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살던 집은 처분했고, 카드도 정지시켰어.
“알았어. 고마워.”
-정말 괜찮겠어? 돈을 물 쓰듯이 쓰던 애가. 내가 아버지 몰래 용돈이라도 넣어 줄까?
“됐어. 나 스스로 돈 벌어서 지내보려고 하니까.”
-네가 그러고 싶다니까 말리지는 않을 건데, 혹시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응.”
-남자 친구랑은 어때? 수영 씨가 잘해 줘? 내가 밤에 쓰기 좋은 장난감 몇 개…….
“누나. 여기 통신이 막혀서 안 들리네. 다음에 전화할게. 끊어!”
모처럼 훈훈하게 끝내려는데 이 누나는 쓸데없이 그런 걸 물어. 혜린의 오지랖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간만에 진한 가족애를 느낄 뻔했던 진호가 신호 불량을 핑계로 바삐 통화를 마쳤다. 이럴 동안에 자기 연애나 챙기면 좀 좋아. 정연과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는 기함할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인데, 한창 잘해 줘야 할 시기에 -심지어 나이 차도 열 살이 넘는 주제에- 남의 연애에 관심을 가지는 누나를 보니, 정연이 몇 배는 아까웠다.
걔도 참. 요상한 데에만 콩깍지가 낀다니까. 진호가 핸드폰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으며 캐리어의 손잡이를 쥐었다.
용돈이라도 넣어 주려는 누나의 심정은 이해한다. 그간 아버지의 재력에 기대어 살아왔던 제가 편리한 생활을 버리고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성원이 후원금도 마련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는 필수이고,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아서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도 기분만은 홀가분했다. 몇 배는 고단한 삶이겠지만 후계를 포기했으면서 아버지에게 빌붙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홀로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게 저에겐 더 큰 만족이었다.
“형. 뭐 해요? 안 따라오고.”
앞서가던 수영이 통화가 끝난 뒤에도 멈춰 서 있는 진호에게 보따리를 든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알겠다며 발을 옮기자, 짐을 잔뜩 든 수영이 들뜬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내 나란히 손에 쥔 캐리어가 흙길을 구르며 터덜거렸다. 잘못하면 논밭에 구를 참이라 유의하면서 길을 걷는 진호를 수영이 안쪽으로 당겼다. 멀리서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이 보였다.
한 학기가 끝났다. 학점은 4.5점 만점에 4.0점. 턱걸이로 간당간당하게 4점대에 올랐다. 막판에 밤을 지새우며 공부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사진의 세계 성적이 A+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4개월에 대한 보상 같아서. 제 가르침 덕이라며 의기양양한 짠돌이는 마뜩잖았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불만 사항에 불과했다. 수영과 함께하기로 마음먹고,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에 숨겨 왔던 말을 아버지에게 전부 털어놓고 나니, 더는 바랄 게 없다는 감상이 들었다.
“저기예요.”
농가가 몰려 있는 부근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던 수영이 조그만 동산 초입에 있는 붉은 지붕 집을 가리켰다. 단층으로 된 단출한 주택이었다.
대문을 지나 현관문 앞에 다다르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 쳤다. 수영이 애인을 데려갈 거라고 전했다는데, 이미 저인 걸 알고 있다지만 가족들의 반응이 어떨지 좀체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같은 성별인 것도 모자라서 좋지 않은 화제로 엮여 각종 매체에 대서특필되었던 상대인데. 당연히 싫지 않을까. 수영이 잘 설명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이 받았을 충격을 고려해 소개를 미루자고 했다. 그러나 수영은 전혀 신경 쓸 것 없다며, 기필코 저를 가족들에게 보여 줘야겠다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떠밀리듯이 시골에 왔다. 물론 나도 짠돌이네 가족이 보고 싶고 궁금하긴 하지만 시기가 지극히 이른 거 아닌가.
“정말 괜찮을까요?”
수영이 열쇠를 꺼내려고 보따리를 내려놓는데, 걱정이 앞선 진호가 팔뚝을 붙잡았다. 수영이 진호의 손을 감싸 쥐며 다른 손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셔츠의 각을 잡아 주었다. 중요한 자리라고 수영과 맞춰 입은 정장이었다.
“그럼요.”
자신만만하게 올라간 입가를 보니 안심되지만, 잔잔한 불안감은 여전했다. 왜 자기 가족을 게이로 만들었냐며 보자마자 쫓아내는 게 일반적일 테니까.
수영이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꽂았다. 문이 열리고 먼저 들어가는 수영을 뒤쫓아 안으로 들어섰다. 진호가 캐리어와 함께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움켜쥐었다. 할아버지와 동생들을 보면 뭐라고 인사해야 하지. 우선, 집에서 신세 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어.”
현관에 들어서서 짐을 내려놓는 수영의 너머로 보인 집 안은 온통 어두컴컴했다.
“아무도 없어요?”
“네. 아무도 없어요.”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을 걸어가는 수영의 뒤에다 대고 묻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수영이 부엌 안쪽을 지그시 바라보다 방향을 제 쪽으로 돌렸다.
“일단 들어와요. 밭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나 보네.”
저를 향해 팔을 휘적거리는 실루엣을 보던 진호가 꾸물거리며 구두를 벗었다. 설마 일부러 나를 피하는 건 아니겠지. 불현듯 뇌리를 휘감는 어떤 가능성을 애써 밀어내며 진호가 조심스럽게 문지방을 밟았다. 아냐. 착각이야. 짠돌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불은 왜 안 켜…….”
쿵쾅대는 가슴을 붙든 채, 수영에게 다가가는데 부엌과 거실의 불이 동시에 켜졌다. 어디선가 고깔모자를 쓴 아이 셋이 후다닥 달려와 앞에 서더니 배꼽 앞에 양손을 모았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우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직접 만든 것인지, 정체 모를 노래를 합창한 아이들이 손에 쥐고 있던 폭죽을 터뜨렸다.
“짠!”
펑,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알록달록한 색의 종잇조각들이 저와 수영의 머리 위로 소복이 떨어졌다.
“이게…….”
수영과 똑 닮은 얼굴을 한 채, 저를 향해 반짝반짝 빛을 내는 여섯 개의 눈동자를 마주한 진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깜빡였다. 얼어 버린 진호의 옆에서 수영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놀랐죠? 형 온다고 준비한 거예요.”
설마 식탁 밑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귀신인 줄 알았다며 동생들에게 너스레를 떤 수영이 딱딱하게 굳은 진호의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얘네들이 내 동생들이에요. 왼쪽부터 차례로 둘째 남수민, 셋째 남수훈, 막내 남수정.”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아이,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 머리를 곱게 땋은 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하나씩 가리키며 소개한 수영이 진호의 허리에 제 팔을 감아 안았다.
“그리고 여기는 내 애인, 서진호.”
“반가워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오. 앞으로 진호 형이라 부르면 되죠?”
“진호 오빠! 보고 싶었어요!”
수민, 수훈, 수정이 순서대로 손뼉을 치며 진호를 맞이했다.
“어…….”
이 중에서 나만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건가. 뇌의 시냅스 활동이 정지해 버린 진호가 수영의 품에서 빠져나올 여념조차 없이 세 사람을 훑어봤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환대를 받을 수가 없다.
“이 할아비는 쏙 빼놓고 소개하기냐.”
그때 흰 머리의 노인이 뒤에서 수영을 쿡 찔렀다.
“할아버지!”
수영이 뒤돌자 노인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진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쪽은 우리 할아버지, 남영길 씨.”
수영이 뒤늦게 진호를 제 앞으로 끌어오자, 영길이 투박한 손으로 진호의 두 손등을 부여잡았다.
“진호라고 했나? 수영이한테서 얘기 들었다. 촌구석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수영에게서 느꼈던 따뜻한 분위기가 풍겨왔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푸근한 할아버지의 맞이에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워졌다.
“이 형, 완전히 놀랐나 본데. 진호 형.”
수영이 허리를 강하게 쥐었다. 묵직한 압력에 진호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저……. 괜찮으세요?”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나이가 어린 동생들은 그렇다 쳐도 할아버지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사건이었을 텐데, 어째서.
“애인이 저인데.”
제 상식으론 납득할 수가 없다. 남자에다가 손주와 성적인 소문이 돌았던, 심지어 손자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전국적으로 욕을 먹게 했던 장본인인 자신을, 이렇게 따스하게 받아 준다는 게. 남자와 만난다는 것 때문에 저를 감시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더더욱.
“기사도 보셨을 텐데…….”
영길이 염려로 단단히 얼어붙은 진호의 하얀 손을 연신 쓰다듬었다.
“네 잘못이 아니잖냐. 이상한 놈한테 걸려서 그리된 거 다 안다. 거기다 수영이 이놈이 요만할 적부터 동생들 돌보고 돈 버는 데 혈안이라 눈 감기 전에 연애 한 번 할까 걱정이었는데, 이리 멋들어진 짝을 데려왔으니 나는 이제 여한이 없어.”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뜬 눈가를 바라보던 진호가 가슴속에서 뭉클하게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눌러 삼켰다. 감동으로 벅차오른 진호의 등을 수영이 한 손에 감싸 안았다.
“봐요. 내가 반길 거라 했죠?”
환하게 웃으며 등을 쓸어내리는 수영과 가까스로 시선을 마주친 진호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알면서도 까먹곤 했던 진실이 떠올랐다. 남수영은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동생들과 이벤트를 준비해서 놀라게 할 계획이나 짜 놓고, 괜찮을 거라며 저를 다독였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그저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현관을 들어서는 내내 긴장했던 심장이 녹진하게 녹아갔다.
“고마워요, 다들. 환영해 주셔서.”
저를 향한 눈동자들을 향해 한 명씩 눈을 맞춘 진호가 쥐고 있던 종이 가방을 영길에게 건넸다.
“며칠 묵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가져왔어.”
“애들 것도 따로 준비했대. 내가 애인 하나는 잘 뒀지?”
수영이 진호의 허리를 잡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자연스럽게 갈빗대를 쓰다듬는 손짓에 진호가 기겁해서 수영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아무리 저를 편견 없이 받아 줬다지만 눈앞에서 보이는 애정 행각은 무리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제 속은 모르는지 눈치 없는 수영은 그대로 제 손에 깍지를 끼더니 허리 위로 끌어 올렸다. 차마 가족들 앞에서 수영을 밀쳐 낼 수도 없었던 진호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게. 수영이가 복도 많구먼.”
다행히 영길은 관심도 없는지 종이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여 밥 먹자. 진호 온다고 백숙 끓여 놨다.”
“오빠. 같이 저녁 먹어요. 우리 할아버지 백숙, 진짜 맛있어요.”
수민이 수영에게 안기듯이 잡힌 진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옆에서 수훈과 수정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아요. 여름 별미.”
“옥수수랑 수박도 있어요!”
“어, 어. 그래?”
냉큼 달려와 제 팔을 잡아챈 수정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며, 진호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수정에게 진호를 빼앗긴 수영이 거실에 홀로 선 채 억울한 듯 항의했다.
“와. 너무하다, 너네. 나는 안중에도 없어?”
“빨리 와요.”
처량한 모양새에 웃음이 터진 진호가 오라고 손짓했다. 자기에게는 형밖에 없다며 뒤따라 부엌으로 들어오는 수영을 동생들이 장난스럽게 놀려 댔다.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었어. 자석처럼 제 허리에 안착하는 수영의 커다란 손을 진호가 애정을 꾹꾹 담아 잡아 주었다.
* * *
“앞으로 서너 걸음 더 가요. 좋아요. 조금만 더.”
양손으로 눈을 가린 진호의 어깨를 잡으며 수영이 뒤에서 방향을 알려 주었다. 진호가 수영의 말에 따라 살며시 발을 디디며 미간을 구겼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그냥 보면 재미없잖아요. 이건 여기서 봐야 제일 예뻐요.”
“대체 얼마나 대단하다고.”
별거 아니기만 해 봐라. 진호가 자신의 눈을 가린 손 뒤에서 수영에게 눈을 흘겼다.
배가 터지도록 식사를 한 뒤, 수영이 보여 줄 게 있다며 트럭에 태웠다. 뭘 꾸미는 건지 물어봐도 묵묵부답이기에 찜찜한 심정으로 따라왔는데, 야단법석을 떨며 저를 안내하는 수영 때문에 기대감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봤자 눈을 뜰 때 보이는 건 어디 산기슭이겠지만. 걸을 때 풀 같은 게 밟히는 걸 보면 저를 산으로 데려온 게 틀림없었다.
“다 왔어요. 천천히 눈 떠 봐요.”
앞으로 향하던 진호가 발을 멈춘 채 눈에 대고 있던 두 손을 내렸다.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오래 감겨 있어 먹먹한 시야가 점차 깨끗해졌다. 눈을 찌푸려 초점을 맞추던 진호가 입을 떡 벌렸다.
“와.”
제가 선 언덕 위로 광활한 밤하늘이 배경을 가득 메웠다. 별이 정말 쏟아져 내릴 것 같네. 근방에 나무가 없어, 별빛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천공이 무한히 펼쳐졌다. 동쪽에는 짙은 보랏빛의 은하수가 수많은 행성 사이를 구름처럼 가로질렀다. 잡지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천체가 정면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대단한 거 맞죠?”
뒤에서 수영이 뿌듯한 듯 물었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니.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우두커니 하늘을 보던 진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메라 가져올걸.”
“그럴 줄 알고 가져왔죠.”
수영이 어깨에 메고 있던 카메라 가방을 진호에게 건네주었다. 같이 메고 있던 또 다른 가방을 열어 삼각대를 꺼낸 수영이 평평한 대지 위에 세웠다. 웬일로 이런 것까지 다 챙겼대. 수영이 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 진호가 설레는 마음으로 삼각대 위에 고정했다.
“설치는 완료했고, 셔터가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
렌즈에 빛이 잘 들어오도록 노출을 높인 진호가 풀밭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수영에게로 돌아왔다. 진호가 옆에서 천천히 무릎을 굽히자, 수영이 급히 다리를 접으며 양반다리를 한 허벅지 위를 제 손으로 두드렸다.
“여기 앉아요.”
“됐어요.”
애도 아니고 거기에 앉냐. 차갑게 거절하는 진호의 손목을 잡은 수영이 짐짓 엄한 눈으로 팔을 당겼다.
“애인 사이에 이런 것도 안 되나?”
“나, 참.”
어서 앉으라는 듯 눈짓하는 수영을 째려보다 마지못해 다리 위에 살포시 엉덩이를 붙였다. 수영이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붙들어 안았다. 단단한 수영의 가슴이 등에 맞닿았다.
“형. 나 또 고백할 거 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짠돌이의 고백이라면 그다지 유쾌한 기억이 없었던 터라 가슴이 떨리는 게 아니라 치가 떨릴 지경이었지만, 제 의사와는 반대로 수영의 손이 닿는 복부엔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예전 같으면 생리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자위했겠으나, 지금은 그게 아닌 걸 알고 있다.
“뭔데요.”
태연한 척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수영이 허공에 떠 있는 진호의 손을 쥐어 무릎 위에 올렸다.
“나 외할아버지한테서 IGN 물려받기로 했어요.”
“뭐?”
내가 뭘 들은 거지? 진호가 화들짝 놀라 일어서려 하자, 수영이 옭아매어 도로 앉혔다.
“내 말 끝날 때까지는 가만있어 봐요.”
후계는 죽어도 안 할 거라며. 우리 집에 찾아온 이모까지 쫓아냈으면서. 허탈한 고개를 뒤로 꺾으니 수영이 화답이라도 하듯 눈을 맞췄다.
“형이 신현우 그놈 때문에 뉴스에 나고 납치까지 당했을 때, 아무것도 못 한 내가 한심해서 죽을 것 같았어요. 내가 힘만 있었어도 형 상처 하나 없이 지킬 수 있었을 거예요. 딱 신현우를 잡아낼 힘만 있었어도.”
그래서 명함에 적힌 이모의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손 하나만 까딱하면 요긴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데 안 할 수가 없지 않나.
“형 험한 꼴 당하는 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써서 형 지키는 데 쓰려고요.”
수영이 치켜 올라간 진호의 눈꼬리를 엄지로 어루만졌다. 하지만 잠자코 듣던 진호의 눈매는 더욱 날카롭게 세워졌다.
“어릴 적에 내쫓겼다면서요. 외가 때문에 10년 넘게 생고생을 했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후계를 자청해요? 왜 그랬어요. 왜 그렇게까지…….”
“내가 형 끝까지 책임진다고 했잖아요.”
지당한 이치라도 되는 듯 답하는 본새에 화도 나지 않았다. 수영에게 IGN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허망한 눈으로 수영을 응시하던 진호가 이마를 떨구었다. 어떻게 그렇게 평안한 눈빛으로 네 모든 걸 버린다고 말할 수 있어. 나 하나 때문에 원수나 다름없는 외할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네 인생을 희생할 거라고. 어떻게.
“내가 좋은 집도 구해 줄게요. 형, 평생 먹여 살리고 사진작가 활동도 평생 지원해 줄게요.”
수영이 아래로 떨어지는 등을 바짝 당겨 안으며 붉어지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나 졸업하고 나면 같이 미국 가요.”
진호의 가슴 앞에 작은 상자가 내밀어졌다. 수영이 사각 케이스를 열자 심플한 디자인의 브론즈 반지 한 쌍이 살포시 놓여 있었다. 큼지막한 보석 없이 투박하면서도 클래식한 이미지가 수영과 어쩐지 닮아 있었다. 진호가 은은하게 빛을 내는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은 거냐고요.”
외가의 가업을 잇기로 했더라도 고가의 귀중품을 마련하는 건 짠돌이로서는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제가 수영의 고향 방문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진지하게 저희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을 수영이 그려져서 어떠한 말도 보탤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안 괜찮다고 타박하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형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평생 내 옆에 묶어 두려고.”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수영의 말이 농담 같아서도 아니었고, 마냥 기뻐서도 아니었다. 제게 끝없이 주고자 하는 수영의 마음이 과분해서, 되레 허탈감이 들었다. 나는 네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는 빈털터리 대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그래서 같이 미국 안 갈 거예요?”
수영이 빤히 케이스를 바라보는 진호 앞에 가까이 내밀었다. 뒤에서 본 동그란 머리통은 혼란한 듯 굳어 있었다. 안 봐도 형은 매끈한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을 것이었다.
“응?”
수영이 보채듯 생각이 많은 정수리 위로 턱을 올렸다. 진호가 닫고 있던 입술을 벙긋거렸다.
“응…….”
겨우 내뱉은 소리에 옅은 물기가 어렸다. 든든한 배경, 물질적인 풍요, 게다가 가족까지 모조리 등진 제가 이 무거운 진심을 받아도 되는지. 감히 보답은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던 과정은 찰나였다. 누가 사귀는 사이에 일평생을 약속하냐고 꾸중이라도 하고 싶은 의욕도 사라졌다. 나를 위해 여태 힘겹게 구축해 온 인생을 버린다는 수영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남은 것 하나 없는 내 삶 전부였으니까.
수영에게 고백한 순간부터, 수영과 제 사이에 이별이라는 단어는 진작에 지웠다. 그렇기에 수영이 없는 일상을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남수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숨이 멎을 때까지 남수영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 우리가 멀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겠지.
“같이 갈게. 미국.”
“고마워요, 형. 허락해 줘서.”
진호의 볼에 또다시 입을 맞춘 수영이 반지 하나를 집어 왼손 약지에 끼웠다. 맞춘 것처럼 반지가 딱 맞게 들어갔다.
“마음에 들어요?”
은은한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반지를 내려다보던 진호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잖아요.”
“다행이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아는 사람에겐 다 물어봤거든요. 뭐가 예쁜지.”
수영이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다른 반지를 케이스에서 꺼냈다.
“내 것도 끼워 줘요.”
제가 받은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크기가 더 큰 반지였다. 자세를 돌려, 반지를 받아 든 진호가 수영의 왼손을 잡아 끼워 넣었다. 흡족한 듯 제 왼손을 진호의 왼손과 겹쳐 잡은 수영이 마주 보고 있던 진호를 잡아당겼다. 품 안에 진호가 엎어지듯 들어갔다.
“우리 이제 결혼만 하면 되겠네요?”
“결혼이라니.”
매번 앞서간다니까. 수영다운 발상에 짧게 웃은 진호가 새침하게 받아쳤다. 수영이 ‘미국에서는 동성끼리 결혼할 수 있대요. 내가 찾아봤어요’라며 진지하게 설명을 늘어놨다. 미국 헌법 조항까지 줄줄이 읊는 수영을 진호가 저지했다.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나한테 언제까지 존댓말 쓸 거예요?”
“반말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수영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키웠다. 수영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던 진호가 우물거리며 말을 씹어냈다.
“그건 좋아하기 전이니까.”
수영과 사귀게 된 이후로 말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수영이 계속 존댓말을 쓰기에 덩달아 저도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미래까지 약속한 마당에, 수영은 제가 놓자고 하기 전까진 존댓말을 쓸 기세여서 결국 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은 왜 안 싫은데?”
수영이 가슴에 닿는 얼굴을 양손에 잡아 올렸다. 알면서 굳이 왜 물어. 느긋하게 늘어진 눈가를 보다가 진호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목구멍이 간질거려 기침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결혼하기로 한 사이니까.”
“하하. 형……!”
수영이 목청이 터져라 웃더니 굳게 다물린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가볍게 겹쳤다.
“결혼 생각 없다며. 아깐 왜 튕겼어.”
“너무 먼 얘기잖아. 좀 부끄럽기도 하고…….”
“부끄러워?”
하긴 안 튕기면 서진호가 아니지. 싱글벙글한 수영이 제 눈길을 피하는 진호의 눈가에 몇 번이고 키스를 내렸다. 끌어안는 힘에 눌려 풀밭에 드러누운 진호가 저를 위에서 가두고 있는 수영을 밀어냈다. 알몸을 드러낸 것처럼 낯 뜨거운 설렘이 심장을 울렸다. 결혼 약속이라니. 내가 이런 남우세스러운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없는 말도 아니니까.
“잠시만 이것 좀 놓고.”
“응, 응. 나도 사랑해, 진호야.”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 라고 말하려는데 불현듯 수영이 제 두 손목을 오른손으로 잡아 내렸다.
“그러면 안 사랑해?”
이 자식이 진짜 왜 이래. 혀끝에 맴도는 문장을 직설적으로 뱉기가 멋쩍어서 결혼이라는 대체어를 내세웠을 뿐인데, 과연 수영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 자기. 사랑 없이도 결혼하는 사람이었어?”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를 왼손으로 잡아 제 쪽을 보게 한 수영이 붙잡은 뺨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힘이 다 풀린 진호가 항복한 듯 느른한 눈빛으로 수영을 올려 봤다.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저는 아직 서툴고 더디다. 하지만 수영이 제게 주었던 수많은 사랑을 헤아리면, 알량한 자존심쯤은 기꺼이 내던질 수 있었다. 어떻게 내가 널 이길 수 있을까. 내가 짐작할 수 있는 한계치의 수백, 수천 배를 내어 주는 너를.
“수영아, 사랑해…….”
화끈거리는 낯을 손등으로 가린 진호가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억지스러운 면마저 좋아서 져 주는 제가 바보 같다고, 남수영이라면 바보가 되어도 좋을 만큼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우리 진호 사랑해.”
진호의 승복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실실대던 수영이 입술을 서서히 포갰다. 이번엔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부드럽게 윗입술을 머금는 수영에게 저를 내맡기며 진호가 어느새 풀린 두 팔을 수영의 허리에 감았다.
서울에 가면 첫째로 동거할 집을 구해야지. 짠돌이에게 부담되지 않게 딱 둘이 살 정도의 월세 집을 골라 매일 같이 학교에 가고, 과제를 하고, 함께일 미래를 계획하다가 졸업까지 하고 나면…….
머릿속에 행복만 가득할 앞일을 그려 나가던 진호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사실에 수영의 어깨를 잡았다. 뭉그적대는 수영을 간신히 떼어 낸 진호가 불만인 듯 쏘아붙였다.
“너 군대 안 갔잖아. 나 그럼 1년 반 동안 너 기다려야 해?”
말도 안 돼. 이 나이 먹고 연하 남친 때문에 곰신이 되다니.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떨어져 지내라고?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수영 때문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수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눈썹을 세웠다.
“나 군대 안 가.”
“어떻게 군대에 안 가? 너 설마 국적 미국이었어?”
혹시 얘 외국인이었나? 그래서 여태 미필이었던 거였어? 뜻밖의 가능성에 진호가 놀라기 전에 수영이 재빨리 잘못된 가정을 고쳐 주었다.
“나 국적 한국 맞아.”
“그럼 왜 안 가는데?”
“안 가도 되게 만들었는데. 옆에 계속 있겠다고 맹세했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얼떨떨한 진호에게 수영이 ‘형, 나 그만한 권력은 있는 남자야’라고 속삭이며 벌어진 입술을 좇아 물었다. 이 새끼, 내가 아는 그 짠돌이가 아닌데. 이런 게 자리의 위력인가? 어안이 벙벙한 진호가 추궁을 포기한 채 입 안 깊숙이 파고드는 수영을 받아들였다. 아무렴 어때. 안 가도 된다는데. 그럼 됐지.
수영의 뒤로 우리 둘을 감싸는 우주가 감기는 눈에 찬란하게 담겼다. 이미 카메라에 사진은 찍히고도 남았겠지만, 확인은 뒤로 미뤘다. 지금은 저 때문에 없던 권세도 만들어서 휘두르고 다니는, 사랑스러운 연인을 탐하기에도 부족하니까. 제가 입은 것과 똑같이 하얀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리며 진호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군대에는 안 간다니까…….
수영이 재벌이 되었다고 해도 빚은 지고 싶지 않으니 새집과 함께 아르바이트도 구할 것이다. 큰돈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월세와 생활비를 보태면서 사이좋게 남은 학기를 수강하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사진작가로서의 경력을 쌓고, 소중한 사람들 앞에서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하고, 한적한 저택에서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꾸리는 동안 많이도 다투겠지.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저희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이목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고, 서로의 의견이 충돌할 때도 수없이 많을 것이며, 그밖에 예상치 못한 난관에 골머리를 앓기도 할 테다.
하지만 그런 건 두렵지 않았다. 수영과 늘 함께 있을 거니까. 궁지에 몰려도 그때마다 서로를 잡아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제가 헷갈리고 망설일 때마다 수영이 몇 번이고 확신을 심어 주었던 것처럼.
단단히 얽힌 두 손에 나란히 끼워진 반지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도 빛났다. 하늘에 뜬, 셀 수 없이 많은 어떤 별들보다도 환하고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