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8)

16.

일상으로의 복귀는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짠돌이와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으나, 다시 경호를 맡게 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전처럼 같이 살 수도 없었고 학교 일이 아니면 함께 있을 계기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시험공부를 빌미로 주말에도 만나서 수영의 특훈을 받을 수 있었지만, 누나가 부탁한 것 때문인지 과외에 진심인 짠돌이 덕에 시험이 끝날 때까지 그간의 회포를 풀 겨를도 없이 공부에만 매달려야 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벼락치기로 어영부영 기말고사를 끝내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사진의 세계 수업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밤새 작성해야 하는 긴 분량의 리포트가 아니고 촬영 과제라 다행이었다.

쏴아아-

엔진의 기동음과 함께 유람선이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진호가 멀어지는 강가의 풍경을 렌즈에 담았다. 셔터음이 몇 번 터지더니 진호가 렌즈의 줌을 당기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푸르른 밤섬이 프레임 안에 들어찼다.

“조심해요.”

후미로 바짝 다가서는데, 뒤에서 수영이 잡아당겨 강제로 발이 멈췄다. 눈앞의 카메라를 치우자 바로 발밑에서 파도가 철썩이고 있었다.

“떨어질라.”

보호 펜스 너머까지 고꾸라진 허리를 당겨 바르게 세운 수영이 갑판 안쪽으로 끌었다. 진호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줄곧 강을 향해 있던 시선을 수영에게 옮겼다. 손에 든 과자 봉지와 아메리카노가 눈에 띄었다.

“형도 좀 쉬어요. 유람선까지 탔는데 즐겨야죠.”

주변을 둘러보니 갑판에 나온 승객들이 사진을 찍거나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며 떠들고 있었다. 모두 한강 크루즈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었다. 촬영에 너무 심취해 있었나. 진호가 뙤약볕을 오래 맞아 빨개진 뺨을 쓸었다.

“그거 줘요.”

수영이 제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제 것이라도 되는 양 강건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카메라를 수영에게 건네주었다. 빈손에는 자연스럽게 커피 잔이 쥐어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한 거예요.”

덥다고 생각하긴 했었지. 진호가 손부채질하며 받아 든 커피를 빨대로 쪼로록 빨아 마셨다. 냉기가 씁쓸한 맛과 함께 열로 데워진 속을 적셨다.

유람선을 탄 것은 과제를 위해서였다. 도시의 여름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 한강까지 나왔는데, 수영이 유람선을 타 보자고 했다. 역동적인 광경을 포착할 수 있다나 뭐라나. 미심쩍긴 했지만 저도 호기심이 일었기에 수영을 따라 크루즈에 올랐다. 날은 더웠지만 하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수면과 한강 양옆으로 줄지어 선 첨단 빌딩의 조화는 그림으로도 퍽 나쁘지 않았다. 짠돌이도 별다른 속셈은 없었는지 잠잠했다. 배에 오르기 전의 찜찜함은 기우였다.

느긋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배와 함께 흘러가는 강변의 사람들을 구경하다, 수영의 손에는 음료가 들리지 않은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뭐 안 마셔요?”

아무리 얇은 셔츠라지만 덥지도 않나.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저와 달리 멀쩡한 수영을 흘깃 보던 진호가 수영을 객실 안으로 데려가려고 손을 뻗었다.

“내가 살 테니까 마시고 싶은 거 골라요.”

“난 됐어요.”

진호가 팔을 잡기 전에 손을 저어 거절한 수영이 제 얼굴을 보고 웃더니 느닷없이 손을 올렸다. 장시간 아메리카노를 쥐고 있어 차가워진 손끝이 이마를 쓱 훑고 지나갔다.

“내가 닦을게요.”

모르는 새에 땀이라도 흘렸나 보다. 창피해진 진호가 손등으로 앞머리를 닦아 냈다.

“거기 아니고 여기예요.”

수영이 애먼 곳을 더듬고 있는 진호의 손을 쥐더니 눈썹 가를 쓸어내렸다. 몇 번 훑다가 팔을 내린 수영이 진호의 손에 남은 물기를 가져가듯 손으로 문지르더니 놓아주었다. 더럽지도 않나. 가볍게 떨어진 수영의 손을 진호가 내려다보았다. 열은 충분히 식혔는데 귓불이 여전히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금방 물러난 손이 아쉬웠다.

그러다 어디선가 저를 향한 눈초리가 느껴져 뒤를 돌았다. 갑판으로 나와 있던 승객들의 눈길이 일제히 거두어졌다. 수영과 저를 알아보는 걸까.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의 대화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를 의식하는 느낌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전국에 제 얼굴이 팔린 이상, 야외로 나오면 이전과 다르게 불편한 일이 생길 거라 예상은 했었다. 과대와 정연이 함께 명예 회복에 힘써 준 덕에 학교에서는 원상태로 돌아가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그 외는 달랐다. 저와 수영에 대한 오해가 풀렸지만,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건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래도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사진을 찍거나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형도 먹이 줘 봐요.”

갑판을 둘러보는 제 품에 과자 봉지가 안겨졌다. 무슨 뜻이냐며 올려다보자, 수영이 옆으로 눈짓했다. 커플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펜스 밖으로 열심히 과자를 던지고 있었다. 상공을 맴돌고 있던 갈매기 떼가 달려들어 공중에 뜬 과자를 덥석 물어갔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 봐요.”

초등학생 때 크루즈를 탄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동영상에서 제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과자를 갈매기에게 던지는 게 재미있어 보여 저도 크루즈를 타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지중해를 순회하는 6성급 크루즈에 저를 태웠다. 일주일 내내 풀장 안에서 클래식 공연을 감상하는 지루한 일정 속에 갈매기 먹이 주기 같은 이벤트는 퍼포먼스로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그때가 떠오른 건 왜일까. 봉지를 뜯자 냄새를 맡았는지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머리 위를 배회했다.

막상 과자를 꺼내 먹이를 주려니 시꺼멓게 달려드는 갈매기 떼가 무서워 머뭇거렸다. 옆에서 수영이 봉지 안의 과자를 한 움큼 가져갔다.

“봐요.”

수영이 집중하라는 듯 제 눈을 가리키더니 과자 한 조각을 집어 펜스 밖으로 내밀었다. 제 앞을 날아다니던 갈매기 하나가 딴 놈에게 빼앗길 새라 잽싸게 과자를 물어 갔다. 수영이 한 손 가득 담긴 과자를 하나씩 집어 하늘을 향해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갈매기들이 차례로 과자를 가져갔다. 어려운 게 아니구나. 손쉽게 손안의 것을 처리한 수영을 보던 진호가 봉지 안의 과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강 쪽을 향해 팔을 뻗자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쥐고 있던 과자가 사라졌다.

“와.”

신기해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수영이 눈웃음을 지었다. 저도 마주 보며 눈가를 휘었다. 왠지 두근거리는 가슴의 박동을 느끼며 과자를 다시 집어 올렸다. 또 다른 갈매기가 날아왔다.

하나 더. 그리고 또 하나 더. 열을 지어 날아와 과자를 쏙 빼앗아가는 갈매기들의 행렬이 제가 마술이라도 부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진호는 잊고 있던 동심에 취해 홀린 듯이 과자를 건넸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옆의 커플처럼 한 움큼 쥐어 창공에 던졌다. 그러곤 벌떼같이 몰려드는 장관을 구경했다. 이런 게 유희가 될 수 있다니. 마치 초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근데 얜 어디 갔지? 곁이 허전한 느낌에 사위를 살피자 수영이 멀찍이 떨어져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요?”

오라고 손을 까딱이자 수영이 오른쪽에 나란히 섰다.

“과제요.”

어깨에 카메라 스트랩을 걸고 있던 수영이 저 멀리 날아가는 갈매기 떼를 향해 셔터 버튼을 눌렀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갈매기들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으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쓸 만한 게 찍히겠어요?”

모여 있을 때 찍지. 아깝게. 진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수영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게요.”

수영이 대수롭잖은 듯 인정하더니 카메라를 내렸다. 돌려 달라고 손을 뻗자 묵직한 카메라가 올려졌다.

“더 찍으려고요?”

수영이 어깨에 걸친 스트랩을 빼내 진호의 목에 걸어 주었다.

“아뇨. 찍을 만큼 찍었어요.”

카메라를 받아 든 진호가 저장된 사진을 보려고 앨범을 열었다. 공원에서 돗자리를 펼쳐 놓고 일광욕하는 시민들, 부모님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이어지는 마천루까지. 하늘을 떠다니는 갈매기처럼 무수히 많은 찰나의 역사가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고이 담겨 있었다. 이 중에 어떤 걸 제출하면 좋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사진을 대충 훑어보는데, 화면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형.”

성큼 앞으로 다가온 수영이 무게를 잡았다. 앨범을 살피던 진호가 눈을 맞추자 묵묵히 쳐다보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곧게 마주한 눈은 다정해 보이기도, 그윽해 보이기도, 혹은 슬퍼 보이기도 했다.

“할 말 있어요?”

수영은 망설이는 듯해 보였다. 답지 않게. 뒷말을 기다리다 못해 물어보자, 수영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도중에 말을 끊은 수영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을 해 봤는데? 호기심뿐이었던 감정이 불안으로 기울었다. 헛된 조바심이란 걸 알지만, 수영이 이렇게나 주저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진호가 두 눈을 키우며 숨을 죽였다.

“나는 형이…….”

“저기요!”

수영이 결심한 듯 말을 잇는데, 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제 쪽으로 뛰어왔다.

“혹시 남수영 씨랑 서진호 씨 아니세요? 명문대 경영학과 훈남!”

그중 키가 큰 한 명이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걸었다.

“저희는 방해할 생각은 없고요. 두 분 응원한다는 말, 전하고 싶어서요.”

키가 작은 여자가 옆에서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 가쁜 숨을 내쉬며 작은 포장지를 건넸다. 투명한 포장지 안에는 초콜릿이 박힌 쿠키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팬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이런 걸 받기는 좀.”

키 큰 여자가 얼떨떨하게 서 있는 진호의 품 안에 쑤셔 넣듯이 쿠키를 전달하자, 당황한 진호가 돌려주려고 쿠키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두 분 사랑, 아니, 우정 영원하길 바랄게요!”

손사래를 친 키 큰 여자가 친구와 함께 쏜살같이 사라졌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진호가 멀뚱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제 손에 남아 있는 쿠키 봉투를 수영에게 들어 보였다.

“이건 어떡하죠? 받아 버렸는데.”

“……아, 그거요?”

달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던 수영이 굳은 인상을 풀며 뒤늦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순간 심각했던 기운에 불안이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형 먹어요. 저분들이 주고 싶다는데.”

웃는 상으로 돌아온 수영이 어정쩡하게 선 진호에게서 포장지를 가로채 갔다.

“그래도.”

이것도 괜한 기우일까. 아까 본 것은 환각이었다는 듯이 멀쩡해진 수영의 낯을 바라보니 입술에 쿠키가 닿았다.

“먹어 봐요.”

진호가 잠깐 망설이다 한 입 베어 먹었다. 초콜릿의 촉촉한 식감이 입 안에 머물렀지만,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수영이 저도 한 입 베어 먹더니 맛있다며 중얼거렸다.

-승객 여러분. 저희는 곧 여의도 선착장에 도착하겠습니다. 안전을 위해 승객분들은 선내 좌석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들어가죠.”

수영이 짐을 챙기며 진호의 손목을 살짝 쥐는가 싶더니 바로 뗐다. 허전한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 보던 진호가 앞서가는 수영을 뒤따라 발을 옮겼다. 여자들이 말을 걸기 전, 수영이 말하려고 했던 건 뭐였을까. 궁금했지만 좋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아 질문을 삼켰다. 지금, 수영과 한 발짝 떨어진 거리가 유독 멀게 느껴졌다.

* * *

선착장에 도착한 뒤, 차로 돌아온 진호는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정리했다. 수영은 남은 쓰레기를 버려야겠다며 쿠키가 들어 있던 봉지를 들고 공원으로 나간 상태였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진을 기계처럼 넘기며 진호가 이마를 짚었다.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나는 형이…….」

내가 뭐 어떻다는 말인지. 거듭 상상을 해 봐도 뒤의 말을 추측할 수가 없었다. 수영이라면 제가 상처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을 거란 걸 믿지만, 앞에 붙인 단서가 마음에 걸렸다.

대개 고심했다는 말 뒤에는 부정적인 문장이 따른다. 우린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다거나,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하다거나. 게다가 그 말을 제게 한다는 건, 그 부정적인 생각에 확고한 결단을 내렸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애초에 우리 사이가 헤어지고 말고를 논할 수 있는 관계인지는 불명확하지만. 그렇지만.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이후로 조금씩 달라진 수영의 모습이 거리를 두는 것 같다는 의심에 불을 지폈다.

최근의 수영은 전처럼 손을 마구 잡아 대지도 않고, 숨 쉬듯 걸던 짓궂은 장난도 치지 않았으며, 이따금 애달픈 눈빛으로 저를 보곤 했다.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저 저 혼자 설레발을 치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 이유가 만일 내가 싫어져서라면. 그토록 애정을 갈구해도 연락 두절로 비수를 꽂았던 신현우처럼, 짠돌이도 나를 떠날 채비를 하는 거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골똘히 궁리하며 카메라를 만지던 진호의 손이 멈췄다. 이런 게 있었나. 앨범 속의 사진 하나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던 의식을 붙잡았다.

제가 하늘을 맴도는 갈매기 떼를 향해 힘껏 손을 뻗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속에서 저는 새를 처음 본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사진엔 촬영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고 했다. 수영의 눈으로 본 저는 티 없이 맑고, 행복해 보였으며, 찬란했다.

제가 티끌 하나의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수영뿐일 것이고, 저를 이렇게 봐 줄 수 있는 사람도 세상에 수영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 수영이 만약 내게서 멀어지려고 한다면……. 명치 깊은 곳에서 응어리졌던 것이 울컥거렸다.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당장에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쓰레기통이 얼마나 멀리 있던지. 공원 한 바퀴를 돌았어요.”

벌컥 차 문을 연 수영이 너스레를 떨며 운전석에 앉았다. 진호가 급히 표정을 정돈하며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사진은 잘 찍힌 거 같아요?”

“네.”

“배는 안 고파요? 뭐 안 먹어도 괜찮겠어요?”

“네.”

말에서 감정이 흐를까 봐 무뚝뚝하게 단답형으로 응했다. 일부러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수영이 핸들을 잡았다.

“이만 형 집으로 데려다줄까요?”

“…….”

“형 집으로 가죠.”

아무런 대꾸가 없자,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수영이 주차장에서 차를 뺐다. 도로로 나와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차 안에서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다 왔어요.”

로비로 들어가는 출입구 앞에 차를 세운 수영이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는 진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안전벨트를 쥔 진호의 손이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물어볼까. 말까. 고뇌로 가득한 눈을 수영과 마주했다. 별거 아니란 걸 이성으로는 알지만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

먼저 입을 뗀 건 수영이었다. 어딘가 엄중한 눈빛을 한 수영이 수그러지는 진호의 턱을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형이 나 때문에 힘들어지는 게 싫어요.”

진호의 눈이 의미를 되묻듯 수영을 훑었다. 열기가 배인 수영의 엄지가 잡은 턱을 매만졌다.

“나 때문에 형이 뉴스에 뜨고,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본가에 돌아가고, 모르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신현우에게 험한 꼴을 당할 뻔했잖아요. 나 하나 때문에.”

“그건…….”

그게 왜 너 때문이야. 넌, 너는. 반박하려던 진호가 수영의 눈가에 드리운 짙은 음영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내가 형 옆에 있으면 구설수가 끊이지 않을 거예요. 다들 우릴 알아보잖아요. 아까 전 배에서처럼.”

수영의 손이 제게서 떨어졌다. 수영은 유람선 객실 안으로 바람처럼 사라지던 두 여자를 바라봤을 때와 같이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내가 형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설마 했지만, 줄곧 염려했던 그 말을 수영에게서 들으니 머릿속이 삽시간에 새까매졌다. 어째서 번듯한 셔츠를 입고 왔나 했더니 이런 고백을 들을 줄은 몰랐다. 폭죽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눈앞에서 하얀 색채가 스파크를 터뜨리며 바스러졌다.

“그래서 형을 떠날까…….”

“안 돼.”

진호가 수영의 말을 끊으며 멀어진 소매를 붙잡듯 두 손으로 쥐었다.

“떠나지 마.”

“형?”

놀란 듯 수영이 붙잡힌 팔과 진호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이리도 절박한 반응이 나올 줄은 모른 듯했다.

“이미 좋아하게 됐는데…….”

숨겨 왔던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성급하게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진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수영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도 선뜻 털어놓을 의지가 없었던 건, 이렇듯 저를 떠나게 되는 날이 올까 봐서였다. 내 마음을 다 보여 줬는데 자신은 식었다며 헤어짐을 고하거나, 하루아침에 내 앞에서 사라진다면 그때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게 수영이라면. 수영과 멀어지면, 신현우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울 것 같아서. 다시는 내 삶을 회복할 수 없게 될까 봐.

하지만 인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네가 날 안 보겠다는데.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깟 고백쯤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영의 소매를 말아 쥐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수영이 되묻듯 눈가를 들어 올렸다. 옅은 홍채 안에서 제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좋아하게 됐다고, 너.”

그러니까 떠난다고는 하지 마. 진호가 희미한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이며, 수영의 손목을 갈퀴처럼 제 손으로 얽었다. 힘줄이 튀어나올 것처럼 도드라진 진호의 손목을 내려 보던 수영이 이내 눈물을 떨굴 듯 바르르 떨리는 젖은 눈가를 바라보았다.

“형. 지금…….”

수영의 눈이 전에 없이 커다래졌다.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입술만 움찔대던 수영이 정신을 차린 듯 부드럽게 손목을 감아쥐었다.

“나, 형 안 떠나요. 내가 형을 왜 떠나요.”

“떠나는 거, 아니야?”

손아귀의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방금은 분명 떠날 거라고……. 사고가 엉켜 버린 진호가 갈피를 잃은 듯 멍한 눈을 했다.

“서론이 너무 길었나 보네요.”

수영이 설핏 웃으며 뻣뻣이 굳어 버린 진호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래도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하려 했어요. 내가 형 끝까지 책임질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수영의 눈동자에는 어둠이 아닌, 따스한 빛이 스미고 있었다. 진호가 여전히 혼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러면 왜 망설인 거야. 곧바로 말하면 되잖아. 곁에 있고 싶다고.”

“이대로 옆에 있기에는 양심에 찔려서요. 난 형 당당하게 좋아하고 싶거든요.”

뻔뻔해서 기가 막혔다. 고작 그거 때문에 그렇게나 사람 애를 끓였다고. 황망해진 진호가 그저 입술만 씹었다. 수영은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맹하게 웃더니 딱딱해진 손바닥을 한 손으로 살며시 쥐었다.

“미안해요. 이기적이어서.”

익숙한 감촉이 손을 덮었다. 수영이 용서를 구하듯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해요, 형.”

수영의 포근한 시선을 바라보던 진호가 이내 이마를 떨구었다. 짠돌이는 늘 이랬다. 제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원망하고, 투덜대도 바보같이 다 받아 주면서 담담하게.

“난, 나는…….”

진호가 아릿해지는 가슴께를 깊은 들숨으로 가라앉혔다. 수영이 저와 거리를 두는 듯이 행동했던 것은 제가 미워져서라는 하찮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제 마음이 내게 부담이 될까 봐. 또 내가 곤경에 처하게 될까 봐. 그런 시답잖은 배려심으로.

날 그런 눈으로 보면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처럼 바라보면서. 그렇게 곁에 있으려고 했다고. 내 마음이 누굴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수영이 유람선에서 저 모르게 찍은 제 사진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수영은 그런 놈이다. 내가 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에게서 멋대로 등을 돌릴 인물이 아니었다. 믿는다고 했으면서, 확실하지도 않은 장래를 걱정해서 속마음을 숨겼던 저는 멍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냥 좋아한다는 말도 아닌, 더 많이 좋아한다고 말해 주는 너에게 언제든지 답해 줄 수 있다. 나도 너와 같다고.

“나도…… 너 많이 좋아해, 수영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어디를 가든 따라붙는 커다란 덩치가 좋았고, 언제든 내 기분을 살펴 따라 주는 세심한 사려가 좋았다. 나를 위해서 꾸준히 신뢰감을 심어 주는 강직함도 좋았고, 지금은 아무래도 좋을 촌스러운 옷차림까지. 모든 게.

“누굴 이렇게나 좋아해 본 적은 처음이라서 생소할 정도로.”

진호가 제 손을 쥐고 있는 수영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야 알겠다. 네가 어째서 내 손을 그렇게나 잡으려 했는지. 나는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진호…… 형.”

수영이 놀란 듯 제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뜨거운 손이 목선을 타고 올랐다. 수영의 동공이 미세하게 커졌다.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수영의 이모가 찾아온 날,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때처럼, 혹시라도 꿈인 줄 알까 봐 두 눈을 똑똑히 바라봤다.

“정말 많이 좋…….”

“알아요.”

수영이 됐다는 듯 턱을 문질러 내렸다. 잔잔하던 입가가 둥그런 호를 그리고 있었다. 입술을 벌리자, 혀가 섞여 들었다. 목구멍이 막힐 것처럼 살덩이가 깊숙이 입 안을 메웠다. 갑작스레 막힌 인후가 헛기침을 뱉어 내자, 수영이 달래듯 방향을 틀었다. 커다란 손이 뒤로 꺾이는 목을 굳건히 받쳤다. 달려드는 키스에서도 묻어 나오는 다정함에 어쩐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틈 하나 없이 수영에게 붙은 가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심장이 수영과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설렘과 떨림, 화학적 작용에 의한 신체적 반응을 넘어, 하나가 되었다는 안정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 순간, 단단한 심지로 버티고 있던 보호벽이 뿌리까지 녹아 사라져 버렸다. 불안과 걱정으로 허물어졌던 속이 빛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이런 게 진짜 키스인 걸까. 수영과는 몇 차례나 입을 맞대어 봤지만 하면 할수록 새로운 세계를 맛보는 것 같았다. 금세 수영을 좇아 혀를 얽은 진호가 수영의 옆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수영이 걸리적거리는 진호의 안전벨트를 풀며 허리를 둘러맸다.

“하아.”

진호가 입술을 떼며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곧장 수영이 제 혓바닥을 삼켰다. 숨 쉴 틈도 없었지만 놓치고 싶지 않아서, 거칠어지는 호흡을 삼키며 수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수영이 들썩이는 제 가슴을 더듬더니 배로 손을 옮겼다. 습기가 찬 천 위로 수영의 손이 문질러졌다. 골반을 쓸던 손이 더욱 아래로 내려가더니 엉덩이를 콱 쥐었다. 진호가 허리를 움칠거렸다.

“하, 잠깐만.”

흐릿해진 눈으로 수영을 밀어내자, 수영이 아쉬운 듯 옆구리를 주무르더니 놔주었다. 서로의 가빠진 숨결이 차 안을 메웠다. 말려 올라간 셔츠를 잡아 내린 진호가 허리를 세웠다.

“나머지는…… 우리 집에서 해요.”

새빨갛게 열이 오른 낯을 멍하니 보던 수영이 허리를 팔에 감아 끌어당겼다. 진호의 어깨에 걸쳐진 수영의 턱이 축 늘어졌다.

“형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요. 심장 터져서.”

수영이 투정을 부리듯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말할 때 닿는 숨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요? 진짜 꿈같아요, 이거.”

“됐고, 콘돔이나 사 와요.”

여유로운 듯이 굴더니 뒷북치기는. 진호가 달아오른 낯빛을 숨기며 수영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실은 제가 쑥스러워서 다시 못할 거 같았다. 고백이란 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긴 신현우한테도 사귀어 달라곤 했어도 좋아한다고 한 적은 없었으니.

“와, 형. 박력.”

“제일 큰 거로 사는 거 알죠?”

이게 꿈이 아니라면 몰래카메라가 확실하다며 호들갑을 떠는 수영을 가뿐히 무시한 진호가 차 문을 열고 나갔다. 로비로 들어가려던 차에, 뒤에서 수영이 크게 ‘서진호!’라며 제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뒤를 돌자 수영이 차창 밖으로 상체를 내밀며 외쳤다.

“이따 기대해!”

하여간 1절로 그치면 될 일을 2절까지 해서 문제라니까. 진호가 고개를 돌려 수영을 외면했다. 서둘러 아파트 로비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랐다.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진호가 셔츠 윗단을 잡아 바람을 일으켰다. 올해 여름은 더위가 유난히 심하네. 그렇게 생각하는 진호의 입매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 * *

“하읏…….”

침대에 누운 진호가 얕은 신음을 흘리며 허벅지 안쪽을 잘근거리는 수영의 뒤통수를 움켜잡았다. 거친 손바닥이 헐벗은 유두를 스치며 자극했다. 도드라진 꼭지가 발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보얗게 드러난 가슴팍에는 수영이 물고 빤 흔적이 선연했다.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고 해야 하나. 수영이 일일이 제게 허락을 구하며 물어 댄 건 수치스러웠지만 진이 다 빠질 때까지 전희를 느낄 수 있었다. 전에 했을 때도 이랬었나. 술에 취해 기억이 끊긴 채로 했던 탓에 수영과의 섹스가 어땠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선지 그때도 애타게 했을 것 같단 말이지. 한참을 애무에만 힘쓰고 있는 수영을 게슴츠레 보며 진호가 맨어깨를 잡았다.

“생각보다…… 잘하네요?”

“내가 배우는 게 좀 빨라서요.”

요즘엔 시청각 자료도 많고, 너튜브에서 웬만한 건 찾아볼 수 있잖아요? 수영이 씩 웃더니 불룩하게 튀어나온 진호의 성기를 속옷 위로 잡아 문질렀다.

“으읏.”

진호가 턱을 치켜들며 탄성을 내뱉었다. 현관에 들어올 때만 해도 깨끗이 씻고 나온 저를 보고 어색하게 서 있더니, 나름 능숙하게 리드하는 수영이 신기했다. 이전에 한 번 하긴 했다지만…….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형 거 한 손에 들어와서 귀여워요.”

속옷 안에 손을 밀어 넣은 수영이 발딱 솟은 성기를 꺼내 주물러 댔다.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네 손이 지나치게 큰 거거든. 어디서도 작다는 소린 안 들어 봤는데. 약이 오른 진호가 벌떡 허리를 세우며 앉아 있는 수영의 위에 올라탔다. 무릎을 매트리스에 댄 채 엉덩이를 들고 보니, 수영의 얼굴이 가슴에 있었다.

“닥치고…….”

“넣기나 하라고요?”

수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진호의 브리프를 끌어 내리며 물었다. 제 속내를 다 안다는 듯한 자만이 고까웠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황홀한 거라는데 왜 갈수록 짜증이 나는 걸까. 생글거리는 면상 때문에 고백을 무르고 싶어진 진호가 수영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물론 수영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래야죠. 무려 서진호 씨가 날 좋아한다는데 기분 좋게 해 드려야지.”

수영이 회음부를 더듬어 구멍을 찾았다. 중지가 미끄러지듯이 내벽을 타고 들어갔다. 검지도, 약지도 손쉽게 들어가자 수영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진호를 올려다봤다. 민망해진 진호가 눈을 피했다.

“씻을 때 풀어 둬서…….”

“내 좆이 그렇게 급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짠돌이 거는 보통 크기가 아니니까 미리 준비를 해 뒀을 뿐인데, 넣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이 돼 버렸다. 물론 안달 난 것도 맞긴 하지만, 수영에게 들키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는 진호를 보며 웃던 수영이 손가락 사이를 벌렸다가 좁히며 안을 넓히자, 창피해진 진호가 수영의 어깨를 주먹으로 약하게 쳤다.

“놔 봐요.”

몸이 녹은 진호가 휘청거리며 수영의 등 뒤에 놓인 콘돔을 들어 뜯었다. 그래도 XL이면 들어가겠지. 브리프를 내려 우람하게 솟은 채 꺼떡이는 수영의 페니스를 빼냈다. 제 팔뚝만 한 크기였다. 가만, 이거 잘 안 들어가겠는데? 진지하게 제 배 속의 공간과 수영의 좆 크기를 비교하다가 콘돔을 꺼내 끼우는데, 역시나 귀두 아래에서 끼여 버렸다. 개탄하는 눈으로 수영을 마주 보자 수영이 보채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냥 하면 안 돼요?”

생으로 하는 건 깔끔하지 않아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당장은 저도 시급했으니까. 하는 수 없이 콘돔을 벗겨 낸 진호가 수영이 덤으로 사 온 러브 젤을 들어 손에 짜더니 수영의 성기에 치덕치덕 발랐다. 수영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양 손바닥에 기둥을 잡고 위아래로 살살 문지르자, 수영이 무언가를 억누르듯 제 목덜미를 쥐었다.

“이건, 너무 야한데……. 상냥하게 하기 어렵겠는데요.”

“좀 거칠게 해 봐요. 그게 좋으니까.”

지금 같은 속도로는 심각하게 느려서 속이 터질 것 같다고. 갈급해진 진호가 선액으로 범벅이 된 비부에 귀두를 가져다 댔다. 두툼한 기둥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엉덩이를 내리며 수영의 것을 밀어 넣었다. 끄트머리가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아릿한 통증이 둔부를 때렸다.

“흐으……!”

진호가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아래로 움직였다. 묵직한 것이 빠듯하게 내부를 뚫었다. 수영이 진호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삽입을 도왔다. 부드럽게 풀었는데도 애널을 찢을 듯이 들어오는 성기가 안의 주름을 짓누르며 파고들었다.

“아……!”

아랫배를 메우는 타격감에 진호가 동작을 멈췄다. 절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 쌀 것 같았다. 거칠게 해 달라는 말은 실언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많이 아프네. 아, 아픈 게 아니라 너무 느끼는 건가.

“형. 더 넣어도 돼요?”

수영이 마른 가슴을 당겨 입에 물며 진호의 골반을 잡아 내렸다. 표피 위로 불거진 혈관이 전립선을 누르며 깊이 들어왔다. 어차피 넣을 거면 왜 물어보는 거냐며 항의하고 싶었지만 입을 벙긋할 여유가 없었다. 통증과 함께 파도처럼 밀려드는 쾌감을 견디기에도 벅찼다. 순식간에 빨개진 진호의 뺨을 쓰다듬던 수영이 허리를 감싼 채 세게 쳐올렸다.

“하아, 아!”

반쯤 들어갔던 페니스가 명치까지 깊이 박혔다. 격통이 전류처럼 내장을 울렸다. 진호의 선단에서 하얀 액체가 핏, 하고 뿜어져 나왔다. 끈적한 사정액이 수영의 복부에 튀었다.

“와. 빠르네.”

수영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아랫배로 흘러내리는 정액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경험은 제가 더 많으니까 수영을 골려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손도 못 쓰고 넣자마자 가 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진호가 힘이 빠져 고꾸라지는 허리를 세우더니, 수영의 어깨를 뒤로 세게 밀어 눕혔다. 일자로 누운 수영의 배에 손을 짚고 올라탄 진호는 복수라도 하듯 허리 짓을 하며 안에 가득 찬 수영의 성기를 깊숙이 욱여넣었다.

“형?”

“가만히…… 있어요.”

수영이 움직이려고 하자, 가슴을 눌러 도로 눕힌 진호가 엉덩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 페니스가 반만 걸쳤다 나오기를 거듭했다.

“흐, 으읏.”

아래를 버겁게 채우는 충만감에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파들거리며 힘겹게 움직이는 진호를 수영이 붙잡으려 했다.

“가만히, 있으라, 니까.”

진호가 두 손목을 모아 잡아 결박하며 접합한 아래를 허리 힘으로 꾹 눌렀다. 좁은 구멍이 오물거리며 느릿하게 좆을 삼켰다. 빨리듯이 들어가는 기둥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던 수영이 불현듯 상체를 일으키며 허리를 쳐올렸다.

“하, 흐읏!”

균형을 잃은 진호가 타박할 새도 없이 안이 꿰뚫렸다. 흡사 야구 방망이라도 집어넣은 것 같았다. 끝까지 처넣은 수영이 페니스를 빼내자 내벽이 헐 것처럼 얼얼했다.

“잠, 읏……!”

갑자기 시작된 허리 짓에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가슴을 밀어 수영을 저지하려던 진호가 이내 등을 붙잡아 매달렸다. 가득 들어찬 내부가 버거웠지만 멈추고 싶지도, 놓고 싶지도 않았다. 속을 집요하게 휘젓는 수영의 부피감에 사타구니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넣어도 넣어도 애가 타서,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으응, 읏.”

진호가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수영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허리를 위아래로 놀렸다. 젤을 충분히 발랐음에도 뻑뻑하게 들어오는 성기가 안을 뜨겁게 채웠다. 사정 후 늘어졌던 제 좆이 빳빳하게 세워졌다. 수영의 것이 들락날락하며 누구도 닿아 본 적 없던 곳을 마구 찔러 댔다.

“많이, 아파?”

“흐으, 으…….”

수영이 묻자 진호가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가 가로저었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아파하면서도 계속 골반을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면 싫은 건 아닌데. 제 위에서 흔들리는 진호를 끌어안은 수영이 속도를 높였다. 형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멈추려고 했지만 하반신은 그러지 못했다. 섹스할 때는 가능한 한 부드럽게 해 주려고 마음먹었는데도, 그간 잘 유지해 왔던 인내심의 고삐가 지금에 와서 풀려 버렸다.

무려 진호 형이 고백했는데.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드디어 말해 줬는데 이 이상 어떻게 참아.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여유가 없는 건 제 쪽이 더했다. 아무 대가 없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분에 넘치게 과중한 선물을 받아 버렸으니 벅차오르는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흐윽!”

세차게 배 안쪽의 우둘투둘한 부분을 끝으로 긁자, 진호가 자지러지며 묽어진 선액을 뚝뚝 흘렸다. 여기가 느끼는 데인가. 수영이 각도를 비틀어 방금 닿았던 곳을 지그시 눌렀다. 내벽이 수축하며 제 정액을 쥐어짤 듯 강하게 물어왔다. 그 즉시 사정해 버릴 것 같아서 제 것을 무느라 근육이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양손에 잡고 버텼다.

“후……. 형 안, 너무 좋다.”

“으읏, 후으.”

“형도 좋죠?”

“흐응, 좋아……. 네 거.”

쾌락에 젖어 헉헉대던 진호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른 채 느른한 턱을 수영의 어깨에 괴었다. 안개라도 덮은 것처럼 머릿속이 탁했다. 엄청난 크기 때문에 아픈 것도 있었지만, 마치 태어나 처음으로 섹스를 하는 것처럼 좋았다. 그것은 비단 성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가슴에 닿는 뜨거운 온기가, 쾌감 속에서도 제가 누구에게 안겨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각하게 만들었다.

“너무 좋아…….”

진호가 안에서 부풀어 오른 수영의 성기를 조이며 잠시 떨어졌던 아랫도리를 수영의 배에 붙였다.

“하, 서진호.”

수영이 격한 열락으로 저릿한 좆을 뿌리 깊이 처넣으며 다시금 밀어붙였다. 격렬한 움직임에 접합부에서 하얀 거품이 일었다. 진호의 페니스에서 물처럼 흘러나온 애액이 구멍을 적셔 윤활제가 되었다. 귀두가 빠져나올 때까지 좆을 뺐다가 단번에 꽂아 넣으며 허리를 퉁기자 전보다 적은 양의 정액이 하복부로 울컥 쏟아져 나왔다.

“하으! 자, 잠깐.”

사정 직후에도 피스톤 질을 멈추지 않는 수영에 넋을 되찾은 진호가 허리를 치며 긴급히 말렸다. 진동기를 꽂기라도 한 듯, 잔경련이 끝나질 않았다. 뭉그적대며 움직임을 멈춘 수영이 바들거리는 등을 감싸 매트리스에 눕히더니, 더운 숨이 흩어지는 진호의 입술을 쓸었다.

“쉬고 싶어요?”

“으응…….”

이러다 복상사…… 는 아니고, 복하사로 죽겠다. 늘어지는 눈매를 힘들여 올린 진호가 생존 본능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여태 섹스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대. 저 못지않게 흥분한 듯 붉어진 가슴팍이 눈앞에 있었다. 수영이 젖은 앞머리를 올려 주며 속삭였다.

“내 거 말고, 나 좋아한다고 말해 주면.”

“그건 아까…….”

“그거로는 부족해서.”

이 새끼가. 침대 위에서마저 짓궂은 수영이 얄미웠지만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게 귀여웠다. 콩깍지가 단단히 꼈네. 진호가 제 이마를 손목으로 가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좋아, 한다고…….”

“누굴?”

“너…….”

“‘너’가 누군데.”

“남수영…….”

진짜 끈질기네. 입이 귀에 걸린 수영을 향해 눈을 흘긴 진호가 입을 닫았다. 매우 흡족한 듯 수영이 빙그레 웃으며 굳은 입매에 뽀뽀 세례를 내렸다. 제 안에 박혀 있던 것이 느릿하게 짓쳐들어왔다.

“쉴 거라며……!”

진호가 박차를 가하며 냅다 저를 끌어안는 수영에게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은 곳을 쑤셔 대는 바람에 의미 없는 반항에 그칠 뿐이었다. 수영이 하염없이 흔들리는 진호의 머리맡에 제 이마를 묻었다.

“미안. 못 참겠어.”

반동으로 자꾸만 위로 밀려나는 몸을 수영이 붙잡으며 반응이 오는 곳을 빠르게 눌러 댔다. 진호의 숨이 금세 가빠지며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아흑, 으응……!”

아플 정도로 찔러 오는 수영 때문에 새된 소리만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수영의 허리만 붙든 채 매달렸다. 묵직한 고환이 엉덩이 아래를 쳐 대며 철썩이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열에 들떠 의식이 점점 몽롱해졌다. 극점에 치달은 등이 수직으로 굽어졌다.

“아, 하윽!”

외마디 소리와 함께 진호가 허리를 거세게 튕겼다. 그와 동시에 수영이 사출했다. 따끈하고 질척한 액체가 배 속을 뭉근하게 채웠다.

“하아, 아…….”

진호가 숨을 고르며 축축해진 시트 위에 상체를 늘어뜨렸다. 진득하게 꽂혀 있던 제 것을 빼낸 수영이 구멍 밖으로 흘러내리는 정액을 급히 손등으로 닦아 냈다.

“미안해요. 안에 싸 버렸네.”

탈진한 진호가 됐다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너무 심하게 좋아서 아무것도 못 하다니.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곧 잠이 들듯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꺼풀이 자동으로 감겼다.

“씻고 자요.”

수영이 대자로 뻗은 진호를 안아 들더니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안에 남은 거, 긁어내야 하는데…….”

수영의 어깨에 상반신을 걸친 진호가 중얼거리자, 수영이 욕조 안에 진호를 조심스레 앉혔다.

“내가 할게요.”

샤워기의 물을 틀어 온도를 맞춘 수영이 욕조에 들어가 진호를 안아 올렸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이 등을 서서히 적셨다.

“안 아프게 하려고 했는데 조절이 잘 안 됐어요.”

그새 부었네. 엉덩이를 벌려 상태를 살핀 수영이 속상한 듯 혼잣말을 뱉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수증기가 노곤한 육체를 데웠다.

“형. 근데 우리 이제 친한 사이 아닌 거죠?”

“…….”

“우리, 사귀는 거죠?”

점차 끊어지는 의식 속에서 수영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결에 응, 이라고 했던 것 같다. 졸음이 쏟아졌다. 그 때문에 수영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대충 오늘부터 1일……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음성이 뇌에 전달되기도 전에 잠에 빠져 버린 진호였다.

* * *

진호는 위로 고개를 들어 층수를 셌다. 하나, 둘……. 20층, 건물의 꼭대기에는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게 언제였더라. 어머니의 꽃꽂이 장식을 전하러 온 이후로 기억이 없으니 1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 제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달라진 외관을 무감하게 훑으며 진호가 로비로 들어갔다. 어차피 앞으로 올 일이 없을 곳이었다.

“도련님?”

비서실장은 갑작스레 찾아온 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사장실에 연락을 넣었다.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실장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섰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형식적인 실장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뒤에서 문이 닫혔다. 사장실 안에는 단둘만 남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상만은 커튼을 열어 볕이 쏟아지는 창가 앞에서 등을 진 채 서 있었다. 상만과 거리를 유지한 진호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후계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허울뿐인 지위였다. 한때는 후계라는 이름 아래 경영 수업을 들었었지만, 그 이름을 제 앞에 내세워 활용한 적은 없었다. 늘 떼어 내고 싶었던 수식어. 장차 AE 제약을 이끌어 갈 리더라지만 경영에는 조금도 참여하지 않는 애매한 위치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상만은 대답 없이 부동자세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말도 안 된다며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혹시나 못 들은 것일까 싶어서 재차 입을 열었다.

“절 쫓아내도 좋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제가 쓰는 카드 다 가져가세요. 대신 AE와는 엮이는 일이 없게 해 주세요. 경호원도 더는 붙이실 필요 없습니다.”

“남수영, 그놈 때문이냐?”

뒤를 돌고 있던 상만이 방향을 돌려 진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올 게 왔구나. 진호가 주먹을 굳세게 말아 쥐었다.

“아뇨. 제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계기는 수영이었으나 순전히 저만의 판단이었다. 수영과 함께해야겠다는 확신이 제가 숨기고 있던 욕망을 일깨웠다.

“처음부터 회사 경영에는 관심 없었습니다. 잘할 자신도 없고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힘이 두려워 가슴속에만 묻어 왔던 말이었다. 저 때문에 다른 이에게 불똥이 튈까 봐 끝내 꺼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견디지 못하겠다. 아버지의 꼭두각시인 척 따르면서 뒤로는 제멋대로 지내는 이중생활도 지쳤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의 기 싸움도 그만두고 싶었다.

“그래서 남자나 만나면서 천박한 짓거리를 계속하겠다고?”

아버지의 뒤에서 역광이 비쳐 얼굴에 그늘이 졌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천박한 짓거리라뇨. 남자를 만나는 건 제 사생활입니다. 아버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요.”

“내 침대에서 대놓고 사내놈이랑 뒹군 게 천박한 게 아니란 말이냐.”

“언제 적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건…….”

발끈한 진호가 잠시 말을 끊었다. 아버지가 옛 얘기를 들춰내려 했다. 이러다간 결말이 나지 않는다.

“그건 오해입니다. 신현우가 강제로 한 거였어요.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무심한 듯 딱딱한 말투로 답변했다. 동요해선 안 된다. 이번에야말로 아버지와의 악연을 끊을 때였다.

“남자를 만나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고, 그 일에 평생을 바치고 싶습니다.”

돌풍 같았던 스캔들이 제 삶을 휩쓸고 난 뒤,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들었다. 정식으로 후계를 받아 경영자가 된다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간의 이슈가 되고, 대중의 입방아에 끊임없이 오르고, 내 언행을 속속들이 주시당하고 판단받을 테지. 예전에 남자와 스캔들이 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게다가 수영과 사귀기로 했으니 위험 요소는 더욱 커질 것이다. 수영과 함께하는 내내 과거의 추문이 끊임없이 회자가 되며 저와 수영을 괴롭힐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뭘 좋아하는지를 드러내지 못해서 죽을 때까지 그런 입장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할 결심이 섰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따로 있고, 그것을 하려 한다고. 나는 그거 아니면 안 되겠다고.

“사진작가 말하는 거냐.”

차분한 상만의 음성에 진호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기어이 제멋대로 하겠다는 거군.”

상만이 혀를 차더니 창가 옆에 놓인 커다란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김이 오르는 잔을 든 상만이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고집이 죽은 네 엄마랑 똑 닮았어.”

상만이 따끈하게 달인 차를 목으로 넘기며 딱딱하게 굳은 채 입을 벌리고 있는 진호를 응시했다.

“네 엄마도 자기 좋은 거라면 포기할 줄 몰랐었지. 상대가 뭐라고 하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생전에 미숙은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저 몰래 주선한 여자와의 만남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때도, 사업 자금으로 쓰라며 건네는 돈을 돌려보냈을 때도, 이따금 이사실로 전해지던 꽃다발을 배송 중지시켰을 때도 한결같이 저 한마디로 제 입을 막아 버렸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내버려 두라고.

“……엄마 얘기가 여기서 왜 튀어나와요.”

진호가 혼란스러운 듯 고인 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집안과 연을 끊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음에도 잠잠한 아버지가, 제 앞에서 엄마를 주제로 삼는 아버지가 낯설었다.

“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입에 담을 자격이나 돼요?”

병원에서 생고생하는 엄마를 매몰차게 버리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 놓고,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보란 듯이 그 여자와 결혼해 놓고, 저와 닮았다며 잘 안다는 듯이 엄마를 끄집어내는 저의를 모르겠다.

“죽든 말든 관심도 없었으면서.”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만, 네가 아는 게 전부 옳다는 신념은 버리는 게 좋아.”

상만이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네 엄마에게 할 도리를 다했어.”

죽은 아내의 얘기에 반사적으로 예민하게 구는 아들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진호는 저와 죽은 아내 사이의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에 어렸던 진호에게 케케묵은 데다 좋지도 않은 얘기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고 싶지 않았으니. 진호 나이가 벌써 스물다섯이니 이제 30년은 거뜬히 넘었겠군. 상만이 울분이 가시지 않은 듯 주먹에 핏줄이 잔뜩 선 진호를 쳐다봤다.

미숙은 친한 대학 후배이자, 그림 작가가 꿈인 미대생이었다.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알게 됐고, 연애 고민이나 진로 고민을 상담할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서로 연애 감정은 전혀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홀로 살고 있던 제집에 미숙이 찾아와 함께 과제를 해도, 일말의 야릇한 분위기가 생기지 않는 사이였다. 동성 친구와 다를 바 없는 여자와 결혼을 결심한 건, 한밤중에 집으로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선배……. 지금 선배네로 가도 돼요? 집에서 쫓겨나서 갈 데가 없어요…….」

전화를 걸어 놓고도 한참 답이 없는 미숙에게 추궁하자 갈라져 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심상치 않은 직감에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집으로 찾아온 미숙은 선글라스와 두건으로 얼굴을 꼭꼭 숨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싸맨 틈 사이로 드러난 피부가 눈에 띄게 창백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벌벌 떠는 몸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주며 진정시킨 뒤,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한참을 입술만 짓씹던 미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부모님께 여자 애인이 있다는 걸 들켰어요.」

상상도 하지 못한 발언에 물끄러미 바라보자, 미숙이 선글라스와 두건을 벗었다. 왼쪽 뺨과 눈에 멍이 들어 빨갛고 파랗게 색이 번져 있었다.

「이건…… 아버지한테 맞아서 가린 거예요. 호적에서 팔 테니까 남자랑 만날 거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말래요.」

「너, 여자 좋아했어?」

상처가 심한 것도 신경이 쓰였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더욱 컸다. 남자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나. 돌이켜 보면 미숙은 제게 연애 상담을 할 때, 상대가 남자라고 말했던 적이 없었다. 애인의 사진을 본 적도 없었고, 단지 미숙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미숙은 어쩔 수 없이 여자임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선배도 제가 혐오스럽죠? 다신 안 보고 싶을 거예요.」

「아니……. 일단 알겠어.」

동성을 좋아하는 건 정신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미숙은 지극히 평범하고 똑똑한 대학생이었고, 또 제게 미숙은 소중한 후배였다. 그래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어떡해요, 선배? 이게 알려지면 학교도 못 다녀요. 게다가 동네에 소문이라도 나면…….」

미숙은 불안했는지 제 팔을 붙잡으며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을 거듭했다. 동성애라고 하면 에이즈와 관련된 기사만 신문에서 쏟아졌을뿐더러, 남성 동성애자에 비해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인지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미숙과 친한 저도 동성애가 더럽다는 인식엔 변함이 없으니, 학교나 사회에 알려진다면 미숙은 인격적으로 매장당할 것이 자명했다.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고,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 내가 부모님을 설득해 볼 테니.」

미숙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껄끄러웠지만, 갈 곳 없는 데다 다친 여자애를 밖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두려움에 떠는 미숙을 달래는 게 급선무였기에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고 타이른 뒤 연고를 발라 주고 손님방에 재웠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어떻게 알려진 것인지, 미숙이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는 와전되어 미숙이 여자와 입에 담기 힘들 만큼 문란한 잠자리를 즐긴다는 헛소문이 공공연한 사실처럼 돌았다.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해도 퍼질 대로 퍼져 기정사실로 된 것을 걷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미숙의 부모를 찾아가 미숙이 힘들어하니 호적에서 파는 것만은 참아 달라고 부탁해 봤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미숙의 부모는 미숙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는 이상 없는 자식이라며 확고하게 단정 지어 버렸다. 저를 향한 비난을 견디지 못한 미숙은 자퇴까지 하게 되었다.

집에서 영영 쫓겨난 뒤 돈도 없이 떠돌이가 된 미숙을 데려간 건 저였다. 제집에서 시체처럼 하루 내내 누워 있으면서 미숙은 매일 울었다. 제 인생은 끝이라며,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물론 작가로서의 미래도 모조리 막혔다며 통곡했다. 밥숟가락을 입 안에 직접 밀어 넣지 않으면 먹지도 않았다. 이러다 내일 죽어도 놀랍지 않겠다는 우려가 들 때쯤, 어떤 제안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와 결혼해.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거 다 이룰 수 있으니까, 살 생각부터 하라고.」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생명은 살려야 할 것 같아서. 만약 미숙이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는다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바닥까지 떨어진 평판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정상적으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으려면 결혼 외에는 별다른 묘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와는 법적인 부부로만 지내고 나머지는 멋대로 살라고 했다.

놀란 듯 저를 보던 미숙은 이내 고맙다며 또 울었다. 그렇게 저는 공식적으로 부부로 지내는 대신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자는 조건으로 미숙과 혼약을 맺었고, 미숙을 향한 손가락질은 없었던 일처럼 사그라들었다. 제약 사업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던 제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이성애자임을 확인받고 나서야, 미숙은 그릇된 성욕을 가졌다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미술 공부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결혼을 기점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되었다. 누구에게든 결혼이 당연한 시절이라서 가능했던 이야기였다.

부부가 된 이후, 미숙은 가족 모임이나 기업 행사에 참석할 때가 아니면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고 학회나 전시회를 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러다 알게 된 여자와 연인 관계를 맺기도 했고, 이별도 여러 번 겪었다. 미숙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마다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게 보안을 유지하는 건 제 몫이었다. 호된 곤경을 치렀음에도 여전히 여자를 만나는 행태가 떨떠름하긴 했지만 제가 참견할 부분은 아니었다.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약속이 있는 한, 미숙이 누려야 할 권리였으므로.

미숙의 감당 못 할 행동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미숙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일에만 매달리는 저에게 원치 않은 결혼이니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제게 만날 여자를 소개해 주었다. 제 뒤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기에 혜린에 이어 진호까지 낳아야 했음에도 한결같았다.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조건을 붙였지만, 후계를 생산하는 것이 지당하게 인식되는 환경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결혼하고 나자 손자가 보고 싶다는 양측 부모의 강요가 거세졌다. 저는 대를 이어 회사를 물려주어야 할 처지로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라고 여겼다. 아들이 필요하다며 부탁하는 저에게, 미숙은 자신도 아이를 갖고 싶었다며 승낙해 주었다.

임신은 시험관을 이용한 체외 수정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인공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얻은 자식이었지만, 미숙은 지극정성으로 열 달간 배 속에 아이를 품었다. 그 과정은 진호를 낳을 때까지 한 번 더 반복되었다. 결혼 전의 약속을 깨뜨리긴 했지만, 혜린과 진호를 연달아 낳은 것에 대해 미숙도, 저도 후회 한 점 가지지 않았다. 경위야 어떻든 제 자식의 탄생은 기쁜 일이었다.

약속은 이미 깨졌고, 제게 마음 써 줄 이유가 하등 없는데도 미숙은 꿋꿋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어 나갔다. 암으로 병치레를 하는 중에도 중매를 자처하는 것은 물론, 그림을 그려 번 돈을 주기도 했고, 이사실로 꽃을 배달하기도 했다. 각자의 삶에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게 아니냐며 다그치면, 병든 자기를 뒷바라지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의리라고 했다. 의리 같은 건 지킬 필요 없다며 치료에만 전념하라고 화를 내도 이게 제가 원하는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속한 완치를 위해 가진 배경과 힘을 동원하는 것은 남편으로서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책무였다. 미숙의 역할은 그저 본인의 신변에만 만전을 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제게 관심을 주는 미숙이 저로선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제 나이는 지천명을 바라보고 있었고, 대학 때 이후로 안 해 본 연애를 시작했다. 병세가 차차 호전되던 어느 날, 제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음을 알리자 미숙은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미숙의 습관적인 관심은 자연히 시들해졌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미숙은 치료에만 매달렸고, 퇴원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혼 이후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으며,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듯, 돌연 전신에 악성 종양이 퍼졌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숙은 혜린과 진호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제가 죽으면 재혼할 때 보태라며 비상금을 남기는 사족도 덧붙였다. 이제는 각자의 자유를 찾은 줄 알았건만, 죽어서도 타협할 수 없는 그녀만의 고집이었다.

“나는 네 엄마를 원하는 곳에 묻어 준 것으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묘하게 미숙의 모습과 겹치는 진호를 보며, 상만이 말을 마쳤다. 제게 미숙은 애증의 존재였다. 벗이었지만 혐오의 대상이었고, 멀리하고 싶었으나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숙은 여자를 사랑해서 저와 결혼해야 했고, 쓸데없이 제게 미안해했고, 침대에 피를 토하며 골골거렸고, 그러면서도 제게 미안해했고, 그러다 허무하게 가 버렸다. 미숙의 말로를 알았기에 제 자식만큼은 아니길 바랐다. 그랬기에 진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숙이 그랬던 것처럼, 동성을 사랑해서 지난한 비극을 겪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낡을 대로 낡은 제 속사정을 아들이 알아야 할 구실은 없었다. 신현우 그 자식에게 납치당해 상한 몸으로 돌아온 아들놈을 보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미련을 끊어 낼 때가 됐다고. 예전처럼 혈기왕성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준다면, 무엇이든 허락하겠노라고.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 죽은 듯이 쓰러져 잠이 든 아들놈을 보며, 이른 결혼을 밀어붙였던 것을 후회했다. 아들만은 미숙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랐으면서, 그 길로 몰아붙였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든가요.”

진호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어찌 됐든 저는 알아서 나가 살겠습니다. 후계 자리는 저 말고 누나에게 주세요. 원래부터 누나가 맡아야 했던 자리니까.”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인 진호가 뒤돌아 걸었다. 언제나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렇게 되새기며 문고리를 잡았다.

“괜찮은 놈이더구나.”

문고리를 잡은 손이 멈췄다.

“잘 지내라.”

잘못 들은 건가? 진호가 머리를 홱 돌렸다. 창가의 햇볕이 닿아 하얗게 비치는 아버지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했다.

“안 그러셔도 아주 잘 지낼 겁니다.”

어느 시절부터 활기를 잃은 탁한 눈동자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문을 열었다. 할 말은 다 했는데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 길로 저는 아버지와 완전히 갈라섰으니 그 근원에 대해서 깊이 파헤칠 필요는 없었다.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영이 얼른 보고 싶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너와 연애하며 사진작가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 빙구 같은 놈은 고생했다며 저를 꽉 안아 주겠지. 눈에 훤한 수영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진호가 발을 옮겼다.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로비로 나서는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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