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그날 하루만 밤새웠어도 100점 맞을 수 있었는데.”
“난 할 만큼 했어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까워서 그러죠.”
“내가 괜찮다는데 뭔 상관이에요?”
흡사 신입생 때 성적을 보며 한숨짓던 누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자기 점수도 아니면서 웬 오지랖이야. 수영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등을 돌린 진호가 가방을 메며 현관으로 나섰다.
중간고사가 끝나면서 짠돌이와의 과외도 동시에 끝이 났다. 공부하라고 보챌 일이 없으니 편해질까 했는데 수영은 어제 나온 마케팅 관리 성적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고작 만점에서 7점 모자란다고 이 지경이면, 재무 회계에서 80점 받은 거 보면 기절하겠네. 진호는 새로 산 구두를 상자에서 꺼내 살포시 현관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난 주말에 백화점에서 고른 신상이었다. 중간고사 성적이 괜찮아서 혜린이 수영의 편으로 용돈을 보내 줬다. 이렇게 된 데에 짠돌이 덕이 컸다는 것이 못내 걸렸지만 -신기하게도 짠돌이가 뽑은 예상 문제 대부분이 시험 문제로 나왔다- 윤이 나는 가죽 구두를 보니 금세 마음이 풀렸다. 사진의 세계 수업에선 수영의 도움 없이 만점을 받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아침은요?”
“배 안 고파요.”
“수업 가긴 이른 시간인데?”
“난 먼저 갈 거니까 나중에 오든가 알아서 해요.”
구두는 요즘 그렇게 잘 나간다는 IGN의 고딕 옴므 라인이었다. 어렵게 구한 것을 개시할 생각에 눈이 빨리 떠졌다. 일찍 일어난 김에 구두와 같이 구매한 향수도 뿌렸다. 이제 나가서 이 향긋함을 만끽할 일만 남았다.
“밥은 먹고 가요! 형 먹으라고 토스트 구웠다고요!”
“됐다니까요?”
빳빳한 구두 뒤축을 힘겹게 밀어 발을 끼워 넣은 진호가 신경질적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힘차게 벌어지던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왜 안 열리지?”
여러 번 문고리를 흔들던 진호가 어깨에 힘을 주며 철문을 밀었다. 끼익, 하고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이거?”
커다란 택배 상자 세 개가 좁은 옥탑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진호를 따라 가방을 메며 밖으로 나온 수영이 토스트를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진호가 의문스러운 듯 택배 더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택배가 왜 이렇게 많이 왔지? 잘못 온 거 아니에요?”
짠돌이 성격에 이 많은 걸 주문했을 리는 만무하고. 그러니 답은 아랫집 택배가 잘못 온 것밖에는 없었다. 진호가 계단으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막은 택배 상자를 밀치며 주소를 확인했다.
“여기 맞는데?”
배송지를 읽다 놀란 진호가 재차 적힌 주소를 읽었다. 두 번을 봐도, 세 번을 봐도 여기가 맞았다.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것들 혹시 수영 씨가 샀어요?”
수신인 항목에 적힌 정체 모를 글씨체를 알아보기가 어려워서 수영에게 물었다.
“아뇨.”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에 의아한 진호가 상자에 꽂혀 있던 눈길을 수영에게 향했다. 무언가가 못마땅한 듯 찌푸려진 눈매가 생소했다. 심하게 찡그리지도, 그렇다고 편안해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꿈틀거림이었지만 잔뜩 굳은 얼굴이 그 의미를 짐작게 했다. 짠돌이가 이런 표정도 지었었나? 고개를 갸웃거린 진호가 발신인을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Kyunghee…… Im……. 임경희?”
죄다 영어로 적혀 있어서 식별하는 게 조금 늦었다. 필기체로 날려 쓴 글씨를 손으로 따라가며 발음하던 진호가 한국 이름임을 깨닫고 고쳐 읽었다.
“이 사람 몰라요?”
“몰라요.”
수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 모르는 건가? 배달이 잘못된 거라면 주인을 찾아야 할 것이고, 맞는 거라면……. 짠돌이 이 새끼, 한 대 맞아야겠는데. 진호가 확실히 하기 위해 아래에 쓰인 주소지를 읊었다.
“맨해튼 5번가……, 뉴욕시?”
갈수록 알 수 없어지는 택배의 출처에 진호가 확신한 듯 허리를 세웠다.
“정말 모르는 거 맞죠?”
“모른다니까요. 얼른 학교에나 가요.”
등을 떠미는 수영에게서 답을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수상한데. 하지만 시골 출신에 짠돌이인 수영과 뉴욕 맨해튼은 어떠한 관련도 없어 보였다. 미국에서 이 자식한테 택배가 올 일이 있겠냐마는, 아까 목도했던 심각한 표정이 잔상에 남았다.
“내용물을 보고 싶은데.”
“됐어요. 우리 것도 아닌데 봐서 뭐 해요?”
슬쩍 뒤돌아 택배로 향하려 했지만 수영이 덥석 가방을 잡아챘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발바닥이 층계에 닿았다. 난간을 잡아 균형을 잡은 진호가 한 소리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이 새끼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
“함부로 만지지…… 읍.”
벌어진 입술 새로 푹신한 빵이 쏙, 하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입 안을 채웠다.
“터치 안 할게요. 됐죠?”
수영이 손을 떼며 보란 듯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땅에 떨어질 듯, 입에 물린 채 덜렁대는 토스트를 진호가 어쩔 수 없이 제 손으로 잡았다. 수영은 한술 더 떠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안 내려가요? 학교 일찍 간다면서요.”
“…….”
화내는 것도 귀찮아진 진호가 입에 든 것을 우물우물 씹으며 층계를 내려갔다. 쓸데없는 데 힘쓰지 말자. 손에 든 토스트가 수영이라도 된 양 힘껏 물어뜯으며 핸드폰을 켰다.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몰래 고급 택시를 부른 진호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잠시 후 기함할 수영을 기대하며 진호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왔어요?”
택시에서 내려 강의실에 도착하니 수영이 앞쪽에 자리를 잡은 채 환하게 반겼다. 분명 택시를 탄 건 저 혼자인데, 걸어서 오겠다던 수영이 한발 더 빨랐다. 심지어 택시를 타겠다는 발언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이걸로 긁으라면서 카드도 내주었다. 뭘 잘못 먹었나. 짠돌이가 이럴 리가 없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진호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수영의 옆에 앉았다. 계획대로 택시를 타고 편하게 왔는데 진 건 저인 듯했다.
“서비스의 4대 특성으로는 무형성, 비분리성, 이질성, 소멸성이 있는데…….”
정각에 딱 맞춰 들어온 김 교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진호 역시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김 교수의 강의를 흘려들으며 공책에 낙서를 끄적였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 카메라를 빼곤 전부 놓고 온 탓에 노트북을 새로 사기 전까지만 공책을 쓴다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여태껏 쓰고 있었다. 쓰다 보니 노트북보다 공책이 편한 것도 있었다. 가령, 지금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옮길 수 있다든지. 창밖으로 펼쳐지는 벚나무의 향연을 종이에 옮기며 떠오르는 사진의 콘셉트를 적었다. 따뜻한 봄. 길바닥에 흩어진 꽃잎. 구도는…….
[부감?]
수영이 공책 끄트머리에 댓글처럼 조그맣게 글자를 써넣었다. 멀뚱히 글을 보던 진호가 의미를 깨닫고는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아래로 내려다보는 샷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나저나 언제부터 읽고 있었던 거지? 괜스레 창피해진 진호가 그 밑에 답을 썼다.
[신경 꺼요.]
이러다 또 김 교수한테 걸리면 그땐 어떤 벌을 내릴지 모른다. 전에는 억지로 발표를 시켰으니 이번엔 더한 것을 시킬지도.
[메신저로는 말 짧게 잘 쓰던데.]
제 말은 귓등으로 듣는지 수영은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그냥 편하게 말 놓지 그래요?]
[내가 왜요?]
[아님 나만 놓을까?]
펜을 들고 있는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건 곤란한데. 문자에서 존댓말을 쓰지 않은 건 귀찮아서였다. 안 그래도 짠돌이가 잔뜩 쥐여 주고 간 정리 노트를 암기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정성스럽게 말을 높여 줄 성의 따윈 없어도 된다고 판단했다.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응?]
펜이 멈춘 사이 수영이 말을 덧붙였다. 섣불리 응하기엔 난감해서 눈을 빤히 쳐다보자 수영이 재촉하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진호가 망설이듯 손가락 사이에 걸친 펜대를 쥐락펴락했다.
제가 유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친한 사이로 지내자고 자기 입으로 말했는데 굳이 말을 높여서 끝까지 거리를 두고 싶은 건 유치한 고집일지도 모른다. 정연에게는 말을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도저히 수영에게만은 ‘우리 말 놓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릴 적엔 친하지 않아도 또래이면 편하게 반말을 썼다. 새내기 때는 먼저 말을 놓으라며 상대에게 권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렇게 까다롭게 변하게 된 건 역시 상처받기 싫어서겠지. 이젠 다 잊었다고 여겼는데 신현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입 속이 쓴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진호가 씁쓸한 감상을 갈무리하며 볼펜 끝을 끌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번엔 수영의 펜촉이 갈 곳을 잃었다. 곧게 세워진 펜을 물끄러미 보다 시야를 높이자 수영이 미간을 좁힌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내가 마음이 안 좋잖아요.]
수영이 뒤늦게 답글을 휘갈겨 썼다.
[미안해요. 억지로 강요 안 할게요ㅠㅠ]
진하게 쓰인 ‘ㅠㅠ’ 옆에 눈물을 쏟고 있는 졸라맨이 그려졌다. 삐뚤빼뚤한 선을 보니 그림엔 영 소질이 없는 듯했다. 그게 나름의 애교처럼 느껴져서 진호가 풋, 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설명은 여기까지 하죠.”
갑자기 커진 김 교수의 언성에 진호가 퍼뜩 놀라며 공책을 제 쪽으로 당겼다. 수영과 딴짓하고 있던 게 들켰을 줄 알았는데 김 교수의 눈이 다른 곳을 향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여기서 수업 끝인가요?”
학생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농담을 던지자 강의실 안이 시끄러워졌다. 김 교수가 교탁을 두드리며 학생들을 조용히 시켰다.
“아뇨. 여러분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 강의를 일찍 끝낸 겁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김 교수가 멀리 있는 누군가를 향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손이 뻗은 방향을 따라 시선을 강의실 뒤쪽으로 옮기자 기다란 형체가 몸을 세웠다. 검은 정장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였다. 수업 전에는 없었는데, 김 교수의 강의 중간에 뒷문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저렇게 키가 큰 사람은 수영을 제외하고 학교에서 본 적이 없는데 당당하게 책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뒤통수가 아주 익숙했다.
“이리로.”
김 교수가 교탁 앞에 남자를 세웠다. 진호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허.”
하마터면 펜을 바닥에 던질 뻔했다. 이건 혹시 꿈인 게 아닐까. 진호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채 넋이 나간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이 친구는 여러분들의 과 선배이자, 미국에서 MBA를 조기 졸업하고 유명 기업 IGN에서 일하고 있는 신현우라고 해요. 여러분들의 취업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바쁜 일정 중에 이렇게 깜짝 방문을 해 줬습니다. 다들 IGN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봤죠? 최근에 명품으로 뜨고 있는 의류 브랜드죠.”
야. 들었어? IGN이라니. 대박.
어쩐지 태가 다르더라.
저 스펙에 피지컬도 좋아.
주변에서 학생들이 저들끼리 수군댔다. 김 교수가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학생들을 빙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기회는 찾기 힘드니까 남은 시간 동안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세요. 이제 현우 네가 알아서 진행해 봐.”
김 교수가 차례를 넘기듯 교탁에서 비켜나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김 교수님이 칭찬을 과하게 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닙니다. 교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했을 뿐이에요.”
가볍게 던지는 농담에 학생들이 까르르 웃었다. 일부는 ‘거짓말이죠-’ 같은 장난스러운 추임새를 덧붙이기도 했다. 이 좋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진호뿐이었다.
‘정말 신현우……?’
부정하려 해도 잘난 척이 몸에 밴 저 태도로 보아, 자신이 알던 신현우가 맞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았다는 것도, IGN에 취직했다는 것도,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도 죄 모르는 얘기였다. 저를 버리고 사라진 뒤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놈이 2년 만에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 제일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형. 저 사람…….”
전에 진호가 악몽을 꾸며 읊었던 이름임을 깨달은 수영이 걱정스러운 듯 진호를 살폈다.
“괜찮아요?”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진호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대놓고 경계하는 낌새에 수영의 인상이 덩달아 험악해졌다. 제게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남자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 말씀에 덧붙이자면, 지금은 일을 쉬고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IGN에는 학업을 마치는 대로 복귀할 예정이고요.”
강의실 곳곳을 느리면서도 예리하게 훑던 눈이 한곳을 향했다.
“여러분과 이렇게 볼 수 있어 참 반갑군요.”
진호와 시선을 마주친 남자가 씩 웃었다. 겉보기에는 참으로 근사한 미소였지만 진호에겐 소름 끼치도록 끔찍한 비웃음이었다. 그 미소 하나로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지난날의 고통이 무더기로 전신을 옭아맸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생애 마지막 사랑이라 자부했던, 그러나 결국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이 났던 아픈 과거가.
신현우가 돌아왔다.
무슨 정신으로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변하고 있는 신현우의 존재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혹시라도 또 눈이 마주칠까 걱정되어 공책에다 필기하는 척을 했다.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제 쪽에서 피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꿋꿋이 버텼다. 옆에서 수영이 안색이 나쁘다든지, 밖에 나가는 게 어떻겠냐라든지, 뭐라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악몽 같은 시간이 얼른 끝나기를 기다리며 기계처럼 펜만 움직였다.
한 시간이 10년 같았다. 수업 종료 시각이 지나서도 질문이 10분 이상 이어져, 김 교수가 급하게 강의를 마무리했다. IGN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들 일부가 남아 현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창백해진 진호가 휘청이며 강의실을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뒤따라 나온 수영이 곧 넘어질 것 같은 진호를 부축하며 물었다. 진호가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얘가 알아봤자 어쩌겠어. 괴로웠던 순간은 이미 지나갔고, 깜짝 방문이라 했으니 신현우를 앞으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소식 하나 없이 사라졌던 신현우가 인제 와서 나타났다고 한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신현우, 저 사람이랑 뭔가 있죠?”
하지만 수영은 쉽게 넘어갈 생각이 아닌 듯했다. 괜찮다며 부축한 손을 밀어내고 복도를 걷는데, 어깨가 붙잡혔다. 상태가 안 좋은 것을 감안한 것인지 붙잡는 힘이 약했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에요?”
“상관없잖아요.”
순간 울컥해서 말투에 짜증이 스며들었다. 짠돌이 놈이 어떻게 눈치를 챈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되새기고 싶지 않은 연애사를 끄집어내는 게 불편했다.
“신경 쓰여요. 형이 힘들어하니까.”
“진호야.”
우려가 담긴 수영의 음성에 다른 것이 섞였다. 단 세 글자만으로도 누구의 것인지 파악한 몸뚱어리가 움칠 떨렸다. 신현우였다.
“가요.”
진호가 소리의 근원을 향해 뒤돌아선 수영의 소매를 붙잡았다.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진호가 모른 체하며 수영을 이끈 채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오랜만이다.”
어느새 진호를 앞지른 다리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진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비켜.”
“그동안 잘 지냈어?”
“비키라고.”
“그새 더 예뻐졌네.”
되도록 피하고 싶었는데. 무시로는 떨어질 것 같지 않아, 고개를 치켜들어 눈을 똑똑히 마주했다.
“잘 지냈냐고?”
가까이서 본 신현우는 여전했다. 대학생이었던 때보다 옷차림이나 분위기가 어른스러워진 것은 있었지만 사람을 깔보는 듯한 눈빛엔 변함이 없었다. 한때는 저 기고만장한 자태를 성숙함으로 착각했었고, 거기에 끌렸었다.
“응. 아주 잘 지냈어.”
2년 전이라면 설렜을 것이다. 예쁘다는 말 한마디에 온종일 입가가 찢어져라 웃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살아서 눈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기뻐서.
“네가 걱정 안 해 줘도 될 만큼 잘 살고 있어.”
언젠가 신현우와 재회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생일 파티에서 알게 된 사이니, 상류층 모임이나 기업 행사에서 스치기라도 하지 않을까 희망했었다. 그래서 그토록 질색이었던 모임을 발이 닳도록 기웃거렸다. 아버지가 드디어 인맥 쌓기에 관심이 생겼냐며 좋아하는 건 싫었지만 그땐 신현우를 보고 싶은 열망이 더 컸다.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묻고 싶었다. 왜 나를 떠났는지. 그동안 내 생각은 했는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던 건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인지.
“그러니까 좀 꺼져. 안 보고 싶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느 것도 궁금하지 않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내 눈에 안 띄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삐졌구나? 그래. 섭섭할 만도 하지.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제 심정을 가벼운 변덕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어르듯 부드럽게 건네는 말투도, 전부 불쾌했다. 신현우는 아직도 저를 살살 달래 주면 웃고 마는, 사랑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던 애새끼로 아나 보다.
“…….”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 복도 반대쪽 계단을 통해 내려갈 참이었다. 더는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았다.
“거기 서 봐.”
“…….”
“진호야.”
무시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걷는데, 끈질기게 따라와 다시 앞길을 막았다.
“미안해. 용서해 줘.”
신현우가 난데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거침없던 다리가 갈 곳을 잃고 멈추었다. 제가 아는 신현우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낮출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상대가 저라면 더더욱.
“모두 내 탓이야. 그때 널 두고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일어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좋지 못한 과거가 떠오른 탓이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아버지가 급히 미국으로 보내는 바람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가기 전에 널 만나려고 집에도 몇 번 찾아갔지만 서 사장님이 하도 완고하셔서.”
복도를 지나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흘긋거렸다. 진호가 이를 악다물며 현우의 팔꿈치를 잡아 억지로 세웠다. 억세게 끌어 올린 탓에 허리가 살짝 들리나 싶더니 이내 아래로 떨어졌다.
“여기서 이러지 마.”
“계속 보고 싶었어. 미국에 있는 동안 뭘 해도 네 생각뿐이었어.”
“그만해…….”
메슥거리는 감각이 가슴께를 휘감았다. 가식뿐인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았다. 목을 타고 오르는 신물을 삼키며 진호가 주먹을 쥐었다.
과거에도 신현우는 미안하다는 말을 밥 먹듯이 했었다. 저를 버려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싫은데 섹스를 강요하고, 제 생일을 잊었어도 당연한 듯 넘어가고, 헤어지겠다고 울며 화를 내면 그제야 미안하단 한마디로 끝을 냈다. 하지만 신현우가 하는 짓은 그 후에도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MBA 졸업할 때까진 한국에 못 돌아온다고 해서. 그래도 널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미친 듯이 공부해서 졸업도 일찍 끝내고, 네게 잘 보이려고 IGN에 들어가고…….”
더는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아 버렸다. 신현우의 음성이 의미 없는 신호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거짓말이다. 입에 발린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신현우에게 지겹도록 속았다. 그러니 이것도 필시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야 하는데, 어떻게 저 눈은 저렇게 뻔뻔하게 진실을 가장할 수 있는 거지?
“그만하시죠.”
수영이 하얗게 질린 진호를 뒤로 빼내며 무릎을 꿇고 있는 현우의 앞에 섰다.
“진호 형이 곤란해하잖아요.”
현우가 적대적인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눈을 치켜떴다.
“네가 누군데? 진호 새 남자 친구라도 되나?”
“사람들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이러시면 민폐죠. 두 사람 관계, 공공연하게 다 떠벌리고 싶습니까? 개중에는 수업에서 당신을 본 학생들도 있을 텐데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 진호랑 무슨 관계냐고.”
“일어나시죠.”
“싫다면?”
“안 일어나시면 제가 억지로 일으킵니다.”
현우가 돌처럼 굳어서 꿈쩍도 하지 않자 수영이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 손을 쳐 낸 현우가 무릎을 세웠다. 수영을 노려보던 시선이 그 너머의 진호를 향했다.
“서진호. 네가 말해. 이 자식이랑 무슨 관계야?”
“말하기 싫다잖아요.”
수영이 진호가 보이지 않게 제 뒤로 꼼꼼히 숨기며 말을 가로챘다.
“너한테 안 물었는데?”
“계속 소란 피우시면 경비 아저씨 부를 겁니다.”
“경비?”
현우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불러서 뭐라고 할 건데? 사내새끼 둘이서 치정극이나 벌이고 있다고? 그러면 알아서 말려 줄 것 같아?”
“그 말은 저랑 싸우겠다는 말로밖에 안 들리는데요?”
수영이 현우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제 키를 훌쩍 넘어 다가오는 음영에 현우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뒤뜰로 가실까요?”
“여기도 괜찮은데? 왜. 쫄리나 보지?”
주춤한 현우가 밀리기 싫었는지 수영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 사이, 물러나 있던 진호가 수영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무시하고 가요.”
“하지만 이 사람이 형을…….”
“됐어요. 다들 점심 먹으러 가서 본 사람도 얼마 없어요. 괜찮으니까 제발 가요.”
남들에게 남자랑 사귀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수영이 끝내 진호에게 끌려왔다. 두 사람을 멀찍이 떨어뜨린 진호가 현우를 똑똑히 직시했다.
“다 지난 일이야. 나도 잊고 살았고. 그러니까 옛날 일은 들추지 말았으면 해.”
치미는 심정을 눌러 담아 차분히 전달하려 애썼다. 진심으로 마지막을 고하듯이.
“용서…… 는 어렵겠지만 노력해 볼게. 형도 이제 나는 잊고 다른 사람 만나.”
한때는 정말 좋아했었다. 그러나 풋풋하고 말랑했던 그 감정은 세월이 지나 사라져 버렸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곤 하지만 신현우를 다시 볼 생각도 없고, 다시 만날 생각은 더더욱 없다. 이렇게 우연히 맞닥뜨린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새삼 신현우가 제 마음에서 떠난 것을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해 보였던 사람이 지금은 길거리의 행인보다 못해 보였다.
“부탁할게.”
마지막이기에 거친 감정을 부러 드러내지도 않았다. 한 대라도 때리면 속은 풀리겠지만, 여지를 주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굳건한 기세에 현우도 더할 말이 없었는지 뒤로 물러섰다.
“먼저 갈게. 잘 살아.”
담담하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옆을 지나쳤다.
“진호야.”
수영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는데 현우가 불러 세웠다. 대응하기 싫어서 부러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 사실 IGN 그만뒀어. 복귀한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한국에 온 거, 공부하러 온 것도 있지만 너 보려고 온 거야. 나, 다 버리고 왔어. 너 하나 때문에.”
잠깐 멈칫한 진호가 발을 다시 움직였다. 방금 자신은 분명하게 이별을 고했다. 다소 일방적일지라도 마음속에서는 신현우와 종결을 맺은 지 오래였다.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대학원 준비하려고. 김 교수님에게 말해서 수업도 같이 들어갈 거야. 너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
헛소리가 들리지 않게 뛰어가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난 너 포기 못 해!”
신현우가 외치는 목소리가 귀에 닿았을 때, 제 발은 막 학교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제 주제에 고고한 척하기는.”
복도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현우가 교정으로 멀어지는 진호를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마뜩잖은 듯 입술을 씹었다. 옆에 덤이 붙어서 계획대로 풀리진 않았지만, 다루기 쉬운 상대이니 넘어오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씨발. 이거 비싼 건데.”
바닥에 무작정 꿇어앉는 바람에 더러워진 바지를 털며 현우가 투덜거렸다. 아버지가 지원을 거의 끊어 버려, 통장 잔액이 말이 아니었다. 대충 먼지를 털어 낸 현우가 복도 반대편으로 향했다. 김 교수를 만나야 했다.
* * *
경영관 건물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진호의 걸음이 느려졌다. 거세게 땅을 박차던 힘이 약해지더니 교정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형?”
진호를 따라오던 수영이 행여나 넘어질까 싶어 팔을 잡았다.
“후우.”
자동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신현우에 대한 증오와 식을 대로 식어 버린 애정 덕분인지 칼같이 끊어 내고 나올 수 있었지만, 뜻하지 않게 마주한 트라우마가 지친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진호가 이마를 짚으며 열을 식혔다. 이제는 골까지 아픈 듯했다.
“여기 앉아 봐요.”
수영이 진호를 나무 그늘이 드리운 벤치로 이끌자, 진호가 즉시 팔을 빼냈다.
“됐어요.”
“형. 지금 상태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
“아, 괜찮다고요!”
짜증이 치솟은 진호가 팔을 휘둘러 수영의 손을 뿌리쳤다. 아차, 싶어 눈을 맞추니 수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했다. 감정에 치우쳐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수영에게 화풀이한 꼴이 되었다. 아까도 다짜고짜 붙잡는 신현우 때문에 곤경에 처한 저를 도와주지 않았던가. 진호가 머쓱한 듯 제 팔을 쓸었다.
“미안해요. 머리가…… 조금 혼란스러워서.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형이 괜찮다면 어쩔 수 없지만…….”
수영은 할 말이 많지만 참는 것 같았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진호를 바라보던 수영이 정문 쪽으로 앞서 걸었다.
“집에 가죠.”
오후 수업이 줄줄이 휴강이라 점심은 수영의 집에서 해결해야 했다. 수영을 따라 저도 발을 옮기는데, 허리춤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선배. 지금 잠시만 시간 돼요? 저 학교에 있어요!]
정연이었다. 중간고사 때문에 한동안 정연과 만날 틈이 없었다. 전에도 정연이 몇 번이고 연애 작전의 일로 만나자며 연락했지만 그때마다 짠돌이가 내준 숙제 때문에 약속을 미뤄서 미안하던 참이었다. 마침 머릿속도 복잡하던 차에 집중할 게 생겨 잘됐다 싶었다.
[나도 학교야.]
[그럼 경영학과 과방으로 오실래요? 여기에 아무도 없어요.]
정연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알겠다고 서둘러 답한 진호가 수영을 올려다봤다.
“집엔 먼저 가 있을래요? 일이 있어서 과방에 들르려고요.”
“혼자서요? 왜요?”
수영이 염려됐는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양심에 찔린 진호가 눈을 피했다.
“신현우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건 아니죠?”
“아, 아니에요. 정연 후배를 만나야 해서.”
진호가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설령 신현우랑 만난다고 해도 짠돌이와는 상관이 없는데 그렇게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최정연을 지금 왜 만나요?”
“…….”
“알았어요. 신경 안 쓸게요.”
심란한 진호의 눈빛을 읽은 수영이 포기한 듯 두 손을 들었다.
“갔다 와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괜찮으니까 가요.”
어정쩡하게 발길을 돌린 진호가 고개를 돌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수영에게 외쳤다.
“기다리지 말고 가요!”
마지못해 한 손을 들어 OK 사인을 보내는 수영을 본 진호가 과방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수영은 멀어지는 진호가 점이 될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배! 진짜 오랜만이에요!”
과방에 들어서자 정연이 소파에 기대 있던 등을 세웠다. 자연스럽게 제 옆자리로 이끄는 정연에게서 이질감을 느낀 진호가 주춤하며 소파에 앉았다. 근데 얘 체대 아니었나?
“경영학과 과방엔 어쩐 일로?”
“한동안 수영 오빠 보려고 엄청나게 들락거렸더니 과대 오빠가 그럴 거면 편하게 들어오라 그랬어요. 이젠 저희 과방보다 편해요. 여기가.”
얼마나 왔으면 제 방처럼 있냐. 테이블엔 햄버거 세트를 늘어놓은 채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정연을 진호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햄버거의 포장지를 뜯은 정연이 진호에게 불쑥 내밀었다.
“점심 안 드셨죠? 제 거 반쪽 드실래요?”
“아니. 배는 별로 안 고파서.”
햄버거라면 좋아하지만, 후배인 정연의 것을 뺏어 먹고 싶진 않았다. 배도 그다지 고프지 않았기에 거절했다.
“혹시 먹고 싶으면 묻지 말고 먹어요. 여기 감자튀김 맛있어요.”
뜯은 포장지 위에 케첩을 뿌린 정연이 감자튀김을 집어 그 위에 찍어 먹었다. 악, 맛있어! 발을 동동 구르며 온몸으로 맛을 표현하는 정연에게 진호가 본론을 꺼냈다.
“수영 씨 때문에 부른 거지? 전에 둘이 만나려고 했는데 급한 일 생겨서 못 만났잖아.”
정연을 대신해 수영과 야구장에 갔던 주말을 떠올리며 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방금까지 신현우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었는데 정연을 만나니 저도 그 밝은 기운에 동화되는 것 같았다.
“아, 맞아. 그랬죠.”
정연이 뒤늦게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며 입에 든 햄버거를 우물우물 씹었다. 뜻밖에도 정연은 수영과의 데이트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보다 선배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뭔데?”
“혜린 언니랑 수영 오빠랑 사귀어요?”
“뭐?!”
뜬금없는 소리에 말문이 막혀 마른 입에 사레가 들었다. 누나가 짠돌이랑 사귀어? 그보다 얘는 누나랑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기침을 몇 번 뱉어 낸 진호가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아 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아니, 선배 찾으러 선배 집까지 찾아갔을 때 있잖아요. 그날 혜린 언니가 저를 집에 데려다줬거든요. 둘이 전부터 알던 사이 같아서 수영 오빠랑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몰라도 된다는 거예요! 수상하게!”
정연이 들고 있던 햄버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열변을 토했다. 아마 누나는 저와 수영의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일러두었을 것이다. 제약 회사 사장 아들에 경호까지 붙어 다닌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진호도 그 사실을 차마 밝힐 수는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단지 고개만 끄덕였다.
“별거 아닌 사이면 바로 말할 텐데, 답을 안 하는 걸 보면 보통 사이는 아니겠죠? 설마 비밀 연애라도……?”
정연이 애처롭게 콜라를 빨대로 빨아 마시며 울상을 지었다.
“하긴. 그 언니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고, 차도 있고, 예쁜 데다 성격도 똑 부러질 것 같고……. 제가 수영 오빠라도 저보단 혜린 언니를 더 좋아할 것 같네요.”
정연은 이미 수영과 혜린을 사귀는 사이로 단정 짓고 있었다. 누나와 짠돌이라. 애초에 혜린은 고등학생 때 이후로 남자와 사적으로 만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짠돌이는 맨날 저랑만 있어서 누굴 만날 환경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사이도 아냐.”
“그래요? 그럼 무슨 사이인데요?”
정연이 햄버거를 무느라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며 물었다.
“음. 둘은 나를 통해서 서로 알게 됐어.”
“선배 누나라서요?”
“그렇지.”
중요한 핵심을 빼긴 했지만 제가 수영을 경호원으로 고용하자고 혜린에게 얘기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심했는지 온화해진 정연의 기세가 금세 냉랭해졌다.
“그게 뭐라고 비밀이래요? 더 수상해.”
정연은 여전히 의심을 놓지 못했다.
“선배는 어때요? 그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류는 없었어요?”
이상한 기류는 자시고 두 사람이 연락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안 보는 사이에 몰래 한다고 해도 24시간 내내 제 곁을 지키는 짠돌이가 안 들키게 누나와 연락을 주고받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짠돌이가 그런 여우 같은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제가 자는 사이에 통화할 수도 있고, 메시지로 달콤한 대화를 속삭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짠돌이는 제가 악몽을 꾼 것을 누나에게 일러바친 전적이 있지 않았던가. 저랑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늘 누나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3년 동안 지겹도록 겪은 신현우가 그 예였다.
“그런 건 없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쓰라렸다. 그럴 일은 없다는 건 알지만, 신현우를 맞닥뜨리고 나니 울적해졌다. 담담히 이별을 고했고, 모두 끝난 일인데도 아픔이 구석구석 남아 있었다.
아직도 생생했다. 같이 잠자리한 뒤에도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락하던 신현우와, 제 생일에 바빠서 늦는다고 해 놓곤 클럽에 갔던 신현우와, 어떤 언질도 없이 저를 본가에 버려둔 채로 미국으로 떠난 신현우가.
“누나도 별 뜻 없이 한 말일 거야. 둘이 그런 사이 아니야.”
정말 아닐까? 제 안의 확신이 점차 힘을 잃어 갔다. 제가 말한 건 사실이 아니라 바람일지도 모른다. 짠돌이와 누나가 특별한 사이라면 오히려 좋아야 하는 건데. 무슨 이유로든 짠돌이와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은 건데, 한편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게 신현우는 이제껏 잘 숨어 있다가 왜 나타나서 싱숭생숭하게 만드는지. 진호가 속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흐음.”
정연이 미심쩍은 듯 햄버거를 느리게 씹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직접 물어봐야겠어요. 혹시 혜린 언니 번호 알려 줄 수 있어요?”
누나 번호를? 진호가 당황해서 정연을 빤히 쳐다봤다. 하기야 정연이 누나를 만났다고 해도 AE의 상무인 걸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친근하게 언니라고 부르는 거겠지. 그런데 왜 가까운 짠돌이에게 안 묻고 굳이 누나에게 묻지? 좋아하는 상대라 물어보기 힘든가? 궁금해진 진호는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이걸 계기로 정연이 수영과 자주 연락하게 되면 그것대로 골치가 아플 듯했다.
“개인 번호는 누나 동의 없이 어려울 것 같고, 대신 비서실 직통 번호 알려 줄게.”
“비서실이요?”
정연이 되레 놀라 햄버거를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보기보다 직급이 높아서 당황했나 보다. 기가 죽은 것을 보니 상대가 안 될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어쩐지 그때 기업 이미지니, 경호 직원이니 하더라니……. 뭐, 그것도 괜찮아요. 연락만 할 수 있으면.”
“그래. 얘기가 다 된 거면 먼저 가 볼게.”
신현우 일만 해도 벅찬데 짠돌이 일까지 헤아리려니 뇌가 과부하로 터질 것 같았다. 정연에게 연락처를 전송한 진호가 과방을 나가려고 허리를 세웠다.
“아아, 네. 선배도 점심 드셔야죠.”
정연이 같이 일어서며 배웅하듯 손을 흔들었다. 정연에게 힘없이 미소로 화답한 진호가 문을 열기 전, 말을 보탰다.
“비서실에 전화했을 때 안 된다거나 바쁘다고 하면 나랑 관련된 일이라고 전해. 그러면 금방 바꿔 줄 거야.”
오랜만에 봤지만 별 도움 없이 회의를 끝낸 게 미안해서 팁 아닌 팁을 전수해 줬다. 진호가 후련해진 낯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어.”
밀어내기도 전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어안이 벙벙한 사이, 진호는 문고리를 잡은 채 과방 밖으로 딸려 나왔다. 그 덕에 문 앞에 서 있던 커다란 형체에 머리를 부딪쳤다.
“오빠?”
정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턱을 들자 수영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게 박아서 빨개진 이마 위를 수영의 손바닥이 살살 문지를 때 즈음, 사태를 인지한 진호가 다급히 상체를 떼어 냈다.
“지,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설마 대화를 들은 건 아니겠지. 진호가 수영의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내가 형 두고 어디 가요.”
“밖에 계속 있었던 거야?”
정연이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앞으로 뛰듯이 다가왔다.
“건물 앞에서 기다리다가 형이 안 나오길래 과방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해맑은 얼굴을 보니 저와 정연의 얘기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진호가 안심하며 긴장한 어깨를 내리는 사이, 정연이 테이블에서 감자튀김을 가져와 수영에게 내밀었다.
“밥 먹었어? 햄버거 먹던 중인데 오빠도 같이 먹을래?”
“아니. 됐어.”
수영이 멀어진 진호의 팔을 잡아당기며 문밖으로 꺼냈다.
“난 진호 형이랑 먹을 거라서.”
“아. 으응.”
정연이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감자튀김을 든 손을 내렸다.
“우린 이만 갈게.”
“어, 어. 잘 가!”
정연이 어색하게 두 손을 흔들자, 수영이 진호를 복도로 끌었다. 정연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넨 진호가 문을 닫으며 수영을 따라 출구로 나섰다.
“점심 뭐 먹을래요?”
정문 밖으로 나온 수영이 건널목 앞에서 신호등의 파란불이 켜지길 기다리며 진호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안 먹어요.”
지칠 대로 지쳐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지만 입맛이 없었다. 집에서 잠이나 잘까. 여러 방안을 궁리하던 와중에 어깨에 걸친 무게를 감지한 진호가 수영의 손을 털어 내려 했다.
“이거…….”
“저기 파란불.”
진호가 신호등에 켜진 색을 확인하는 틈을 타, 수영이 허리에 팔을 감은 채 잽싸게 앞으로 끌었다.
“오늘은 집에서 고기 파티 해요. 내가 쏠게요.”
그거라도 먹고 힘내요. 이래서 군대는 어떻게 다녀왔대? 수영이 비실거리는 진호를 건너편 보도블록으로 옮기며 불평을 원천 차단했다. 자기는 군대에 다녀오지도 않았으면서. 적반하장에 발끈하며 진호가 반박했지만, 웃으며 화제를 넘기는 수영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 * *
“많이 기다렸죠? 이것저것 사 오느라고 늦었어요.”
수영이 무언가가 가득 담긴 커다란 장바구니 두 개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 누워 있던 진호가 부신 눈을 비비며 허리를 세웠다.
“자고 있었는데.”
진호를 옥탑방으로 데려온 수영은 쉬고 있으라며 안에 집어넣고는, 고기를 사 오겠다고 나간 뒤 무려 세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고기 사러 어디까지 갔다 온 거예요?”
점심은 일찍이 물 건너갔고 저녁 먹을 시간이 가까웠다. 수영이 가방 안의 재료들을 하나씩 꺼내며 뜯더니 싱크대 위에 정리했다.
“형한테 먹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찾기가 힘들어서요.”
소라도 잡고 왔나. 진호가 바닥에 흩어진 재료들을 같이 싱크대 위에 옮기며 마블링이 예쁘게 잡힌 고깃덩어리를 눈에 담았다. 많이도 사 왔네. 이걸 어떻게 다 먹어.
“내가 할 테니까 가만둬요.”
수영이 진호가 들고 있던 고기 팩을 빼앗아 한 손으로 죽 뜯었다. 비닐에 포장된 상추를 꺼내려 하자 그것마저 빼앗겼다.
“거.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수영이 안 되겠다는 듯 진호를 뒤에서 안아 방구석으로 끌고 갔다. 기력이 떨어져 반항하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진호를 이불보 위에 내린 수영이 엄한 투로 명령을 내렸다.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요. 금방 끝나니까.”
도와준다는데도 저러네. 포기한 진호가 바닥에 드러누워 수영이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마늘을 까고 고기를 먹기 좋게 썰어 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살던 집에서나 여기에서나 수영은 늘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항상 건강식만 고집해서 질릴 때도 많았지만 맛은 일품이었기에 투덜대지 않고 잘 먹었다. 또, 은근히 깔끔한 걸 좋아해서 집 안에 잡동사니가 많긴 해도 정돈이 잘돼 있었다. 얼굴도 –인정하기 싫지만– 단정하게 잘생겼고, 흔치 않은 체격과 몸매에다 가정적인 남자라. 짠돌이만 아니었어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달라붙지 못해서 안달이었을 텐데. 인기 많은 정연이 수영의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까닭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 눈으로 빤히 보면 난처한데.”
수영이 다듬은 재료를 커다란 접시에 보기 좋게 담으며 진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 거 같아서.”
“미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거 봐라. 아무래도 저 새끼는 저를 형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만만해 보이는 거야, 내가. 진호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욕을 뱉을 뻔한 걸 참았다.
“준비 다 했으니까 밖으로 나와요.”
수영이 힘껏 노려보는 눈을 향해 밝게 웃어 주고는 손질한 재료와 버너, 접시 등을 양손에 들었다.
“안 먹어요.”
퉁명스럽게 내뱉었더니 수영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현관으로 나갔다. 조만간 밖에서 우당탕하고 물건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후엔 고소한 고기 냄새가 열린 현관문 틈으로 흘러들어 왔다.
“고기 타기 전에 먹어요!”
수영이 밖에서 소리쳤다. 자존심에 끝까지 누워 있으려던 진호는 코로 솔솔 들어오는 고기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뭉그적대며 몸을 일으켰다. 허기진 배는 이기지 못하는 얄팍한 자존심이었다.
문밖으로 나오니 수영이 옥탑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 뒤로 차곡히 쌓인 택배 상자가 보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수영이 어느 틈에 정리한 모양이었다.
“저건 계속 저렇게 둘 거예요?”
적은 양도 아니니 주인이 있다면 찾아 줘야 할 터였다. 수영이 대수롭지 않은 듯 잘 익은 고기를 한 점 들어 진호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알아서 처분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자기가 알아서 한다니 그걸로 됐지, 뭐. 주인 찾아 주든 말든 앞으로 난 상관 안 한다. 강경한 수영의 태도에 진호가 택배 더미에서 관심을 거두었다.
“와서 맛 좀 봐요.”
수영이 고기를 올려놓은 진호의 접시를 내밀며 손짓했다. 배가 슬슬 고팠던 진호가 냉큼 맞은편에 앉았다.
“어, 이거. 토시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를 보며 진호가 눈을 치켜떴다. 소고기 중에서 양도 적고 가격대도 높은 부위인데. 수북이 쌓인 고기 탑을 보며 진호가 수영을 힐끔 쳐다봤다.
“비싼 건데, 이렇게 많이 사도 돼요?”
저도 양심은 있는지라 짠돌이 집에 붙어살면서 비싼 고기까지 얻어먹으려니 눈치가 보였다. 누나가 과외비니, 뭐니 해서 생활비를 두둑이 보내 주고 있겠지만 저를 떠맡고 있으니 아껴 쓴다고 한들 여기로 도망쳐 오기 전보다는 수입이 적을 것이었다. 게다가 근래에 수영은 제가 돈 쓰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도 않았다. 조만간 누나한테 이 자식 월급 좀 올려 달라고 하든가 해야지.
“지금 내 걱정 해 주는 거예요?”
수영이 노릇해진 고기를 뒤집으며 웃었다.
“걱정은 아니고, 궁금해서.”
어쩐지 쑥스러워진 진호가 접시에 놓인 고기 한 점을 입에 물었다. 기대했던 대로 연한 살이 살살 녹는 것이, 이곳이 천국인가 싶었다.
“맛있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씻어 놓은 상추에 파절임과 함께 싸 먹으니 맛이 환상이었다.
“잘 먹네.”
수영이 흐뭇한 듯 빵빵해진 볼을 손끝으로 쓸었다. 입이 막힌 진호가 눈을 흘기자 뺨 한가운데를 지그시 누르더니 손을 떼어 냈다. 질색하는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입 안에 가득 찼던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기다렸다는 듯 수영이 평상에 놓인 소주를 까서 종이컵 안에 따랐다.
“소고기엔 소주죠.”
그 말을 꺼낸 상대가 짠돌이라는 데엔 불만이었으나 심히 동의했다. 낮에 스트레스를 극한으로 받은 터라 이를 털어 낼 수단이 필요하던 차였다. 진호가 수영이 건네는 종이컵을 받아 한입에 들이켰다.
“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배 속에 탈탈 털어 넣은 뒤, 짙은 한숨과 함께 묵직한 심경을 흘려보냈다. 아무렇지 않으려고 종일 노력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긴 힘들었다.
“형. 고민 있죠?”
수영이 침울해 보이는 진호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확답을 듣지 않아도 그 원흉이 뭔지 짐작 갔다. 신현우.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과거의 일을 캐묻고 싶지는 않았기에 선택을 진호에게 넘겼다.
“고민이요.”
종일 가라앉아 있던 게 눈에 보였나 보다. 진호가 깨끗이 비워진 잔을 뚫어져라 보며 망설였다. 말해도 될까.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 속은 풀릴지도 모르지만 수영이 알게 되면 저를 어떻게 바라볼지 두렵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신현우와의 연애사가 까발려진 데 더해, 약해 빠진 속마음까지 보이면 그만큼 한심한 짓도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서…….”
진호가 소주를 빈 잔에 따르며 대답을 미뤘다.
“어떤 게요?”
물어보는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웠다. 술이 담긴 잔을 매만지며 고뇌에 잠겼던 진호가 수영과 눈을 맞췄다. 잔잔하면서도 강한 눈동자가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진호가 용기를 북돋으려는 듯 잔을 들어 술을 입 안에 담았다.
“사실…… 무서워요. 신현우를 다시 보는 게.”
털어놓고 싶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여전히 안 미덥긴 하지만, 경청하는 듯 제게 몰입한 수영을 보니 결심이 굳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했다.
“아까 얼핏 들었겠지만, 전에 나랑 사귀었던 사람이에요. 2년 전에 연락도 없이 사라졌는데 오늘 갑자기 나타난 거예요. 그 자식 때문에 아버지랑 사이가 틀어져서 본가에서 나오게 된 거고요. 남자 좋아하는 걸 들키는 바람에……. 아버지가 경호원을 붙이고, 본가에 끌고 가려는 것도 그 자식이랑 관련된 거예요.”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는 거북하지 않을까 싶어 도중에 표정을 살폈다. 종이컵을 쥔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매우 집중한 듯 보였다. 계속 말을 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연애할 때도 나한테 아주, 아주 많은 상처를 줬어요. 바람은 기본이고, 하기 싫은 걸 자꾸 요구하고……. 그때 받은 상처 때문에 가끔씩 힘들어요.”
빈 종이컵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좀이 아니라 많이 무서웠다. 신현우가 아니라 그가 가져올 심리적인 고통이. 신현우는 진심으로 나와 다시 만나고 싶은 걸까. 출셋길이 열린 꿈의 직장을 포기하면서까지. 신현우가 만약 조교가 된다면 김 교수의 수업 때마다 보기 싫은 낯짝을 봐야 했다. 그와의 관계를 끊었지만 과연 강제로 마주쳐야 하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시 만나면 싹 다 잊은 것처럼 외면하려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미운 정도 정인지……. 그 자식을 수업에서 보면 그땐 이보다 차갑게 할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증오도 미련이다. 용서하지 못하기에 놓지 못하는 것이다. 깨달은 현실에 진호가 컵을 꽉 쥐었다. 눅눅한 종이가 진호의 손안에서 볼품없이 구겨졌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안 미워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 자식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복한 모습만 보여 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술기운 때문인지 눈 주위에 열이 몰렸다. 제가 봐도 제 모습이 참 꼴사나웠다. 나이도 먹은 형이 구질구질한 옛사랑의 아픔을 잊지 못해 질질 짜고 있으니, 미련하다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짠돌이는, 남수영은 어떻게 생각할까. 너도 속으론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넌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너는 그래도.
“진호 형.”
거칠지만 따스한 손이 왼뺨을 살며시 쥐었다. 들어 올리는 방향을 따라 눈을 높이자 자신과 상반되게 편안한 얼굴의 수영이 보였다. 느긋하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그려진 미소가 되레 안정을 주었다.
“괜찮아요.”
잔잔한 파동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괜찮나? 정말 괜찮아? 동아줄을 붙잡는 것처럼 단단한 손목을 그러잡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진호를 바라보던 수영이 가까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뇌에 각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문장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수영이 빨개진 눈가를 엄지로 훑더니 씩 웃었다. 괜찮은 건가……? 아래로 처져 있던 진호의 눈이 동그랗게 세워졌다. 그 안에서 차오르는 생기를 발견한 수영이 진정된 어깨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수영이 균일한 속도로 등을 쓸어내리는 동안 진호는 품 안에 얌전히 갇혀 있었다.
수영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건 위험한 시도였다. 아무리 친하다 해도 이런 속 깊은 얘기를 꺼내는 건, 게다가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밝히는 건 힘든 일이었다. 날 때부터 남들과는 조금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진호는 사람이 얼마나 쉽게 바뀔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가까운 예가 아버지와 신현우였다. 섣불리 속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은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이런 얘길 꺼내면 남수영은 어떻게 반응할까. 남자가 이런 일로 벌벌 떠냐며 백안시할까. 아니면 갑자기 왜 그러냐며 회피할까. 언제 네 편이었냐는 듯 변해 버릴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영은 그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안에서 뭉쳐 있던 딱딱한 감정들이 녹아내렸다. 심장 부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진호가 수영의 넓고 커다란 등에 두 손을 올렸다.
“형. 걱정하지 마요.”
수영의 속삭이는 음성이 귓속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잊은 것 같은데, 나 형 경호원이에요. 우리 계약 아직 안 끝났잖아요?”
수영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진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미약하게 닿는 숨결에 수영이 같이 웃으며 더욱더 세게 진호를 껴안았다.
“그 새끼는 형 못 괴롭혀요. 보기 싫으면 아예 근처도 못 오게 해 줄게요. 왜 형이 피해요? 잘못한 건 그 자식인데.”
다소 과격한 감이 있지만 묘하게 힘이 되는 말이었다.
“계속 미워해도 돼요. 멀쩡해 보일 필요도 없어요.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말하기도 싫으면 내 소매를 잡아요. 알아서 처리할게요.”
누굴 유치원생으로 아나.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물어!’ 하고 외치면 사정없이 물어뜯는 충직한 똥개를 보는 것 같아 바람 빠진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어. 웃었다.”
수영이 멀어지더니 하얗게 핀 진호를 보고 반색을 했다. 붉은 흔적이 남은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수영이 진호를 놀렸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뭐 난다는데.”
“뭐가요?”
“글쎄요. 확인해 볼래요?”
수영의 손이 등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게 진짜. 이 감동적인 순간에 무슨 추태를. 진호가 손목을 잡아채려 등 뒤로 손등을 더듬었다. 쉽게 안 놓아줄 것 같아서 있는 힘껏 옆으로 밀어냈다.
“어……?”
너무나도 가볍게 수영의 팔이 평상 위로 떨어졌다. 힘을 실었던 어깨가 갈피를 잃고 강하게 휘청였다. 당황한 사이에 고개가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박겠다 싶어 허공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아!”
뒤통수에 무언가가 닿자 노파심에 비명부터 질렀다. 그런데 예상보다 아프지 않았다. 평상이 이렇게 따뜻했나? 반쯤 눈을 떠 보니 수영의 옅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혼자 뭐 해요?”
한 손으로 진호의 뒷머리를 받친 수영이 누워 있는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박았다. 진호가 넋이 나간 것처럼 수영을 응시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서글서글한 눈매가 보였다. 문득 속이 탔다. 술이라면 충분히 마셨는데 목이 말랐다.
서서히 시야를 낮추는데 무언가를 참는 듯 굳게 다물린 입매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멈춘 수영 탓에 진호의 동공이 진동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수영이 바위 같은 등을 뒤로 물렀다. 팽팽했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평상에 뉘어졌던 진호의 허리가 수영에 의해 바르게 세워졌다.
방금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단상을 되뇌며 진호가 갈 곳을 잃은 눈으로 제 입술을 짚었다. 닿지 않아서 아쉽다고 생각했다. 마치 키스라도 기대한 것처럼. 미쳤어. 말도 안 된다. 술에 취해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형. 여기 봐요.”
수영이 굳어 있는 진호의 손목을 잡아 난간 앞으로 이끌었다.
“예쁘죠.”
어느새 해가 저물고 칠흑 같은 어둠이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언덕 아래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인 건물들이 저마다의 색을 내며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서울의 밤 풍경에 진호가 공상에서 깨어나 난간에 바짝 붙었다.
“형?”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호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난간 앞에 선 진호가 뷰파인더로 구도를 잡았다. 거침없는 손짓이 셔터 버튼을 마구 눌렀다. 렌즈를 통해 하나의 점으로 축소된 장면이 진호의 눈 안에 별빛처럼 박혔다.
“…….”
수영이 홀린 듯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촬영에 집중한 진호는 이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듯했다. 핸드폰 화면에 담긴 진호를 관찰하던 수영이 액정 위를 부드럽게 터치했다.
찰칵. 미약한 소음을 내며 진호의 모습이 사각의 틀 안에 담겼다. 제가 느끼는 반짝임의 반의반도 담기지 않았지만 굳게 닫힌 입가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만으로도 족했다. 수영이 진호의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설정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형이 알면 노발대발하겠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형의 면모를 아는 사람이 저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희망이 일었다.
“뭐 해요?”
핸드폰을 쳐다보며 실실대는 수영이 이상한지 카메라를 가방 안에 정리하던 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뭘 보기에 저렇게 나사 빠진 것처럼 웃고 있대.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영이 능청스럽게 핸드폰을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 자식 이상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알아봤자 쓸데없는 것일 게 뻔했다.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은 진호가 수영의 종이컵을 들어 술을 따랐다.
“좋은 경치엔 술이 제격이죠.”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와 들뜬 진호가 술잔을 수영에게 내밀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수영이 받아치며 술잔을 받더니 진호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진호가 야경을 바라보며 운치 있게 한 잔 들이켰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평상에 앉아 그윽한 풍경을 감상했다. 층마다 환한 불빛이 켜진 빌딩을 보며 한 잔. 차들과 사람들이 지나치는 대로변을 보며 한 잔. 남산 위에 걸린 하얀 달빛을 보며 한 잔. 절경을 안주 삼아 홀짝이던 진호가 잠잠해진 수영을 향해 눈을 돌렸다. 수영은 깊은 사색에 잠긴 듯 도심 한가운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고상한 그림 같다고 생각하며 술잔에 남은 몇 방울을 입 안에 떨어뜨렸다.
“……?”
오른쪽 어깨에 푹신한 무언가가 닿자 수영이 시선을 내렸다. 어느샌가 잠든 진호가 고개를 꺾은 채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많이 취했는지 살며시 덮인 눈꺼풀 근처가 붉었다. 균형을 잃고 앞으로 떨어질 것 같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잡아 제 어깨 위에 바르게 올려 둔 수영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정해진 목표를 달성했는데도 손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희게 드러난 깨끗한 이마를 엄지로 몇 번 쓸던 수영이 나직이 한숨을 내었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형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겠다고 대차게 나섰지만 벌써 인내심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형 동생 사이로 지내겠다고 하면서도 그 선을 넘고 싶은 욕망이 하루에도 수백 번 가슴을 쳤다. 시종일관 거리를 두면서도 이렇게 경계를 풀고 기대어 올 때면 그 충동이 배가 됐다. 괴로워 우는 것도, 즐거워 웃는 것도 전부 저한테만 보였으면 했다.
“으응…….”
어디가 불편한지 진호가 뒤척이며 머리칼을 어깨에 문질렀다. 깊숙이 파고드는 기척에 수영이 난처한 듯 혀를 찼다.
“일부러 이러지?”
곤히 잠든 진호에게 애꿎은 탓을 돌리며 수영이 말랑한 볼을 약하게 꼬집었다.
“으…….”
집히는 감각이 느껴졌는지 진호가 눈썹을 찌푸렸다. 괜히 심술이 난 수영이 엄지와 검지로 볼살을 잡아당겼다. 입술이 옆으로 늘어진 채로 진호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쥐고 있던 손을 놓자, 뺨에 동그란 손자국이 남았다. 수영이 손등으로 자국을 지우듯 살살 쓰다듬었다.
“진호야.”
이때 아니면 언제 불러 보나 싶었다. 잠든 진호는 싫다며 인상을 쓰지도, 하지 말라며 밀어내지도 않았다. 이 상황이 기꺼운 수영이 이마에 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닿을 듯 말 듯 느릿하게 다가가던 입술이 매끈한 살결에 살포시 닿았다. 뺨을 매만지던 손이 가는 목덜미를 쥐었다. 금방 멀어졌던 입술이 콧등으로 떨어졌다.
작은 복수였다. 물론 진호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안달이 난 제 속내는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잠에 빠진 형에 대한 약간의 반항심. 그리고 조금은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 그런 것들이 겹쳐 거대한 합리성을 만들어 냈다.
“서진호.”
새근거리며 얕은 숨을 내뱉는 입술 앞에서 수영이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나 키스한다?”
“우응…….”
“네가 좋다고 했어.”
진호의 잠꼬대를 멋대로 받아들인 수영이 턱 밑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입술이 손끝에 닿았다. 야릇하게 벌어지는 아랫입술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두 입술이 서서히 겹쳐졌다. 포갠 채로 가만히 닿고만 있던 수영이 입술을 떼어 내려고 했다.
“이게…….”
진호가 닫혔던 눈꺼풀을 들더니 수영의 어깨를 쥐었다. 몽롱한 눈 안에서 까만 불씨가 타오르더니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키스야…….”
의아한 듯 경직된 수영의 입가를 보며 진호가 샐쭉하게 웃더니 어깨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수영의 입술 새로 혀를 밀어 넣은 진호가 날름 입 안을 핥았다.
“하.”
수영이 혼란스러운 듯 헛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혀를 삼켰다. 고민할 시간도 아까웠다.
* * *
수영의 입술이 떨어지자 진호가 가쁜 숨을 헐떡였다. 뿌연 시야로 수영의 붉은 눈가가 보였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흐읍.”
기억을 더듬을 겨를도 없이 살덩이가 입술 새로 흘러들어 와 안을 휘저었다. 거침없이 파고드는 움직임에 숨이 턱 막혔다.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손이 쑥 들어왔다. 거친 손바닥이 배를 쓸더니 가슴을 더듬었다.
“읏……!”
진호가 허리를 뒤틀며 수영의 팔을 잡았다. 수영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세게 붙잡아 당겼다. 숨이 찬 진호가 어깨를 주먹으로 치자, 비로소 수영의 입술이 떨어졌다.
“자, 잠깐.”
진호가 황급히 상체를 세웠다.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짠돌이랑 키스를…….
“이거…….”
꿈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짠돌이랑 혀를 섞고 있을 리가 없다. 뾰족해졌던 눈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하필 꿈을 꿔도 이런 꿈을.
“왜요. 인제 와서 그만두려고요?”
수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진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술에 취한 몸뚱어리가 힘없이 수영의 가슴에 기대졌다. 옷 안에 들어 있던 손이 유륜을 쓸었다.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아, 안 돼.”
꿈이라도 짠돌이와의 섹스는 사양인데, 저항할 수가 없었다. 따뜻한 손이 여린 피부 위를 스칠 때마다 온몸이 간질거렸다.
“안 되는데…….”
제가 주무르는 대로 바르작거리는 진호를 내려다보던 수영이 거추장스러운 티셔츠를 잡아 올렸다. 민감해져 꼿꼿하게 솟은 유두를 진득하게 뜯어보다가 혀끝으로 건드리자, 진호가 펄떡 튀어 올랐다.
“아……!”
“기분 좋아요?”
수영이 한쪽 가슴을 문 채 혀로 느릿하게 빨아 당겼다. 잔뜩 취한 탓인지 촉각이 곤두섰다. 중심이 뻐근해지는 느낌에 진호가 무의식적으로 골반을 움직였다. 딱딱해진 성기가 수영의 허벅지에 비벼졌다.
“으응…….”
현실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짠돌이에게 조르는 꼴이라니. 그러나 서툴면서도 부드러운 애무가 정말 남수영다워서, 수영과 섹스를 하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읏……!”
몸이 어떻게 된 건가 싶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졌다. 수영이 입에 넣은 유두 끝을 혓바닥으로 핥아 올리자 허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진호가 성마른 손짓으로 수영의 복근을 짚었다. 잘 잡힌 근육을 타고 내려가던 손이 커다랗게 솟아오른 곳을 잡았다.
“이거, 빨리.”
“…….”
“빨리 넣어 줘…….”
상대가 짠돌이라거나, 씻지 않았다거나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원래라면 콘돔까지 살뜰히 챙겼겠지만, 어차피 꿈인데 짠돌이랑 떡을 치든 SM 플레이를 하든 무슨 상관. 당장 수영의 것을 넣어서 타 버릴 것 같은 이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했다.
열심히 제 가슴을 빨고 있는 수영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열린 지퍼 틈으로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진호는 조그맣게 숨을 들이켰다. 알고는 있었지만 몇 번을 봐도 컸다. 이런 크기의 좆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아, 참. 이거 꿈이었지. 그런데 꿈치고는 지나치게 현실과 똑같이 생겼는데.
그때 이불 위로 상반신이 눕혀졌다. 수영이 진호 위에 올라탄 채 허리를 숙였다. 남김없이 수영에게 가려진 진호가 풀린 눈으로 수영을 올려다보았다.
“진호 형.”
수영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부르며 손을 올렸다. 호기롭게 눕혀 놓고서는 진호의 머리맡에서 공중을 배회하던 손끝이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귓가에 닿았다. 엄지로 뺨 주변을 훑자 진호가 손목을 두 손으로 쥐어 제 사타구니에 가져다 대려고 했다.
“그냥 얼른…….”
수영이 발정 난 것처럼 낑낑대며 구멍을 찾는 진호를 탐색하듯 훑어봤다. 단단히 취한 게 틀림없었다. 형이 먼저 키스해 온 것도 모자라서 박아 달라고 애교를 부리다니. 이건 간절한 소망이 만들어 낸 환영, 뭐 그런 건가? 확인하듯 눈앞의 진호를 더듬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익숙한 감촉이었다. 입가가 금세 호선을 그렸다.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한 듯했다.
“싫다면?”
수영이 축축하게 젖은 진호의 브리프 안으로 손을 넣어 페니스를 꺼냈다. 수영이 손바닥으로 살살 비비자 편하게 늘어져 있던 목에 핏대가 솟았다.
“빠, 빨리.”
“진호야.”
수영이 버둥거리는 진호를 어르듯 뺨과 목에 입을 맞추면서 발딱 솟은 기둥을 감싸 쥐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언제는 상냥한 게 좋다며.”
“흐읏, 닥치고 넣으라고.”
진호가 다급하게 수영의 팔뚝을 잡았다. 뜻대로 안 되니 이젠 칭얼거린다. 수영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티셔츠를 턱 아래까지 걷어 올리더니, 가슴부터 장골까지 길을 내며 핥고 물었다. 움직임이 초조한 듯 빠르면서도 또 신중했다.
“아아…….”
마른 배를 핥던 혀가 허벅지 근처로 내려오자 신음이 짙어졌다. 트레이닝 바지와 브리프를 발목까지 벗겨 내린 수영이 귀두 끝을 문지르며 자극을 더했다. 진호가 꿈틀거리며 수영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만…….”
그만 좀 애태워. 말은 입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아득한 쾌감에 허우적대고 있는데,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수영이 사타구니 안쪽을 지나더니 고환 밑을 혀로 훑었다.
“하지 마. 그런 데……. 읏.”
축축한 살덩이가 회음부를 지그시 눌렀다. 이 새끼가 지금 어딜. 진호가 수영의 이마를 밀쳐 낼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이러다 넣기 전에 싸 버릴 것 같았다.
“그만하라, 고.”
힘겹게 밀어내는데,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불알을 빨고 있는 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시각적인 충격에 의식이 정지했다.
“하지…….”
비단 충격만은 아니었다. 선정적인 자태와는 별개로 가슴을 울컥거리게 만드는 눈빛에 할 말을 잃었다. 순간의 실수로 짠돌이 손에 가 버렸던 그날 밤과 똑같은 시선으로 수영이 저를 보고 있었다.
명치 부근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껄끄럽지만 동시에 달가웠다. 불가해한 감정이었다.
“여기서 그만할까?”
진호는 수영을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손으로는 어깨를 막고 있지만 힘이 하나도 없었다. 미약하게나마 붙잡고 있던 손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거봐. 싫은 게 아니잖아. 수영이 속이 훤히 비치는 진호의 두 뺨을 양 손바닥으로 눌렀다.
“정작 참고 있는 게 누군데.”
급한 것으로 치면 제가 백배는 더할 것이다. 한참 전부터 발기한 채로 있느라 가랑이 사이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형이 넣고 싶다며 제 좆을 잡았을 때는 그대로 사정할 뻔했다.
“안 참으면 되잖, 흣……!”
수영이 회음부를 비비던 손가락을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선액으로 흥건해진 입구가 매끄럽게 벌어졌다. 진호가 부들부들 떨며 수영의 검지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강 사장이 보내 준 게이 동영상 컬렉션을 떠올린 수영이 내벽을 더듬었다. 처음엔 안 보려고 했지만, 언젠가는 형과 섹스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라는 사심 섞인 조바심에 몇 편을 다운로드해서 봤었다. 대부분 하드한 내용이라 그다지 도움은 안 됐지만 남자끼리 어떤 방식으로 섹스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행여나 다칠까 봐 제 손가락을 아주 느리게 넣으면서, 진호의 반응을 살폈다. 제 밑에서 허덕이고 있는 형은 제 상상에서보다 훨씬 색정적이었다. 전신의 혈기가 아래로 쏠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참냐고.
“흐으.”
들어오는 손가락이 하나 더 늘자 진호가 움칠 떨며 수영의 팔을 붙잡았다. 좁아서 빡빡한 내부를 빠듯하게 넓히며, 손가락 개수가 조금씩 늘어났다.
“이제…….”
오랜 시간 끝에 손가락 네 개가 빠져나가자, 느릿한 애무에 감질난 진호가 기다렸다는 듯 수영의 분신을 더듬었다. 한 손으로 잡히지 않아서 양손으로 붙잡은 그것을 꺼내 구멍에 맞췄다. 이만하면 충분히 풀렸으니까.
“……?”
들어가지 않을까 짐작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아무리 커도 이만큼 정성스럽게 넓혀 놨으면 들어가기라도 하는데 입구에서 턱 막혀 버렸다. 아니, 왜 끄트머리도 안 들어가는 거야? 질겁한 진호가 억지로 수영의 귀두를 눌러 제 안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찢어지게 아프기만 하고 들어가질 않았다. 어지간하면 고통도 참을 텐데 이건 정말 삐끗하면 응급실에 실려 갈 수준이었다.
“이, 이게…… 뭐냐고.”
이런 황당한 꿈이 있나. 어떻게든 넣으려고 끙끙대던 진호가 포기한 듯 손을 내렸다. 뭐 이딴 경우가 다 있어.
“하, 안 되겠네.”
수영이 아쉬운 듯 진호의 목덜미를 핥으며 귀두를 잡아 회음부에 문질렀다.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구멍에 비비던 성기를 마지못해 떼어 내자 길게 선액이 묻어났다. 박고 싶은 걸 참고서 성심껏 풀어 놨더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수영이 늘어지는 진호를 붙들며 제 것과 진호의 것을 한 손에 붙잡았다.
곧 두 기둥이 끈적하게 비벼졌다. 두툼한 수영의 좆에 주름이 짓눌리자, 진호가 선단에서 질척한 액체를 뿜어냈다. 진호가 흘린 것으로 흠뻑 젖은 페니스가 맞물리며 음란한 소리를 냈다.
“읏, 흐윽.”
온몸의 피가 몰려 뜨거워진 성기가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수영의 손안에 갇힌 진호가 허리를 흔들었다. 한계였다. 정수리가 저릿해져, 눈가를 찡그리며 수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수영이 허리 짓을 하며 박차를 가했다.
“후, 진호야. 좋아?”
“하읏, 아……!”
“그래. 나도.”
수영이 진호의 신음을 막무가내로 해석하며 시뻘게진 귓바퀴를 물었다. 하지만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진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단지 하복부를 강타하는 사정감만 느껴질 뿐.
“하윽!”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쾌감을 느끼며 진호가 열감을 토해 냈다. 희멀건 정액이 가슴 위로 쏟아졌다. 사정 후의 탈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형. 끝난 거야?”
난 싸려면 아직 멀었는데. 우람하게 페니스를 세운 수영이 스르르 감기는 진호의 눈을 보더니, 옆의 서랍에서 마른 수건을 꺼냈다. 수건으로 몇 번 훔쳐 내자 정액으로 더러워진 진호의 가슴팍이 깨끗해졌다.
“이러고 가면 서운한데.”
상기된 뺨에 몇 번이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앞으로는 이런 건 흔한 관계가 될 거니까 섭섭해하면 안 되겠지?”
수면 상태에 들기 직전, 진호는 웃으며 되묻는 수영의 얼굴을 각인하듯 눈에 새겼다. 다음에도 짠돌이랑 섹스하는 꿈을 꿀 거라는 말인가. 이런 게 흔한 관계가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선지 이번 꿈은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