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3권) (13/18)

댕댕공 냥냥수

3권

13.

“형. 벨트 여기 있어요.”

“아, 네네.”

진호가 눈에 띄게 허둥거리며 수영이 내민 안전띠의 고리 부분을 잡아챘다. 좌석 왼쪽 아래의 연결부에 고리를 끼우는 손이 계속 헛손질을 했다. 보다 못한 수영이 진호의 손등을 쥐어 손수 눌러 넣은 후에야 제대로 벨트를 맬 수 있었다.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죠? 지금이라도 내릴까요?”

“아, 아뇨. 아무 문제 없어요.”

수영이 안색을 살피려 얼굴을 들이밀자, 진호가 고개를 내저어 벗어났다. 문제가 없긴. 현재 자신은 매우 문제가 많은 상태였다. 수영을 똑바로 직시할 수 없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수영을 보면 불현듯 가슴이 울렁거린다거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증상은 점차 적응되어 무뎌졌다. 그러나 이따금 불쑥 억눌렸던 것이 터져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정체불명의 증세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급기야는 눈도 못 마주치다니.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저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쉽사리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말하냐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인물에게. 진호가 정신을 차리려고 세게 정수리를 털었다. 짠돌이 아니면 신상을 맘껏 터놓을 수 있는 상대가 없다는 사실이 원통했다.

“자. 인원 체크 하겠습니다.”

버스의 운전석 옆에 있는 안전바를 잡고 선 과대가 핸드폰을 확인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 이름이 불리자 손을 든 진호 뒤로, 학생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 들었어? 현우 조교님, 전치 4주 나왔대.”

“헉.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래?”

“소문으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데가 없다던데? 그래서 오늘 MT도 못 온다고 하더라고.”

요즘 들어 그 꼴 보기 싫은 낯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다쳐서 그런 거였구나. 신현우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는 희소식에 솔깃해진 진호가 목을 뻣뻣이 세워 귀를 뒤쪽으로 가까이 댔다. 하지만 학생들은 금방 주제를 옮겨 저녁에 열릴 고기 파티에 대해 떠들어 댔다. 실망한 진호가 수영의 팔을 두드렸다. 신현우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해져서인지 툭 하면 뛰쳐나왔던 해괴한 증상이 자취를 감추었다.

“혹시 신현우에 대해서 들은 거 없어요?”

“신현우요?”

“전치 4주라던데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수영이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슬그머니 폰을 뒤로 가리는 손에 의식이 따라갔다. 이 새끼는 별거 아닌 것도 의뭉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니까. 매끄럽게 바지 뒷주머니 안으로 안착하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진호가 수영을 눈짓으로 추궁했다.

“모르겠는데요.”

해맑은 확답에 진호가 포기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하긴, 짠돌이가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신현우랑 접점도 없을뿐더러,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사이에 서로의 상태에 관해 관심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찌 됐거나 당분간 신현우를 안 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그리도 가기 싫은 MT였는데, 신현우의 소식을 들으니 그깟 MT, 백 번쯤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려고요?”

진호가 좌석 등받이에 편히 기대며 눈을 감자, 수영이 제 어깨를 두드렸다.

“여기 기대요.”

“됐어요.”

“싫으면 말고요.”

세 번쯤은 권할 줄 알았는데 간단히 물러나자, 아쉬워진 진호가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다. 저 꾀에 넘어가지 말자. 마음을 다잡은 진호가 팔짱을 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짠돌이의 계략에 순순히 넘어가기엔 그간 겪은 일이 많던 차였다.

결과적으로 진호는 수영의 꾀에 넘어간 것이 되었다. 과대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외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니, 이마가 수영의 어깨에 파묻힌 채였다.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자는 틈에 기대게 했구먼. 속았다고 면박을 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제 깼냐며 느긋하게 저를 향하는 느슨한 상판을 보자 또다시 속이 울렁거릴 것 같아서, 안전띠를 풂과 동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버스에서 내리자, 풀숲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펜션이 눈에 들어왔다. 참여한 인원이 적다더니 얼마 안 되는 참가비로 용케 좋은 곳을 구한 듯싶었다.

“남자분들은 201호, 여자분들은 301호 쓰시면 됩니다. 짐 정리 끝나면 8시까지 마당으로 나오세요.”

과대의 안내에 따라 201호로 올라가 짐을 내려놓은 진호가 뻐근해진 허리를 짚으며 일어섰다. 짠돌이는 아직 안 온 건가? 이쯤 되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문득 드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는데 방문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 없으니까 허전해요?”

“무슨…….”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옆에서 바글거리며 짐을 푸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건가. 진호가 안절부절못하며 수영에게 다가갔다.

“방금까지 나 찾고 있었잖아요. 어미 잃은 망아지처럼.”

“아니거든요.”

“아니긴. 다 봤는데.”

발뺌해도 짠돌이에게는 안 통했다. 항상 보이던 애가 안 보이니까 걱정한 것뿐인데. 자신이 없어서인지 해명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어미 잃은 망아지까진 아니었는데.

“형도 안 그런 척하지만 사실 나 꽤 좋아하죠?”

“조용히 해요.”

어떻게 하면 의식의 흐름이 그런 식으로 이어질 수가 있지. 제 말마따나, 엄연히 친한 형으로서 아는 동생의 안위가 궁금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주변의 관심을 끌기 싫었던 진호가 하는 수 없이 수영을 잡아끌며 앞서 과대가 공지했던 마당으로 나왔다.

“어, 진호 선배!”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과대와 함께 화로를 끌어다 놓던 정연이 진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너도 왔어?”

진호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가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리 경영학과와 연이 깊다지만 MT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묻지 않아도 그 이유는…….

“오빠! 그거 주방에서 손질해야 해!”

제 뒤에서 포장된 정육과 각종 채소를 테이블 위로 꺼내는 수영을 향해 정연이 한마디 보탰다. 멀리서 수영이 알았다며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정연이 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너 집중 훈련 기간 아니었어?”

다음 주가 전국 육상 대회라 사진의 세계 수업에서 몇 주 전부터 보이지 않았던 정연이 갑작스럽게 MT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창 정신없을 때인데 이 먼 곳까지 와도 괜찮은 건가?

“하루 정도는 괜찮아요. 잠시 쉬는 시간도 필요했던 차라.”

정연은 수영이 재료 손질을 하러 펜션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쁜 일정은 둘째 치고 식단 조절에 잠드는 시간까지 철저하게 관리해야 할 시기에 이곳을 찾은 원인은 분명 저것 때문이겠지. 그 정도로 짠돌이가 좋은 거구나. 새삼 수영을 향한 마음의 깊이가 짐작되어 착잡해졌다. 수영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구나.”

읊조리듯 대답한 진호가 서둘러 과대가 가져온 상자를 뜯었다. 정연을 이전처럼 대하기 힘들었다. 수업에 나오지 못한 요 며칠 새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까맣게 모르는 정연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낀 탓이었다.

오늘 밤에 사람 여럿 죽어 나가겠네. 상자 안을 메운 숙취 해소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호가 하나씩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정연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는 몸을 바삐 움직이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수영이 씻은 재료를 가져오고 고기가 불판 위에서 익을 즈음, 다른 학생들도 서서히 마당으로 나와 커다란 테이블 주변으로 자리를 잡았다. 삼겹살과 소주 파티로 가볍게 시작한 MT는 진호가 예상한 대로 각종 술 게임을 거치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수영, 정연과 함께 테이블 구석에 앉은 진호는 얌전히 술잔을 기울였다. 정연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수영이 수차례 말을 걸었지만, 진호는 단답으로 관심을 물리쳤다.

“선배. 어디 안 좋아요? 갑자기 왜 말이 없어요.”

정연 역시 말수가 적어진 진호를 걱정했지만 진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영에게 고백을 받은 뒤로 정연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저는 빠져 주는 게 맞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진호는 한껏 들떠서 조잘거리는 정연과 차분하게 받아 주는 수영을 관찰하듯 시야에 담았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선남선녀처럼 둘은 무척 잘 어울렸다.

수영은 저보다 정연과 잘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원래 게이도 아니었고, 예쁜 데다 성격도 좋은 여자가 한결같이 좋아해 주는데, 그걸 마다하는 것도 미련한 짓이었다. 수영을 위해서라면 정연과 이어지도록 돕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지? 진호는 반문해 보았다. 친구라면 좋은 사람과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이 찜찜한 심정은 뭘까. 확실하게 거절도 했으니 수영의 고백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지만, 두 사람을 맺어 주고자 하는 의욕이 예전만큼 거세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건만 저 혼자만 엉뚱한 곳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에 들어갈까요?”

정연과 똑같이 눈가에 걱정을 매단 수영이 연거푸 기울여지는 진호의 술잔을 잡았다. 이제는 안다. 저 눈빛의 깊이가 타인을 볼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정연을 마주했을 때 비해 한결 부드럽고 다정한 빛깔을 띠고 있는 수영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 눈이 정연에게 향할 미래를 생각하니 속이 갑갑해졌다. 짠돌이랑 사귈 뜻도 없으면서 왜 이러는 건지. 수영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 정연과 맺어 주는 게 껄끄러운 걸까.

진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였다. 아끼는 동생의 입장을 고려하면 동의 없이 억지로 정연과 엮는 게 미안할 수 있지. 진호가 수영을 향해 후련한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수영이 미적거리다 잡은 손을 뗐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무언가가 가슴 한곳을 찌르는 듯 답답한 감각은 여전했지만 진호는 그것을 술기운 탓으로 돌려 버렸다.

자정에 이르자, 취해 쓰러진 사람이 속출했다. 펜션 1층의 너른 거실로 자리를 옮긴 뒤, 남은 사람은 진호와 수영, 정연, 과대를 포함해 열 명 남짓뿐이었다. 많이 취한 듯 얼굴이 시뻘게진 과대가 숟가락으로 소주잔을 퉁퉁 두드렸다.

“자아, 여러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거 아시죠?”

저를 바라보는 무리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보이던 과대가 신나서 목청을 높였다.

“진실 게임 갑시다!”

“와- 진실 게임!”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쳐댔다. 진호가 예상했다는 듯 싱거운 표정을 지었다. 진실 게임은 소위 ‘썸’을 커플로 맺어 주기 위한 연애의 장이나 진배없었다. 그 현장에 껴 봤자 남 연애사의 엑스트라가 되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위층으로 갈까요?”

같은 마음인지 내내 핸드폰만 보고 있던 수영이 층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수영 오빠. 거기 앉아 봐.”

대답은 듣지도 않고 진호의 팔뚝을 잡아 일으키려는 수영을 정연이 불러 세웠다.

“오- 둘이 뭐야?”

“아까부터 계속 붙어 있더니, 이유가 있었네-”

학생들의 장난 섞인 환호성이 들려왔다. 수영이 손사래를 치며 물러서자, 야유로 바뀐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앉아요.”

진호가 엉거주춤 선 수영에게 작게 속삭였다.

“여기 있으려고요?”

“아뇨. 난 방으로 돌아가려고요.”

“혼자선 못 가요.”

“꼭 같이 있어야겠어요?”

맞은편을 힐끔 보니 정연이 노심초사한 듯 두 손을 맞쥐며 수영을 올려보고 있었다.

“형이 내 눈앞에 없으면 안 돼요, 난.”

그 말에 가라앉았던 속이 재차 울렁거릴 것 같았지만, 자제력을 발휘해 마음가짐을 정갈하게 다스렸다. 익숙해졌더니 정체 모를 간질거림이 어느 정도 통제가 되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같이 여길 뜨자고 말할 뻔했다.

“그럼 나도 여기 있을게요.”

진호가 하는 수 없이 떼었던 엉덩이를 도로 바닥에 붙였다. 적어도 정연에게 했던 약속은 지키고 싶었다. 둘이 친해지도록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어도, 친해질 계기는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몸살로 아플 때 괜찮냐며 안부를 물어봐 주고 챙겨 주던 정연이다. 알게 모르게 정이 든 정연의 연애 작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도무지 내키지 않는지 뻗대듯 서 있던 수영이 진호를 따라 자리에 앉자, 학생들의 환호가 거세졌다. 술과 분위기에 취해 다소 떠들썩한 열기를 과대가 손을 저어 잠재웠다.

“다들 진정하고, 소주병을 돌리면 입구가 향하는 쪽의 사람이 질문을 받는 거예요. 답하기 싫으면 이거 마시면 되고.”

과대가 둥그렇게 모인 원의 중앙에 놓인 놋그릇들을 가리켰다. 각각의 놋그릇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우중충한 색의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소주나 맥주는 당연히 넣었을 테고, 설마 막걸리까지 섞은 건가. 마셨다간 단번에 가겠는데. 진호가 진절머리를 치며 과대가 쥐고 있는 초록빛의 병에 주의를 집중했다.

“첫 번째 판 돌립니다-”

과대가 쾌활한 어조로 병을 돌렸다. 소주병이 뱅글뱅글 회전하더니 보란 듯이 수영 앞에서 멈췄다.

“방향이 딱 남수영이네!”

과대가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수영을 지목했다. 일각에서 방청객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수영이한테 질문할 사람은 보나 마나…….”

모두의 시선이 정연에게로 향했다. 취해서인지 주목을 받아서인지 정연이 발그레 뺨을 붉히며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 제가 할게요.”

정연이 입을 떼자 커다란 방 안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오빠.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수영에게로 틀어졌다. 수영이 즉각 답했다.

“응.”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이 ‘오-’ 하고 함성을 질렀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자리가 불편했다. 진호가 살포시 제 손등 위에 얹힌 수영의 손바닥을 밀어냈다. 수영이 저를 지긋이 바라보며 응답한 건 자신만 알아챈 듯싶었다. 뭐 하는 거야. 이 짠돌이가. 수영을 위로 흘겨보던 진호는 수영이 밀려난 손을 다시 얹으려는 걸 차마 막을 수 없었다.

“혹시 이 중에…….”

“추가 질문하고 싶으면 마셔.”

어쩐지 낯빛이 전보다 어두워진 듯한 정연이 질문을 던지려 하자, 과대가 막으며 놋그릇을 건넸다. 수영을 빤히 보던 정연이 단박에 그릇을 받아 들이켰다. 순식간에 놋그릇을 비운 정연이 젖은 입가를 훔치며 물었다.

“이 중에 있는 건 아니지?”

“여기 있는 사람 맞아.”

이번에도 수영은 곧장 답했다. 태평한 수영과는 달리 정연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과대를 비롯한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존나 직진이야.”

“둘이 잘 어울린다! 사귀어라!”

뜨거운 반응이 잇따랐다. 이 전개가 흥미로운 듯 열심히 둘의 관계를 추측하며 떠드는 학생들도 있었다. 진호는 숨을 죽이며 결연한 태도의 수영을 복잡한 눈으로 지켜봤다. 설마 그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는 나라고 털어놓는 건 아니겠지.

손을 쥐는 악력이 강해졌다. 그게 저를 달래는 표현 같아서 뺄 수가 없었다. 손목을 약간 비틀기만 하면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걸 아는데도.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서니 수영이 제게 상처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다. 묘하게 안심이 되는 수영의 온기에 진호가 입꼬리를 올리려다 금세 내렸다. 정연이 떡하니 보고 있는데도 수영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 꼭 불륜 현장을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죄책감을 느낀 진호가 수영에게서 손을 빼냈다. 고백을 거절했음에도 이러는 건 수영에게도, 정연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 서진호. 이 일은 그날 호텔에서 나오면서 이미 끝난 거야. 어딘가 서글퍼진 진호가 눈앞의 술잔을 들어 올리던 때였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조교님!”

과대가 현관으로 들어온 현우를 보고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 상태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병원에서 푹 쉬시지.”

현우가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거실의 한가운데로 걸어왔다.

“너희가 보고 싶어서 퇴원 승인받자마자 바로 택시 타고 왔지.”

현우의 너스레에 학생들의 우레 같은 함성이 터지고, 과대가 현우를 부축하며 안으로 이끌었다.

“진실 게임하고 있는데 조교님도 끼실래요? 지금 한창 재밌어지려던 참이에요.”

“그래? 그럴까?”

현우가 흔쾌히 승낙하며 과대 옆의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노골적으로 저를 직시하는 눈빛에 진호가 치를 떨었다.

후배들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저 냉혈한이 그럴 리가. 기필코 다른 흑심이 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MT에 안 왔을 텐데. 전치 4주라는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한쪽 팔과 다리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것만큼은 고소했다.

“형. 방으로 돌아갈래요?”

수영이 진호를 뒤로 이끌며 귀엣말을 했다.

「그 새끼는 형 못 괴롭혀요. 보기 싫으면 아예 근처도 못 오게 해 줄게요. 왜 형이 피해요? 잘못한 건 그 자식인데.」

신현우가 학교로 찾아왔던 날,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내뱉었던 짠돌이의 말이 지금 떠오르는 건 왤까. 고개를 끄덕이려던 진호가 방향을 고쳐 좌우로 흔들었다.

“여기 있을래요.”

“괜찮겠어요? 방에서 쉬는 게 좋을 텐데.”

수영이 신현우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슬쩍 진호를 뒤로 빼내려 했다. 하지만 결심을 굳힌 진호가 우악스러운 팔을 잡아 내렸다.

“피하기만 하는 것도 질렸어요.”

전에 없던 호승심이 솟아났다. 과거에도 현재도 저를 힘들게 하는 건 신현우인데 왜 잘못도 없는 제가 알아서 피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신현우를 보는 게 이전만큼 두렵지도 않은데 도망치는 건 싫었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원치 않아도 봐야 하니 이기든 지든 결판을 내자, 하는 심보였다. 끝까지 저만 지는 건 억울했다.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현우를 보는 수영의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전에도 신현우를 향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던 짠돌이지만 지금은 특히나 기세가 흉흉했다. 저도 신현우라면 질색이지만 짠돌이는 더한 것 같았다. 싫다고 말하기도 아까우면 제 소매를 잡으라고 했던 사람은 어디 갔어. 떠오르는 기억에 진호가 굳었던 입매를 풀었다.

“하라면 하라죠. 예전처럼 당하고만 있지도 않을 거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신현우를 누르고 위에 서 보려는 악에 받친 서러움도 아니었다. 수영이 있으면 뭐든 괜찮을 것 같아서, 설령 신현우가 제게 해를 끼친다 해도 의지할 구석이 있다는 게 안심이 돼서. 다른 경호원들처럼 누나에게 사생활을 보고한 일은 잊히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때와 사뭇 다르단 걸 아니까. 아니더라도 믿어 보고 싶으니까. 아니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으니까.

여느 때처럼 수영과 거리를 두려고 세워지는 보호벽을 내리누르고 오기를 부려 보기로 했다. 나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널 믿어 보고 싶은 걸 보니 그놈의 미운 정이 제대로 붙었나 보다. 수영이 눈빛으로 마지막 경고를 보냈지만 진호는 무시했다. 수영은 포기한 듯 진호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럼 나한테서 1초도 떨어지지 말아요.”

유치원생 아니라니까. 뭐 이런 과보호가 다 있어? 진호가 항변하려 했지만 수영이 워낙 확고하여 고이 입술을 접었다.

“조교님도 왔으니 다시 돌려 볼까요?”

과대의 날렵한 손놀림에 소주병이 빙글 돌아갔다. 빠르게 원을 그리던 병목이 어느 한 지점에서 속도를 늦추었다. 긴장한 채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를 따라가던 진호의 시선이 제 앞에서 멈췄다. 어, 이러다가 내가 걸리겠는데?

“형.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 봐요.”

수영이 자세를 바로잡는 척하며 진호를 은근히 밀었다. 수영의 완력에 떠밀려 우측으로 미끄러진 진호가 바닥을 짚으며 균형을 맞추었다.

“야, 이거 뭐냐. 남수영 또 걸렸네.”

수영이 밀친 덕에 원래 진호에게 향했어야 할 병 입구가 수영을 향했다. 다들 병에만 집중하느라 둘의 자리가 살짝 옮겨진 것도 모르는 듯했다.

“수영이한테 질문할 사람? 이번 판도 정연이가 할래?”

과대가 정연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정연과 수영 사이를 밀어주려는 의도인 듯했으나, 정연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전 됐어요.”

웃음기 한 점 없는 낯으로 의사를 강하게 내비친 정연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무릎을 세운 채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래? 혹시 다른 분들은?”

과대가 예상치 못한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주위를 빙 둘러봤다. 현우가 과대의 무릎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게.”

“조교님이요?”

놀랍지도 않았다. 붙기만 하면 다투기 일쑤인 두 사람이 잠잠하다면 그때야말로 비상이었다. 이번엔 대체 어떤 기상천외한 유치함으로 실망을 줄지 기대하며 진호가 현우를 향해 눈초리를 세웠다.

“너, 마지막으로 섹스한 게 언제야?”

“와아. 세다.”

“일단 경험은 있는지 물어봐야 맞는 거 아니에요?”

몇몇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몇몇은 흥미로운 듯 낄낄거리며 현우를 바라봤다. 수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반면 치켜뜬 진호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유치한 게 아니라 저급하다. 친분이 깊은 사이에서도 하지 않는 질 낮은 농담 따먹기를 여기에서, 그것도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조교가 하다니. 결코 원치 않았지만 신현우의 버러지 같은 인성을 다시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차. 이걸 까먹고 있었네.”

망설임 없이 중앙으로 향하는 수영의 손에서 놋그릇을 빼내며, 현우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곧 뒤에서 자주색의 유리병이 나타났다.

“오는 길에 같이 마시려고 사 왔어.”

와인이 놋그릇 안으로 콸콸 쏟아졌다. 대놓고 수영을 저격하는 행위에 진호가 현우를 향한 눈가에 힘을 주었다. 대체 어쩔 심산인 거지.

“마셔.”

현우가 내민 놋그릇 속의 액체는 우중충함을 넘어서 검정에 가까운 색을 띠고 있었다. 구정물도 이만큼 탁하진 않겠다. 저걸 마시면 아무리 체력이 강한 수영이라도 쓰러질 게 자명했다. 나는 포기하고 짠돌이를 집요하게 노릴 작정인가. 당연히 저를 향할 거라 예측했던 화살이 수영을 향하자, 공연히 속이 끓었다.

“아무렇게나 답해요.”

잠자코 정체불명의 액체로 손을 뻗는 수영을 말리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신현우의 의중이 훤히 보이는데 가만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저와 신현우 사이에 휘말려서 안 해도 될 고생을 겪는 중인데. 손목을 낚아채 놋그릇을 빼앗으려는데, 수영이 그대로 팔을 꺾어 폭탄주를 홀랑 마셔 버렸다.

“마시지 말라니까.”

진호가 놋그릇을 쥐어 빼냈지만 깨끗하게 비운 후였다. 허망한 눈길로 그릇 안을 쳐다보자, 수영이 웃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요.”

갈증 때문에 독한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능청맞게 늘어놓는 짠돌이가 당황스러웠다. 평소 같으면 신현우에게 그딴 질문도 질문이냐고 받아쳤을 텐데, 어쩐지 차분한 모습이 낯설었다. 그와 동시에 참담했다. 얼마나 지쳤으면 고집 센 짠돌이가 신현우가 건네는 술을 받는 족족 마시는 거냐고. 그것도 원인을 따지고 보면 제 탓인 것 같았다. 침통한 심정으로 신현우를 보자, 이죽거리는 입매가 심히 아니꼬웠다.

“추가 질문하려면 마셔야 하나?”

“아, 아뇨. 조교님은 환자시니까 그냥 넘어가죠.”

현우가 빙글 웃으며 과대에게 묻자, 과대가 화들짝 놀라며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이견이 없는 듯 잠잠했다. 현우가 만족스러운 듯 비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 상대가 이 안에 있지?”

신현우는 수영과 제가 잤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비열한 놈. 저 새끼는 나와 관련되어 있다면 어떤 질문을 하든 짠돌이가 침묵으로 일관할 것을 알고 이러는 것이었다. 어쩔 줄 모르며 곤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관전하는 건 덤일 테지.

“조교님, 뭔가 아는 거 같은데?”

“설마 최정연이랑?”

“미쳤다. 수위 장난 아니다.”

신현우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학생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 정연을 끌어와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신현우 때문에 피해받는 건 저 하나로 족하다. 더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기 싫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연에게 미안할 일만 생길 것 같아 진호가 다급히 외쳤다.

“이건 좀…….”

“형은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수영이 강제로 뒤로 무르자, 진호가 눈매를 바짝 세우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나랑 신현우 사이의 일이에요. 나만 당하면 해결되는 거라고요.”

“알아요. 그치만 지금은 참아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나 때문에 손해를 받는 꼴을 두고만 보라고? 그 피해자 목록에 1순위로 제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건 아는 걸까? 이런 때마저 침착한 수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수영이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제가 아는 짠돌이는 불의를 보고도 참는 인간이 아니었다. 너절한 도발 따위 어울려 줄 수 없다며 난장을 쳐도 모자랄 판에.

현우가 건넨 그릇을 가져온 수영이 온갖 주종에 와인까지 섞여 독주가 되어 버린 술을 거침없이 입 속으로 흘려 넣었다.

“또 마시는 거 봐. 최정연 맞네.”

“다들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최정연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근거 없는 추측으로 애먼 사람 상처 주지 마세요.”

어느 한 곳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빈 그릇을 내려놓은 수영이 강경하게 대꾸했다. 순식간에 거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다행인 건지 정연은 무감한 낯빛으로 수영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하하. 이 판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판 돌려 볼까요? 이번에는 누가 걸릴지 무척 기대가…….”

“여자 아니지?”

애써 밝은 톤으로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과대의 노력이 무색하게, 현우가 말을 잘랐다. 이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치달았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수영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가 쓰러질 때까지 마시면 되는 건가? 원하는 게 그거야?”

“농담 하나에 죽일 듯이 덤비네. 누가 보면 찔리는 구석이 있는 줄 알겠어.”

“…….”

“뭘 꾸물거려? 떳떳하면 확실하게 대답하면 될 거 아니야.”

톡, 하고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주위를 휘감았다. 진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며 현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 새끼가 기어이 사고를 칠 요량인가 보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울대에 힘을 줬다.

“야, 야. 저거 봐.”

고요했던 공기가 점차 소란스러워졌다. 진호가 현우에게 소리치려는 걸 멈추고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식겁한 진호가 수영에게 달려들었다. 경황이 없어 반말이 튀어나온 것도 몰랐다. 눈을 돌리자마자 아래로 낙하하는 수영의 정수리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기에. 바닥에 이마를 박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붙들어 막았다. 제 품으로 떨어지는 턱끝에서 방금 들이켠 듯한 검은 액체가 주룩 흘러 떨어졌다. 그새 마신 거야? 수영의 손에서 깔끔하게 비워진 그릇이 굴러떨어졌다. 미련하게 그걸 왜 받아 마셔. 아무 잘못도 없는 네가.

“남수영…….”

웬만한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는 짠돌이가 술에 취해 쓰러졌다. 어깨를 잡고 흔들자 바위 같던 몸체가 깃털처럼 펄럭였다. 신현우에게 눈길을 돌리자, 목표를 이룬 듯 희열에 찬 얼굴이 보였다. 나쁜 새끼. 비겁하다 못해 저열한 새끼. 쌍욕이라도 그 잘난 상판에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쓰레기 같은 놈에게는 말 한마디도 아까웠다.

“일단 방으로 옮겨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정연이 뛰쳐나오며 수영의 팔을 잡아 올렸다. 현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진호가 뒤늦게 허리를 잡으며 정연을 도왔다. 체격이 큰 탓에 두 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과대를 포함한 장정 다섯 명이 붙어 수영을 201호로 옮길 수 있었다.

* * *

“어휴, 얘는 취하면 안 되겠다. 옮기는 것도 여간 일이 아니네.”

이불을 깐 바닥에 조심스레 수영을 눕힌 과대가 너스레를 떨며 일어섰다. 같이 수영을 내려놓은 학생들이 허리를 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방금 조교, 겁나 싸하지 않았냐?”

“접때 발표 이후로 완전히 찍혔나 본데.”

“근데 조교님이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지 않았어? 수영 선배 혹시 게이…….”

“어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후딱 내려가.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과대가 인상을 쓰며 옆에서 수군대는 후배들을 물렀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수영이 관련해서 이상한 소문 들리면 너네 다 죽을 줄 알아.”

쭈뼛거리며 방을 나가는 학생들을 향해 주먹을 올리며 겁을 준 과대가 수영의 머리맡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검은 인영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방금 건 조교님이 잘못했죠.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선배도 여긴 신경 쓰지 말고 1층에서 마저 놀아요.”

“아니, 내가 남아 있을게. 넌 할 게 많잖아.”

진호는 수영의 감은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걱정이 질척하게 묻어나는 뒤통수를 보며 과대가 처진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수영인 괜찮을 거예요. 독한 술을 연속으로 마셔서 취한 것뿐이에요.”

처연하게 올려다보는 눈망울이 흐리다. 눈가에 찔끔 고인 눈물을 보고 당황한 과대가 반응이 없자, 고개를 아래로 떨군 진호가 구겨진 수영의 옷자락을 잡아 반듯하게 폈다.

“그래도…… 내가 여기 있는 게 마음이 편할 거 같아.”

“……그래요. 혹시 모르니까 선배가 봐 주시면 좋죠. 무리하진 마시고 피곤하면 바로 주무세요.”

미세하게 위아래로 까딱거리는 머리통을 지켜보던 과대가 천천히 뒤돌아 나갔다. 홀로 수영의 곁에 남은 진호가 옆에 놓인 담요를 펼쳐 덮어 주었다.

“그만하라고 하면 됐을 텐데, 왜 당하고만 있었던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진호가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수영의 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등이 꼼꼼히 가려진 뒤에도 소매를 붙잡은 손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크고 단단한 손바닥에 굳은살과 잔 상처가 빼곡했다. 스물두 살이 갖기엔 다난한 삶의 굴곡.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돈을 벌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던 걸까. 문득 짠돌이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머뭇거리다 손을 위로 포갰다. 이건 어디까지나 빚을 갚기 위한 거다. 제가 아플 때 손을 잡아 줬던 것처럼, 자신도 똑같이 해 주고 있는 것뿐. 합당한 근거를 찾으며 수영의 손 틈 안에 제 손을 끼워 맞췄다. 짠돌이의 손이 아귀를 맞추며 강하게 붙들었……. 잠깐, 짠돌이가 내 손을 붙잡는다고?

“참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요.”

토끼 눈으로 고개를 올리자 수영이 웃음을 터뜨리며 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너, 깨어 있, 아니, 쓰러진 거 아니었어요?”

놀라서 말이 꼬였다. 이 새끼, 멀쩡하면서 취한 척 누워 있었던 거야?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미안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어서.”

수영이 곰살궂게 눈가를 접더니 허리를 세우며 맞잡은 손을 치켜들었다.

“조금 더 버티고 있길 잘했지. 얌체처럼 손을 쏙 집어넣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오해하지 마요! 깨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네, 네. 그러시겠죠. 형님.”

“아, 진짜.”

팔을 휘저으며 수영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덫에라도 든 듯 빠지지 않았다. 수영이 버둥거리는 손을 당겨 끌자,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졸지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여기에 우리만 있는 거 아니에요.”

수영의 어깨 너머로 시체처럼 널브러진 사람들을 둘러보며 가슴팍을 밀쳤다. 물론 바란 대로 밀어지진 않았다.

“다 자고 있는데 누가 봐요?”

“그래도 혹시나.”

“깜깜해서 우리가 누군지도 모를걸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과연 불이 꺼져 있어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암흑천지였지만, 제게 거짓말을 해서 심장을 내려앉게 만든 짠돌이에게 안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요즘 다가오는 스킨십에 크게 거부하질 않았더니 그새 기어오르네. 진호가 딱 붙지 않으려 바닥을 짚는데, 등에 가벼운 압력이 가해졌다.

“귀 대 봐요.”

“왜요. 무슨 짓을 하려고.”

“신현우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속삭이듯 가벼운 음성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복수?”

뜬금없는 얘기에 진호가 되묻자, 큼지막한 손이 목덜미를 쥐어 당겼다.

“형한테 알려 줄 게 있어요.”

수영은 진호를 끌어안은 채로 무언가를 속닥거리더니 고개를 뒤로 물렀다. 멀어진 진호의 낯은 불만 대신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거 사실 맞죠? 또 놀리는 거 아니죠?”

“내가 왜 형한테 거짓말을 해요.”

사례가 차고 넘치지 않나. 몇 분 전의 일을 포함해서 그동안 몇 번을 속았는지 셀 수 없을 정도인데. 꺼림칙한 낌새를 지울 순 없었지만, 수영이 저를 골려 먹으려고 이렇게 큰 허언을 꾸며 댈 거라는 의심도 들지 않았다.

짠돌이가 전해 준 말이 진실이라면 그것도 난감한데. 신현우가 저와 수영에게 벌이려고 하는 짓은 상상의 한계치를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긴, 그 새끼는 오래전부터 도덕성의 기준이 남다르긴 했다. 애초에 도덕성이란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신현우라면 부릴 법한 수작이라 물음표로 들끓었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몸은 그럼 괜찮은 거예요?”

신현우가 지나치리만큼 노골적인 방식으로 수영에게 와인을 따라 준 데에는 음험한 의도가 있었다. 다행히 현재 수영은 멀쩡해 보인다만, 제게 알려 준 신현우의 계략에 따르면 이렇게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보시다시피.”

수영이 보라는 듯 팔을 펼쳤다. 문제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역시 몸뚱이 하나는 건장하다며 진호가 수영을 찬찬히 훑었다.

“그렇게 보면 또 서는…….”

“복수 계획은 뭐예요?”

실없는 소리를 하려 하기에 말을 끊으며 일찌감치 차단했다. 수영이 등 뒤로 깍지를 끼며 거리를 좁혔다.

“아, 하지 말라니까.”

“이래야 들릴 텐데.”

“그냥 평범하게 대화하면 안 돼요?”

“남들이 들으면 어쩌려고요.”

아까는 안 보이니까 괜찮다며. 태세 전환이 어찌나 빠른지. 진호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마지못해 수영의 어깨 위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디까지나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막기 위한 거였다. 그러니까 괜스레 귀가 뜨거워지는 느낌은 착각일 거야.

“수영 오빠는 괜찮아요?”

짠돌이에게서 계획을 들은 뒤, 방을 나서는데 정연이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왔다.

“어? 어. 푹 자고 있어.”

제가 신현우를 유인하는 대신 수영은 만취한 연기를 계속하기로 했던 것을 기억하며 진호가 다급히 뒤로 문을 닫았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설마 쓰러진 짠돌이를 옮긴 이후부터 계속 있었던 건가.

“다행이네요. 전 큰일 난 줄 알고.”

정연이 한시름 던 듯 한층 개운한 얼굴을 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대뜸 고꾸라진 짠돌이 때문에 가슴 졸인 사람만 몇인지. 벽 반대편에서 태평하게 누워 있을 수영 대신 속으로나마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걱정돼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네. 오빠 상태도 듣고, 선배도 볼 겸.”

짠돌이는 그렇다 치는데, 나? 얘가 나한테 볼일이란 게……. 생각의 꼬리를 물다 그 끝에 다다른 진호가 입매를 굳혔다. 역시나 그것밖엔 없나.

“지금 시간 있어요?”

“음, 그게.”

“잠깐이면 돼요.”

복수 계획을 실행하려면 신현우를 마주하는 게 우선이다. 그사이 다른 음모를 꾸밀지도 모르고. 하지만 간절한 정연의 눈빛을 보니 마냥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정도?”

“3분? 아니, 1분도 안 걸릴 거예요.”

“일단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

1분 정도면 괜찮겠지.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 채 정연을 계단으로 이끄는 진호 뒤로, 짙은 그림자 하나가 따라붙었다.

“여기라면 누가 보거나 듣지 못할 거야.”

옥상 정원으로 올라온 진호는 철문을 닫으며 가운데 놓인 벤치로 손을 내밀었다. 정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오도카니 버티고 섰다.

“엄청 짧게 끝날 거라서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

“후…….”

저답지 않게 손을 꾸물거리며 짙은 숨을 늘어뜨리는 정연은 누가 봐도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덩달아 긴장한 진호가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

“수영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 누구예요?”

올 게 왔구나. 진호가 정연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아까의 진실 게임과 관련된 얘기일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짠돌이가 제 입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이 안에 있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는데 누군지 궁금한 게 당연하지. 지당한 궁금증인데,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야, 어떻게 말하냐고. 남수영이 좋아하는 상대가 바로 나라고.

“설마 남자예요?”

눈꼬리를 살짝 치켜드는 정연은 초연해 보였다. 이미 그렇게 단정 짓고 받아들인 걸까. 자신의 짝사랑 상대가 남자를 좋아하고, 어쩌면 게이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솔직하게 밝히는 게 좋지 않을까. 짠돌이가 게이라는 오해를 사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남수영이 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일찍이 거절했고, 다 끝난 일이라고. 원래 남자를 좋아하는 애는 아니니 너에게로 관심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찰나에 잊힐 변덕스러운 감정이라고. 그러면 정연도 그렇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지도 모른다.

“그,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사고와 행동이 어긋난다. 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닌데 알량한 혀끝이 멋대로 독단을 벌였다.

“선배도 모른다고요?”

“으응…….”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얄궂게도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오빠한테 물어보는 수밖엔 없나.”

단념한 듯 꺾인 정수리가 명치를 뻐근하게 만들었다. 정연이 상처받을까 염려돼서? 믿고 부탁했던 저에게 배신감을 느낄까 봐? 끝까지 입을 다문 건 그런 일차원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욱 속이 쓰라렸다. 그보다 난해한 감정이 제 안에 뿌리 박혀 있어서, 마지막까지 정연에게 숨길 수밖에 없을까 봐.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선배도 이거 마시고 쉬어요.”

정연이 펑퍼짐한 스포츠 재킷의 주머니에서 기다란 형체의 물건을 꺼내 내밀었다. 무거운 죄책감과 불편한 안도감 사이에서 방황하던 진호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얼룩졌다.

「숙취 해소제를 받게 될 거예요. 신현우가 직접 주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주든. 그걸 받고 나면 혼자 있는 상황을 만든 다음, 마시는 척해요. 진짜 마셔도 상관은 없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귓속말로 수영은 신현우의 꿍꿍이를 낱낱이 밝혀 주었다. 뚜껑에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을 거고, 그 안엔.

“이거, 어디서…….”

“선배 기다리고 있는데 과대 오빠가 주더라고요. 진호 선배도 피곤할 테니 전해 달라고 하면서.”

과연 수영이 알려 준 대로 숙취 해소제의 꼭대기에는 눈에 띄지 않게 뚜껑 색상과 똑같은 녹색의 스티커가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정연이나 과대가 신현우와 한패일 리는 없었다. 자기가 직접 전하면 내가 안 마실 거라는 걸 알았겠지. 그래서 두 다리나 걸쳐서 이걸 전한 게 확실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신현우가 치밀해서, 나와 짠돌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뇌를 이토록 굴렸다는 데에 넌더리가 나서, 손발이 싸늘하게 식었다. 수영이 사전에 알아채지 못했다면, 의심 한 점 없이 음료를 마셨을 테고, 그 뒤는……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아, 으응. 잘 마실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숙취 해소제를 받은 진호가 계단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이제 혼자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먼저 내려가. 난 여기서 바람 쐬다가 들어갈게.”

정연이 아래층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본 진호가 난간 쪽으로 걸어가며 살며시 뚜껑을 열어 입구에 입술을 댔다. 그 자식이 보고 있을까. 반쯤 열린 문틈 새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지만, 신현우가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 문을 살짝 등진 채 병을 기울였다.

한밤중이라 다행이었다. 척이라는 게 들킬까 싶어, 조명이 잘 들지 않는 그늘 속에 몸을 감추고 음료가 흘러들어 가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마시는 티를 내려고 일부러 과하게 목 넘김 소리를 냈다. 10초가량을 꼴깍이다 캬아- 하고 거창한 탄식을 내지른 뒤, 재빨리 병을 뒤집어 내용물을 바깥에 버렸다. 난간 너머가 산이라서 증거 인멸에는 최적이었다.

오는 건가, 안 오는 건가. 이쯤 되면 신현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날 법도 한데 쥐 죽은 듯 사위가 얼어붙었다. 모든 촉각이 등 뒤를 향해 바싹 곤두섰다. 아무래도 같이 가는 게 좋겠다며 걱정하는 수영을 뒤로한 채 씩씩하게 방을 나섰던 게 허상 같았다.

“술은 좀 깼어?”

빈정대는 듯한 기색은 부드러운 어투로도 숨길 수 없었다. 신현우다. 눈을 질끈 감은 진호가 취한 척 난간에 기대며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네가 여긴, 왜…….”

삐걱거리는 턱을 간신히 굴려 문장을 뱉었다. 기계처럼 한 자씩 끊어지는 게 제 귀에도 어색했다. 이래서 내 연기에 속아 넘어가긴 할까? 표정을 분간하기 힘든 암흑과 먼 거리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덜컹, 하고 철문이 둔탁하게 닫혔다. 이내 문고리가 철컥이며 잠겼다. 그러고 보니 문을 잠글 거라는 얘기는 없었는데. 괜찮은 걸까. 초조해진 진호가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탈출로를 찾으려고 눈을 굴리는 동안.

“몸은 어때?”

역겨운 목소리가 다가왔다. 달빛이 만든 음영으로 현우의 위치를 식별한 진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신현우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 이처럼 둘이서 독대해 본 적이 없었다. 실타래처럼 늘어지는 지난날의 악몽이 뇌리에서 슬금슬금 똬리를 놨다. 수영의 빈자리가 거대하게 느껴졌다.

“상관없잖아.”

계획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뭉쳐 있던 적대감이 튀어나왔다. 취하지 않았단 걸 들켰을까. 아차 싶었지만 신현우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상관이 많지. 약발이 잘 받는지 알아야 하니까.”

두 뼘 정도의 거리를 남긴 채 멈춰 선 신현우는 여태 본 것 중에 가장 흥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노로 이지러진 제 모습에 대단히 만족한 듯 보였다.

“그 새끼 치우느라 아깐 애 좀 썼어. 안 그랬으면 너랑 오붓하게 대면할 일도 없었을 거고, 안 그래? 진호야.”

“…….”

“얼굴이 붉네. 효과가 슬슬 나타나나 본데?”

뱀처럼 서늘한 손끝이 뺨을 스쳤다. 온몸의 털이 솟는 감각에 가까워지는 손목을 손등으로 쳐 냈다. 현우는 허공에 뜬 손을 호주머니 안에 도로 집어넣더니 진호가 든 빈 병에 힐긋 눈길을 주었다.

“네가 마신 게 뭔지 알아?”

“…….”

“최음제.”

어둠 속에서 안광이 하얗게 번뜩였다. 익히 아는 사실인데도 처음 들은 것처럼 심장이 지하로 곤두박질쳤다. 신현우는 숙취 해소제에 최음제를 넣어서 뭘 하려고 했을까. 제가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광경을 보고만 있으려고 먹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술은 깬 지 오래인데 돌연 속이 메슥거렸다.

“어때. 내 좆이 좀 그리워졌어?”

“…….”

“아니지. 넌 원래 내 좆에는 환장했으니까.”

세차게 노려보는 진호는 안중에도 없는 듯 현우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어 댔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비명을 지를까. 수영은 신현우를 몰래 뒤따라오겠다고 했으니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제가 신호를 보내면 들이닥치기로 했는데, 신현우가 문을 잠가 버린 덕에 불러도 들어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닥쳐.”

조금만 버텨 보자, 라는 다짐으로 진호가 약해지는 결의를 북돋웠다. 기껏 복수하려고 칼을 갈았는데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홀로 상대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는데. 도망칠 땐 치더라도 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쏟아붓고 싶었다. 너 같은 놈은 다 잊었다고, 나에게 티끌 한 톨의 영향력도 없다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욕설은 다 늘어놓으며.

“자존심 부릴 여유 없을 텐데. 뒤가 근질근질해서.”

현우가 제 엉덩이를 움켜쥐려는 걸 허리를 뒤틀어 피한 진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과거의 단면이 파편처럼 머릿속에 꽂힌 탓이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신현우의 손길 하나, 눈길 하나면 바라 마지않던 시절이. 이 자식의 아래에 깔려 거친 추삽질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새벽이. 어렵사리 해낸 다짐이 무색하게 인내력이 바닥을 보였다. 당장이라도 먼지가 되어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런 주제에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을까? 정말 다 잊었다고?

“마음껏 튕겨 봐. 몇 분 뒤엔 스스로 조르게 될 거니까.”

“그만……. 그만해.”

자괴감과 울분이 한데 뒤엉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짠돌이가 혼자 가는 나를 말릴 때 잠자코 포기할걸. 나인 척 신현우에게 연락해 옥상으로 부를 테니, 핸드폰만 빌려 달라고 할 때 냅다 고개만 끄덕일걸. 치미는 혈기에 휩쓸려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며 나서지 말걸. 기어코 미끼를 자처한 것이 한심스러웠다.

“어떻게 해 줄까. 오랜만이니까 살살 해 줘? 아니다. 너는 격한 걸 좋아하니까.”

“그만해! 그만하라고!”

절박한 심경으로 신호를 보냈다. 수영이 구해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남은 수단이 이것밖엔 없었다.

“씨발, 좀 닥쳐.”

신현우가 뒤편을 흘끔 살피며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속에 든 것을 위로 올릴 뻔했다. 습기 찬 살갗이, 제 목이라도 조를 듯이 음습해서.

“으읍, 으으!”

안간힘을 쓰며 입을 막은 손을 잡아 뒤틀었다. 어깨 너머로 본 출입문은 여전히 적막했다. 남수영, 언제 와. 소리 지르면 바로 올 거라며. 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는 건데.

“이 새끼가 닥치라니까.”

흐물흐물하게 늘어졌던 신현우의 동공이 노기로 또렷해졌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챌 것처럼 주먹이 올라갔다. 피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딜 맞게 될까. 얼굴? 배?

뻑!

귀청이 떨어질 듯한 타격음이었다. 이렇게 맞아 죽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에 비해 신체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고통이 극한을 초월하면 감지할 수도 없는 걸까.

“조교님, 뭐 하시는 거예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떠돌던 와중에, 우당탕, 하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옥상이 시끄러워졌다. 슬그머니 눈꺼풀을 열자 신현우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과대와 사방을 둘러싼 군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서 너덜너덜하게 삐걱거리고 있는 철문을 보니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맞은 건 내가 아니라 저 문이었구나. 근데 짠돌이는 어디 갔지?

“형.”

머리 위에서 답변이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건지 묻기도 전에 팔뚝이 잡혔다. 흐릿한 시야에서 신현우가 멀어지더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서 풍경이 우뚝 멈췄다.

“얼굴 좀 봐요.”

수영이 급한 대로 핸드폰의 플래시를 켜서 눈이 부시지 않게 대각선으로 비췄다. 따뜻한 엄지손가락이 하얗게 질린 뺨을 훑고 지나갔다.

“저 새끼가 어디 손댔어요?”

수영이 플래시를 내리며 솜털 하나하나 탐색하듯 피부를 훑었다. 거죽은 거칠지만 동작만큼은 부드러운 손끝이 발목 아래까지 살피더니 어깨에 닿았다. 적절히 얹어진 수영의 존재감이 다 괜찮다는, 무언의 위로처럼 느껴져 날 선 신경이 녹아들었다. 이제 괜찮아. 진호가 수영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맞은 데는 없어요. 멀쩡해요.”

신현우를 상대하느라 흩어진 혼백을 추스르려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보다 앞서 해결할 일이 있었다. 어쨌건 수영이 구하러 와 줬으니까, 계획을 얼른 마무리 지어야 했다. 굳건하게 뻗대는 어깨를 밀자 수영이 제 손목을 붙들었다.

“정말…….”

“알았으니까 나중에. 아직 남은 게 있잖아요.”

진호가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빈 유리병을 디밀었다. 시선이 제 눈썹 언저리에 진득하게 달라붙었지만 그 앞에 대고 병을 크게 흔들었다.

“괜찮다니까.”

“…….”

“빨리요.”

바지 호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병과 함께 내밀었다. 그러자 손목의 압박이 느슨해졌다.

“금방 올게요.”

병과 핸드폰의 무게가 수영에게 옮겨 가더니 손목에 맞닿은 살갗이 손등을 스치며 떨어졌다. 그러고도 수영은 미련이 남는 듯 진호를 응시하더니 상체를 틀었다. 거침없이 신현우에게 달려가는 등이 성급했다.

수영이 원을 그리며 선 사람들을 뚫고 안으로 사라지자 진호도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손으로 신현우에게 복수하진 못했지만 그 자식이 일으킨 소동의 대가를 치르는 장면은 놓칠 수 없었다. 수영에게 먼저 가라고 한 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맞았다. 다만 짠돌이라면 저는 신현우 그림자에도 닿지 못하게 했을 것이므로 나름대로 부린 꼼수이기도 했고.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지?”

중앙으로 다가가자, 모여든 머리들 한가운데에 냉랭한 수영과 가소롭다는 듯 비웃고 있는 신현우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둘러대려고 해도 소용없어.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 전부 다 봤으니까.”

수영의 말이 끝나자 그 뒤의 학생들이 동조하듯 쑥덕거렸다.

분위기가 살벌하던데, 봤어?

조교가 진호 선배 때리려고 했잖아.

“나한테 엉뚱한 화풀이하지 말고 네 애인이나 잘 간수해.”

신현우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끌며 수영을 노려보았다. 남들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곧잘 하곤 했는데 짜증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 것이, 속으론 저놈도 부글거리는 게 보였다. 약점을 정확히 건드렸나 보네.

“얼마나 고팠으면 나한테 넣어 달라고 지랄이야.”

불리한 상황에 더욱 자극적인 루머를 던져서 모면하려는 목적이 너무나도 또렷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있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일을 당연한 듯 들먹이는 것이 이기적이다 못해 추잡스러웠다. 같은 심정인지 여유롭던 눈매가 굳어 버린 수영과 술렁거리기 시작한 사람들, 기고만장한 신현우가 차례로 의식에 박혔다.

신현우의 말이 새빨간 거짓임은 자신도 수영도 잘 알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만약 모두가 신현우의 말에 선동된다면 저와 수영은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남수영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마음이 쓰여 앞에 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건 본인 얘기 아닌가.”

인파 중간에 불뚝 솟은 수영이 덤덤한 듯 앞줄로 나온 진호에게 눈을 돌렸다.

‘괜찮을 테니 거기 그대로 있어요.’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지 않을 텐데, 그러면서도 굳은 확신이 옅은 홍채 안에 가득해서 그만 발을 멈추고 말았다.

“방금 진호 형한테 최음제 먹여서 덮치려고 했잖아.”

“허. 없던 사실까지 지어낼 정도로 정곡을 찔렀나?”

저렇게 철면피인 것도 어떤 의미론 대단하다. 신현우 성격에 이렇게까지 찔렸으면 본래 성질이 버럭 뛰쳐나올 법도 한데, 입가의 근육이 씰룩이는 게 제 눈에 보일 정도로 절박하면서도 타격 없는 척 구는 모양새가 처량하기까지 했다.

“짠하네.”

수영이 짧게 한숨을 흘렸다. 짠돌이도 저와 비슷한 걸 느낀 걸까. 진호는 한편으로 안심하며 다음을 기다렸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이제껏 수영이 신현우에게 흔들렸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수영이라면 신현우가 어떤 도발을 하든 개 짖는 소리로 치부하고 넘겨 버릴 위인이었다.

“짠한 건 너겠지. 어디 증거라도 있으면 몰라.”

“이거.”

수영이 제가 건네준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이 안에 최음제 넣어서 형한테 먹이려고 했잖아.”

“이게 증거?”

현우가 어이가 없는 듯 헛바람이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맛보기고.”

수영이 다른 병을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냈다. 전의 것과 같은 위치에 초록색 스티커가 붙어 있는. 차이점이 있다면, 안이 갈색의 액체로 차 있다는 점이었다.

“진짜는 이거.”

“뭐야.”

“뭐긴 뭐야. 이게 네가 준비했던 거라고.”

신현우의 눈이 수영이 든 병에 멍하니 꽂혔다.

“상황 파악이 안 돼? 형이 마신 건 내가 준비한 가짜고, 이게 네가 최음제를 넣은 진짜.”

수영이 현우의 앞으로 두 개의 병을 번갈아 들었다. 흐트러졌던 동공의 초점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신현우가 겨우 침착을 유지하려는 듯 입가를 떨며 당겨 올렸다.

“이게 뭐, 씨발. 그래서 내가 최음제를 넣었단 증거가 어딨는데? 아무 병이나 들고 와서 우기면 그게 사실이 되나?”

신현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최음제가 든 병의 실물을 얻었다 해도, 신현우가 넣었다는 결정적인 단서가 없었다. 하지만 수영이 대비한 계획이 보기보다 촘촘하게 짜여 있다는 걸 신현우는 몰랐다.

“…….”

수영이 진호의 핸드폰을 현우의 앞에 들이밀었다.

-네가 마신 게 뭔지 알아? 최음제.

신현우가 제게 다가와 지껄였던 말이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자존심 부릴 여유 없을 텐데. 뒤가 근질근질해서.

-마음껏 튕겨 봐. 몇 분 뒤엔 스스로 조르게 될 거니까.

“증거라면 여기. 자기 목소리도 분간 못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이제는 감출 여력도 없이 무너져 버린 신현우의 입가와 대조적으로, 수영의 입가는 잠긴 듯 단단했다. 다시 듣는 신현우의 음성은 벌레가 기어가듯 귓속을 불쾌하게 적셨지만, 해냈다는 승리감이 그것을 덮고도 남았다. 짠돌이를 졸라서 제가 몰래 녹음하겠다고 나선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이렇게 개운한 쾌감도 느끼지 못했을 테니. 신현우와 맞부딪치며 온갖 혐오감을 체감하는 중에도 가까스로 정신력을 유지하여 녹음 버튼을 누른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진짜 조교 맞나 봐.

그렇게 게이로 몰고 가더니 자기가 게이였네.

미친놈 아냐? 어떻게 저런 짓을.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혼돈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저를 향하고 있는 오직 하나의 시선이 눈 안에 박혔다.

「증거를 빌미로 자백하는 걸 녹음하려고 했죠.」

현장을 덮치고 나면 어떻게 신현우를 골탕 먹일 것인지 물어보는 제 질문에, 수영은 결정적인 무기가 있다고 했다. 듣자 하니 신현우가 최음제를 넣었던 숙취 해소제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그걸로 신현우가 제 잘못을 실토하도록 만들고, 녹음까지 해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게 만들 작정이라고 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준비를 해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짠돌이가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버스에서 물었을 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던데, 신현우가 입원한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신현우가 꾸미는 짓을 파악해서 대처해 놓을 정도면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걸 전부 치사하게 자기 혼자서만 알고 있냐. 나한테도 귀띔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

홀로 구시렁대는 험담과는 달리 진호의 낯은 한낮처럼 밝게 빛났다. 혹시나 신현우 때문에 제게 미세하게라도 흠집이 날까 봐, 힘들어할까 봐, 배려해 준 게 아닐까. 추측이 아니라 진실일 게 뻔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리만치 닿아 오는 눈동자에 가슴께가 시렸다. 누차 겪은 바 있던, 꽁꽁 얼었던 벽이 햇볕을 맞아 녹아 사그라지는 듯한 느낌. 진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건, 남수영이 유일하다고. 첫사랑인 신현우에게 흠뻑 빠져 있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고. 그리고…… 이건.

“한 번 들어서는 모르나 봐? 더 크게 해서 들려줘?”

수영이 약 올리듯 핸드폰을 흔들었다. 신현우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듯이 제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고장 난 테이프처럼 같은 단어를 반복하던 신현우는 수영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걸로는 네 말을 입증하기엔 무리라는 건 알겠지.”

녹음한 내용만으로는 신현우가 숙취 해소제 안에 손수 최음제를 투여했음을 증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신현우의 반응만으로도 답변은 충분했다. 학생들은 이미 신현우가 범인이라고 믿고 있었고, 의견이 한쪽으로 명백하게 쏠린 이상, 신현우도 물러설 곳이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몰래 녹음하는 거, 존나 찌질한 짓거리인 건 알아?”

“남이 마시는 음료에 최음제 타는 건 고상한 행위고?”

“씨발…….”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고 있는지 말하는 턱이 덜덜 진동했다. 그 한심한 몰골을 내려다보던 수영은 거리낌 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한 번은 도망칠 기회를 드릴게.”

“하.”

“고맙다는 말은 됐으니까.”

수영이 빙그레 웃자마자 신현우가 박차고 나가듯이 옆을 지나쳤다. 세찬 기세에 모여 있던 학생 무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신현우도 나름 창피하긴 했는지 이마를 꺼질 듯이 바닥에 처박은 채였다. 다문 잇새로 바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천년 묵은 때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대단한 복수라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저 자식을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자연스레 눈이 수영에게 향했다. 수영은 후련한 듯 시원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대로 형, 하고 달려와 부둥켜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얌전했다. 시선이 얽힐수록 볼에 팬 주름만 깊어질 뿐이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되어서, 코끝이 찡해졌다.

“뭘 봐요.”

저도 똑같은 미소를 입가에 달고 있을 테다. 보지 않아도 알았다. 수영을 보는 순간, 줄곧 저를 좇고 있던 눈가에 이채가 서렸으니까.

“알잖아요.”

알긴 뭘 알아. 난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싫어할까 봐 조심스럽다는 거? 그래서 안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는 거? 이것으로 정말 괜찮은 건지 걱정하고 있다는 거? 괜히 날 끌어들인 건 아닌지 후회하고 있다는 거?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거? 아니면……. 모른다고. 어떤 건지 알려 주지 않으면.

하지만 진호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으니.

“야. 조교는 어떻게 되는 거야?”

“뭘 어떻게 돼. 이제 학교엔 얼씬도 못 하는 거지.”

“나는 뭔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들어가서 잠이나 잘래.”

현우가 사라지자, 옥상으로 올라왔던 학생들도 충격에 휩싸인 채로 하나둘씩 방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십수 명이 둘 사이를 가를 듯이 지나쳐 가도 수영과 진호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끌벅적한 소란이 깊숙한 심야로 사라질 때까지, 보이지 않는 밧줄이 둘을 묶어 버린 것처럼.

“어떻게 알고 준비해 놓은 거예요.”

한참 뒤, 정적을 깬 건 진호였다. 제가 누워 있던 방에서는 시간이 촉박해 어떻게 보복해 줄 것인지만 설명해 줬기 때문에 듣고 싶은 게 많을 것이다. 수영이 남은 비밀들을 줄줄이 늘어놨다.

“상무님께 부탁해서 병실에 CCTV를 달아 놨어요. 그 새끼가 뭔 짓을 벌일 거 같아서요.”

투나잇에서 신현우가 수상한 짓을 저지르려는 걸 알고 난 뒤, 대책을 세웠다.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신현우가 어떤 계략을 꾸밀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혜린에게 연락해 아무도 모르게 CCTV를 설치했다.

핸드폰으로 실시간 영상을 받아 보며 동태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신현우가 정체불명의 택배를 받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택배 안에는 숙취 해소제와 함께 물약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최음제고 다른 하나는 수면제였다. 그걸로 어쩔 셈인지 알아내려고 두고 봤더니, 신현우가 최음제를 꺼내서 숙취 해소제에 주사기로 주입하는 걸 목격했고, 그래서 이를 멀쩡한 것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현우는 응당 숙취 해소제에 최음제가 들어 있을 줄 알고 과대에게 전달했던 거고.

수면제도 엄한 데에 쓰일 거라고 판단해, 바꿔치기해 두었다. 당시에는 수면제의 용도를 몰랐지만, MT에 가져온 와인을 보고 어디에 사용하려고 했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수면제가 들어가 있지 않은, 그러나 신현우는 수면제가 들어 있다고 착각한 와인을 마시고 기절한 척 열연을 펼친 거였다.

“신현우가 여기 올 것도 알고 있었죠? 그것도 누나가 알려 줬어요? 누나도 알고 있었던 거예요?”

CCTV 설치를 도운 건 혜린이지만, 그 명목이 진호 형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CCTV와 연동된 핸드폰을 통해 신현우가 퇴원하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고, 곧장 이곳으로 올 거라고 짐작한 건 저뿐이었다. 신현우를 처리하는 건 온전히 제게만 맡겨졌으면 해서 그 누구에게도 복수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CCTV 때문에 혜린과 연락한 것이 다시금 형의 신경 줄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질투해 주는 건 좋지만, 미움받는 건 싫은데. 형은 제가 상무님에게 프라이버시를 흘릴까 봐 불안한 것이겠지만. 수영이 토라진 진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심하는데, 진호가 불퉁하게 질문을 던졌다.

“왜 내겐 숨기려고 한 거예요?”

내막은 간단하다. 신현우라는 이름만 들어도 거부 반응을 보이는 형이 염려되니까. 최대한 형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끌어들일 생각은 일절 없었다. 다만 신현우를 함정에 빠트리려면 형의 도움이 필요해, 계획을 털어놓은 거였다. 수면제를 먹고 쓰러진 상태인 제가 신현우를 불러내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나. 그래서 형의 핸드폰을 빌려, 형이 부른 것처럼 신현우를 꾀어내려고 한 건데. 형이 먼저 신현우를 유인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야, 난 형이…….”

“걱정했잖아요.”

응? 뭘 해? 수영이 제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는 ‘다시는 나 모르게 누나랑 연락하지 마요’라든가, ‘멋대로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니까’ 같은 대사가 나와야 하는데, 걱정이라니. 형이 저를 신경 써 줬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 큰 나머지 환청을 들었다는 게 더 그럴듯했다.

“뭘 멍하니 있어요.”

“다시 말해 봐요.”

“왜 멍하니 있냐고요.”

“아니. 그거 말고, 그 전에.”

“싫은데요.”

시선의 방향을 미묘하게 비끼며 제 옆을 지나치려는 게 쑥스러워 보이는 건 착각일까. 착각이 아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형의 입에서 ‘네가 걱정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뭐, 결과적으로는 괜찮았으니 다행이긴 한데.”

“걱정했어요? 나 때문에? 울 뻔했어요?”

“울긴 누가 울어요.”

없는 얘길 지어내네. 뻘쭘하게 뒤돌아서려는 걸 수영이 어깨를 잡아 돌렸다.

“멀쩡한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지면 누구라도 그럴걸요.”

변명하듯 덧붙이는 수습도, 그러면서 팔은 고분고분 붙잡혀 있는 모순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쓰러지기 직전, 들었던 다급한 외침도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걸까. 내가 마음에 걸려서, 그리도 안타깝게 내 이름 석 자를 불렀던 걸까.

“게다가 와인에 수면제를 타려고 했다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겠어요.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인데.”

수영은 신현우가 최음제와 함께 수면제를 구매했다고 했다. 자신에게 와인을 넣은 폭탄주를 마시도록 유도하는 꼴을 보고, 그 속에 수면제를 탔다는 걸 확신했다고. 그 양이 치사량에 가까워, 일찍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병원 신세를 지는 건 짠돌이였을 것이다. 신현우의 계략만 들었을 때는 바꿔치기한 것을 모르고 겁에 질렸었지만, 수영이 이어서 귓속말로 수면제를 물로 바꿔 놓았음을 알려 주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했다고는 하나, 수영이 죽을 고비에 이를 뻔했다는 것은 변함없었다. 삐끗해서 실수라도 했다면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목구멍에 돌덩어리가 떨어진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지축이 주춤 흔들리더니, 익숙한 무게가 온몸을 감쌌다. 커다란 어깨에 눈앞이 가려져 까치발을 하자, 묵직한 팔이 등허리를 죄어 오더니 떠 있던 발바닥을 바닥으로 안착시켰다.

“형은요? 형은 이대로 마무리 지어도 괜찮아요?”

밀어낼 수가 없었다. 담백한 말투에 상냥함이 잔뜩 실려 있어서. 맞닿은 심장의 울림이 짠돌이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그만큼 나를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복수는 이걸로도 충분해요.”

복수 계획에 동참하기로 약속하고 방을 나서기 전, 수영이 물었다. 신현우가 위협하는 현장을 덮치고 나면, 어떻게 하고 싶냐고. 때리고 싶으면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되고, 약점을 이용해 마음껏 부려 먹을 수도 있다고, 뭐든 해 줄 테니 제 손을 빌려서 미련 한 점이라도 남지 않도록 털어 내라고 그랬었다. 하지만 실은 거창한 복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현우가 내 앞에서만 사라진다면, 미움도 원망도 다 잊고 신현우를 만나기 전과 똑같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면 여한이 없었다. 신현우를 옥상으로 끌어들이겠다며 나선 것은, 앙갚음이라기보단 깔끔히 과거를 청산하기 위함이었다. 늘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그늘을 내 손으로 거둬 내고, 모든 미련을 떨쳐 내고 싶어서였는데…….

결국엔 신현우를 마주하자 무너지고 말았지만, 어찌 됐든 그 새끼는 여길 떠났고, 나는 여기 남았다. 나를 껴안고 있는 이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그 때문에 포옹에 가뿐히 응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고마워요. 날 좋아해 줘서.”

이 말도 전하고 싶었다. 수영이 제게 헌신하는 건 그만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모처럼 복수 계획까지 설계하면서 힘써 줬는데, 저도 어떻게든 보답해 주고 싶었다. 평소에는 제가 보기에도 차가웠으니까 이때만큼은 할 수 있다면 많이, 더욱더 따뜻하게.

수영이 느릿하게 숨을 내쉬는 것이 흉부로 느껴졌다. 알맞은 반응을 고민하는 걸까. 바로 떨어지지 않는 대답에 외려 제가 애가 탔다. 이만하면 변변찮은 농담이라도 나와 줘야 하는데.

“고마우면…… 뽀뽀 한 번만 해 줘요.”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지. 늘 그랬듯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웬일인지 입가엔 짜증이 아닌 미소가 머물렀다. 지금의 수영은 사뭇 진지하다. 장난으로 속여 보려 해도, 투정을 부리는 음성이 감정을 삼키듯 억눌려 있었다. 허허실실 넘어가는 능구렁이 같던 이전과는 달랐다. 수영도, 저도.

“그 입 좀 닫아 봐요. 당장.”

* * *

‘어떡하지?’

정연은 옥상으로 통하는 문 뒤의 벽에 숨어서 밖을 빼꼼 살폈다. 수영을 찾아다니다 옥상으로 다시 왔건만 무슨 일인지 기류가 어수선했다. 영문도 모른 채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경영학과 사람들을 피해서 문 뒤에 숨어 있었는데, 어쩐지 분위기상 저 둘 사이에 끼면 안 될 것 같았다. 중요한 얘기라도 하나. 어둑한 실루엣만으로도 진중한 공기가 생생하게 끼쳐 와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었다. 싸우는 것처럼은 안 보이는데,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오늘은 꼭 물어봐야 하는데.”

다음 주가 전국 대회 첫 출전이라서 1분 1초라도 컨디션 관리에 신경 써야 할 시기에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은 수영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다.

「어. 정연이니?」

비서실 직원에게 진호 선배와 관련된 일이라고 해서 통화하게 된 혜린은 반갑다는 듯 다정한 음색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데다 바쁜 도중에 연락한 저를 귀찮게 여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언니한테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수영 오빠랑 사귀는 사이예요?」

약 5초간 정적이 흘렀던 것 같다. 그 후로 귀가 떨어질 듯이 터진 웃음소리가 답변을 대신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된 혜린이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확언했다.

「아니. 전혀 아니야.」

「정말 아니에요?」

믿을 수가 없어서 재차 확인했다. 비밀 관계라더니,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었나?

「아니래도.」

어쨌든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초조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바쁠 테니 이만 전화를 끊으려는데, 혜린이 말을 덧붙였다.

「너 수영 씨 좋아하니?」

직전의 질문으로 눈치를 챈 건가. 누가 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은연중에 있었던 건지, 아니면 호탕한 언니의 반응 덕이었는지, 머뭇거리던 입이 이내 술술 열렸다. 고등학생 때 달리는 모습을 보고 반한 것부터 아주 강철이 따로 없는 수영의 한결같은 철벽까지. 지금 돌아보면 창피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좋을 사소한 감정과 투덜거림도 혜린이 진지하게, 그리고 즐겁게 들어 줘서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고 털어놓은 적은 없어? 내게 전화까지 할 용기면 이미 얘기했을 법도 한데.」

「없어요. 한 번도.」

「왜? 거절당할까 봐 겁났어?」

「고백해도 거절할 게 뻔하잖아요. 오빤, 저는커녕 여자 자체에 관심이 없어요.」

「음. 만약 수영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떡할래?」

수영 오빠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그런 가정은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말문이 막혔다. 수영은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사람이 아니라고 장담했기 때문에. 하지만 만에 하나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철벽을 쳤던 거라면.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처럼 누군가를 짝사랑하기 때문이라면.

「그러면…….」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이 골을 울렸다. 어째서 그 생각을 못 했던 걸까. 좋아하는 상대가 있어서 그랬던 거라면 애초에 승산조차 없었던 건데.

「언니. 죄송한데 잠깐 끊어야 될 거 같아요. 아니, 앞으로 통화로 업무를 방해할 일은 없을 테지만, 어…… 아무튼 제 얘기 들어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조차 못 한 채 허둥지둥 통화를 마쳤다.

「그래. 내 연락처 알려 줄 테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여기로 연락해. 정말 괜찮으니까.」

차분한 대답에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 있는 듯했지만 그런 걸 염두에 둘 여유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어느새 빈 공책에 낯선 전화번호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책상 앞에 망연히 앉아서 생각했다. 수영 오빠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면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 그래도 잘될 가능성이 희박한데, 다른 곳을 향한 수영의 마음을 제게로 돌리려고 애쓰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 사람과 잘되라고 축복해 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좋아한다고 고백해 버릴까.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은 수영과 직접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수영이라고 해서 누굴 좋아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었으니까. 시작부터 엇나갔던 짝사랑이라면 그 끝이 비참한 건 당연할 테니, 제 마음을 정리하는 게 저를 포함한 모두에게 이로울 듯했다. 수영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시간이 얼마인데, 포기하더라도 제 마음 정도는 알리고 그만두고 싶었다.

수영과, 또 수영을 향한 제 마음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 훈련도 포기하고 수영을 만나러 왔다. 수영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졸음이 몰려와도 선뜻 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결판을 낼 요량으로 마지막까지 기다릴 참이었는데 수영과 진호의 대화는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안 끝났나?”

벽 뒤로 몸을 감춘 채 열린 문틈 새로 고개를 길게 내밀었다.

“헙.”

두 눈에 들어온 뜻밖의 장면에 정연은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러곤 천천히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세상에. 오빠와 선배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졸려서 헛것을 보나 싶어 눈두덩이를 두어 번 비벼 봐도, 달빛에 어스름하게 비치는 두 입술은 하나로 겹쳐 있었다.

의문 하나가 자연히 해결됐다. 수영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은 진호 선배였다. 믿고 싶지 않아도 저 행복에 찬 표정이 온몸으로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얼핏 보기로는 진호 선배도 싫지 않은 –심지어 부끄러워 보이는– 눈치였다. 맞닿았던 입술이 가볍게 떨어진 뒤에도 두 얼굴은 멀어질 기색이 없었다.

유독 유난으로 느껴졌던 수영의 챙김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진호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생전 안 타던 택시를 타고, 안 사던 커피를 사고, 실종된 선배를 찾으러 홀로 야산을 휘젓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때는 작은 의문으로 넘겼던 것들이 인제 와서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태평해도 되는 거야?’

막강한 라이벌의 등장인데.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나는 오빠를 훨씬 전부터 좋아해 왔다고, 오빠와 사귀기 위해서 선배와 거래까지 하며 노력해 왔는데 그 결과가 이거냐고 따지는 게 인지상정인데, 심경이 나른한 오후의 호수처럼 평안했다. 이토록 아무렇지 않아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고백하고자 기다렸던 의지마저 한 점도 안 남고 사라져 버렸다. 둘이 입을 맞추는 광경을 목격한 직후부터.

‘고백은 안 해도 될 것 같네.’

이제껏 기다렸던 게 아깝지는 않았다. 오랜 짝사랑에 면역이 된 탓일까. 아니면 이 마음에 종지부를 찍을 계기를 찾아서일까.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희한하게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정연이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며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장장 4년을 끌고 온 짝사랑이 허무하게 종결을 맺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이 심리도, 오빠가 마음에 둔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봤을 때 모른다고 답변했던 선배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여겼던 제 마음조차, 어느 하나 진실로 여겨지는 것이 없었다. 손안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층계를 내려가던 정연이 주소록을 살폈다. 답답한 속이라도 풀고 싶은데…….

“앗.”

전화할 뜻은 없었는데. 마침 눈에 띈 번호 옆에 달린 통화 버튼을 무심코 눌러 버린 정연이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정연아?

“언니, 죄송해요. 잘못 눌러서.”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진짜 실수예요.”

-나 안 자고 있었어. 괜찮아.

“아, 그게…….”

방정맞은 입술이 쉬이 거절의 소리를 뱉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도 아니고 ‘무슨 일 있어?’라니. 속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는 말투였다.

“언니. 잠시만 시간 돼요?”

친한 사이도 아닌데 이러면 민폐인 걸 알지만, 아무래도 이번 한 번은 눈 딱 감고 저질러 봐야겠다.

* * *

“형. 많이 취했어요?”

기껏 뽀뽀해 줬더니 돌아오는 게 이따위라니, 눈치를 밥 말아 먹은 짠돌이 아니랄까 봐. 진호가 수영의 가슴 언저리에 긴 한숨을 뿌리며 눈꺼풀을 내렸다.

“싫었어요?”

“아니…….”

수영의 손이 갈 곳을 잃고 진호의 얼굴 주변을 떠돌았다. 이러면 못 참을 걸 알면서 일부러 도발하는 건지. 진호의 뺨에 머무르던 손이 다물어진 입가를 지그시 눌렀다.

쉽게 들뜨지 않는 편이 좋다. 형은 좋아하지 않아도 섹스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뽀뽀 정도야 가벼운 인사 축에도 끼지 못할 거다. 전에도 취기에 삽입 직전까지 가 놓고 다음 날 몽땅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한낱 뽀뽀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게 맞는데 형이 먼저 해 버리면, 게다가 귀엽게 입을 맞대 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가슴이 욱신거려서 의사도 묻지 않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몇 초간 망설이듯 꿈쩍도 하지 않던 형이 살며시 입술을 열었을 때는 희열에 몸서리가 쳐졌다. 설령 이것 또한 주사였다 해도 거부할 의향 따윈 없었다.

목덜미를 손아귀에 쥔 채 입천장을 느리게 훑으니, 곧 제 것보다 작은 혀가 얽혀 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물컹한 살덩이를 흡입했다. 젖은 입 안이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삼켜졌다. 달큼한 내음에 끌어안은 골반을 움켜쥐듯 쓸었다.

“읍, 으음.”

아래로 떨어져 있던 손이 제 옷깃을 강하게 붙들어서, 아쉽지만 볼 안쪽을 슬그머니 건드리다가 빠져나왔다. 멀어진 입가가 타액으로 얼룩져 있는 자태까지 음심을 자극해서 그만 눈길을 돌려 버렸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기 전까지 섹스 안 한다면서요.”

“그래서 키스만 했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진호가 맞는 말에 반박은 못 하고 먼 곳을 향하는 눈동자를 물끄러미 보더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거 해결 안 해도 돼요?”

겨우 키스로 만족한단 말이지. 괜한 치기에 손안에 담기지도 않는 탄탄한 물건을 손바닥으로 살살 쓸자, 수영이 퍼뜩 손목을 잡아챘다.

“어, 어. 왜 이래요?”

동요한 듯 흔들리는 눈빛이 묘한 쾌감을 주었다. 맨날 수영에게 당하기만 하다가 놀리는 입장에 있으니 이리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짠돌이가 허구한 날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던지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제야 수영의 심리를 이해할 것 같은 진호였다.

“지금이면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진심과 장난을 적당히 섞은 채 다시 팔을 아래로 내리자, 수영이 칼같이 막아 냈다. 여유 없이 풀어 헤쳐진 표정을 보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런 재미를 자기만 맛보고 있었단 말이야?

“장난은 이쯤 해요. 충분히 괴로우니까.”

힘을 잔뜩 실은 채 내뱉는 수영의 기세가 워낙 심각해서 아쉽지만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더 했다간 되레 제가 당할지도 몰랐고. 진호가 손의 힘을 풀자, 수영도 안심했는지 잡았던 팔을 내려놓았다.

“형은 앞으로 술 마시면 안 되겠어요.”

떨어진 손끝을 응시하던 수영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짙은 숨을 뱉었다. 진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 매번 속아 넘어가고야 만다. 손에 닿는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과, 나를 향해 얽어 오는 시선이 너무나 황홀해서. 깨고 나면 나만의 착각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만다. 상대가 형이라는 것만으로.

그러니 형의 부추김이 성적 욕구에 불과함을 인지하고서도 늘 밀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방금도 하마터면 자제력을 잃고 셔츠 밑단을 잡아 올릴 뻔했다. 하여간 서진호라는 사람은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인 구석이 있다. 매 순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내 심정을 눈곱만큼이라도 헤아리고는 있을까.

“마음에도 없으면서 사람 홀리기나 하고.”

마음에 없진 않았는데. 진호는 받아쳐 주고 싶었지만 관뒀다. 그 대신 눈빛으로 실컷 반박해 줬다. 뽀뽀해 달라는 어이없는 요구를 들어준 것도, 다짜고짜 다가오는 입술에 순순히 응해 준 것도 충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도 아니었다. 내가 그러고 싶었다. 그뿐인데 언제 홀렸다고 그래.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수영이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내리누르듯 엄지로 지긋이 매만졌다.

“봐. 지금도.”

손끝의 열기가 발끝까지 번져 오는 듯했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뜨겁다 못해 포근해서 밀쳐 낼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망부석처럼 붙잡힌 채, 다가오는 시선을 받아 내고만 있었다.

방금의 키스로 깨달은 것이 있다. 저도 수영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서로의 혀가 얽히고, 체온을 느끼면서 단순한 육욕이 아닌 가슴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신현우를 비롯해 그간 밤을 보냈던 어느 섹스 파트너에게서도 느끼지 못하던 충족감이었다. 그 상대가 수영이라는 사실은 역시 반갑지 않았지만 더는 물러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로 인해 온전해지는 감각이 확연했기 때문에. 한동안 수영만 보면 발생했던 불가사의한 신체의 증상도 원인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막 닿을 것 같던 입술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간격을 두고 정지했다. 두 번은 돼도 세 번은 안 된다는 건가. 난 이전과는 다른데. 정말 진심으로 하고 싶은데, 너랑.

“그러면 안 할 거야?”

주저하는 낌새가 못마땅해서 심술을 내며 등을 감쌌다. 조르듯 안으로 끌어당기자 수영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 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손쉽게 풀어졌다.

“설마.”

취기로 인한 어리광처럼 보였을까. 미소를 머금은 입가가 오기를 담은 듯 거칠게 겹쳐 왔다. 순식간에 입술을 열고 들어오는 살점을 기꺼이 받아 삼켰다. 목구멍까지 헤집는 혀를 빨아들이고, 목뒤를 감아쥐는 손길의 압박감을 느끼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간간이 흘려보냈다. 말하자면, 격렬하긴 해도 과거에 다른 남자들과 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키스였다.

“하아, 잠깐…….”

그런데도 심장이 튀어나올 듯 곤두박질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막이 먹먹해지며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맥박이 뛰는 고동 소리만이 귓가에 박혔다. 짠돌이가 여유로웠다면 필시 눈치를 채고 놀렸을 것이다.

“잠, 흐읍……!”

멈추라는 뜻으로 제 등을 감싸고 있는 팔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허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헛손질했다. 이를 알아챈 수영이 틈을 주듯 살짝 입술을 떼어 내는가 싶더니 곧장 윗입술을 빨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입술이 다시 열렸다.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멈추고 싶은 의지와 동시에 멈추고 싶지 않은 의지가 충돌했다. 그사이, 몇 번이고 수영과 호흡을 섞었다가 떼어 내기를 반복했다. 욕망이라든지, 쾌락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키스. 제겐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처럼 여겨지던 행위를 수영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좋아해, 진호야.”

입술이 멀어질 때마다 수영이 숨을 내쉬듯 나지막한 음성을 흘렸다. 세차게 떨리는 박동이 가라앉을 새도 없었다. 이제는 몇 번째일지도 모를 입맞춤을 하며 진호가 생각했다. 지금이 캄캄한 밤이라 다행이라고. 만약 빛이 있었다면, 수줍은 사춘기 소년처럼 붉어진 제 얼굴이 여과 없이 드러났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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