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댕공 냥냥수
2권
08.
“30분 줄 테니까 예상 문제 뽑아 놓은 거 풀어 봐요.”
책과 프린트물로 가득한 밥상 위에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한 페이지에 빼곡히 들어간 질문들을 보며 한숨을 쉰 진호가 뭉그적거리며 펜을 들었다.
‘마케팅 관리 철학의 변천 과정을 서술하시오’, ‘미시 환경 분석 방법인 3C 분석에 관해 서술하시오’, ‘BCG 매트릭스에 대하여, GE 매트릭스와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서술하시오’ 등등. 죄다 서술형으로 줘 놓고 30분 동안 풀라는 게 말이 되냐.
곁에 붙어 앉은 수영을 쏘아보던 진호가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띠며 펜으로 무언가를 메모하던 수영이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고개를 들었다.
“30분 안에 못 풀면 벌칙 있어요.”
“벌칙이 뭔데요?”
“글쎄요.”
진호가 쳐다보자 수영이 눈을 마주쳤다. 쓱 올라가는 입꼬리에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뭘까요?”
손이 올라오더니 삐죽 튀어나온 볼을 약 올리듯 쿡 찔렀다.
“아, 진짜.”
이 새끼가. 진호가 진절머리를 치며 수영의 팔을 쳐 냈다. 수영이 일찌감치 반응을 예상한 듯 아무렇지 않게 타이머를 들어 친절히 진호 앞에 놓아두었다.
“27분 29초 남았어요. 파이팅.”
파이팅은 무슨. 그 앞에다 중지를 살며시 올려 주고 싶은 심정을 누르며 이마를 짚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지. 그래. 이건 따지고 보면 서혜린 탓이다.
「또 학사 경고 맞으면 알지? 확실히 말해 두는데, 이번엔 도와주지 않을 거야.」
중간고사 안내 공지가 뜨기도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과외 구해 놨으니까 쌤이 시키는 대로 해.」
대학생이 무슨 과외를 받냐고 항의했지만 누나는 지난 학기 성적을 줄줄 읊으며 방어를 막아 냈다.
「군대까지 다녀왔으면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니? 네 성적표 보면 등록금으로 뭘 한 건지 감이 안 잡혀.」
학사 경고 맞은 건 한 번밖에 없는데. 그땐 새내기라 놀기 바빴고, 또 신현우랑 연애하느라 성적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은 하려고 시험공부는 열심히 했었다. 이러지 않아도 중간은 하는데. 억울해서 반박하려고 했지만 누나는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과외 선생님이란 게 짠돌이 새끼일 줄이야. 어차피 돈이 필요해서 하는 것 아니냐며 과외 따윈 필요 없다고 했지만 한사코 가르쳐 주겠다며 나선 건 수영이었다. 이 자식은 몸뚱이가 두 개라도 되나. 아르바이트를 몇 탕씩 뛰면서 과탑이라니. 경영학과 천재들은 모두 뒤졌나 보다. 수영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언가를 공책에 적는 동안 힘껏 째려본 진호가 대충 답변을 끄적였다.
“……?”
수영이 설명해 준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짜깁기해서 써 내려가던 중, 무릎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있어 떨어뜨렸다. 그랬더니 다시금 따뜻한 체온이 따라왔다.
“뭐예요?”
“뭐가요?”
대놓고 무릎을 굽혀 피했더니 아예 다리 위에 제 다리를 겹쳐 올린다. 무릎이 눌려 빼도 박도 못하게 돼 버렸다.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자 수영이 뻔뻔하게 타이머를 가리켰다.
“10분 15초 안에 다 쓸 자신 있나 봐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죠?”
혼잣말로 중얼거렸더니 수영이 짐짓 엄한 투로 타일렀다. 선생은 무슨. 제대로 된 선생은 학생한테 이런 짓 안 한다고. 진호가 제 위에 올라가 있는 수영의 무릎을 밀치며 타이머를 들었다.
“먼저 방해했으니까 벌칙은 무효로 해요.”
“이러면 더 힘들어질 텐데.”
수영이 진호가 쥔 타이머를 빼앗아 버튼을 누르더니 밥상 위에 올렸다. 남은 시간이 10분에서 5분으로 줄어들었다.
“5분 안에 마무리하시죠. 안 그러면.”
수영이 혜린의 연락처가 뜬 핸드폰 화면을 들고 보란 듯이 흔들었다. 치사하게 누나한테 이르기냐. 누가 촉새 아니랄까 봐. 진호가 눈을 세모꼴로 세우며 펜을 세게 쥐었다.
“4분 36초.”
수영이 타이머에 남은 시간을 읊으며 씩 웃었다. 아오. 이걸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수영과 자신의 체격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진호가 -저도 체구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작정하고 싸워도 수영을 이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보였다- 다급히 남은 문제를 풀었다. 이 기회에 좋은 성적이나 받고 누나한테서 과외의 ‘과’ 자도 나오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수밖에.
“……뭘 봐요?”
아무래도 이 새끼는 어떻게든 벌칙을 주려는 심산인가 보다. 아까는 끈질긴 터치로 방해하더니 이제는 끈질긴 시선으로 훼방을 놓고 있었다. 탁 소리 나게 펜을 내려놓은 진호가 한 손에 턱을 괸 채 자신을 감상하듯 쳐다보고 있는 수영에게 날 선 목소리를 내었다.
“왜요? 쓰던 거 계속 써요.”
수영이 손에서 떨어진 펜을 흘긋 보더니 타이머의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1분 10초. 그만큼이라도 더 감상하고 싶은데.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형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에 아쉬웠다.
“됐어요.”
그런 속셈을 눈치라도 챈 듯 진호가 답변을 쓴 종이를 내밀었다.
“흠. 채점해 보죠.”
수영이 김빠진 듯 식은 낯으로 프린트를 가져갔다. 진호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수영의 손에 들린 빨간 펜을 주시했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지. 아마 공부 못하는 이미지론 보이고 싶지 않은 심리겠지. 이 나이에 과외 받는 것도 서러운데 짠돌이한테 무시당하면 그만큼 서러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잘했네요. 근데.”
예상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린 수영이 눈가에 장난기를 띠었다. 그 순간을 포착한 진호가 주먹을 쥐었다. 대체 뭐라고 말하려고.
“반은 틀렸어요. 물어보는 주제에 대한 핵심이 빠져 있네요.”
“암기할 시간도 안 주고 대뜸 질문지부터 내밀었잖아요.”
떠오르는 대로 막 쓰다 보니 내용이 듬성듬성 빠진 건 당연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진호가 수영에게 타이머를 들어 보였다.
“시간도 지켰고요.”
“답은 다 못 적었죠.”
“다 적었는데요.”
진호가 프린트물을 똑똑히 보라며 수영의 앞으로 밀었다. 짠돌이 새끼가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들어. 당당하게 제 답변을 가리키는 진호를 비웃듯 수영이 손에 든 것을 돌려 넘겨주었다. 뭐야. 뒷면이 있었어? 진호가 수영이 보여 준 페이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반은 못 적었으니까 받아야죠. 벌칙.”
“어이가 없네.”
“어의가 없으면 죽어요.”
이 자식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다. 진호가 꾸역꾸역 화를 삼키며 목소리를 차분하게 낮췄다.
“……래서, 벌칙이 뭔데요?”
대체 뭘 생각했는지 들어나 보자. 진호가 팔짱을 끼며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수영이 해맑게 입을 열었다.
“나한테 말 놓기.”
“싫어요.”
“벌칙을 싫어서 하지, 좋아서 하나?”
“그거 말고 다른 거 말해 봐요.”
어쭈. 은근슬쩍 말 놓는 것 봐라. 진호가 손을 내저으며 눈가를 좁혔다. 이 자식, 이걸 빌미로 친한 척할 작정인가 본데 그렇게 흘러가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옜다 하고 짠돌이한테 한 번 져 주면 그 뒤론 시도 때도 없이 기어오를 거다. 그 꼴을 가만두고 보는 것도 못 견딜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거리를 두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잠깐이라도 사이를 좁혔다간 얼마나 약을 올릴지 떠올리기만 해도 열불이 올랐다.
“진호 형.”
“…….”
“진호야.”
그거 봐. 듣기만 해도 성질이 막 오르는 게…….
“수영아, 라고 불러 봐.”
진호가 따지려던 찰나, 수영이 진호의 뺨을 양손에 감싸 쥐고 눌렀다. 입가가 손바닥에 밀려 입술이 부리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이에, 머 하는.”
수영의 손목을 떼어 내려 붙잡은 채 말을 꺼내니 문장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눈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살벌한 기색을 띠고 있었지만 입술이 오물대는 탓에 귀여운 옹알이밖엔 되지 않았다.
“자. 따라 해 봐. 수영아-”
“시어요.”
“시어?”
수영이 뭉개지는 진호의 발음을 따라 하며 웃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진호가 수영의 손에서 벗어나려 고개를 비틀었다.
“아, 이거 노아-”
“나도 싫은데? 내 이름 부르기 전까진 안 놔줄 거야.”
볼록 튀어나온 볼을 손으로 눌렀다 뗐다 하던 수영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거렸다. 숙인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치켜든 얼굴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와. 이거 동영상으로 찍어서 남기고 싶네요.”
혼자서 생쇼를 다 해요. 싸늘하게 식은 눈이 보이기는 하는지 수영이 발갛게 자국이 남은 살을 주물럭거리더니 굳게 닫힌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벌렸다.
“진호야. 수영아, 라고 불러 봐.”
“…….”
“수영아. 이거 놔주면 안 될까? 이렇게 부탁하면 놔줄게.”
아랫입술을 엄지로 매만지며 수영이 진호를 보챘다. 그새 쓸데없는 문구가 추가된 건 덤이었다.
“얼른.”
요즘 유달리 짠돌이가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실없는 장난을 자주 치긴 했어도 무시하면 곧 잠잠해지곤 했는데, 이상하게 얼마 전부터 장난에 제동이 걸리지 않게 된 느낌이었다. 묘하게 스킨십도 잦아진 것 같고. 대체 뭐가 이 자식의 이상한 스위치를 켠 거야. 잔뜩 고양된 눈을 빛내고 있는 수영을 위아래로 훑던 진호가 조그맣게 소리를 내뱉었다.
“……아. 이거…… 안……?”
“더 크게 해 봐. 안 들려.”
“수영…… 아. 이것 좀 놔주면 안 돼……?”
한숨과 함께 말을 흘려보냈다. 짠돌이 놈한테 수영아, 라니. 한 번 뱉었을 뿐인데 소름이 돋았다. 수영은 만족한 듯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손은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 진호의 아랫입술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놔 달라니까요.”
“응. 알아.”
말귀를 못 알아들었나 싶어 재차 강조했지만 수영은 은은한 미소만 지은 채 손을 가만히 놓아두었다.
무엇이 계기였는지 알 것 같다. 그날 밤에도 짠돌이 놈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봤었다. 하는 짓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눈빛은 무슨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녹아내렸다. 그럴 거면 행동이라도 부드럽든가. 진호가 무표정으로 응수하며 뺨을 쥐고 있는 수영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이거 놓으라고.”
그때 아주 큰 실수를 한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급해도 짠돌이 손에 가는 건 아니었는데, 성욕에 눈이 멀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던 걸까.
“서진호.”
살이 몰려 빨개진 입술을 매만지며 수영이 조용히 불렀다. 진호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가라앉는 눈동자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입술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보이는데도, 툭 치기만 하면 떨어질 정도로 수영의 손아귀에 힘이 빠져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신체의 어느 것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성욕에 눈이 멀었다면 덮치는 쪽은 수영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다.
“키스해도 돼?”
입술 언저리에 속삭이듯 말을 뱉는 수영의 숨결이 닿았다. 잦게 뛰어오르는 맥박이 귓가를 둥둥 울렸다. 진호는 답을 미루며 이내 감길 듯 잠기는 수영의 눈을 보고만 있었다.
응, 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한 번은 실수였다고 해도 두 번이 되면 그건 실수라고 할 수 없다. 두 번이 되면, 그게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는 건 삽시간일 것이다. 열 번이 되었을 땐 이런 건 물어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스킨십이 자유로운 관계가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자신을 떠나 버릴 것이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엔 이 또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 여겼다. 좋으니까 가까이 있고 싶고, 만지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신현우를 만나고 깨달았다.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도 섹스할 수 있고,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보냈어도 연락조차 없이 제 앞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신현우와의 연애는 행복했던 기억보다 상처받은 기억이 배로 많았지만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쉬이 놓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노력을 해도 몸으로 얽힌 상대에게 마음마저 얽히지 않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신현우가 떠난 뒤로 관계를 가질 때는 절대 한 사람과 한 번 이상 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욕구만 해소하는 목적이었으니 그거면 족했다. 두 번이 되면 그건 가벼운 관계가 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혹시 착각할까 봐서 하는 말인데.”
일부러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 없이 시선을 피할 것만 같았다.
“그날 밤의 일은 별 의미 없는 거 알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던 수영의 눈매가 삐뚜름하게 접혔다.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듯했다.
“의미가…… 없어?”
상처받은 눈이었다. 2년 전의 자신과 똑 닮은. 심호흡하며 솟아오르는 잡념을 눌러 내린 진호가 턱을 꼿꼿이 든 채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 관계가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요.”
수영이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못을 단단히 박았다. 어느새 사이의 간격을 떨어뜨린 수영이 멍한 듯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관계가 뭔데요?”
질책보다는 질문에 가까운 투였다. 글쎄. 대체 무슨 관계라고 해야 할까. 갑을 관계이지만 갑이 을에게 신세 지고 있는 관계? 계약으로 묶였지만 대딸도 해 준 관계? 그것도 아니면 그냥 같은 과 선후배 관계?
“설마 아직도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지는 않겠죠?”
물어보는 수영의 눈에는 혼란이 사라지고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가슴 한편이 조금은 편해졌다.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이던 진호가 입술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아마도…….”
“그건 아니겠죠. 계약서도 버린 마당에.”
계약서를 버려? 진호가 벌어졌던 입을 닫으며 추궁하듯 눈꼬리를 올렸다.
“전에 카메라 가져오면서 들킬 뻔한 거 기억나요? 그때 실장한테 건넸던 거.”
웬 서류가 카메라 가방에서 나오기에 뭔가 했더니, 버릴 심산으로 계약서를 가져온 거였군. 진호가 의문을 해결한 듯 눈꼬리를 내림과 동시에 인상을 팍 썼다.
“중요한 문서를 왜 버려요?”
“형이랑 계약 같은 거로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전 더 가까운 관계가…….”
“가까운 관계?”
진호가 수영의 말을 끊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도 계약을 종료하기 전까진 엄연히 비즈니스 관계 맞아요.”
수영이 풀죽은 눈을 하고서 일어선 진호를 올려다보았다. 혼자서 설레발치더니 쌤통이다. 진호가 눈을 흘기며 밥상 위를 정리했다.
“그래도 수영 씨한테 뜻하지 않게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볼썽사납게 튀어나온 종이 더미를 밥상 위에 쳐서 반듯하게 각을 맞춘 진호가 펜과 함께 집어 들며 허리를 세웠다.
“친한 형 정도는 돼 줄게요.”
저도 많이 물러지긴 했나 보다. 짠돌이가 처진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져 오는 걸 보면. 마냥 신현우밖에 몰랐었던 자신이 겹쳐 보여서일까? 하지만 수영은 그런 애절한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다. 너무 제멋대로라 탈이지. 그렇다면 왜 계속 이 자식이 눈에 밟히는 걸까.
“와. 서진호-”
수영이 일어서며 손뼉을 쳤다.
“서진호?”
“……형!”
그새를 못 참고 기어오르려 하기에 면박을 주었더니 수영이 말을 잽싸게 고치며 와락 껴안았다. 팔에 걸려 있던 프린트 더미에서 몇 장이 아래로 팔락이며 떨어졌다. 애써 정리해 놨더니 다시 주워야겠네. 진호가 바짝 붙은 가슴을 떼어 내기 위해 허리를 비틀었다.
“이거 놓죠?”
“에이. 친한 사이에 야박하긴.”
수영이 등을 두드리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진호는 빠져나오기를 포기한 듯 얌전히 안겨 있었다. 요지는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것이었는데, 수영은 친하다는 단어에 꽂힌 듯했다. 말뜻을 정정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인제 와서 굳이, 라는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멍청하게 헤실대는 저 상판이 밉지만은 않은 걸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짠돌이가 꽤 마음에 들었나 싶었다. 친구 정도면 뭐, 괜찮겠지. 진호는 속으로 납득하며 수영의 가슴을 밀어냈다.
“형. 근데.”
의외로 수영이 순순히 물러나며 진호의 품 안에 든 프린트 뭉치를 집어 들었다.
“수업은 마저 해야죠?”
펜과 종이를 밥상에 내려놓은 수영이 진호의 양어깨를 잡았다. 도망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반원을 그리는 입매가 섬뜩했다.
“학점 4점대는 넘어야 하니까.”
“누나가 그랬어요?”
이 새끼는 눈치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 진호가 뜨끔해서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아쉽다. 자연스럽게 빠지기 좋은 타이밍이었는데.
“아뇨. 성적을 올려 달라고만 하셨지만,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수영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힘이 풀린 다리가 주르륵 내려갔다. 수영이 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무릎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4점대는 말도 안 돼요.”
“김 교수님 강의를 들어 봐서 대충 패턴을 알거든요. 저랑 오늘 밤을 불태우면 할 수 있을 거예요.”
밥상 위에 걸쳐진 손가락 사이로 펜이 끼워졌다. 얼떨결에 그것을 잡은 진호가 연신 싱글벙글한 수영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저 화상이 좋아질 뻔했는데 지금은 세상에 저런 악마가 없다.
“불태우는 건 무리고, 10시까지로 적당히 합의 보죠.”
“형이 하는 거 봐서요.”
“뭘 하면 되는데요? 애교라도 부려요?”
“오. 그거 좋네요. 한번 해 봐요. 고려해 보게.”
뭔 말을 못 하겠네. 진호가 펜을 주먹으로 쥐며 밥상 위로 눈길을 돌렸다. 짠돌이 앞에서 애교라니. 상상만 해도 구역질 난다. 후딱 문제만 풀고 끝내든가 해야지. 펜을 바삐 놀리는 진호의 머릿속에 짧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 친한 형 동생으로 지내도 괜찮은 걸까?
짠돌이가 기어오를 기회를 제 손으로 제공한 건 둘째 치고,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그 연유를 헤아려 보려다가 정신을 다시 문제지로 집중했다. 머리가 더 아파지는 건 질색이었다.
* * *
친한 형 동생으로 지낼 수 없다. 그것이 그날 밤 수영이 내린 결론이었다.
애인. 사랑하는 사람. 사전적 의미로만 받아들였던 단어가 형과 연결되자, 과녁처럼 심장에 꽂혔다. ‘좋아하는 형’이라는 개념 안에 가두기엔 부족했던 그 모호한 마음의 정의를 알게 된 것이다. 제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친한 사이가 아닌 애인 사이였다. 농담식으로 불렀던 자기라는 호칭은 사실 진심이 대부분이었다.
형을 친구가 아닌 연애 대상으로서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가슴이 벅차서 잠들기 힘들었다. 사귀고 싶은 사람이 생기다니.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진호 형이라니. 설렘의 여파인지 그날 밤 꿈에는 형이 나왔고, 잠에서 깨니 형이 자신을 보고 자위를 하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혹스러워서 피했을 것이나, 형이 저를 상대로 세우는 것이라면. 아랫도리가 터질 듯이 지끈거려서 참을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지 믿을 수 없어서 아직도 꿈속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형에게는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니. 그렇다면 형이 좆을 세웠던 상대도 자신이 아니었던 걸까. 설마 다른 상대에게. 결론이 거기까지 미친 수영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악력으로 아픈 손바닥보다 명치 깊숙한 곳이 다리미로 지진 것인 양 쓰라렸다.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기야?”
꽃다발을 사서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고백하는 게 좋을지, 촛불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로맨틱하게 고백하는 게 좋을지, 형에 대한 감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PPT로 이지적인 고백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던 것은 모두 시간 낭비가 된 꼴이었다. 형이 예상 문제를 푸는 동안 열과 성을 다해서 계획서를 썼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모든 게 끝나 버렸다.
“자기야? 내 말 듣고 있어?”
고백하기 전에 거절당한 것도 억울한데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수음한 형을 제 손으로 도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수영아!”
“아, 네. 사장님.”
수영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툭 튀어나온 생각들을 접어 넣었다. 빨간색으로 뽀글뽀글하게 파마를 볶은 중년의 남성이 얇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빈틈없이 목둘레를 감은 금목걸이가 찰랑댔다.
“갑자기 웬 죽상이야?”
“아닙니다. 하시던 말씀 계속하세요.”
수영이 잠시 내려놓았던 펜을 비장하게 집어 들었다.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아. 아무튼,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기합이 필요하다, 이거야.”
현철이 가락마다 반지가 끼워진 번쩍번쩍한 손을 서로 맞부딪쳤다. 상대의 생김새를 간신히 분간할 정도로 어두운 조명 틈에서 금니가 유난히 반짝였다. 현란한 무지개색 미러볼이 범상치 않은 이곳은 수영이 일하던 게이 바, 투나잇이었다.
진호에게 좋아한단 말 한마디 꺼내 보지 못하고 거부당한 수영은 곧바로 투나잇의 사장인 현철에게 연락을 걸었다.
「자기야. 혹시 끌리는 남자 생기면 꼭 말해 줘야 해? 내가 자기 연애만큼은 두 팔 다 걷고 도와줄게.」
게이 바에서 일할 적에 현철은 수시로 수영의 연애 사업에 관심을 두었다. 당시에는 제가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느낄 일이 있을까, 싶어 농담으로 넘겼지만 상황이 바뀌자 그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짝사랑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현철은 당장 찾아오라고 답했다.
「전에 보내 준 사진의 그 친구니? 세상에. 설마 했는데 우리 자기가 연애 고민을 하는 날이 오네. 내가 다 설렌다, 얘.」
현철은 다소 어지러운 얼룩무늬의 호피 셔츠를 펄럭이며 부산스럽게 수영을 맞았다. 수영은 2년간 고생했던 옛 직장에 대한 감회에 사로잡힐 틈도 없이 테이블에 공책을 내려놓았다.
「사장님. 남자를 꼬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형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앞으로 좋아하게 만들면 되니까. 설령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미래를 바꾸면 되니까. 그러니 섣불리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수영이 공책에 쓴 ‘기합’이란 단어 위에 여러 번 동그라미를 치며 결의를 다잡았다.
“기합은 충분한데. 그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죠?”
“직방인 방법이 있지.”
현철이 대단한 내용이라도 되는 듯 수영에게 상체를 바짝 붙였다.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수영이 숨을 참으며 귀를 기울였다.
“무조건 자빠뜨려.”
“네?”
수영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뒤로 떨어뜨렸다. 현철이 시험의 필승 비법을 짚어 주는 스타 강사처럼 검지를 쳐들었다.
“남자는 자고로 욕구에 약한 생물이라, 자기가 작정하고 한 번 천국 보내잖아? 그러면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야. 내 말 믿어.”
“그렇지만…….”
“그 한 번이 어렵긴 하지. 하지만 자기는 전혀 걱정할 게 없어. 날 찾아왔으니까.”
현철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그 친구는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수영이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전에 형이 이상형을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섹시한 스타일?”
“그럼 볼 것도 없네.”
현철이 시시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공책 위를 맴돌고 있는 수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기야. 이건 아무한테나 안 가르쳐 주는 건데, 잠깐 귀 좀 대 봐.”
수영이 미심쩍은 눈으로 현철을 훑더니, 뭐라도 건질까 싶어서 마지못해 옆얼굴을 가까이 댔다.
“……?!”
한동안 현철의 설명을 듣던 수영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말을 마친 현철이 뿌듯한 듯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아무한테나 알려 주지 않는지 알겠지? 이 바닥에서 30년 넘게 구르면서 터득한 특별 노하우니까 너만 알고 있어야 해.”
“그게 정말 가능해요?”
수영이 곧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걸 거기에 넣었는데, 그걸 또다시 넣는다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것을 입에 물린 채로……. 저도 성인이라 알 건 다 안다고 믿었는데 현철이 알려 준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신세계였다. 무슨 뜻인지 절반도 못 알아들었지만 이해하고 싶진 않았기에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가능한지는 직접 해 보면 알게 될 거란다.”
현철이 알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를 보듯 수영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웬만하면 평범하게 다가가고 싶은데.”
“이 순진한 영혼을 어떡하니? 자기야. 남자를 꼬시고 싶다며. 그러려면 이것만큼 좋은 게 없어요.”
현철이 손가락을 오므려 둥그렇게 만든 뒤 다른 손의 검지를 들어 그 안을 쑤시는 시늉을 했다. 적나라한 표현에 수영이 헛기침하며 현철의 손을 잡아 내렸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
현철이 두 팔을 벌린 채 어깨를 으쓱였다. 게이 바 아니랄까 봐, 과연 짝을 지은 남성들이 끈적한 음악에 맞춰 서로를 더듬고 있었다. 일할 때는 남 일이라 여겨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달랐다. 저와 진호 형의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만지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좋아한다는 것을 의식한 순간부터 물 흐르듯이 사고가 그쪽으로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뽀얀 살결을 제 손안에 가두고 마음껏 주무르고 싶었다. 그때처럼 달뜬 탄성을 지르게 만들고 종국에는 빨갛게 익은 얼굴로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형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사정이었다. 진호 형은 다른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거기에 성적인 관계도 포함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키스도 거부했는데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을까? 장난삼아 할 수 있는 뽀뽀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에겐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형이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왕이면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그런 수영의 결심을 모르는 현철이 말을 덧붙였다.
“잘 모르겠으면 참고 자료를 보내 줄게. 내 러브러브 컬렉션인데 이걸 그 친구랑 같이 보면 해결될 거야.”
“아니, 사장님. 안 보내 주셔도 돼요.”
수영이 말리려고 하자 현철이 손을 피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냐. 사양 말고 받아.”
“진심으로 괜찮은데.”
현철의 애장품이라면 그 수위를 알 만했다. 그런 거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 전 고용주인 데다 제 아버지뻘인 현철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수영이 어쩔 수 없이 손을 물렀다. 받는 척만 하고 나중에 지우든가 해야지.
현철이 무언가를 열심히 찾더니 전송 버튼을 눌렀다. 마법 소녀물에나 나올 법한 상큼한 알림음이 뾰로롱, 하고 울렸다.
“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해 봐.”
“네.”
건성으로 대꾸한 수영이 한숨을 쉬며 공책을 덮었다. 명쾌한 해답을 얻을 거라 기대했는데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싶었다.
“근데 자기, 그 친구랑 이미 잘되고 있는 중 아니었어? 접때 보내 준 사진에 있는 친구랑 다른 애야?”
현철의 질문에 잠시 말을 고르던 수영이 태연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네. 맞아요.”
사실은 그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인 데다 그 형이랑 진짜 애인이었던 적도 없지만요. 차마 진실을 뱉지 못한 수영이 떨떠름하게 입 안을 혀로 훑으며 씁쓸함을 삼켰다. 구구절절이 제 사정을 말하기도 귀찮았고, 혹여 형에게 불똥이 튀어 카메라를 회수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다.
“어머. 그렇게 안 봤는데 카사노바네? 이 남자 저 남자 다 홀리고.”
현철이 과장되게 어깨를 떨며 스르륵 무릎을 세우는 수영을 멈춰 세웠다.
“이대로 가려고?”
“뭘 더 해야 해요?”
수영이 미간을 좁히며 공책을 집었다. 그대로 가방에 집어넣는 모양새를 지켜보던 현철이 수영의 손목을 당겼다.
“계약서 써야지.”
“계약서는 왜요?”
“내가 맨입에 특급 비밀을 알려 주겠니? 좋은 걸 받았으면 그에 맞는 대가를 줘야지.”
“사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서울에선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속담을 여러 번 경험해 본 저지만, 그걸 사장님한테 당할 줄은 몰랐다. 수영이 냉정하게 현철의 손을 잡아떼었다.
“전 여기서 일 안 해요.”
“정말? 전에 받은 월급의 두 배를 준다고 해도?”
“안 돼요.”
“그럼 세 배는?”
“그…….”
이전 월급의 세 배라면 혜린에게서 받는 월급보다 많았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하려던 수영이 머뭇거리다 의지를 굳혔다.
“……래도 안 돼요.”
돈에 정신이 팔려 진호 형을 잊다니. 남수영. 실망이다. 그런 각오로 형을 꼬실 계획이라면 이미 글렀어. 수영이 찰나의 시간 동안 고민한 자신을 자책하며 가방끈을 쥐었다.
“아깝네. 자기 보러 오는 손님들 때문에 수입이 짭짤했는데.”
현철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수영을 놓아주었다.
“조언 감사했습니다.”
수영이 허리를 꾸벅 굽히며 출입구로 나서는데, 현철이 뒤에서 말을 던졌다.
“자기야. 가기 전에 팁 하나 주자면.”
수영이 발걸음을 멈추고 현철을 향해 뒤돌았다. 손가락에 낀 굵은 금반지가 빛을 내며 현철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특별한 방도를 찾기보다 네 마음대로 따를 때가 정답인 경우가 있어.”
“마음대로요?”
“네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지.”
솔직하게 고백하면 망할 거 같은데. 제가 친해지려 할 때마다 싫어하는 진호를 수없이 봐 온 수영이 수긍할 수 없는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아마 형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되지 않을까.
“어째서요?”
“그런 게 있어.”
현철이 손깍지를 끼며 수영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다시 일을 시켜 보려는 속셈도 있었지만 그 전에 수영은 정이 들었던 직원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듯하지만 정작 흥미는 보이지 않는 수영의 연애 사업에 유독 관심이 갔다. 설명해 봤자 이런 쪽으로는 경험이 없는 수영이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기에 말을 줄였다. 이런 타입은 일일이 계산해서 행동하는 것보다 마음 가는 대로 던졌을 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니까.
“그 친구랑 다음에 가게 놀러 와! 내가 비싼 술 대접할게!”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뒤돌아서는 수영을 향해 외친 현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생만 하던 우리 수영이 인생에 꽃필 날이 머지않았군. 근거 없이 긍정적인 예감을 품으며 현철이 듬직한 등을 향해 행운을 빌어 주었다.
“후.”
바를 나온 수영이 짧은 숨을 뱉어 내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연애 상담을 받으러 갔다가 성교육만 잔뜩 받았다.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사장님 외에 이런 걸 물어볼 사람도 없고, 결국 답은 이것뿐인가. 수영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며 핸드폰을 들어 포털 사이트 검색창을 켰다.
[남자 꼬시는 법.]
검색 버튼을 눌러 가장 상위에 뜨는 블로그 주소로 들어갔다.
잇님들~~ 봄입니다!
꽃이 피면서 마음도 괜히 선덕선덕해지는 계절이죠.^^
길거리에서 팔짱 끼고 다니는 커플들을 보면서 내 짝은 어디에 있나, 그런 생각 많이 하셨죠?
저도 요즘 옆구리가 많이 시리더라구요ㅠㅠ
나이가 차면서 남자 만날 일도 줄어들고……. 주변에선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이렇게 혼자서 늙어 죽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흑흑.
그래서 방법이 뭐라는 거야. 글을 찬찬히 읽어 가던 수영이 못마땅한 듯 스크롤을 내렸다.
연애하는 제 지인들은 이걸 강력 추천하더라구요. 남자를 꼬시는 비법은 바로~
흥미가 생긴 수영이 내려가는 화면을 멈추고 아래의 내용을 정독했다.
올리브일 페로몬 향수! 이것 하나면 당신도 커플!
엄지를 치켜든 채 윙크를 한 이모티콘이 마치 ‘다 해결됐지?’라는 듯 산뜻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광고 글이잖아.”
시간 아까워. 취소 버튼을 눌러 검색창으로 되돌아온 수영이 다른 페이지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첫 부분을 넘기고 중간부터 읽었다.
1. 상대에게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리액션 하자.
리액션을 잘해 주는 사람에겐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겠죠!
리액션을 잘하는 방법에는 뒷말 따라 하기가 있는데요. 메신저로 대화할 때, 상대가 하는 말끝에 ‘?’를 붙여서 다시 물어봐 주면 돼요. 참 쉽죠?
이건 꽤 쓸 만하겠네. 솔깃한 이야기에 수영이 홀린 듯이 나머지 내용을 읽었다.
2. 자신을 가꾸자.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선 외모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깔끔한 옷과 액세서리, 메이크업 등으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 보세요. 의외의 모습에 상대가 뿅 반하게 될지도 모른답니다!
블로그 글은 2번까지가 전부였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이것부터 따라 해 볼까. 의욕이 넘친 수영이 메신저 앱을 열어 진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뭐 해요?]
당분간은 답이 없을 줄 알았는데 문자를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 하지만 답장은 1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공부.]
못마땅한 기운이 글에서도 느껴졌다. 현철과 만나는 동안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랬더니 부루퉁하던 형이 떠올랐다.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하네. 입술을 삐죽이며 끄적이고 있는 광경이 쉽게 상상됐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수영이 블로그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렸다.
[공부?]
읽음 표시가 뜨더니 그 후론 답장이 없었다. 또 1분 늦게 보내려나 싶어서 기다렸는데 10분이 넘도록 무소식이었다. 어느새 버스에 오른 수영이 문자를 추가했다.
[저녁 먹었어요?]
이번엔 읽음 표시가 바로 뜨지 않았다. 공부에 집중했나 보네. 뒷자리에 앉은 수영이 핸드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창밖을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늘 형과 붙어 있던 탓에 메신저로 연락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카메라를 가져오려고 형 집에 침입했을 때 메시지를 받긴 했지만 늦게 본 탓에 제대로 된 답장도 못 보냈으니 그건 연락이라 보기 어려웠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연결 고리는 이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가슴이 설렜다.
[ㅇ.]
10분쯤 뒤에 답장이 왔다. 이젠 답도 귀찮은지 자음 하나만 달랑 있었다. 벌칙으로 말을 놓으라고 하긴 했었지만 대충 대답하란 뜻은 아니었는데. 잠깐 말 놓는 것으로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나. 제게는 친근하게 대해 줬으면 하는데 아직 형에게는 버거운 것 같았다.
[ㅇ?]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곧장 떴지만 역시나 답장은 없었다. 20분이 넘게 흘러도 마찬가지였다. 바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효과가 없는 건지. 블로그 글에 쓰인 걸 따라 했는데 큰 성과는 없었다. 그래도 형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지.
-다음 정류소는 명문대 입구입니다.
익숙한 풍경이 눈앞을 스치자 하차 버튼을 누른 수영이 재빠르게 글자판을 눌렀다.
[금방 도착해요. 조금만 기다려요.]
어딘가 밋밋한 것 같아 윙크하고 있는 토끼 이모티콘을 같이 보냈다. 읽었다는 상태 표시가 뜨자마자 답이 왔다.
[이모티콘 금지.]
나름 잘 보이려는 수작이었는데 반응은 쌀쌀했다. 귀여운 걸 안 좋아하나? 그래도 존댓말을 생략하는 걸 보니 메신저로는 저를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낯가리는 것 같아도 천성이 착해서 내 뜻대로 따라 주는 게 형의 매력이니까.
“감사합니다!”
버스가 정차하자 답장을 보내려던 수영이 기사님께 인사를 건네며 후다닥 내렸다. 응답하듯 힘찬 소음을 내며 떠나는 버스를 뒤로한 채 수영이 주택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겨우 두세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이산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형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분명 불만 가득한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을 그 실물이 보고 싶었다. 역시 대답은 직접 보면서 하고 싶어. 좁은 골목길을 내달리는 발걸음이 그 언제보다 빠르게 바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