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주말에 시간 되죠?”
일과를 마친 평일 저녁.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 맥주 한 캔을 들이켜고 있는데 수영이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를 쥐었다.
“왜요?”
“야구 보러 갈래요? 표 얻었거든요.”
“컥.”
하마터면 입에 있던 걸 그대로 뱉을 뻔했다. 겨우 한 모금을 삼킨 진호가 콜록거리며 잔기침을 해 댔다.
“그거 설마 공짜로 얻은 거예요?”
“네.”
물론 짠돌이가 제값 주고 야구장 티켓을 사지는 않았을 터다. 그런데도 굳이 당연한 걸 물어보는 이유는 제 예상이 틀려 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누구한테서요?”
“최정연이요.”
“아…….”
진호가 탄식하며 소파 등받이 위로 이마를 박았다.
[수영 씨가 왜 나한테 표를 줘?]
금방 1이 사라지고 울고 있는 토끼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육상부 긴급 소집이 있어서 못 가게 됐어요ㅠㅠ 죄송해요…….]
[아냐. 정연 후배가 사과할 건 없는데.]
진호가 빠르게 글자판을 누르며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야 내가 산 표를 내가 얻어 쓰게 생겼잖아.]
[죄송해요ㅠㅠ 선배가 사 주셨는데ㅠㅠㅠㅠ]
날린 푯값 정도야 아무렇지 않다. 중요한 건 모처럼 홀로 즐기려고 했던 주말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진호 씨? 내일 같이 가는 거죠?”
“아뇨. 전 안 갈 겁니다.”
원래 스포츠에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야구장에도 생전 가 본 적이 없었다. 정연이 수영과 가 보고 싶다는 말에 구해다 줬을 뿐. 수영 없는 조용한 주말을 원한 게 전부였다.
“같이 가죠? 어차피 안 가면 저랑 집 안에만 있을 텐데.”
“혼자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진호가 신경질적으로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진호 씨 지키는 게 제 일인데 가려면 같이 가고 있으려면 같이 있어야죠.”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요. 각자 지내도.”
“안 돼요. 가끔 바람도 쐐 주고 해야죠. 남는 표 버리기도 아깝고.”
결국은 돈 때문이구먼. 진호가 혀를 쯧, 차며 빈 캔을 구겼다.
“아무튼 전 안 갈 거니까 설득시키고 싶으면 혹할 만한 대안을 제시해 봐요.”
진호가 농구 골대에 슛을 넣듯 깡통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일어났다. 스치듯 지나치는 팔을 수영이 덥석 붙잡았다.
“그럼 저는요?”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나가든 말든 상관 안 할 거니까.”
익숙하게 팔을 털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큼지막한 손이 강하게 손목을 덮었다.
“대안으로 저는 어떠냐고요. 하루 동안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특권을 드릴게요.”
“엑?”
당황해서 듣도 보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짠돌이가 순순히 제 몸을 내어 줄 리가 없는데. 그렇게나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싶다고? 돈에 환장한 나머지 머리가 돌아 버린 거 아니야? 진호가 지갑에서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이거 얼마로 보여요?”
“14만 6천 원이요.”
직접 세어 보니 액수가 정확했다. 정신은 아직 멀쩡한데. 주섬주섬 쥔 돈을 지갑에 집어넣는 진호를 지켜보던 수영이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제가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어서 말이죠.”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걸까? 진호가 미심쩍은 눈으로 수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간만에 욕구라도 푸는 게 좋을까. 외모만 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욕조에서 무심코 마주친 거대한 남성을 떠올리며 진호가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제 분신이 선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 몸뚱이 가져서 뭐에 쓰라고요.”
그래도 그렇지. 고프다고 아무거나 집어 먹으면 체한다. 짠돌이의 육체를 함부로 탐했다간 제 몸에서도 짠맛이 날 것 같았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지.
“그건 진호 씨 마음이죠. 싫으면 말고요.”
“아, 잠깐만요.”
이렇게 넘어가기엔 아쉬운데. 짠돌이를 마음껏 부려 먹을 몇 안 되는 기회였다.
“제가 원하는 건 다 하는 거죠? 빼는 거 없어요.”
“물론이죠.”
“좋아요. 거래 성립.”
미심쩍긴 하다만, 안 한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집에 와 버리면 되니까. 진호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자, 수영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알죠? 돈 쓰는 건 예외예요.”
그럴 줄 알았어. 돈지랄은 기대조차 안 했다. 뿌리치듯 손을 놓은 진호는 드레스 룸에 고이 모셔 두었던 카메라를 챙겼다. 주말에는 짠돌이 놈을 마음껏 굴려야겠네. 그러는 김에 불편했던 것도 떨쳐 버리고. 무언가가 연상된 진호가 수영에게 일침을 날렸다.
“우선 그 수갑부터 버리시죠.”
“버리기엔 정이 많이 들었는데.”
수영이 아쉬운 듯 호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은팔찌를 꺼내더니 엄지로 애처롭게 매만졌다. 지독하기도 하지. 항시 그걸 가지고 다니냐. 한심하게 보던 진호가 혀를 찼다.
“거래했잖아요.”
하는 수 없이 쓰레기통으로 터덜터덜 향하는 뒷모습에 진호의 입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계획했던 대로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을 듯했다.
* * *
조금은 이른 토요일 한낮의 야구장은 한산했다. 수영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진호가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짐 챙겨야죠?”
“지금 챙길게요.”
“카메라는 특히 조심히 다뤄 줘요. 수영 씨 몸값보다 비싸니까.”
수영이 뒤에서 구시렁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호가 쏟아지는 햇볕을 막으려 선글라스를 썼다.
“저쪽으로 가 보죠.”
구장 옆을 둘러싼 공원을 지시하며 진호가 가볍게 걸음을 뗐다. 양손에 커다란 짐을 가득 쥔 데다 목에는 카메라 가방을 건 수영이 그 뒤를 따랐다. 공원에 도착한 진호는 수영을 시켜 집에서 들고 온 조명을 설치하게 하더니, 수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조립하는 동안에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 수영이 고생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진호가 세팅을 마치고 그늘로 들어오는 수영을 향해 카드를 건넸다.
“이걸로 유니폼이랑 글러브 사서 갈아입고 와요. 오는 길에 매표소에 들러서 티켓도 받아 오고요.”
“넵.”
수영은 의외로 군말 없이 카드를 받아 들더니 구장으로 쌩하니 가 버렸다.
“별일이네.”
돈 쓰는 건 예외라길래 쓴소리라도 할 줄 알았건만. 이거 설치하느라 많이 지쳤나. 진호가 의아해하며 땅을 짚고 일어섰다. 수영이 돌아올 때까지 조명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방향을 맞추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쳤다.
“갈아입고 왔어요.”
유니폼을 입은 수영이 글러브를 왼손에 끼워 넣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선수 같네. 달라붙는 상의 때문에 수영의 떡 벌어진 어깨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카드는 여기요.”
수영이 비닐로 포장된 유니폼과 함께 카드를 건넸다.
“카드는 수영 씨가 가지고 있어요.”
앞으로 시킬 일이 많을 거 같으니까. 이것저것 사 오라고 할 만한 걸 떠올리며 진호가 웃음을 삼켰다. 자잘한 데에 돈 쓰는 건 지적 못 하겠지.
“이건 뭐예요?”
무표정을 되찾은 진호가 수영이 쥐고 있는 유니폼을 자세히 보며 물었다.
“진호 씨도 입으면 좋을 거 같아서 샀어요.”
“제 걸 왜 사요?”
이러려고 흔쾌히 간 거였냐. 진호가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수영이 내민 유니폼을 밀어냈다.
“영수증 받았죠? 가서 환불받고 와요.”
“영수증 버렸는데요.”
“……어쨌든 전 안 입을 거예요.”
“안 입으면 저도 사진 안 찍을래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진호가 황당하다는 듯 수영을 반사판 앞으로 밀어냈다.
“가서 포즈나 잡아 봐요.”
“싫은데요.”
진호의 희망과는 달리 수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새끼가 애처럼 왜 이래.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입어 봐요.”
“제가 싫다는데 왜 그래요?”
“저기 보여요?”
경기장으로 하나둘씩 모이는 사람들을 가리킨 수영이 진호 앞으로 옷을 다시 내밀었다.
“여기선 다들 입어요. 안 입으면 눈에 띌걸요.”
그런가. 확실히 똑같은 디자인의 유니폼들 사이에서 혼자만 반듯하게 셔츠를 입고 있으면 쓸데없이 튈 것 같기는 했다. 진호가 머뭇거리는 것을 포착한 수영이 포장을 벗겨 안의 내용물을 진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왕 산 김에 입고 와요. 자세 연습하고 있을게요.”
“…….”
“아니면 여기서 갈아입을래요? 전 상관없는데.”
“됐어요. 화장실에서 갈아입을 거니까.”
뻔뻔한 수영의 제안에 진호가 질색하며 구장으로 향했다. 저 새끼 앞에서 갈아입을 바엔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다녀오는 게 낫지. 못마땅한 진호가 이를 악물더니 화장실로 발걸음을 뗐다.
“시간도 없으니까 빨리 저기 서 봐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온 진호가 잔디밭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딱 맞는 사이즈에 수영이 흡족해하며 위아래로 훑었다.
“오. 잘 어울리는데요. 이러니까 마치 커플룩…….”
“닥치고 자세나 잡을래요?”
진호가 말을 자르며 카메라를 꺼내 들자, 수영이 그럴싸하게 시구 자세를 잡았다. 모델 일을 해 봐서 그런지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진호는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카메라를 눈앞에 갖다 대었다.
“적당히 던지는 척하면 찍을게요.”
글러브로 공을 쥔 채 한 발을 들어 올린 수영이 팔을 내두르자 진호가 연사로 셔터를 눌렀다. 수영에게 공을 던지게 했다가, 달리게 했다가, 점프를 시키는 등 여러 가지 포즈를 시도해 보던 진호가 턱을 모로 기울였다.
“뭔가 부족한데.”
결과물은 과제를 제출하기에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어딘가가 아쉬웠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본 진호가 허리에 손을 짚었다. 경기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죠. 촬영은 거의 마무리됐으니까.”
수영이 글러브를 벗으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조명이랑 반사판 좀 치워 줘요.”
진호가 미련을 떨쳐 내지 못한 채 카메라와 렌즈를 가방에 넣었다. 어느새 조명을 캐리어 안에 넣은 수영이 진호의 카메라 가방을 챙겨 차로 향했다. 그동안 진호는 입장 줄에 서 있기로 했다.
“티켓 가지고 있죠?”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낭 하나를 멘 채 달려오는 수영에게 대기 줄에 서 있던 진호가 손을 내밀었다.
“네. 여기.”
진호에게 티켓을 건네던 수영의 시야에 매표소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작은 남자애 하나가 들어왔다. 매표소 앞을 지키던 진행 요원이 아이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꼬마야. 줄 서는 데 방해되니까 비켜라.”
요원이 신경질적으로 안전 봉을 휘두르자 흠칫 어깨를 떨던 꼬마는 도망가는 듯싶더니 다시 매표소 앞에 다가와서 표를 사는 사람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작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눈에 밟혔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올게요.”
수영은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더니 답은 듣지도 않고 아이에게로 뛰어갔다.
“혹시 부모님 잃어버렸어?”
수영이 꼬마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려 무릎을 꿇었다. 목이 다 늘어져서 해진 티셔츠가 마음에 걸렸다.
“아, 아뇨.”
짚이는 데가 있는지 의미심장한 눈을 한 수영이 티셔츠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며 물었다.
“돌아갈 곳은 있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구장 앞에 줄 맞춰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꼬마의 의중을 알아챈 수영이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티켓을 꺼냈다.
“이게 갖고 싶어?”
꼬마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시선을 티켓으로 옮겼다.
“사고 싶은데 돈이 없는 거지?”
“네…….”
꼼질대는 조막만 한 손이 때가 타 꾀죄죄했다. 수영은 지저분하게 닳은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릎을 세웠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매표소로 가더니 곧 돌아온 수영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아이에게 티켓을 내밀었다.
“다행히 표가 남아 있더라. 같이 보러 들어가자.”
“그래도 돼요?”
꼬마는 조그만 눈을 반짝이며 수영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하지.”
“와아.”
그제야 힘차게 올라가는 입꼬리에서 기쁨이 묻어났다.
“일로 와. 들어가자.”
수영이 꼬마의 손을 잡으며 대기열로 이끌었다.
“얘는 뭐예요?”
수영이 모르는 아이와 같이 돌아오자 진호가 황당한 듯 팔짱을 꼈다.
“부모님 없이 혼자 야구 보러 왔는데 처음이라 그래서 이것저것 챙겨 주려고요. 이름은 성원이래요.”
지저분한 행색을 보니 평범한 아이 같지는 않았다. 가출이라도 한 건가. 귀찮기는 했지만 애초에 경기에 흥미는 없었으니 일행이 한 명 는다고 한들 별다를 건 없을 것 같았다. 애를 챙긴다고 수영의 관심이 그쪽으로 분산되면 저에게도 좋을 것 같았고.
“마음대로 해요.”
“역시 진호 씨는 수락할 줄 알았어요.”
수영이 손을 둥글게 모아 진호의 귓가에 대며 속삭였다.
“카드 좀 썼어요. 이해하죠?”
“네?”
진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수영을 노려보았다. 얼굴을 떨어뜨린 수영이 뭐가 즐거운지 성원의 티켓을 흔들었다.
“나중에 제 월급에서 깎아요.”
티켓 하나 더 사는 것쯤이야 괜찮았지만 어쩐지 짠돌이가 놀리는 것 같아 언짢았다. 뭐, 이 새끼가 속 썩이는 게 한둘이 아니니. 진호가 체념하는 동안, 수영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귀여운 캐릭터가 양쪽에 달린 머리띠를 꺼내 성원의 머리에 씌웠다.
“이거 진호 씨 주려고 산 건데, 성원이 너 해야겠다.”
그런 끔찍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단 말이지. 진호가 아이와 함께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수영 앞에 손을 펼쳤다.
“카드 줘요.”
이 새끼가 남의 돈이라고 함부로 쓰네. 통장에서 돈 나가는 거야 그렇다 쳐도 고작 짠돌이의 고약한 유흥에 쓰였다는 걸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다.
“힝.”
“지랄하지 말고 내놔요.”
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불쌍한 척 울먹이는 수영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을 누르며 손을 더 멀리 내밀었다.
“애 앞에서 말 좀 가려서 해요.”
네놈이 험한 말이 나오게 만들잖아. 손바닥에 부드럽게 놓이는 카드를 홱 낚아챈 진호가 상종도 하기 싫은 듯 몸을 돌렸다. 이게 자제한 거라고. 애 없었으면 야구장이고 뭐고 짐 싸서 집에 갔다.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 준 진호가 수영과 성원을 뒤로한 채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삐치기라도 한 듯한 진호를 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흘린 수영이 성원의 손을 잡고서 진호를 뒤따랐다.
“볼만해요?”
성원과 함께 앉기 위해 좋은 자리를 포기하고 -성원의 자리 옆에 앉은 관객과 표를 바꿨다- 같이 뒤쪽에 앉은 수영이 왼편에서 무심하게 관전하고 있는 진호의 팔을 당겼다.
“자리 바꾼 건 미안해요. 그래도 경기는 잘 보이죠?”
“나쁘진 않은데.”
진호가 다리를 꼬며 몇 분째 미동이 없는 선수들을 무기력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거 뭐, 움직이는 게 없으니 뭘 보고 있으란 건지 모르겠네.
“이거 들어 봐요.”
수영이 가방 안을 뒤적이더니 진호와 꼬마에게 싸구려 응원 봉을 건넸다. 필시 어디 굴러다니는 걸 주워 온 비주얼이었다.
“이런 걸 왜 줘요?”
“이거라도 들고 있어야 흥이 나요.”
“전 됐어요. 이런 거.”
진호가 응원 봉을 밀어내자 수영이 진호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이거 봐요. 애도 얌전히 잘 받는데. 어른이 돼서 투정 부려서야 되겠어요?”
눈을 반짝이며 응원 봉을 흔드는 성원이 기특한지 등을 토닥인 수영이 엄한 얼굴로 진호를 마주 보았다.
“옆에 친구 보니까 받아야겠어요, 말아야겠어요, 진호 어린이?”
대체 자신을 뭐로 보는 건지. 진호가 짜증이 잔뜩 섞인 손놀림으로 수영이 든 응원 봉을 낚아챘다.
“아이고. 우리 진호. 착하다.”
수영이 진호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약을 올렸다. 응원 봉으로 걸리적거리는 손을 확 쳐 내려고 했는데 수영이 한 박자 빨리 손을 떼어 그럴 수도 없었다. 이거 애 앞에서 화낼 수도 없고. 진호는 어쩔 수 없이 수영이 미리 가져온 맥주로 -수영의 야구장 아르바이트 인맥으로 공짜로 얻었다- 속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들고 같이 응원할까?”
관중석 앞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응원단을 보며 수영이 성원에게 바짝 붙었다. 성원은 신난 듯이 치어리더들을 따라 팔을 휘저었다. 수영이 성원을 따라 팔을 흔들자 성원이 까르륵 웃었다.
“진호 씨도 같이해요.”
수영이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진호의 손을 잡아 올렸다. 진호가 인상을 써도 아랑곳하지 않은 수영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오늘만 눈 딱 감고 어울려 줘요.”
가뜩이나 시끄러워서 안 들리는데 귓속말은 왜 하는지. 간지럽게. 진호가 예민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대충 알겠다는 표시로 팔을 내저었다. 응원단을 따라 봉을 설렁설렁 흔드니 수영이 다시 귀에 입술을 댔다.
“고마워요.”
알겠으니까 그만 붙어. 진호가 고개를 대충 까딱거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수영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경기에 빠져들어 환호를 질러 댔다. 애도 아니고 뭐가 그리 즐겁대.
“오오오- 나아가 승리하자-”
경기가 중반을 넘어섰을 때쯤, 진호는 지루해하던 것은 잊고 뜨거운 열기에 휩쓸려 누구보다 봉을 신나게 흔들고 있었다. 맥주에 반쯤 취한 진호가 멀리 날아가는 공을 보며 함성을 질렀다. 우리 팀이 이기고 있으니 기분은 좋네.
“저기, 형아.”
똑같이 환호를 지르고 있던 꼬맹이가 수영의 바지 자락을 잡아끌었다.
“저 배고파요.”
고사리손으로 배를 문지르는 성원에게 허리를 숙이며 수영이 가방에서 도시락 통을 꺼냈다.
“김밥 싸 왔는데. 이거라도 먹을래?”
수영이 꺼낸 삼단 도시락에는 깻잎에 정성스럽게 싸인 김밥이 정갈히 담겨 있었다. 수영이 하나를 꺼내 입에 넣어 주자 우물거리며 잘도 먹는다. 진호가 그 모습을 바라보자 성원이 김밥을 꺼내 진호에게 내밀었다.
“형아도 아, 하세요.”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진호는 아이의 손이 닿도록 무릎을 굽히며 입을 벌렸다. 동그란 물체가 입 속으로 쏙 들어왔다.
“맛있죠?”
“으, 으응.”
짠돌이가 만든 거라 칭찬 따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대에 찬 눈망울을 무시할 수 없어 억지로 동의했다.
“맛있어요? 그러면 이것도 먹어요.”
수영이 김밥을 하나 꺼내 진호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이제 됐는데.”
“맛있다면서요.”
능청맞게 휘어진 눈가를 찌릿 쳐다본 진호가 한숨을 내쉬더니 삐걱삐걱 턱을 열었다. 거절했다간 애한테 거짓말을 한 게 되니 어쩔 수 없었다.
“크게 벌려요. 먹을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여는 둥 마는 둥 애매하게 벌린 턱을 잡은 수영이 진호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눌러 내렸다.
“자, 잠깐.”
당황한 진호가 손목을 잡자 수영이 김밥을 집은 손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본분을 다한 손가락이 입술 새로 빠져나오며 쪽, 하는 마찰음을 일으켰다. 본의 아니게 손가락이 빨린 수영이 아무렇지 않게 손끝에 남은 밥풀을 제 입에 넣었다.
“음. 밥이 잘됐네.”
“지금 뭐예요?”
진호가 눈썹을 번쩍 들어 올리며 추궁했다. 수영이 당연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아깝잖아요.”
아깝다고 그런 짓을 하냐? 수영이 거쳐 간 흔적을 닦아 내듯 입술을 세차게 문지르는 진호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이건 술기운 때문이야. 홧홧한 기운을 떨치려 진호가 귓바퀴를 문질렀다.
“이걸로 목 축여요.”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단단히 말하려던 찰나, 이번엔 수영의 가방에서 물병이 튀어나왔다. 누런색의 투명한 액체가 심상치 않아 눈을 피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제 손에 쥐어져 있었다.
“건강에 좋은 보리차예요. 많이 마셔요.”
어휴. 역시 짠돌이답다. 진호가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보리차를 벌컥 들이켰다.
“만족해요?”
“네.”
오늘 저 짠돌이를 이용해 주기로 한 건 자신인데, 어째 계속 말리는 느낌이다. 진호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쥐었다. 태연한 저 면상에 조만간 죽빵 하나 날린다.
“자. 여러분들이 그토록 기다리셨던 시간입니다! 바로 키스 타임!”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키스 타임?”
“화면에 비치면 옆 사람이랑 키스해야 해요. 잘하면 경품도 주더라고요.”
“그런 게 있다고요?”
진호가 되묻는 순간, 전광판에 커플로 보이는 두 남녀가 비쳤다. ‘귀엽게’라는 아나운서의 주문에 따라 남자가 부끄러워하는 여자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세상에 별의별 이벤트가 다 있네. 진호가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보리차를 마셨다.
“다음은 사랑스럽게-”
다음 주인공은 아이와 함께 놀러 온 부부였다. 아내가 남편의 볼을 휘어잡은 채 입술로 도장을 찍자 여기저기서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 정말 사랑스러운 키스였죠. 마지막은 찐하게 갑니다!”
신난 아나운서가 목청을 높이며 분위기를 띄웠다.
“이쯤 되면 재미있는 그림이 나와 줘야 하거든요.”
다른 아나운서가 말을 덧붙이며 기대감을 높였다. 와아- 전광판에 다음 사람이 비치자 장내가 술렁였다.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진호가 자세히 보려 눈을 찌푸리자 익숙한 노란빛의 물병이 두드러져 보였다. 엥. 설마.
“우리예요!”
수영은 뭐가 신났는지 번쩍 만세를 부르더니 양 볼을 덥석 잡았다. 이 새끼가 진짜 할 셈이야? 애초에 카메라맨은 무슨 이유로 시커먼 남자 둘을 잡은 거야? 당황한 진호가 넋을 잃은 사이, 수영이 잽싸게 머리를 당겨 입술을 맞춰 왔다.
“읏.”
누르는 힘에 상체가 뒤로 젖히며 뜨거운 감촉이 강하게 입술을 짓눌렀다. 닿았던 온기는 금세 사라졌지만, 애써 진호가 지워 놓은 흔적 위에 수영의 입술이 새로운 흔적을 남겼다. 모든 게 멈춘 듯한 순간 속에서 주변의 비명이 귀에 맴돌았다.
“꺄아아-”
“와우. 이렇게 거침없는 남남 커플은 처음 보네요.”
“이 분위기 살려서 바로 오늘의 베스트 커플을 뽑겠습니다. 베스트 커플은 이분들이네요!”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떨어진 수영의 어깨 너머로 대문짝만하게 확대된 자신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두 분. 찐한 우정 간직하시길 바라고요. 참여하신 분들은 모두 경품을 받으러 응원 단상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상품 제가 받아 올게요!”
수영이 벌떡 일어나서 반팔 티셔츠 두 장을 가져오기 전까지 진호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여기요.”
단상에 갔다 온 수영이 진호 앞으로 티셔츠 한 장을 내밀었다.
“형한테는 클 거 같네요.”
형이라는 말보다 지금껏 가시지 않은 생생한 입술의 감촉이 신경 쓰였다. 진호가 제 입술을 쓸어내리며 수영을 추궁했다.
“진짜로 하면 어떡해요?”
“뭘요?”
“몰라서 물어요?”
수영이 다른 한 장을 성원에게 대보더니 곱게 접어 주었다.
“이건 작으니까 너 입어도 되겠다.”
“못 들은 척하지 말고요.”
“그까짓 뽀뽀가 뭔 대수라고.”
“뭐요? 대수?”
진호가 열이 올라 벌떡 일어서며 뒤돌아 있는 수영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수영이 못 들은 척 성원이 입은 옷 위에 새 옷을 걸쳐주며 접힌 주름을 툴툴 털어 폈다.
“덕분에 공짜 옷 구했잖아요. 그럼 됐지.”
“내 의사도 안 물어봤는데?”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요?”
수영이 진호 앞에 마주 선 채 허리를 굽혔다. 수영의 가지런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억울하면 형도 해요. 자.”
수영이 입술을 쭉 내밀며 다가왔다. 진호가 손바닥으로 수영의 이마를 눌러 밀었다.
“저리 치워요.”
“싫으면요?”
수영이 끈질기게 얼굴을 붙여 왔다. 더욱 가까워진 거리에 진호가 고개를 빼며 어깨를 밀었다. 얜 뭐 먹고 힘이 이리 센 거야.
“제가 자른다, 자른다, 하고 안 자르니까 못 자르는 거 같죠?”
“네.”
수영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 새끼 정확히 간파했네. 진호가 뻗치는 열을 가까스로 식히며 수영에게 받은 티셔츠를 집어 던졌다.
“자리에 앉기나 해요.”
“자기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형아들 싸우지 마요…….”
성원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이거 참, 애 앞에서 몹쓸 짓을 한 기분인데. 머쓱해진 진호가 좌석에 도로 앉았다.
“어이구. 성원이 깜짝 놀랐구나. 싸우는 거 아니야. 친해서 그런 거야.”
친하다고? 그 발언에 태클을 백만 개쯤 달고 싶지만 애 앞에서 소란을 피우기 싫어 분을 삭였다. 수영이 부드럽게 성원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수영의 웃는 낯을 보고 안심한 성원이 그제야 씩 웃었다.
* * *
“재미있었어?”
응원하던 팀이 승리를 거두고, 후련한 마음으로 경기장을 나온 수영이 주차장으로 앞장서서 걸어가는 성원에게 물었다.
“네!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서 너무 좋았어요. 헤헤.”
성원이 수영이 입혀 준 커다란 티셔츠 자락을 나부끼며 깡충 뛰었다.
“제가요. 꿈이 야구 선수였거든요?”
“그래?”
“친구들이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대서 포기했어요. 근데 오늘 보니까요. 또 하고 싶어졌어요.”
방긋 웃는 아이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수영이 차 트렁크에서 야구공과 글러브를 꺼냈다.
“손 내밀어 봐.”
성원이 두 손을 쭉 뻗자 수영이 글러브를 왼손에 끼워 주었다. 작은 주먹이 쑥 들어가고, 제대로 넣었는지 확인한 수영이 간격을 넓히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공 던질 테니까 잡아 볼래?”
아스팔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수영이 성원을 향해 가볍게 야구공을 토스했다. 멈칫하던 성원이 반사적으로 왼팔을 올렸다. 날아오던 공이 커다란 글러브에 정확히 꽂혔다.
“잘하네. 이번엔 네가 던져 볼래?”
아이가 공을 꽉 쥐더니 수영에게로 날렸다. 포물선을 그리던 공이 수영의 손에 그대로 잡혔다.
“이제 멀리서 던진다! 이것도 잡아 봐.”
수영이 뒷걸음질 치며 약하게 위로 띄우자, 공이 더 큰 포물선을 그리더니 성원의 손에 안착했다. 차에 기대고 서서 그 모습을 눈에 담던 진호가 홀린 듯이 뒷좌석에 놓아둔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하늘이 어둑해져 어스름한 조명 아래로 두 그림자가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높이 오른 공을 온몸을 던져 받아 내는 어린 소년의 미소가 하얀빛을 받아 반짝였다. 진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해 보니까 어때?”
“좋아요.”
공을 여유롭게 받은 수영이 멀찍이 선 성원에게로 걸어갔다.
“야구 선수가 정말로 되고 싶어?”
“네.”
“그럼 하는 거지. 안 그래?”
어느새 꼬마의 코앞에 다다른 수영이 공을 손에 쥐여 주며 볼을 살짝 꼬집었다.
“주위의 말은 신경 쓰지 마. 마음만 있으면 돈 같은 거 하나도 안 중요해.”
“헤헷.”
볼이 집힌 성원이 헤실거렸다. 덩달아 입가에 호를 그린 수영이 조막만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야구공에 눈길을 주었다.
“글러브랑 공은 너 가져. 이 형 건데, 이 정도는 그냥 줄 거야.”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수영과 시선이 마주친 진호가 움찔 어깨를 떨며 카메라를 내렸다.
“뭘 보고 그렇게 놀라요?”
몰래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놀리듯 묻는 수영을 따라 진호를 바라본 성원이 일렁이는 눈망울로 진호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그래도 돼요?”
흐트러진 낯빛을 숨긴 진호가 눈빛으로 면박을 주자, 수영이 한쪽 눈가를 찡긋거렸다. 아오. 이 새끼 내가 거절 못 할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저러지.
“그래. 너 가져.”
야구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저에겐 짐 덩어리일 뿐이었다. 수영의 뜻대로 따르는 게 영 못마땅했지만 순수한 아이의 희망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나중에 봐요.’
수영에게만 보이도록 단단히 쏘아붙인 진호가 보조석에 탔다. 수영이 뒷문을 열어 주며 성원을 안으로 떠밀었다.
“너도 타. 데려다줄게.”
성원이 뜀박질하며 뒷좌석에 오르자, 수영이 안전띠를 매 주었다.
“성원이는 사는 곳이 어디야?”
“희망 보육원이요!”
성원이 글러브와 야구공을 한 품에 끌어안은 채 주소를 불렀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수영이 내비게이션을 켜서 성원이 알려 준 대로 입력했다. 곧 진호의 차가 부드럽게 도로 위를 주행했다.
희망 보육원은 도심 구석에 위치하고 있었다. 제법 깔끔한 외관에 안도하며 수영이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어, 선생님이다!”
“아이고, 성원아. 여태 어디 있었니? 한참 찾았잖아.”
차에서 번쩍 뛰어내린 성원이 막 정문을 나서고 있던 젊은 여자를 향해 뛰어갔다. 숨이 막힐 듯 성원을 껴안은 보육원 교사가 수영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경찰에 막 신고하려던 참이었는데.”
“아닙니다.”
수영이 따라 고개를 숙이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형아들은 간다. 잘 지내야 해.”
“형아들. 빠빠이.”
“형도 인사해요.”
수영이 진호의 무릎을 툭 쳤다. 진호가 수영의 옆으로 보일 듯 말 듯 하게 허리를 굽혔다. 아이를 대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지만 나름의 노력이었다.
“잘 있어.”
보육원 안으로 사라지는 성원을 지켜보던 수영이 뒤늦게 차창을 올리며 시동을 걸었다. 바깥 풍경이 차단되자 진호가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끼며 수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왜요.”
“형이라고 하지 말랬잖아요.”
“뭐 어때서요. 뽀뽀까지 한 마당에.”
수영이 ‘뽀뽀’라는 단어를 강조하듯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삐죽 내밀었다. 이 새끼, 순진한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눈치가 지지리도 없는 능구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진호가 수영의 장난을 받아 줄 생각이 없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 얘긴 앞으로 금지예요.”
“뭐만 하면 금지래.”
“분명히 얘기하는데, 허락 없이 스킨십하지 마세요. 당연하지만 뽀뽀도 안 되고요. 설령 제가 정신이 나가서 허락한다 해도 하지 마세요.”
진호가 수영의 말을 무시하며 신경질적으로 상체를 돌렸다. 별 탈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지, 잘못했다가 이상하게 소문이 나면 끝이다. 또 모르지. 아버지 귀에 들어가게 될지도. 진호가 진저리를 치며 액운을 털 듯 어깨를 털었다.
근데 진짜 사장님이 알게 되면 어쩌지? 불안해진 진호는 핸드폰을 꺼내 밀린 연락을 살폈다. 마침 누나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괜한 우려겠지. 그때 윙- 하고 울리는 진동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행동 조심해.]
조심해? 무슨 행동을?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쓰인 다섯 글자를 뚫어지게 보던 진호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뭔 일 생겼어요? 표정이 심각한데.”
수영이 허리를 진호 쪽으로 당기며 눈을 맞췄다. 진호가 시선을 피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 새끼가 뭘 알겠냐. 말해 봤자 내 속만 타들어 가지.
“됐어요. 별일 아니니까.”
“별일인 것 같은데요. 걱정되니까 말해 줘요.”
수영이 저답지 않게 진지한 눈빛으로 끈질기게 시선을 좇았다. 짠돌이가 이런 면도 있었나. 꽉 붙잡은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평소 같으면 뿌리쳤을 텐데, 왜인지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별건 아니고.”
“네.”
수영이 어떤 얘기라도 받아들이겠다는 듯 입을 꽉 다물었다. 각오할 만큼 진중한 것도 아닌데. 수영의 태도에 오히려 무안해져 다른 말이 나왔다.
“공이랑 글러브값도 월급에서 깔 거예요.”
“와, 형. 보기보다 치사한 사람이네.”
당했다는 듯 손을 떼어 내는 수영에게 진호가 고소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서 튀어나온 말. 진심으로 싫어하는 수영의 얼굴을 보자 찜찜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누나에게서 온 메시지는 오늘도 비용이 꽤 나왔으니 지출을 줄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진호는 혜린의 연락을 속 편히 넘겼다. 앞으로의 일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채.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 나왔습니다.”
“넵. 감사합니다.”
벤티 사이즈의 테이크아웃 커피를 받아 든 수영이 빨대를 챙겼다. 혹시 모르니까 티슈도 몇 장 가져가야지. 집어 든 휴지를 호주머니에 접어 넣은 수영이 홀가분한 걸음으로 교내 카페를 나섰다.
“오빠. 어디 가?”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정연이 앞을 가로막았다. 놀란 수영이 뒷걸음질 치며 흔들리는 커피 컵을 바로잡았다.
“……어. 수업 끝나서 집에 가려고.”
자연스럽게 곁에 따라붙은 정연이 수영의 손에 들린 커피를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세웠다.
“오빠. 커피도 마셔?”
“내가 마실 건 아니고, 진호 형 주려고 샀어.”
“오빠 돈으로?”
“응.”
정연이 눈을 더욱 크게 키우며 대용량의 커피와 수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봐 왔던 수영은 선물은커녕 제가 마실 커피도 돈이 아까워 안 사는 위인이었다.
“진호 선배한테 빚진 거라도 있어?”
“아니. 없는데.”
이상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수영이 이리 친절할 리 없다. 게다가 제일 큰 사이즈로 사다니. 각별한 사이 같다고 느꼈지만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 남수영이?
“약점이라도 잡힌 거야?”
“약점은 무슨.”
“아니면 복권에 당첨됐다거나.”
“뒤에 수업 없어?”
주차해 둔 차 앞에 도착한 수영이 귀찮은 듯 정연을 비켜 세웠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그래 봤자 잠깐이지만 형 성격상 왜 이렇게 늦었냐며 타박할 가능성이 컸다. 커피가 맛없다고 새로 사 오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다음 수업까지 한참 남았어.”
그런 속을 알 리 없는 정연이 밝게 답하며 꿋꿋이 차 옆에 버티고 섰다.
“그러다 다쳐도 모른다.”
“다치면 오빠가 병원 데려가 주면 되지.”
“선수가 그렇게 말해도 되냐.”
손을 저어 실실 웃고 있는 정연을 뒤로 물린 수영이 차창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진호 씨. 문 열어 봐요.”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형?”
잘 안 들렸나 싶어 이마를 창 가까이 대고 크게 소리쳤다. 진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수영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문이 손쉽게 열렸다.
“왜 문을 열어 놨어요?”
수영이 커피를 전해 주려 머리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였다.
털썩. 수영의 손에 들려 있던 커피 잔이 아스팔트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안에 있던 커피가 얼음과 함께 쏟아져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오빠?!”
정연이 놀라 찌그러진 플라스틱 컵을 잡아 세웠다. 잠시 후 수영이 차 안에서 몸을 서서히 빼냈다.
“없어.”
“응?”
넋이 나간 듯한 수영의 안색을 보며 정연이 되물었다. 마주친 수영의 동공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듯 망연했다.
“진호 형이 사라졌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수영의 오른손에는 낯익은 진호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 * *
익숙한 냄새가 폐부를 파고든다. 어릴 적 엄마가 정성스레 가꾸었던 정원의 풀 냄새. 원 없이 뛰어놀았던 마당. 누나와 책을 꺼내 놓고 졸기만 했던 서재. 모두 그리웠던 광경이었다. 눈앞에 앉은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서진호.”
진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름진 남자의 눈가가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겠나?”
“덩치 큰 남자 셋이 다짜고짜 끌고 온 걸 부른 거라고 한다면 잘 모르겠는데요.”
“말대꾸하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친 거냐.”
쯧쯧. 상만이 혀를 차며 책상 앞으로 상체를 당겼다.
“본가로 들어오너라.”
“싫습니다.”
차에서 수영을 기다리다가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납치되었다. 제 의사 따윈 상관이 없는 거다. 그래 놓고 자기 명령에 따르라고. 진호는 이를 악문 채 나이 든 남자를 향해 눈을 치떴다. 상만은 예상한 듯 제 앞에 마주 보고 앉은 사내를 미동 없는 눈동자에 담았다.
“권유가 아니야. 명령이다.”
지겹도록 겪어 왔다. 내 말은 곧 법이라는 식의 태도. 진호는 굴하지 않고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얘기는 경호원 채용하면서 끝난 것으로 아는데요. 지금도 충분히 절 감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혜린이는 너무 물러.”
가죽 의자에 기대앉은 상만이 느긋하게 진호를 주시했다.
“너도 알지 않나. 내가 많이 봐줬다는 걸.”
“…….”
“고집은 그만 부리도록 해. 젊은 날의 치기로 넘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싫다고.”
두 얼굴이 꼿꼿이 서로를 마주했다. 가만히 진호를 바라보던 상만의 눈동자가 그 너머에 있는 검은 그림자들을 향했다. 그의 고갯짓 한 번에 뒤에 줄지어 서 있던 가드들이 허리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고요한 서재 안에는 단둘만이 남았다. 상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아직도 남자 만나는 거냐?”
“……!”
뜻밖의 질문에 진호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가 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2년 전의 ‘어떤 일’. 상만이 그 주제를 입에 올린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답은 아버지가 제일 잘 아실 텐데요. 굳이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지.”
진호는 허리를 세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딴 유도 신문에 걸리면 안 된다. 단지 꼬투리를 잡으려는 술수일 뿐이다.
“네 입으로 말하는 걸 들어야겠다.”
“말해 봤자 안 믿으실 거잖습니까.”
“솔직하게 말한다면 믿어 주마.”
진호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미 아버지가 정해 놓은 결론이 있을 것이다. 그래 놓고 자기 뜻대로 따라 주길 바라는 거겠지.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게 누구인지는 사장님과 관계없습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탁상 위를 느리게 두드린 상만이 조용히 손을 내렸다.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낸 그가 작은 사진 하나를 진호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건 뭐지?”
상만의 손에 들린 것은 야구장 전광판에 비친 자신과 수영의 모습이었다. 수영이 입술을 부딪친 그 순간이 절묘하게 담겨 있었다. 진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야구장 남남 커플’이란 턱도 없는 제목으로 SNS에 떠돌고 있더구나. 기사화 안 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임 실장이 지우느라 애 많이 썼어.”
“…….”
“이놈과 무슨 사이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눈가에 까만 안광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이놈이!”
순간 이성을 잃은 상만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서슬 시퍼런 눈매가 매섭게 진호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그 짓거리 그만두게 하려고 가드를 붙였더니 어디 할 짓이 없어서 그놈이랑 붙어먹어?”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으나 오해입니다.”
“오해라고? 떡하니 증거가 있는데.”
진호가 부들부들 떨리는 제 손끝을 얽어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솔직히 많이 억울하다. 짠돌이와는 그저 갑을 관계일 뿐이다. 어쩌다 뽀뽀한 것도 그 새끼가 다짜고짜 달려들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전부 짠돌이 탓인데.
“그건 수영 씨가 경품 얻으려고…….”
“변명은 됐다.”
상만은 의자에 등을 파묻으며 화를 추스르는 듯했다. 이윽고 안정을 되찾은 상만이 진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늘부로 경호원과의 계약은 해지하고, 본가에 들어오도록 해라. 짐은 내일 가져오도록 지시해 뒀다.”
“아버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약이 해지되면 짠돌이를 만날 이유가 없어진다.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소중히 지켜 온 자취 라이프가 사라진다는 뜻이고, 또.
“안 됩니다.”
짠돌이가 직업을 잃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돈 없이는 못 사는 놈이라 하루 만에 직장을 잃으면 타격이 엄청날 텐데. 그 녀석이라면 생활비라도 내놓으라며 펑펑 울지도 모르지. 그토록 고대하던 일인데도 수영의 실망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니 입 안이 썼다. 그동안 정이라도 든 건가.
“정말 오해입니다. 물어보면 수영 씨도 아니라고 할 거예요.”
“됐다니까.”
강하게 쥔 주먹 안으로 땀이 찼다. 어떻게 말해도 아버지는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빌어 보기라도 할 수밖에. 진호는 최대한 누그러진 말투로 간청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맹세할 테니까 봐주세요.”
“결정은 끝났다. 지내던 방도 정리해 뒀으니 오늘부터 거기서 지내거라.”
상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여전히 한심하단 눈길로 쳐다보는 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옛날 언젠가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털어놓았을 때와 똑같았다.
“아버지는 바뀐 게 없으시네요. 너무하십니다. 제 사생활은 없는 겁니까?”
“싫으면 선을 보든지.”
“선이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경호를 붙여 감시할 줄은 알아도 여자 친구를 만들어 준다거나 선을 보라고 하지는 않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맞선 얘기를 꺼낼 줄은.
“너도 슬슬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냐. 여자도 여럿 만나 보고.”
“전 여자를 좋아할 수 없는데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진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상만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급격히 일렁였다.
“그건 네 착각이다. 네가 좋아할 만한 여자를 못 만나서 그런 거야.”
“싫습니다. 선 같은 건 안 볼 겁니다.”
“오늘부터 본가에서 지내겠단 뜻으로 받아들이마.”
도로 제자리걸음이다. 이래서야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진호는 굳게 다짐한 듯 탁상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굳이 저를 집 안에 들이셔야겠다면 비서 아줌마를 내쫓으세요. 그 사람과 같이 지내기 싫습니다.”
“아줌마라니. 네 엄마다.”
“우리 엄마는 10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아줌마랑 뒹구느라 정신없을 때 말이죠.”
“이놈이 못 하는 말이 없어!”
탁상을 내리치며 상만이 우뚝 섰다. 그에 맞서 진호도 벌떡 일어나 상만을 노려보았다.
“왜요. 틀린 말 아니잖아요?”
“이 자식이?!”
노기에 북받친 상만이 탁상에 놓인 작은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진호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사실은 심히 쫄렸다– 붉으락푸르락 변화하는 아버지의 안색을 쳐다봤다.
“그 일이 저한테 얼마나 트라우마였는지 아세요? 집안일에 안 엮이고 얌전히 내 삶 살겠다는데, 왜 자꾸 끌어들이세요? 아버지는 제게 뭐라 할 자격 없는 거 아닌가요?”
“자격이 없어? 네놈이 그게 할 소리냐?!”
“뭐요!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너, 너……!”
진호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상만이 골이 당기는지 목뒤를 잡았다. 이마까지 빨개진 상만은 진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넌 내가 보는 앞에서 사내새끼랑 뒹굴었던 건 기억 못 하는 거냐!”
* * *
2년 전 그날은 매우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빴던 기말고사가 끝나고 간만에 신현우와 단둘이 만날 수 있었던 날이었다. 어디서 만나는 게 좋을지 이런저런 후보를 고민하고 있던 찰나,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 지금 집이지? 집에 누구 있어?
“아니. 왜?”
누나와 아버지는 회사에 갔고, 아줌마는 모임, 가정부 이모는 비번이었다. 즉, 본가는 전부 제 차지라는 의미였다. 그때는 자취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집 안에 저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거대한 해방감을 느끼며 침대에서 뒹굴던 중이었다.
-진호야. 내가 여기저기 생각해 봤는데.
형은 이름을 잘 불러 주지 않았지만, 가끔 다정하게 부를 때가 있었다. 그럴 땐 그 순간이 그렇게 좋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보통 같았으면 모텔이나 가자고 할 신현우가 여기저기 생각해 봤다니. 며칠 전에 투나잇에서 웬 남자에게 작업을 걸다가 걸린 뒤로 제 기분을 신경 쓰는 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이런 거로 쉽게 좋아하면 안 되는데.
-오늘은 너희 집에서 보자. 한 번도 가 본 적 없잖아.
“우리 집? 안 될 건 없는데…….”
옛날이지만 어머니가 계실 때는 친구도 몇 명 데려왔었으므로 문제는 없었다. 아버지랑 비서 아줌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가 알 바는 아니었다.
“형이랑 밖에서 데이트하고 싶었다고.”
-난 너희 집 궁금한데.
“집에서 할 게 뭐 있다고?”
-할 거 많지. 너랑 둘이서.
“뭐래.”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삐져나오는 미소는 어쩔 수 없었다. 몇 번을 당해도 달콤한 말 한마디에 금세 헤벌쭉해지는걸.
-진호야. 안 될까?
“…….”
-얼른 대답해. 보고 싶다.
“알았어.”
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이겨. 알면서도 신현우 앞에선 호구가 되니 큰일이다. 제 답변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다들 늦게 돌아올 테니까 잠깐은 괜찮겠지. 진호가 핸드폰을 협탁에 올려 두며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만나기는 해도 오랜만에 형을 보는 거니까 꾸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소를 알려 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이 초인종을 눌렀다. 경비 아저씨에겐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 뒤, 형을 집 안에 들였다. 거실 소파에 늘어지게 앉으며 따라 앉으라는 의미로 옆을 툭 치는데, 형이 외투도 벗지 않고 서서 집 안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별거 없네.”
“응?”
“야. 집 구경 좀 해 보자.”
“우리 집? 뭐 볼 거 없을 텐데.”
“괜찮으니까 네가 안내해 봐.”
얼떨떨하게 소파에 드러누워서 형을 쳐다보는데, 형이 어깨를 잡아 끌어 올렸다.
“으응…….”
어차피 거실에 있어 봤자 할 만한 게 TV 시청밖에 없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눈앞에 보이는 주방 쪽으로 형을 데려갔다.
“보다시피 1층엔 뭐 없어. 거실이랑 손님 받는 응접실, 주방. 이게 끝이야.”
“2층엔?”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한 테이블을 쓱 만져 보며 현우가 주방 끝에 있는 나무 층계를 힐끔거렸다.
“2층에 가 볼래?”
묻기도 전에 형은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말을 정말 안 들어요. 진호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뒤를 따랐다.
“침대 크네.”
2층에 있는 제 방과 누나 방을 지나쳐 3층의 안방에 도착한 형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
당황해서 다리를 치니 꿈쩍도 하지 않고 아예 베개를 들어 머리 뒤에 놓았다.
“왜. 누워 있으면 안 돼? 나도 사장 된 기분 느껴 보자.”
“아버지가 알면 큰일 나. 내 방으로 가자.”
“싫은데?”
형은 일어날 의지가 아예 없어 보였다. 안 되겠다 싶어 팔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는데, 역으로 뒷덜미를 붙잡혔다.
“너도 누워.”
“아!”
힘이 풀린 사이에, 끌어당겨져 침대에 눕혀졌다. 퍼뜩 손을 뻗어 매트리스를 짚자 어깨를 누르며 제 위에 올라탔다.
“이거 놔.”
낑낑대며 다리를 밀어 보려 했지만 형이 무릎 사이에 제 하체를 빈틈없이 끼운 탓에 제대로 힘도 못 써 보고 밑에 깔린 처지가 되었다.
“장난은 그만하고…….”
“이게 장난으로 보여?”
형이 살벌해진 눈을 코앞에 바짝 붙였다. 잔잔해 보였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독기를 품고 있었다. 이내 셔츠 안으로 차가운 손이 들어왔다.
“형!”
번쩍 눈을 뜨며 다급히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형은 가소롭다는 듯 손을 떼어 내 머리 위로 올려 잡았다.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려도 여유로운 손짓으로 바지 버클을 손쉽게 풀어 헤쳤다.
“미쳤어? 하지 마!”
다리를 차며 저항해 봤지만 손은 이미 속옷 안을 휘젓고 있었다. 반쯤 선 성기를 쥔 채 문지른 현우는 진호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지와 함께 팬티를 한 손으로 끌어 내렸다.
“잠시만……!”
“입 다물고 뒤돌아.”
“잠깐, 형. 나 오늘 준비 안 됐…….”
우악스럽게 어깨를 휘어잡는 손길과 동시에 가슴팍이 매트리스에 닿았다. 깜짝 놀라 엎드린 채 고개를 뒤로 돌리자, 신현우가 뒷머리를 잡아 아래로 누르며 엉덩이 아래로 걸쳐진 바지를 잡아 내렸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하반신으로 차가운 공기가 싸하게 닿았다.
“다리 벌려.”
“형!”
질겁해서 온 힘을 다해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엎드려 있어 제한된 시야로 형을 제압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제발 놔줘. 응?”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다. 아버지 침실에서, 하물며 씻지도 않았는데.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나중에 방이라도 잡아서…….”
“한 번만 떡치고 말래, 아니면 여기서 하루 종일 떡칠래?”
살짝 들렸던 어깨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눈코입이 이불에 파묻힌 채 귓가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재깍 결정해.”
이러려고 집에 온다고 한 거였나. 역시 신현우는 검은 속내가 있었던 거다. 맨날 끌려다니면서 그걸 잊어버리다니. 진호가 가볍게 현우를 집에 들인 과거를 후회하며 천천히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허구한 날 후회하면 뭐 해. 돌아서면 또 신현우 뜻대로 하고 있는데.
“잘하면 넣지는 않을게.”
치켜든 가랑이 사이로 형의 것이 밀려들어 왔다. 허벅지에 닿는 뜨거운 감촉에 다리가 떨렸다.
“알아서 흔들어 봐.”
“윽.”
다리 사이를 조인 채 허리를 움직였다. 아래로 흐물거리는 성기가 형 거에 비벼지며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주인 심정도 모르는지 제 주니어는 금세 말간 액체를 흘려 댔다.
“잘 좀 해 봐. 하나도 안 꼴리잖아.”
“하고 있잖아……. 읏!”
목덜미가 잡혀 이불속으로 처박혔다. 얼굴이 매트에 눌린 채로 형이 뒤에서 세차게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씨발.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으윽!”
형이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힘이 풀린 허벅지 사이로 경직된 페니스가 들락날락했다. 메마른 피부에 거친 표면이 닿아 따끔거렸다. 그 사이를 파고드는 아찔한 쾌감에 허리가 곧추세워졌다.
“이러고 있는데 너희 애비 들어오면 재밌겠다. 그치?”
“그런 말, 하지 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불안한 시선이 닫혀 있는 방문으로 향했다. 문이라도 잠가 둘걸.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너 이런 거 좋아했어? 물이 줄줄 흐르네.”
“그,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씨발. 존나 좋아 죽는데.”
“그게 아니, 흐읏.”
점차 거세지는 허리 짓에 엉덩이가 철썩철썩 부딪쳤다. 덩달아 가빠지는 호흡에 진호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뜨거워진 이마에서 땀이 흘러 이불을 적셨다. 억지로 하는 건 싫은데, 바람과는 다르게 생리적인 흥분에 열이 올랐다.
“솔직히 말해. 좋지?”
“아, 아니…….”
“아니라고?”
현우가 한 손으로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고꾸라져 있던 진호의 턱이 뒤로 휙 젖혔다. 후들거려 자꾸만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지탱하며 가까스로 신음을 삼켰다.
“혀엉, 제발…… 지금이라도…….”
“좋다고 해 봐. 그럼 놔줄게.”
“하윽. 형……!”
뒤로 꺾인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애무 없이 무작정 박아 대는 성기에 살갗이 까질 듯 쓰라렸다. 허벅지로 파고드는 고통 속에서, 희열에 잠겨 빨딱 선 제 페니스가 야속했다. 그만하고 싶은데도 그럴 수가 없다. 현우 형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간신히 벌린 입 사이로 거친 숨이 뿜어 나왔다.
“조……, 하아…….”
“뭐라고?”
“흐응, 좋아……!”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양 무릎이 후들거려 두 손으로 이불을 붙잡았다. 극점에 치달은 아래가 움찔거렸다.
“형, 이제, 놔……. 하윽.”
눈앞이 흐려지며 페니스가 정액을 뿜어내려는 듯 수축하는 감각이 몰려들었다. 그때였다.
“계약 건은 임 실장 통해서 처리하고, 지분 문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커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사정감을 참지 못하고 이불 위에 백탁액을 뿜어내는 순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아버지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아……!”
순간 몽둥이에라도 맞은 듯한 충격이 두개골을 강타했다. 새까만 암막이 머릿속을 뒤덮는 듯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몽롱한 상태에서도 굳어 있던 아버지의 모습만은 생생하다. 핏기 하나 없이 질린 낯빛과 혐오가 가득 담긴 눈동자. 그건 분노도 아닌 공포였다.
“서진호, 너…….”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현실이다 못해 꿈인 것 같았다. 온몸의 기관이 작동을 멈춘 듯했다.
“아…….”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버지의 백안이 점점 붉어지며 떨리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하나하나 눈에 박혔다. 아버지의 팔이 올라가더니 핸드폰이 날아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호흡이 멈췄다. 그러곤 온통 암흑이었다.
그 뒤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이틀 만에 눈을 뜨고 나니 신현우는 번호도 바꾼 채 연락 두절, 자신은 잠금장치가 설치된 방에 감금.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도록 차단된 방 안에서 한 달을 갇혀 살다, 겨우 풀려나왔을 때는 이미 형과 관련된 모든 흔적이 사라진 후였다.
한마디 언질도 없이 잠적한 신현우, 저를 없는 사람 취급 하는 아버지, 마주칠 때마다 경멸의 눈길을 숨기지 않는 아줌마. 모두 견딜 수 없어 누나에게 부탁해 본가에서 나와 살 곳을 구했다. 극구 반대할 것 같던 아버지는 경호원을 붙이는 조건으로 독립을 허락했다. 그렇게 2년이 훌쩍 지났다.
“침대도 바꾸고 집도 뜯어고쳤는데, 아직도 방에 들어가면 그 장면이 생생해. 이놈아!”
상만이 들고 있던 스탠드를 쿵, 하고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의 일이 떠오른 진호가 지지 않고 맞섰다.
“그건 제가 원해서 했던 게……. 아무튼 알아서 나가 살겠다는데 왜 인제 와서 돌아오라고 하는 거냐고요?”
“네가 또 사내새끼랑 놀아나는 게 보이잖아!”
“오해라니까요?!”
“잔말 말고 선택해. 선볼 거야? 집에 들어올 거야?”
상만이 탁상을 돌아 서 있는 진호에게 성큼 다가왔다. 진호가 물러서지 않으려 발에 힘을 주었다.
“둘 다 싫습니다. 저는 원래 살던 대로 쥐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아버지도 저를 없는 자식이라 생각하시고 내버려 두세요.”
“계속 그따위로 살겠다는 거냐? 그건 정상이 아니야. 정신 나간 놈들이나 하는 더럽고 천박한 짓이란 말이다!”
말이 안 통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뜻하진 않았지만 정사 장면을 보인 것도 아버지에겐 큰 충격이라 여겨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하지만 없었던 일을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안 되는 걸 되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넌 우리 집 유일한 아들이야. 곧 회사를 이끌어야 할 몸이다. 정신 차리고 여자를 만나든, 후계 수업을 받든 해라.”
진호는 머릿속으로 바깥 상황을 그려 보았다. 아까 나간 가드가 대여섯. 적어도 이 방 밖에는 서너 명의 가드가 버티고 서 있을 것이다.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긴 힘들겠고, 무언가 대안이 필요한데. 창밖 아래를 바라보던 진호의 눈에 마당이 들어왔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맞아. 그거다.
“알겠습니다.”
“뭐?”
순순히 물러나자 되레 놀란 상만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진호는 확신이 가득한 몸짓으로 고개를 냅다 숙였다.
“따끔한 질책 잘 알아들었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집에 들어오겠습니다.”
“너 이 자식. 진심이야?”
상만이 믿을 수 없는 듯 진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취하던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좀 챙겨 오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진호가 최대한 불쌍한 감정을 그러모아 눈 안에 담았다. 상만이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진호를 응시했다.
“……다녀오너라. 대신 가드도 같이 데려가거라.”
“네.”
누가 저에게 따라붙을 거라고 예상했기에 당당히 목청을 높였다. 상만이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자, 서재 내부에 있는 초인종이 울렸다. 상만이 탁상 위의 버튼을 누르자 문이 저절로 열리며 경호실장이 들어왔다.
“임 실장. 잠시 자기 집에 다녀오겠다는데 애들 몇 명 데리고 동행해. 중간에 어디 새지 않게 잘 보고.”
“예.”
상만을 향해 허리를 굽힌 경호실장이 진호에게 다가서며 짧은 경례를 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가드 여섯을 대동한 채 저택을 빠져나와 정원을 가로질렀다. 아버지도 쉬이 보내 줄 생각은 아닌가 보다. 저보다 한두 뼘은 큰 장정들이 사방을 포위하며 대문으로 안내했다. 이거 쉽진 않겠는걸. 빠져나올 타이밍을 노리며 진호가 주위를 살폈다.
“저기.”
정문 앞까지 거의 다다랐을 때, 진호가 경호원들을 멈춰 세웠다.
“너무 급해서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을까요?”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다리를 꼬며 엉거주춤한 상태로 임 실장을 바라보았다. 실장이 미심쩍은 듯 진호를 살폈다. 다급해진 진호가 팔을 붙잡으며 주저앉았다.
“제발요. 네? 못 참겠어요.”
최대한 애처로운 눈빛으로 실장을 쳐다보니 그도 어쩔 수 없었는지 사위를 둘러싼 경호원들에게 손을 올렸다.
“너희 셋은 차 빼고 있어. 나랑 나머지 둘은 저택으로 안내하지.”
“예.”
지시를 받은 가드 셋이 정문 앞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앗싸. 통했다. 순간 기쁨의 미소를 지을 뻔한 진호가 올라오는 입꼬리를 눌러 내렸다.
“도련님은 저희와 함께 가시죠.”
기회는 이번뿐이다.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인 진호가 왔던 길을 되돌아 저택으로 향했다. 가드가 셋으로 줄어든 탓에 앞이 비었다. 진호는 서서히 발걸음의 속도를 줄이며 틈을 엿보았다. 앞서서 현관에 도착한 실장이 도어 록을 열었다. 이때다, 싶었던 진호가 옆에 선 두 사람 뒤로 빠져나가더니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세 명이 즉시 추격해 왔다. 시간을 끌면 곧장 잡힌다. 그 전에 뒷문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뒷문엔 경비가 허술하고 높은 산이 있어 따라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진호는 어릴 적 누나와 몰래 뒷문으로 나가 놀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힘껏 발을 굴렀다.
“헉, 헉.”
현관과 거리가 가까운 덕에 금세 뒷문에 도착했다. 벨을 눌러 철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정문과 달리 뒷문은 안에서 바로 열 수 있는 구조였다. 밖이 잠겨 있지 않다면.
“제발 열려라.”
문고리를 잡고 세게 돌렸다. 하지만 돌아온 건 철컥거리며 부딪치는 쇳소리뿐이었다.
“아, 씨. 뭐야.”
“도련님! 거기 서세요!”
가드들이 코앞까지 따라잡았다. 여기까지 고작 열 걸음. 까딱하면 영락없이 붙잡힐 신세였다. 진호는 다급하게 문을 밀며 문고리가 부서져라 흔들어 댔다. 제발. 제발.
“읏!”
가드 하나가 진호의 팔을 붙잡을 무렵, 철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진호는 환호성을 지르며 가파른 산길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도련님!”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잠시, 발 빠른 가드들이 간격을 좁히며 뒤따랐다. 이러다 잡히게 생겼는데. 힘을 내어 달려 보려 했지만 많이 소진된 체력 탓에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짠돌이 말대로 평소에 운동해 놓는 건데.
“아.”
설상가상으로 돌덩이에 걸려 엎어졌다. 헐레벌떡 무릎을 세우자 어느새 가드 하나가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얼른 돌아 가시, 으윽!”
급한 대로 손에 잡히는 흙을 얼굴에 집어 던졌다. 재빠르게 일어나 산을 오르는데, 발을 붙잡혔다. 뒤를 돌아보니 흙을 맞은 가드가 빨개진 눈으로 간신히 구두를 잡고 있었다. 그 뒤를 다른 두 명이 바짝 붙어 왔다.
“아. 저리 가요!”
진호는 다급히 발을 털어 내며 소리를 질렀지만 단단히 붙잡힌 탓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에라. 안 되겠다. 진호는 어쩔 수 없이 붙잡히지 않은 쪽의 신발을 벗어 가드들을 향해 집어 던졌다.
“따라오지 마세요!”
구두짝을 정통으로 맞은 가드가 고꾸라진 사이 진호는 마지막 젖 먹던 힘을 짜내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번에 잡히면 진짜 끝이다. 이 생각뿐이었다.
“윽, 도, 도련님!”
하지만 오랫동안 훈련받은 이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끈질기게 뒤쫓아 오는 가드들에 지쳐 쓰러질 때쯤, 진호의 눈에 커다란 바위가 들어왔다. 저기다. 진호는 공격당한 가드들이 미적거리는 틈을 타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헉, 헉, 허억.”
“분명 여기로 도망쳤는데.”
흙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행여나 들킬세라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두 손으로 막았다. 조그맣게 난 바위틈으로 우왕좌왕하는 발이 보였다.
“너희 둘은 이쪽으로 가 봐. 난 저 위로 올라가 볼게.”
“예.”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조용해졌다. 진호는 침도 제대로 못 삼키고 가만히 웅크려 있었다. 안심하고 나갔다가 붙잡힐 것 같아서.
얼마가 지났을까. 한참을 엎드려 있어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진호가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둑해진 하늘에 황량한 바람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경계를 푼 진호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기어 나왔다.
“정말 갔네.”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지만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왔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산을 내리려던 진호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근데 어디로 가야 하지. 현재 주소지인 아파트에는 경호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본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러나저러나 아버지에게 붙잡히긴 마찬가지. 진호는 본능적으로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지갑과 핸드폰,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다. 도망치는 와중에 어디선가 흘린 것 같았다.
발이 따가워서 흙으로 더러워진 양말을 벗었다. 정신없이 뛰어오느라 발바닥이 까진 것도 몰랐다. 흥건한 피와 상처로 새빨간 얼룩이 진 발을 멍하니 쳐다보던 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짠돌이 새끼는 내가 사라진 걸 지금쯤이면 알아챘을 텐데 왜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 옆에 있겠다고 했으면서 가장 필요한 순간에 없다.
“이럴 줄 알았어.”
혹시 실종된 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집에 있는 거 아니야? 미간에 가는 실금을 그리던 진호가 볼 것도 없다는 듯 체념했다. 그 새끼라면 그러고도 남겠다. 믿었던 내가 등신이지. 별 타격도 없는 듯 진호가 벗은 양말을 내팽개치고는 돌멩이가 적은 산 위쪽으로 발을 옮겼다. 하여튼 짠돌이 놈은 내 눈에 띄면 그 즉시 해고다.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나온 마당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아윽. 아파.”
벗겨진 상처가 흙길에 쓸려 따끔거렸다. 걸음을 옮길수록 짙어지는 쓰라림에 눈물이 찔끔 났다. 진호는 아픔을 견디고자 나무 기둥을 붙잡았다.
“하…….”
그래도. 그래도 그 미운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건 왤까. 진호는 가슴 한구석에 스며드는 씁쓸함을 지워 내며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 * *
“뭐래요? 안에 있대요?”
수영이 대문에서 나오는 혜린을 향해 뛰쳐나갔다.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 정장의 사소한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하게 치장한 혜린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아.”
의미를 알아챈 수영이 땅이 내려앉을 듯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양손을 허리에 짚었다.
“아버지가 데려온 건 맞는데 한두 시간 전에 뛰쳐나갔대요. 뒷산으로 도망쳤다는데 어디로 갔는진 모르겠다네요.”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수영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습관적으로 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전화는 대체 언제 받을 수 있는 건지.”
수영이 애꿎은 수화기에 성질을 내며 통화를 끊었다. 수십 번을 걸어도 한결같은 여자의 음성에 역정이 났다. 정연이 옆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수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빠…….”
수영은 진호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동시에 혜린에게 연락했다. 혜린은 짐작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사과부터 했다. 미리 피하라고 전했어야 했는데 늦었다며,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끌려간 것 같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혜린에게 주소를 물어 본가로 찾아왔다. 하지만 보아하니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경찰에 전화해야겠습니다.”
수영이 다이얼 화면을 열자, 혜린이 단호하게 수영의 팔을 잡아 막았다. 차가운 인상이 굳어 사나운 기운을 풍겼다.
“안 돼요. 경찰이 알게 되면.”
“이 상황에서도 안 된다고 하실 거예요? 진호 씨가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저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저희 집안 사정부터 해서 진호가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새어 나갈 수도 있어요. 그러면 기업 이미지뿐만 아니라 진호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줄 거예요.”
수영이 112를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혜린의 말이 옳다. 형은 일반인과 다르게 인지도가 있는 회사의 후계자니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부자간에 불화의 조짐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형에게 좋지 않을 결과를 불러올 것은 자명했다. 최대한 제 손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죠. 제가 형을 찾을 테니 얘 좀 집에 데려다주세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수영이 따라서 일어난 정연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아냐. 나도 함께 선배를 찾을게.”
정연이 손사래를 치며 수영에게 되돌아왔으나, 곧 다시 혜린의 앞으로 밀려났다.
“안 돼. 오후 수업도 빠졌잖아. 밤이 되면 위험하니까 집에 돌아가.”
“그래도.”
“얼른.”
수영이 엄한 눈초리로 정연을 재촉했다. 눈치를 살피던 정연은 억센 기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혜린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정연을 보내고 뒷산을 향해 돌아서려는 수영을 혜린이 멈춰 세웠다.
“제 쪽의 경호 직원을 부를게요. 같이 찾아요. 저는 당장 회사로 가 봐야 해서.”
“오는 데 얼마 걸리는데요?”
“한 20분?”
20분이면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1분, 1초라도 지체해선 안 되었다.
“일단 저 혼자 찾고 있겠습니다. 직원들 도착하면 알려 주세요.”
수영이 허리를 숙이며 뒷산 쪽으로 뛰어갔다.
“수영 씨!”
수영이 뒤돌자 혜린이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손을 모았다. 수영과 있는 내내 세워져 있던 눈매가 처음으로 꺾여 있었다.
“같이 찾아 주지 못해 미안해요! 직원들 곧 올 테니까 핸드폰 잘 챙기고 있어요!”
“네!”
멀찍이 떨어진 수영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O 사인을 만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혜린도 심히 염려하고 있을 터였다. 막중한 직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겠지.
수영이 이를 악물며 산 입구로 달려갔다. 한두 시간 전이면 멀리 못 갔을 거다. 맨몸으로 나갔으니 주변을 뒤지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 힘을 내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가슴 한쪽 구석이 싸늘했다. 혹시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아닐까. 산짐승을 만나 공격당하는 건 아닐까. 추위에 벌벌 떨고 있지나 않을까. 형도 성인 남성이라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설마 하는 의심이 자꾸만 과대한 상상을 키웠다.
만약 형이 이대로 실종된다면. 제 눈앞에서 영영 사라진다면. 재빠르게 둔덕을 오르던 수영의 발이 느려졌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을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조건 오늘 안에 찾는다.”
그런 일은 결단코 일어나선 안 된다. 애써 불안을 가라앉힌 수영이 멈췄던 발을 세차게 뻗었다. 기필코 찾을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반드시.
“진호 씨! 어디 있어요!”
산 중턱까지 오른 수영이 핸드폰 플래시를 비추며 애타게 진호를 불렀다. 혜린이 알려 준 직원의 번호로 연락해 산 곳곳을 뒤져 달라고 요청했지만 스물에 달하는 숫자로도 부족했나 보다. 여태 진호 형은커녕 사람 비슷한 걸 찾았다는 전달도 받지 못했다.
“어디로 간 거야.”
수영이 나무 사이를 샅샅이 뒤지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산속에서 사람을 찾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비까지 내리는 통에 상황이 악화되었다. 수영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을 여념도 없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수풀을 헤쳤다.
흔적이라도 찾을까 싶어 흙길을 뒤적이던 수영의 눈에 낯익은 지갑이 보였다.
“형 거다!”
안의 카드며 주민 등록증을 뒤져 보니 틀림없이 진호의 것이 맞았다.
“형! 진호 형? 여기 있어요?”
플래시로 사위를 비춰 보니 앞에 커다란 바위가 눈에 띄었다. 곧장 뛰어간 수영은 그 아래의 커다란 틈새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형?!”
역시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수영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하고 애꿎은 흙바닥을 움켜쥐었다. 비도 오는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위험하게.
“돌아 버리겠네. 진짜.”
갈피를 잃고 아래로 떨어진 수영의 시선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 바닥의 붉은 자국이 보였다. 수영은 그것을 손으로 슬쩍 만져 보았다. 냄새를 맡아 보니 희미한 피비린내가 났다. 혹시나 형이 흘린 것일지도. 벌떡 허리를 젖힌 수영이 흙바닥을 뒤적였다.
“이거다.”
비에 일부가 씻겨 나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핏자국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얼마나 다쳤으면 피가 이렇게. 수영의 머릿속에 다리를 절뚝거리며 붉은 혈액을 흘리고 있는 진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까지 맞았을 텐데. 눈앞이 아찔해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죄어 오는 듯 초조했다.
“남수영. 정신 차리자.”
발까지 다친 형은 이 산속에서 얼마나 괴로울까.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깝다. 재빨리 어두운 기운을 거둬 낸 수영은 서둘러 핏자국을 따라갔다. 지워지기 전에 찾아야 한다. 수영은 급한 마음에 바닥을 기며 다른 핏자국을 찾았다. 온몸을 적신 빗방울이 젖은 옷자락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손발이 흙투성이가 되고 오한에 손이 떨렸지만 상관없었다. 형을 찾을 단서가 있었으니까.
“진호 형!”
정상을 향해 간간이 뻗어 있던 핏자국은 무너져 가는 판잣집 앞에서 끊어졌다. 수영은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달려가 좁은 나무 문을 벌컥 열었다.
“형! 여기 있어요? 들리면 말해요!”
기대와 달리 안은 잠잠했다. 수영은 핸드폰으로 안을 비추며 발을 들였다. 텅 빈 나무 바닥이 끼익, 거리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그 끝을 따라가니 동그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진호 형?!”
뛰어가 얼굴을 확인하니 형이 맞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기에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자 미동도 없다. 덜컥 내려앉는 가슴에 수영이 맥을 짚었다. 다행히 심장은 제대로 뛰고 있는데.
“형! 일어나 봐요! 형!”
두 볼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수영은 계속 어깨를 치며 귀를 진호의 코앞에 가져다 댔다. 호흡도 제대로 내쉬고 있다.
“진호 형?!”
“뭐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호가 힘없이 수영을 밀쳤다.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게 저놈 입술이라니. 끔찍하다.
“형!”
수영은 심하게 구겨진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진호를 와락 껴안았다.
“이거 놔요…….”
워낙 세게 껴안은 탓에 숨이 막힌 진호가 수영의 등을 통통 쳤다.
“다친 데가 어디예요?”
진호에게서 몸을 떼어 낸 수영이 구석구석을 살피며 물었다. 애먼 곳을 짚고 있는 수영을 향해 진호가 친절히 제 발을 가리켰다.
“어디 봐요.”
수영이 발을 뒤집어 다친 곳을 찾았다. 어딜 볼 것도 없이 발바닥 전체에 피딱지가 져서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형…….”
“형?”
“진호 씨…….”
수영이 호칭을 바꾸며 상처투성이인 발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흙바닥에 돌투성이라 많이 아팠을 텐데.
“신발은요?”
“도망치는 중에 버렸어요.”
“옷도 다 젖었네.”
물기가 가득한 셔츠 깃을 매만지던 수영이 빤히 진호를 보더니 별안간 껴안았다. 진호가 캑캑대며 수영의 어깨를 잡았다.
“이거 놔요.”
“미안해요. 경호원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이 꼴로 만들고…….”
“이거부터 좀.”
“잘 챙기지 못한 내 잘못이에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세게 끌어안는다. 고집 세던 짠돌이가 웬일로 사과를 하고, 어지간히 미안한가 보네. 진호는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을 풀며 짙은 숨을 내쉬었다. 미운 놈이라도 이렇게 보니 반갑긴 한가 보다. 온종일 굳어 있던 입가가 올라가는 걸 보니.
“캑…….”
그렇지만 숨이 막혀서 못 참겠다. 안도감에 젖어 있던 것도 잠시, 강한 압박에 진호가 쓴소리를 뱉으려고 했다.
“저, 캑, 저기.”
“업혀요.”
간신히 말을 잇던 찰나, 수영이 손을 풀더니 뒤돌았다.
“네?”
“걸어서 내려갈 거 아니면 업히라고요.”
축축이 젖은 등을 보던 진호가 묵묵히 몸을 내주었다. 기력이 다해 걷는 것도 무리다. 짠돌이 등에 업히는 것도 싫지만 이 이상 힘쓰는 건 더 싫었다. 진호가 가슴을 기대자 수영이 두 다리를 잡아 지탱하며 일어섰다.
“이제 돌아가요.”
밖으로 나오자 비는 멎어 있었다. 왔던 길을 따라 내려가던 중에 진호가 넌지시 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죠?”
“우리가 살던 아파트요? 왜요. 싫어요?”
“거기 가면 아버지한테 붙잡혀요. 호텔이라도 가야 하나 싶은데 지갑은 없고.”
“지갑 찾았어요.”
수영이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등 뒤로 젖은 지갑과 함께 미리 챙겨 둔 핸드폰을 넘겼다.
“이거 다 어떻게 찾았어요?”
“지갑은 바닥 뒤지다가 발견했고, 핸드폰은 차에 두고 갔던데요.”
다행이다. 양손에 각각 받아 든 진호가 지갑 안을 뒤적였다. 많이 젖진 않았으니 지폐는 쓸 만하겠다. 근데 이 돈으로는 하룻밤밖에 지내지 못하겠네. 카드를 쓰면 바로 아버지에게 들킬 테고.
“아니면 우리 집은 어때요?”
“아까 말했잖아요. 안 된다고.”
“아니, 진호 씨 집 말고요. 내가 이전에 살던 집.”
짠돌이네 집? 지갑 안을 뒤적이던 진호의 손이 멈췄다.
“집 옮기면서 계약도 끝난 거 아니에요? 그럼 못 들어가죠.”
“아뇨. 아직 쓸 수 있어요. 계약 만료 전이라서. 나간 뒤로도 집이 안 팔려서 다달이 월세 내고 있었거든요.”
진호는 고민에 잠겼다. 당분간 아버지 몰래 지낼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괜히 짠돌이에게 불똥이 튄다면? 물론 이 자식이 어떻게 되든 나와 상관은 없지만 짠돌이에게서 원망이 담긴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짠돌이에게 빚을 진다니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진호 씨한테는 많이 불편할 수 있어요. 지금 사는 곳보다 훨씬 허름할 테니. 그래도 나름 경치도 좋고 지내다 보면 살 만해요.”
“그치만.”
“내 걱정은 말고요. 오래 지낼 것도 아닌데.”
“걱정 안 했거든요? 누가 걱정했대요?”
진호가 성질을 내며 수영의 어깨를 쳤다. 간지럽기만 한 펀치에 수영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지낼 곳도 없잖아요?”
그건 맞다. 짠돌이네 아니면 선택지도 없는데, 뭐.
“아, 모르겠다…….”
하루 동안 지나치게 많은 일이 있었다. 진호는 생각을 포기하며 수영의 등에 꽁꽁 언 뺨을 묻었다. 축축한 외투 너머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럼 우리 집 가는 거죠?”
“…….”
“진호 씨?”
“으음…….”
“자요?”
수영이 살짝 몸을 흔들었지만 뒤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새 잠들었네.”
수영이 주의 깊게 발을 내디디며 흙길을 내려갔다. 가까이서 반짝이는 빛무리가 보였다. 다 왔네. 가까스로 마음을 놓은 수영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간다. 형과 함께. 괜스레 살랑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수영은 손에 들린 제 소중한 고용주를 행여나 놓칠세라 꼭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