라의 SD 카드를 연결했다.
“수영 씨가 사연 쓸래요? 메시지가 수영 씨에게 왔으니 본인이 직접 보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줘 봐요.”
수영이 상의의 소매를 한쪽 팔에만 걸친 채 진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노트북을 건네받은 수영이 자판을 두들기더니 금방 진호에게 돌려주었다.
“마지막 찍은 사진으로 보냈어요.”
“사연은 안 쓰고요?”
자기 일 아니라고 대충 쓴 거 아니야? 사연을 지어내기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기에 의아했다.
“진호 씨 씻고 있을 때 미리 써 뒀죠. 커플인 것처럼 애틋하게 썼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팔도 제대로 끼워 넣은 수영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진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미리 써 둔 건 칭찬할 만한데, 그런 징그러운 행동은 자제해 주면 안 되겠니.
“옷 갈아입고 나와요. 카메라 손보고 있을게요.”
침대에 올려 둔 카메라를 가져간 수영이 가방을 챙겨 침실을 나갔다. 여유로운 수영의 뒤꽁무니를 시선으로 뒤쫓던 진호가 풋,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언가 달라 보이는 수영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이대로만 간다면 같이 지내는 것도 할 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진호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 * *
“프런트에 카드 돌려주고 올게요.”
“수영 씨가 챙기지 않았어요?”
로비에 도착한 수영이 카드 키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자 진호가 되레 의문을 표했다.
“진호 씨가 챙긴 줄 알았는데.”
호주머니를 뒤지던 수영이 비상키를 받으러 프런트로 달려갔다. 순조롭다 했더니 역시나. 뛰어가는 거대한 체구를 향해 한심한 눈길을 보낸 진호가 허리춤에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어. 누나.”
-걱정돼서 전화했더니 기분 좋은 것 같네? 누나라 부르는 거 보니까.
“나쁠 이유도 없잖아. 이번엔 무슨 일인데?”
-업무차 연락해 보는 거지, 뭐. 요즘 잠은 잘 자고? 나쁜 꿈을 꾸거나 그러지는 않아?
“갑자기 그걸 왜 물어.”
-그냥. 예전에 너 많이 힘들었던 게 떠올라서.
힘들었던 일? 천진하게 웃고 있던 진호의 입가가 굳어졌다.
-너 혹시 아직도 신현우 못 잊었니?
“누나.”
-그 일은 이제 좀 잊어.
2년 전에 있었던 ‘어떤 일’. 신현우와 헤어져야 했던. 혜린은 그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진호는 번지는 두통에 목덜미를 감싸며 이를 악물었다.
“최근엔 잊고 있었는데, 말해 준 덕에 생각날 것 같네.”
“진호 씨. 찾았어요!”
멀리서 수영이 달려오며 카드 키를 흔들었다. 별일 없으니까 끊어, 하고 통화 종료를 누르려는데 문득 머리를 스치는 일이 있었다.
「방금 햄버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생각했죠.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업무차 연락해 보는 거지, 뭐. 나쁜 꿈을 꾸거나 그러지는 않아?」
설마. 혜린의 ‘업무차 연락’이라는 말이 뇌리에 꽂혔다. 맞아. 저 새끼는 감시하는 게 일이었지. 분명 누나와 계속 연락하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내가 햄버거 좋아하는 걸 안 거야. 그렇다면.
-진호야? 여보세요?
“상무님이에요?”
수영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바로 반응을 보였다. 진호는 그마저도 아니꼬웠다. 얼마나 연락했으면 목소리만 듣고 알아. 진호는 조용히 핸드폰에 대고 끊을게, 라고 말하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전 괜찮은데 더 통화하시지.”
“저기요.”
진호가 수영의 말을 끊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어제 제가 자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경계심 가득한 눈빛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수영이 카드 키를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안 좋은 꿈을 꾸는지 자꾸 앓는 소리를 내더라고요. 신현우인가? 그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누나한테 그 얘기 했어요?”
“네. 제 일이니까요.”
말문이 막힌 진호는 차가운 눈으로 말을 대신하며 수영을 등졌다. 왜 잊고 있었을까. 저 짠돌이 놈은 업무 보고든 감시든 일이라면 열심히 했을 테지.
“잠깐 카드 키 반납하고 올게요.”
“…….”
“진호 씨?”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곧장 출구로 향했다. 무엇보다 수영에게 휘말렸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정작 중요한 건 내팽개쳐 두고, 이대로만 갔으면 좋겠다며 헤실거렸다니. 같이 지내야 하는 이 사람은 내 정보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할 뿐인데.
“먼저 밖에 가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수영이 카드 키를 반납하러 프런트에 들르는 동안, 진호의 머릿속은 새로운 계획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차례다. 경호원은 경호원답게, 고용주는 고용주답게. 최소한의 관계만 허락하며 선을 지키는 사이가 되어야만 한다.
“방법을 찾아보자.”
주차 요원이 차를 가져오길 기다리며 차분해진 진호가 비장한 얼굴로 복잡한 번화가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