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두운 서재 안. 희미한 탁상용 조명 빛에 의지해 서류를 읽어 가던 상만이 초인종 소리에 손만 올려 책상 위의 버튼을 눌렀다.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자동문이 열리고, 집 안에서까지 슈트로 갖춰 입은 혜린이 얇은 서류철 하나를 든 채 탁상으로 걸어왔다.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가족 사이에 나눌 만한 일상적인 대화나 잡담 같은 건 없었다. 매주 그랬던 것처럼 혜린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호에게선 아직 눈에 띄는 점이 없습니다. 의외로 잘 적응해서 지내는 것 같아요.”
“쯧. 언제까지 그 집에서 지낼 건지.”
상만은 혀를 끌끌 차더니 머그잔에 담긴 뜨거운 커피로 입 안을 축였다.
진호가 본가에서 도망치고 나간 뒤, 한동안 이 잡듯이 서울 바닥을 뒤졌던 상만은 진호가 수영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했었다. 당장 집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진호가 이 길로 집안과 영영 연을 끊어 버릴까 봐 걱정됐던 혜린이 묘안을 냈다. 진호 성격상 그 집에서 오래 지낼 리가 없으니 결국 제 발로 찾아오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진호가 자진해서 본가로 돌아오지 않겠냐는 혜린의 말에 반신반의했던 상만은 수영의 집 상태를 보고 납득했다. 깔끔한 걸 워낙 좋아하는 데다 편리함에 익숙한 진호는 그 좁은 옥탑방을 견디기 힘들 것이었다. 오래 버텨도 사흘이면 진호에게서 연락이 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그 사흘이 벌써 한 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억지로 잡아 오려고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만도 화가 누그러져 내버려 두었다. 물론 혜린이 진호에게 선을 보게 하겠다는 약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놈하고도 별일은 없나?”
수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진호와 혜린이 입을 모아 수영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상만은 믿지 않았다. 기실 두 사람이 사귀느냐는 상만의 관심사 밖이었다. 첫째는 사업가로서, 아들이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불러올 골치 아픈 논란이 거슬렸고, 둘째는 아버지로서, 설령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해도 그런 사이로 발전할 싹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게 그 사유였다.
“보고드릴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보고할 만한 일이 없다……. 네가 봤을 땐 어때. 둘이 진정 아무런 사이가 아니야?”
상만은 누나로서가 아니라 상무로서의 감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혜린은 일에 있어선 칼같았지만 잔정이 많아 제 동생에 있어선 유독 판단이 흐린 경우가 많았다. 어릴 적 친모를 여의고, 일하기 바쁜 저 대신 둘이서 이 큰 저택을 지켰으니 진호가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겠지만, 조직의 머리에 있는 자가 사소한 감정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혜린이 말뜻을 알아듣고 회상에 잠겼다. 일전에 수영의 옥탑방에 갔을 때 둘은 사이가 좋아 보였다. 전이라면 어떻게든 아파트로 돌아가려고 혈안이었을 진호가 수영의 집에서 잘 지내는 것도 예상외였고, 그 상태에서 수영의 사정을 고려하는 것은 더욱이 놀라웠다. 이전부터 수영에게 빚진 게 있다면서 월급과 보너스를 많이 챙겨 달라고 하더니, 수영을 친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영도 가끔 연락이 와서 보면, 진호가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진호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게 전부였다. 지난번에는 진호가 좋아하는 향을 물어보기에 진호가 집에서 쓰던 향수 종류를 읊어 줬었다. 그 시점에서 두 사람은 단순한 경호원과 고용주의 관계를 넘어섰음을 알았다. 하지만 연인 사이라고 하기에는 둘 사이에 풋풋하고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없었다. 심상치 않은 관계임은 확실하나, 사귄다고 하기에는 모호했다.
“서로 연애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평범한 친구 사이로 보입니다.”
전자는 진실이었지만 후자는 거짓이었다. 혜린은 진호의 사소한 변화가, 수영의 다소 유난스러운 챙김이 보다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희망적인 신호일 거라고 여겼다.
혜린에게 있어 진호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현우와 강제적으로 헤어지고 난 뒤, 진호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척 힘들어했다. 군 복무 중에도 휴가를 나오면 신현우를 찾아 달라며 저에게 매달렸었다. 혜린은 일언반구도 없이 홀랑 사라진 현우를 그만 잊어버리길 바랐지만 진호는 끈질겼다. 제대할 때 되어서는 포기한 듯 현우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지만, 대신 진호는 그 어떠한 진지한 만남도 하지 않겠다는 듯 휴학 기간 동안 클럽만 다녔다. 혜린은 그런 진호가 과거의 아픔을 깨끗이 잊었으면 했다. 진호와 수영 사이가 미심쩍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두 사람이 잘되길 기원하는 바람에 가까웠다.
“진호가 선을 보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팩트를 각색해 전달했다. 혜린으로서는 진호가 수영과 오래 같이 지냈으면 마음이었다. 수영으로 인해 진호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좋은 사람과 만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상만이 이윽고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 애가 순순히 그러더냐.”
“전에 살던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 주는 조건으로요.”
“망치지 않겠다는 서약도 받았겠지?”
“물론입니다.”
혜린은 한 치도 주저함이 없었다. 진호에게 맞선을 성공적으로 끝낼 방법을 찾아 놓으라고 일러두었지만, 상대만 잘 고르면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의외로군. 선은 싫다고 그렇게 버티던 애가.”
역시 그 집에서 사는 건 무리였나. 여전히 본가에 들어오지 않는 건 괘씸했지만 선을 본다고 결심한 것을 큰 수확으로 여긴 상만은 커피를 다시금 홀짝거리더니 아파트에서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제안을 수락했다. 어찌 됐건 아들이 여자와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그러면 그렇게 해 줘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혜린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렸다.
“상대는 골라 두신 분이 계십니까?”
“진호랑 잘 맞기만 하면 된다. 앞으로 우리 사업에 도움이 되는 집안이면 더 좋겠고.”
혜린이 다행인 듯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미 딱 맞는 상대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만의 앞이라 목소리와 표정은 웃음기 한 점 없이 딱딱했다.
“명문대학교 병원 안 원장의 차녀, 안지선 양은 어떠세요?”
“안 원장?”
상만이 이마를 작게 꿈틀거렸다. 명문대학교 병원이면 국내 최고의 대학 병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큰 병원이었다.
“네. 그 집안 차녀도 올해 스물다섯이라 진호와 잘 통할 거예요.”
상만이 고민하듯 서류를 탁상 위로 내려놓았다.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동안 어느 제약 회사와도 깊은 커넥션이 없었던 명문대 병원과 사돈을 맺게 된다면 사업에 아주 큰 이득이 될 것이 명백했다. 다만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뜸을 들였을 뿐이었다. 흔쾌히 승인하면 본새가 안 살잖아. 상만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안 원장이 쉽게 허락하진 않을 거다.”
“제가 지선 양과 친분이 있어 괜찮을 겁니다. 마침 그쪽도 괜찮은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고 하고요.”
안 원장이면 딸 바보라 제 딸을 꼭꼭 숨기고 다녀서 후보로 올리지도 못했는데 혜린과 연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상만이 이미지상 시간을 끌더니 마지못해 허락하듯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혜린이 제 계획이 연달아 성공한 것에 흥분한 눈빛으로 서류철을 안았다. 상만이 용건이 끝났다는 듯 의자를 옆으로 돌려 결재에 몰두했다. 혜린은 탁상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제 아버지가 일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할 말이 남았나?”
상만은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 떠날 생각이 없는 듯한 혜린을 추궁했다. 혜린이 경직되어 있던 입가를 부드럽게 올리며 줄곧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을 꺼냈다.
“진심으로 진호가 결혼하길 바라세요?”
“그럼.”
상만이 설명할 가치도 없다는 듯 미동 없이 서류를 읽었다.
“그게 진호를 위한 길이라 생각하세요?”
혜린은 상만이 진정 진호에게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상만은 예전부터 후계자라는 이유로 진호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유달리 애틋했던 제 동생이 당시 비서였던 지금의 어머니와 재혼한 아버지를 싫어할 이유는 명확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아버지가 그리는 그림이 족쇄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진호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CEO가 될 마음도 없었고, 적성에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상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호를 아끼고 있었다. 혜린이 그렇게 믿는 데에는 제 기억 한편에 자리한 강력한 장면이 한몫했다.
혜린이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종례 후 정문을 걸어 나와 대기하고 있을 기사님을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차 한 대가 나타나더니 눈앞에서 멈추었다.
「혜린아. 얼른 타거라.」
지금이면 한창 업무로 바쁠 아버지였다.
「무슨 일 있어요?」
아버지가 입학식 이후로는 저를 데리러 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외라고 느낀 혜린이 뒷좌석에 앉으며 묻자, 상만이 들뜬 목소리로 핸들을 꺾었다.
「네 동생이 태어났단다. 어서 보고 싶지 않니?」
항상 무뚝뚝해 보였던 아버지가 그토록 즐거워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 전엔 아버지가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혜린이 놀랐던 건 그게 다가 아니었다.
「씩씩한 왕자님이에요. 한번 안아 보시겠어요?」
병원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인큐베이터에 누운 아기를 조심히 꺼내 위생복을 껴입은 상만의 앞에 내밀었다. 저도 안을 수 있을 만큼 조막만 한 데다 안면이 온통 붉은 갓난아기는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나에게도 동생이 생기다니. 형제가 있는 친구들을 내심 부러워했던 혜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버지가 아기를 받아 드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간호사에게서 아기를 받은 상만은 말이 없었다. 아기가 너무 이상하게 생겨서 실망하셨나 봐. 쭈글쭈글한 피부에 눈도 제대로 못 뜬 동생을 보며, 어린 마음에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진호야.」
상만이 아기의 이름을 불렀다. 갓 태어난 아기는 제 이름인 것을 알았는지 방실 웃었다.
「그래. 네 이름이 서진호다.」
그 순간, 혜린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활짝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장의 사진이 되어 각인처럼 혜린의 뇌리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당시의 기억은 혜린에게 강한 확신을 주었다. 아버지는 비록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적어도 진호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면?”
상만이 그것 외에 다른 길이 있냐는 듯 되물었다. 상만에게는 결혼이 진호가 행복한 최선의 길이었다. 작금의 진호는 올바른 길에서 한참 빗겨 나 있었다.
상만은 진호가 태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혜린이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름이 불리자 해맑게 짓는 순수한 미소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귀여운 아들이 제 누나와 함께 자신의 뒤를 이어 회사를 키워 나갈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기대가 무너진 것은 2년 전의 ‘그 일’ 때문이었다.
아들이 ‘자신의 방’에서 ‘남자’와 잤다. 사업을 뒤이을 유망주로 여겼던 아들이 동성을 좋아하는 것도 천인공노할 일인데, 입에도 담지 못할 플레이를 즐길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한 기업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온갖 더러운 꼴을 목도한 상만이었지만, 아들의 추잡한 정사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충격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만일 누가 인생의 기억 중 하나만 지울 수 있다고 한다면 주저 없이 그때를 말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진호가 일반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 했다. 약간은 이른 감이 있지만 맞선을 보라고 한 것은, 진호가 이런 방식의 삶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해서였다.
결혼 외의 대안이 있을 수 있냐는 상만의 얼굴이 진호를 처음 안았던 때와 닮아 있었다. 혜린은 아버지에게 되레 묻고 싶었다.
진정으로 그리 여기신다면 어째서 진호가 수영과 지내는 것을 한 달이 되도록 두고만 보고 계시는지.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 세밀하게 살펴야 할 결혼 상대는 어째서 점찍어 놓지 않으셨던 건지. 진호가 수영의 집에 숨은 이후로 막아 놓았던 용돈은 어째서 저를 통해서 다시 진호에게 보내고 계시는지.
평소와 다름없이 냉철한 혜린의 눈빛에서 한 줄기 파문이 이는 것을 목격한 상만이 대화의 끝을 맺었다.
“밤이 늦었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혜린은 자포자기한 듯 어렵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놈 말이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중에 상만이 혜린을 불러 세웠다. 혜린은 힘이 들어간 음성에서 누구의 얘기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열 살 이전의 기록이 없더구나.”
혜린은 수영을 경호원으로 채용하기 전 급하게 살폈던 조사 보고서를 떠올렸다. 열 살 때부터 시골에서 살았다는 문구에서 시작되는 보고 내용.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상만은 거기에서 의문을 품은 모양이었다.
“이 부분도 같이 조사해 봐.”
진호가 걱정되시면 직접 말씀하시지. 혜린이 부름에 멈춰 서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진호와 아버지의 사이가 나쁜 건 알겠지만 그 때문에 중간에서 저만 죽어나고 있었다.
“네. 임 실장에게 전해 놓겠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기에. 아버지로서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이 가업을 잇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기에 강제로 선을 보게 하려는 것일 테다. 그 심정도 이해가 되었지만, 그건 진호에게 있어 고통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진호로서는 아픈 어머니를 두고 바람을 피운 아버지가 미울 테다. 하지만 생전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당신이 언제나 바라던 일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진호에게는 아버지의 불륜이 큰 상처가 되었지만, 진호 또한 아버지에게 트라우마를 주지 않았던가.
“이 이상 말씀 없으시면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상만이 다시 결재에 몰입하자, 혜린이 서재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하여간 둘 다 고집은 엄청 세다니까.”
서로 양보하면 될 것을 뭐가 아쉬워서. 혜린이 안타까움에 불만 섞인 혼잣말을 뱉었다. 진호가 선을 본다고 했고, 아버지도 퍽 물러서 둘 사이의 갈등을 풀 희망이 보이는데 도중에 관둘 수도 없었다. 어쩌겠어. 고집불통인 부자 사이의 중재자가 된 것은 내가 자처한 일인데. 골칫거리이긴 해도 진호와 상만은 제게 있어 소중한 가족이었다. 어딘가 어긋난 두 사람이 화해했으면 하는 건, 동생과 아버지 모두를 잃고 싶지 않은 제 욕심이기도 했다.
청량한 벨 소리가 울리자 혜린이 발신인을 확인했다. 수영이었다. 진호에 대해서 궁금한 게 또 생긴 건가? 혜린은 기껍게 전화를 받았다.
“네. 수영 씨.”
아버지 지시대로 수영을 조사할 뜻은 없었다. 상무의 위치에 있으면서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고 자신한다. 수영을 직접 본 건 얼마 안 되지만 그간 꼼꼼히 진호를 챙겨 온 것을 보면 진호에게 해를 가할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호가 손해를 끼쳤으면 끼쳤지.
“무슨 일이에요?”
진호는 모르겠지만 수영이 진호를 위해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저였다. 얼마 전에 제게 부탁했던 일도 매한가지였다. 보통은 저와 관련이 없다며 모르는 척 넘어갈 문제를 수영은 진호가 걱정된다며 세심하게 살펴 준 것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바쁜 일정에도 수영의 요청대로 어떤 자료를 조사하여 넘겨주었다. 그랬더니 고마움의 표시로 작은 선물을 보낸단다. 이렇게 좋은 애를 뒷조사할 필요가 있겠어? 혜린이 거절은 하지 않겠다고 산뜻하게 답하며 통화를 끊었다. 경쾌한 발걸음이 제 방으로 이어졌다.
* * *
“형. 안 가요?”
“아, 네. 가요.”
가겠다고 하면서도 진호는 연거푸 강의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수영이 팔꿈치를 두드리며 분산된 시선을 제게 집중시켰지만, 진호는 미련이 남는 듯 가방을 고쳐 메며 늦장을 부렸다.
“뭐 찾아요?”
수영이 안 되겠는지 뒷문으로 향하던 발을 멈추고 진호의 눈길이 닿는 곳을 따라갔다. 강의실 내부를 느리게 훑어본 진호가 남은 미련을 떼어 냈다. 눈을 씻고 봐도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신현우요. 안 보여서.”
다시 돌아온 마케팅 관리 시간. 당연히 마주할 줄 알았던 신현우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전처럼 긴장이 되지는 않았으나 그 면상을 보면 썩 유쾌하지는 않을 듯하여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차에 잘된 일이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물론 수영이 심심하다며 공책에 제멋대로 낙서를 하기는 했다- 떠오르는 발상을 정리하다 보니 수업이 끝나 있었다. 후련한 기분으로 재무 관리 강의를 들으러 나가면 되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안 보이면 좋죠. 굳이 왜 찾아요.”
“찜찜하잖아요.”
지난 수업 때 쪽지를 주고받다가 걸린 게 창피했나? 신현우가 이대로 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땡큐지만, 폭풍 전야처럼 이다음에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수영이 걱정도 팔자라며 진호의 등을 문밖으로 떠밀었다.
“헉, 헉. 다행이다. 아직 있었네.”
복도로 나오자 과대가 숨을 헐떡이며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오른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호흡을 가라앉힌 과대가 진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학과 사무실로 가 보세요. 김 교수님이 찾으세요.”
“김 교수님이? 무슨 일로?”
“저도 몰라요. 개인적으로 면담할 게 있다고 혼자 오라고 하셨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깐깐한 김 교수가 부른다면 중요한 일일 것 같았다. 성적 때문인가? 아니면 전에 맡겼던 발표 때문에? 강의 시간에 떠들어서 주의라도 주려는 걸까? 대충 생각해도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용건을 가늠할 수 없었다. 영문을 몰라 멀뚱히 서 있던 진호는 사나워지는 수영의 눈빛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선배, 이번에 저희 과 MT 참가하시죠? 참가 명단에 있던데.”
“내가?”
MT가 있다는 걸 지금 안 사람한테 뭔 소리래. 진호가 검지로 제 쪽을 가리켰다. 과대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네. 선배 이름이 있는데 수영이 이름이 없어서 이상했거든요.”
“그거 나 아니고 다른 사람인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제가 학번이랑 학년까지 다 확인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MT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제 이름이 참가 명단에 올라가 있다니. 착오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잘못 적힌 것 같은데. 내 이름은 거기서 빼 줘.”
MT라고 해 봤자 시답잖은 술 게임에 술이 떡이 될 때까지 퍼마시는 것뿐이었다. 대학 생활을 갓 시작한 새내기면 몰라도 그 지루한 과정을 몇 번이나 겪은 저에게는 귀찮은 술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가 봤자 똑같은 게임이나 하다가 다음 날 숙취에 괴로워하며 비몽사몽 한 상태로 집에 돌아올 것이 눈앞에 선했다. 즐겁지도 않은 흑역사를 제 손으로 쌓고 싶은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취소 같은 건 없어요.”
“혹시 빠지면 수수료 물어야 해?”
간혹 정해진 기간 안에 취소하지 않으면 수수료를 무는 악질적인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수수료라고 해 봤자 1, 2만 원 정도였기에 문제도 아니었다. 진호가 익숙한 듯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얼마 주면 돼?”
“선배님. 그건 넣어 두시죠.”
진호의 지갑이 도로 밀려났다. 과대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얼마를 주시든 취소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고? 진호가 반문하려고 하자, 과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현재 참가율이 심각하게 저조해서 MT 자체가 무산되게 생겼거든요. 선배님은 무조건 참가하셔야 합니다.”
이거 완전 독재 아냐? 학생들의 의견 하나하나 귀 기울여야 할 과대가 의견을 처참히 묵살하고 있었다. 진호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나왔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오시면 절대 후회 안 할 겁니다. 제가 장담할게요.”
“아니, 안 간다고.”
과대가 진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수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남수영. 너는 선배님이랑 한 세트니까 같이 참가하는 거다.”
“응.”
짠돌이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가세했다. 너까지 왜 그래? 진호가 수영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죽인 채 경고했다.
‘싫다고 해요.’
‘싫은데요.’
‘아니, 나한테 말고 과대한테.’
‘싫다고요.’
‘대체 왜요?’
‘형을 좋아하니까.’
그게 지금 여기서 왜 나와? 뻔질나게 웃고 있는 수영에게 눈을 부라리자, 수영이 말을 덧붙였다.
“형이랑 같이 가고 싶은데요. MT.”
“그럼 둘 다 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과대가 두 사람 사이의 들리지 않는 대화를 자르며 결론을 마무리 지었다. 한층 홀가분해진 어깨가 부드럽게 방향을 돌렸다.
“아니. 대화 다 안 끝났는데.”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과대를 붙잡자, 과대가 갑자기 줄행랑을 쳤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전 이만 바빠서!”
“잠깐, 거기 서!”
진호가 외쳐도 과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뭐 저런 과대가 다 있어. 진호가 작아지는 과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곧 졸업하는 마당에 MT를 가게 생겼다. 가 봤자 파릇파릇한 새내기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을 텐데. 앞이 깜깜해진 진호가 무의식적으로 학과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지금 과사 가는 거예요?”
옆에서 따라 걷던 수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덕에 진호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학과 사무실에는 조교가 있었지. 오늘 강의에 신현우가 안 나온 걸 보면 과 사무실에 없을 확률이 높았지만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과대한테 사무실에서 신현우를 봤는지 물어볼걸. 뒤늦게 후회한 진호가 멈춰 있던 발을 움직였다. 수영이 앞서 나가는 진호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대신 갈게요.”
“교수님이 부른 건 난데요.”
진호가 고개를 돌리자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듯 수영의 인상이 굳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교수님이 형을 개인적으로 볼 일이 없잖아요. 우리 둘이라면 모를까. 게다가 개인적인 대화를 연구실도 아니고 과 사무실에서 해요?”
그렇게 따지면 이상하긴 한데, 그건 신현우를 볼지도 모른다는 찜찜한 마음 때문인지도 몰랐다.
“교수님이 진짜 부른 거면 어쩌려고요. 개인적인 상담이 필요해서.”
짠돌이는 자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저를 따로 부를 명분은 충분했다. 강의 시간에 둘이서 얼마나 딴짓을 했는데 개인 면담을 하고도 남지. 괜한 걱정에 안 갔다가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이 일로 점수가 깎이면 또 이 자식한테 과외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거의 다 왔어요.”
진호가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학과 사무실의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밖에 있어요. 나 혼자 들어갔다 나올 테니까.”
진호가 뒤에 선 수영에게 당부하고는 문을 당겨 열었다. 내부로 들어가면서 당기던 손을 내리는데 문이 닫히지 않고 그대로 세워졌다. 진호의 말을 듣지 않고 같이 들어온 수영 탓이었다.
“왜 들어와요?”
“잠시만요.”
수영이 진호의 물음을 넘긴 채 앞질러 안으로 들어갔다. 수영을 뒤따라 들어가자, 방의 왼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책상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허리를 일으켰다. 얼굴을 식별한 진호가 멈칫하며 인상을 구겼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있었네.
“혼자서 오라니까 귀찮은 걸 달고 왔어.”
현우가 양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수영을 –정확히는 그 뒤에 있는 진호를– 향해 걸어왔다.
“뭐 때문에 불렀죠?”
진호 앞에 선 수영이 다가오는 현우를 멈춰 세웠다. 그런 수영이 눈엣가시인 듯 현우가 삐딱하게 서서 권태로운 눈으로 둘 사이를 훑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너 말고 진호 말한 거잖아.”
“제가 대리인이니까 형한테 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싫은데?”
현우가 수영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저를 노려보다 못해 눈으로 찌를 것 같은 진호에게 옮겼다.
“다음 주가 발표인데 분석할 기업은 정했어?”
“네.”
네가 알 바 아니라고 말하려던 진호의 눈이 수영을 향했다. 주제 언제 정했는데? 기억에 없는데? 수영은 그러기로 약속한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
“IGN으로 할 겁니다.”
“IGN?”
현우가 가소롭다는 듯 삐뚜름하게 입술을 접어 올렸지만 수영은 차가운 눈으로 현우를 응시할 뿐이었다.
“뭐야. 안 그런 척하더니 은근히 신경 쓰였나 봐?”
“김 교수님을 사칭해서 형을 부른 조교님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이 새끼가?”
현우가 나지막이 욕설을 지껄이며 한 걸음 다가왔다. 수영은 요지부동이었다.
“연락하지 말라고 친절하게 메시지도 보내 드렸고, 차단까지 해 놨으면, 내가 어지간히 싫은가 보다, 하고 피하는 게 맞는 거 아닐까요?”
“상관할 바 아니잖아. 네가 뭘 알아.”
현우가 비키라는 듯 어깨를 잡으려 하자 수영이 손목을 잡아 밀어냈다.
“조교님이야말로 뭘 모르시네요. 연락이 안 되니까 이런 방식으로 부르는 거, 상대 입장에서는 소름 끼칠 일이에요. 스토킹이라고요.”
“스토킹?”
뒤로 밀려난 현우가 푸핫, 하고 헛웃음을 쳤다. 재미있다는 듯 박장대소를 하며 웃던 현우가 일순 눈가를 모로 세우며 웃음기를 지웠다.
“별 좆같은 소릴 다 듣네.”
“싫다는데 끈질기게 연락하고 만나 달라고 하는 게 스토킹 아니면 뭡니까?”
현우가 혼자서 웃다가 정색하는 동안 수영은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다. 강의실 밖을 나오면서 몇 번이나 없는 게 맞는지 확인하는 진호를 보면서 진심으로 화가 났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얼마나 아팠으면 이래. 수영은 진호가 힘들었던 과거에 제가 함께 있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한탄스러웠다.
“앞으로 발표든 뭐든 어떤 일로도 형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만날 구실 찾지도 마시고요.”
진호에게 접근하려는 현우를 막아 세우며 수영이 강경하게 일렀다. 수영에게 팔이 붙잡힌 현우가 이를 악문 채 흔들었지만 빠지지 않았다. 수영에게 살벌한 눈빛을 보내며 몸싸움을 벌이던 현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걸리적거리는 건 치워 버리면 그만이지.”
대체 뭔 짓을 하려고. 뒤에서 어쩌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던 진호가 치를 떨었다. 대학 시절 신현우는 유명 교수인 아버지를 등에 업고 질 나쁜 짓을 저지르곤 했다. 주로 상류층 자제들이 모이는 은폐된 클럽을 드나들었는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뻔했다. 가루를 흡입하는 건 물론이고 집단 난교를 하기도 했다. 부러 아버지의 지위를 들먹이며 완강히 거부한 덕에 사귀는 동안 그런 일에 얽히지는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마약을 권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얘기하는 그에게 환멸이 났다. 이런 새끼를 좋아했었다니. 새삼 저의 미련한 안목에 혀를 찼다.
“네가 원치 않아도 보게 될 거야.”
현우가 수영에게 붙잡힌 팔을 털어 내며 음산한 기운을 뿌렸다.
“보긴 뭘 봐요. 일 없어요? 조교가 이렇게 한가했나.”
수영이 비꼬아도 현우는 무엇이 즐거운지 실실대더니 핸드폰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급한 호출이 온 듯했다.
“씨발. 이 새끼는 손이 없나. 존나게 부려 먹네.”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현우가 저를 향해 날 선 시선을 보내는 진호를 향해 못을 박듯 싱긋 웃었다.
“나중에 보자. 진호야.”
현우가 둘을 지나쳐 학과 사무실을 나갔다. 빈방에 덩그러니 남은 두 사람이 현우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불안해진 진호가 수영의 팔을 툭툭 쳤다.
“무슨 속셈일까요.”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친절한 척 이것저것 챙기더니, 그걸로는 잘 안 되니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는 듯했다. 웃고 있지만 서늘했던 현우의 표정을 떠올리며 진호가 어깨를 떨었다. 수영이 진호의 등을 도닥였다.
“별거 아닐 거예요.”
“혹시 모르잖아요. 저 자식은 아버지 백으로 뭐든 할 거라고요.”
“그냥 귀여운데요.”
귀엽다고? 저게? 진호는 한심한 듯 문 너머를 느른하게 바라보는 수영의 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요즘 밤늦게 아르바이트하러 다니더니 많이 피곤한가? 헛것이 보이는 거 아냐?
“하는 짓이 귀엽잖아요. 강의실에선 말을 못 붙이니 사무실로 부른 게. 혼자서 오라고 하면 냉큼 혼자 올 줄 알았나.”
수영이 실소를 터뜨리며 굳은 진호의 손목을 잡아 사무실 출입구로 끌었다.
“걱정은 접어 두고 수업이나 들으러 가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어물쩍 넘어가도 되는 건가. 신현우의 마지막 말이 잊히지 않았지만 수영이 별일 아닌 것처럼 대하자 정말 별거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조교 신분인데 흠잡힐 만한 짓은 안 하겠지.
“발표는 어떡하죠? 당장 다음 주인데.”
신현우가 발표 얘기를 꺼내서 갑자기 떠올랐다. 일주일이 남았으니 슬슬 준비해야 할 때였다. 수영이 사무실 문을 열며 상쾌하게 대답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죠.”
“네?”
짠돌이라면 지금이라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며 들들 볶을 줄 알았는데. 진호가 어벙하게 되묻자 수영이 진호를 재촉했다.
“수업 늦겠어요. 얼른 가요.”
일단 수업이 급하긴 하지. 진호가 재빠르게 문밖으로 나오며 강의실로 서둘렀다. 수영이 뒤따르며 줄곧 궁금해하던 것을 입에 올렸다.
“형. 근데 선보는 날 잡혔어요?”
* * *
[토요일 저녁 6시. OO 호텔 레스토랑. 절대 늦지 마.]
하필이면 저번 주에 수영과 같이 갔던 레스토랑이었다. 누나에게서 온 문자를 한참 들여다본 진호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정리한 뒤, 뒤에 서 있는 수영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요.”
“네. 좋은 결과 기다릴게요.”
진호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수영을 수상한 눈초리로 훑었다.
“즐거워 보이네요.”
누나가 말한 토요일은 오늘이었고, 오늘은 바로 맞선을 보는 날이었다. 형식적인 거라고 해도 결혼할지도 모르는 여자를 만나는 건데 저렇게 호의적일 수가 있나? 게다가 같은 호텔에서 일주일 전에 저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는데.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결국, 포기한 걸까. 진호가 어쩐지 허전해지는 마음을 무시했다.
“그럴 리가. 평소랑 똑같은데요.”
수영이 입꼬리를 힘껏 올린 채 실실 웃었다. 뭔가 있는데, 저거. 아니면 상심한 나머지 맛이 갔나. 진호가 현관에 편안하게 기대어 선 수영에게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누나가 찾아왔을 때도 선뜻 선보러 가라고 보내 주더니 충격이 컸나 보네.
“오늘은 알바 없어요?”
“있어요. 형 나가면 나도 나가려고요.”
“알바 잘하고요.”
수영이 측은해져서 하지도 않던 응원을 보낸 진호가 열린 현관문을 밀며 발걸음을 뗐다.
“이따 봬요.”
닫히는 문틈으로 수영이 손을 흔들었다. 갸우뚱거리며 문을 닫은 진호가 바삐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나치게 태평한 척하는 수영도 안타까웠지만, 우선 원치도 않은 선을 봐야 하는 제 앞가림부터 해야 했다.
절대 늦지 말라는 누나의 당부에 따라 일찍 출발한 결과,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예약해 둔 자리에 앉은 진호가 왼쪽 손목에 찬 시계 -잘 보이려고 누나한테 부탁해서 받았다- 를 보며 상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랑 동갑이라고 했지. 혜린에게서 대략적인 정보를 들은 진호가 기억을 되짚었다.
「안지선이라고, 안 원장이 무척이나 아껴서 공적이나 사적으로 드러난 바가 거의 없어. 잘못하면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 집 부모한테 영원히 찍힐 수 있으니 행동거지에 유의하고.」
얼마나 공주님같이 자랐기에 누나가 그런 주의까지 줬을까. 안 그래도 이전 집으로 돌아갈 유일한 기회라 각별히 대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부담이 늘었다. 애프터 없이 선을 좋게 끝낼 방법도 찾아야 하는데 궁리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하는 수밖에 없나. 진호가 빈 유리잔을 매만지며 고뇌에 빠졌다. 친구라. 수영은 얼마 전 여기서 좋아한다며 꽃다발을 건넸고, 저는 거절했다. 이대로 깔끔하게 끝내면 되는데 아까 전 자신을 편하게 보내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괜찮은 척이라면 안 해도 되는데. 조금은 가지 말라고 붙잡았어도.
“아, 씨. 미쳤나. 무슨 지랄 맞은 소릴…….”
붙잡았으면 뭐? 안 올 거였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튀어나와 머리를 쥐어뜯던 도중, 테이블 앞에 그늘이 졌다. 고개를 올리니 떨떠름한 인상의 여자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지선 씨죠?”
설마 들었나? 그런 거면 초장부터 망했는데. 진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세요.”
지선이 진호를 빤히 보더니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저는 서진호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다섯이고요.”
“…….”
이다음은 상대도 자신을 소개할 차례인데 지선은 한마디 말도 없이 진호를 뚱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자마자 욕설을 들었으니 못마땅할 만도 하지. 진호가 깜깜해지는 머릿속을 서둘러 밝혔다. 일단은 애프터고 자시고 망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돌려놓는 게 중요했다.
“배고프시죠. 메뉴 고르시겠어요?”
아까부터 표정 변화가 없는 지선을 보며 진호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메뉴판 좀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웨이터가 기다렸다는 듯 들고 있던 메뉴판을 진호 앞으로 건넸다. 진호가 메뉴판을 지선 쪽으로 돌려놓았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지선은 긴 목록을 주르륵 훑더니 검지로 어느 한 곳을 콕 집었다.
“이걸로 두 개 주세요.”
의미를 알아챈 진호가 같은 곳을 짚으며 웨이터를 물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만 남았다. 위기감을 느낀 진호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을 건넸다. 망한 첫인상을 회복해야 했다. 먼저 공감대 형성부터.
“갑자기 선이라니, 부모님도 주책이시…….”
아, 이게 아닌가. 지선의 안색이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에 진호가 잽싸게 말을 돌렸다.
“……지만 그럴 수 있죠. 하하.”
큰일 났다. 아무래도 지선에게 제대로 찍혀 버린 듯했다. 진호를 탐색하듯이 경직된 눈으로 쳐다보던 지선이 웨이터가 잔에 따라 준 물을 우아하게 마셨다. 귀하게 자란 딸답게 군더더기 없는 자태였다.
진호가 진땀을 빼며 지선을 따라 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혹시 몰라. 급하게 마시면 교양 없다고 찍힐지. 오늘따라 생수 마시는 것도 신경 쓰였다.
테이블 위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말은 꺼내지 않고 자신만 쳐다보는 지선 때문에 진호가 안절부절못하며 대화 주제를 찾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진호가 굳어진 입가를 힘겹게 끌어 올리며 지선을 바라봤다.
“원피스가 잘 어울리시네요. 화사한 색 잘 맞기 어려운데.”
굳은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앗빛 시폰 원피스를 보며 진호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렇게 된 이상 칭찬으로 작전을 변경한다. 하지만 진호의 소망과 달리 지선은 어떠한 호감도 가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
“…….”
망했다. 그것도 제대로 망했어. 문득 이곳을 뜨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누구든 제발 이 상황에서 구해 주면 소원이 없겠다.
“주문하신 파스타 나왔습니다.”
절규하던 차에 눈앞에 접시가 휙 내밀어졌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음식을 먹는 동안엔 적어도 어색하진 않을 테니까. 말을 더 꺼내기도 모호한 때에 끼어든 웨이터가 고맙기까지 했다.
“감사합……. 어?”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하려고 고개를 든 진호가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이 자식이 왜 여기 있어? 혼란해진 진호가 반듯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남자를 올려다봤다.
“맛있게 드세요.”
수영이 해맑은 미소를 만면에 띠며 두 사람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럼. 또 필요한 게 있으시면…….”
“자, 잠깐만요.”
수영이 물러나려고 하자, 진호가 황급히 소매를 붙잡았다.
“혹시 뭐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고객님?”
수영이 영업용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웃음을 지었다. 이 새끼 지금 즐거워 보이는데. 뭐라도 한마디 하려던 진호가 지선의 눈치를 보더니 있는 힘껏 입가를 끌어 올렸다.
“지선 씨 먼저 드시고 계세요. 전 잠시 볼일이 있어서. 5분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지선이 무감한 눈으로 두 사람을 훑더니 포크를 집어 들었다.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진호가 수영을 레스토랑 구석으로 데려갔다.
“알바 간다면서요?”
“지금 알바하는 중인데요.”
수영이 능청스럽게 제 팔에 걸친 냅킨을 들어 보였다. 이따 보자더니 여기서 보자는 말이었냐. 진호가 부쩍 수척해진 듯한 얼굴을 쓸었다.
“여긴 왜 따라와요. 선보는 거에 동의한 거 아니었어요?”
“저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
“아니,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아버지와 누나에 이어 짠돌이한테까지 게이의 뜻을 알려 줘야 하나? 어쩔 수 없이 선을 보는 걸 알고 있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진호가 답답한 속을 추스르며 초등학생을 달래듯 얼렀다.
“이건 형식적인 거라고요. 맞선을 잘 끝내야 우리 둘 다 아파트로 돌아갈 수 있잖아요?”
“근데 왜 그렇게 히죽거려요? 형식적인 거라면서.”
“그러니까 선이 잘 끝나야…….”
말을 이어 나가던 진호가 멈칫했다. 이 새끼 설마.
“지금 질투해요?”
“당연하죠.”
기다렸다는 듯 수영의 입에서 즉각 답이 튀어나왔다.
“잊었나 본데, 저 형을 좋아…….”
“미쳤어요?”
기겁한 진호가 수영의 입을 막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들 이쪽엔 관심이 없는 걸 보니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진호가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수영에게 몸을 기울였다.
“이럴 거면 누나가 선보라고 했을 땐 왜 가만히 있었어요?”
“형이 돌아가길 원하니까요.”
수영이 진호의 손을 가뿐히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정리하자면, 자신을 위해서 참았으나 질투가 나서 기어이 알바까지 구해서 보러 왔다는 말이었다. 전부터 선은 언제 보는지, 어디서 보는지 꼬치꼬치 캐묻더니 이러려고 그랬던 거였군. 쏘아붙이려던 진호가 진지한 수영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희한하게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왜 짠돌이가 귀여워 보이지? 나까지 맛이 갔나. 진호가 억지로 웃음기를 지우며 엄하게 대했다.
“선보는 건 어디까지나 이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거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말고요.”
그것보다 중대한 사안이 있었다. 마침 곤란하던 차에 짠돌이가 온 건 오히려 찬스일지도 몰랐다.
“나랑 같이 돌아가고 싶으면, 좀 도와줘요.”
진호는 수영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지선의 기분을 풀어 준 다음, 분위기가 좋을 때를 노려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제안한다는 것이었다. 고심했던 작전을 차근히 읊자, 수영은 흥미가 없는 듯 시큰둥하게 얘기를 들었다.
“내 말 이해했죠? 그냥 같이 분위기 띄워 주면 돼요.”
지선에게 일러뒀던 것보다 시간이 지체되자 진호가 대화를 마무리하며 자리에 돌아가려고 했다. 반면 수영은 제게서 돌아서는 진호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요?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얘기해요.”
진호가 손을 빼내려고 남는 손으로 수영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수영은 쉬이 진호를 놓아주지 않았다.
“알겠어요. 알겠는데, 그러면 형은 나한테 뭐 해 줄 거예요?”
이 와중에 치사하게 굴기냐. 짠돌이답게 자기가 한 일의 대가를 톡톡히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수영의 도움이 절실한 때였다.
“뭐 바라는 거 있어요?”
진호가 지선이 있는 테이블을 훑으며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 지선은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쥔 채 우두커니 앉아서 파스타 접시만 노려보고 있었다. 저 사람, 저러다 망부석 되겠네.
“나랑 데이트해요. 이번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뭐라고요?”
진호는 진지하게 되묻고 싶었다. 저기 혹시 금붕어세요? 당신 지난주에 여기서 나한테 차였거든요?
“전에 말했잖아요. 난 포기 안 해요. 형이 나한테 넘어오기 전까지.”
들을수록 어째 가관이다. 보통은 상대가 거절하면 –심지어 정식으로 데이트도 하고 호텔까지 갔는데 거절당했다– 그만두는 게 인지상정인데, 이 새끼는 말귀를 거꾸로 알아먹나. 고백도 했겠다, 이젠 대놓고 꼬시겠다는 건지 뭔지.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저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선언은 단순한 치기가 아니었나 보다. 어떻게 해도 결론은 NO일 텐데, 무슨 배짱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떡할래요?”
빙긋이 웃음 짓는 수영은 이 상황이 매우 즐거운 듯 보였다. 진호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아오. 이 새끼, 내가 거절 못 할 거 뻔히 알고.
“……게요.”
“네?”
“한다고요.”
우선은 맞선을 잘 보는 게 중요했기에 이를 앙다물고 수긍했다.
“이상한 데 데려가지만 말아요.”
나도 이사만 하면 너한테 볼일 없다, 이거야. 전처럼 스위트룸이니 뭐니 예약해 뒀다간 그대로 안녕이다. 진호가 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수영을 잡아끌었다.
“동의도 했으니 이제 내 부탁 들어줘야죠?”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것 같아 헐레벌떡 수영과 함께 자리로 돌아오니, 지선이 떠나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입 뜨지도 않았는지 그릇 위의 파스타도 새것 그대로였다.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셨나요? 다른 거로 주문할까요?”
입맛이 안 맞으면 도리어 다행이지. 진호가 수영에게 알려 준 계획을 떠올리며 기회를 잡았다.
첫 번째는 진호가 비싼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자고로 먹는 것만큼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비싸고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으면 아무리 못마땅한들 제안을 들어 줄 여유 정도는 생길 터였다.
“저, 여기.”
진호가 기다렸다는 듯 수영에게 메뉴판을 달라고 할 심산으로 손을 들었다. 그때 지선이 진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어, 어……. 허공에 뜬 손이 천천히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지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엔 무거운 침묵만 남았다. 시도도 하기 전에 첫 번째 계획이 물 건너 가 버렸다.
“크흠. 제가 분위기 좀 띄워 봐도 될까요?”
이대론 안 되겠던지 적막한 공기를 뚫고 수영이 테이블 앞에 다가섰다. 변함없이 무표정한 가운데 지선의 눈초리가 매서운 기색을 띠었다. 마치 ‘당신이 왜?’라는 듯했다.
“이건 이분이 VIP이신데 특별히 이벤트를 요청하셔서 해 드리는 겁니다.”
수영이 진호를 공손히 가리키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에둘러 변명했다.
“고객님. 혹시 지갑 있으십니까?”
수영이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채 지선을 향해 두 손을 배 앞에 모아 공수했다. 지선이 수영을 위아래로 길게 훑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는 건지 참여하기 싫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대답은 안 해도 의사는 표현하는 걸 보니 심기가 심하게 뒤틀린 건 아닌 듯했다.
“그러시다면.”
수영은 당황하지 않고 진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객님은 있으시죠?”
“어……. 네.”
잠시 망설였던 진호가 지갑을 꺼냈다. 분위기를 살린답시고 뭔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지갑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의문투성이였지만 그밖에 다른 방법도 없었던 터라 수영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안에 동전이 있으면 모두 꺼내 주세요.”
지폐도 아니고 동전으로 분위기를 어떻게 띄우겠다는 거야? 더욱 알 수 없어진 주문에 진호가 갸웃거리며 수영을 쳐다봤다.
‘일단 해 봐요.’
수영이 작게 입 모양으로 진호를 보챘다. 별수 있나. 진호가 하는 수 없이 지갑 안의 동전을 털어 냈다. 최근 현금을 많이 썼더니 꽤 많은 동전이 탈탈 털려 나왔다. 진호가 지갑에서 500원, 100원, 50원, 10원 할 것 없이 동전만 싹 다 골라내 테이블 위에 정렬하는 사이, 새 유리잔을 가져온 수영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제가 뒤돌아 있을 테니 동전을 원하시는 만큼 여기 빈 유리잔 안에 떨어뜨려 주세요.”
마술이라도 보여 주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분위기를 띄워 보겠다는 말이 이해됐다. 진호가 알았다는 듯 까딱이자 수영이 뒤를 돌았다. 챙그랑. 챙. 챙. 한 손안에 잡히는 만큼 동전을 집은 진호가 동전을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가 아플 정도로 귓속에 파고들었다. 진호가 다른 손으로 제 귀를 막으며 한두 개씩 느리게 동전을 넣었다.
“다 넣었어요.”
손안의 동전을 전부 털어 넣은 진호가 귀에서 손을 떼며 수영을 불렀다. 수영이 두 사람 쪽으로 돌아서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럼 제가 이 속에 있는 동전이 얼마인지 맞혀 보겠습니다.”
응? 진호의 낯빛이 얼빠진 듯 하얘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수영이 분위기를 띄워 본답시고 급작스럽게 고안한 장기는 동전 소리로 금액 맞추기 묘기였다. 이걸로 진짜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저처럼 지선이 헛웃음이라도 터뜨린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신기한 차력 쇼도 아니고, 그렇다고 멋진 마술도 아닌 떨어진 동전의 액수를 맞추는 듣도 보도 못한 묘기였으나, 이 괴상한 특기에 남은 희망을 건 진호가 꿀꺽, 침을 삼켰다. 짠돌이라면 응당 맞출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어쩐지 긴장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제발 피식하기라도, 아니면 입꼬리가 꿈틀거리기만이라도 해라. 진호가 지선을 향해 주문을 걸듯 깍지 낀 양손을 꼭 모았다. 지선은 세상의 흥미란 흥미는 다 잃은 눈으로 수영을 관전하고 있었다.
“제 답은요.”
대조적인 두 사람의 상판을 보던 수영이 괜히 말 사이에 틈을 주어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4,360원입니다.”
경매장에서 낙찰가를 선언하듯 엄숙하게 예상 금액을 입에 올린 수영이 승리를 예상하며 씩 웃었다. 저래 놓고 틀리면 안 되는데. 조마조마하며 진호가 유리잔 속의 동전을 꺼냈다.
“하나, 둘, 셋…….”
지선에게 잘 보이게 앞으로 내밀며 동전의 개수를 센 진호가 마지막 동전을 놓으며 외쳤다.
“4,360원!”
설마 했는데 이걸 맞추네. 괜히 짠돌이가 아니야. 진호가 신기해하며 지선에게 주의를 돌렸다. 이 정도면 기가 차서라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솔직히 제가 지선이라면 별 희한한 묘기에 입가가 움찔거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
칼바람이 세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진호와 눈이 마주친 지선은 놀랍게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외려 전보다 어두워진 듯한 낯빛에 진호의 낯빛 또한 짙어졌다. 짠돌이 새끼. 자신 있다는 듯이 말하더니 실패네. 눈을 굴려 면박을 주자 수영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짠돌이가 그럼 그렇지. 잘될 거라고 잠시나마 빌었던 내가 등신이다.
‘어쩔 거예요?’
진호가 입 모양으로 책임을 물었다. 수영이 평온한 눈빛으로 진호를 안심시키며 지선에게 말을 꺼냈다.
“이벤트가 별로 재미없으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사죄의 뜻으로 노래 한 곡 올리겠습니다.”
뜬금없이 웬 노래? 예정에 없었던 행동에 눈을 번쩍 뜨며 수영을 바라보았다.
“고객님도 같이 하시죠.”
눈을 마주친 수영이 진호의 팔을 잡으며 일으켜 세웠다. 분위기를 우중충하게 만들어 놓은 건 본인이면서 나는 왜? 억울한 진호가 수영을 향해 눈가를 모로 세우자, 수영이 작게 소곤거렸다.
“남은 건 이것밖에 없어요.”
“왜 나도 같이하는 건데요?”
“형이 도와 달라고 했으니까 옆에서 뭐라도 해야죠.”
수영이 지선 쪽을 흘깃 보며 진호를 잡아당겼다. 지선은 전보다 배는 침울해진 얼굴로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진호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이거라도 해야지. 어쩌겠어. 여태 지선이 보여 준 반응으로 보아, 뭘 하든 어지간해서는 상한 심기를 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던 진호는 수영에게 끌려가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매니저님. 지금 무대 좀 쓸 수 있을까요?”
홀 중앙에 위치한 간이 무대로 진호를 데려간 수영이 매니저를 불렀다.
“무대까지 쓰려고요?”
평범하게 부르면 어디가 덧나냐. 생각보다 큰 규모에 진호가 흠칫 놀라며 수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늘 예약된 무대는 없는데, 무슨 일이죠?”
매니저가 유니폼을 입은 수영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웨이터가 난데없이 무대를 쓴다고 해서 의아한 듯했다. 수영이 진호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
“이 고객님이 무대를 빌리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언제 그랬냐? 진호가 원망하듯 흘겨보자 수영이 동참하라는 듯 눈짓을 했다. 매니저가 시선을 진호에게 옮기더니 찌푸려졌던 미간을 부드럽게 풀었다.
“고객님께서 사용하신다고요. 현재 예약이 비어 있어서 사용은 가능하신데, 한 시간 단위로 예약금을 내셔야 합니다.”
“그러신대요.”
진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수영이 대신 답했다. 그러더니 어느 틈에 챙겨 온 진호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매니저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계산하시면 된답니다.”
이러다 무대에서 노래까지 하게 생겼네. 진호가 말리려고 손을 내밀자 수영이 앞을 가로막으며 속삭였다.
“어차피 내 카드잖아요. 밑져야 본전이에요.”
망설여진 진호가 주춤했다. 사실 별다른 방도가 없기는 했다. 말을 더하면 더할수록 끝없는 땅굴 속으로 침잠하는 와중에 잡을 지푸라기가 수영 하나뿐이라서.
“지금부터 한 시간만 계산해 주세요.”
그 틈에 수영이 매니저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진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인 매니저가 카드를 받아 계산을 치렀다.
“이번에도 망하면 봐요. 데이트고 뭐고 없던 일 되는 거예요.”
불안해진 진호가 단단히 일렀다. 매니저에게서 카드를 돌려받은 수영은 자신 있는 듯 진호를 무대 위로 이끌었다.
“제가 고향에서 이거 했을 때 반응이 안 좋았던 적이 없어요.”
그럼요. 그러시겠죠. 진호가 자포자기하며 수영에게 잡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두 번 연달아 계획이 실패해서 그런지 기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뭘 하라고 데려온 거죠?”
짠돌이랑 함께 노래를 부를 의향은 조금도 없었다. 제가 곁에서 같이 한다고 해도 좋은 효과가 없을 것이 당연했을뿐더러 본래 노래나 춤 같은 건 질색이었다. 나란히 서서 손뼉이라도 쳐야 하나. 쭈뼛거리며 수영을 따라 올라온 진호가 테이블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둘러보며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하겠다고? 안면에 철판을 깐 짠돌이는 몰라도 저는 창피해서 도저히 못 할 것 같았다.
“형은 옆에서 춤이라도 춰요.”
“네?”
“그래야 흥이 돋죠.”
수영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마이크가 준비된 무대 중앙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이런 걸 하고 싶으면 혼자 하라고.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어서 뒷걸음질 치는데, 수영이 대뜸 손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아, 아. 여러분. 좋은 저녁 보내고 계신가요?”
수영은 무대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다름이 아니라, 고객님 중에 노래를 선물하고 싶으시다는 분이 계셔서 제가 이렇게 무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오오-”
“뭐야? 누가 프러포즈하는 거야?”
“어머. 로맨틱해.”
고급 바나 레스토랑에서 으레 볼 수 있듯, 무대를 빌려서 하는 고백 이벤트로 여긴 사람들의 관심이 수영에게 쏠렸다.
“여기 계신 서진호 님이 신청해 주셨고요. 저쪽 테이블에 앉아 계신 안지선 님께 꼭 들려주고 싶으시답니다.”
수영이 양손을 모아 지선이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자 사람들의 이목이 지선 쪽으로 옮겨 갔다.
“나는 빼 주면 안 돼요?”
진호가 수영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수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형이 나서서 해야 지선 씨가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이 새끼, 궁지에 몰린 제 모습을 재미있어하는 건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것 같다. 미묘하게 올라간 수영의 입꼬리가 아니꼬웠다.
“도와주려는 게 아니고,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죠?”
“에이, 설마. 내가 얼마나 형이랑 데이트하고 싶은지 모르죠?”
진호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수영이 태연하게 미소로 화답했다. 웃음으로 무마하면 다냐. 한 대라도 치고 싶은 걸 -세어 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백서른한 번째로 참으며 진호가 힘이 풀린 수영의 손아귀에서 제 손목을 빼냈다. 어쩌겠어. 이렇게 해서 화가 가라앉는다면 대충 장단이라도 맞춰 줘야지. 어느새 목적이 지선의 기분 풀기가 되어 버린 진호가 수영과 거리를 두고 섰다.
“그러면 바로 노래 시작하겠습니다.”
근데 보통 세레나데는 피아노 같은 거라도 치면서 부르는 거 아닌가? 진호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스칠 때 즈음, 수영이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첫 소절을 불렀다.
“옹헤야- 옹헤야- 모두 같이 옹헤야-”
간단히 호응이라도 해 주려고 박수를 치던 진호의 손이 느려졌다.
“즐거웁게 옹헤야- 노래하세 옹헤야-”
노래의 정체를 깨달은 진호의 사고가 정지했다. 짠돌이랑 있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았나. 이상한 꿈을 많이 꾸네. 교과서에서나 봤던 토종 민요를 다 듣고. 전에 꾼 꿈에서는 짠돌이랑 자기까지 했는데, 민요 정도야 이상한 축에 끼지도 않지.
……그런데 그거 꿈 아니었지 않나? 그러면 이것도.
“와, 씨…….”
정신이 현실로 돌아온 진호가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제 입을 틀어막으며 참았다. 고향에서 반응이 좋았다더니, 민요였냐. 게다가 농사할 때 부르는 노동요라니.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지. 관객들이 죄다 할아버지, 할머니뿐일 텐데.
하지만 여긴 농촌도 아니고, 하물며 관객들이 농부들인 것도 아니다. 프러포즈인 줄 알고 기대했던 관객들의 표정이 싸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에헤에헤 옹헤야- 어절씨구 옹헤야- 잘도 한다 옹헤야-”
저기요. 분위기 싸해진 거 못 느끼세요? 여기서 혼자서만 싱글벙글하시거든요? 떠들썩하던 레스토랑 안이 순식간에 얼음장이 된 것도 모르는지 수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심지어 진호에게 따라 하라는 듯 후렴구인 ‘옹헤야’ 부분에서 마이크를 들이밀기까지 했다. 진호의 눈가가 점점 붉어졌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선을 망치려고 작정했네. 다급히 시선을 돌리니 지선이 한결같이 미동 없는 얼굴로 수영을 맹렬히 쳐다보고 있었다.
“두리둥실 옹헤야- 밝은 달이 옹헤야-”
“됐으니까 이제…….”
맨날 짠돌이한테 속으면서 또 속아 넘어가다니. 체념한 진호가 수영을 말리려고 손을 뻗는 순간, 양옆으로 미약하게 벌어지는 지선의 입가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어떠한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선만 주야장천 쳐다본 진호에게는 아주 커다란 발견이었다. 그것은 분명 지선이 호응을 보일 것이라는 증거였다. 순간 흥분한 진호가 멈추었던 손뼉을 다시 치기 시작했다.
“에헤에헤-”
“…….”
“어절씨구-”
“…….”
“잘도 한다-”
“……헤야.”
그 조그만 변화에서 희망을 본 진호가 후렴구에서 수영이 건넨 마이크에 대고 작게 ‘옹헤야’를 읊조렸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지선만 노린다는 생각으로 진호가 흥을 타는 수영에게 어울려 주었다.
“잘도 한다 옹헤야-”
“옹헤야-”
두 사람의 합창을 끝으로 노래가 끝났다. 잠잠한 장내에는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넋을 잃은 듯이 -일부는 분노가 차오른 듯이- 일관된 자세로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노래를 완창했다는 뿌듯함에 미소를 짓고 있는 수영 외에는.
내가 뭘 한 거지. 싸늘한 대중의 반응에 정신을 차린 진호가 머리를 흔들었다. 역시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민요로 분위기를 띄우다니. 무대에서 내려가면 곧장 다그칠 셈으로 진호가 수영의 팔을 잡았다. 넌 이제 나한테 죽었어. 데이트고 뭐고, 일단 한 대 맞자.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진호가 수영을 계단으로 끌고 내려가려는데, 구석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풉.”
“…….”
“푸핫. 하하!”
누군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진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하하하…….”
지선이 손뼉을 마주치며 숨이 넘어갈 듯이 웃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에 진호가 제 눈을 비볐다. 설마 이게 꿈인 건 아니겠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수영을 보자, 수영이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락일 줄 알았던 결말은 뜻밖에도 대성공이었다. 진호가 비로소 한숨 돌리며 거머쥐었던 수영의 팔을 풀어 내렸다.
“아하하…… 흐으, 흐으윽.”
웃고 있는 거, 맞겠지? 아래로 고꾸라진 지선의 정수리를 지켜보던 진호가 괴상하게 뒤바뀐 웃음소리에 계단을 내려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흐윽, 흑, 으허엉-”
“돌겠네, 진짜.”
앞뒤 잴 것 없이 진호가 지선에게 달려갔다. 잘 나가다 갑작스럽게 왜 우냐고. 이제 막 성공이 눈앞에 보였는데 이러기냐.
“괜찮으세요?”
바닥에 엎어져 대성통곡을 하는 지선을 일으켜 세우며 상태를 살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흐으, 그, 그게…….”
진호를 보며 간신히 울먹거리던 지선이 뒤따라온 수영을 보더니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엉-”
“저기, 우선 밖으로 나가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쪽을 손가락질했다. 이곳은 너무 눈에 띄니까. 진호가 힘이 없어 허물어지는 지선의 어깨를 잡아 지탱하며 수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선 씨 좀 밖으로 데려가요.”
수영이 별로 내키지 않는 듯 흐느적거리는 지선을 내려다보더니 마지못해 어깨에 들쳐 멨다. 수영이 출구로 걸음을 옮기자, 진호가 치마가 말려 올라간 지선의 뒤를 외투로 가려 주며 재빨리 수영을 따라갔다.
“흐윽, 으으…….”
아무도 없는 복도에 다다른 수영이 내려놓은 후에도 지선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진호가 외투와 함께 챙겨 온 휴지 조각을 건네며 지선을 달랬다.
“힘드시면 집으로 돌아가실래요?”
휴지를 받아 든 지선이 까맣게 번진 화장을 닦아 내며 진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저, 저기요?”
진호의 손이 어쩔 줄을 모르고 허공에 맴돌았다. 반면 수영이 눈썹을 작게 일그러뜨렸다.
“지선 씨?”
지선을 바로 세우려고 어깨에 손을 올리는데, 수영이 진호의 손목을 잡아 붙들었다. 그때 지선이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요…….”
“네?”
“역시 봐야겠어요. 그 애를.”
이게 무슨 말이야. 어리둥절한 진호가 눈을 끔뻑이며 수영을 쳐다보는데, 지선이 진호의 어깨에 파묻었던 이마를 들어 올렸다.
“저…… 사실은 여자 좋아해요.”
뜻밖의 고백에 진호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라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계속 결혼을 재촉하셔서…… 그 일로 다투다가 헤어졌거든요.”
“…….”
“전 그 친구 말고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선이라도 봐 보라고 독촉하시고 해서, 마침 혜린 언니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부탁하기에…… 어쩔 수 없이 나왔는데…….”
울음이 잦아든 지선이 무덤덤하게 저를 보고 있는 수영과 눈을 마주했다.
“저분의 노래를 듣고 그 애가 떠올라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무슨 사정인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옹헤야’의 어떤 부분이 심금을 울린 거지. 진호가 같이 슬퍼하기도, 그렇다고 웃기도 어려운 마당에 어쩌지를 못하고 허둥거렸다. 난감한 진호의 태도를 예상한 듯 지선이 설명을 이었다.
“제 애인이 민요 명창이었거든요…….”
아아. 그러셨군요. 하하. 참. 이런 우연이. 진호가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꾹 다물어 참았다.
“제가 말이 없어서 많이 당황하셨죠……. 저도 첫 만남에 예의 없이 굴고 싶진 않았는데, 맞선 자리가 영 내키지 않아서요.”
지선이 미안한 듯 울상으로 올려보자, 진호가 어깨를 잡아 지선을 멀리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이젠 끝인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 돌파구가 있었다. 이거 간단하게 해결되겠는데? 빛을 잃었던 진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죄송하지만 이 선 자리는 없었던 거로 하는 게…….”
“아닙니다. 지선 씨. 그러면 안 돼요.”
활기를 되찾은 진호가 급히 지선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어요.”
“뭔데요……?”
“저랑 지선 씨는 친구 사이로만 지내고, 부모님들께는 서로 마음에 든 것처럼 얘기하는 거예요. 지선 씨는 저를 핑계로 대고 이전 여자 친구분 만나시면 되고요. 그러면 이런 귀찮은 선 자리는 앞으로 안 나오셔도 되겠죠.”
“흡, 그런 방법이…….”
솔깃해진 지선이 훌쩍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근데 그럼 진호 씨는……?”
“저도 선 자리는 질색이라서. 지선 씨를 핑계로 피할 수 있으면 좋거든요.”
진호를 보던 지선이 수영 쪽으로 눈길을 주더니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으니, 댁으로 모셔다드릴까요?”
옆에서 잠자코 서 있던 수영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아, 괜찮아요. 끝나면 기사님이 오기로 했거든요.”
진호에게서 외투를 가져가며 거절한 지선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집에 돌아가겠다고 알렸다. 금방 차가 올 것이라는 지선을 따라 로비로 내려가니,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 문을 열어 탑승한 지선이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약속한 건 안 잊으셨죠?”
함께 부모를 속이기로 합의한 것을 환기하며 진호가 손을 흔들었다. 지선이 빨개진 눈으로 진호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네. 두 분도 행복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세단이 호텔을 떠나갔다.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호가 눈을 깜빡였다. 뭔가 불쾌한 오해를 산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저분이랑 연락할 건 아니죠?”
수영이 멍한 진호의 팔꿈치를 가볍게 두드렸다. 진호가 수영의 어깨를 잡아 저를 향하도록 돌렸다.
“알고 있었죠?”
“뭘요?”
“지선 씨 여자 친구 얘기요.”
“전 방금 처음 들었는데요?”
수영이 결백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능청스럽게 치켜뜬 눈매가 의심스러워도 엄청나게 의심스러웠다. 거짓말. 그렇지 않고서야 그 자리에서 그리 당당하게 민요를 부를 수가 있나. 분명 날 놀리려고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거겠지.
“어떻게 알았어요? 누나한테 들었어요?”
“와. 나 진짜 억울한데.”
수영이 진심이라는 듯 흔들림 없이 진호의 눈을 직시하자, 진호가 어깨를 잡았던 손을 살며시 내렸다. 뭐야. 정말로 우연이었던 거야? 뭐, 워낙 눈치가 없는 짠돌이니 그 많고 많은 곡 중에 민요를 선택할 수도 있을 법한데……. 진호가 물음표를 거두지 않은 채 저를 쳐다보자 수영이 웃으며 진호의 허리를 쥐었다.
“형. 우리 다음 데이트는 어디서 할까요? 난 당장에 호텔로 들어가도 괜찮은데.”
이게 사람 가지고 장난치나. 빙긋이 웃는 낯짝에 주먹을 꽂고 싶은 심정을 백서른두 번째로 누르며 진호가 수영의 손을 잡아떼어 냈다.
“알바 안 해요? 가서 서빙해야죠.”
“어차피 업무 시간도 끝나서, 형이랑 남는 방 잡아서 들어가도 돼요.”
“일단 유니폼부터 벗고……. 방을 왜 잡아요?”
아차. 하마터면 무심코 넘어갈 뻔했네. 진호가 뒤늦게 수영을 흘겨보며 날을 세웠다.
“호텔 데이트 해야죠.”
“이상한 데 데려가지 말라니까요?”
“호텔이 이상한 데예요? 무슨 상상하는 거예요? 형.”
진호가 약속의 조건을 들이밀자, 수영이 순진한 척 눈을 키웠다. 아예 말을 말자. 진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영에게서 등을 돌려 택시가 일렬로 정차해 있는 정류장으로 발을 옮겼다.
“아, 알았어요. 장난 안 칠게요. 이 옷만 반납하고 같이 가요.”
수영이 항복해도 진호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형. 농담이라니까요?”
농담은 무슨. 넌 농담을 그런 눈으로 하냐. 묘하게 진심 같았던 수영의 눈빛을 떠올리며 진호가 멈춰 섰다.
“3분 줄게요. 그 안에 빨리 갈아입고 와요.”
“3분은 좀.”
“하나, 둘…….”
“다녀오겠습니다!”
뒤에서 후다닥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많이 급한가 보네. 진호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손으로 가려 쓸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라더니, 바보 같긴. 그래서 쉽게 누굴 좋아하면 안 되는 거라고. 진호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수영을 향해 씁쓸한 조언을 뱉으며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쉽게 좋아하면 안 되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혼잣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별 하나 없이 깜깜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