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다음 날 일어나니 정연은 서울로 돌아가고 없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간밤에 잠을 설치도록 고뇌했던 일이 수포가 된 것 같아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어제 수영과 키스까지 해 놓고 뻔뻔하게 정연과 마주할 낯도 없었다. 다음 주가 대회라고 했으니 한창 정신이 없겠지. 깊은 대화는 훗날로 미루며 몽롱한 정신으로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해결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로 오는 버스 안에서, 그리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부족한 수면을 채우다 보니 오후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늘 점심은 뭐로 할까요. 한식? 양식? 일식? 중식?”
찜찜한 제 속도 모르고 짠돌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점심 타령이다. 괜히 심통이 나서 무시하려다가, 수영의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그렇게 웃으면 책임져 줘야 하는데.”
“뭘요?”
“앞으로 웃을 때마다 뽀뽀 한 번씩 해 줘요. 그걸로 참게.”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어제 이후로 짠돌이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허물었더니 역시나 기어오른다. 입가의 미소를 지워 버린 진호가 오늘따라 한층 들뜬 듯한 수영에게 눈을 부라려 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이라도 웃어 주면 안 된다니까. 잊고 있었던 깨달음을 되새기며 버튼을 누르자, 로비에 정지해 했던 엘리베이터 문이 바로 열렸다. 순식간에 몸을 집어넣은 진호가 밖은 보지도 않고 닫힘 버튼을 눌러 버렸다. 문틈으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안 봐도 남수영이겠지, 뭐.
익숙한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리웠던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낯선 중년 여자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어?”
고급스럽게 온통 하얀 정장으로 차려입은 옷차림이 범상치 않았다. 자칫하면 촌스러울 법도 한데, 디자인이 깔끔하고 맵시가 좋아 여자에게 잘 어울렸다. 집을 잘못 찾아왔나? 진호가 여자 앞으로 주춤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여긴 우리 집인데, 주소를 잘못 아신 것 같은데요.”
“서진호 학생, 맞죠? 수영이가 신세 지고 있는.”
난데없이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당당하게 뻗어진 새하얀 실크 장갑에 압도되어 무의식적으로 손을 잡았다. 중년의 여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주름진 눈가가 둥글게 휘어지며 푸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호가 경계가 풀어진 시선으로 잡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근데 누구신지…….”
질문과 동시에 ‘띵’ 하는 도착 음이 울리더니 수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수영아!”
여자가 수영을 보자마자 반가운 듯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반면, 진호를 향해 투정이라도 쏟아 낼 듯 장난기를 머금고 있던 수영의 인상은 여자를 발견한 순간부터 급격히 일그러졌다.
“여기까지 찾아와요?”
“네가 번호를 차단했잖니. 너랑 얘기하려면 이 방법밖엔 없었어.”
“전 할 얘기 없는데요. 늦기 전에 비행기 표 구해서 돌아가세요.”
수영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진호의 팔을 잡아채더니, 여자의 곁을 지나쳐 카드 키를 꺼내 들었다. 번호를 차단했다고? 방금까지만 해도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었던 중년의 여성에게 강한 흥미가 생겼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 거지?
“너 보려고 맨해튼에서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다시 돌아가란 말이니?”
“누가 오라고 했어요? 뭘 하시든 헛수고일 거니까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맨해튼?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단어에 진호가 팔뚝을 털며 수영에게서 멀어졌다. 설마 하는 생각에 지나칠 수가 없었다.
“12년 만에 이모 보는 건데, 반갑지도 않아?”
“그쪽 집안이랑은 평생 엮이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돌아가세요. 좋은 말 할 때.”
“수영아. 난 그저 네가.”
“혹시 성함이 임, 경 자, 희 자인가요?”
진호가 중간에 끼어들자, 놀란 듯 여자가 주름진 눈가를 폈다.
“진호 학생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죠?”
“택배 보내신 거 봤어요.”
맨해튼이라는 지명을 듣는 순간, 직감이 왔다. 정체불명의 택배 상자를 보낸 사람이자, 수영이 걸려온 전화를 질색하며 끊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 사람이 이모였다니.
짠돌이 새끼. 옥탑방에 배달된 상자 더미가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굴더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다른 건 묻지 않아도 알아서 나불대는 수영이 미심쩍은 낌새를 보인 유일한 부분이라 쭉 신경이 쓰였다. 무엇이 켕겨서 알아서 처리한다며 택배에 대한 내 관심을 떼어 놓은 걸까. 신현우의 계략도 혼자 알고 있었던 걸 떠올리면 수영의 꿍꿍이가 지나치게 거슬렸다. 혹시나 저 몰래 중요한 일을 꾸미고 있을까 봐.
“저에 대해선 어떻게 아신 거죠?”
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그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이 아줌마가 어떻게 저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수영이 전화번호도 차단한 상대에게 제 신상을 털어놓았을 리 만무했다. 여기 올 걸 알았다면, 보자마자 정색하며 쫓아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얘가 말했을 것 같진 않고. 뒤라도 캤어요?”
진호가 부드럽게, 그러나 불쾌함이 묻어난 말투로 물었다. 예사롭지 않은 옷차림에서부터 느꼈지만, 아까부터 옆구리에 끼고 있는 핸드백의 브랜드 로고가 유독 튀었다.
“수영이가 지내는 곳을 알아봤을 뿐이지, 진호 학생을 뒷조사하진 않았어요.”
맨해튼에 살면서 IGN의 제품을 애용한다, 라. 그렇다면 재산이야 넘치도록 있을 테고, 짠돌이의 거처야 금방 알아낼 수 있었을 테지만……. 아르바이트 경력만 해도 A4 열 장을 채우고도 남는 짠돌이와는 거리가 멀어서, 명품을 전신에 휘감은 아줌마가 수영과 같은 집안사람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짠돌이가 실은 재벌 가문의 자제였다는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된다. 이제껏 알고 있던 수영에 대한 이미지와 눈앞의 상황이 부조화를 일으켜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깐 들어가도 괜찮을까?”
진호가 답을 듣고서도 반응이 없자, 경희가 수영을 향해 싱긋이 웃었다. 둥글게 접히는 눈매를 보면 짠돌이랑 닮긴 닮았는데. 혼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진호가 눈만 깜빡거렸다.
“돌아가세요.”
수영이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경희가 같은 곳을 눌러 아래로 향하는 버튼에 표시된 하얀 빛을 끄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손이 가로막았다.
“우선은 돌아가시죠.”
진호가 잡았던 손을 공손히 내려놓으며 예의상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걸리는 점은 수영이 제 앞의 여자를 몹시나 꺼린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싫어하던 신현우에게도 대놓고 화를 낼지언정 피하지는 않았는데, 전의 통화 때도 그렇고 짠돌이는 이모라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것조차 아까워 보였다.
“본인이 싫다고 하고, 저도 갑작스러운 손님은 원치 않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약속을 하고 오세요.”
그래서 이 상황부터 정리하는 게 맞겠다고 판단했다. 제 복잡한 속은 그렇다 쳐도, 이 아줌마를 수영이 경계하는 데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거라 믿으니까.
“아뇨. 진호 학생은 몰라서 그래요. 수영이랑 오해가 있어서…….”
“오해 같은 거 없어요. 그만 돌아가세요.”
수영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진호를 뒤로 빼냈다. 층수 표시판을 보니 이제 막 로비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오래도 걸리네. 수영이 하강 버튼의 하얀 불을 재차 확인했다.
“수영아.”
경희가 전보다 단단한 목소리로 수영을 타이르듯 불렀다. 입가에 박제된 것 같은 미소는 변치 않았지만, 날카로워진 눈매가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경희가 멀뚱히 뒤에 선 진호를 눈으로 훑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네 외할아버지, 많이 위독하셔.”
“…….”
“당장 내일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아. 그래도 네 생각이 나셨는지 수영이 네가 당신의 뒤를 이어 회사를 경영하길 바라시더구나. 물론 네가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지만…….”
“그래서요?”
수영이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더니, 뒤늦게 죄책감이라도 들었나 보지. 갈 땐 편하게 가고 싶다는 심보인가 본데, 그건 그 사람 사정이지 제 사정은 아니었다.
“연 끊었다며 저희 남매 쫓아낼 땐 언제고, 필요해지니까 돌아오라고요? 후계 자리라도 쥐여 주면 옳다구나, 하고 냉큼 받아들일 줄 아셨어요?”
“그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겠어? 내년이면 수민이 대학도 보내야 하잖아.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네가 조금만 참으면 온 가족이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이 기회를 포기하기도 아깝지 않아?”
이모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제 대학 등록금 내기도 빠듯한 와중에, 동생의 대학 입학까지 겹치면 감당하기 버겁다는 건 예정된 고난이었다. 부담이 클 테니 눈 딱 감고 손 벌리면 서로 좋다는 얘기지. 그것도 일리는 있으나 전부터 제 답변은 한결같았다.
“그런 기회 원한 적 없고, 우리 가족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고민이라도 해 보면 안 되겠니? 이모는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경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승강기의 도착을 알리는 알람음이 울렸다. 스르륵 문이 열리자 수영이 기다렸다는 듯 하강 버튼을 꾹 누르며 안으로 손짓했다.
“타세요.”
“수영아.”
“여기 들어오겠다고 경비업체에 얼마나 먹였는지 모르겠지만, 다음엔 아까운 돈 버리지 마세요.”
완고한 거절이었다. 설득을 더 해 보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경희가 수영의 앞에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당분간 한국에 있을 거니까 뭐라도 필요하면 연락해.”
줄곧 뒤에서 듣고만 있던 진호가 명함에 금박으로 박힌 글자를 보고 놀란 듯 헛숨을 들이켰다.
“넣어 두세요.”
“받기라도 해.”
잇따른 사절에도 제 앞에서 거두어지지 않는 빳빳한 종잇조각을 수영이 빤히 보더니 가로채듯 가져갔다.
“조만간 다시 연락할게.”
수영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경희 역시 말을 보태지 않고 묵묵히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수영이 버튼에서 손을 뗐다. 수영을 보며 선 경희가 로비 층의 버튼을 누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경아 일은…… 미안해.”
가라앉아 있던 수영의 눈가가 움찔거림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소리도 없이 승강기가 아래로 향하고, 표시판에 뜬 숫자가 점차 작아지는 걸 지켜보던 수영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모 때문에 불편했죠? 이제 들어가서 쉬어요.”
카드 키로 현관문을 여는 수영을 진호가 저지했다. 회사, 경영, 후계. 평생 짠돌이와는 교집합으로 묶일 리가 없는 단어가 뇌리에 맴돌았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수영이 재벌가 집안 출신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나한테 할 말 없어요?”
가족이 부자라면 수영이 짠돌이가 되거나 수없이 많은 아르바이트를 뛸 필요가 없다. 수영이 대화조차 기피할 정도로 친척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필시 이쪽 집안도 저희 집안처럼 만만치 않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연이 짠돌이가 택배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일 테고.
맞아, 택배. 거기서부터 갑작스러운 이모의 방문 그리고 아까 본 명함까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수영이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띤 채 문을 열었다. 무심하게 부엌으로 들어가는 저 커다란 등이 지쳐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진호가 약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수영을 뒤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뭐 먹을래요. 냉장고에 달걀이랑 김치 남은 거 있는데, 김치볶음밥 어때요?”
싱크대에 손을 씻으며 무심하게 물어보는 뒤태를 보며 진호가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아, 새우도 있네. 해물볶음밥도 괜찮겠다.”
“경아가 누구예요?”
냉장고 안을 뒤지는 수영에게 단호하게 질문을 던졌다. 포장된 새우 봉지를 꺼내던 수영의 손이 멈추더니, 고개를 숙이느라 굽어졌던 허리가 펴졌다.
“집에서 쫓겨났다는 건 뭐예요? 원래는 시골에 살았던 게 아니었어요?”
“점심 안 먹어요?”
냉장고 문을 닫은 수영이 새우가 든 봉지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더니 뒤돌아 눈을 마주했다. 이런 때마저 태평하게 점심 타령이라니. 요령에 넘어가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번에는 어떻게든 답을 받아 낼 작정이었다.
“외가가 IGN인 거, 왜 말 안 했어요.”
신현우가 다녔던 그 회사, 김 교수에게 찍혀서 발표까지 했던 그 회사의 브랜드 로고가 경희가 내민 명함에 떡하니 찍혀 있었다. 그 말인즉슨 수영이 이모의 제안을 수락했으면 IGN의 경영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매우 비현실적이게도. 만약 경희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일이었다.
“그래요. 점심은 나중으로 미루죠.”
수영이 포기한 듯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구석에 놓인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다.
“내 말 안 들려요?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요.”
그간 IGN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척, 관계없는 척하며 저를 속인 것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의문의 택배도, 신현우의 계략도, 갑작스러운 경희의 방문과 수영의 배경도, 제가 묻지 않았으면, 우연히 발견하지 않았으면 영영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에 가슴이 끓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난 치욕스러운 연애사부터 엉망인 우리 집구석 사정까지 밝혔는데, 넌 왜 아무것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잖아요.”
돌이켜 보면 수영이 저 자신에 대해 진지한 얘기를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내가 어떤지만 살폈지. 내가 먹을 것, 내가 입을 것, 내가 할 것, 내가 느끼는 것이 우리 사이의 주된 대화였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모르는 부분을 제가 챙겨서 문제였다. 반면 저는 수영의 과거나 미래 계획,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가족이 몇 명인지도. 그나마 수영을 집에 들였던 첫날에 누나에게 물어봐서 알게 된 것 정도가 수영에 대한 정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좋아한다고 했던 주제에 자신의 사적인 영역이라든지 깊은 속내는 보여 주질 않는다. 이러면 사생활 운운했던 이전의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론은, 날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차 마실래요?”
수영이 선반에서 찻잔과 녹차 티백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뻗친 진호가 포트의 물을 잔에 따르는 수영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가 중요해요, 지금?”
“알겠으니까 여기 앉아요.”
수영이 진호의 손을 다른 손으로 쥐어 그대로 의자에 앉혔다. 힘이 풀린 발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눈앞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녹차가 놓였다.
“그렇게 알고 싶어요?”
수영이 맞은편에 앉으며 제 찻잔에 물을 부었다. 긍정의 뜻으로 격하게 머리를 흔들자, 뭐가 웃기는지 피식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손등을 그러잡았다. 갑자기 손은 왜 잡아. 뿌리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면 얘기를 안 해 준다고 할 거 같아서 내버려 뒀다. 그리고 사실은…… 놓기 싫은 마음도 아주 살짝 있었다.
“형이 알려 달라고 사정하는데 못 알려 줄 건 없죠.”
열이 올라 따뜻한 진호의 손끝을 제 손안에 꽉 쥐며 수영이 운을 뗐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좋을까. 음. 아무래도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지.
* * *
열 살 무렵,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맨해튼에 거주하고 있고, 막내 수정이가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나올 날을 기다리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무렵. 그때의 자신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과였다. 같이 놀자며 친구들이 붙잡아도 뿌리치고 저택으로 향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남은 시간을 어머니의 서재에서 보냈다.
IGN의 디자인 기획을 도맡고 있던 어머니는 서재 안에 틀어박혀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그 때문에 서재의 곳곳에는 각종 명품 브랜드의 제품을 정리해 놓은 카테고리와 시안, 포스터 등이 즐비했다. 넘치도록 넓어서 허전한 제 방보다 열정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서재가 저에겐 더욱 아늑해서, 온종일 그 안에서 머물며 해당 시즌의 명품 잡지를 읽곤 했다.
“경아야. 나 왔어.”
어린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어머니를 이름으로 불렀다. 업무를 마친 아버지가 선물을 잔뜩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 배 속의 수정이를 포함한- 여섯 식구가 다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밖에서는 영어를 써도 집 안에서는 모국어를 써야 한다는 가문 철칙에 따라 우리 가족끼리는 언제나 한국어를 썼다.
“수영이, 오늘 모든 과목에서 A 받았다며? 고생 많았어.”
아버지가 준 장난감 차를 식탁 위에 굴리느라 밥은 뒷전인 수훈이에게 숟가락을 쥐여 주려는데, 아버지가 대신 수훈이에게 쥐여 주며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교수라는 직책에 걸맞지 않게 여기저기 다치고 상해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바닥은 따스했다.
“우리 수영이가 얼마나 멋진데. 시킨 적도 없는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동생들도 잘 돌보고. 엄마는 수영이가 무리하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니까.”
수민이의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 주던 어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저는 그러는 게 행복해요, 라고 답하니 어머니는 환한 웃음으로 보답해 주었다.
“그래? 수영이가 행복하다면 엄마는 그걸로 족해.”
어린 마음에 그 따스한 한마디가 가슴에 박혀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웃음과 어머니의 미소. 그것 때문에 매번 친구들의 권유도 무릅쓰고 악착같이 집으로 오게 되는 것이었다. 부푼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너른 식탁이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단란하고 그리운 그때의 풍경은 현재까지도 제 기억 속에 깊숙이 자리해서, 불쑥 떠오를 때마다 절로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곤 했다.
이런 나날만 이어질 것 같았던 우리 가족이 보기만큼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수정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밤이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서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하는데, 안방에서 조그마한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 말소리라기엔 흐느낌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에 열린 문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데, 울음이 섞인 듯한 어머니의 음성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당신은 그럼 어떡해. 그렇게나 힘들게 교수가 됐는데, 아빠 때문에…….”
본능적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서서히 뒷걸음질 치며 문에서 멀어졌다. 아버지의 품에 묻힌 어머니가 어깨를 떨며 서럽게 눈물을 삼키는 것이 당혹스러운 동공에 맺혔다. 항상 밝은 엄마가 저렇게 슬피 우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마침 교수 자리가 내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 일은 또 알아보면 되는 거고. 괜찮아.”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첫 강의 나갈 때, 설레서 잠도 제대로 못 잤으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등을 쓸어내리며 잔잔히 웃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서글퍼 보여서, 저도 모르게 잠옷 자락을 양손으로 힘껏 쥐었다.
“이리 예쁘고 똑똑한 부잣집 딸내미랑 결혼했으니, 이 정도는 감내해야지.”
가라앉은 기분을 띄우려는 듯,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어머니를 껴안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노력에도 어머니의 울음은 그치질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여보. 나 때문에, 우리 가족 때문에……. 옆에서 곤히 자는 수정이가 깰까 봐 울음을 삼키는 어머니의 몸이 무너질 것처럼 흐늘거렸다.
무슨 영문인지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더 있다간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잽싸게 방으로 돌아왔다. 가슴속이 울컥거리는 감정과 혼란으로 북적거렸다.
외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게 만든 건가. 작년에 칠순을 맞은 외할아버지의 축하 파티에서, 못마땅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노려보던 외할아버지의 서늘한 표정이 떠올랐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묘하게 무겁다고 느껴졌던 공기가 내 착각은 아니었구나.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흉이 외할아버지란 건 명확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 봤던 외할아버지가 괜스레 미워졌다. 다음에 만나면 엄마와 아빠에게 사과하라고 해야겠다. 그런 결심을 품으며 눈을 감았다.
고대했던 외할아버지와의 재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였다. 잘 다듬어진 잔디 공원 한가운데 넓은 터에 목관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하얀 관에 들어가 있는 시체가 내 어머니라는 사실은 경희 이모에게서 몇 번이고 들었지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같이 저녁을 먹고 대화를 나눴는데, 이젠 말하는 어머니를 영영 볼 수 없다니.
몽둥이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귀가 윙윙거렸다. 현실감이 없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간 정신을 놓을 것 같아, 양손에 각각 쥐고 있던 수민이와 수훈이의 손을 붙들었다.
“둘 다 교통사고로 죽었다죠? 차체가 완전히 찌그러졌다던데요.”
“그 자리에서 즉사했대. 안됐지, 뭐.”
“그건 그렇고 유산은 어떻게 되는 거지? 쟤네가 받는 건가?”
“글쎄요. 법적으로 그렇겠지만, 회장님이 두고 보시겠어요? 평소에 남 서방 눈엣가시로 여겼잖아요.”
일면식도 없는 친척들의 가벼운 말들이 공기 중으로, 그리고 우리에게로 쏟아졌다. 무리 중에 우리 남매만 외딴 섬에 떨어진 듯했다. 그저 하염없이 하늘만 보고 있는데, 수민이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오빠. 엄마랑 아빠는 언제 와? 여기 왜 왔어? 집에 안 가?”
“누나는 그것도 몰라? 아빠랑 엄마, 놀러 갔잖아. 그치, 형.”
“으응.”
동의를 구하는 수훈이를 향해 힘겹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것 봐. 내 말 맞잖아. 해맑게 투덕거리는 둘을 지켜보다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리니까, 당분간은 숨겨야겠어.
“수영아. 아침 못 먹었지.”
귓가에 속삭이는 경희 이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하관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이모가 사 줄게.”
“아뇨. 전 괜찮아요. 수정이는요?”
“수정인 우리 집 유모 아줌마한테 맡겨 놨어.”
「우리 수영이. 먹고 싶은 거 있어? 엄마가 돌아오면서 사 올게.」
그날 밤, 부모님은 외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했다. 생전 만나지 않던 외할아버지를 보러 간다는 게 의아했지만, 얼마 전에 몰래 들었던 아버지의 실직과 관련된 듯했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마침 예전에 엄마가 해 줬던 떡볶이가 떠올라서, 떡볶이를 해 달라고 했었던 것 같다.
「그래. 오랜만에 떡볶이 만들어 먹을까?」
갓난아기인 수정이를 품에 안은 아버지가 내 머리칼을 쓸었다.
「금방 올 테니까 동생들 잘 보고 있어.」
평범한 대화였고, 평범한 하루였다. 늘 해 왔던 것처럼, 손을 흔들며 현관을 나서던 부모님. 그게 내가 본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러곤 그날 새벽, 이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모님이 타던 차가 트럭과 부딪쳐 사고가 났고, 숨은 이미 끊어진 후였다고. 아버지가 온몸으로 감싸 안은 덕에 수정이는 무사할 수 있었다고.
“굶으면 건강 상하니까 간단하게라도 먹자, 응?”
“저 빼고 동생들만 챙겨 주세요.”
통화로 부고를 전하며 울먹이던 이모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입맛이 없어 거절하려는데, 주위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기 회장님 오시네.”
회장님이라면 외할아버지다. 황급히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외국인 가드들의 경호를 받으며 리무진에서 내리는 외할아버지가 보였다. 드디어 왔구나. 마음이 급해져 동생들을 이모에게 맡기고 무작정 달려갔다. 뒤에서 이모가 부르는 게 들렸지만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란 직감에 발을 멈추지 않았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수많은 가드를 양옆에 대동한 외할아버지의 앞을 두 팔을 뻗어 가로막았다.
“우리 아빠는요? 아빠는 어쨌어요? 외할아버진 알고 있죠?”
“We'll take care of it.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아빠는 어디 있냐고요!”
거대한 덩치의 서양인 경호원이 팔을 뒤로 잡아챘다. 버텨 서 보려고 해도 힘으론 역부족이라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당신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직장을 잃은 것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어떻게 죽어서까지 이럴 수 있어.
“아빠도 묻어 줘요. 우리 아빠도 엄마랑 같이 묻어 달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두 명인데 장례를 치른 사람은 한 사람이다.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아버지 시신만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다고? 아무리 봐도 외할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사과하세요! 우리 아빠가, 우리 엄마가 어쩌다 그렇게 됐는, 우읍.”
“Kid, you'll bleed if you make a slip of the tongue. (꼬마야. 입 잘못 놀렸다간 피 본다.)”
한국어를 알아듣는 경호원에게 사지가 붙잡힌 채 애타게 소리쳐 봤지만, 강제로 막힌 입에선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쇳소리만 퍼져 나올 뿐이었다.
“누가 네 할아버지지?”
희끄무레한 눈썹이 비뚤어지며 저를 탐색하듯 느릿하게 훑었다. 관록과 재력이 주는 중압감에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고 싶지 않아 눈을 피하지 않고 똑똑히 응시했다.
“네놈은 우리 가족이 아니다. 경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놔뒀던 거지.”
깔보는 듯한 탁색의 눈동자가 저를 찔렀다. 무섭도록 냉혹한 시선. 파티 때 아버지를 보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천한 놈.”
외할아버지는 눈길조차 아깝다는 듯 고개를 돌리더니 무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온몸이 묶인 저는 친지들의 환대를 받는 외할아버지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소릴 질러도 고작 열 살짜리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경아가 세상에 없으니 저렇게 버려지는구나.”
“그러게, 걔는 왜 없는 집 남자랑 살겠다며 난리를 쳤는지.”
“그거 알아요? 그 남자, 경아 누나 돈으로 대학도 겨우 졸업했다면서요?”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제가 아는 한,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 아버지가 얼마나 끔찍이 우리 가족을 사랑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당신들이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떠드는 친척들에게 화가 났다. 제 가족이 죽었는데 동정조차 할 줄 모르는 작태에 환멸이 났다. 나 혼자 진실을 떠들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수영아, 가자. 이제.”
보다 못한 이모가 내 어깨를 쥐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잠자코 이모를 따라 텅 빈 집으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동생들과 함께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체의 지원을 끊는 것도 모자라, 일가에 속했던 흔적까지 지워 버린 회장님을 어기고 고아가 된 우리 남매를 돌봐 줄 간 큰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공항까지 데려다준 경희 이모는 내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인천 공항에서 내리면, 할아버지께서 마중 나와 계실 거야. 이모 번호 잊지 않았지? 한국 도착하면 꼭 연락해. 이건 필요할 때 용돈으로 쓰고.”
달러를 원으로 환전해 온 이모가 두둑한 흰 봉투를 내 재킷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소매를 정리해 주었다. 여러 차례 거절해도 한사코 넣어 줄 것을 알아서, 되돌려 주고 싶은 심정에도 얌전히 이모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젠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이모에겐 미안하지만, 한국에 돌아가서도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가난에 허덕일지언정 임씨 집안에 빚을 질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Good afternoon ladies and gentlemen. Thank you for flying OO Airlines. Our flight will depart from John F. Kennedy Airport and arrive at Incheon Airport in 14 hours. (OO 항공을 이용하시는 손님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 비행기는 존 F. 케네디 공항에서 출발하여 열네 시간 후 인천 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승무원이 이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했다. 양옆으로 나란히 앉은 수민과 수훈은 생애 첫 비행기 탑승에 들뜬 것도 잠시, 곤히 잠든 후였다. 그리고 제 품에는 생후 3개월이 채 안 된 수정이가 안겨 있었다.
“으아, 아-”
포동포동한 팔을 휘저으며 수정이가 칭얼거렸다. 젖병을 물려 주자 기분이 좋은 듯 금세 조용해졌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서 좋겠다. 티 없이 맑기만 한 얼굴에 괜히 심술이 나서 찡긋거리는 코를 간질이다 이내 와락 끌어안았다. 성인보다 높은 아기의 체온이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에 이 온기를 느꼈을 테다. 이 작은 생명 하나 살리겠다고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렸다. 수정이의 따스한 체온을 지켜 주고 싶어서, 시야가 흐릿해지고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놓지 않으려 애를 썼을 것이다.
“으윽…….”
갑자기 가슴께가 뻐근해지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드디어 실감이 났다. 내가 사랑하던 부모님, 나를 사랑해 주시던 부모님을 평생 볼 수 없다는 것을. 내게 남은 건 핏덩이 같은 동생들뿐이고, 앞으로는 나 혼자서 식구들을 지켜 내야 한다는 것을.
끅끅대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입 안을 적셨다. 수민이와 수훈이가 곯아떨어져서 다행이었다. 만일 깨어 있었다면, 서럽도록 우는 저를 보고 불안해했을 테니까. 잇몸에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어, 터져 나오는 울분을 간신히 갈무리했다. 이제부턴 함부로 눈물을 보여선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밑에 딸린 동생들을 봐서라도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한국에 가면 할아버지 일부터 도와드려야겠다. 용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르바이트를 찾아보자.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인터넷에서 찾아봤던 내용을 떠올리며 잠든 수정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엄마. 내가 행복하면 엄마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죠. 고생은 좀 하겠지만 그게 우리 가족을 위한 거라면 난 행복할 거예요. 그러니 걱정 놓으세요.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 무리 너머 어딘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괜찮을 거다. 우리 가족이 무탈한 한, 저는 행복할 것이고, 제가 행복한 한, 모든 게 괜찮을 테니까.
* * *
“이후는 형이 아는 그대로예요.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 혼자서 우리 사 남매를 키웠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착실히 돈 모아서 동생들 교육비, 생활비 벌고 그랬죠.”
수영이 지난 일을 회상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진호가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평온해 보이는 수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말은 저렇게 쉽게 해도 절대 쉬운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열 살부터 수영이 겪어야 했던 삶의 무게가 전해져 제 가슴에 얹힌 듯 목이 갑갑했다.
“놀랐어요? 얼굴이 창백한데.”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안 놀라요.”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려다 제 손이 계속 수영에게 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거친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짠돌이가 된 까닭이 있었구나. 제 밑에 있는 동생들을 봐서라도 어떻게든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겠지.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했기에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는 것이고. 아직 군대에 안 간 것도, 명품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서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것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팍팍한 삶 때문일 것이다. 외가가 유명한 IGN의 오너라고 해도 그 혜택을 누릴 기회는 없었기에, 왜 여태 사실을 숨겼냐고 따져 묻기도 미안해졌다.
“많이 힘들었죠.”
수영이 겪어 온 고난을 반증하듯 굳은살이 박인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에 반해 돈을 물 흐르듯 쓰는 저를 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사소한 것으로 트집이나 잡는 제 모습이 얼마나 철없어 보였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가 나았다. 수영의 과거를 알게 된 지금, 그간 수영에게 쏟아 냈던 온갖 불평이 한없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 미안해요. 그것도 모르고 맨날 싫은 소리나 해 대서.”
“미안할 게 뭐 있어요. 형이 미안할 거 하나도 없어요.”
수영이 빈손으로 진호의 턱을 잡아 올리더니, 차가워진 뺨을 쓸었다. 제 말에 안도했는지 얼어 있던 눈동자가 온기로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엄지로 눈가를 몇 번 쓸어 올리자 흔들리는 눈빛이 너무나 투명해서 그대로 키스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냈다. 대신 잡고 있던 손을 고쳐 쥐며 깍지를 꼈다.
“그거 알아요? 내가 뭔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 형이 처음이에요.”
첫 만남 때부터 왠지 모르게 눈에 밟혔다. 시작은 동생처럼 챙겨 달라는 혜린의 부탁에서였지만, 업무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라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형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것이고, 나도 뭔가를 마음에 둘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먹고 사는 게 바빠서 그런 걸 고민할 틈이 없었거든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근데 형을 좋아하면서 알게 됐어요. 무언가를 마음에 품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거구나.”
저에겐 가족밖에 없다고 여겼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까마득한 시절부터 제가 바라본 건 할아버지와 동생 셋뿐이었으며, 그들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 여겼다. 제게 행복의 의미란 그것 이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상상이나 했을까. 그 울타리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거라는 걸. 타인으로 인해 기분이 날뛰고, 날마다 새롭고, 이윽고 행복의 정의마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가족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심정을 형을 통해 수없이 경험했다. 그로 인해 저는 변화할 수 있었다. 형이 아니었다면 누군가를 위해 시간과 돈, 그리고 제 감정을 할애하는 일은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형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형이 원하는 사진작가도 됐으면 좋겠고, 나 때문에 미안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옥탑방에서 형이 말했듯이, 신현우 같은 건 완전히 잊고 앞으로의 즐거운 일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사진작가든 뭐든 원한다면 모두 제가 이뤄 줄 자신이 있었다. 그걸로 형이 행복할 수 있다면. 제가 형에게서 받은 것처럼.
“아, 나 때문에 울어 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말하는 내내 제게 고정돼 있던 눈이 일렁였다. 굳어 버린 표정에선 심리를 읽을 수 없었다. 다만 서서히 붉어지는 뺨에서 형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싫은 건 아니구나. 물론 형이야 스킨십에 약하니까 이것도 별 의미는 없겠지만, 안 뿌리친 것만 해도 크나큰 발전이었다.
“무슨…….”
진호가 수영에게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런 진지한 고백은 매번 갑작스럽지만 그 순간만큼은 저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나로 인해 행복하다니. 아버지에게서도, 누나에게서도, 신현우에게서도, 심지어 돌아가신 우리 엄마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던 말이었다. 남수영은 제게 상상 이상의 것을 준다. 본가에서 탈출했을 때도, 아팠을 때도, 신현우에게 괴롭힘당했을 때도, 언제나.
“나도…… 그래.”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손끝이 달아올라서 떨리는 게 맨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숙맥처럼 쑥스러운 티는 내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눈을 마주했다.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말을 뱉고 나서는 눈길을 돌리고 말았지만.
연애 감정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짠돌이 앞에서는 바보처럼 떨리고 긴장하게 된다.
“형, 방금.”
수영이 옆으로 돌아가는 턱을 잡아 제 쪽을 보게 했다. 내 착각일까. 저를 녹일 듯이 쳐다보는 눈빛이 살짝 흔들린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잘못 들은 게 아닐 것이다. 대답하면서 저도 어렴풋이 생각했다. 맨정신으로, 그것도 제가 나서서 말을 놓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진 않았다. 문장 끝에 글자 하나를 뺐을 뿐인데, 가슴이 시리도록 떨려서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형.”
시선을 에둘러 피하자, 수영이 깍지 낀 손을 당기며 간격을 좁혔다. 뭘 자꾸 뚫어지게 보는 거야. 민망하게. 진호가 수영에게 붙잡힌 고개를 뒤로 무를 때쯤, 수영이 깍지를 풀더니 손목을 잡아 제 뺨에 댔다.
“나 좀 세게 때려 볼래요?”
“네?”
“어제부터 계속 꿈속인가? 형이 안 하던 짓을 하네.”
아, 정말.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친다니까. 엄청 용기 내서 말 놓은 건데. 진호가 한 대 치기라도 할 심산으로 손을 멀리 떼어 내는데, 수영에게 다시 붙잡혀 끌려갔다.
“……?”
손을 털어서 놓으려는데, 손등에 촉촉한 감촉이 닿았다.
“생생한 걸 보니 꿈은 아닌데.”
“…….”
“형이 먼저 시작한 거예요.”
도장 찍듯이 입술로 피부 위를 누르던 수영이 답을 재촉하듯 연이어 손등 위로 입맞춤을 내렸다.
“무르기 없어.”
“잠깐.”
앞으로 말을 놓자는 의미는 아니었고, 야릇한 스킨십을 허락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전날 날 끌어안았던 팔뚝과 부드럽던 키스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뜨거운 숨결이 손목을 스치고 팔까지 내려왔다. 이성으로는 아니라고 거절해야 하는 걸 아는데, 정작 제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그게.”
“잊어버린 건 아니죠? 우리 어제 키스했잖아. 이렇게 형 입술에, 몇 번이나.”
수영이 살갗을 가볍게 빨며 시선을 제게 맞췄다. 현기증이 이는 듯, 귓속이 먹먹해졌다.
“……엉.”
“…….”
“형?”
“…….”
“전화 왔어요.”
“네? 아.”
어쩐지 어디서 윙윙대는 소리가 들리더라니, 핸드폰 진동이었구나. 진호가 수영이 내민 핸드폰을 가로채더니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신인은 누나였다.
“무슨 일이야?”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있는 수영을 힐끔 돌아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쉬운 듯 체온이 닿았던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짠돌이와 달리, 저는 난감한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 준 누나가 고마웠다.
-너 괜찮아? 신현우 그 새끼가 최음제 먹이려고 했다며.
“어? 아, 괜찮아. 별일 없었어.”
수영이 누나에겐 복수 계획을 알려 줬을 줄 알았는데, 뒤늦게 전화로 물어보는 누나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누나는 MT에서의 일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뭐, 굳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누나는 원하면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뭐가 괜찮아! 그 자식이 너한테 손대려고 했는데. 게다가 조교로 있으면서 너랑 수영 씨 괴롭혔다면서? 학교에서 소문이 자자하더라.
“정말 괜찮다니까.”
진호가 혜린을 차분하게 달래며 방문을 닫았다. 웬만해선 평정심을 유지하는 누나가 흥분해서 말을 쏟아 내는 걸 보니 화가 끝까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냉정해지는 머리와 달리, 바닥에 주저앉은 제 귓바퀴의 열은 혜린과의 통화가 끝나도록 식기는커녕 뜨거워져만 갔다.
* * *
여름, 하면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습하고 뜨거운 공기. 고막을 때릴 것처럼 울리는 매미 소리.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그리고 기말고사.
아직 바깥에 다닐 수 있을 만큼 적당한 자외선이 내리쬐는 초여름. 진호는 뜨거운 공기도, 매미 소리도, 아이스크림도 없는 도서관에서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려고 했다.
‘왜요.’
지긋이 노려보자, 맞은편에 앉은 수영이 입술만 뻐끔거리며 물었다. 알면서 묻는 의도가 다분해서 답변은 생략했다. 공부하러 왔다면서 남의 발은 왜 건드냐고. 진호가 수영의 발이 닿지 않게 옆으로 의자를 옮기며 책상 위에 쌓인 전공 서적을 제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하지만 짐작했던 것보다 길었던 수영의 다리는 기어코 제 신코를 툭, 하고 건드리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발끝으로 제 정강이를 쓸어 올리기도 했다. 중간고사 때는 공부하라며 난리더니, 간만에 학업에 집중 좀 하겠다는데 웬 방해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시험을 준비할 의지조차 없는지 수영의 앞은 책 한 권 없이 깨끗했다.
“공부 안 해요?”
참다못해 검지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수영이 제 쪽으로 튀어나온 진호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코앞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진호야. 우리 언제 데이트 갈까.”
수영이 진호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 말 하면서 책으로 얼굴은 왜 가리는데. 남들이 오해하면 어쩌려고. 진호가 둘의 옆얼굴을 동시에 가리고 있는 전공 서적을 잡아채 쌓인 책 더미 위로 올렸다.
“형 안 붙여요?”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죽인 채 응수했다. 이래서 함부로 말을 놓는 게 아니었다. 한 번 먼저 말을 놓았을 뿐인데, 형 취급도 안 하려고 한다.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실수를 저질러 버린 과거를 후회하며 진호가 읽고 있던 페이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땐 뭐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에게 주기만 하는 수영이 고마워서, 조금이라도 보답해 주고자 반말을 썼을 뿐인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까불어 댈 줄이야. 하여간 이 새낀 ‘적당히’가 없다니까. 도중에 혜린이 신현우 일로 연락하면서 기말고사 얘기도 꺼내는 바람에 시험에 신경 쓰느라 수습을 못 했더니, 그 뒤로 은근슬쩍 말을 놓는 것이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MT에서의 사건으로 신현우가 학교에서 퇴출당한 덕에 더는 그 자식의 낯짝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누나 말로는 조교 자리에서 쫓겨난 뒤로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던데 아마도 미국으로 도망간 모양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수영이 말을 고쳤다.
“형. 우리 언제 사귈까.”
요구대로 ‘형’을 붙여 주긴 했으나 뒤에 따라오는 문장이 가관이었다. 지선과의 선 자리에서 도움을 받는 대신 데이트를 하기로 했던 적은 있지만, 사귀자고 한 적은 없는데. 데이트 수락이 어떻게 교제하자는 얘기로 비약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런 도발에 넘어가기엔 짠돌이의 계략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일일이 반응해 주지 말자. 진호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화를 차단했다.
“오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쓸데없는 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조용히 시켜야지. 인내심이 얼마 못 가 바닥난 진호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계속 이럴 거면 집에…….”
웅- 책상 위의 책들이 흔들리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안 받아요?”
빙그레 웃는 상판에 쏘아붙이려다, 주위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얼른 핸드폰을 쥐며 열람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아, 무슨 일이야?”
뛰다시피 해서 나온 까닭에 조금 벅차오른 호흡을 다스리며 두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선배! 지금 TV 틀어 봐요!
한껏 고양된 정연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육상 전국 대회 결승이라고 했지. 체대 여신에다 명문대학교에 첫 금메달을 안겨 줄 유망주라고 해서, 최근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정연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걸 알고 있었다. 연습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일부러 연락을 미루고 있었는데, 정연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그것도 대회 결승 당일에.
다행히 나쁜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고민했던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 정연을 대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도서관이라 TV는 못 봐.”
-그럼 너튜브에서 스포츠 채널 들어가 봐요!
통화를 끊지 않은 채,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들어갔다. 정연의 말대로 스포츠 채널을 검색하니 마침 전국 육상 경기 대회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화면 보여요?
“응. 보여.”
동영상을 재생하는 순간, ‘여자대학부 400m 명문대학교 최정연 우승’이라는 큼직한 문구와 함께 선수 대기석에 앉아 있는 정연의 모습이 비쳤다. 핸드폰을 든 채 뭐라고 말하는 상대가 나구나. 제가 TV에 나온 것도 아닌데 기분이 묘해졌다.
“축하해. 우승.”
-뭘요. 수영 오빠 옆에 있죠?
“아니, 어……. 있어.”
없다고 하려다, 제 앞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하고 말을 바꾸었다. 수영이 정연으로 채워진 핸드폰 화면을 응시하더니 제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인상이 험상궂게 변한 것 같았다. 뜨끔해져서 애플리케이션을 닫고 통화에 집중했다.
“바꿔 줄까?”
-아뇨. 선배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볼일이 뭔데?”
짠돌이와 관련한 일인가. 최대한 긴장을 숨기며 태연하게 대했다. 잠깐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정연이 밝게 대답했다.
-우리 거래는 여기서 끝내는 것으로 해요.
정연과 한 거래라면 한 가지밖에 없기에 되물어 볼 것도 없었다. 남수영의 여자 친구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 MT 때만 해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걸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옆에 선 수영에게 들킬까 봐, ‘남수영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라는 뒷말은 부러 생략했다.
-음. 할 말은 많은데, 결론만 말하자면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요.
짠돌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고? 그러면 그동안 내게 짠돌이와 잘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건, 그리고 짠돌이를 볼 때마다 부끄러워했던 건, 대체 뭐였던 거지. 질문은 많았지만, 옆에 수영이 있다는 사실 탓인지 정연이 자세한 설명을 꺼리는 듯해서 묻지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만둬도 되는데……. 안 그래도 나 역시 그만두려고 했거든.”
정연이 무사히 대회를 마치고 나면 제 쪽에서 먼저 거래를 끝내자고 할 생각이었다. 제가 수영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된 이상, 정연을 도울 수는 없게 되었으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정연에겐 미안하지만 자신과 정연을 속인 채 거래를 지속하는 것이 더욱 미안할 짓이었다.
“왜냐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저, 알고 있거든요.
“알고 있어? 어떻게.”
-MT 때 옥상에서 둘이 키스하는 거 다 봤어요.
사고가 정지했다. 그걸, 그걸 봤다고. 얼떨떨한 눈으로 수영을 훑자, 수영이 무슨 의미냐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미쳤지, 서진호. 누가 볼 거라는 생각을 못 하다니. 얼마나 이 자식한테 홀렸으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둘이 그러고 있는 거 본 사람 저 혼자밖에 없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니까.
정연이 누군가에게 저와 수영의 일을 떠벌릴 거라 여기진 않았기에 걱정은 없었다. 다만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을 정연이 가슴에 걸렸다.
“미안해. 네가 받았을 상처에 대해선 진심으로 사과할게.”
-왜 그래요. 마음 약해지게.
“아냐. 내가 잘못한 거지. 널 도와준다고 해 놓고. 전에 네가 들어주기로 했던 소원도 없던 거로 하자.”
제가 도와주는 대신 정연이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었지만, 현재에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굳이 소원이 있다면 거래를 그만두는 것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선배가 저자세로 나오니까 화도 못 내겠네요.
정연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푸우- 하고 한숨을 뱉었다.
-그래도 억울해서 안 되겠어요.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분해! 선배도 그렇고, 수영 오빠도, 나한텐 아무것도 안 알려 주고! 우리 나름 친한 줄 알았는데 저 혼자 친구로 생각했던 거예요?
정연의 애교 섞인 원망에 입가가 느슨해졌다. 연락을 미뤘던 건, 대회를 준비하는 정연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것도 있었지만 이 일로 정연과 사이가 멀어지는 게 두려웠기 때문도 있었다. 수영을 사이에 둔 경쟁자였을지도 모르나, 정연은 제게 있어 얼마 안 되는, 대화가 편한 상대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소원은 선배가 들어주는 거로 해요!
“뭔데? 들어줄게.”
거래상으로는 정연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었으므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그런 건 대수롭지 않았다.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생떼를 써도 받아 주고 싶은 정연의 긍정적인 에너지에 저도 동화된 듯했다.
-수영 오빠 바꿔 봐요.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 괜찮겠지. 정연에 대한 사사로운 질투가 가슴 한편에 남아 있어서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정연을 믿었기에 핸드폰을 수영에게 건넸다.
“받아 봐요.”
“됐어요.”
“빨리.”
협박하듯이 핸드폰 액정을 수영의 코앞에 들이밀자, 포기한 듯 받아 들더니 진호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받아 보라니까.”
진호가 거절하려고 핸드폰을 밀어내는데, 스피커로 정연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수영 오빠?
스피커 모드로 전환한 건가. 설마 내가 궁금해할까 봐서?
“형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거 싫어하잖아요.”
그건 네가 나 몰래 딴짓할 게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별다른 의미는 없는데. 수영의 이모가 온 날,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이후로는 대놓고 훤히 보여 줄 심산인 듯했다. 나름의 배려가 기분 나쁘진 않아서 수긍하듯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빠. 듣고 있어?
“어. 얘기해.”
-대회 끝나고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그게 뭐냐면.
짧은 정적이 흘렀다. 별일 아닐 텐데 왜 조마조마하지. 진호가 무덤덤한 수영의 낯을 살피며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정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좋아해.
아깐 좋아하는 게 아니라며. 깜짝 놀란 진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키운 한편, 수영의 시선은 진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좋아했어. 우상으로서.
“…….”
-난 그동안 나보다 잘 달리는 오빠를 동경했던 모양이야. 그걸 사랑으로 착각한 거지.
그럼 그렇지. 10년 감수했네. 진호가 벌떡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는 모르겠지만 나 마음고생 되게 많이 했거든? 진호 선배가 잘 알 거야. 선배가 뭐야, 우리 학교 경영학과 사람들은 다 알걸? 그러니까 추억으로 마무리하기 전에 진호 선배 대신 오빠가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어.
“뭔데?”
정연의 협박 아닌 협박에 수영이 진호에게 허락을 구하듯 눈가를 세웠다. 진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 축하 선물 하나 사 줘.
“그게 다야?”
옆에서 듣고 있던 진호가 끼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데이트라든가, 하다못해 그간 철벽 쳐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부탁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소원이었다.
-그게 다예요. 솔직히 4년 동안 오빠한테 무시당한 전적을 떠올리면 울분이 치솟는데, 심리적인 보상보다 물질적인 보상이 더 확실하잖아요? 물론 사과도 받아 낼 거지만.
최정연이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은근히 실속을 챙기는 태도가 낯설었다. 그건 그렇고, 어차피 저도 정연에게 축하 선물을 하려고 했으니 부탁을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미안해. 몰라봐서.”
수영이 핸드폰을 제 앞으로 당기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걸 왜 날 보면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영의 표정이 진지한 걸 보니 저를 위해 대충 둘러대는 것 같진 않았다.
-알면 됐어. 선물은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주고 싶은 것으로 골라. 어차피 뭘 받는지보다 오빠한테 받는다는 게 중요하니까.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당부하자면, 진호 선배한테는 잘해! 눈치 없이 굴지 말고!
새침한 말투에서 저를 향한 애정이 느껴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영과 제 사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주제를 언급하면 귀찮아질 것이 뻔해서 짚어 주지는 않았다.
“응. 잘할 거야.”
다짐하듯 묵직하게 답을 뱉은 수영이 통화를 끊으려는 듯 종료 버튼 위로 엄지를 올렸다. 그때 스피커 너머에서 정연이 웅얼거리며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서진호. 전화 받아 봐.
“누나?”
서혜린이 왜 거기서 나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진호가 수영에게서 핸드폰을 가져왔다.
-정연이는 너랑 신현우 사이의 일,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너나 걔나 서로 불편해할 거 같아서 MT에서 생긴 일은 안 알려 줬거든. 앞으로도 모르게 할 거고.
정연이 신현우와의 일을 알았다면 괜찮냐며 연락이 왔을 터라, 까맣게 모를 거라고 짐작하던 차였다. 근데 왜 그걸 누나가 알려 주냐고.
“정연 후배랑 언제 친해졌어?”
-넌 몰라도 돼. 그럼 끊는다?
“잠깐, 누나?”
진호가 되물었을 때는 벌써 통화가 끊어진 후였다. 뭐야, 그 애매한 대답은. 제가 정연에게 혜린의 비서실 연락처를 알려 준 이후로 친해진 건 분명한데, 숨기는 듯한 기색이 의심스러웠다. 누나가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타인과 사적인 관계를 맺는 일은 드물었으니.
“지금 갈까요?”
꺼져서 까매진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데 수영이 출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선물 사러요?”
“네. 우리 데이트 가야죠.”
당연하다는 듯 팔을 잡아당기는 손을 남은 손으로 붙잡았다. 어째서 그게 데이트가 되는 걸까. 샬베스타의 개인 전시회에 갈 때도 데이트라고 부풀려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누나한테 이르면 어쩌려고요? 선생님이 불량하다고.”
기말고사 때도 누나의 요청으로 내 성적을 책임지게 된 짠돌이였다. 일이라면 어떤 난관에 부닥쳐도 철저히 해내고 마는 수영이 무슨 연유로 농땡이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공부할 생각이 없었는지 옷부터 때깔이 달랐다. 집에서 출발할 때 정장을 차려입고 나온 것에서부터 불안했지만, 설마가 진짜일 줄이야. 과거를 돌아보면 이 자식이 멀끔한 상태일 때 순탄한 하루를 보낸 적이 없었다. 그걸 간과하고 있었다니.
“에이. 설마 형이 그러겠어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어떤 사이인데? 반문하고 싶었다. 짠돌이의 속마음이야 빤하다. 보나 마나 내 사소한 변화 하나로 우주 저 너머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겠지. 너와 달리 천천히 나아가고 싶은 나는, 아직 우리 관계의 정의를 변경할 마음이 없다고 단정을 지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나 성적 떨어지면 책임질 거예요?”
“언제든 책임질 준비는 돼 있는데요.”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시험까지 2주 남았잖아요. 하루 정돈 놀아도 괜찮아요.”
수영이 자신 있다는 듯 열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공부한다 해도 몰입이 흐트러진 지 오래라 흔쾌히 장단에 맞춰 주려고 뒤따라 들어갔다. 다만 확실히 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그럼 이걸로 데이트 약속은 지킨 거예요.”
열람실에 두었던 짐을 챙겨 와 사물함에 정리한 뒤, 손을 털었다. 수영이 알겠다는 듯 주억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러면서 내 허리를 잡기에, 무슨 짓이냐며 밀쳤더니 데이트 아니냐며 다시 허리에 팔을 둘렀다. 주변에서 흘끔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해도 고집 센 짠돌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으로 합의를 본 채 도서관을 급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덩치가 큰 데다 정장까지 차려입은 짠돌이에게서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가까스로 차에 도착해 벨트를 매고 있는데 수영이 시동을 걸며 물었다.
“최정연이랑 한 거래는 뭐였는데요?”
“다 들었어요?”
“들리던데요.”
큰일 났다. 막판에 짠돌이에게 들켜 버렸다. 사색이 된 제 낯빛이 재미있는지 은은하게 미소를 짓는 수영이 어쩐지 무서웠다.
“말 안 해 줄 거예요?”
“그게.”
잠깐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다 끝난 일인데 말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정연과 너를 이어 주기로 약속했지만, 정연이 널 좋아했던 게 아닌 걸 깨닫고 나서 거래가 끝났다’ 정도로만 털어놨다. 왜 자신을 두고 그런 약속을 했냐고 따질 것 같던 수영은 반대로 잠잠했다.
“기분 안 나빠요?”
“형한테 안 서운하면 거짓말이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져야지.”
수영이 싱긋 웃더니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진 않은데, 다행인 건가? 숨을 돌리는 진호의 왼손에 무게감이 실렸다. 고개를 돌리니 수영이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제 손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이걸로 퉁쳐요.”
웬일로 어물쩍 넘어가나 했다. 진호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손을 온전히 수영에게 맡겼다. 수영이 간지럽게 손가락 사이를 구석구석 매만지는 것도 모자라서 마구 주물러 대기 전까지는.
* * *
평일 오후의 백화점은 한산했다. 로비에 들어선 수영은 진호를 곧장 향수 매장으로 끌고 갔다. 진호의 카드로 VIP 라운지에서 여유를 즐기며 느긋하게 쇼핑을 할 수도 있었지만, 어렵게 잡은 데이트 약속을 선물 고르기 따위로 허비할 여유는 없었다.
정연에게 향수를 주자는 아이디어는 진호의 것이었다. 수영이 여자에게 줄 선물을 사 봤을 리가 없으니 제가 정연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을 골랐다. 수영이야 무슨 선물을 살지 고민조차 없어 보여서 결국은 제가 골라야 했겠지만. 진호는 구상해 둔 후보들을 떠올리며 직원에게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진호의 의뢰대로 시험용 향수 세 개를 가져온 직원이 친절히 시향지에 향수를 뿌려 차례로 건네주었다. 신중하게 향을 맡아 본 진호가 수영에게도 시향지를 내밀었다. 수영은 한두 번 맡아 보더니 무난한 플로럴 계열의 제품을 골랐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진호가 직원에게 포장을 부탁했다. 마린이나 시트러스 계열의 향도 괜찮았지만 밝고 화사한 외모의 정연에게는 플로럴이 가장 어울릴 듯했다.
“여자 친구분 선물이에요?”
진호의 요청에 따라 빨간 리본으로 향수를 포장하던 직원이 궁금한 듯 수영에게 물었다. 각종 향수가 일렬종대로 가지런하게 놓인 진열대를 눈으로 훑던 진호가 계산대로 눈길을 돌렸다.
“아뇨. 그냥 아는 사람 선물이요.”
“아아.”
수영의 대답에 알겠다는 듯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직원의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앳된 얼굴에 단아한 투피스 정장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이거 혹시. 진호가 별 관심 없는 듯 제 옆에서 진열대를 구경하고 있는 수영을 곁눈질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수영은 제게 있어 불길함의 상징일지라도 눈을 즐겁게 하기엔 충분했다.
“이거 시향해 볼 수 있나요?”
수영이 향수 하나를 가리키며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향지 몇 장을 챙겨 수영에게 다가갔다. 어조가 전보다 세 톤은 높아진 데다 콧소리도 일부 섞인 것 같았다.
“네. 고객님. 이건 메릴린 먼로가 즐겨 썼기로 유명한 향수인데, 포근한 향이라 남녀 상관없이 잘 어울려서…….”
뭐야. 진짜 짠돌이한테 흑심 있는 건가? 둘 사이에 끼어든 직원 덕에 얼떨결에 뒤로 밀려난 진호가 눈웃음을 치며 -진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직원을 뜯어봤다. 신성한 직장에서 사심을 저렇게 뻔히 드러내도 되는 걸까. 매니저에게 일러둘까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나 혹시 질투하는 건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게다가 사적인 감정 때문에 컴플레인까지 걸려고 하다니. 멀뚱히 두 사람을 보던 진호가 뒤에서 수영의 셔츠 자락을 잡았다.
“얼른 가요. 선물 다 골랐잖아요.”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며 옷을 당겼다. 수영이 직원에게 이것도 포장해 달라고 말하며 진호에게 끌려갔다. 당황한 직원이 수영이 가리킨 제품을 급히 꺼내 왔다.
“합쳐서 38만 7,000원입니다.”
수영이 제 카드로 계산하자, 직원이 포장된 향수가 담긴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조그마한 명함이 덤으로 붙었다.
“제 연락처인데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됐습니다.”
진호가 명함을 든 직원의 손을 공손히 밀어내며 쥐고 있던 옷자락을 밖으로 끌었다. 직원에게서 종이 가방을 받은 수영이 멀뚱히 진호를 바라보며 걸음을 따라갔다.
“뭐예요.”
진호에게 이끌려 건물 밖으로 나온 수영이 제 셔츠를 붙들고 있는 진호의 손을 잡았다. 진호가 흐트러진 표정을 정리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놓았다.
“아무것도 아닌데요.”
“아무것도 아니긴. 뭔가 있는데.”
“직원이 사심으로 고객을 대하면 안 되니까요. 그게 보기 싫었을 뿐이에요.”
“아닌데. 질투 같은데.”
수영이 눈가를 좁히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뜨끔한 진호가 눈을 슬슬 피하며 발레파킹해 놓은 제 차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또다시 충동적인 감정에 지고 말았다. 예전이면 ‘이상하게 거북스럽다’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 자식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한 뒤라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게 옹졸한 시샘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이래서야 잔뜩 들뜬 짠돌이에게 먹이만 던져 줄 뿐이잖아. 뒤늦게 창피해진 진호가 수영 몰래 뺨을 붉혔다. 어차피 남수영이 좋아하는 건 난데, 애처럼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약점을 보이고 말았다.
“내 마음대로 생각할래요. 형도 나한테 마음 있는 거라고.”
수영이 싱글벙글 웃으며 시선을 돌리는 진호의 양 볼을 붙잡았다. 진호가 당황한 눈빛을 숨기며 수영의 손을 떼어 냈다.
“친한 동생 챙기는 것도 못 하나.”
때마침 주차 요원이 차를 가져왔다. 재빨리 조수석에 오른 진호가 대화를 끝맺었다. 수영이 멀어지는 뒤통수를 빙글거리며 바라보더니 운전석에 올랐다.
“이건 누구 주려고 산 거예요.”
수영에게서 종이 가방을 받아 든 진호가 정연의 선물 옆에 나란히 놓인 또 다른 향수를 꺼내 들었다.
“누구겠어요.”
앞이 뻥 뚫린 도로를 주시하며 수영이 액셀을 밟았다. 안 알려 주는데 누군지 어떻게 알아. 수영을 의심 섞인 눈으로 째려보던 진호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나예요?”
수영은 말없이 그저 웃고만 있었다. 어쩐지 저답지 않게 날 따라서 진열대를 유심히 보더라니. 짠돌이가 선물을 줄 사람이 저밖에 없는 건 알지만, 돈을 막 쓰는 짠돌이에겐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게다가 일전의 데이트에서 돈을 펑펑 쓴 결말이 호텔 고백이었던 걸 떠올리면 앞길이 깜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를 위해 비싼 향수를 골랐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자신이 있었다. 12년 가까이 악착같이 모아 왔던 돈을 나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쓴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워서.
“이다음엔 어디로 가요?”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곳이요.”
한강 대교에 들어선 수영이 속력을 낮췄다. 노을이 어스름하게 비치는 하늘 아래로 가로등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야경의 시작점이었다.
“여기 앉아요.”
한강 공원 근처에 차를 세운 수영이 인적 하나 없는 강변 구석의 둑에 털썩 앉으며 제 옆자리를 쓸어 냈다. 수영이 털어 준 자리에 걸터앉으며 진호가 발아래를 살폈다. 발치에 닿을 듯 말 듯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조용하네요.”
어찌나 고요한지 강물이 둑에 부딪혀 찰박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건너편에 늘어선 강남의 빌딩을 차례로 훑어보던 진호가 수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자주 와요?”
“자주는 아니고 기분 전환하러 가끔 와요. 여기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거든요.”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머리 위로 불어왔다. 수영이 답답한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차분히 내려앉은 눈이 강 너머로 향했다. 골똘히 무언가를 숙고하는 수영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태초 그런 모양이었던 것처럼 수영의 그림자가 불빛이 어른거리는 수면과 어우러졌다.
“형이랑 와 보고 싶었어요.”
뒤로 팔을 뻗어 편하게 바닥을 짚은 수영이 고개를 돌렸다. 옅은 눈동자에 익히 알고 있던 따스함이 번졌다. 가슴속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왜인지 안 물어봐요?”
“……이유가 뭔데요?”
멍하니 수영만 보다가 한 박자 늦게 질문했다. 수영이 나서서 제 얘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귀를 기울였다. 쓸데없는 농담으로 무마하지는 않겠지. 이를테면, 아무도 없는 데서 키스라도 하고 싶었다든가. 만약 그런다면 데이트고 뭐고 혼자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통장에 돈 한 푼 없었을 때 여기서 노숙했었거든요.”
진호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노동이나 노점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노숙이라는 단어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투명한 진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수영이 곧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상경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사장님한테 사기당하고 방세도 못 내서 집주인한테 쫓겨났었어요. 갈 데가 없어서 밤새 이리저리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었죠.”
눈빛만 보면 소싯적 첫사랑이라도 추억하는 것처럼 아련했다. 지난 일에 개의치 않으면 다행이지만……. 진호가 먼 곳을 향한 수영의 시선을 좇았다.
“다리 밑에서 쭈그리고 자는데, 앞이 막막한 거예요. 당장 내일 등교도 해야 하고 할아버지한테 생활비도 보내야 하는데, 돈은커녕 빚을 지게 생겼으니. 그래도 학교는 다니고 싶어서 막노동을 뛰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새벽이 오더라고요.”
“…….”
“여명이 빌딩 너머로 차오르고 주변이 환해지는 걸 보면서, 막연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단 확신이 생겼어요.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반드시 아침은 오니까요.”
수면 위로 속절없이 흔들리던 두 얼굴이 마주했다. 그때의 풍경이 떠오른 수영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저를 보는 진호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도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일어나서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았어요. 그러다 강 사장님 눈에 띄어서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거고, 형도 만나게 된 거예요.”
진호는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어쭙잖은 위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상처만 될 뿐이었다. 다행히 짠돌이는 위로가 필요 없어 보였지만, 한창 대학 생활을 만끽해야 할 시기에 바닥의 삶을 경험해야 했던 수영의 스무 살에 공연히 제 가슴만 아팠다.
“형이 왜 그런 표정을 해요. 힘들었던 건 난데.”
수영이 울상을 지을 듯이 좁아 든 진호의 미간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이런 얘기를 형에게 할 줄은 몰랐다. 과거를 포함해 저에 관한 깊은 얘기를 누구에게도 터놓은 적이 없었다. 꺼내 봤자 좋은 주제도 아니고, 저 자신에게도 중대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부모님을 잃기도 했는데, 노숙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굳이 여기까지 데려와서 이런 고백을 왜 하냐면.”
이마를 살살 문질러 주름을 거둬 낸 수영이 흡족한 듯 손을 떼어 냈다.
“형도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형이 알려 주기 전부터 궁금한 건 늘 많았다. 신현우와의 연애사부터 본가에 끌려가야 했던 배경은 무엇이고,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하지만 형이 말하기를 꺼리기도 했고 아픈 과거를 꺼내서 형을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형이 대답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았다. 저도 제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형에게 자세히 말한 적은 없었다.
「내 말 안 들려요?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요.」
왜 알려 주지 않았냐는 말이 저를 궁금해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러고 나서 이어진 형의 수줍은 위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새로운 소망을 품게 했다. 이것 또한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 형이 나에 대해서 궁금해한다는 신호가 관심의 표현일지도 모르니까. 형이 원하는 거라면 별 재미없는 제 인생사쯤은 언제든지 꺼내 놓을 수 있었다.
“이런 고백은 부담스러워요?”
“아뇨. 전혀.”
고개를 저은 진호가 둑을 짚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수영의 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음. 이건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인데요.”
쑥스러운 듯 목청을 가다듬은 진호가 수영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갰다.
“원래 친한 사이에는 어떤 얘기를 해도 괜찮은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음을 어필하려고 최대한 장난스럽게 해 봤는데 자연스러웠으려나. 진호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괜히 가려운 듯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위로라고 할 것도 없고, 친한 형 동생 사이가 어떤 건지 저도 잘 모르지만, 아무쪼록 제 마음이 잘 전해지길 바랐다.
“그래요.”
수영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말을 뱉더니 진호의 손을 제 손안에 가두었다. 형이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할까. 이건 정말 형 동생 사이라서 하는 행동일 뿐일까. 손을 붙잡느라 부쩍 가까워진 진호의 어깨를 내려다보며 수영이 진호의 손을 살며시 매만졌다. 긴장했는지 차가운 손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형이 저를 위해 용기를 냈다는 게 선명하게 와닿아서 깊숙한 곳에서 치미는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형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했던 것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형.”
진호의 손을 녹이듯 꼭 쥐고 있던 수영이 반듯한 등을 끌어안았다. 진호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수영이 한숨과 함께 끓어오르는 감격을 가까스로 흘려보냈다. 가슴에 닿는 수영의 체온에 진호가 허리를 움찔 떨었다. 똑같이 장난으로 받아칠 줄 알았는데. 진지해진 분위기가 당혹스러웠지만 수영을 위하는 제 목적이 달성된 것 같아서 싫지 않았다.
“갈수록 형이 좋아져서 큰일이에요. 어떡하지.”
맞붙은 가슴을 통해 수영의 심장 고동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해졌다. 제 박동도 덩달아 뛰어올랐다. 두 박동이 일정한 간격으로 맞춰졌다. 순간을 만끽하며 수영의 품에 저를 내맡겼다.
“내가 준 거 뿌렸어요?”
한참을 끌어안고만 있던 수영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낯설지 않은 향이 진호의 체향과 섞여 코끝에서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차에서 나오면서 살짝 뿌렸는데, 혹시 냄새가 독해요?”
“아뇨. 좋아요. 잘 어울려.”
깊이 향을 음미하던 수영이 얼굴을 양손 가득 쥐었다. 압력에 진호의 뺨이 찐빵처럼 눌렸다.
“하아, 형.”
화풀이라도 하듯 진호의 볼을 잡고 주물럭거리던 수영이 의미 모를 한숨을 짧게 뱉었다.
“솔직히 말해요. 형도 나 좋아하죠? 그래서 이러는 거죠?”
“그건…….”
끝까지 숨기기는 무리였나. 진호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닫았다. 갑작스럽게 밝히고 싶진 않은데, 제게 닿은 수영의 손은 너무나 따스했다.
“알겠어요. 그렇다고요.”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제멋대로 단정 짓긴. 토를 달고 싶은 심정과 달리 입가엔 둥근 호가 그려졌다. 제 장난을 뒤늦게 받아 주는 것 같아서. 진지할 땐 부담스럽지 않은, 장난칠 땐 가볍지 않게 건네는 수영이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왜 웃어요. 또 사람 헷갈리게.”
수영이 별안간 뺨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촉, 하고 피부가 마찰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 정도는 봐줘요. 형이 너무 예쁘고 귀엽고 멋진 탓이니까.”
“참, 나.”
뭐라는 건지. 얄밉지만은 않은 수영의 언사에 진호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터질 것 같은 심장을 힘겹게 가라앉혔다. 이러다 뜻하지 않은 고백이라도 해 버릴 것 같아서 수영의 품에서 멀어졌다.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뭐였더라.
“첫 번째로 좋아하는 곳은 어딘데요?”
수영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가를 세우자 진호가 툴툴거렸다.
“여기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곳이라면서요.”
말뜻을 알아차린 수영이 진호의 손을 맞잡았다. 저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듯 한 말인데 형은 세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는데 안 좋아할 수 있겠냐고. 차오르는 심정을 풀 데가 없어서 애꿎은 형의 손만 만지작댔다.
“형. 시험 끝나면 우리 집에 갈래요?”
“옥탑방이요? 거긴 왜요?”
“옥탑방 말고, 시골에 있는 진짜 우리 집.”
갑자기 시골에? 뜬금없는 제안에 진호가 되묻듯 눈을 키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거든요. 거기가.”
진호가 고민하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성급해진 수영이 고개를 잡아 저를 바라보게 했다. 간절한 수영의 눈빛을 바라보던 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시골집에 가자는 제안을 들을 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시간을 끌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수영의 얼굴을 좀 더 오래 보고 싶어서라는, 못된 사심에서였다.
“와. 형! 고마워요. 진짜.”
감격한 수영이 진호를 가득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껴안는지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진호가 어깨를 치며 간신히 숨 쉴 공간을 만들었다. 아까 분위기 잡던 남수영은 어디 갔냐고.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가를 수영의 가슴에 묻어 가렸다.
수영이 학창 시절을 보낸 장소는 어떨까. 동생들은 어떻고 할아버지는 어떠실까. 가기도 전에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기말고사가 후딱 끝났으면 좋겠다.”
수영이 품에 들어오는 어깨를 쥐었다. 물론 성적은 혜린이 부탁했던 대로 올릴 예정이지만, 지금은 시험 따위를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형이 1950년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메릴린 먼로를 뛰어넘는 섹스 심벌이 되지 않았을까. 엉뚱한 가정을 품으며 수영이 진호의 향기를 제 뇌리에 새겼다. 기념비적인 순간을 아로새기기엔 짧은 밤이었다.
찰칵. 찰칵.
어둠 속에서 셔터음이 연달아 울렸다. 그것은 매우 작은 소리라서 누구의 귀에도 닿는 일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둑에 앉은 두 사람을 향해 몇 번이고 셔터를 누르던 그림자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곤 고요함이 자리를 메웠다. 오직 땅으로 까맣게 내려앉은 담뱃재만이 그림자의 흔적을 증명할 뿐이었다.
* * *
대낮의 골목. 오래된 벽돌 건물 담벼락에 등을 기댄 남자가 손끝에 걸린 담배를 털어 냈다. 바닥에 쌓인 담뱃재와 꽁초의 개수가 남자가 머문 시간을 가늠하게 했다. 폐부에 스며든 연기를 뿜어내며 남자가 제 손에 든 핸드폰을 응시했다. 제시한 기한은 오늘까지. 아직 연락은 오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돗대를 꺼내 입에 무는데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떴다. 기다렸던 연락임을 직감했다. 뜸을 들이다 5초 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여태 결정을 못 내린 건가. 남자는 비죽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사장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날세.
“직접 연락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남자가 정말 놀랐다는 듯 입에서 담배를 빼냈다. 메일 끝에 대포폰 연락처를 남기면서 서 사장에게서 연락이 오길 내심 기대했는데 바람이 이루어졌다.
-나도 자네가 그런 식으로 메일을 보낼 줄은 몰랐네만.
“비서실로 메일 보낸 건 제가 봐도 너무하다 싶긴 하네요.”
실장부터 해서 비서실 직원 전부가 봤을 테다. 본인들이 속한 회사의 사장 아들이 웬 남자랑 데이트한 사진부터 섹스 비디오까지. 그거 입단속하느라 애를 많이 썼을 테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정직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누군지 명확하게 밝혔잖아요.”
-…….
“2년만인가요? 저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지가. 진호 문제로 저랑 대화를 많이 하셨었죠.”
-잡담은 거기까지 하게.
상만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들 얘기에 민감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니까. 현우가 조금씩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물며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래서 생각은 많이 해 보셨어요?”
-자네의 제안은 거절하겠네.
“지나치게 단호한 거 아닙니까. 거절하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아시면서.”
상만이 거부하는 시나리오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막상 들으니 허무했다. 페널티가 적었나. 아니면 무기가 역부족이었나. 현우가 머리를 굴리며 입술 새로 구름을 연신 뿜어냈다.
“사장님은 진호의 섹스 비디오가 뉴스에 장식돼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시죠. AE의 후계자가 남자랑 붙어먹는다는 기사가 쏟아져도요.”
-그렇네.
상만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전에는 돈을 주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이 양반이 무슨 바람이 들었나. 3억을 주면 아들과 헤어져 주겠냐며 전전긍긍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태연한 척은. 무뚝뚝한 말투 속에서 느껴졌던 다급한 기색을 떠올리며 현우가 2년 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서진호와 헤어질 마음은 없었다. 몇 년 더 가지고 놀다가 버릴 생각이었으나 아들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만 사장님 덕에 3억이라는 공돈을 얻고 미국으로 날랐다. 유학을 명분으로 떠나긴 했지만 MBA 같은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미국에서 경영 대학원을 다니긴 했으나 학점이 모자라 수료하지도 못했고, IGN에서 일했다는 것도 아버지 인맥으로 잠깐 인턴직을 경험한 게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약에 한창 빠져 있을 때라 출근을 제때 못 해서 잘렸고, 화가 단단히 난 아버지가 지원을 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제대로 공부하며 교수라도 해 보라고 했지만, 글쎄. 돈만 손에 쥐면 언제든 미국으로 튈 생각이었다. 한국에 오면 서진호를 꾀어서 몇 번 놀아 주다가 그걸 빌미로 서 사장에게 돈을 뜯어낼 작정이었는데 예상보다 반발이 컸던 서진호와 떨거지 같은 남수영 그 자식 때문에 실패했다. 멀쩡한 조교 자리에서도 쫓겨나는 바람에 아버지를 피해 은신처에 숨어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자택에서 나오면서 몇 푼 훔쳐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지하를 전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쓸 만한 협박거리를 찾으려고 진이 빠지도록 둘을 쫓아다녔지만 건진 건 뽀뽀 사진 한 장뿐이었다. 한마디로 씨발스러운 상황이었다.
“제가 가진 게 그것뿐인 것 같습니까?”
섹스 비디오는 딥페이크 기술로 만든 가짜였다. 지하에 있는 썩은 인생 중 몇몇은 약만 쥐여 주면 쓸 만한 걸 만들어 냈다. 이번에도 좋은 걸 몇 개 물려 주면 신나서 더한 것을 만들어 올 터였다. 그러니 강력한 무기는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데.
-자네가 뭘 가지고 있든 내 대답은 동일해. 그딴 쓰레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일세.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나.”
초조함을 감추려고 꽁지 끝까지 탈 정도로 연기를 빨았다. 비장의 카드라도 있는 건가. 2년 전과는 상반된 반응에 속만 타들어 갔다.
-자네야말로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군. 신 교수는 아나? 자네 이러는 거.
제 신분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타격이 크진 않았다. 다만 제 아들과 연관됐다면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서상만이 태도를 바꾸었다는 게 크나큰 변수였다. 그동안 서 사장은 아들과 관련해서는 늘 약자의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신상을 알아내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제가 가진 카드가 더 강력했으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저도 제 좆대로 할 테니까. 앞으로 협상은 없을 겁니다.”
대화를 끌었다간 제 패가 까발려질 것 같아 이쯤 돼서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쪽에서도 손해 볼 거 없다는 분위기를 풍겨야 했다. 손톱만큼 남은 연초를 땅바닥에 던지며 현우가 전화를 끊었다.
“씨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한탕 챙겨 보려고 했더니 끈질기게 안 따라 주는 새끼들 때문에 열불이 올랐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나 혼자 좆 될 순 없지.”
소스만 있다면 이용할 장소는 넘쳤다. 같잖은 놈들.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길거리에 나앉는 꼴을 보면 그것만큼 재미난 구경거리가 없을 텐데. 현우가 핸드폰에 저장된 영상을 확인하며 비열하게 웃었다.
신음을 흘리며 엉덩이를 흔드는 서진호의 영상이 재생됐다. 제 아래에서 울며 허리를 젖히는 실제 서진호는 이것보다 수수한 맛이 있었다. 제 영상을 지워 달라며 동정을 구걸하는 모습은 어떨까. 현우가 입맛을 다시며 인터넷 창을 열었다. 새로운 흥분과 복수로 인한 희열로 머리끝이 쭈뼛 설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