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8)

04.

“아.”

진호는 거실 바닥에 놓인 낡은 라디오를 미처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옆에 쌓인 신문지 더미에 떨어져 무사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진호가 아릿한 이마를 감싸며 일어섰다.

“수영 씨.”

진호는 거실 한가운데 쪼그려 앉은 인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것들 언제 치울 거예요?”

오래된 브라운관을 구석에 쌓아 올리던 수영이 허리를 세웠다.

“진호 씨가 반성할 때까지요.”

“헛소리 말고 좋은 말 할 때 치워요.”

툭 내뱉는 어투가 날카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진호네 거실은 수영이 가져온 잡동사니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현관 앞에까지 고물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게 돈을 작작 썼어야죠.”

수영이 나무라며 손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었다.

“돈의 소중함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시라고요.”

진호는 거실을 가득 채운 물건들을 치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사태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영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고심하던 진호는, 가장 쉬운 방법이자 수영에게 가장 타격이 클, 돈을 이용하기로 했다. 일명 ‘돈지랄로 쫓아내기’ 작전이었다. 물론 까딱해서 수영이 집을 나가면 꼼짝없이 본가로 가야 했으므로 딱 거슬릴 만큼만 괴롭혀야 했다. 사무적인 용건을 제외하면 집 안에서 서로 없는 것처럼 평화롭게 지낼 만큼만. 그래야 저 짠돌이에다 촉새 같은 놈이 누나한테 일러바치지 않을 테니까. 진호는 수영의 별명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하며 이를 갈았다.

첫 번째 작전은 5백만 원 상당의 최신형 노트북을 사는 것이었다. 수영 몰래 인터넷으로 노트북을 구매해 집으로 배송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영은 배달된 노트북을 보고 기함을 했다.

「지금 쓰는 것도 멀쩡한데 새 걸 또 샀어요?」

하지만 단단히 마음먹은 진호는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수영의 앞에서 택배 상자를 뜯고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노트북을 화장실로 가져갔다. 그러곤 수영이 보는 앞에서 미리 물을 채워 놓은 욕조 위에 노트북을 잡은 손을 내밀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진호는 한 손으로 노트북을 잡은 채 조금씩 팔을 내렸다. 인상을 쓴 채 욕실 문턱에서 지켜보는 수영에게 보란 듯이 노트북을 물속에 담갔다. 수면 아래로 한쪽 귀퉁이가 서서히 잠겨 들어갔다.

「진호 씨. 왜 이래요?」

절반 정도가 잠겼지만 진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약과지.

「잠깐만요!」

보다 못한 수영이 달려와 노트북을 낚아챘지만 이미 속까지 푹 젖어 버린 노트북은 한 번 작동해 보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내 돈으로 샀으니까 내 마음이죠.」

충격을 받아 어두워진 수영의 낯빛에 진호는 보란 듯이 비수를 던졌다. 이걸로 힘들어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두 번째 작전은 요거트 백 개 사기였다. 밀려든 택배 무더기에 수영은 다시금 놀라더니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수제 그릭 요거트는 왜 이렇게 많이 산 거죠?」

「이러려고요.」

진호는 수입 요거트 하나를 꺼내 뜯더니 뚜껑에 묻은 잔여물을 핥아 먹었다. 음. 적당히 달고 맛있네. 그러고는 다른 하나를 뜯어 뚜껑만 핥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

「뭐 하는 짓이에요?」

수영이 요거트를 빼앗으려 하자 진호는 옆으로 쏙 피하며 상자 안의 다른 요거트를 꺼냈다. 약 올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뚜껑만 핥고 버렸다. 천천히 일그러지는 이마의 주름이 볼만했다.

「진호 씨.」

「네.」

「지금 뭐 하자는 거죠?」

「수영 씨도 와서 먹어요. 요거트.」

헤실거리며 또 다른 요거트를 따자, 수영이 질렸다는 듯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이런 거 누가 가르쳐 줬어요?」

가르쳐 주긴. 다 뜻이 있어서 이러는 거라니까. 굳이 따지자면 바로 당신이요. 그 막무가내 정신을 이어받은 거지. 진호는 연이은 작전 성공에 두근거림을 느끼며 맛있게 요거트를 핥아 먹었다. 무려 57개까지.

세 번째 작전은 택시 타고 등교하기였다. 일찍 일어나 여유롭게 모닝커피를 즐긴 뒤, 수영 몰래 택시를 예약했다. 전문 기사까지 딸린 고급 택시로. 아니나 다를까, 집 앞에 멈춰 선 검은 세단을 보고 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난 거 있으면 말로 해요. 이러지 말고.」

「화난 적 없는데요.」

「이게 화난 게 아니면 뭐예요. 새로운 장난?」

「그냥 심심해서요.」

수영을 향해 빙긋 웃어 준 뒤 유유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 문을 쾅 닫자, 어안이 벙벙한 상판이 차창을 메웠다.

「정말 이럴 거예요?」

「싫으면 걸어오든가요. 전 택시 탈 테니까.」

「그러세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진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도중에 수영이 운전석 쪽 창문을 똑똑 두드려 열었다.

「기사님. 안전 운행 부탁드려요.」

네, 하고 대답하는 기사를 향해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친 수영이 배웅하듯 손을 흔들었다. 이게 아닌데. 벌써 출발해 버린 택시 안에서 세워 달란 말은 못 하고 진호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해서 진호는 자존심 회복을 위해 네 번째 작전에 돌입했다.

「진호 씨. 제가 공책을 안 가져와서 그런데 메모지 하나만 빌려주실래요?」

김 교수의 마케팅 관리 시간에 수영이 부탁을 해 왔다. 이 기회를 놓칠 진호가 아니었다. 이전 같았으면 싫다고 거절했겠지만 그런 일차원적인 방법으로는 수영을 괴롭힐 수 없었다. 그것 대신 진호는 메모지를 주는 것을 택했다. 이러면 분명 정떨어지겠지.

「여기요.」

「고마, 어?」

놀라는 수영의 낯에 대고 승리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호가 내민 것은 신사임당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특별한 메모지였다.

「5만 원?」

「네. 메모지로 쓰세요.」

「진심으로요?」

진호는 찰나의 순간 망설였다. 되묻는 수영의 인상이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험악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짠돌이한테 질쏘냐. 진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해요, 지금?」

수영이 손에 쥔 5만 원을 진호 앞으로 휙 던졌다.

「선 넘네.」

먼저 선을 넘은 게 누군데. 대항하려던 진호를 가로막은 것은 두 사람을 예의 주시 하던 김 교수였다.

「거기 두 사람. 사이가 참 좋네요?」

교수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잘못 보셨어요. 최악입니다, 최악. 진호가 떨어진 5만 원을 주워 수영에게 내밀었다.

「돈을 소중히 써야죠.」

「나중에 수업 끝나고 봐요.」

수영이 진호를 흘겨보더니 이내 교재 위로 시선을 옮겼다. 들은 체도 안 하네.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진호는 지폐를 도로 지갑에 넣었다. 목표한 대로 된 것 같긴 한데 뭔가 찜찜하달까. 자신을 벌레 보듯 바라보던 수영의 눈동자가 쉽게 잊히지 않았다.

「5만 원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여 줄 테니까.」

그래서 고물을 하나씩 주워 왔을 때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렇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5만 원 치 모일 때까지요.”

담담하게 뱉는 얼굴이 뻔뻔하기 그지없다. 진호는 라디오에 박아 얼얼한 발목을 감싸 쥐며 핸드폰을 들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거기 고물상이죠? 여기 XX 아파트인데…….”

수거업체는 금방 도착했다. 최대한 많은 인원을 보내 달라고 했더니 열 명 남짓한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잘 오셨어요. 거실에 있는 거부터 치워 주세요.”

진호는 일그러진 수영의 눈가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정말 이러실 거예요?”

수영이 잡동사니를 용케 헤치고 성큼 다가왔다. 지지 않으려 시선을 고정한 채 버텨 섰다. 수영의 손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손목을 붙잡혔다.

“잡지 마시죠.”

손등으로 쳐 내자 잡은 손이 툭 떨어진다.

“그래요. 한번 해 보자고요.”

단단히 각오한 듯한 수영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진호는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이런 도발에 내가 쫄 줄 알고.

“아저씨. 이거 얼른 다 치워 주세요.”

포기했는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수영을 보며 큰 소리로 얘기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쾅, 문이 닫히고 신속하게 이동하는 고물 덩어리를 보며 진호는 근심을 내려놓았다. 됐어. 드디어 이겼다.

* * *

“오늘 저녁에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좌석 예매해 놓으세요.”

다음 날 아침, 학교로 가는 차 안에서 벨트를 매며 수영에게 주문했다.

“제주도는 왜요?”

“옥돔이 갑자기 당기네요.”

“네. 그럴게요.”

어제의 수법이 먹혔나 보다. 별말 없이 따르는 수영을 보며 진호가 의외라는 듯 토끼 눈을 했다. 금세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퍼스트 클래스로 끊는 거 잊지 마시고요. 강의 다 마치면 바로 공항으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뭐야. 왜 이렇게 순종적인데. 토씨 하나 달지 않고 수긍하는 수영에게서 희망이 보였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군.

“진호 씨. 잠시 손 좀 빌려주실래요?”

보통 때엔 덥석덥석 잘도 잡더니 웬일인지 물어보기까지 한다. 진호는 반신반의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그래. 진작에 이렇게 부탁했으면 좋았잖아.

철컥. 손목에 차가운 감촉이 부딪쳤다. 생소한 감각에 팔이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수영이 진호의 왼쪽 손목에 채운 것은 완구용 철제 수갑이었다.

“벌이요.”

세상 천연덕스러운 말투였다. 진호는 순간 어이를 상실하고 허, 허, 하는 이상한 헛웃음을 내뱉었다.

“앞으로 함부로 돈 안 쓰겠다고 할 때까지 안 풀어 줄 거예요.”

“농담하지 말고 풀어요.”

손목을 있는 힘껏 비틀어 빼내려고 했지만 어린이용이라 틈새가 작아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사납게 쏘아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긋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망할 짠돌이 새끼.

“약속하면 되잖아요. 돈 허투루 안 쓰겠다고.”

수영은 제 오른손에 똑같이 채워진 수갑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안 그럼 종일 저랑 붙어 있는 거예요.”

그래야 버릇이 고쳐지지. 수영은 난리를 치며 손목을 흔드는 진호를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이거 무슨 유치원생 훈계하는 아버지가 된 기분인걸.

「왜 뒤쪽에 타세요?」

며칠 전 게이 바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한 사진을 찍고 호텔에서 나올 때부터 이상했다. 유난히 굳은 표정으로 뒷좌석에 쌩하니 앉아 버리는 진호는 평상시와 달라 보였다.

「뭔 일 있어요?」

물어도 답이 없다.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수영이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카드 키 가지러 가기 전까지는 괜찮아 보였는데, 가지고 돌아오니 달라져 있었지.

「상무님이랑 싸웠어요?」

혜린과의 통화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생각난 수영이 물었지만 진호는 여전히 조용했다. 뭐 때문인지 삐져도 단단히 삐졌네. 수영은 혜린이 아니라면 남은 건 자신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최근에 진호와 관련된 사람이라곤 혜린 아니면 자신뿐이니까.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운전이나 하세요.」

빙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 때문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뭘 잘못했지?

「말을 해 줘야 기분이라도 풀죠.」

「말해 봤자 누나한테 다 이를 건데요, 뭐.」

상무님에게 이른다고? 3초간 멍해졌던 수영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업무 보고한 것 때문에 그래요?」

「아닌데요.」

「맞는데 뭘 아니라 그래요.」

「아무튼 아니에요.」

참. 동생도 이런 동생이 없다. 사생활 보호 운운하더니 이런 거에 민감하구먼. 수영은 그렇게 가볍게 넘겼다.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겠지, 맛난 거 먹여 주면 또 기분 좋아지겠지, 하고.

그래서 한술 더 떠 괴로워하는 악당 역할을 자처했다. 노트북을 물에 담갔을 때도, 요거트를 뚜껑만 핥아 먹고 버렸을 때도, 고급 택시를 불렀을 때도 그저 철없는 도련님의 투정으로 여겼다. -물론 노트북은 A/S를 받아 고쳤고, 남은 요거트는 토끼 마켓에 팔았다- 자기 딴에는 복수라고 하는 게 귀엽기도 했고.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메모지라고 내미는 5만 원에 순간 이성을 상실할 뻔했다. 아무리 잘해 주기로 했다지만 한계라는 게 있다. 지폐 한 장이라도 벌려면 얼마나 힘든데. 아마 친동생이었으면 등짝 스매시라도 날렸을 거다.

조금이라도 잘못을 깨달으라고 잡동사니를 잔뜩 가져다 놨더니 이번엔 고물상을 불러 모조리 치워 버렸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고물 더미 틈새에 있는 장난감을 슬쩍 챙겼다.

“하루 동안 잘 지내보자고요.”

수영이 핸들 위에 두 손을 올리며 액셀을 밟았다. 덕분에 진호의 왼손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진짜 죽고 싶어요?”

“절약하겠다는 약속부터 하고 죽이든 살리든 하시죠.”

“허, 참.”

옆에서 노려보는 눈길이 꾸준히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구멍 뚫리겠네요. 그만 쳐다보세요.”

“풀어요.”

“약속하면.”

“제가 왜요.”

“그럼 계속 이렇게 다니시든가.”

“차라리 말을 말자.”

포기한 듯 돌아가는 고개가 허탈했다. 이제 좀 얌전하네. 수영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제대로 고생해 보시죠. 서진호 씨.

* * *

조금 늦게 도착한 강의실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뒷문을 살짝 열어 내부를 쓱 둘러본 진호가 살며시 문을 닫았다.

“이러고 저길 어떻게 들어가요.”

왼쪽 손목을 차지하고 있는 쇳덩이를 가리키자 수영이 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뭐 어때서요. 다들 별 관심 없을걸요.”

“이걸 보고 아무렇지 않다고요?”

진호는 왼팔을 등 뒤로 감추며 수영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들어가요.”

붙는 건 싫지만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수영에게 닿지 않으려 간격을 넓히면서 진호가 강의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수영이, 진호 선배. 여기서 또 보네요.”

조심스럽게 구석 자리에 앉으려는데 과 대표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진호가 얼른 수영에게 붙으며 손목을 뒤로 가렸다.

“이 수업 들어?”

“아뇨. 전 잠시 놀러 왔어요.”

과대가 앞쪽에 둘러앉은 무리를 가리켰다.

“그때 집은 잘 들어가셨어요?”

“응. 잘…… 들어갔지.”

술에 만취했던 개강 총회 날을 떠올리며 진호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잘은 무슨.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 짠돌이 새끼한테 업혀서 집에 들어간 걸 생각하면 짜증이 치솟는다.

“둘이 친한가 봐요? 자주 붙어 있는 거 보면.”

“그래? 사실은 우리.”

수영이 해맑게 뒤에 감추었던 손목을 앞으로 빼내려 했다. 식겁한 진호가 오른손으로 팔을 잡았다. 덕분에 진호는 수영과 찰싹 붙은 모습이 되었다.

“하하. 잘못 봤어. 전혀 아니야.”

기계적으로 웃은 진호가 ‘전혀’를 크게 강조하며 남은 손을 휘저었다.

“친하시구먼, 뭘.”

진호의 말이 겉치레인 줄 알았는지 과대가 너스레를 떨며 꼭 붙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때 수영이 다시 오른팔을 내밀려고 했다.

“하지 마세요.”

진호가 수영에게만 들리게 소곤거렸다. 수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뒤로 손목을 흔들며 이죽거렸다.

“돈 아껴 쓰겠다고 말하면요.”

“싫다니까요.”

“남수영 학생, 서진호 학생. 그만 붙어 있고 자리에 앉으세요.”

팔을 앞뒤로 흔들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김 교수가 언질을 주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교탁 앞에 서서 출석부를 두드리는 김 교수에 과대가 자리를 피했다. 진호는 팔목에 주었던 긴장을 풀며 졸아 있던 가슴을 쓸었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으나 더 큰 문제는 강의 시간이었다. 노트북을 쓰려고 하는데 쇠사슬이 보일까 봐 양손을 쓸 수 없었다. 난감해하는 진호에게 수영이 펼쳐 놓았던 공책을 쓱 내밀었다.

“여기다 쓸래요?”

“싫은데요.”

“어차피 노트북 안 쓸 거잖아요.”

“그래도 싫어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제가 쓰는 수밖에.”

수영이 오른팔을 책상 위로 올리자 진호가 급히 막았다.

“뭐 하는 거예요.”

“노트북도 안 쓰고, 공책도 안 쓴다면서요. 전 필기를 해야겠으니 손 좀 쓸게요.”

“잠깐만.”

무작정 팔을 위로 들어 올리려는 수영을 제지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의 격렬한 손동작을 눈치챘는지 몇몇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봤다.

“줘 봐요. 제가 쓰게.”

울며 겨자 먹기로 책상에 놓인 공책을 눈앞으로 당겼다.

“잘 부탁해요.”

수영이 눈가를 둥글게 휘며 환히 웃었다. 진호는 거기다 펀치를 날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필기 안 하고 뭐 해요.”

화를 삭이며 노려보자 수영이 약 올리듯 설명하는 김 교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하려고 하잖아요.”

진호가 손 대신 눈으로 때리며 핀잔주었다. 이런 놈을 해고할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볼펜 든 거 안 보여요?”

“저만 보길래 집중하시라고.”

정말 어이가 없다 못해 소멸할 지경이다. 진호가 기가 찬 듯 한마디 덧붙였다.

“계속 말 거니까 필기를 못 하는 거잖아요.”

“저도 두 학생 때문에 수업을 못 하겠군요.”

머리 꼭대기에 내려앉는 음성에 고개를 들자 김 교수의 엄한 눈이 떡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진호 학생. 출석부를 보니 학년이 꽤 높던데, 우리 후배들에게 거시 환경과 미시 환경의 차이 정도는 설명해 줄 수 있겠죠?”

김 교수가 미간을 구기며 머리가 까져 반질반질한 이마를 쓸었다. 진호는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어디선가 들은 기억은 나는데 뭐였더라.

“죄송합니다. 저는…….”

“교수님. 제가 설명해 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려는데 수영이 말을 가로챘다.

“나는 진호 학생에게 물었는데.”

“저희는 한 몸이라서요.”

밝게 답하는 게 자신이 봐도 참 얄미웠다. 그러면서 또 묶인 팔을 내밀려는 것을 간신히 밀어내 막았다. 김 교수는 수영의 이런 태도에 익숙한지 해 보라는 듯 손을 교탁 방향으로 뻗었다.

“수영 학생이 나와서 설명해 봐요.”

“네!”

대답 한번 우렁차다. 다행히 어물대다 창피를 당하는 수모는 면했지만 수영이 벌떡 일어난 탓에 진호도 어쩔 수 없이 무릎을 들어야 했다.

“진호 학생은 왜 일어나죠?”

‘수갑 찬 걸 들킬 수는 없잖아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진호는 왼쪽 손목을 흘긋 바라보더니 우물쭈물하며 작게 소리를 내었다.

“한 몸…… 이라서요.”

그 순간 침묵 속에서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 교수는 체념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둘 다 나와 보세요.”

진호가 머뭇거리는 동안 수영은 교탁을 향해 발을 옮기고 있었다. 진호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수영에게 딸려 갔다. 교탁에 나란히 선 진호와 수영 옆에서 김 교수가 팔짱을 꼈다.

“거시 환경과 미시 환경이 뭐죠?”

“마케팅 환경 분석에서 쓰이는 용어로, 기업에 영향을 주는 환경 중에서 통제가 불가능한가와 가능한가에 따라 각각 거시 환경과 미시 환경으로 나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요.”

“거시 환경 요소에는 사회 문화, 기술, 경제, 환경, 정치 등이 있고, 미시 환경 요소에는 소비자, 경쟁자, 공급자 등이 있습니다. 거시 환경을 다섯 가지 요인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STEEP 분석이라고 합니다.”

교수의 질문에 수영이 또박또박 답변하며 진호를 흘끔 바라보았다. 어쩌라는 거야. 칭찬이라도 해 줘?

“예를 들면 어떻게 분석할 수 있죠?”

“다음은 서진호 씨가 말해 줄 겁니다.”

이러려고 나선 거네. 진호가 수영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둘이 한 몸이라니까.”

교수님. 그걸 인정하시면 어떡해요. 진호가 낙담하며 잽싸게 두뇌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뇌 속을 뒤져 봐도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첫마디를 어렵게 뗀 진호의 말문이 턱 막혔다. 강의실 안에 있는 학생들이 모두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수영에게 간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도와줘요.”

“돈 아끼기로 약속하면요.”

나 원, 더러워서.

“치사해서 안 해요.”

“한마디면 되는데.”

“진호 학생?”

“빨리요.”

“약속.”

미치겠네. 건드리면 터져 나올 것 같은 욕설을 눌러 내리며 진호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를 악문 채 수영을 째려보자, 수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나오시겠다고. 작게 속삭이는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STEEP에서 사회 문화적 요인의 예로는 인구 및 연령 분포가 있고, 기술적 요인의 예로는 스마트폰의 발달이 있습니다. 경제적 요인의 예에는 인플레이션, 환경적 요인의 예에는 지구 온난화 문제가 있으며, 정치적 요인의 예로는 노동법과 같은 법적 규제가 있습니다.”

수영이 대신 대답하자 몇몇 학생들이 오-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진호만은 이 상황이 못마땅한지 잔뜩 찌푸린 미간을 보였다. 흡족한 김 교수가 굳었던 입매를 풀며 교탁으로 다가왔다.

“이만하면 됐어요. 자리로 들어가세요.”

진호는 묶인 손목을 악착같이 가린 채 자리로 되돌아왔다. 김 교수가 교탁 앞에 서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다음에는 이걸로 안 봐줍니다.”

“네.”

김 교수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 수영이 옆에 앉은 진호를 향해 공책을 내밀었다.

“필기 이어서 해야죠.”

진호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참고 볼펜을 쥐어 공책이 찢어져라 꾹꾹 눌러썼다. 또 떠들었다가 나가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중간에 못 알아보게 날려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까는 제 덕에 잘 넘겼죠?”

모든 강의가 끝난 뒤, 차로 향하는 수영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했다. 하여간 짠돌이 새끼. 눈치는 더럽게 없다. 세 과목을 내리 듣는 동안 제 심장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도 모르고.

“공항에 갈 준비나 해요.”

“이러면 더 풀기 힘들어질 텐데. 혹시 저랑 같이 있는 게 좋으세요?”

상대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진호는 수영을 무시한 채 주차장으로 먼저 발을 옮겼다.

“예매는 했어요?”

차에 도착한 진호가 안전띠를 매며 신경질을 냈다. 망할 수갑 때문에 차에 타려면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넘어가야 했다. 수영은 시큰둥하게 시동을 걸더니 핸들을 잡았다.

“아니요.”

“지금 해요.”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지. 진호가 빤히 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보였다.

“예매 안 해도 괜찮아요.”

수영이 핸들을 꺾으며 진호와 눈을 마주쳤다.

“어차피 안 갈 거라서요.”

그러고 보니 가는 방향이 너무 익숙했다. 이대로 3분만 가면 집이겠네.

“차 돌려요.”

“싫은데요. 돈 못 쓰게 할 거예요.”

“당신 고용한 건 나거든요? 몇 번을 말해요.”

화가 나서 매달린 왼손을 위아래로 흔들자, 수영이 오른손으로 진호의 손을 떼어 내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쥐었다.

“가만히 좀 있어요. 그러다 사고 나요.”

“불안하면 차 돌려요.”

진호가 수영을 향해 있는 힘껏 눈을 흘기자 수영이 제 손에 얌전히 붙들린 진호의 손목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가만히 안 있으면 계속 이러고 갈 거예요.”

그렇다고 깨갱할까. 응. 깨갱해야지. 손목을 털어 내도 수영의 손이 떨어지지 않자, 진호가 졌다는 듯 손에 힘을 풀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져 주는 거야. 고집 센 촉새 짠돌아. 집 가서 보자.

* * *

“읏. 아아.”

“왜 그러시죠?”

“아, 너무 아파요. 조금만 더 살살, 으윽.”

“어떡해. 아팠어요? 실수로 손이 미끄러져서.”

미안한 듯 부드러운 어조와는 달리 진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더욱더 강하게 수영의 머리칼을 두 손으로 휘어잡았다.

“눈에 샴푸 들어갔어요.”

“여기요?”

진호는 괜히 거품 묻은 손으로 욕조 앞에 쪼그려 앉은 수영의 눈을 짚었다. 짠돌이 새끼. 맛 좀 봐라.

진호는 집에 돌아와 씻어야겠다는 수영에게 머리 감는 걸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그러고는 두피를 마구 문지르며 원 없이 복수하는 중이었다.

“아. 눈을 만지면 어떡해요.”

샴푸가 들어가 빨개진 눈을 한 수영이 빈손으로 제 오른손과 엮인 진호의 왼손을 붙잡았다.

“미안해요. 아팠어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진호는 수영 뒤에서 웃음을 눌러 참으며 샤워기 물을 틀었다.

“얼른 씻길게요.”

이게 바로 병 주고 약 주기지. 일부러 손끝에 힘을 가득 실어 누르며 머리카락을 헹궜다.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

“몸은 알아서 씻어요.”

속이 풀릴 때까지 문지르다 적당할 때쯤 손을 뗐다. 수영이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감싸며 일어섰다.

“누구 때문에 머리가 다 벗겨질 뻔했네요.”

“감겨 준다니까 냉큼 욕실로 들어간 사람이 누군데요.”

“이럴 줄 알았나요.”

수영이 툴툴대며 윗옷을 훌렁 벗었다.

“이거 잡고 있어요.”

수갑 덕에 한쪽 팔이 빠지지 않아 수영의 옷이 서로의 팔을 연결하는 고리에 걸쳐졌다. 진호가 걸린 옷을 내미는 수영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싫어요.”

“좀 잡아 봐요. 안 그럼 젖어요.”

“남이야 젖든 말든.”

“진호 씨는 안 씻을 거예요? 똑같은 꼴 당하기 싫으면 들어요.”

“전 새로 사면 되니까 괜찮거든요.”

“그러다 평생 이렇게 사는 수가 있어요.”

수영이 수갑을 흔들며 왼손으로 옆에 널어놓은 수건을 낚아챘다. 그런 협박에 속을 줄 알고. 진호가 콧방귀를 뀌며 대응했다.

“그래 봤자 전 제 마음대로 돈 쓸 겁니다.”

“계속 그렇게 하세요.”

수영이 맞받아치며 바지춤을 잡았다. 벗으려나 보다. 못 볼 꼴을 보기 전에 황급히 뒤돌아섰다. 곧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욕실을 메웠다. 진호는 수영에게 묶인 왼팔을 뒤로 꺾은 채 버티고 서서 수영이 씻는 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언제까지 씻어요.”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쯤, 지루해진 진호가 은근슬쩍 물었다.

“곧 끝나요.”

대답과 함께 물소리가 멈추었다. 적막한 상태로 1분, 2분, 10분이 흘렀다.

“아직 안 끝났어요?”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진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신경질을 냈다. 차분한 수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뇨. 다 씻었죠.”

“그런데 왜 안 나와요.”

“계속 이러고 있을 거니까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진호가 무작정 문으로 발을 떼었다.

“이러면 나오겠죠.”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강하게 뒤로 당겨진 왼쪽 손목이 얼얼했다.

“한번 나가 봐요. 그러면 인정해 줄게요.”

“와. 진짜.”

안간힘을 썼지만 제 팔만 아프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호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팔을 잡아당겼다.

“진호 씨만 손해예요. 좋은 말 할 때 포기하죠.”

“절대 못 해요.”

“저도 못 나가요.”

나도 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 갈 데까지 가 보자. 진호는 에라이, 하며 마른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가 더 오래 버티나 보죠.”

그 상태로 얼마가 흘렀을까. 슬슬 씻고 싶어진 진호가 입을 열었다.

“벗고 있으니 춥죠?”

“아뇨.”

“분명 추울 텐데.”

“나가고 싶은가 보죠? 자꾸 물어보는 거 보니.”

은근슬쩍 떠봤지만 수영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이 새끼 진짜 아무렇지 않은 거야? 의문이 들었지만 눈을 테러당하기 싫었던 진호는 꿋꿋이 버티고 앉았다.

“전혀요.”

“저도 아무렇지 않은데요.”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아무런 말 없이 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 진호가 움찔거리며 번쩍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나.

“그냥 포기하고 들어가서 자요.”

나른한 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호는 목을 빳빳이 들고 보란 듯이 허리를 높였다.

“자기는 뭘 자요.”

“방금 졸았으면서.”

“잠깐 눈 감은 거거든요?”

진호가 발끈하여 고개를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그까짓 남자 새끼 알몸 보는 게 어때서. 굳이 피할 필요가 있나? 자기가 알아서 가려야지.

“나와요. 나 좀 씻게.”

멈췄던 고개를 움직여 정면으로 수영과 마주했다. 시선이 저도 모르게 탄탄한 배를 지나 허리로 향했다. 뭐야. 이번에도 수건으로 잘 가리고 있네.

“포기하는 거예요?”

“아뇨. 그냥 씻는다고요.”

진호가 무작정 욕조 안으로 들어가며 수영을 밀어냈다. 더는 찜찜해서 못 참겠다.

“다 씻을 때까지 뒤돌고 있어요.”

“싫다면요?”

꼬박꼬박 말대꾸라니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진호가 질린 표정을 하며 샤워기를 오른손에 쥐었다.

“물벼락 맞을 준비해야죠.”

수도꼭지를 열어 물이 조금씩 나오게끔 하자 물벼락은 싫었는지 비척비척 뒤를 돌았다.

“저랑 눈 마주치면 그대로 맞는 거예요.”

“보고 싶지도 않으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세요.”

수영이 뒷짐을 지며 섰다. 완전히 돌아선 것을 확인한 진호가 조심스럽게 겉옷을 벗었다. 수갑 고리에 걸린 셔츠는 고이 접어 수영이 들게 시키고, 바지와 속옷은 반듯하게 개어 물이 닿지 않는 선반에 올려 둔 진호가 웅크려 앉은 채 수도꼭지를 돌렸다. 피부가 따뜻한 수온에 녹아들었다. 오른손으로 힘겹게 비누칠을 하며 수영을 흘끔 보니 여전히 그대로 서 있었다.

“씻는 거 도와줘요?”

한 손으로 샴푸질을 하느라 낑낑대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수영이 불쑥 물었다.

“됐거든요.”

진호가 질색하며 샤워기를 들었다.

“5분 안에 안 끝내면 이대로 방에 들어갈 거예요.”

“싫다면?”

“저랑 평생 이렇게 지내야죠.”

선택지가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진호가 얼른 물을 틀어 전신에 묻은 거품기를 걷어 냈다. 하지만 다른 손을 쓸 수 없어 제대로 씻기지 않았다. 이 새끼는 진짜로 5분 뒤에 끌고 갈 거 같은데. 촉박한 마음에 손 대신 샤워기를 뒷머리에 비벼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잘 안 되죠? 줘 봐요.”

“헉.”

순간 돌아보는 수영의 모습에 진호가 다급히 앞으로 샤워기 물을 분사했다. 하지만 다급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샤워기를 빼앗긴 채 뒤통수를 붙잡혔다.

“빨리 씻고 그만하죠.”

수영이 진호의 머리칼을 쓸며 꼼꼼히 거품기를 씻어 내렸다.

“뭐 하는 거예요?!”

진호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쳤다.

“걱정 마요. 몸은 가렸으니까.”

어깨에 닿는 축축한 느낌에 오른손으로 등을 쓸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수건으로 가려 준 건가.

“다 됐습니다.”

귀 뒤까지 세심하게 닦아 낸 수영이 수도꼭지를 잠그며 머리의 물기를 털어 주었다.

“이걸로 닦아요.”

손에 닿는 보송한 물체를 잡아 머리를 툭툭 털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이제 방으로 가죠.”

“우선 뒤돌아…….”

수영이 나가려는지 왼쪽 손목이 앞으로 당겨져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거대한 기둥이 코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뭐야.

“요…….”

콧등에 닿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기까지 약 5초의 시간이 흘렀다. 부드러운 감각이 익숙한데. 아, 포르노에서 보던 거네. 아니, 그거보다 훨씬 크다. 이런 게 존재할 수 있구나. 근데 이 새끼 자기 허리에 두르고 있던 걸 준 거야?

“으악!”

제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식하자마자 진호가 들고 있던 수건을 그대로 수영에게 던졌다.

“갑자기 왜 그래요?”

“당장 가려요!”

발악하듯 커진 음성에 수영이 갸우뚱거리며 허리에 수건을 둘렀다.

“남의 좆 처음 봐요?”

“닥쳐요. 제발.”

진호가 머리를 감싸더니 희번덕 눈을 치켜세웠다.

“뒤돌고, 절대 돌아보지 말아요.”

진호가 어깨를 안으로 움츠린 채 수영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렸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진호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지는 건 정말 싫은데.”

“…….”

“돈 아껴 쓸 거니까 이거 풀어요.”

진호가 왼팔에 묶인 수갑을 다른 손으로 잡아 흔들었다.

“오. 항복하는 거예요?”

수영이 의외인 듯 놀라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진호가 다급히 외쳤다.

“돌아보지 말라니까요?!”

“알겠어요. 확실히 약속하는 거죠?”

“……네.”

진호가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주억거렸다.

“좋아요.”

수영은 흐뭇한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벗어 던진 바지의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곧이어 작은 열쇠 하나가 수영의 손에 딸려 나왔다.

달칵. 허리를 아래로 낮춘 채 웅크리고 있는데,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손목에 휑한 바람이 닿았다. 왼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니 걸림이 없다. 이제 진호는 자유예요.

“약속. 꼭 지켜요.”

수영이 벗어 둔 옷가지를 정리하며 빙긋 웃었다. 진호는 됐다는 듯 손을 훠이 저었다.

“나가기나 해요.”

“넵.”

짧게 대답한 수영이 문을 닫으며 욕실을 나섰다. 진호가 허망한 눈으로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짠돌이 말마따나 남의 생좆을 목도했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놀라기에 저는 그다지 유난스러운 인물이 아니었다.

“씨발.”

하지만 지금만은 예외로 둘 수밖에 없었다. 열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저 새끼의 좆에 제 좆이 반응한다는 것은.

“한동안 안 하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서진호. 아무 때에나 발딱 세우고.”

배에 닿을 듯 솟아오른 성기에 진호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걸 어떻게 가라앉히냐고.

이로써 짠돌이를 떨어뜨려야 할 필사적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완전히 맛이 간 고추 레이더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저 새끼랑 엮이면 안 된다. 아무리 좆이 그리워도 대상은 가려서 받아야 한다.

“그나저나 그 새끼는 왜 선 거야.”

우람하게 솟아 있던 기둥이 떠오르자, 진호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 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짠돌이 놈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내 좆은 소중하니까. 저런 흉물에 서게 둘 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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