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8)

12.

“응. 지금 도착해서 들어와 있어. 바뀐 건 별로 없네?”

진호가 혜린과 통화하며 낯익은 현관에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자잘한 가구들이 사라진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너 다시 올 거 같아서 별로 손대지 않았어. 어때. 용돈도 줘, 집도 지켜 줘, 이사도 도와줘. 이 정도로 챙겨 주는 누나 봤어?

진호가 뒤에 서서 저를 지켜보고 있는 수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좋은 누나라면 감시관을 붙이진 않을 텐데. 카드도 되찾고, 집도 되찾으면 이 자식의 잔소리가 늘어날 게 뻔했다.

-서진호. 대답이 없네?

“알았어. 고마워.”

마지못해서 원하는 답을 주긴 했지만 아메바의 솜털만큼은 고마운 점도 있었다. 누나가 아버지를 설득해 줬으니 이 집에도 돌아올 수 있었고, 이삿짐도 손쉽게 옮길 수 있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이사 올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2주, 길면 한 달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선 진호가 서랍 안에 단정하게 개어져 있는 제 옷들을 확인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는 수영의 집에 있던 옷들이었다.

어제 지선을 만나고 수영과 함께 옥탑방에 돌아간 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누나한테서 이전에 살던 집으로 옮길 짐을 준비해 두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곧 이사를 도우러 사람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저와 약속한 대로 지선이 안 원장에게 착실하게 결과를 전달한 모양이었다.

-너도 꽤 하더라? 지선이가 너 되게 마음에 들었대. 사장님도 소식 듣고 놀라서 주말 아침에 출근하셨어. 네 짝 찾았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실 거 같은데.

그건 좀 곤란한데.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진호가 서랍을 닫으며 허리를 세웠다. 선을 잘 봐서 아버지의 간섭이 줄어들면 좋지만, 그게 지나치면 지선과 엮이게 될 수 있었다. 집안의 경사처럼 큰일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누나가 알아서 잘 막아 줘. 난 두 번 다시 그런 자리 갈 마음 없으니까.”

지선과의 만남만 생각해도 머리를 쓰느라 골치가 아팠다. 이왕이면 집안에서 주도해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가족들이 자유롭게 내버려 둬야 저와 지선이 서로 만나는 척하면서 딴짓을 할 수 있으니까.

-근데 좀 웃기지 않아? 너네 둘 다 동성을 좋아하는데 서로 마음에 든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어.

핸드폰 너머에서 혜린이 깔깔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는 지선이 여자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소개한 거겠지. 하나도 안 웃긴다고 받아칠 수도 있었지만, 누나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기를 택했다. 원치 않게 누나에게 진 빚이 상당했다.

-지선이는 너 게이인 거 아니? 알면 어떨지 궁금하다.

“누나, 언제까지…….”

언제까지 놀릴 거냐고 물으려는데, 제 방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이상한 점을 목격한 진호가 우두커니 서 있는 수영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보일러실 치웠어?”

수영이 지내던 조그마한 보일러실이 가구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안에 있던 침대며 책상, 수영이 쓰던 책과 옷, 그 외에 각종 생활용품이 싹 사라진 것이다.

-너 집 나가고 나서 사장님 지시로 수영 씨 물건을 다 빼 뒀는데. 그거 말해 주는 걸 깜빡 잊었네.

짠돌이의 물건이라고 해 봤자 비슷한 디자인의 옷가지 몇 벌과 세면도구 같은 게 전부일 테지만 수영에게 있어서 그건 소중한 자산이었다. 게다가 짐이 남아 있을 줄 알고 옥탑에서 별로 안 챙겨 왔는데. 먼지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방을 보는 수영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누나가 잊는 것도 있어?”

말도 안 된다. 업무만큼은 전부 칼같이 처리하는 서혜린이 그거 하나 말해 주는 걸 잊었을까. 아무리 봐도 수상한 속셈을 숨기고 있을 터였다.

-그러게. 어쩌다 보니 그걸 잊어버렸네?

혜린이 과장된 연기 톤으로 맞장구를 쳤다.

-당분간 네 방에서 둘이 오붓하게 끌어안고 자든가 해. 수영 씨 집에서는 맨날 같이 잤으니까 괜찮지?

“누나.”

-필요하면 킹사이즈로 바꿔 줄게.

“누나, 야, 서혜린!”

뚝.

“아, 씨. 이 누나가 진짜.”

진호가 핸드폰을 내리며 구시렁댔다. 같이 이 집에서 지내게 한 것도 모자라서 같이 자라니, 왜 자꾸 나랑 짠돌이를 엮지 못해 안달이냐고. 싫어하는 거 알면서 일부러 놀리려고 이러나?

“형. 나 먼저 씻을게요.”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수영이 눈가를 둥그렇게 휘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 걸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는데요.”

이 새끼 싱글벙글한 것 보소. 씻고 나오면, 뭐. 내 방에 재워 줄 줄 아나?

“소파 있으니까 거기서 자요. 거기는 넓어서 불편하지 않을 테니까.”

진호가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거실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수영이 들은 건지 만 건지 씩 웃더니 수건을 챙겨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저 새끼. 사람 말은 왜 씹어. 은근히 불안해진 진호가 닫힌 욕실 문을 황망하게 바라봤다. 근데 쟤는 자기 짐이 몽땅 사라졌는데 별말이 없네. 전 같으면 피 같은 돈 돌려내라고 한바탕 난리를 쳤을 것 같은데.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괜스레 기분이 미묘해진 진호가 제 방으로 피신했다. 짠돌이가 어찌 되건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으음…….”

감았던 눈을 슬쩍 뜨니 방 안이 깜깜했다. 개인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워서 뒹굴던 중에 저도 모르게 잠에 빠졌나 보다. 진호가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에 손을 뻗었다. 침대맡을 더듬다가 짚이는 게 없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묵직한 것이 허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니 수영이 저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게 진짜.”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니까. 초기의 계약 조건은 잊었는지 침대의 한쪽을 차지한 채 저를 안고 있는 게 너무나 당당해서 기가 찰 지경이었다.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떼어 내려고 하니 역시나 힘이 세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하여간 말을 참 안 들어요. 진호가 한숨을 내쉬며 수영의 팔을 놓았다. 짠돌이한테 안겨서 잠든 게 한두 번도 아니니, 새삼 거리낄 것도 없었다.

“자요, 그냥. 아직 새벽 1시밖에 안 됐어요.”

수영이 저와 간격이 벌어진 진호를 당겨 안으며 정수리에 턱을 걸쳤다. 이 새끼 깨어 있으면서 자는 척이었냐. 흠칫 놀란 진호가 굳건하게 깍지를 낀 수영의 손등을 손바닥으로 통통 쳤다.

“이걸 놔야 편히 자죠.”

“안 돼요. 이건 내 수면제라서.”

이기적인 놈. 자기만 잘 수 있으면 다냐. 수면제까지 이런 거로 퉁치려고 하니 과연 짠돌이다웠다. 속으로 욕하는 게 뻔히 보였는지 수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자장가라도 불러 줘요?”

“됐거든요.”

진호가 삐죽대며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밀착된 탓에 수영의 따뜻한 체온이 등에 닿았다. 좀 떨어지라고 저항이라도 해야 하는데 어째선지 거부하고 싶지가 않았다. 허리를 감싼 적당한 무게가 방패를 두른 듯한 안정감을 주었다.

“형. 우리 데이트 어디로 갈까요.”

“…….”

“1박 2일 여행은 어때요? 부산? 제주도?”

“…….”

“좋다고요? 알았어요. 제주도 호텔 잡아 놓을게요.”

“제발 닥치고 잠이나 자면 안 될까요?”

무시하려다 참다못한 진호가 수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수영의 숨결이 닿은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긴장이라도 했나. 아까 전부터 왜 심장이 두근거리지. 빨라지는 맥박을 들키지 않으려고 진호가 가슴께를 문지르며 퉁명스럽게 단언했다.

“부산이든 제주도든 호텔은 안 갈 거니까 무조건 당일치기로 잡아요.”

“그래요? 진심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철면피 같은 태도에 진호가 수영에게서 뒤돌아 누우려고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심장이 빨리 뛰었던 건, 아무래도 이 자식 때문에 화병이 나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됐으니까 이제 잠 좀.”

“지금 섰잖아요. 형.”

뭐? 수영을 노려보던 눈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원망스럽게도 제 분신이 바지 위로 힘차게 머리를 쳐들고 ‘까꿍!’을 외치고 있었다. 얘가 왜 이러지. 딱히 자극받을 만한 일도 없었는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진호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 이건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거라고요.”

수영이 전혀 안 믿는 듯 수상쩍은 눈길로 훑더니, 진호가 무방비한 틈을 타서 허리를 잡아끌었다.

“그럼 이래도 아무렇지 않겠네요? 그렇죠?”

수영이 귓바퀴를 엄지로 쓸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진호가 어깨를 움칠거리며 수영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이 새끼가 정말. 정도를 모르고 장난을 막 치네.

“이거 놔요. 빨리.”

“왜요. 아무렇지 않다면서요.”

수영이 진호의 뒷머리를 그러잡아 제 쪽으로 바짝 당기며 말을 이었다.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깝게 다가온 수영 때문에 진호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진동했다. 당혹감에 목뒤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형.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이거 놓…….”

몸이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음과는 다르게 수영을 밀치는 손에 힘이 빠져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아래가 저릿해지는 느낌에 진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수영이 속삭임이 아닌 또렷한 목소리로 진호의 귀에 말을 박았다.

“그럼 얼른 날 좋아해요.”

잔뜩 움츠리고 있는 진호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은 수영이 어깨를 한 번 토닥이더니 미련 없이 손을 떼어 냈다. 이내 답답한 기운이 사라지고 휑한 공기가 상체를 감았다. 침대에서 일어난 수영이 방문을 열고 나가는 소음이 들렸다. 문이 스르륵 닫히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진호는 감았던 눈을 뜰 수 있었다.

“……뭐야.”

발끝에서부터 몰리는 열기에 골이 지끈거렸다. 맥이 팔딱팔딱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불을 말아 쥐는 낯이 얼떨떨했다.

짠돌이의 낯간지러운 장난이야 익숙하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전처럼 수영의 질문에 그게 아니라고 받아칠 수가 없었다. 짠돌이랑 섹스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섹스가 다가 아닌 것 같으니까. 열불이 나서도 아니었다. 짠돌이가 답답해서 이러는 거라면 안겨 있다는 이유만으로 쓸데없이 맥박이 날뛰진 않았을 거다.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신현우랑 사귀기 시작할 때였던가.

아니다. 그때와 비슷하면서도 생소했다. 그러니까 그것과는 다른 감정일 것이다. 진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사고의 흐름을 끊었다. 이 이상 생각했다간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될 것 같았다.

진정하려고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 보니, 세차게 울리는 고동은 여전했다. 짠돌이 새끼. 이래 놓고 자기만 휙 가 버리면.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진호가 젖혀진 이불을 끌어 올리며 수영을 향해 소리 없는 원성을 뱉었다. 아무래도 저는 오늘 밤에 푹 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아니, 아마도 저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잠시나마 어깨를 감쌌던 수영의 손은 델 것처럼 뜨거웠었다.

* * *

“자, 오늘이 무슨 날이었죠?”

오늘 쪽지 시험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김 교수의 물음에 당황한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그중 진호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진호는 평소에 자주 하던 낙서도 잊은 채 창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요 며칠간 진호는 혼란스러웠다. 밤을 꼴딱 새운 그날 이후로 제 신체와 마음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수영이 갑자기 저를 부르거나, 팔을 잡으려 할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가 일쑤였다. 함께 있을 때 신경 쓰이는 쪽은 수영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제 쪽이 더 신경 쓰여서 난감했다. 마치 조울증에라도 걸린 것같이 수영의 사소한 행동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정말 이상했다.

교탁 앞에 선 김 교수가 얼빠진 학생들을 크게 둘러보더니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수영 학생, 서진호 학생?”

제 이름이 불리자 멍해져 있던 진호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발표 준비. 해 왔죠?”

아차. 진호가 가만히 입을 벌렸다. 이번 주 내내 수영이 뇌 속의 지분율을 잔뜩 차지하는 바람에 발표를 깜빡 잊고 말았다. 잊을 게 따로 있지 그걸 잊어버리냐. 진호가 자책하듯 이마를 짚더니 수영의 팔을 두드렸다.

“어떡해요?”

발표는 어떡하냐고 물어봤을 때, 짠돌이가 별일 아닌 것처럼 굴어도 혼자서 챙겼어야 했는데. 진호가 원망하듯 흘겨보자, 수영이 김 교수를 향해 태연하게 손을 들었다.

“네. 해 왔습니다.”

거짓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해도 되나. 그래 봤자 안 해 온 거 금방 들통날 텐데. 진호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수영이 진호에게만 들리게 말하며 무릎을 세웠다.

“내가 미리 준비해 뒀어요. 형은 앉아서 보고만 있어요.”

뭐라고? 진호가 당황한 낯으로 유유히 교탁 앞으로 걸어가는 수영을 응시했다. 웬일로 정장을 입었나 했더니 발표 때문이었나. 반듯하게 다려진 수영의 셔츠를 보며 진호가 남몰래 뺨을 붉혔다. 난 또 나 때문인 줄 알았네.

“발표는 제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김 교수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진호를 향해 의문의 눈길을 보내자 수영이 미리 준비해 둔 답변을 했다. 진호가 조사를 맡은 것으로 이해한 김 교수가 시작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수영이 스크린에 PPT 화면을 띄우며 입을 뗐다. 아직도 얼떨떨한 진호가 마치 제가 발표를 하는 듯이 조마조마한 채로 스크린에 눈길을 주었다. PPT의 첫 화면을 본 진호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의 화려한 삼원색으로 꾸며진 배경과 그 안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큼지막한 글씨. 아무래도 짠돌이는 미적 가치관이 범인들과는 많이 어긋나 있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에 차 있던 학생들 역시 PPT를 보는 눈빛이 식어 있었다. 냉랭해진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수영이 여유로운 웃음을 띠며 설명했다.

“제가 조사한 기업은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계 미국 기업, IGN 그룹입니다. 수제 구두 및 정장 브랜드로, 구두가 주력 상품이죠. 고급화 전략을 추구하여, 회사에서 인증한 장인이 직접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수영이 IGN을 언급하자, 몇몇 학생들이 뒷자리에 앉은 현우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현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수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은 문제점입니다.”

IGN의 간단한 역사와 현황을 읊은 수영이 페이지를 넘기자, 스무 줄은 족히 돼 보이는 문단이 한 면에 들이찼다.

“올해 글로벌 브랜드 가치 순위 92위로, 한국계 기업 중에서는 상위권에 속하나 전 세계적으로는 그다지 높지 않은 순위입니다. 여기 그래프를 보시면, 고급화 마케팅에 치중한 나머지, 대중 인지도 면에서 같은 계열의 기업보다 떨어지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무슨 숨은그림찾기냐고. 배경 귀퉁이에 조그맣게 자리한 그래프를 보며, 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발표는 잘하네. 자신 있는 태도로 설명을 이어 나가는 수영은 꽤나 전문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하며 진호가 굳어 있던 입가를 부드럽게 풀었다.

“따라서 마케팅적인 면에서 친숙화 전략이 필요합니다. 현재 유명한 수제 의류 브랜드, 소위 말하는 명품 브랜드는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고급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히 지금의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홍보에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댄 현우를 향해 수영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역사가 짧은 IGN의 경우는 이러한 고급 브랜드와 다르게 대중 마케팅에 힘을 쏟아야 더 많은 고객층을 유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예시로는 대중화 상품으로 가격대를 낮춘 제품 라인을 기획하거나 MZ 세대를 겨냥한 체험 중심의 팝업 스토어를 여는 방안이 있겠습니다.”

이후 수영은 대중화 전략에 대한 예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더니 발표를 마쳤다. 수영의 발표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으나, 그 대상이 하필 IGN이었던 탓에 학생들이 현우의 눈치를 봤다.

“몇 가지 질문할게요.”

기다렸다는 듯이 현우가 말을 꺼냈다. 또다시 시작이네. 진호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최근 IGN은 포털 사이트, SNS 등 온라인상에서는 보통의 중저가 브랜드보다 인지도가 높은 편인데, 다른 명품 브랜드보다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로 대중 인지도가 낮다고 판단한 겁니까?”

말투가 못마땅하긴 했으나 논리적인 질문이었다. 나름 유학파라고 공부를 하긴 했나 보네. 대학생이었던 시절에도 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니 그 실력이 어디 가진 않은 듯했다. 하물며 IGN에 근무하기도 했으니 짠돌이보다는 알고 있는 것이 많을 터였다. 진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수영을 바라보았다.

“IGN의 주요 상품이 중저가 구두가 아니라 고급 수제 구두이기 때문에 비교 대상을 같은 명품 브랜드로 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SNS에서 유명한 것은 국내에서만 그렇고, 이 또한 제품보다는 한국계라는 점 때문에 이슈화된 것이므로 유의미한 자료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꽤 하는데? 수영이 차분하게 답변하는 것을 보고 진호가 눈을 번쩍 키웠다. 짠돌이가 괜히 과탑이 된 건 아닌 듯했다. 현우가 수영을 향해 눈가를 좁히더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IGN에서도 ATL 마케팅(TV, 라디오, 신문, 잡지 등의 일방향적 마케팅)을 활용하여 꾸준히 광고하고 있는데 친숙화 전략이 부족하다는 건 잘못된 거 아닙니까? 제대로 조사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데요.”

“IGN은 뉴 미디어같이 젊은 세대에 친숙한 미디어 활용이 적은 편입니다. 최근의 마케팅은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쌍방향적 방식이 트렌드인데, 오래된 마케팅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니 더욱 적극적인 친숙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조교님이야말로 제대로 근무 안 하신 것 같은데요.”

점점 가열되는 논쟁에 학생들의 시선이 수영과 현우 사이를 바쁘게 지나다녔다. 수영이 자신의 계획과 다르게 답을 착실히 해내자, 비위가 상한 현우가 눈썹을 삐뚜름하게 세웠다. 현장에서 일했던 실무자가 한낮 학부생보다 못해 보이는 것에 열이 뻗친 듯했다. 레이저라도 쏘는 듯 팽팽한 둘 사이를 진호가 불안한 눈으로 주시했다. 강의실 안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제자들의 학구열에 심취한 김 교수뿐이었다.

“남수영 학우는 발표하는 기본자세가 안 돼 있는 것 같네요. PPT 색상과 배경 선정을 너무 대충 한 거 아닙니까? 디자인도 발표의 일부인데요.”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던 현우가 휘황찬란한 수영의 PPT 화면을 가리켰다.

“이거 교수님 수업 자료랑 똑같은 디자인인데요. 지금 교수님의 미적 센스를 지적하시는 겁니까?”

수영의 답변에 학생들의 이목이 김 교수에게 쏠렸다. 때아닌 봉변에 김 교수의 민숭한 이마에 땀이 솟았다. 현우가 잽싸게 말을 바꿨다.

“색상이 아니라, 폰트 말하는 겁니다. 글씨체가 궁서체가 뭡니까? 글자 수도 좀 줄이고.”

“그럴 줄 알고 폰트별로 PPT를 만들어 왔습니다.”

흔들리던 진호의 표정이 무심하게 변했다. 이럴 줄 알았어. 웬일로 둘이 정상적인 대화를 하나 했더니, 금세 유치한 싸움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제발 저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며, 진호가 수영이 ‘PPT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이름의 폴더를 클릭하는 걸 담담하게 지켜봤다. 50가지라니, 도대체 얼마나 준비한 거야. 수영의 폰트에 대한 집착을 이해해 보려던 진호가 이내 포기했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바탕체, 굴림체 다 있습니다. 이 중에 조교님 마음에 드는 거 하나는 있지 않을까요?”

수영은 글씨체가 다른 50개의 PPT를 일일이 보여 주었다. 동그란 원 안의 깜찍한 양재와당체를 봤을 때, 진호는 그만 창피해지는 낯을 두 손으로 가려 버렸다. 어째서 부끄러움은 내 몫인지.

“50개 다 구려요. 하다못해 함초롬바탕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학교 컴퓨터에 폰트가 이런 것밖에 없었습니다. 조교님이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라도 해 주실 건가요?”

“지금 나한테 시비 겁니까?”

“일방적으로 시비 걸고 있는 건 조교님인데요.”

“와, 나. 이 새끼가.”

현우가 열받은 듯 책상을 치며 일어서자, 뒤에서 지켜보던 김 교수가 상황을 정리했다.

“자, 자. 두 사람 다 흥분은 가라앉히고. 발표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네요. 준비한 거 잘 봤어요.”

교탁까지 걸어 나온 김 교수가 수영의 등을 두드리며 자리로 돌려보냈다. 기대 이상으로 조사해 온 것에 흡족한 듯이 보였다. 진호의 옆자리로 돌아온 수영이 손을 브이 자로 만들었다. 뭘 잘했다고 웃는지. 눈치 없이 헤실대는 수영에게 핀잔하려던 진호가 그 뒤의 현우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잔뜩 일그러져 있는 인상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너무 즐거워서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잡음이 있긴 했지만 발표도 잘 끝냈고, 신현우에게 골탕도 먹였으니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잘했어요.”

진호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술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수영이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벙긋거렸다.

“아직 20분이 남았으니 남은 진도를 나가 보겠습니다.”

김 교수의 발언에 학생들이 실망한 듯 탄식했다. 이윽고 지루한 수업이 이어졌다.

“왜 혼자 준비했어요? 나한텐 귀띔도 안 해 주고.”

수업이 끝난 뒤, 가방을 챙기며 진호가 은근슬쩍 수영에게 물었다. 현우는 수영에게 두고 보자며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는 김 교수를 따라 종적을 감춘 뒤였다. 겸연쩍은 듯 저를 향해 어색하게 웃고 있던 현우에게 잔뜩 비웃어 줬던 진호는 후련한 듯 가슴을 털었다.

“형이 잘못 걸린 거잖아요. 내가 신현우랑 다투는 바람에.”

수영이 발표 자료를 모아 정리했다. 여기저기 줄을 긋고 메모해 놓은 흔적이 다분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호가 수영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고마워요.”

종이를 잡아 들던 수영의 손이 멈추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길에 진호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곧 수영이 짓궂은 미소를 드러냈다.

“고마우면, 이제 나 좀 좋아해 봐요.”

이 감동적인 순간에 그런 말을 해서 초를 쳐야겠냐. 기껏 칭찬해 줬더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어오르네. 진호가 뜨끈해지는 귓불을 문지르며 받아치려는데, 수영의 호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잠시만요.”

수영이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뭐지. 모르는 번호인데.”

짧게 고민하던 수영이 손끝으로 화면을 그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영아.

중년 여성의 음성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수영의 인상이 확 굳어졌다.

“연락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번호도 차단할게요.”

-잠깐만, 수영…….

수영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 누군데 저렇게 박정하게 대하지? 이토록 냉담한 표정은 누나가 보낸 택배를 받았을 때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가 잘못 걸었나 봐요.”

대수롭지 않은 듯했으나 아까와 비교하면 기분이 나빠진 듯 보였다.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 같던데, 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진호는 눈감아 주기로 했다.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안 좋은 일은 아니죠?”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요.”

수영이 오른손을 들어 진호의 옆머리를 쓸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조심스럽게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걱정해 주는 거예요?”

수영과 눈을 마주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나쁘진 않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명치를 죄어 오는 감각. 며칠간 수영만 보면 이상했던 제 상태와 비슷했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하다. 아무리 짠돌이가 마음에 안 들고, 귀찮은 구석이 있어도 친한 후배이자 동생인데. 수영이 제게 있어 단순한 계약 관계를 넘어서서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수영이 만약 저를 떠나게 된다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친한 형 동생 사이가 이런 건가? 꼬꼬마 시절의 절친과는 달랐고, 대학에서 알고 지낸 선후배 사이와도 달랐다. 애초에 친했던 선배가 신현우뿐이었으니 알 길이 없지만.

“다음 수업 들으러 가죠.”

생각에 잠긴 진호를 수영이 뒷문으로 잡아끌었다. 진호가 힘없이 수영에게 끌려갔다. 손을 놓아달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싫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싫지가 않아서 문제였다.

* * *

“여기 잭 콕 한 잔이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수영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유리잔에 위스키와 콜라를 따르더니 금세 라임을 끼운 잭 콕 하나를 만들어 냈다.

“여기 있습니다.”

수영이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건네자 주문한 남자가 멈칫하더니 잔을 받았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남자가 침을 꼴깍 삼키더니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수영을 응시했다.

“안경을 벗어 보는 건 어떠세요? 손님이 더 많이 모일 것 같은데.”

“이건 꼭 써야 하는 거라서요. 조언 감사합니다.”

수영이 눈꼬리를 둥글게 접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남자의 끈덕진 시선이 온몸에 달라붙었지만 수영은 알아채지도 못하고 그저 출입문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늘도 허탕인가. 새벽 4시가 넘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얼굴을 비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 투나잇에서 다시 아르바이트하게 된 것은 강 사장에게 빌린 찻값과 옷값을 대신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그것보다 긴급한 사유가 있었다. 근무한 지 2주가 되어도 정작 그 사유가 되는 인물은 이곳에서 코빼기도 볼 수 없었지만. 안경도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사장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써 왔던 건데 이러다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퇴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수영이 출입문 위에 조그맣게 걸린 벽걸이 시계를 보며 씻은 잔에 남은 물기를 행주로 닦아 냈다. 먼지 하나 남김없이 깔끔해진 유리잔을 은은한 조명 빛에 비춰 본 수영이 만족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치대에 잔을 걸었다.

그때 출입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따릉- 하고 울렸다. 잔을 향했던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린 수영의 콧노래가 뚝 멈췄다.

그 사람이다. 수영이 날카로워진 눈매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붉은 얼굴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가 상대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많이도 마셨네. 수영이 마음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남자가 다가올 때까지 못 본 척 잔을 닦았다. 남자가 고꾸라지듯이 스툴에 주저앉으며 주문했다.

“위스키 하나.”

“…….”

“뭐야. 위스키 하나 달라고.”

“…….”

“씨발. 말귀 못 알아먹어?”

남자가 야비한 눈꼬리를 치켜들고 수영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수영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맛없으면, 씨발. 죽여 버린다.”

목 빠지게 기다렸던 신현우가 왔다. 잔뜩 만취한 채로. 술에 취해서인지 변장 덕인지 모르겠으나, 제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어디서 약이라도 하고 왔는지 풀린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고기가 제 발로 미끼를 물었으니 이제 낚싯줄을 감기만 하면 됐다.

「신현우에 대한 정보를 알려 달라고요?」

신현우가 진호를 만나러 학교로 온 이후, 수영은 혜린에게 뒷조사를 부탁했다. 연애하는 내내 형을 괴롭히다 홀연히 미국으로 사라졌으면서 갑자기 대기업 IGN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데다가, 그 이유가 형을 보고 싶어서라니. 수상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수영은 현우가 한국으로 돌아온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영영 한국 땅엔 발도 딛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혹시 돌아온 거예요?」

단지 정보만 알려 달라고 했을 뿐인데, 혜린은 진호 형과 신현우가 만난 것까지 눈치채고 말았다. 수영이 주저하다 하는 수 없이 현우가 학교로 찾아온 일을 이실직고했다.

나중에 형이 알면 또 일러바쳤다고 화낼 것이 뻔했으나, 꿍꿍이가 가득해 보이는 신현우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들키면 싫은 소리 좀 듣지, 뭐. 당분간 까칠함이 극치에 달하겠지만 그 결과 형이 안전해질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우려할 만한 사고는 없었다고 얘기하자, 한시름 놓은 혜린은 알겠다며 이른 시일 내에 자료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혜린에게서 사람을 통해 USB 하나가 전달되었다. 수영은 USB를 받은 즉시 핸드폰에 연결해 내용을 살폈다.

기록상의 신현우는 미국에서 유학하며 재벌가 자제들과 친해져 권력을 등에 업고 각종 범죄를 저질렀다. 그중 하나가 마약 복용으로, 매일같이 클럽을 드나들며 주사를 맞거나 가루를 마셨다. 암시장에서 코카인, 헤로인, LSD 할 거 없이 다양하게도 구해 썼으며, 약에 취한 채 남창을 불러 집단 난교를 벌이기도 했다.

운 나쁘게 걸려 경찰에게 잡혔다가 몇 푼 쥐여 주고 풀려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한 달 전부터 암시장에 발길을 끊었다. 수영은 그 대목에 주목했다.

마약 중독자가 한순간에 마약을 끊었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서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갱생하거나, 혹은 약값을 치를 돈이 없거나. 답은 뻔했다. 신현우가 한국에 온 것은 돈 때문이라는 결론이었다.

급전을 구하려면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그 해답을 찾아야 했다. 마침 혜린이 한국에서 신현우가 자주 드나들었던 장소를 USB 자료에 입력해 두었고, 공교롭게도 그중 한 곳이 투나잇이었다.

형과 처음 만났던 곳.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나는 그 기념비적인 추억에 신현우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연고가 있는 덕에 어렵지 않게 신현우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수영은 투나잇에서 아르바이트 겸 잠복 수사를 하기로 했다. 안경을 써서 변장하고 있다가 신현우가 오면 독한 술을 권해 취한 틈을 타 한국으로 돌아온 진의를 불게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놈이 제 발로 찾아온 것도 모자라 손수 만취까지 해 오셨다. 다시는 없을 기회였다.

이날을 위해 바텐더 알바를 2년 동안 해 왔던가. 수영은 정성을 가득 담아 술을 따르고, 얼음을 띄웠다. 물론 만드는 내내 속으로는 미친 듯이 저주를 퍼부었다.

“주문하신 위스키 드리겠습니다. 서비스로 더 맛있게 타 드렸어요.”

금방 비우도록 얼음과의 비율을 세심하게 조절한 수영이 테이블에 팔을 걸친 현우의 앞에 잔을 내밀었다. 현우가 수영을 보지도 않고 잔을 가로채어 냅다 들이켰다. 맛이 괜찮았는지 불평은 없었다. 금방 한 잔을 비운 현우가 유리잔을 부술 듯이 내려놓았다. 잔을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후, 씨발. 이딴 걸 300에 받아? 배합이 존나 엉망인데……. 뉴욕에 돌아가기만 하면.”

“고객님.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칵테일 한 잔, 서비스로 드릴게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현우가 내려앉았던 초점을 수영에게 두었다.

“……뭐야, 너.”

“원하시는 메뉴 있으세요? 칵테일이 싫으시면 위스키로 드릴까요?”

“너 덤터기 씌우려고 그러지. 나 정신 멀쩡해! 처맞기 싫으면 꺼져!”

고함을 지르다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한 현우가 간신히 테이블을 잡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수영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현우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알코올 냄새가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에 섞여 코를 찔렀다.

“저도 관심이 많거든요. 약에는.”

몽롱했던 현우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저도 몇 번 했었는데 질 좋은 건 진짜 찾기 어렵더라고요.”

수영이 가루를 코로 흡입하는 시늉을 했다. 현우는 여전히 의심하는 눈치였다.

“혹시 형님이 괜찮은 데 아시면 소개해 달라고 하려고요.”

“약에 관심 있어?”

현우가 경계를 풀었다. 좋은 먹잇감이 얻어걸렸다고 생각한 듯했다.

“싸고 괜찮은 걸 아는데.”

“와. 알려 주시면 좋죠. 그런데 형님은 미국에서도 사셨나 봐요? 아까 미국 어쩌고 하는 걸 들었거든요.”

수영이 호들갑을 떨며 셰이커에 양주와 시럽을 넣고 흔들었다.

“거기는 좋은 물건이 널려 있지.”

매끈했던 현우의 이마에 붉은 혈관이 돋아났다.

“씨발, 아버지한테 들키지만 않았어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본데, 이거 마시고 속 풀어요. 서비스예요.”

수영이 갓 제조한 칵테일을 내밀었다. 현우가 덥석 잔을 쥐더니 원샷 했다.

“서비스 괜찮네.”

칭찬까지 덤이었다. 수영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했다.

“그 좋은 물건 두고 여기 온 이유가 있어요?”

“……이유야 있지.”

날카롭던 눈빛이 힘을 잃고, 턱을 받치던 손이 아래로 서서히 떨어졌다. 취기가 마침 몰려온 듯했다.

“어떤 이유요?”

“여기, 돈줄이 있거든.”

수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존나 멍청한 놈이 있어. 2년 전에 제 새끼한테서 떨어지라고 이걸 줬지.”

현우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얼마일 것 같아? 3억이야, 3억. 크큭, 그러니까 존나 멍청하지.”

현우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렸다.

“나라서 말 안 하고 참았지, 그걸 누가 참아? AE의 하나뿐인 도련님이 애비 침대에서 뒤로 박히다가 걸렸다는 걸.”

“…….”

“걔가 와꾸도 반반하고 뒷구멍 맛이 존나 좋았는데……. 비싸게 구는 게 같잖아. 씨발. MT에서 존나게 빨아 먹어야지.”

수영의 입가에 간신히 달려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현우는 싸해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서 계속 떠들어 댔다.

“근데 너, 좋은 거 빨고 싶댔지? 내가 맨입에 줄 수는 없고 대가를 받아야겠는데…….”

“뭐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현우가 내리깐 눈을 들어 음흉한 시선을 보냈다.

“너 꽤 반반한데, 얼마에…… 쳐줄래?”

“…….”

“한 번 대 주면…… 10 정도는 깎아 줄게. 어때……?”

“……좋아요.”

수영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이내 미소를 띠었다. 흡족한 듯 턱을 주억거린 현우가 턱을 짚고 있던 팔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그러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야 알코올이 듣네.”

미소는 진심이었다. 계획대로 잘 걸려 줬으니까. 술에 취한 신현우는 제가 얻고자 했던 정보를 술술 불어 주었다. 이 정도면 성공이 아니라 대성공이었다. 다만 적당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추악한 속내까지 까발려서는 기어코 귀찮은 짓을 벌이게 만든다.

시간은 새벽 5시 5분. 마감 시간을 넘겼다. 어느새 손님들은 다 떠나고 쓰러진 신현우와 자신만 남았다. 마감 정리를 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수영이 취한 현우를 들어 어깨에 대충 걸쳤다. 투나잇에서 나온 수영은 어둑한 골목으로 향했다. 거칠게 내딛는 발걸음이 그악했다. 한 손에는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와인 병 하나가 들린 채였다.

약 한 시간 후, 차츰 옅어지는 안개 사이를 뚫고 한 남자가 모텔 밖으로 나왔다. 그의 손에는 침대 시트로 보이는 커다랗고 낡은 보자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무거운 것이 들었는지 보자기를 등에 멘 채 질질 끄는 남자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얀 천이 검붉은 얼룩으로 짙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체크무늬 셔츠는 무엇 하나 묻은 것 없이 깔끔했다.

* * *

뜨거운 햇빛이 눈두덩이를 때리자 현우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이 몇 시…… 아, 아파.”

쉰 목소리가 터진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입 주위가 따끔거리자 현우가 손등으로 문질렀다. 거뭇해진 핏덩이가 피부에 묻어 나왔다. 또 정신을 잃고 어딘가에 부딪혔나. 약과 술에 취하면 어디 한 곳이 찢어지는 건 일상다반사였기에 현우는 보통 때처럼 넘기려고 했다.

“아아……. 씨발…….”

그런데 가만 보니 입술만 쓰라린 게 아니었다. 의식이 깨어나면서 전신이 몽둥이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렸다. 눈도 퉁퉁 부어서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실수로 다친 것치고는 상태가 심각했다. 특히 항문이 불에 지져지기라도 한 것처럼 얼얼했다. 뒤를 짚어 보니 축축하다. 씨발. 지리기라도 한 건가.

“엄마. 저기 저 아저씨는 왜 저러고 있어? 어디 아픈 거야?”

“젊은 놈이 대낮부터……. 쯧쯧. 저래서 요즘 것들은.”

“저거 보여? 대박. 인별에 올려야지.”

사람들이 웅성거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도로에서 쓰러졌나? 현우가 눈이 떠지지 않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힘겹게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미끈하고 딱딱한 촉감이 닿았다. 도로 위가 아니었다.

“어디야, 여긴.”

현우가 간신히 딱딱한 물체를 짚고 등을 세웠다. 그 순간 피와 눈곱으로 달라붙었던 눈꺼풀이 뜨였다.

“이게 뭐야.”

난데없이 세종대왕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만 원짜리 지폐에서 수없이 보았던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 뭐야. 아직 잠이 덜 깼나.

“헉, 씨발.”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현우가 식겁하며 세종대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낭떠러지처럼 깎아지른 돌 기단 아래로 인파가 벌 떼같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머리를 드니 근엄한 이순신 장군상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이곳은 도로라든가 골목 같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거, 꿈이지?”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꿈이라기엔 통증이 지나치게 실감적이었다. 현우가 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씨발…….”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기억을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클럽에서 술과 약을 잔뜩 한 뒤로부터 필름이 끊겨 있었다. 낭패감에 눈앞을 팔로 덮어 가리는데, 바지 뒷주머니에서 시끄러운 알람이 울려 힘겹게 핸드폰을 꺼냈다.

[뒤는 처음이라면서 잘만 받아먹던데? 사진은 전리품으로 가져갈게.]

해괴한 문자와 함께 사진 하나가 전송되어 있었다. 설마, 하는 불안감에 확인해 보니 허벅지를 벌린 채 뒤를 내주고 있는 누군가의 뒤태가 반쯤 잘린 채 나와 있었다. 흐릿한 포커스로 인해 엉덩이에 꽂힌 채 은은한 빛을 내는 물체가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반쪽짜리 사진에서도, 취한 제 얼굴만은 명확했다.

“시이발…….”

한낮의 햇볕은 살갗을 녹일 듯 따가웠고, 피로에 찌든 몸뚱이는 성한 곳이 없어 숨을 쉴 때마다 격통이 뼛속을 찔렀다. 제가 침대로 여기고 누워 있던 곳은 세종대왕 동상의 넓은 무릎 위였으며, 지난밤 자신은.

“씨발!”

누구인지도 모를 놈에게 뒤를 따였다.

『댕댕공 냥냥수』3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