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8)

15.

“찾으시는 거 있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주위를 둘러싼 장정들 사이를 흘끔 훔쳐보던 진호가 임 실장의 질문에 손을 저으며 강의실 구석 자리에 앉았다.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수영은 학교에 오지 않은 듯했다. 양옆에 나란히 앉은 경호원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책상 위에 공책을 펼쳤다. 노트북 같은 건 사용할 수 없었다. 모든 통신 기기로부터 차단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인터넷에 들어가 봤자 좋지 않은 뉴스만 실컷 보게 될 터였다. 아직 아침에 받았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 것은 한 건의 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AE 제약의 후계자, 동성 애인과의 강압적인 성관계 동영상 유출]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이른 새벽, 갑작스럽게 누나가 깨우기에 알람이 울리기 전이라며 짜증을 냈더니 코앞으로 튀어나온 핸드폰 화면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서상만 AE 제약 사장의 독남 서진호 씨가 동성과 성관계를 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모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에 서 씨가 한 남성과 강압적인 성관계를 즐기는 동영상이 게시된 것이다. 영상 속 서 씨는 각종 성인 기구를 활용하거나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는 등 난잡한 취향을 드러냈다. 논란의 글을 게시한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영상에 함께 등장하는 남성은 서 씨의 동성 애인이며 그 증거로 두 사람의 밀회 장면을 담은 사진을 함께 첨부했다. 현재 해당 게시글은 삭제된 상태이나, 정재계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동성연애 스캔들로 서 씨에 대한 논란은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기사의 아래에는 모자이크로 처리된 동영상의 일부 장면과 함께 한강 둔치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남자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익히 보았던 자료였다. 며칠 전, 이유도 모른 채 본가에 끌려온 제게 아버지는 기사에서 말하는 영상과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윽박지르는 아버지에게 항변도 못 하고 영상 속에서 질척하게 뒤엉키고 있는 저와 수영을 망연히 바라봤다. 구속구를 입에 문 채 침을 흘리는 제 모습에 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뇌리에 남은 잔상은 평생에 걸쳐 기억될 정도로 강력했다. 대체 이런 걸 왜, 누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딴 걸 제작해 전송한 자의 정신세계에 구역질이 났다.

한참 동안 아버지의 호통을 듣고 난 후에야 입이 열렸다. 남수영과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영상은 누군가가 고의로 만든 것이며, 사진 속의 인물은 저와 수영이 맞지만 연인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화가 끝까지 오른 아버지는 저를 방 안에 가두었다. 아파트에 있던 짐은 본가로 옮겨졌고, 핸드폰은 물론이고 이전에 쓰던 노트북을 비롯한 전자 기기는 모두 압수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학기 중이라 학교는 다닐 수 있게 해 줬다는 점이었다. 임 실장의 철저한 감시 아래에서, 수업을 듣는 것 빼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신현우가 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10억을 알려 준 계좌로 입금하면 영상과 사진의 원본을 넘겨주겠다고 했다고. 제안을 거절하면 영상을 다른 곳에 뿌릴지도 모른다는 제 말에 아버지는 콧방귀를 뀌며 거절할 거라고 했다. 메일을 보낸 자의 신원이 확실하니 논란이 생기기 전에 신현우를 붙잡아 처리하면 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누나가 보여 준 기사를 보아하니 아버지의 청사진은 처참히 무너진 듯했다.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동성연애 스캔들, 강압적인 성관계, 서진호. 기사에 또렷하게 쓰인 제 이름 석 자가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아버지가 신현우의 협박을 무시했을 때부터 예견했던 일임에도, 먹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골이 먹먹했다. 완벽한 암전이었다.

모든 사고가 정지한 그 순간에도 제 손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포털 사이트 전면이 저에 관한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인터넷을 달군 AE 제약 후계자의 동성 성관계 스캔들]

[아들의 파격적인 성적 취향에…… AE는 묵묵부답]

[성 소수자 시민 연대, 논란의 동성연애 스캔들은 심각한 인권 침해]

쏟아지는 기사에 눈앞이 아찔하다 못해 깜깜했다.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하고 심각한 분위기의 혜린만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누나가 당분간 수업에 빠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어떡하지. 학교에 가면 다들 저를 알아보고 혐오 어린 시선으로 쳐다볼 것이다. 기사가 진실이든 아니든 저는 취향 이상한 게이로 낙인찍혀 졸업할 때까지 꼬리표가 따라다닐 것이며, 어쩌면 극한의 호모포비아에게 잘못 걸려 달걀 폭탄을 맞을지도 모르고, 교수님을 비롯한 학생 전부가 저를 없는 사람 취급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학교에는 짠돌이가 있었다.

전날 강의실에서 스치듯이 마주친 수영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봤었다. 임 실장의 제지로 인해 말 한마디 붙일 수 없었지만 짧은 눈 맞춤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 오늘도 학교에 가면 틀림없이 수영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수업을 들을 여지는 충분했다. 누나에게 등교 의사를 밝히자, 평소의 두 배로 경호원을 붙여 주었다. 아버지는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연락으로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집에 있겠다고 할 걸 그랬나. 자리에 앉자마자 앞에 앉은 학생들이 저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AE 제약의 후계자라고 대문짝만하게 내 사진이 실린 것을 봤겠지. 누나가 대응책을 찾고 있다고 했지만 불안한 건 변함없었다. 제 쪽으로 쏠리는 시선을 피하며 이마를 책상으로 내렸다. 눈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간담이 서늘해졌다.

“고개 드세요. 도련님이 위축되어 계시면 논란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옆에 앉은 임 실장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럴 거면 티 나게 경호하질 말든가. 이건 뭐, 내가 화제의 인물이 맞는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제 주변을 육각형으로 둘러싼 시커먼 정장들을 보며 진호가 굳어 있던 어깨를 떨어뜨렸다.

어차피 절반은 사실 아닌가. 문제의 영상은 저와 하등 상관없는 가짜였지만, 짠돌이가 제 뺨에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은 진짜였으니까. 신현우가 어째서 그런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와 수영의 데이트 장면을 귀신같이 잡아낸 것을 보면 미국으로 도망갔다는 가설이 거짓인 듯했다. 나쁜 새끼. 끝까지 치졸하게 구는 짓거리에 신물이 올라왔다. 이 새끼는 용서할 가치도 없는 놈이었다.

책상 옆으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인기척이 들렸다. 따가운 시선은 두려웠지만 짠돌이인가 싶어서 눈꺼풀을 슬쩍 들었다. 강의 시작 5분 전인데도 수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아버지가 등교를 막은 건 아니겠지? 아니길 바라지만 그럴 소지는 다분했다. 아버지는 저와 수영이 함께 있는 걸 싫어했으니 이 일을 계기로 다시는 보지 못하게 수영을 먼 곳에 보냈을 수도 있었다. 본가에서 출발하기 전에 누나에게 짠돌이를 지켜 달라고 부탁했어야 했는데. 인터넷 기사를 보자마자 넋이 나가서 수영이 학교에 오지 못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만큼 저에게는 수영이 간절했다.

“실장님. 남수영은 어떻게 됐나요?”

아차 싶어서 임 실장에게 살며시 물었다. 임 실장은 곤란한 듯 이마를 구기더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남수영 씨에 대한 정보는 도련님께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철통 경호를 맡게 된 시점부터 여러 차례 물어도 임 실장의 응답은 똑같았다. 아버지가 짠돌이에 대해서 제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언질을 준 탓이었다.

손목의 시계를 보니 3분이 남아 있었다. 강의실 좌석의 절반 이상이 수업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찼다. 조급해하지 말자. 짠돌이랑 떨어지기 전에도 이쯤 돼서 학교에 도착한 적이 있었잖아. 다짐한 것과 달리 책상 아래의 다리가 달달 떨렸다. 수영이 오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불안함과 사방에서 흘겨보는 눈길이 저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형.”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수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마저도 반가웠다.

“죄송하지만 대화는 안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임 실장이 수영을 향해 경고했다. 말투는 공손했으나 행동은 엄격했다. 수영은 무언가를 전할 듯이 입술을 움직이더니 이내 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며 늘 보았던 평범한 미소였다.

분명히 짠돌이는 기사를 봤을 것이다. 저에게 닥친 형극에 가슴 아파했을 테고, 분노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낌새는 안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저도 미소로 화답했다. 잘될 것이다. 근거 따윈 없고, 돌파구 같은 것도 못 찾겠다. 하지만 남수영이 지어 준 미소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될 것 같다는 안심이 스며들었다.

제 피부를 샅샅이 훑어 내리던 눈빛이 가슴께로 닿았다. 늘어졌던 눈꼬리가 놀란 듯 슬쩍 들렸다. 진호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수영의 입가가 더욱 크게 휘어졌다.

“자리로 돌아가시죠. 계속 서 계시면 강제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임 실장이 수영의 어깨를 잡아 재차 경고했다. 수영이 알겠다는 듯 발걸음을 돌렸다. 제게 눈을 떼지 않던 짠돌이는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수영의 동태를 지켜보던 임 실장이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으니 멀리 보낼 구실을 찾지 못한 듯했다.

수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저를 뒤덮을 것 같던 압박감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아침에 본 기사에서는 스캔들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으니, 학생들이 저와 연인으로 보도된 인물이 수영임을 알 리가 없겠지만, 모르는 일이다. 정보력이 뛰어난 누리꾼들이 사진에 드러난 실루엣만으로 그것이 수영임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 긴장으로 손아귀가 축축했다.

그래도 수영이 뒤에 있으니까. 그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놓였다.

“출석 부르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정각에 딱 맞추어 앞문으로 들어온 김 교수가 출석부를 교탁에 올리며 강의실을 훑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하던 김 교수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석을 불렀다.

겉으로 보면 일주일 전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제 이름이 불리자 학생들이 부산스럽게 저를 쳐다보며 수군댔다는 것과, 김 교수가 제 옆의 시꺼먼 어깨들을 이따금 흘긋거리며 움찔거렸다는 것과, 오늘따라 뒷머리가 유달리 간질거렸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 * *

어두운 사장실 안엔 묵직하고 냉랭한 적막이 감돌았다. 창이 온통 커튼으로 가려져, 탁상 위에 놓인 전등만 불을 밝히는 방 안은 흡사 취조실을 방불케 했다. 혜린이 전달한 보고서를 세밀하게 훑던 상만이 중얼거렸다.

“경영학과 MT에서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었다는 학교 커뮤니티 게시글과 한강 근처에서 두 사람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여러 차례 등장하면서 서진호의 동성 애인이 명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남수영이라는 의견이 인터넷상에서 우세. 이에 남수영에 관한 기사 및 뉴스도 다량 생산되고 있는 상태…….”

그 뒤로 스무 페이지 넘게 차지하고 있는 인터넷 게시글과 뉴스 보도 자료, 관련 영상 링크를 스르륵 넘긴 상만이 인상을 구긴 채로 다음 문구를 읽었다.

“올해 초 SNS에서 미미하게 이슈가 있었던 ‘야구장 키스 타임’ 사진이 누리꾼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서진호와 남수영이 애인이라는 설이 기정사실로 되고 있다, 라.”

깔끔하게 지운 줄로만 알았는데 잔재가 남아 있었군. 익히 봤었던, 진호와 수영이 야구장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 자료를 무심하게 살피던 눈가가 치켜 올라갔다. 표정엔 변화가 없지만 속은 분노로 들끓고 있을 것이 분명한 제 아버지를 보며 혜린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기사 내보낸 거 반응은 어때.”

상만이 보고서를 탁상 위로 던지며 팔짱을 꼈다. 혜린이 뻣뻣이 선 채로 홍보팀에서 오전에 브리핑했던 내용을 읊었다.

“저희 쪽에서는 계속해서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아니라 선후배 사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영상 분석 결과, 고도의 딥페이크 기술로 제작된 악의적인 영상이었다는 점, 사진에서 드러난 스킨십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연인 사이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 다수의 대중에게 설득력을 얻은 모양입니다.”

“효과는?”

“효과는…….”

머뭇거리던 혜린이 낭패스러운 기색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동성연애 스캔들을 덮을 만큼 크지는 않은 듯합니다.”

“IP 주소는, 확인됐나?”

“최초 유출자의 IP 주소는 확보해서 위치를 찾긴 했는데, 해당 PC로 게시글을 등록한 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답니다. 아마도 신현우가 신분을 도용해서 PC방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폭로자가 신현우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네.”

참담한 소식을 전하며 혜린이 송구스럽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기어이 신현우가 대형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일전에 비서실로 전송된 메일과 동일한 내용으로 올라온 게시글을 보고, 신현우가 스캔들을 일으킨 최초 게시글의 작성자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신현우가 보낸 메일을 공개해서 스캔들이 조작된 것임을 밝힐 수도 있었지만, 게시글 작성자가 신현우라는 확실한 물증이 부족했다. 신현우가 진호의 전 남자 친구였던 탓에 추문이 커질 것을 우려한 아버지는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태도였다.

서진호, 넌 대체 어쩌다가 그런 놈이랑 사귀었던 거야. 검붉은 와인빛으로 물들인 손끝을 맞잡고 있던 혜린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제 동생과 사귀고 있을 때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헤어지고 나니 그만한 쓰레기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영의 신상까지 알려지며 요 며칠간 대한민국은 AE의 동성연애 스캔들로 들썩거렸다. TV를 틀면 진호와 수영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고, SNS에서도 ‘AE 동성 스캔들’ 태그가 실시간 인기 검색어 순위에서 내려가질 않았다.

샘성처럼 엄청난 대기업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제약 회사의 후계자가 가진 성적 취향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은 저도 몰랐다. 빅 데이터 분석에서 ‘외모’, ‘신분 차이’, ‘훈훈함’ 등이 키워드로 뽑히는 걸 보면 국민적 관심의 요인이 단순히 동성연애 스캔들 자체에만 있지는 않은 듯했다. 관련 기사를 보면 악성 댓글도 많았지만, ‘저렇게 잘생긴 남자들이 게이라니 전 인류적 손실이다’, ‘다 필요 없고 둘이 커플 너튜브라도 찍어 줬으면 좋겠다’ 등의 호응 댓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신현우가 쏘아 올린 불쏘시개가 철저한 무관심 속에 잊히길 바랐던 임원진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결과였다.

“신현우의 행방은 계속 찾는 중입니다. 신 교수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한다고 약속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때 신현우에게 스캔들의 책임을 물어도…….”

“됐다. 앞으로 그 자식 얘기는 잡혔다는 소식 아니면 꺼내지도 마.”

상만이 심기가 거슬린 듯 허리를 세우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이 뻗쳐 골이 지끈거렸다. 작금의 사태에 이른 데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그 애송이의 협박을 가소롭게 여겼던 탓이었다.

메일을 받은 뒤, 진호를 불러 사실 관계를 따지고 나서 영상 분석을 의뢰했다. 진호의 설명대로 성관계 동영상은 잘 만들어진 가짜로 판명이 났고, 사진은 진짜였지만 자극적인 장면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이 자료가 대외로 유출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철없는 도련님의 혈기로 넘겼다. 10억쯤은 부모에게서도 얻을 수 있는 부잣집 자식이 그 돈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애송이는 제 생각보다 한참은 멍청한 놈이었던 모양이다. 2년 전, 충격에 휩싸여 3억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미국으로 보낸 게 두고두고 후회되어 거절했더니만, 후폭풍이 상당했다.

지나치게 낙관했어. 탁상에 놓인 두꺼운 보고서를 펼치는 상만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놈은 어떠냐.”

“얘기했던 대로 본인의 집에서 칩거 중이고, 저희 쪽에서는 특별한 제지 없이 감시 중입니다. 주의할 만한 행동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믿을 만한 얘기겠지?”

혜린이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입가에 힘을 주었다. 날카롭게 흘겨보는 눈매가 저를 추궁하는 게 아주 잘 보여서 가시 뭉치를 씹고 있는 듯 입 안이 불편했다. 네가 진호와 수영의 사이가 보통의 친구 사이라고 단언해서 둘을 방관했더니 이 사달이 난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혜린이 억울한 심정을 숨기며 사무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임 실장에게 물으셔도 똑같은 답변을 들으실 겁니다. 원하시면 남수영 씨를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힘써 볼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릴.”

상만이 혀를 차며 보고서를 넘겼다. 그러는 아버지는 왜 수영 씨를 돌려보내셨어요, 라고 대꾸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내며 혜린이 페이지를 넘기는 상만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장님을 뵙게 해 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스캔들이 터졌던 당일, 수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침 상만이 수영을 진호와 떨어뜨려 놓으라고 지시를 내린 참이었다. 상만이 주는 1억을 받고 시골에 있는 가족들에게 돌아가 있으라는 제 말에 수영은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수영이 돈을 받고 순순히 물러날 성격은 아니었기에 우선 사장님께 여쭤보겠다고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아버지에게 의사를 물어본 결과는 뜻밖이었다.

「안 될 이유도 없지. 주말에 점심 중으로 시간 잡아 봐.」

아버지는 만나서 겁을 줄 작정이었던 것 같다. 비서를 통해 일정을 조율하며 입가에 띠던 미소가 그 언젠가 진호의 담임 선생을 잘랐을 때처럼 살벌했었다. 제 짐작대로 아버지는 기를 죽일 셈이었는지 고급 요정으로 수영을 불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고작 세 사람을 위해 차려진 60첩 반상과, 황금으로 수놓아진 용이 장식된 벽면과, 스무 명이 넘는 직원이 입구에서부터 일렬로 허리를 숙이는 광경. 일반인은 일평생 접하지도 못할 거대 규모에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수영은 그런 내색 없이 아버지 앞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1억으로는 부족하던가?」

아버지가 도자기 잔에 담긴 물로 목을 축이며 수영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수영은 아버지의 의도적인 기선 제압에 아랑곳하지 않은 듯 편안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진호 형에 대한 논란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무슨 수로? 진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수영의 의지는 이해가 된다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이었다. 이미 전국적으로 두 사람의 연애가 확정된 판국에 흐름을 뒤집기에는 엄청난 패가 필요했다. 그런 패를 수영이 갖고 있을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자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역시나 아버지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깊어진 이마의 주름과 서늘해진 눈매가 아버지의 심리를 대변했다.

「제가 뒤집어쓰면 됩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네가 왜?’라는 듯한 눈을 했다. 수영도 그 눈빛을 읽은 듯했다.

「사장님께서는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모르겠지만, 저와 형은 연인 사이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영상은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사진은 어쩌다가 오해할 만한 장면이 찍힌 거지만, 제가 일방적으로 형에게 들이댄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조곤조곤 제 입장을 전하는 수영을 주시하기만 했다. 우선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신가. 묵묵부답인 아버지 대신 제가 말을 꺼냈다.

「수영 씨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여론이 바뀔까요? 수영 씨만 비난받고 끝날 가능성이 커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저를 향해 눈길을 돌린 수영이 눈가를 둥글게 휘어 보였다. 어떤 의도도 계략도 느껴지지 않는 발언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저였다. 정말 순수하게 진실을 밝히려는 목적이었나. 수영이 아버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형은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제가 형의 위치를 고려하지 못한 탓이겠죠. 사장님께서는 1억 원을 받고 본가로 돌아가라고 하셨지만, 죄송스럽게도 얼마를 주신들 제 마음이 변하진 않을 겁니다. 논란이 해결될 때까진 곁에서 돕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사장님이 만나지 말라고 하면 안 만나겠습니다. 형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신경 써 주신다면 알아서 사라지겠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아버지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캐물었다.

「그렇게 해서 자네가 얻고자 하는 건 뭐지?」

「진호 형의 안전이죠. 그것 외엔 없습니다.」

수영의 눈동자가 아버지의 짙어진 눈과 맞부딪쳤다. 아버지는 그 너머에 있는 실체를 읽으려는 듯했지만, 수영의 눈빛은 흐린 빛 하나 없이 맑기만 했다. 수영을 꿰뚫어 보듯 탐색하던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진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가?」

아버지의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딱딱하던 수영의 인상이 활짝 펴졌다. 답은 즉시 튀어나왔다.

「네. 정말 좋아합니다. 얼만큼인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수영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수영 주변의 공기가 바뀌며 가슴께에 포근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건 분명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둘이 잘되길 바랐던 저로서는 어서 진호가 수영의 진심을 알아채길 바랄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둘이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었다.

저와 같은 것을 아버지도 느꼈을까. 궁금해서 곁눈질한 아버지의 표정에서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진데,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

「없으시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아버지는 상관없다는 듯 밥상 위를 무감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수영이 있던 빈자리엔 손 하나 대지 않은 듯 물잔과 수저가 처음 나온 그대로였다.

「어떻게 할까요.」

「네 생각은 어떠냐.」

요정을 나오면서 아버지에게 묻자, 도리어 질문이 제게로 돌아왔다. 제 의견이야 언제나 일관적이었다.

「수영 씨는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저희가 긍정의 사인을 보내면 그대로 실행할 거예요. 관건은 신현우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죠.」

아버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저를 훑었다. 개인적인 사견임을 책망하는 것 같아 뜨끔했지만 저도 연기엔 자신 있는 덕에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아버지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수영이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감시를 하라는 단서를 붙인 채로. 돈 한 푼 쥐여 줄 일 없이 자기가 알아서 눈에 띄지 않겠다고 하니 허락하신 걸까.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세단에 오르는 아버지의 옆모습에서는 여전히 심중을 읽을 수 없었다.

“그놈이 뒤통수를 쳤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회상에 잠긴 저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수영을 만난 게 불과 이틀 전이니 배신했다고 판단하기엔 일렀다. 역시 아버지는 제 의견을 사견으로 치부한 듯했다.

“수영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네게 물은 내가 잘못이지.”

아버지에게 제 신뢰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하락한 듯했다. 안 믿으실 거면 아버지는 왜 내버려 두라고 하셨느냐고요. 되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형식적으로는 업무 보고 중이었던 터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보고서는 언제 줄 생각이냐?”

“어떤 보고서 말씀이십니까?”

“그놈의 열 살 이전 기록 말이다.”

그간 언질도 없었기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혜린이 어떻게 피해 갈지 머리를 굴리던 차, 청량한 벨 소리가 울렸다.

“잠시만요.”

타이밍도 좋게 임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혜린이 상만에게서 고개를 돌려 전화를 받았다. 한숨 돌리며 임 실장의 보고를 듣던 혜린이 짧게 몇 번 대꾸하더니 금방 통화를 끝냈다.

“영상이 올라왔답니다.”

무슨 일이냐는 듯 이마를 드는 상만에게 핸드폰을 내민 혜린이 임 실장이 보내 준 너튜브 링크를 눌렀다. 창이 뜨자마자 영상은 곧바로 재생됐다.

-아, 아. 이거 들리나?

카메라가 작동되는지 확인하는 듯 화면이 흔들리더니, 프레임 안으로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수영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명문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남수영이라고 합니다.

옥탑방에서 찍었는지 익숙한 벽지를 배경으로 앉은 수영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말을 꺼냈다.

-제가 이렇게 영상을 찍는 까닭은, 저와 같은 학과 선배인 서진호 씨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입니다.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서는 엄중하지만 온화한 기운이 흘렀다. 혜린의 예상대로 수영은 자신이 뒤집어쓰겠다는 약속을 이행한 모양이었다.

-저와 형이 연애한다는 가십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진으로 찍힌 저희 모습은, 제가 억지로 형에게 뽀뽀한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진호 형을 일방적으로 좋아한 거지, 형이 절 좋아해서 사귀거나 한 게 아니에요.

멋쩍은 듯 작게 헛기침을 낸 수영이 뜸을 들이더니 뒤를 이어 나갔다.

-진실만 말씀드리자면 저와 형은 친한 선후배 사이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와 형의 그, 성관계 동영상이라고 알려진 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맞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지만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느슨하게 풀어졌던 수영의 입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해졌다. 혹시 모를 불똥에 대비해서 신현우에 대한 언급은 자제해 달라는 AE 제약 측의 부탁을 반영한 듯했다.

-음. 하지만 제게는 이게 있습니다.

수영이 제 핸드폰 화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댔다. 술에 절었는지 누군가가 침대에 안면을 처박은 사진이었다. 온통 진하게 덧씌워진 모자이크의 아래는 살색의 향연이었다. 이목구비를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알 수 있는 부분은 엉덩이로 추정되는 부근에 무언가가 꽂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새, 아니, 그 사람은 이게 뭔지 알 겁니다. 사진의 주인공 본인은 이걸 갖고 싶으면 저한테 찾아오시면 됩니다. 주소는 안 알려 줘도 알겠죠?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수영이 입만 싱긋 웃더니, 넥타이로 조여진 목의 칼라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 일로 이유 없이 뭇매를 맞고 있는 서진호 씨에게는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진호 형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은 멈춰 주시길 바랍니다.

수영은 뻣뻣한 얼굴로 돌아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것으로 영상은 끝이었다.

“사진 얘기는 뭐냐.”

상만이 혜린을 다그치듯 핸드폰을 밀어냈다. 혜린은 자신도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미끼를 던져서 신현우를 움직이게 할 속셈인 것 같습니다.”

“알고 있었지?”

“무엇 말씀이십니까?”

상만의 물음에 혜린이 눈을 둥그렇게 키우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신가 놈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 말이다.”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멀뚱히 눈만 깜빡이는 혜린에게 상만이 의뭉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무튼 약속은 지켰으니 된 거 아닐까요.”

어깨를 으쓱이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혜린이 황급히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저는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덩달아 탁상 위의 시계를 본 상만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더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한 혜린이 사장실을 나섰다. 현재 시각은 낮 12시 5분. 사규에 따라 전 직원이 점심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 * *

“사진 속 서진호가 입고 있던 슈트 브랜드 천만 원 호가에 입이 떡…… 아니, 이런 건 왜 궁금한 거야.”

스크롤을 내리는 진호의 인상이 험악해져 갔다. 이런 내용을 원한 게 아닌데. 제가 입은 셔츠와 재킷, 시계까지 낱낱이 분석해 가격을 추정한 기사 원문을 보며 혀를 찬 진호가 창을 닫고, 검색창으로 되돌아갔다.

“남수영과 서진호의 패션 비교를 통해 본 신분 차이. 이것도 됐고, 옥탑방에 살면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던 희대의 짝사랑 남 남수영의 안타까운 사연…….”

아래로 거침없이 내려가던 검색 목록 창이 멈췄다. 마우스를 쥐고 있던 진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이딴 게 왜 궁금하냐고…….”

수영의 아픈 과거가 온 세상에 까발려지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저를 파헤쳤으면 파헤쳤지, 파 봤자 구렁텅이일 뿐인 짠돌이의 사생활이 뭐가 그렇게 흥미롭다고. 걔가 어떻게 아등바등 살아왔는데, 그깟 가십거리가 뭐가 중요해서 남의 상처를 후벼 파고 그래. 외려 대수롭지 않을 남수영 대신 제가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을 정보가 아니라, 쓸 만한 자료가 하나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씁쓸한 안색을 지우지 못한 채 진호가 검색 목록을 뒤졌다.

얼마 전, 제 부탁을 듣고 혜린이 몰래 노트북을 구해다 줬다. 메신저 기능이 차단된, 단지 인터넷 검색만 가능한 용도의 노트북이었지만 상만의 눈을 피해 제게 전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힘을 좀 썼는지 임 실장을 설득시켜서 임 실장이 경호하고 있는 동안에는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 덕에 방 안에 감금되다시피 박혀 있는 중에도 해결책을 도모할 수가 있었다.

스캔들이 터진 후, 실험용 유리 케이지에 갇힌 듯한 생활이 이어졌다. 아버지의 통제하에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전부인 일상 속에서 그 누구와의 소통도 없이 사람들에게 보이기만 할 뿐인 처지가 통 속의 쥐나 다름없었다. 경호원들에게 보호받고 있어서 학교에서 위협을 받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지나갈 때마다 쑥덕거리는 학생들이나 야멸찬 눈빛을 보내는 학생들은 허다했다. 그 눈들은 마치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지, 스캔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지에 대한 정보가 전부 가로막힌 상태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적대감은 더한 공포를 키웠다. 누나에게 경과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누나는 알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답해 주지 않았다.

수영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수영은 스캔들이 터진 당일 이후부터는 제게 접근하지도 않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다. 수영이 이유 없이 저와 거리를 둘 리는 없으므로 상황이 잘못되고 있다는 불길함이 들었다. 저뿐만 아니라 수영에게 무슨 일이 닥쳤다는 직감이 드는데도 24시간 아버지에게 감시당하는 위치이니 수영이 어떻게 된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답답해서 숨통이 막힐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저를 살피러 온 혜린을 붙잡고 애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이렇게 지내다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누나는 매달리는 제 모습을 보더니, 안타까웠는지 수영이 해명 영상을 올렸다고 말해 줬다. 어떤 해명 영상? 얼떨떨한 저에게 누나는 어느 너튜브 영상을 보여 주었다.

“단지 선배를 좋아했던 것뿐, 남수영 해명에 비난 여론 사라질까.”

우연히 눈에 띈 기사 제목을 소리 내어 읽은 진호가 책상에 팔꿈치를 세운 채 길게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마에 생긴 주름이 깊어졌다.

수영의 영상을 본 뒤,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남수영 네가 왜 해명을 해? 왜 날 좋아한다고 말해? 그 사진은 대체 뭐야? 왜 네가 잘못했다는 거야? 왜 나에게 사과하는 건데?

처음에는 의문투성이였다. 어째서 수영이 해명 영상까지 찍어서 올려야 했는지 이해가 도통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은 화가 났다. 굳이 저를 좋아한다고 말해서 제 무덤을 파는 짠돌이가 미련했기 때문에. 마지막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무덤은 본디 짠돌이가 아니라 제가 들어갈 곳이었기 때문에.

정지된 화면 속의 수영을 공연히 보다가 누나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누나는 당연히 반대했다. 이런 감정 상태로 통화해 봤자 수영에겐 보탬이 되지 않을 거라고, 네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 줘야 수영도 희생한 보람이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제겐 앞뒤 사정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영상 속 짠돌이의 모습이 MT에서 폭탄주를 마시고 쓰러졌던 짠돌이의 모습과 겹쳐졌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시늉이었지만, 지금은 실제라는 것이었다. 저는 혜린에게 빌다시피 했다. 내가 안 괜찮은데 어떡하냐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었다. 그러나 누나는 한숨만 푹 내쉬더니 끝내 허락을 내려 주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던 저는 누나에게 노트북 하나만 공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험용 쥐도 궁지에 몰리면 케이지를 벗어나려 발악한다. 덫에 걸려 다시 갇히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까지 실험용 쥐인 채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서진호는 무슨 죄임?ㅋㅋㅋ 게이 새끼 하나 때문에 실명 다 까이고 졸지에 변태 호모 취급당함ㅋㅋㅋ]

[ㅋㅋㅋ서진호는 무슨 죄임22222]

[버젓이 신상 공개하는 것도 대단함……. 죄책감도 없나?]

[쟤 같은 놈들 때문에 아무 죄 없는 동성애자들이 욕먹는 것임.

└우욱. 벌레 같은 새끼들 그만 좀 기어 나와라.

└ㄲㅈ]

수영의 해명 영상에 달려 있던 댓글들이 떠올랐다. 그 글을 수영도 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쌍욕과 인신공격으로 점철된 댓글 창을 보며 얼마나 눈을 감았는지 모르겠다. 보다가 제 속이 다 망가질 것 같았음에도 글을 읽어 나가는 행위를 멈추지는 않았었다. 원래는 제게 향했어야 할 화살을 수영이 대신 맞아 준 것이기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 심산이었다. 가진 건 노트북 하나뿐이지만, 여론을 뒤집을 만한 자료를 있는 대로 찾아내서 저와 수영을 비난했던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수영에게 씌워진 프레임은 거짓이며 이 모든 건 신현우의 잘못이라고. 마음 같아서는 신현우를 잡아 자백을 시키고 싶었지만,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기에 현재로선 판도를 바꿀 만한 반박 자료를 찾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기도 없고, 여기도…….”

검색 결과의 페이지를 넘기는 진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유용한 정보를 찾고자 하는 소망과 달리, 이렇다 할 성과는 나오질 않았다. 내내 달고 있던 이마의 주름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질 낌새가 없었다.

“밤늦게까지 뭘 하는 거냐.”

적막을 뚫고 들어온 상만의 음성에 진호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진호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뒤를 돌았다. 다행인 것은 제 손에 들린 것이 노트북이 아니라 물컵이며, 이곳이 제 방이 아니라 주방이라는 점이었다.

“뭘 하긴요. 물 마시잖아요.”

진호가 보란 듯이 컵을 상만의 앞에 들이대더니 안에 담긴 물을 삼켰다. 아버지도 밤을 새운 건가. 주방에서 마주친 상만은 불을 켜지 않아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밤을 새우든 안 새우든 제 관심사는 아니었으니 눈길만 슬쩍 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잠이나 자.”

저도 물을 마실 참이었는지 상만이 진호의 옆으로 다가와 정수기에 컵을 댔다.

“알아서 해요.”

진호가 상만은 보지도 않은 채 방향을 틀어 제 방으로 발을 옮겼다. 안 그래도 냉한 사이에 스캔들이 터지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악화할 대로 악화한 상태였다. 한동안 말도 안 걸더니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러게 왜 메일을 받고도 신현우를 가만뒀냐고 따지려다, 귀찮은 싸움만 될 것 같아서 단념했다.

“학교생활은 할 만하냐.”

등 뒤에서 들린, 쉰 듯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할 만하냐고? 일부러 제 화를 돋우려고 작심한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아까처럼 무시하고 지나칠 법도 했지만, 울분이 쌓일 대로 쌓인 저에게 아버지가 건넨 말은 일종의 도화선이 되었다.

“알면서 물으세요?”

매일, 어쩌면 매시간 임 실장에게서 저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다면 모를 수가 없다. 보호를 명목으로 붙여진 아버지의 수하들 틈에서 투명 인간처럼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이 다인 제 생활을. 길을 걸을 때마다 제게 향하는 이목을 애써 회피하고자 고개를 떨구는 제 모습을.

“아니면 제 입으로 직접 말하게 해서 치욕이라도 줄 생각이신 거예요?”

“예민하게 굴지 마. 이런 일로 에너지 소모하기 싫다.”

“안 예민하게 생겼어요? 절 시한폭탄이라도 된 것처럼 다루는데.”

갈수록 저를 포위하는 경호원의 수가 늘어만 갔다. 스캔들 이후로 누나가 붙여 준 수만 해도 포화 상태였는데, 지금은 그 배가 됐다. 대통령도 이런 호사를 누리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부의 상징처럼 느껴질 요소가 제겐 족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알아서 입 닫고 있을 테니까 동물원 원숭이처럼 만드는 거 그만두세요. 이상한 소문만 늘잖아요.”

“그럼 너 혼자 다니게 놔두란 말이냐?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어떻게 알고.”

상만이 컵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으며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날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대처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호가 맞서듯 흔들림 없이 상만을 직시했다.

“저더러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아세요? 돈 많은 티 내는 거 작작 하라고 그래요. 과보호하는 거 보면 추문이 사실인 게 틀림없다면서요. 아버지가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거, 모르시겠어요? 진짜 제가 걱정되셨으면 애초에 경호원을 붙이지 마셨어야죠!”

그들은 안 들릴 줄 알고 소곤거렸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말이라도 본인에 관한 것이라면 귀에 들어오는 줄은 몰랐을 거다. 저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못 들은 척 넘겼지만 저를 향한 부정적인 표현들은 무의식 속에 박혀 밤마다 떠오르곤 했다. 이런 입장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내가 믿길 바라다니.

“남자 만나는지 단속하려고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감시를 붙여 뒀으면서, 지금은 절 위해서 경호원을 붙였다는 말을 믿으라고요. 아버지라면 그럴 수 있겠어요?”

“너 이 자식,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는 없는 거야? 꼭 옛날 일까지 들춰서 속을 뒤집어 놔야겠어?”

괜한 싸움 일으키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뒷말을 붙이는 상만의 언성이 높아져 있었다. 과거의 일까지 들먹이며 보란 듯이 제 화를 키우는 진호가 제 자식이지만 얄미웠다. 내 자식이라서 분노가 자제가 안 되는 건가. 홧홧해지는 목뒤를 쓸며 상만이 열을 식히고자 노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거 없잖아요! 똑같이 절 못 믿으시는데. 아버지가 제 말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신 적 있으세요? 남수영이랑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해도, 신현우가 장차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해도, 흘려듣고 내키는 대로 한 건 아버지잖아요!”

“매번 네 위치를 잊는 것 같은데, 넌 AE의 공식 후계자다. 네가 본분을 잊고 남자나 만나고 다니고, 온갖 물의를 일으키고 다니는데 뭘 믿고 맡긴다는 거냐.”

상만이 커지는 음성을 억누르며 찬물로 마른 입을 적셨다. 이슈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매일 밤을 지새우며 대책 회의를 하는 내 신세를 네가 아느냐고 버럭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어서 뻑뻑한 미간만 주물렀다. 피로가 덤으로 늘어났다.

“후계자…….”

후계자 같은 거 바란 적 없다고 외치고 싶었다. AE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원하는 일이나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털어놓고 싶은 욕망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진호는 혀끝에 맴도는 문장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다.

이런 말을 했다간 아버지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시 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내뱉을 수가 없다. 제 실수 때문에 담임 선생님이 직장을 잃었던 것처럼 제 곁의 누군가가 또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그 누군가가 짠돌이가 된다면, 상처의 원흉이 다름 아닌 저라는 사실에 죄책감을 못 견딜 것 같아서. 담임 선생님의 환했던 미소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것처럼.

나 때문에 수영이 위험에 빠진다면. 그 비좁은 옥탑방에서마저 쫓겨나고, 새내기 때처럼 한강 바닥에서 노숙이나 하고, 가족이 있는 고향에도 못 돌아가고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야 한다면.

눈앞이 아찔해진 진호가 손바닥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를 위해 비난 여론까지 뒤집어써서 이미 나락인데 이보다 더한 나락을 선사한다고?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었다. 저는 이미 수영에게 빚을 질 대로 졌다. 진호가 아직도 익명의 군중들에게 야유를 받고 있을 수영을 떠올리며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분을 삭였다.

“네. 제가 처신 잘못해서 물의 일으켰어요. 됐어요? 남자로 태어난 주제에 남자 좋아해서 질 나쁜 애인 사귀었다가 이 꼴 냈고요, 대단한 AE 제약의 후계자인 주제에 경호원 관리도 못 해서 회사 이름에 먹칠할 사진도 남겼어요. 근데 어쩌죠? 아버지 아들은 태생이 이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럴 작정인데.”

하지만 가만히 물러설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후계자로서의 저를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저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남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제 성향이라든지, AE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진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갈망이라든지.

“계속 그러고 다니겠다고? 안 원장 딸이랑 만난다는 건 거짓말이었던 거냐?!”

상만이 혈압이 오른 듯 기어이 목뒤를 붙잡고 말았다. 입에 거품이라도 물 듯한 기세였다. 진호가 체념한 듯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상만을 바라봤다. 아버지는 야구장에서 수영과 입 맞춘 것 때문에 본가로 끌려왔던 그날과 달라진 게 손톱만큼도 없었다. 끝나지 않는 대화의 도돌이표도 지긋지긋했다.

“세상에, 여보. 무슨 일이에요? 웬 고함이 들려서 내려와 봤더니.”

허리가 뒤로 꺾인 채 얼굴이 시뻘게진 상만을 보고 놀라서 뛰어오던 중년의 여자가 진호를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진호는 여자를 향해 흘긋 눈길을 주더니 여자가 내려왔던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와 서로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건 이 집에서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아줌마까지 마주치다니, 최악이다. 성급히 계단을 오르던 진호가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물을 들이켜고 있는 상만을 향해 상체를 틀었다.

“아까 물어보신 거, 답해 드릴게요. 지선 씨한테 제가 거짓말하자고 그랬어요. 만나는 척하자고. 그리고 이거 답한 김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버지 마음대로 쥐고 흔드셔도 남수영한테는 그러지 마세요. 걘 정말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그리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

“너…….”

삿대질하며 호통을 치려던 상만의 동공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잘게 흔들렸다.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선 아들의 얼굴은 제가 일체 뒤집어쓰겠다던 수영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설마. 정수리를 맴돌던 열기가 차게 식는 것을 느끼며, 상만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 * *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뒤에도 검은 정장의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수업을 들은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하나 바뀐 게 있다면, 한시라도 본가에 일찍 돌아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바로 방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임 실장이 실내화로 갈아 신자마자 계단으로 걸어가는 진호를 따라가며 물었다. 진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단을 올랐다.

“네.”

본가에 일찍 오는 것은 제 방에 일찍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방에 들어가 문이 닫히고 나서야, 비로소 할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여사님께 간단한 식사라도 부탁드릴까요? 피곤해 보이십니다.”

바삐 움직이지만 힘이 빠져 삐걱거리는 뒷모습을 보던 임 실장이 가정부를 부르고자 따라가던 발을 멈췄다. 진호가 뒤를 돌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녁은 이따 먹을게요.”

거절하는 진호의 눈 밑이 검었다. 쓸 만한 자료를 찾느라 며칠째 밤을 새웠더니 눈앞이 뿌옜다. 강의 시간에도 졸았고, 차를 타고 본가로 돌아오는 중에도 잠을 잤지만 쌓인 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는 반드시 꽉 막힌 현실을 뚫어 낼 열쇠를 찾아내야 했다.

“알겠습니다.”

임 실장이 더 물어보지 않고 묵묵히 진호의 방 앞까지 경호했다. 언제나 칼같이 각이 맞춰져 있던 셔츠가 후줄근했다. 방에서 노트북으로 대체 뭘 하기에. 머릿속 진호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모습이 임 실장에겐 생소했다.

걱정 같은 다정한 이유는 아니었다. 제게 도련님은 골칫덩어리일 뿐만 아니라 기피 대상에 가까웠다. 담당만 하면 사고를 치니 좋은 감정이 생길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간다며 속이고 도망쳐, 여장한 채로 몰래 아파트에 침입해, 하물며 남자랑 만나다가 제가 오래도록 뼈 빠지게 일하면서 자부심을 키워 왔던 AE의 명성까지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상무님은 도련님의 어떤 부분이 예뻐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시는지. 저 혼자 경호할 때는 노트북을 써도 눈감아 달라며 명령 같은 부탁을 했다. 제 동생이었으면 진작에 집에서 내쫓았을 텐데, 사장님의 지시를 거스르면서까지 동생을 챙기는 상무님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대가로 보너스를 두둑이 받았으니 군말하지 않기로 했다. 일은 정확히 하되 융통성 있게. 제 나름의 직업 철학이었다.

“이거, 떨어뜨리셨습니다.”

진호가 팔에 걸친 재킷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떨어지자, 임 실장이 바닥에서 주워 건네주었다. 하얀색의 에나멜 배지였다.

“아. 고마워요.”

진호가 쳐져 있던 눈꼬리를 세우며 다급히 배지를 받았다. 흠집이라도 났을까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안심했는지 눈매를 늘어뜨렸다. 지켜보던 임 실장이 눈가를 좁혔다. 대체 얼마나 아끼기에 저렇게 애지중지하다 못해 허구한 날 가슴에 달고 다니는 걸까. 이것 또한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제가 맡은 일은 도련님의 행동 감시와 보호뿐이었으니, 그 외의 사적인 사항은 해당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융통성보다 정확성을 택한 임 실장이 안내하듯 방문을 열었다. 진호가 방으로 들어가고, 곧 문이 닫혔다. 임 실장은 집 지키는 개처럼 진호의 방문 앞에 섰다. 끝나지 않는 업무의 연장선이었다.

한편, 방 안으로 들어선 진호는 안쪽에 별도로 마련된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갔다. 미닫이문을 열어 재킷을 옷걸이에 건 진호가 쥐고 있던 배지를 액세서리 진열장에 조심스럽게 두었다. 은은한 조명에 미술관 로고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샬베스타의 전시회에 갔을 때 수영이 달아 준 배지. 그것 이외에도 다른 의미가 있는 배지였다.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수사라도 하듯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는 사람들과 동의도 없이 제 짐을 여행용 가방에 담는 사람들로 넓은 집 안이 득시글거렸다. 이번엔 아버지가 무슨 일로 본가에 데려가려는 것일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무리가 보였지만, 물음표로 가득한 두뇌는 각막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형, 형!」

한 박자 늦게 소리의 방향을 찾은 시야에 수영이 들이찼다. 각막이 인정할 대상을 찾은 것처럼 수영의 단호한 표정이 똑똑히 눈동자에 새겨졌다. 잘 듣고 있다는 뜻으로 눈을 깜빡이는데 수영이 제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상무님께도 연락해 봤는데, 같이 가는 건 안 된대요. 뭔지는 몰라도 내가 사장님에게 밉보였나 봐요.」

무언가를 참는 듯 수영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가 펴졌다. 속이 시끄러운 건 짠돌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엔 없네요.」

짧은 숨이 머리 위를 스치더니, 왼쪽 가슴에 수영의 손이 닿았다. 잠시 후, 손이 떨어진 자리에 동그란 배지가 매달려 있었다.

「이게 뭔지 알죠? 나 못 보는 동안 상시로 하고 다녀야 해요.」

물끄러미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건 너를 보는 중에도 할 수 있잖아. 제 심정은 모르는지 평상시처럼 평온한 수영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제가 떠나는 건 일개 대학생일 뿐인 짠돌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보낸 가드들이 들이닥쳤을 때, 이게 무슨 짓이냐며 따져 묻는 저와 반대로 수영은 침착하게 영문을 물었다. 둘 다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어차피 제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물건 다 빼셨으면 내려가시죠.」

임 실장이 곁으로 성큼 다가오며, 수영에게 나가라고 고갯짓했다.

「잠시만요.」

수영이 양해를 구하듯 손을 들더니, 저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알겠죠? 형. 학교에서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당분간 본가에서 편히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수영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지만, 마음은 정반대였다. 학교에서 보면 뭐 해. 임 실장이 접근도 못 하게 한다는데. 이런 속마음을 알았는지 수영이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배지 위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멀어졌다.

「형.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어떻게든 구해 낼 거란 거 알죠?」

당부의 말이 이어졌지만 아쉬움에 한숨만 흘러나왔다. 갈 수밖에 없는데 어쩌겠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한 듯 수영이 바닥에 놓여 있던 보따리를 양손에 쥐었다.

‘경 마포 갈비 개업 축’

이 집에 수영이 발을 들인 첫날, 저게 뭐냐며 눈살을 찌푸렸었다. 그런데 이젠 저 촌스러운 파란 글씨마저 그리워질 참이었다. 아직 헤어짐의 인사도 나누지 않았는데 덜컥 겁이 났다. 몸의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다던데, 짠돌이와 지금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남수영과 멀어지면, 나는 괜찮을까. 그리고 남수영은, 괜찮을까.

「혹시나 내 걱정은 말고요!」

임 실장에게 저지당해 로비까지 내려가지도 못하고 현관문에서 배웅하는 저에게, 수영이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인솔을 명목으로 양옆에 붙은 경호원들 사이에 낀 수영은 단단하면서도 여유로웠다. 그 시원한 미소가, 힘차게 흔드는 손이 꼭 저를 안심시키기 위한 표현 같아서 임 실장이 강제로 문을 닫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도련님도 짐 싸서 내려가시죠. 자택에서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솟아오르는 불안감을 누르며 실장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아주 잠시만 짠돌이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복학 전에는 혼자서도 잘 지내지 않았던가. 자주 못 보는 건 아쉽지만, 학교에서 보면 되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면 다시 같이 지낼 수 있겠지.

안일하게 여겼다. 임 실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서재에서 아버지가 저와 수영이 뒹구는 동영상을 보여 주기 전까지.

배지를 하고 다니는 건 나름의 의리이자 위안이라고 할까. 진열장을 아련하게 쳐다보던 진호가 드레스 룸을 나갔다. 수영이 집을 나가는 순간에 이걸 건네준 건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이젠 학교에서도 수영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렇게라도 하면 수영과 함께 있는 듯해 마음이 편해졌다.

진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금장치가 설치된 서랍에서 노트북을 꺼내더니 책상 위에 올렸다. 책상 모서리에 배가 닿도록 의자를 당겨 앉은 뒤 인터넷을 켰다.

[남수영]

자동으로 검색창에 수영의 이름을 넣었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내용이 주르륵 떴다. 여전한 악플 세례와 선동 글엔 발끈했지만 이제는 빨리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이 글 중에 보석이 있을 거다. 진호가 눈을 스크린에 바짝 대며 꼼꼼히 훑었다. 페이지가 1에서 10, 10에서 20, 20에서 50까지 넘어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을 때쯤, 시계를 봤다.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거의 90이 넘은 페이지엔 제가 찾는 남수영에 대한 얘기는 없고 동명이인에 대한 글만 나오고 있었다. 간식이라도 먹을까. 출출함에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을 때, 눈에 확 들어온 문구가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선물이라고 하네요. 남수영 학생, 고마워요. 애들도 정말 좋아…… 수영이 형아 고마워!!!……]

이런 게시글도 있었나? 검색 결과에 미리 보기로 뜨는 글의 일부를 읽던 진호가 주저 없이 제목을 클릭했다. 어느 SNS 계정으로 작성한 게시물이었다. 공중에 떴던 엉덩이가 의자로 떨어졌다. 이거다. 사진이 함께 첨부된 글을 쭉 읽어 내려가는 진호의 눈망울에 생기가 돋았다. 급히 페이지를 스크랩한 진호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도련님?”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리자 밖에 있던 임 실장이 놀란 눈으로 진호를 훑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누나 언제 오는지 알아요?”

다급해진 진호가 평소보다 빠르게 말을 뱉었다.

“아니다. 지금 누나한테 전화 좀 걸어 주세요.”

“급한 일이십니까?”

“엄청. 엄청 중요한 일이에요.”

진호가 심각한 어투로 말하며 임 실장을 바라봤다. 뭔가 찜찜한데. 여러 번 진호에게 덴 경험이 있던 실장은 고심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절했다가 혹시라도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면 그 결과를 책임질 사람은 오롯이 저였다. 통화 연결음이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혜린이 전화를 받았다.

“상무님. 다름이 아니라…….”

“줘 봐요. 직접 얘기할게요.”

진호가 제게 달라며 손을 뻗었다. 임 실장이 미덥지 않은지 진호의 눈을 빤히 보더니 핸드폰을 건넸다.

“여기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제가 보는 데서만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알겠다며 핸드폰을 받아 든 진호가 주변을 살폈다. 가정부 이모들은 모두 퇴근하고 아버지는 야근인 데다, 아줌마는 위층에 있어서 사방이 고요했다.

“누나. 부탁할 게 있어. 희망 보육원에 연락 좀 넣어 줘.”

목소리를 낮춰 작게 말하자, 바쁜데 무슨 일이냐는 혜린의 대답이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거기에 성원이라는 애가 있거든? 걔를 만나 봐야겠어. 진짜 중요한 일이야.”

사장님 모르게 또 뭘 하려고? 이 이상 일 키우면 수습 불가야. 수화기 너머로 혜린이 짜증을 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현재로선 이것밖엔 희망이 없었다.

“이것만 도와주면 다시는 부탁 안 할게. 응? 누나-”

젖 먹던 힘을 쥐어짜 내서 애처롭게 혜린을 부르자, 혜린은 알겠으니까 이제 부탁하지 말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임 실장에게 돌려주며 혀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살다 살다 누나에게 아양을 떨다니. 남수영 하나 살리겠다고 평생 안 하던 짓도 하게 된다. 진짜 이 새끼는 만나면 나한테 욕 한 바가지 들어야 해. 진호가 괜히 속으로 투덜대며 임 실장 앞에 검지를 들어 보였다.

“방금 들은 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알겠죠?”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임 실장이 딱 잘라 말하며 사양했다. 저에게는 진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장님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일의 정확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네요, 도련님. 임 실장은 안타까운 듯 -사실 그렇게 안타깝진 않았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저는 사장님께 고용된 직원이라서, 사장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월급 다섯 배로 드릴게요.”

“하지만 언제나 사장님 뜻만 따를 순 없죠. 도련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회사의 노예일 뿐인 월급쟁이에게 확실성이고 융통성이고 무슨 상관이랴. 그저 돈 많이 주는 게 최고지. 순식간에 직업 철학을 땅에 내던진 임 실장이 ‘다섯 배’라는 소리에 눈이 돌아가려는 것을 자제하며 침착하게 순응했다.

“고마워요. 누나한테 꼭 얘기할게요.”

실장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을 바꾸니, 저를 따른다는 말을 여차하면 잘못 들은 것으로 여길 뻔했다.

안도한 진호가 방으로 들어갔다. 돈 앞에서 태세가 급변하는 어디의 누군가가 떠올라 입가가 올라갔지만, 찰나였다. 문제를 타개할 열쇠를 얻었으니, 문을 열 차례였다. 겨우 시작이었다.

* * *

“보육원으로 바로 출발하죠.”

강의가 끝난 후, 차에 탄 진호가 뒷좌석에 앉자마자 운전석에 앉은 임 실장을 재촉했다. 오전에 임 실장을 통해서 누나가 알려 주기를, 희망 보육원 측에 연락해 비밀리에 성원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필요한 대화만 나누고 후딱 본가로 돌아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동행자는 임 실장 하나. 인원이 많을수록 말이 새어 나갈 입도 많아지므로, 대외로 혹은 아버지에게 이 만남이 전해질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알겠습니다.”

임 실장이 군말 없이 시동을 걸었다.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기실 임 실장은 마음이 심히 심란한 상태였다. 역시 상무님과의 통화를 허락하는 게 아니었나. 통화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도련님의 수상쩍은 비행에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이거 영 감이 안 좋은데. 이러다 사장님한테 걸리면 잘리는 거 아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도련님이 이번에도 사고를 칠 것 같은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성원이라는 애를 만나면 어쩌실 겁니까.”

“가 보면 알아요.”

가서 알 것 같으면 지금 알아도 괜찮은 것 아닐까요? 차마 이렇게 반격할 수 없었던 실장은 울화를 삼키며 조용히 핸들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저보다 한참 어린 도련님에게 끌려다니는 제 신세가 말이 아니었다. 월급의 다섯 배라는 악마의 속삭임에 홀려 직업 철학을 팔아 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작게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운전하며 거치대에 올려 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실장이 순간 브레이크를 밟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차창으로 옮겼던 눈이 재차 핸드폰을 향했다. 아무리 봐도 제가 본 숫자가 맞았다. 이게 도대체 얼마야. 월급으로 들어온 액수가 자그마치 원래의 열 배였다. 이 말인즉슨 저는 이제 도련님과 한배를 탔다는 뜻이었다.

“알아서 잘해 줄 거죠?”

뒤에 앉아 있던 진호가 마치 알고 있던 것처럼 물었다.

“네. 이 일에 대해선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네. 낭패라는 듯 차를 모는 실장의 눈은 초연했다. 열 배면 말 다 했지. 이만큼 받으면 어쩔 수가 있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래 못 본 딸이랑 마누라한테 비싼 선물이나 해 줘야지. 결국에는 직업 철학 따윈 중요하지 않다며 결론을 내린 실장은 간만에 얻은 행운을 원 없이 즐겨 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익숙한 골목을 지나 도착한 보육원 정문 앞에는 전에 성원을 데려다줬을 때 봤던 젊은 선생이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진호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에 화답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을 텐데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수영 씨한테 도움이 된다면 저희도 좋죠.”

선생이 생글 웃으며 진호를 반겼다. 근래에 사람들의 경계하는 시선만 잔뜩 받다가 호의적인 대우를 받으니 기분이 한결 포근해졌다.

“안에 들어가시면 성원이가 있을 거예요.”

앞장서서 본관 안으로 안내하는 선생을 임 실장과 함께 뒤따랐다. 깨끗한 외관처럼 내부도 신축처럼 말끔했다. 플로텍스로 된 폭신한 복도를 지나 끝 방에 다다르자 선생이 발을 멈췄다.

“여기예요.”

문고리를 잡은 선생이 아래로 내리며 문을 열었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성원이도 스캔들에 대해 알고 있을까? 어린아이니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나에 대해 안 좋은 말들이 떠돌고 있는 건 알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협조를 받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아이를 다루는 게 어려웠던 진호가 성원을 구슬릴 조건을 생각했다.

“성원아? 성원이 보고 싶다던 진호 형 왔어.”

문을 열며 머리를 방 안으로 내민 선생이 상냥하게 성원을 불렀다. 서서히 열리던 문이 우뚝 정지했다.

“얘가 어디 갔지? 방금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애가 사라졌나? 진호가 급히 선생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놀이방으로 보이는 그곳엔 아이들이 갖고 놀기 위한 장난감과 동그란 책상, 작은 의자만 놓여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살펴보던 선생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원장님. 성원이가 또 나갔나 봐요.”

이마를 짚은 선생이 흔한 일인 듯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호가 옆에 서 있던 실장을 지나쳐 문밖으로 달려갔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먼저 나가서 찾아보려고요!”

진호가 뒤돌아보며 재빨리 뛰어갔다. 전화를 마친 선생에게 잠깐 나가 보겠다고 간단히 전한 임 실장이 진호를 쫓아갔다.

“도련님! 어디 있는지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저만치서 복도를 지나치고 있는 진호와 거리를 좁힌 실장이 뒤에서 붙잡았다. 멈춰 선 진호가 잡힌 팔을 빼내며 실장에게 손을 내저었다.

“실장님은 안에서 찾아봐 주세요. 전 밖에서 찾아볼게요.”

정문으로 나가려고 방향을 튼 진호를 실장이 앞에서 저지했다.

“애 찾는 건 경찰에 맡기시고 도련님은 저와 같이 계셔야 합니다.”

제 앞을 가로막은 손을 내려다보던 진호가 답답한 듯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경호 같은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성원이가 멀리 가기 전에 찾아와야 했다. 방에서 나간 지 얼마 안 됐을 테니 조금만 힘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실장님. 자녀 있으세요?”

“예? 딸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뜬금없는 질문에 실장이 당황스러운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진호가 실장을 짙게 응시했다.

“딸이 실종됐다면 실장님은 어떻겠어요?”

“이거랑 그거는 다른 얘기 아닙니까.”

“저는 지금 그래요. 제 애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절박하다고요.”

진호가 매달리듯 실장의 팔뚝을 붙들었다. 성원이라는 아이는 제게 있어 우물 바닥에 내려온 동아줄과 같았다. 힘겹게 찾은 하나뿐인 열쇠를 허무하게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실장의 팔이 그 동아줄이라도 된 것처럼 움켜쥔 진호가 현재의 제 심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실장님 딸이라면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깝지 않겠어요?”

임 실장은 고민에 휩싸인 듯 혼란스러운 눈으로 진호를 훑었다. 어쩐지 도련님이 달라 보였다. 돈으로만 해결할 줄 아는 철부지로 여겼는데, 의외로 어른스러운 면도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일의 정확성과 상황에 따른 융통성 중에서……. 마지막 남은 직업 철학을 긁어모아 고심을 거듭하던 실장이 결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단, 바깥에서 찾아보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도련님은 원내에서만 찾아보세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안에서만 계셔야 합니다.”

“네.”

실장을 향해 진호가 살짝 웃더니 복도 중앙의 계단으로 달려갔다. 이게 맞는 걸까. 삽시간에 멀어진 진호를 보며 임 실장이 핸드폰을 꺼냈다. 또다시 도련님의 꾐에 넘어가 버렸다. 이번엔 어떠한 물질적인 대가도 얻지 못했지만, 올해로 다섯 살이 된 제 딸이 아른거린 덕분일까. 이상하게 진호를 탓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철부지 도련님을 마냥 믿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혜린에게 보고 메시지를 전송한 임 실장이 건물 출입구로 향했다.

“성원아!”

“성원아- 어디 있어-?”

진호가 계단으로 올라갔을 때는 보육원 교사들이 다 함께 성원을 찾고 있었다. 그들을 잡고 물어보니, 각 층의 모든 방을 뒤지고 있는데 성원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 건물 안에는 없는 건가. 일전에 야구장까지 나왔었던 전적을 고려하면 보육원 밖으로 나갔을 확률이 높았다. 진호는 내부를 선생님들께 맡기기로 하고, 저는 건물 주변이라도 탐색해 보려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본관을 나오니 운동장은 뛰어노는 아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진호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기숙사 건물로 달려갔다.

“아! 아저, 읍, 이거……!”

본관 앞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는데, 건물 뒤편의 모퉁이에서 비명이 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아이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진호가 방향을 돌려 소리가 들렸던 뒤편으로 발을 옮겼다.

“성원아?! 거기 있어?”

“누구, 저 좀 구, 구해 주세요!”

구석으로 갈수록 또렷해지는 목소리에 진호가 본관 뒤편의 풀숲을 뚫고 보육원 담장을 따라 뛰었다.

“성원아, 어디야! 지금 가고 있어!”

“형아! 여기, 읍!”

내가 보이는 건가? 근접했다는 느낌에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덤불을 헤치던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려던 때였다.

“잠시만 기다…….”

급작스럽게 뒷덜미가 낚아 채였다.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옷이 붙들린 채로 몸이 돌려졌다.

“어디긴. 여기 있지.”

“시, 신현우?”

이 새끼가 왜 여기 있지? 스캔들 이후로 숨어 있던 것 아니었나? 상상조차 못 한 신현우의 등장에 머리가 어지럽던 찰나, 젖은 수건이 코와 입을 덮었다. 짙으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비강으로 흘러들었다. 지독한 안개가 낀 것같이 눈앞이 어둑하게 흐려졌다.

“이게…….”

상황을 파악할 정신조차 없었다. 아래로 기울어지는 시야로 두 개의 검은 형태가 한 몸이 되어 흔들렸다. 먹먹해진 귀속으로 ‘형아!’ 하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신현우가 성원이를 빼돌린 건가? 짧은 의문을 끝으로 생각이 끊어졌다. 코를 찌르던 정체불명의 냄새도 점차 아득해졌다. 깊은 잠에라도 빠진 것 같았다.

* * *

“……안 떠? 이 새끼…….”

암흑뿐인 꿈속에서 신현우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떴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예의 비열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신현우의 낯짝이었다.

“깼어? 아쉽네. 너 계속 안 일어나면 깰 때까지 때리려고 했지.”

혼자 신나서 킬킬대는 신현우 뒤로 철골 구조가 훤히 보이는 콘크리트 벽이 보였다. 폐건물인가. 주변을 살피려 바닥에 늘어져 있던 허리를 세우는데 팔이 뒤로 젖혀진 채 움직이질 않았다. 케이블 타이로 꽁꽁 묶인 제 발목을 보니 두 손도 같은 것으로 묶여 있는 듯했다. 앉기라도 해 보려고 꿈틀거리는데 앞에 서서 내려다보던 신현우가 구두 앞축으로 배를 툭툭 쳤다.

“버둥거려도 안 될걸. 그냥 포기해.”

“성원이는…… 어쨌어.”

강당처럼 넓은 내부를 둘러보던 진호가 현우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번들거리는 눈가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애새끼? 나야 모르지.”

신현우가 무릎을 굽혀 제 앞에 쭈그려 앉았다. 매캐하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강해지더니 퀭해진 신현우의 상판이 가까워졌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지 듬성듬성 자란 수염으로 입 주변이 거뭇했고, 셔츠와 바지에 묻은 얼룩은 오래되어 색이 바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라도 성원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봐 두려워진 진호가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글쎄. 네가 잘 따라 주면 알 수 있을지도.”

설마 성원이도 같이 데려온 건가? 이 건물 안에는 없는 것을 보면 다른 데 있을 수도 있다. 대체 애를 어떻게 한 거지? 다급함에 주위를 두리번대자, 허파에 구멍이라도 뚫린 사람처럼 신현우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려댔다.

“궁금하면, 진호야. 반항 따위 할 생각은 일찍 접는 게 좋아.”

서늘한 손이 뺨을 쓸었다. 잠깐 닿는 것조차 싫어서 진저리가 쳐졌다.

“이 손 놔!”

힘겹게 머리를 흔들어 손을 떼어 내려는데, 신현우가 뒷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머리털이 뜯어지는 듯한 아픔과 함께 뻣뻣한 고개가 위로 꺾였다. 며칠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분노를 숨긴 눈동자가 저를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새끼야. 지금 사태 파악이 안 돼? 씨발. 쌓아 온 정이 있어서 봐주려고 해도.”

신현우가 머리채를 잡은 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충혈되어 발개진 눈과 그 속의 형형한 독기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자동 반사로 구역질이 났다. 괴로웠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지지 않으려 바짝 세웠던 눈꼬리가 사시나무 떨듯 바들거렸다.

“씨발……. 평생 병원 신세 지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으윽!”

잡아당겨졌던 머리가 바닥으로 밀쳐졌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찍힌 이마가 쓰라렸다. 무심한 눈으로 저를 훑던 신현우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치익, 하고 라이터가 켜지더니 담배 끝에 불이 붙었다. 지독한 냄새가 골을 울렸다. 나를 납치해서 어쩌려는 거지? 초조함을 숨긴 채 신현우를 향해 눈을 치켜뜨자, 제 얼굴에 대고 연기를 뿜었다. 연기를 듬뿍 마셔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캑, 캑!”

“가만히 있으려니까 뒷구멍이 가려워서 못 참겠어?”

진호의 멱살을 잡은 현우가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안 그래도 박아 줄 테니까 안달 내지 말고 기다려.”

담배를 입에 문 신현우가 왼손에 핸드폰을 든 채 오른손으로 제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뜯듯이 풀어냈다.

“뭐, 뭐 하는 거야?!”

선득한 손길에 허리를 뒤틀며 버둥거렸다. 신현우는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너 따먹는 거 찍어서 남수영 그 새끼한테 보내 주려고.”

남수영이라고. 신현우의 끔찍한 협박보다 그 이름에 의식이 반응했다. 그 순간 하얀 플래시가 얼굴을 비췄다. 눈이 부셔 눈살이 절로 찡그려졌다.

“오랜만이네. 그지?”

한 손에 핸드폰을 들어 가슴께를 비춘 현우가 진호의 셔츠를 어깨 뒤로 넘기며 입맛을 다셨다. 진호는 당혹감에 떨리는 눈빛을 읽히지 않으려 미간에 힘을 주었다.

“확실히 꼴리긴 하네.”

신현우가 반쯤 드러난 가슴팍을 문지르자, 살갗 위를 개미들이 타고 오르는 듯이 께름칙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하지 마……!”

참을 수 없는 혐오감에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웅크렸다. 억지로 가두어 뒀던 악몽들이 쏟아지는 듯했다. 기억이 덧씌워져 섬뜩해진 손짓이 배를 가르듯 아래로 향했다. 가까스로 들고 있던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대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현실이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저 때문에 성원이는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수영은 누명을 벗지 못한 채 신현우에게 농락당할 처지에다, 저는 곧 신현우에게…….

턱이 덜덜 떨렸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의지가 불결한 촉각으로 뒤덮였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갈 곳 없이 흔들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재킷에 달려 있던 배지가 중력으로 늘어져 덜렁거렸다. 그래. 이게 있었다. 수영이 배지를 달아 준 뒤 제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형.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어떻게든 구해 낼 거란 거 알죠?」

이어지는 당부에 한 귀로 흘려들었던 말. 그 말은 단순히 저를 안심시키기 위한 약속이 아니었다. 잊고 있던 사실이 비관적인 사고의 흐름을 끊었다.

공포에 떨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MT에서처럼 수영이 와 줄 것을 믿으니까. 언젠가부터 심장에 뿌리박힌 수영에 대한 신뢰가 없던 용기를 끌어 올렸다. 짠돌이는 반드시 저를 찾아낼 테니, 수영이 오기 전까지 저와 행방을 알 수 없는 성원의 신변은 오롯이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제겐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우선 시간을 벌자. 진호가 묶인 팔로 바닥을 짚은 채 등을 세웠다.

“잠깐만.”

“수작이라도 부리려고?”

배를 훑던 손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릿한 통증에 얕은 신음을 흘리며 진호가 현우를 향해 눈을 홉떴다.

“당할 때 당하더라도 이유는 알고 싶어. 왜 이러는 거야?”

“왜냐고? 씨발. 그걸 몰라서 묻냐?”

핸드폰으로 허리께를 비추고 있던 현우가 진호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남수영 그 새끼가 별 좆같은 사진을 들이밀면서 지랄하잖아. 나라고 당하고만 있으라는 법 있어?”

가까이서 보니, 저를 죽일 듯이 쳐다보는 동공이 초점을 잃은 채 흔들렸다. 이 새끼 지금 정상이 아니야. 미묘하게 빗겨 가는 시선을 마주한 채 진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일을 대비해 반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기분 나쁜 건 이해해.”

“이해?”

검지와 중지 사이로 옮겨 간 담배가 타들어 가 새까만 재를 떨어뜨렸다. 경기라도 일으킬 것 같은 신현우의 눈이 저를 향하는 동안 아주 느릿하게 허리를 틀어 바닥에 늘어져 있던 무릎을 세웠다.

“그렇잖아. 형은 돈이 필요했을 뿐인데.”

아버지가 보여 줬던 메일이 떠올랐다. 그딴 영상을 보내 놓고 10억을 요구했었지.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건지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났다. 알면 알수록 역겨운 인간에게 공감해 주기란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거부감이 일었지만,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인내심을 붙들었다.

“뭐야. 동정이라도 한다는 거야? 네 주제에?!”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진 신현우가 두 손으로 멱살을 잡았다. 역효과인가. 당겨진 셔츠에 목이 졸린 진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 너머로 보이는 출입구에 눈길을 두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 때문에 삽질한 게 얼만지 알아? 씨발. 오늘만 해도 그래. 새벽부터 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느라 하루가 다 갔어. 그게 단 줄 알아? 네 애비 추적 피해서 개같은 반지하에서 내가, 씨발……. 곱씹을수록 꼴받네.”

멱살을 쥔 손이 위로 당겨졌다. 공중에 뜬 어깨가 그네처럼 흔들거렸다. 숨이 점점 막혀 왔다.

“내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곱게 봐주려고 했는데, 웬만큼 때려야 직성이 풀리겠어.”

“큭, 때려…….”

목이 졸린 진호가 배 속의 공기를 긁어모아 소리를 냈다. 적잖이 당황했는지 팽팽히 당겨졌던 셔츠의 깃이 느슨해졌다. 목소리가 쉽게 터져 나왔다.

“때려 보라고.”

“뭐, 씨발.”

돌연 초연해진 진호의 태도에 현우가 움찔거렸다. 진호가 세운 무릎에 힘을 주며 현우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으면.”

“윽!”

밭에서 무가 뽑히는 것처럼 신현우가 위로 쑥 딸려 올라갔다. 이때다 싶었던 진호가 무릎을 들어 두 발로 현우의 배를 가격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현우가 저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입구에서 달려와 현우를 들어 올린 누군가가 떨어져 나간 현우를 제압했다.

“뭐야. 이 새끼, 어떻게 온 거야?!”

수영에 의해 포복 자세로 바닥에 짓눌린 현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현우의 두 팔을 뒤로 꺾어 밧줄로 묶은 수영이 머리끄덩이를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닥쳐, 씨발. 맞아 죽기 싫으면.”

살기에 가까운 눈빛에 겁을 먹은 현우가 어깨를 움츠렸다.

“뭐,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억!”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목청을 찢을 듯한 비명이 폐건물 안을 울렸다. 피가 흐르는 입을 청 테이프로 막은 수영이 진호에게 곧장 달려갔다. 수영의 어깨 너머로 바닥에 내팽개쳐진 신현우가 버둥대며 발악하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다 챙겨 왔는지 호주머니에서 커터 칼을 꺼내 든 수영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손목을 묶은 케이블 타이를 끊었다. 곧이어 발목에도 해방감이 찾아들었다. 살갗이 쓸려 빨개진 양 손목이 눈에 들어온 수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제 왔어요.”

진호가 타박하듯 수영에게 농담을 건넸다. 수영은 아무런 말 없이 제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늘 저를 곧게 직시하던 눈동자가 짙은 어둠으로 일렁였다. 진호가 부러 입매를 올려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나름 잘 버텼죠?”

“…….”

“대답도 안 하네. 무안하게.”

어색한 공기에 말이 늘어났다. 그래도 우리,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오랜만에 보는 건데. 왠지 저만 반가운 거 같아서 민망해진 진호가 마른 손바닥을 바지에 비볐다. 냉정히 따지면 아직 상황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도 아니니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니었다. 구출해야 할 또 한 명의 인물이 떠오른 진호가 이마를 번뜩 치켜들었다.

“아, 혹시 성원이……. 윽!”

와락 저를 껴안은 수영 덕에 말이 끊겼다. 등을 감싼 주먹이 놓지 않겠다는 듯 제 옷자락을 감아쥐었다.

“미안해요. 내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려고 다짐했는데…….”

수영의 품에 갇혀 있던 진호의 눈이 커졌다. 이마에 닿은 수영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수영이 애꿎은 주먹만 쥐어댔다.

조금만 빨랐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신현우가 저를 찾아올 거란 오산은 배부른 착각일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옆에 있었어야 했다. 형을 그렇게 쉽게 떠나는 게 아니었는데. 아파트 현관문 틈으로 저를 보고 있던 진호의 불안한 눈이 떠오른 수영이 말을 이었다.

“모두 내 탓이에요. 내가…….”

“됐어요.”

진호가 천천히 수영의 등을 감싸 안았다. 수영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잘못이 있다면 제게 있었다. 저 때문에 수영이 잃은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왔으니까 됐어요.”

다시 본다면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왜 나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버렸냐며 화를 내고 싶기도 했고, 보고 싶었다며 웃어 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진호는 입을 닫았다. 제게 닿고 있는 수영의 체온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만. 이대로 더. 수영의 가슴에 뺨을 기댄 진호가 아늑한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운 감촉, 냄새, 온도가 온몸을 감쌌다.

“도련님!”

멀리서 차량 전조등이 하얗게 건물 안을 비추더니 땅을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손을 놓는 일은 없었다.

* * *

도착한 임 실장은 더러워진 제 행색을 보더니 서둘러 본가로 데려갔다.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알았냐고 물었더니 누나에게서 전달을 받았다고 했다. 수영이 누나에게 위치를 알려 준 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을 보며 어렴풋이 생각했다.

임 실장의 말에 따르면, 애타게 찾았던 성원이는 보육원 뒤뜰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다. 몸이 다친 데 없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다행히 신현우가 해코지한 건 아니었고, 제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한 것 같다고 했다. 신현우는 기절한 성원이를 버리고 저를 폐건물로 끌고 간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쓰레기 같은 새끼.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던 말은 저를 구슬리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때 아예 고자로 만들어 버렸어야 했어. 침대에 누워 있던 진호가 아쉬움에 덮고 있던 이불을 확 걷어 내렸다.

임 실장과 함께 들이닥친 가드들이 신현우를 질질 끌고 갔을 때, 억울한지 막힌 입으로 고성을 지르는 신현우에게 작별 인사로 가랑이 사이를 힘껏 발로 차 주었다. 그것까지는 한 점의 후회도 없으나, 한 대로 끝낸 점이 못내 아쉬웠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전날 그 고생을 겪고도 수영이 깨우는 대로 일어났던 관성 덕에 자연스럽게 일찍 눈이 떠졌다. 지긋지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와 비슷한 시간에 깨어났을 수영이 떠올랐다. 지금쯤 짠돌이는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겠지. 그렇게 추측하며 진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어?”

두어 번 노크한 혜린이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문지르는 진호를 보는 눈에 걱정이 어렸다.

“몸은 어때?”

“자고 나니 괜찮아.”

진호가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누나는 화려한 하루를 겪었던 저를 심려하는 것이겠지만 정작 자신은 감흥이 없었다. 크게 다친 곳도 없고, 계획했던 일도 실행에 옮겼으니 아쉬울 게 있을 리가. 게다가 신현우에게 복수도……. 아차. 남은 게 하나 있었다.

“좋은 소식이 있어.”

혜린의 어조가 한층 밝아졌다. 저를 향해 내밀어지는 핸드폰을 진호가 덥석 잡았다.

“나왔어?”

아버지가 압수했던 제 핸드폰이었다. 누나가 확인해 보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켜진 화면으로 눈짓을 보냈다.

“읽어 봐.”

얼른 밝기를 올려 누나가 미리 켜 둔 창을 확인했다. 어느 유력 일간지의 인터넷 기사였다.

[단독 : ‘AE 동성 스캔들’ 주모자, 국내 유명 대학 교수의 아들로 밝혀져]

마음에 드는 헤드라인이었다. 그 아래로 쓰인 본문을 빠르게 훑었다.

AE 제약의 후계자로 지목된 서진호 씨의 동성연애 스캔들이 거짓으로 판명됐다. 국내 유명 대학 교수의 자녀로 알려진 신 모 씨는 비밀리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당사를 통해 사실 관계를 밝히겠다며 서 씨의 성관계 동영상으로 떠도는 영상을 자신이 고의로 유포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남수영 씨가 너튜브 영상에서 해명한 것이 전부 맞다’며 물의를 일으킨 데에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뜻을 밝혔다. 서 씨를 겨냥해 악의적인 게시글을 작성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신 씨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며 말을 아꼈다. 한편 AE 제약 서상만 사장은 신 씨의 명예 훼손죄 이슈에 대해, ‘명예 훼손죄 고소 여부는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반응이다.

[개충격이다ㅋㅋㅋ 또라이 아님? 왜 그런 영상을 만듦 ㅋㅋㅋㅋ

└ㄹㅇ 인간도 아닌 개쓰레기. 제대로 처벌받았으면.]

[피해자는 실명으로 명시해 놓고 가해자는 신 모 씨? 신상 다 까발려진 서진호랑 남수영은 어떡하라는 거지.

└명문대 커뮤니티에 신 씨가 누군지 추정한 글 있어요. 한번 읽어 보고 오세요.]

[서진호 씨,,, 남수영 씨,,, 그동안 고생.많았습니다,,, 젊은 청춘인 만큼 금방.극복하고,,, 좋은 앞날이,,, 있을.것입니다. 힘내십시오,,,]

경호팀 직원들에게 붙잡힌 신현우는 잘못을 털어놓을 테니 법적 처벌만은 막아 달라고 빌었다. 저는 신현우의 자백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전했고, 아버지는 뜻밖에도 제안을 수락했다. 신현우가 정의의 심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고소하게 되면 재판이 끝날 때까지 저와 수영의 이름이 수시로 인터넷에 오르내릴 것이었다. 저는 이대로 스캔들이 묻히기를 바랐다. 제 뜻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검찰에 고소하는 대신 일간지를 통해 죄를 자백하도록 했다.

기자와의 면담을 마친 신현우는 아버지의 지시로 인도네시아로 보내졌다. 거기에 있는 AE의 생산 공장에서 일하기를 신현우 본인이 바랐다고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의는 아닌 것 같았으나, 가족마저 없는 자식 취급 하니 기댈 곳이 원천적으로 끊긴 신현우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 같기도 했다.

가드들의 인솔에 따라 공항으로 향하던 신현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전에는 그저 두려웠던 눈이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저딴 새끼 때문에 끙끙 앓았던 도합 5년의 세월이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끝이다. 정말 끝.

댓글을 읽어 내리던 진호가 후련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관 기사로 뜬 제목들을 훑었다.

[남수영, ‘희망 보육원’ 기부 사실 발견되어 화제]

[AE 동성 스캔들 주인공 남수영, 야구장에서 남다른 선행]

[“성실하고 착해서 많이 아꼈죠” 자영업자 강 모 씨가 바라본 직원으로서의 남수영]

서로 다른 신문사의 기사였지만, 자료 제공은 대부분 제가 한 것이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선물이라고 하네요. 남수영 학생, 고마워요. 애들도 정말 좋아…… 수영이 형아 고마워!!!……]

희망 보육원의 SNS 계정에서 발견한 게시글은 수영의 선행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글이었다. 그 안에는 보육원 아이들이 택배 상자를 받고 기뻐하는 사진과 함께, 수영이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생필품과 소정의 금액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택배 상자가 낯이 익어 확대해서 보니, 필기체로 적힌 맨해튼의 주소가 흐릿하게 보였다. 옥탑방에 쌓아 뒀던 택배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첨부된 사진을 살펴보다가, 익숙한 인상착의를 발견했다. 야구장에서 봤던 성원이였다. 그때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성원이에게 증언을 받아 여론을 뒤바꾸자.

그래서 위험한 외출을 감행했다. 신현우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에서 제게 남은 기회는 이것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수영의 이미지를 회복했으면 하는 소망이 절실했다. 신현우가 성원을 빌미로 저를 납치하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기는 했지만, 의식이 깨어난 성원의 협조 덕에 증거를 마저 모을 수 있었다. 다행히 성원은 AE의 지원과 선생님들의 보살핌 속에 몸과 마음을 금방 회복했다. 저 때문에 나쁜 일을 겪은 성원에게 사과하고자 정기적인 후원을 약속했다. 이제부터 성원의 후견인은 저였다.

강 사장의 인터뷰는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뉴스 기사를 클릭해, 강 사장이 수영에 대해 구구절절 칭찬을 늘어놓은 것을 읽던 진호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수영이 이 기사를 봤다면 낯 뜨거워서 제대로 읽지도 못했을 것 같았다.

“어때. 만족스러워?”

진호가 웃자 마음이 놓였는지 혜린이 따라 웃으며 물었다. 진호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를 올리는 데 누나가 큰 도움을 준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아주. 엄청. 대단히.”

“고맙다는 말은?”

혜린이 팔짱을 끼며 오만한 자세로 진호를 쳐다봤다. 진호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고마워. 진심으로.”

“그래.”

항상 애만 먹이는 동생이지만 요 며칠간 죽상이었던 얼굴이 환히 펴지니 제 마음도 덩달아 풀어졌다. 드물게 함박웃음을 지은 혜린이 뒤에 있는 드레스 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서 학교에 가 봐.”

“응.”

진호가 돌려받은 핸드폰을 꽉 쥔 채 드레스 룸으로 걸어갔다. 혜린이 진호의 방을 나서며 검붉은 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이제야 색깔을 바꿀 수 있겠네.”

다음은 하얀색으로 해 볼까. 초여름에 어울릴 매니큐어 색상을 고르며 혜린이 제 방으로 돌아갔다.

드레스 룸에 들어간 진호는 잠옷을 벗고 벽 한쪽에 줄지어 걸린 셔츠 중 하나를 꺼내 입었다. 하얀 여름 셔츠에 맞추어 베이지색의 바지까지 착용한 진호가 액세서리 진열장 앞에서 멈췄다.

그중 한가운데에 놓인 배지는 에나멜로 칠해진 앞면이 갈려서 군데군데 흠집이 남아 있었다. 신현우에게 잡혀가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이제 못 쓰려나 이건. 진호가 안이 비치는 유리창 아래의 서랍을 열어 배지를 꺼냈다. 배지의 뒷면에는 미세한 크기의 위치 추적기가 달려 있었다. 배지의 색과 같아서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

「형.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어떻게든 구해 낼 거란 거 알죠?」

수영이 뒷말을 보태진 않았지만 배지에 뭐가 장착되어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MT에 다녀왔을 때쯤이었나. 수영이 만일을 위해 위치 추적기라도 장만하는 게 좋겠다며 사전에 동의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떼 놓고 다닐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사고가 두려웠다기보단, 그만큼 수영이 마음을 써서 챙겨 준 물건이니까. 더더욱 떼 놓을 수가 없었다. 배지를 지니고 있으면 수영과 연결돼 있는 것 같아 안심되는 것도 있었다. 날 지켜 주는 것 같았다고 하면 유치한 생각인가. 민망해진 진호가 서랍 안에 배지를 도로 넣고는 드레스 룸을 나섰다.

집 밖으로 나오니 강한 햇빛이 가마 위를 내리쬈다. 낮이 되면 덥겠네. 진호가 목 끝에 채워진 단추를 하나 풀었다. 오늘부로 숨 막히던 집중 경호도 끝이었다. 드디어 거대한 장정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진호가 자유를 만끽하며 정문으로 나갔다.

자동으로 닫히는 철문을 뒤로한 채 도로로 나오자 익숙한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 두고 왔던 제 자가용이었다.

왔구나. 운전석 쪽의 창을 마주하는 순간 빠앙, 하는 클랙슨이 울리더니 차창이 내려갔다. 운전자를 확인하는 진호의 눈빛에 기쁨이 서렸다.

“잘 잤어요?”

수영이 창밖으로 머리를 불쑥 내밀며 안부를 물었다. 진호가 문제없다는 의미로 주억거렸다.

“불편한 데는 없었어요?”

차 주위를 돌아 조수석에 앉자 수영이 벨트를 매 주며 또다시 물었다. 붕대로 둘둘 감은 제 손목에 시선이 가 있었다. 수영의 눈에 어두운 빛이 드는 것을 목격한 진호가 좁아진 미간을 뒤로 밀어냈다.

“미안해하지 말라니까요.”

장난스럽게 말했더니 씩 웃는 표정이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겨우 같이 있을 수 있게 됐는데 이런 분위기는 바라지 않았다.

“이런 건 금세 나아요.”

말려 올라간 소매를 내리며 끈질긴 수영의 시선을 떼어 냈다. 퉁명스러운 진호를 빤히 보던 수영이 무릎 위로 떨어진 손목을 살며시 그러잡았다. 천 위로 미약한 체온이 닿았다.

“보고 싶었어요.”

얌전히 손목이 붙들린 진호가 고개를 수영에게 돌리자, 수영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우울한 기색이 사라진 미소. 제가 수영에게서 보고 싶던 것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진호가 마주 웃어 주었다. 물론 활짝 웃은 것은 아니었고, 아주아주 미미하게.

“형. 근데 그거 알아요?”

액셀을 밟은 수영이 한결 가벼운 몸짓으로 핸들을 돌렸다. 진호가 궁금하다는 듯 눈가를 모로 세웠다.

“다음 주가 기말고사예요.”

“……그래요?”

그럼 그렇지. 잠깐이나마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했던 내가 바보다. 진호가 자신을 탓하며 제 손목에 얹힌 수영의 손을 털어 냈다.

“3일 남았으니까 힘내 봐요.”

기말고사가 중요한 건 맞는데 그 얘길 꼭 지금 꺼내야겠냐. 김이 새 버린 진호가 눈길을 차창으로 돌린 채 시트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입가에 간신히 매달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토록 그리던 일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