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다행이네요. 알겠습니다. 네.”
벽에 기대앉은 수영이 전화를 끊었다. 연락을 받은 혜린은 당분간 수영의 집에서 진호를 지내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사장님이 어느 정도 화가 풀리면 알려 줄 테니 그때까지 진호를 잘 봐 달라고, 사장님이 해코지하지 않도록 제 쪽에서 조처할 테니 안심하라며, 무엇보다 진호에게 눈에 띄지 않게 사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대체 아버지와는 어떤 악연이 있어서 뒷산으로 도망치게 된 건지. 힘든 부분이 있다면 제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집안 사정이라 물을 수도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형을 챙겨 주는 것뿐. 수영이 그거라도 잘하자고 다짐하며 옆에 누운 진호를 지켜보았다.
“음……. 물…….”
잠들었던 진호가 눈꺼풀을 반쯤 연 채 허공에 손을 허우적댔다.
“물이요?”
잽싸게 일어난 수영이 냉장고에서 시원한 보리차를 꺼내 왔다. 진호가 상체만 세운 채 수영이 건네주는 컵을 받아 겨우 목구멍 안에 흘려 넣었다.
“몸은 어때요?”
수영이 땀투성이인 진호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불덩이였다.
“좀…… 으슬으슬하네요.”
집에 도착한 후로 진호는 몸살을 앓았다. 비를 맞은 채 산중에 오래 있었던 것이 원인인 듯했다. 약을 먹이고 경과를 지켜봤지만 하루가 지나도 열은 내리지 않았다.
“배고프죠? 죽이라도 먹을래요?”
진호가 힘없이 주억거리며 이불 위로 픽 쓰러졌다. 수영이 싱크대로 달려가 쌀을 씻었다.
수영의 집은 언덕 위를 한참 올라야 보이는 작은 옥탑방이었다. 거실과 부엌, 안방이 모두 하나로 압축된 조막만 한 원룸에 화장실은 밖으로 나가야 쓸 수 있는 이상한 구조. 실망하거나 불편할 만도 했지만 대충 예상했던 탓인지 별 느낌은 없었다. 단지 이런 곳에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짧은 감상이 들었을 뿐.
“으으…….”
약을 먹었는데도 목은 계속 따갑고 뼛속이 찌를 듯이 쑤셨다. 밀려드는 오한에 진호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일어나 봐요.”
냄비를 올린 작은 반상을 이불 옆에 내려놓은 수영이 등을 받쳐 세웠다.
“아, 하세요.”
수영이 김이 폴폴 오르는 죽을 숟가락에 떠 입 앞에 내밀었다.
“제가 먹을게요…….”
숟가락을 가로채려 하자 수영이 손을 뒤로 뺐다.
“어허. 환자가 무슨. 그냥 받아먹어요.”
째릿, 하고 쳐다보자 능청스럽게 눈을 끔뻑인다. 약 10초간의 눈싸움에서 진 진호가 느릿하게 입을 벌렸다. 죽을 호호 불어 식힌 수영이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벌어진 입술 새로 밀어 넣었다.
“아이고, 잘 먹네.”
입 안에 들어온 것을 몇 번 씹다 삼키자 수영이 손주 대하듯 엉덩이를 토닥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레이저를 쏘아도 타격은 없었다.
“속에 안 좋을까 봐 간은 일부러 안 했는데, 먹을 만해요?”
어차피 미각을 상실해 맛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에너지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 가까스로 ‘네’라고 대답하자 뭐가 그리 좋은지 인상이 활짝 펴졌다.
“아, 해 봐요.”
다시 죽을 뜬 수영이 숟가락을 들었다. 입을 벌리려던 진호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고꾸라졌다.
“우욱-”
삼킨 것이 쏟아져 나올 듯이 울렁거렸다. 새파랗게 질린 낯빛에, 수영이 급히 부엌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꺼내 왔다.
“화장실은 머니까 여기에다 해요.”
수영이 봉투를 벌리자마자 앞뒤 잴 것 없이 그 안에 코를 박고 속에 든 것을 쏟아 냈다.
“욱, 우웩-”
“이거, 참. 뭐라도 먹어야 낫는데.”
수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등을 쓸었다. 먹은 것이 없어 투명한 위액만 쏟아 내던 진호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간신히 속은 진정되었지만 남은 기력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약 먹고 한숨 자면 나을 거예요.”
반상에 올려 둔 약봉지를 뜯어 보리차가 담긴 잔과 함께 건넨 수영이 진호의 젖은 이마를 맨손으로 쓸어 냈다. 삼키는 것조차 고통인지 알약과 물을 식도로 넘기며 살며시 눈가를 찌푸리는 게 안쓰럽기까지 했다. 진호에게서 잔을 받아 든 수영이 진호를 편하게 눕혔다. 진호가 자동으로 눈을 감았다.
조금씩 잦아드는 숨소리를 듣고 있던 수영이 진호의 발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약을 진창 발라 놓은 덕에 상처는 가라앉았지만 검게 얼룩진 피딱지는 여전히 선명했다. 실금처럼 난 흉터를 어루만지던 수영이 연고를 가져와 발바닥에 고루 펴 발랐다.
“으…….”
통증을 느낀 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수영이 발에서 손을 떼며 표정을 살폈다. 주름졌던 이마가 평평해졌다. 수영이 깨지 않도록 느리게 붕대를 감아 주었다.
진호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뭐가 잘못됐나 싶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영이 진호의 차가운 손을 주물렀다. 어릴 적에 제가 아플 때마다 할아버지는 손을 주물러 주셨다. 혈액 순환이 돼야 병도 낫는 거라면서. 그러면 신기하게 아팠던 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곤 했다. 형도 얼른 나으면 좋을 텐데. 색색거리며 곤히 잠든 진호를 바라보며 수영이 손바닥을 눌렀다. 잘 때는 정말 순하다니까. 고요히 내려앉은 속눈썹을 내려다보던 수영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왜 서는 걸까. 불룩해진 아래를 보던 수영이 다시 진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잘 알지만 처연한 눈매와 발그레 뜬 홍조가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미쳤냐. 아픈 사람을 두고.”
불순한 사고는 떨쳐 내려고 했지만 머릿속이 금세 산만해졌다. 손은 왜 이토록 부드러운지. 갖은 일로 거칠어지고 푸석해진 제 손과 다르게 형의 손은 아기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고왔다. 손처럼 입술도 부드러웠지. 야구장에서 느꼈던 찰나의 감촉을 되새긴 수영이 저도 모르게 등을 굽혔다.
“흐응…….”
엄지로 아랫입술을 건드리자 진호가 입을 달싹였다. 수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리를 세웠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감도는 듯했다.
이 사람이 궁금하다. 어떤 과거를 품고 있는지, 본가에서는 왜 나왔는지, 아버지에게 납치까지 당한 이유는 무엇인지 같은 진지한 호기심에서부터 잘 때는 어떤 꿈을 꾸고, 아이스크림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든 게 궁금하다.
이런 걸 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호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수영이 아는 것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형으로 치부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
형은 우리가 갑을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형이라 부르는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만으론 부족한 느낌이었다. 서류에 명시된 딱딱한 관계 대신 친밀한 관계가 되었으면 했다. 이를테면, 딱히 업무 때문이 아니더라도 매일 함께 지낼 수 있는.
수영은 주무르던 손을 양손에 쥐었다. 차가웠던 손끝이 따뜻하다. 작은 안도감을 느끼며 수영이 눈을 감았다. 진호를 이곳에 데려온 어제부터 이틀째 잠들지 못했다.
“아. 안 되는데.”
마음과 달리 눈은 떠지지 않았다. 자는 새에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려고. 미간을 엄지로 누르던 수영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라도 해야겠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수영이 화장실로 향했다.
* * *
막 잠에서 깬 진호가 뒤척이더니 번쩍 눈을 떴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보니 점심이 훌쩍 지난 듯했다. 작은 통증 하나 없이 개운한 기분에 기지개를 켰다.
“응?”
손을 위로 쭉 뻗던 진호가 위화감에 허리를 들었다. 수영이 잠들기 전 모습 그대로 곁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은 걸 보니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진호는 제 오른손을 꼭 붙들고 있는 수영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래서 팔이 안 올라갔구먼. 슬그머니 빼면 빠질 줄 알았더니 어지간히도 세게 잡고 있다. 몇 번 흔들다가 포기한 진호는 수영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외출복도 그대로 입고 있는 걸 보니 밤새워 지키고 있었나 보다. 불편하지도 않나. 목을 잔뜩 꺾은 채 졸고 있는 수영을 깨울지 말지 고민하다 어깨 근처에 손을 가져갔다.
웅-
아, 씨. 깜짝이야. 하마터면 수영의 뺨에 입술을 묻을 뻔한 진호가 재빨리 허리를 뒤로 빼며 핸드폰을 찾았다.
웅-
수영에게 한 손을 붙잡힌 채 허둥지둥 주변을 짚어 보던 진호가 바닥에 놓인 핸드폰을 어렵사리 잡았다.
[최정연]
대기 화면에 뜨는 이름을 확인한 진호가 수영을 슬쩍 보더니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다음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정연과의 대화방을 찾았다.
[무슨 일이야? 지금 통화는 안 돼.]
[메시지는 잘 못 보실 거 같아서 전화했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거의 나은 거 같아.]
[다행이에요ㅠㅠ]
눈물을 흘리는 토끼 이모티콘을 무심히 바라보던 진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얘는 아픈 걸 어떻게 알았지? 걱정하지 말라고 왼손으로 한 자 한 자 치던 진호가 전송을 누르려던 것을 멈추고 말을 덧붙였다.
[아프단 건 어디서 들었어?]
[수업 시간에 수영 오빠랑 같이 안 나오셨길래 뭔 일 있나 해서요. 교수님께 물어보니 아파서 결석했다고 하시던데요?]
교수님은 어떻게 아셨지? 누나가 말했나.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던 진호가 답을 보냈다.
[근데 무슨 일로?]
[오늘 박 교수님이 사진 촬영 과제 내주셨어요. 그거 알려 드리려고요.]
정연이 사진 하나를 보내 주었다. 메모지에 가지런한 글씨로 과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촬영 과제라……. 아, 카메라. 드레스 룸에 고이 모셔 둔 샬베스타의 카메라가 뇌리를 스쳤다. 그거 어떻게 얻은 건데. 무려 짠돌이랑 가짜 커플 행세까지 하며 받은 거였다.
[선배. 괜찮은 거죠? 병문안 갈까요?]
지금은 병문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카메라를 사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어찔한 느낌에 진호가 이마를 쥐었다.
[아니. 정말 괜찮아.]
힝, 하고 훌쩍거리는 토끼 이모티콘이 뜨더니 한 줄이 더 붙었다.
[넹……. 푹 쉬세요!]
간단히 고맙다는 답을 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뻐근한 왼손을 탈탈 털었다. 한 손으로 타자 치려니까 힘드네.
수영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아무래도 깨워야 하나. 우선은 카메라를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니 붙들린 오른손이 방해였다.
“저기.”
왼손으로 어깨를 붙잡고 살살 흔들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수영 씨? 일어나 봐요.”
이번엔 세게 흔들었다. 턱이 덩달아 삐걱거리더니 손을 멈추자 아래로 푹 떨어진다. 이거 웬만해선 안 깨겠네. 제 팔을 붙든 손목을 잡고 상하좌우로 흔들어 봤지만 수영의 손에 딱 맞춘 듯 들어간 주먹은 빠지질 않았다. 깰 때까진 못 풀겠다. 깊은 잠에 빠진 수영을 빤히 보더니 무언가 결심한 진호가 수영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넘어가진…… 않겠지. 등을 왼손으로 받친 채 뒤로 당겼지만 제 힘으론 꿈쩍도 안 했다.
옷자락을 붙든 손에 힘을 주며 이마로 어깨 앞쪽을 밀었다. 그제야 커다란 몸뚱이가 뒤로 밀려났다. 그대로 천천히 내려놓는데 무게를 버티기엔 역부족이었는지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얘는 살도 없는데 왜 이렇게 무거워. 뒤통수가 바닥에 부딪힐까 봐 손으로 뒷덜미를 짚은 채 온몸으로 지탱하며 수영을 눕혔다. 간신히 머리를 바닥에 안착시킨 진호가 숨을 골랐다.
“후우.”
이게 뭐라고 숨까지 차냐.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진호가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진호 씨……?”
막 잠에서 깬 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자세를 바로 하려던 진호가 엉거주춤한 채로 멈췄다.
“뭐 해요? 제 위에서.”
“아니. 이건.”
당황해서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밤새 간호한 게 안쓰럽고 고맙기도 해서 잠은 편하게 자라고 눕힌 건데 재수 없게 이 타이밍에 눈을 뜨다니.
“앉아서 자고 있길래 누워서 자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변명이 흘러나왔다. 수영은 별 신경도 안 쓰이는지 눈을 몇 번 비비더니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내렸네요. 몸 상태는 어때요?”
“괜찮은데…….”
제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호가 뒤늦게 냉정해져서는 잡힌 오른손을 털었다. 양심에 찔릴 짓도 안 했는데 허둥댈 건 뭐야.
“손 좀 놔줄래요?”
“아.”
수영이 제 손을 내려다보더니 놓아주었다. 얼마나 오래 잡고 있었던지 손바닥이 빨갛다 못해 하얬다. 쥐가 나서 지끈거리는 손으로 발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검붉던 딱지가 아물어 연해져 있었다. 걸어도 아프진 않겠네. 느슨해진 거즈를 당겨 벗긴 진호가 무릎을 세워 일어서더니 집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제 옷 어디 뒀어요?”
“수업 가려고요? 제가 결석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교수님께 아프다고 알린 게 짠돌이였구나. 정연과의 대화를 상기한 진호가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걸치려다 멈칫했다. 이대로 집에 가면 아버지한테 잡힐 텐데. 자취하는 곳을 아버지가 아니까 제가 올 것을 대비해 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안 가도 괜찮잖아요. 오늘은 쉬어요.”
수영이 외투를 벗기려고 옷자락을 붙잡자 스르륵 흘러내렸다. 생각에 잠긴 진호가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아뇨. 집에 돌아갈 거예요.”
“집이요?”
“거기에 제 소중한 카메라가 있어요.”
카메라를 몰래 빼돌리기로 마음을 굳힌 진호가 전략을 세우려고 두뇌 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만약 경호나 CCTV라도 배치해 뒀다면 큰일이다.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안 들키고 집에 다녀오는 방법은 없을까.
“안 돼요. 이제 막 나았는데. 무엇보다 거기 갔다가 잡히면 다시는 못 나올 수도 있어요.”
수영이 아래로 떨어진 외투를 주섬주섬 주워 올렸다. 나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외투를 멀리 떨어뜨리는 태도가 강건했다. 굳어진 수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호의 눈에 밤새 푸석해진 피부와 현란한 색상의 티셔츠가 들어왔다. 일어났으면 옷이라도 갈아입지. 조금만 꾸며도 완전히 딴사람이 될 텐데 왜 저런 옷을……. 잠깐만, 딴사람?
“줘 봐요.”
진호가 수영이 뒤로 감춘 외투를 집어 들었다.
“안 된다니까요.”
수영이 외투를 뒤로 당겼다. 진호 역시 지지 않고 양손으로 붙잡으며 버텼다.
“그거 하나 얻겠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꼭 가져와야 해요.”
“그래도 안 돼요. 카메라야 사면 되고.”
순 거짓말이다. 짠돌이 놈이 호락호락하게 비싼 카메라를 사도록 두진 않을 거다. 진호가 이를 악물며 옷자락을 고쳐 쥐었다.
“그 카메라가 아니면 필요 없어요.”
“제가 똑같은 거 구해 볼게요.”
“못 구해요. 샬베스타가 맞춤 제작한 거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란 말이에요.”
“충분히 회복된 후에 가도 늦지 않잖아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가져와요? 그리고 이제 다 나았거든요?”
두 사람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코트가 오락가락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었던 수영이 한발 물러섰다.
“그럼 진호 씨는 여기 계세요. 제가 다녀올게요.”
“그쪽도 얼굴 팔린 건 마찬가지라 똑같아요.”
“꼭 가야겠어요?”
당연하지. 돈 주고도 못 사는 걸 이렇게 놓치고 싶지는 않다. 제가 없는 사이 아버지가 마음대로 집 안의 물건을 다 처분할지도 모를 일이고. 의지로 불타오르는 눈빛을 보던 수영이 손의 힘을 풀었다. 그 덕에 있는 힘껏 당기고 있던 진호가 뒤로 휘청거렸다.
“저도 같이 가요. 혼자는 못 가요.”
“그러든가요.”
머릿속이 카메라로 가득 찬 진호가 현관으로 바삐 걸어갔다. 그 뒤를 수영이 뒤따랐다.
“그 집에 몰래 들어갈 방법은 있어요? 카드 키도 없잖아요.”
“방법이야 물론 있죠.”
진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수영 씨가 도와주면 돼요.”
* * *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담벼락에 몸을 숨긴 채 건너편의 아파트 입구를 지켜보던 수영이 평소보다 키가 커진 진호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코트 아래로 삐져나온 연분홍빛 치맛자락이 바람에 살랑 나부꼈다.
“돈은 나중에 갚는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새초롬하게 올려다보는 진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수영이 뒷말을 삼켰다. 마스카라로 한껏 올린 속눈썹과 새빨간 입술이 신기하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니면?”
“됐어요.”
수영이 화려하게 꾸민 진호에게서 아파트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여자인 줄 알겠네.
방법이 있다던 형은 백화점에 들러 원피스와 여성용 코트를 샀다. -형의 카드를 쓸 수 없어서 제가 모아 둔 월급으로 샀다- 형이 화장품과 가발을 사서 메이크업까지 마치고는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하마터면 못 알아챌 뻔했다. 키와 체격이 작은 편이 아닌데도 잘 어울려서, 그 언젠가 형의 잡지에서 본 길쭉한 여성 모델 같았다.
“안경이나 똑바로 써요.”
진호가 삐뚤어진 수영의 금테 안경을 바로 세웠다. 진호가 180도 바뀐 것처럼 수영도 이전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호가 내세운 계책은 위장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변장한 뒤, 틈을 노려 들어가 카메라를 가져올 생각이었다.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변신이 좋을 것 같아 성별까지 바꿔 버렸다. 수영에겐 이참에 제대로 된 옷을 사라는 뜻에서 멀끔한 정장과 함께 안경을 골라 주었다. 포마드로 앞머리까지 깔끔하게 넘기고 보니 역시나 완전히 딴사람이다. 조금 전만 해도 피시방에서 밤새우다 나온 아저씨 같더니 차려입으니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네.
여장까진 오버인 것 같지만 만약을 위해선 어쩔 수 없지. 집에 몰래 잠입한 것이 아버지에게 들키면 큰일이니까. 발볼을 조이는 하이힐 때문에 불편한 종아리를 주무르며 앞을 주시했다. 어릴 때 누나가 화장하는 걸 얼핏 본 게 이런 데 쓰일 줄이야. 잘 몰라서 피부 톤이랑 눈썹만 만졌는데 봐 줄 만은 했다. 변장이 자연스러웠는지 아파트 정문을 통과할 때도 문제가 없었다.
“구두는 벗는 게 어때요?”
수영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선 진호의 모양새가 걱정됐는지 무릎을 굽히려던 참이었다.
“지금이에요!”
주민 한 명이 카드 키를 찍고 들어가는 틈을 타 진호가 수영의 팔을 잡고 출입구를 향해 냅다 달렸다. 하지만 높은 굽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발이 안정적으로 바닥에 닿지 못하고 좌우로 꺾였다. 보다 못한 수영이 진호 앞에 팔을 내밀었다.
“이거 잡아요.”
순간 망설이던 진호가 수영의 팔을 낚아챘다. 어쩌다 보니 팔짱을 낀 형세가 되었지만 한시가 급했던 터라 수영에게 의지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일단 1단계는 통과했고.”
자동문이 닫히기 전에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진호가 팔짱을 풀며 가쁜 호흡을 골랐다. 아쉬운 듯 수영의 눈길이 떨어진 손끝에 닿았다.
“여보쇼. 거기.”
뒤에서 울리는 묵직한 소리에 진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꺾었다. 뒷짐을 진 경비 아저씨가 엄한 얼굴로 진호와 수영을 번갈아 살폈다. 혹시 몰래 들어온 걸 들킨 건가. 긴장한 진호가 침을 꼴깍 삼키며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경비를 마주했다.
“당신들, 지금…….”
목소리를 냈다간 남자임이 들킬 것 같아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는 듯 되묻는데, 아저씨가 혀를 차며 진호의 뒤편을 가리켰다.
“……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못 타요.”
“아.”
다행이다. 들킨 게 아니었네. 안도감에 짧은소리를 내고 만 진호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헛걸음할 뻔했네요.”
수영이 태평하게 받아치며 진호를 슬쩍 뒤로 보냈다.
“그런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진호를 유심히 살피던 아저씨가 앞으로 다가왔다. 진호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번엔 또 뭐지.
“아가씨는 여기 주민인가? 얼굴이 낯선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누나가 하는 걸 자주 봤다고 해도, 처음 해 본 화장이라 어색한 티가 났다. 자세히 보면 가발이라든지 남자라는 걸 쉽게 알아낼 수도 있었다.
“아가씨?”
진호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경비 아저씨가 집요하게 보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 전에 1502호에 들어왔는데 미처 인사를 못 드렸네요.”
지켜보던 수영이 앞을 막아섰다. 경비 아저씨가 1502호 주민이랑 아는 사이면 어쩌려고. 뻔히 들통날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 수영에게 태클을 걸고 싶은 것을 참으며 진호가 잠자코 뒤에 숨었다. 수영을 보며 기억을 더듬던 경비가 입을 열었다.
“호오. 얼마 전에 이사 오신 분들이시구먼.”
경비가 알은체를 하며 경계를 풀었다. 운이 좋게도 때려 맞춘 게 먹힌 모양이었다. 능청스럽게 수영이 손을 내밀자 경비가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악수를 했다.
“두 분은 그럼…….”
“애인 사이입니다.”
애인? 진호가 경비에게 보이지 않게 수영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이 순간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게 아주 원통했다. 수영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 손을 잡아 더욱더 세게 끌어당겼다. 그 모습이 흔한 연인 간의 애정 행각처럼 느껴졌는지 경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 불편 사항이나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쇼.”
“네. 저희는 바빠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수영이 재빨리 진호의 팔을 낚아채 계단으로 이끌었다.
“껄껄. 깨가 쏟아지는구먼. 근데 얼마 전에 이사 왔다는 게 1502호가 맞던가? 나이가 들어서 자주 깜빡깜빡한다니까.”
순순히 물러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경비를 뒤로한 채 수영이 진호와 함께 비상 통로 안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위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데려다 놓자 진호가 펄쩍 뛰며 팔을 뿌리쳤다.
“누가 애인이에요?”
뾰족한 눈빛을 가뿐히 무시한 수영이 진호를 들어 어깨 위로 들쳐 멨다. 얼떨결에 수영의 어깨에 매달린 진호가 거꾸러진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버둥거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당장 내려요!”
수영이 허리를 단단히 잡은 탓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어중간하게 뜬 진호의 다리가 수영의 배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내려놓으라니까!”
“한참 올라가야 하니까 이대로 가죠.”
수영이 뒤로 미끄러지는 진호를 바로잡으며 성큼성큼 층계를 올랐다. 내 발로 걸어서 가겠다며 한바탕 몸부림을 치던 진호는 아래로 피가 쏠린 탓에 이는 현기증을 참지 못하고 저항을 멈췄다. 어쩔 수 없이 참는다. 참아. 진호가 떨어질 것 같은 가발을 감싸며 답답한 속을 가라앉혔다. 속으로는 짠돌이 욕을 백만 번쯤 했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무도 없네요.”
진호의 집이 있는 11층까지 오른 수영이 복도로 통하는 문 뒤에 진호를 내려놓으며 상황을 살폈다. 수영의 너머로 눈만 내민 진호가 낯익은 현관문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다행히 문밖을 지키는 경호원은 없었다.
“제가 가져올 테니까 진호 씨는 바깥 상황 좀 알려 줘요.”
“어딨는지는 알아요?”
“맨날 드레스 룸 서랍에 넣어 두잖아요. 같이 들어갔다가 둘 다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혼자 다녀올게요.”
진호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훌쩍 가 버린 수영이 집 앞에 서더니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한 번 더 문을 두드린 수영이 귀를 문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자 수영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카드 키 대신 비밀번호로도 열 수 있는 도어 록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까진 순조로운데. 진호가 문 뒤에 쭈그려 앉은 채 수영이 사라진 복도를 쳐다보며 핸드폰을 꼭 쥐었다. 이대로 카메라만 꺼내 오면 성공인데 왜 이렇게 긴장되지. 기다리는 시간이 반백 년같이 길다.
[카메라 찾았어요. 지금 나가요.]
손안을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수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다 됐다 싶어 한시름 놓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진호는 급한 대로 벽과 문 사이에 들어가 숨었다. 문틈 새로 보이는 치맛자락을 거두자마자 11층에 도착한 남자가 진호가 숨은 문 앞을 지나쳐 복도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진호가 재빨리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본가의 임 실장이다. 남자의 정체를 알아챈 진호가 핸드폰을 들어 수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경호실장 도착함. 은신 요망.]
길게 ‘요’까지 붙이기엔 긴급해서 간단히 단어로 설명했다. 집 앞에 선 경호실장이 카드 키를 꺼냈다. 부디 짠돌이가 핸드폰을 확인했기를. 섬뜩하게 다가오는 긴장에 주먹을 쥐며 진호가 안절부절못했다. 못 들어가게 막아야 하는데.
띠릭- 실장이 도어 록에 카드 키를 대기도 전에 잠금 해제 음이 울렸다. 수영이 들키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진호가 무작정 일어나 실장에게로 달려들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윽!”
피할 겨를도 없이 진호와 충돌한 실장이 옆으로 벌러덩 넘어졌다. 무턱대고 실장을 들이받은 진호가 그 옆에 나란히 쓰러졌다.
“뭐야?!”
임 실장이 부딪힌 복부를 쥐며 쓰러진 진호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사이, 열린 현관문으로 카메라 가방을 멘 수영이 나오며 복도에 쓰러진 두 사람을 발견했다.
“당신 누구야?”
실장이 수상함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수영을 탐색하듯 훑었다.
“저요?”
실장을 향하던 시선이 머리가 헝클어진 채 쓰러져 있는 진호에게로 향했다. 수영과 눈이 마주친 진호가 도망치라는 뜻으로 턱짓했다. 이 사람, 아버지 쪽 사람이니까 얼른 가.
“누군데 그 집에서 나오냐고.”
임 실장이 일어나며 옷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 냈다. 수영은 줄곧 사인을 보내고 있는 진호에게 눈을 고정한 채 다가왔다. 답답해진 진호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니,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나? 너까지 끼면 더 곤란해진다고! 카메라는 사수해야 할 거 아냐!
“자기야.”
진호의 코앞에 멈춰 선 수영이 무릎을 굽혀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뭐? 자기? 미간 사이에 주름이 늘어난 진호가 노려보는데도 수영은 태연하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이봐.”
“부동산에서 왔습니다.”
실장이 수영의 어깨를 돌려세우자 수영이 진호를 일으켜 세우며 앞선 질문에 답했다. 부동산이라고? 밑도 끝도 없는 임기응변에 진호가 되레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상치 못한 것은 실장도 마찬가지였는지 주춤하며 물러났다.
“이곳에 사시던 분이 집을 매물로 내놔서요. 사전 조사차 왔습니다. 이쪽은 제 아내고요.”
수영이 느릿하게 안경을 추켜올리며 진호를 제 쪽으로 당겼다. 어느새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호칭에 진호의 눈가가 뾰족하게 솟았다.
“그치. 여보?”
동의를 구하듯 올라가는 눈썹에 진호가 울며 겨자 먹기로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쩔 수 있나. 지금으로서는 어이없는 짠돌이의 헛소리에 장단 맞춰 주는 수밖에.
“그런 얘기는 보고받은 적 없는데. 당신들 무슨 수작이지?”
실장이 경계심을 세우며 두 사람을 향해 서슬 퍼런 눈빛을 보냈다. 수영은 준비라도 한 것처럼 카메라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실장에게 건넸다.
“계약서도 있으니 읽어 보시든가요.”
의심스러운 눈길로 실장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진득하게 눌어붙던 시선이 종이 위의 활자로 옮겨 갔다. 저건 뭐야? 똑같이 정체 모를 종이 뭉치에 관심을 두던 진호의 시야가 순간 세차게 흔들렸다.
“뛰어요!”
수영이 진호의 손목을 낚아채며 복도를 내달렸다.
“뭐야?!”
실장이 종이를 내팽개치며 뒤따라 달렸다. 계단을 내려가던 수영이 정신없이 휘청이는 진호를 들어 어깨에 걸쳐 멨다. 매달린 진호가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수영의 재킷을 붙잡았다. 사람 살려. 이러다 멀미 나 죽겠네.
“거기 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온 뒤에도 임 실장은 끈질기게 뒤따라왔다. 수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왕년에 육상부였던 수영도 빨랐지만 실장도 체력이 상당했던 터라 둘의 간격은 벌어질 듯하면서도 금세 가까워졌다.
“서, 서라니까!”
실장이 헉헉대면서도 착실히 쫓아오자 수영의 등을 붙잡고 있던 진호가 제 목에 걸려 있던 큐빅 목걸이를 풀어 던졌다.
“에잇.”
커다란 보석 알이 아슬아슬하게 실장의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갔다. 아깝다. 맞출 수 있었는데. 다음으로 구두를 벗으려던 진호가 급격한 울렁거림에 허리를 굽히며 수영의 등을 잡았다. 어우. 이 차 승차감이 영 별로야.
“저게 뭐야?”
대로변을 지나 상점가에 다다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난데없는 추격전에 쏠렸다. 수영은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쳐 상점가 안으로 들어갔다. 금요일 저녁이라 식당가 골목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인파 때문에 실장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거기! 잠깐, 윽!”
실장의 외침은 군중들 사이에 묻혀 사라졌다.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즈음, 길거리 한복판에 진호를 내려놓은 수영이 실장을 피해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이끌었다.
“잠시 여기 피신해 있죠.”
골목 중앙을 가로지르는 벽 앞에서 뜀박질을 멈춘 수영이 구석에 진호를 놓아주었다. 다리를 후들거리던 진호가 벽을 짚더니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허억.”
“뛴 건 난데 왜 형이 힘들어해요?”
허리를 꺾어 거리 쪽을 확인한 수영이 진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걸 몰라서 묻냐? 네놈이 숨 고를 틈도 안 주고 막 끌고 다녔잖아. 그 덕에 실장을 따돌리긴 했지만. 진호가 통하지도 않을 눈빛을 흘리며 뻔뻔한 수영을 올려다봤다. 버튼 하나 푼 데 없이 목을 죈 넥타이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읏차.”
수영이 과장된 추임새를 넣으며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햇빛이 닿는 곳에 비춰 보니 다행히 긁히거나 망가진 곳은 없었다.
“여기 봐요.”
미처 얼굴을 가릴 틈도 없이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예쁘네. 카메라엔 이상 없어요.”
앨범을 열어 본 수영이 만족한 듯 화면을 들이밀었다. 손바닥만 한 카메라 화면 안에는 땀에 화장이 반쯤 번진 자신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이게 뭐가 예쁘다고.
“근데 형은 남자일 때가 더 예쁘네요.”
곧게 휘어진 수영의 눈가가 느긋하게 진호를 향했다. 지금은 남자가 아니냐고 받아치려던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뭔 헛소리래. 이 새끼가. 속마음과는 달리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손끝이 치맛자락을 짚었다.
“이 새끼들 어디 간 거야.”
골목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수영이 진호를 구석에 몰며 상체를 밀착시켰다. 뒤로 밀려난 진호의 등이 벽에 찰싹 붙었다. 설마 임 실장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진호가 입을 다문 채 그대로 굳었다.
“…….”
덩달아 숨을 죽인 수영의 가슴이 코앞에 닿았다. 심장이 쿵쾅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눈을 슬쩍 올리자 괜찮을 거라는 듯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쿵쿵. 쿵쿵. 안정을 찾은 박동이 균일한 진동을 만들어 냈다. 진호가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수영과 눈을 맞췄다.
가까이서 들리던 발소리가 작아지자, 뜸을 들이던 수영이 조심스럽게 허리를 들었다.
“갔어요. 우리도 나가죠.”
수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진호가 멀어지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수영이 살짝 눈썹을 세우더니 얌전히 끌려왔다. 넥타이에서 떨어진 진호의 손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목 아래의 매듭을 잡고 천천히 풀어냈다. 수영은 진호가 하는 양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더워 보여서.”
넥타이에 이어 답답하게 잠긴 단추까지 두어 개 푼 진호가 목적을 이룬 듯 손을 땅으로 내렸다.
이유를 모르겠다. 왜 손이 불쑥 나갔는지. 왜 말은 짧아졌는지. 왜 아직도 숨이 가라앉지 않는 건지. 그냥 오늘따라 짠돌이가 신경 쓰였을 뿐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자신을 안고 한참을 달리느라 젖은 이마와, 뭐가 좋은지 시종일관 실실대는 사람 좋은 미소가. 분명한 건, 더는 짠돌이가 이전만큼 미워 보이지 않는다는…….
“역시 우리 자기가 최고네.”
……말은 취소. 진호가 무릎을 벌떡 세우더니 카메라 가방을 들고 수영을 휙 지나쳤다.
“왜 그래, 자기야. 삐졌어?”
잔뜩 힘이 실린 구두 굽이 바닥을 찍었다. 수영이 뒤늦게 따라가 붙으며 진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저리 꺼져요.”
손등으로 수영의 팔을 찰싹 쳐 낸 진호가 방향을 돌려 인도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우리, 부부 사이 맞는다면서! 왜 아닌 척하는데요?!”
수영의 외침에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난 몰라요. 저런 미친놈은. 진호가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저런 놈이 순간 멋있어 보였다니. 나도 미쳤지.
“알았어. 여보. 내가 미안해!”
굴하지 않고 쫓아오는 수영을 모른 체하며 진호가 큰길로 벗어났다. 저 새끼는 면상에 나사라도 빠졌나. 왜 저렇게 쪼개는 건지. 정말 애인이라도 보는 것처럼. 숨을 죽인 채 마주했던 수영의 눈동자를 뇌 속에서 지워 내며 진호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귓가에 열이 올라 빨갛게 물이 든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로.
* * *
집에 돌아온 진호가 돌덩이 같은 구두를 벗어 던졌다. 비척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은 뒤 이불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씻고 자요.”
수영이 진호가 팽개친 구두와 코트를 정리하며 눈이 감기는 진호를 흔들었다.
“잠시만 쉬다가…….”
점점 뿌예지는 시야에 진호가 가늘게 눈꺼풀을 내리며 웅얼거렸다. 씻고 자야 하는데. 종일 팔자에도 없는 하이힐에 추격전까지 벌였더니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게다가 수영이 따라오는 걸 무시하려고 빨리 걸었더니 후유증은 더욱 심했다. 따라오면서도 꼬박꼬박 ‘여보’라는 소름 돋는 칭호로 부르길래 우리 사이의 거리를 재차 못 박아 두었더니 ‘형님’이라 불러서 사람들의 경악스러운 눈초리를 한 몸에 받아야 했다. 덕분에 뜨거워지는 낯을 가리며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집까지 뛰어오느라 진이 다 빠졌다. 내가 다시 이 짓거릴 하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다 잘 거면서.”
“씻을 거거든요…….”
진호가 어기적어기적 허리를 세우더니 이내 바닥에 드러누웠다. 화장도 지워야 하고, 가발도 치워야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씻기 전에 해야 할 게 산더미다.
“안 그럼 제가 씻겨요?”
수영이 앞으로 다가와선 무릎을 굽혔다. 그건 안 되지. 진호가 번쩍 눈을 뜨며 바닥을 짚었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무릎을 세우는 데만도 억만년이 걸릴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수영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더니 안아 올렸다.
“억.”
단숨에 허리가 들렸다. 강제로 일으켜진 다리가 비틀대며 힘겹게 바닥을 짚었다. 아, 씨. 놀라라. 이 새끼는 도통 깜빡이를 켜고 들어오질 않는다. 진호가 됐다는 듯 수영의 팔을 밀치며 치마 아래에 손을 넣었다.
“뭘 봐요?”
허리춤을 조이는 스타킹의 밴드 부분을 잡아 돌돌 내리는데 끈덕진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그게. 음.”
허벅지에 걸쳐진 스타킹의 말린 선을 지켜보던 수영이 갈 곳 잃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주춤거리며 넥타이를 잡는 모양새가 어색했다. 뭘 저렇게 당황해? 진호가 미심쩍은 눈매를 좁히며 쏘아붙였다.
“안 가요?”
“갈 데가 없는데.”
겸연쩍게 목뒤를 쓸며 어깨를 으쓱이는 형태가 뻔뻔하기도 했지만 당연한 언사였다. 잊고 있었지만 이 집은 정말 손바닥만 했으니까. 뭐라 대꾸할 건수를 찾지 못한 진호가 괜히 목을 풀며 등을 돌렸다. 이상하게 짠돌이 앞에서는 편히 옷 벗기가 힘들단 말이야. 원나잇 상대들 앞에서는 잘 벗던 주제에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겠지? 암, 아니고말고.
가슴을 가로지르는 단추를 끌러 내린 뒤 팔을 빼내자 핑크빛 블라우스 원피스가 가벼운 마찰음을 내며 살갗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소리만큼 자그마한 소리였음에도 의식은 뒤에서 보고 있을 수영에게 쏠렸다. 신경 쓰지 마. 신경 쓰는 게 더 이상해. 진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바닥으로 떨어진 원피스를 주우려 허리를 아래로 굽혔다.
잠깐. 이 자세는 뭔가……. 문득 자신이 속옷 차림이라는 걸 깨달은 진호가 어깨를 굳혔다. 그렇다는 건 지금 짠돌이 앞에서 반나체로 엉덩이를 내밀었다는 뜻이잖아?
“잠시만.”
나지막이 울리는 수영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민망함에 얼른 표정을 정돈하며 원피스 자락을 손끝에 감아올렸다.
“왜요?”
태연한 척 대답하며 허리를 세우는데 바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손이 엉덩이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며 뒤를 돌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옷, 빨래 통에 넣어 두려고요.”
수영이 스타킹과 함께 진호의 손에 걸린 옷자락을 낚아채더니 제 팔에 둘둘 말았다.
“할 말 있어요?”
“아, 아뇨.”
아. 쪽팔려. 어쩌다 보니 저만 잔뜩 의식한 꼴이 돼 버렸다. 진호가 눈을 피하며 서랍 위에 올려 둔 잠옷을 팔과 다리에 끼워 넣었다.
“온수 틀어 놨으니까 바로 샤워해도 돼요!”
화장실로 향하는 진호의 등 뒤로 수영이 소리쳤다. 진호가 들은 척 만 척 수건을 챙겨 나갔다. 굳건히 닫히는 철문을 보던 수영이 진호에게 닿았던 손을 쥐었다 폈다. 불현듯 목뒤에서 열이 올랐다.
괜찮은 척 연기한 게 들켰으려나. 아까 전, 어떤 ‘중대한 사실’을 알아채고 난 뒤로 형 앞에만 있으면 제 몸과 마음이 뜻대로 되질 않아서 곤란하다. 형도 내 앞에서 이럴 때가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저 형은 먹은 게 다 엉덩이로 가나? 희한하네.”
안 보는 척하며 훔쳐봤던, 벗은 진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수영이 진호의 옷을 빨래 통에 넣었다. 팔을 털어 봐도 손끝에 닿았던 여린 살의 감촉이 사라지질 않았다.
* * *
샤워를 마치고 꼼꼼하게 머리까지 말린 진호는 앞뒤 사정 잴 거 없이 이불보 위에 누웠다. 이불 위에서 뒹굴뒹굴하는 사이 씻은 수영이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며 옆에 나란히 누웠다.
“저리 떨어져요.”
등 뒤에 닿는 체온이 거슬려 밀었더니 수영이 억울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 너무 차갑다. 어떻게 우리 사이에 그런.”
“그 입 쥐어뜯어 버리기 전에 곱게 잠이나 자요.”
진호가 정말로 뜯을 듯이 손을 들자 수영이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진호는 말 대신 눈으로 잔뜩 수영을 씹어 주었다. 수영의 표정이 이내 평소의 형태를 되찾았다.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어요.”
수영의 등 뒤는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진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구겨 수영에게 닿는 면적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자면 안 불편해요?”
“제일 편한데요.”
자세는 불편할지언정 그게 대수냐. 마음이 편한 게 최고지. 진호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리며 수영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진호 씨.”
“…….”
“형.”
이불을 내린 진호가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추궁하듯 눈살을 찌푸렸다. 수영이 무슨 꿍꿍이인지 빙글빙글 웃었다.
“우리…….”
우리?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 진호가 면박을 주려던 찰나, 수영이 세웠던 입꼬리를 내리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대체 뭔 얘기를 하려고.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진호가 덩달아 미간을 좁혔다.
“진실 게임 해요.”
저런 건 상대해 줄 가치도 없다. 진호가 아예 이불을 뒤집어쓰며 대화를 거부했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잠이나 자야겠다.
“친구 집에서 자면 진실 게임 하잖아요. 형이랑 해 보고 싶은데.”
“…….”
“형?”
“…….”
“자요?”
“…….”
“진짜 자나?”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으니까 이불을 덮는 듯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볼 거 많았는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수영이 포기한 듯 잠잠해졌다. 드디어 찾아온 고요함에 한시름 놓은 진호는 이내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으응……?”
허리를 누르는 압박감에 진호가 잠에서 깼다. 뭐 때문에 이렇게 답답하지. 무거운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자 탁한 시야로 까만 적막만 들이찼다. 무게가 느껴지는 곳을 따라 손을 뻗으니 허리께에서 딱딱한 살덩이가 만져졌다.
“뭐야…….”
아래를 보니 웬 튼실한 팔뚝이 옆구리에 걸쳐 있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보나 마나. 진호가 두 손으로 수영의 팔을 잡으며 뒤로 밀어내려 했다.
“으음.”
수영이 진호를 붙들며 허리를 강하게 옭아맸다. 단단하고도 따뜻한 가슴팍이 등에 맞닿았다.
“형…….”
느릿하게 내쉬는 음성이 목뒤를 간질이자 팔을 잡는 손에 힘이 풀렸다. 안 되겠다. 어떻게든 밀어내 보려고 배에 닿는 손을 움켜쥐는데, 수영의 허벅지가 허리에 턱 걸쳐졌다.
수영에게 완전히 포위된 진호는 갈데없이 갇혀 버렸다. 손으로 밀어내고 허리를 흔들어 봐도 수영이 워낙 세게 껴안은 탓에 버둥거리는 몸짓밖에는 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엉덩이 골 사이로 다리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오기에 방어하려고 붙잡았더니 느낌이 이상했다. 다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물렁물렁한데. 손을 더 위로 더듬어 보자, 버섯처럼 둥근 외곽이 만져졌다.
“미친.”
자신이 만지고 있던 물건의 실체를 알게 된 진호가 황급히 손을 뗐다. 맞아. 이 새끼 좆은 평범한 사이즈가 아니었지. 짐승도 아니고 잘 때도 세우고 있냐.
“으음.”
진호의 손이 멀어지자 수영이 눈을 찌푸리더니 배를 누를 듯이 밀착했다. 뜨거운 기둥이 엉덩이 골 사이를 찔렀다. 미치겠네. 진호가 뜨거워지는 뺨을 손바닥으로 차게 쓸었다. 이번엔 왜 서고 지랄이야. 아래가 묵직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진호가 상반신을 반대로 틀었다. 제 고추가 잘못된 대상에게 반응하기 전에 정면으로 밀어낼 참이었다.
“힉.”
어찌해서 겨우 마주 보게 됐는데, 팔을 있는 힘껏 뻗어도 수영이 밀려나지 않는 바람에 반쯤 선 성기가 수영의 것에 닿은 채로 안긴 형상이 되었다.
이래서야 상황만 나빠질 뿐이잖아. 때와 장소를 분간하지 못한 분신이 바짝 허리를 세우며 욕망을 뽐내고 있었다. 다 망했어. 이젠 돌이킬 수도 없다. 진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밀어내려고 애쓰느라 축축해진 이마에 수영의 가슴이 닿았다. 수영이 굳은 진호의 등을 끌어당기자, 허리가 움직이며 맞닿은 성기가 예민해진 하반신을 문질렀다.
“하읏.”
절로 터져 나온 신음에 되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선을 올리니 수영은 한없이 편안한 얼굴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 상황에 잠이 오냐. 눈을 부릅뜬 진호가 늘어진 미간 사이를 검지로 꾹 눌렀다. 매끈했던 수영의 이마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졌다.
“풉.”
그게 웃겨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이어진 수영의 잠꼬대에 진호의 미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혀엉…….”
수영이 움찔거리더니 맞닿은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면바지를 사이에 두고 딱딱해진 두 성기가 천천히 비벼졌다. 등을 타고 오르는 아찔한 감각에 진호가 수영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으응…….”
입술 새로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다물며 진호가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미 축축해진 팬티가 흘러내린 액체로 끈적거렸다. 그 속의 제 분신을 잡아 쓸어 올리니 손등 위로 열망의 흔적이 여지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지간히도 쌓였나 보네. 살짝 만지기만 했는데 오줌이라도 싸는 것처럼 쿠퍼액이 줄줄 흘렀다. 진호는 찰나의 쾌감을 떨치지 못하고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흣…….”
고장 난 건 고추가 아니라 머리일지도 모르겠다. 자는 짠돌이 앞에서 몰래 자위라니.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벌일 리가 없다. 하지만 제 것을 붙잡은 손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미끄러운 표면을 쓸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이성은 쉽게 무너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짜릿함이 복잡한 머릿속을 잠식해 버렸다. 진호는 수영의 가슴께를 붙잡은 채 불덩이 같은 열기에 허덕였다. 성기에서 묵은 체액이 울컥거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간간이 수영이 내뱉는 숨결이 머리맡에 닿아 이마를 간질였다. 타인의 존재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역설적이게도 흥분이 고조되었다. 자신이 지금 하는 짓이 뭔지 똑똑히 자각하라는 질책 같아서.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은 고양감에 진호가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막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진짜 미쳤나 봐. 페니스를 비비는 손짓이 점차 다급해졌다.
“읏, 하아.”
그간 짠돌이에게 시달리느라 남자를 만나지 못한 탓이다. 잠들어 있던 성욕이 뜻하지 못한 자극에 부딪혀 깨어났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짠돌이 거라고 해도 그렇게 큰 게 아래를 비벼 대는데 어떻게 참냐고. 선 채로 잠들 수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거다. 진호가 합리화를 하며 허리를 떨었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읏……!”
페니스가 금방 안의 것을 쏟아 냈다. 손바닥을 펴 보니 질척이는 정액으로 흥건했다.
“하…….”
한동안 연애는커녕 파트너도 없었지. 얼마나 고팠으면 때와 장소도 못 가리고 이 지경이냐. 막 성에 눈뜬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진호가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며 내려간 바지를 추켜올렸다. 그래도 짠돌이한테 안 들켜서 다행…….
“형?”
씨발.
“뭐 해요. 지금?”
씨발. 씨발. 씨발.
타이밍 한번 뭐 같네. 속으로 온갖 욕을 쏟아 낸 진호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둠 속에서 수영의 경직된 눈동자가 제 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하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 가지를 묻는 표정을 회피하며 수영의 옷깃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다. 설마 다 봤을까. 아니야. 못 봤을 수도 있어. 근데 저 눈빛을 보면 확실히 본 것 같은데. 어떡하지. 진호가 수천 가지 변명거리를 쥐어짜 내는 동안 물음표가 잔뜩 떠 있던 수영의 눈빛이 안정을 찾았다.
“아무것도 아니긴. 방금 제 앞에서 딸 쳤잖아요.”
“아, 아니. 그게.”
말을 해도 그런 식으로 표현해야겠니. 뭐, 딸 친 건 맞는데, 그게 다 사정이……. 뭐라고 해명을 해야 하는데 당황해 작동을 멈춰 버린 뇌가 의미 없는 단어만을 출력했다. 아, 씨. 이게 아닌데. 진호가 울상을 지으며 수영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저질이네요. 형.”
“저기, 일단 설명을…….”
“자는 사람을 반찬으로 삼다니.”
응? 손을 좌우로 내젓던 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그것도 모자라서 또 세우다니. 변태.”
급하게 올린 탓에 팬티 위로 반쯤 나온 고간이 뭉툭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병원을 가야겠다. 완전히 맛이 갔네. 눈치 없이 고개를 드는 제 페니스를 향해 진호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한 발 뺐는데 아직도 부족해요?”
수영이 애매하게 선 물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속옷 위로 손을 올려 살며시 쥐었다.
“도와줄까요?”
손바닥으로 살살 쓸어 올리는 손짓에 진호가 눈가를 움찔 떨며 수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저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윽……!”
진호가 말릴 새도 없이 수영의 손이 튀어나온 성기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양손으로 수영의 손목을 쥐고 떼어 내려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잠깐, 내 말 좀…….”
진호가 허리를 뒤틀며 탈출을 시도했다. 이러다 빼도 박도 못하고 당한다. 자위한 걸 들킨 것도 모자라서 남의 손에 가 버리는 수치까지 떠안을 수는 없는데, 마음과 달리 손의 힘은 풀어지기만 했다.
“으읏!”
수영이 아예 속옷 안에 손을 넣어 버린 탓에 등이 굽어 들었다. 제 것이 아닌 타인의 살갗에 닿는 그 감촉이 너무나 생생해서 골이 어찔했다. 말려야 하는데 입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소리만 터져 나왔다.
“아, 흐으, 그, 마안…….”
“그만해요?”
그 소리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수영은 친절하게 되물으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눈, 코, 입, 하나하나 뜯어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아래로 숙였더니 다른 손이 뺨에 닿았다.
“진짜 그만해요?”
“으읍, 흐…….”
단순히 문지르는 동작뿐인데도 한껏 민감해진 비부는 극적인 쾌감을 맛보았다. 다시금 액이 흐르는 선단을 수영이 엄지로 훔치자 발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진호는 수영의 손목을 그러쥔 채 머리를 흔들었다.
“흣, 그만…….”
수영이 페니스를 누르며 거세게 손을 움직였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격해지자 진호가 흔들리는 중심을 잡으려 수영의 팔뚝을 붙잡았다.
“두, 으응, 두지 마…….”
즉시 멈춰야 한다는 양심과 계속했으면 하는 욕망의 틈에서 갈팡질팡하던 진호는 결정을 포기하고 수영에게 저를 내맡겼다. 생각을 버리니 뇌 속이 아래를 데우는 열기로 가득 찼다.
“하, 으읏…….”
이렇게 좋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전신의 감각이 요동쳤다. 이제까지 여러 남자의 손을 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인데도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봐요.”
수영이 수그러드는 얼굴을 잡아 올리더니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을 볼과 눈가를 쓸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이 흐릿한 시야에 담겼다.
그 시선에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를테면 새벽을 여는 창가의 햇볕 같은, 그런 따스한 무언가. 마치 신현우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을 무렵, 데이트에 가기 전 옷차림을 확인하면 거울 속에서 늘 보이던 제 모습 같았다.
“형.”
수영이 왜 그런 다정한 눈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제 눈에는 꼭 그래 보였다. 뜨거운 손끝이 눈 밑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하으……!”
뜨거워진 손바닥이 쏟아 낼 듯 꿈틀대는 제 기둥을 세게 쥐었다. 수영의 팔을 붙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읏, 아아……!”
눈앞이 깜깜해지며 저릿한 감각이 요도를 타고 흘러나왔다. 또 한 차례의 절정이 지나자 기진맥진한 진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수영의 어깨에 묻었다.
“하아, 하.”
진정시키려는 듯, 들썩이는 날갯죽지를 쓰다듬은 수영이 진호가 쏟아 낸 정액으로 축축해진 손을 신기한 듯 쥐었다 폈다. 질척이는 액체를 주물대더니 혀로 손바닥을 슬그머니 핥는다.
“뭐, 뭐 하는…….”
늘어졌던 진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등을 세웠다.
“그걸 왜 먹어요?”
“맛있어 보여서요.”
수영이 태연한 낯으로 음,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서랍 위에 놓인 휴지를 뜯어 진호의 아래를 닦았다. 미쳤나. 이 또라이가. 진호가 경악하며 수영을 빤히 쳐다보는 동안 뒤처리를 끝낸 수영이 속옷과 바지를 올렸다.
“왜요. 형도 먹어 볼래요?”
수영이 손을 내밀자 입을 벌린 채 멍해졌던 진호가 등을 돌렸다. 이 새끼를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런 놈이 자신을 다정하게 봤다니. 잘못 본 게 틀림없다. 진호는 그렇게 아까의 상념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자려고요?”
대화를 포기한 듯 묵묵부답인 진호를 보며 픽 웃은 수영이 이불을 덮었다. 폭신한 천이 어깨를 감싸자 노곤한 기운이 정신을 지배했다. 슬슬 감기는 눈을 지켜본 수영이 갓난아기를 재우듯 어깨를 토닥였다.
“잘 자라. 우리 자기- 앞뜰과 뒷동산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자장가가 들렸다. 교묘하게 가사가 바뀐 걸 알아챘을 때는 이미 깊은 수마에 빠진 뒤였다.
* * *
해가 쨍쨍 내리쬐는 한낮의 공항. 선글라스에 검은 정장을 빼입은 한 남자가 한가롭게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한결같이 좆같네, 여기는. 뭐 바뀐 게 없어.”
다소 거친 말투와 달리 그의 입꼬리는 반듯하게 올라가 있었다. 기분이 좋은 듯 휘파람을 불며 건널목 앞에 선 남자의 뒤로, 신나서 뛰쳐나오던 여자아이가 그만 남자와 부딪치고 말았다.
“뭐야? 씨발.”
날카로운 음성에 놀란 아이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울먹이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저리 안 꺼져?”
“으앙!”
여자아이는 아픈 것도 잊은 채 일어나서는 부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인상을 찌푸리며 아이가 닿은 부분을 탈탈 털어 낸 남자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주소록을 뒤지다 찾은 번호로 전화를 건 그가 화면 위에 뜨는 낯익은 이름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반복되더니 기계 같은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더니, 저 대신 짐을 싣고 있는 기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뭐 해? 빨리 출발 안 하고.”
“예. 거의 끝나 갑니다.”
제 아버지뻘로 보이는 중년 남성에게 반말로 명령을 내린 남자가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들어가 앉았다. 헐레벌떡 트렁크에 짐을 실은 기사가 허둥대며 앞좌석에 앉았다.
“OO동 XX 호텔. 알지?”
“예.”
검은 세단이 도로 위를 달렸다. 남자가 삐딱하게 창가에 기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사가 룸 미러로 남자의 손에 쥔 것을 힐긋거렸지만, 남자는 괘념치 않은 듯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서진호……. 간만에 구멍 맛 좀 보겠네.”
남자가 근질근질해진 아래를 견딜 수 없다는 듯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씩 웃었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가와는 다르게, 검은 렌즈 뒤로 숨은 눈동자는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댕댕공 냥냥수』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