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아온 왕자님
“기사님, 여기서 세워주세요.”
서도운은 택시 미터기에서 반짝이는 숫자를 확인하고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택시 기사가 거슬러줄 지폐를 꺼내자 그는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거스름돈은 넣어두세요. 기사님이 어찌나 말을 잘하시는지 오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커피라도 한잔 사드리고 싶은데 일이 있어서 이렇게밖에 감사를 못 드리네요.”
택시 기사는 뒷좌석에 앉은 남자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선생님께 진료비를 드려야죠.”
가끔 돈을 받고 싶지 않은 손님이 있는데 지금 뒷좌석에 앉아 있는 잘생긴 남자가 그랬다. 저녁 시간 후 태운 손님이 수의사라기에 슬며시 말티즈를 키운다고 했더니 어찌나 곰살맞게 상담해주는지 운전하는 내내 자기도 모르게 떠들어댔다.
“흰둥이는 꼭 병원에 데려가서 뒷다리를 검사해보세요. 안전하게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드럽게 눈을 휘며 건네는 말에 택시 기사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대치동에 있는 큰 동물병원에서 일하신다고 하셨죠? 제가 쉬는 날 우리 애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서도운은 빙긋 웃으며 옆에 놓아둔 쇼핑백을 챙겨 택시에서 내렸다. 번잡한 대학가를 벗어나 길게 이어진 소방도로변에는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독특한 인테리어의 커피 전문점, 레스토랑, 술집들 사이로 ‘꽃집’이라고 적힌 낡은 간판이 멀리서 보이자 반가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발걸음이 빨라지자 손에 든 종이 쇼핑백들이 부딪히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문을 닫은 꽃집 앞에 서서 위를 올려보자 창틀에서 흘러내린 녹물로 장식된 유리창이 보였다. 그곳은 몇 년을 봐도 한결같았고, 2년 만에 봐도 어제 본 것 같이 그대로였다. 2층에 있는 술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꽃집 옆에 있는 입구에 들어서다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슬쩍 계단 위를 올려보자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가 보였다. 좁은 계단은 성인 남자 둘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이라 그들을 밀어내지 않고 지나갈 방법이 없었다. 진지한 듯 보이는 두 남자의 모습에 그는 그들이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누군가 계단 아래 쌓아둔 빈 맥주병이 담긴 자루에 볼일을 봤는지, 묵은 맥주 냄새와 지린내가 섞여 시간이 지날수록 불쾌해졌다. 잠깐 시간을 보낼 곳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봤지만 연탄구이집이나 부대찌개 전문점밖에 보이지 않았다.
“꼭 섹스를 해야 해?”
“아니, 그게……. 섹스하고 싶지 않냐는 거야.”
그는 계단 위를 올려보며 그들의 대화가 언제쯤 끝날까 생각했다. 섹스에 대한 진지한 대화는 술집 앞에서 할 만한 건 아니니 조금만 더 악취를 참기로 했다.
“사귀자고 했을 때 섹스는 안 한다고 말했잖아.”
“알아, 꼭 섹스를 하자는 건 아니야. 나랑 사귀면서 성욕 같은 걸 느낀 적 없어?”
“없어.”
“키스 같은 걸 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어.”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이어지는 대답에 그는 이 대화가 곧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들리고 ‘나쁜 놈’이라든지 ‘개새끼’라는 욕과 함께 누군가 씩씩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혹시 내가 이런 말 해서 기분 나빴어?”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애교를 잔뜩 섞은 목소리가 이어지자 그는 속으로 욕을 하며 다시 계단 위를 올려봤다.
“괜찮아, 불만이 있으면 말해.”
“불만 같은 건 없어. 이런 건 처음이라 좀, 그렇잖아?”
이어지는 목소리는 간들거리며 누군가를 달래는 듯 느껴졌다.
“내가 딱히 밝히거나 심하게 굴러먹는 놈은 아니야. 너 전에 딱 세 명 있었어. 클럽에 가서 물어봐, 나 되게 깨끗하게 놀았어.”
“사귄 사람이 세 명이라고 해서 섹스를 세 번 한 건 아니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그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새 악취로 인한 불쾌감도 잊고 계단 위에서 들리는 대화에 집중했다.
“혹시,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섹스하기 싫다는 거야?”
계단 위의 누군가와 같이, 그도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그건 아냐. 섹스가 싫은 것뿐이야.”
“알았어, 다시는 섹스하자고 안 할게.”
서도운은 소리 없이 감탄사를 외쳤다.
게이가 모두 문란한 건 아니지만 대부분 성적으로 자유분방했고, 다들 건강한 남성이기에 당연히 성욕도 넘쳤다. 아예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전에는 활발하게 성행위를 했지만 무성욕자 파트너를 위해 자신의 성욕을 참아준다니, 보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무성욕자 게이’와 ‘보살 파트너’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자신이 미국으로 간 후 나타난 신참이 분명했다.
꽃집 2층에 있는 병맥주를 전문적으로 파는 그곳은 게이 커뮤니티에서 안방 같은 곳으로 소문난 가게였다.
질펀하게 노는 것보다는 30대 이상의 게이들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 술집은 상호도 없어 ‘원구 형네 술집’이라고 불렸다. 안주도 없이 병맥주만 파는 오래되고 낡은 술집의 어둑한 조명은 오가는 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는 사람만 알고, 아는 사람이 모여, 아는 이야기를 하는 그런 곳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에 어쩐지 몸을 숨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도운은 입구에서 나와 건물 모퉁이에 몸을 감췄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어둠 속에서 머리를 내밀어 밖을 보자 천천히 걸어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떨어져 걷고 있는 두 남자에게서는 연인 같은 친밀함이나 친구 같은 다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오르는 계단이지만 서도운의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그는 입안을 맴도는 묘한 껄끄러움을 삼키고 술집 문을 열었다.
“원구 형, 내가 왔어!”
술집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향해 모였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이들이 달려와 끌어안고 뺨에 뽀뽀를 하는 등 열렬하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그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디서든 환영받는 남자였다.
바 뒤에서 나온 헬스 트레이너 같은 근육질의 남자가 다가와 거친 손놀림으로 서도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거 땄어?”
“당연하지.”
“하여간 넌 잘난 놈이야아.”
서도운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양원구의 손놀림은 가벼웠지만 타격음은 가볍지 않았다. 오랜만에 당하는 애정 어린 폭력에 그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손에 든 쇼핑백들을 양원구에게 내밀었다.
“뭐야아?”
“들어오면서 티셔츠 몇 벌 샀어.”
양원구는 쇼핑백을 받아 안을 들여다보며 잠시 표정을 굳혔다. 쇼핑백마다 고가의 명품로고가 그려진 상자가 있었다. 이번에도 몇백이 훌쩍 넘어갈 것이 뻔했다.
처음에는 아는 형, 동생 사이에 주고받을 금액의 선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거절했지만 서도운은 백 단위는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하고도 남을 재력의 소유자였다.
“고맙다, 잘 입을게.”
양원구를 따라 바로 향하던 서도운은 아직 떠들썩함이 남은 홀을 둘러보며 외쳤다.
“귀국 기념으로 오늘 술값 내가 다 계산해 줄 테니 죽도록 마셔!”
큰 소리 날 일 없는 조용하던 술집에 환호성이 터졌다. 밝게 웃으며 함께 환호성을 지르는 서도운을 보며 양원구는 고개를 저었다.
서도운은 여전히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능력 좋고, 돈 많고, 돈 잘 쓰는 끝내주는 게이였다.
미국 수의사 전문의 자격을 딴다며 한동안 한국을 떠난다고 했을 때 양원구는 이미 잘 나가는 수의사인 그에게 그런 것이 더 필요하냐 물었다. 서도운은 쾌활하게 답했다.
“있으면 편해.”
“그거 쉬워?”
“쉽지는 않은데 난 머리 좋으니까 1, 2년이면 될걸.”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2년 만에 원하는 것을 이루고 돌아왔다.
양원구는 바에 기대앉은 서도운을 보며 신이 편애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흐린 조명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이목구비는 옛 영화 속의 배우처럼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짙은 쌍꺼풀이 진 눈이 그린 듯 휘어졌다.
“기네스?”
“진도 한 병 줘.”
서도운의 말에 양원구는 기네스와 봄베이 사파이어를 바에 올려놨다. 양원구가 코스터 위에 키가 큰 잔을 내려놓자 그는 단단한 거품이 올라오도록 천천히 기네스를 따랐다. 흑맥주에 내려앉은 거품 위로 투명한 진을 쏟아붓기 시작해 거품이 봉긋하게 올라올 때가 되어서야 멈추었다.
“너무 많이 섞는 거 아냐?”
양원구는 봄베이 사파이어 병을 들어 훌쩍 줄어든 양을 확인하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형네에서 마시는 거잖아.”
서도운이 좋아하는 흑맥주와 진을 섞은 칵테일은 ‘Dog's Nose’라는 이름으로, 양원구는 수의사가 수의사 같은 술을 처마신다고 늘 툴툴거렸다.
“하여간 처마시는 거 하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양원구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환영받는 남자는 늘 깔끔하게 술을 마셨다. 분위기에 맞게 적당히 술을 마실 줄 알고, 멋진 농담을 건네고, 흐트러짐 없이 예의를 지켰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스스로 흥에 취해 술을 마시는 곳이 양원구의 술집이었다. 병맥주만 파는 양원구의 술집에 40도가 넘는 진이 있는 이유는 순전히 서도운 때문이었다.
“원구 형, 나 형네 가게 앞에서 신기한 거 봤어.”
“뭐?”
“아, 본 게 아니라 들었구나.”
“뭘 들었는데?”
“게이가 섹스를 안 한대.”
“뭔 소리야아?”
양원구가 구운 아몬드를 작은 접시에 담아 내려놓자 그는 한 알을 들어 꾹꾹 씹으며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뜻하지 않게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본 느낌이라 찝찝했지만 ‘무성욕자 게이’와 ‘보살 파트너’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했다.
“계단 입구에서 대화하는 걸 언뜻 들었는데 플라토닉 러브를 하는 게이 커플이 있더라고. 섹스 안 하는 게이라니, 환상의 존재잖아.”
서도운의 말에 양원구는 피식 웃었다.
“아, 씹선비.”
“씹선비?”
“걔 별명이야아.”
“누구? 무성욕자 게이?”
그의 되물음에 양원구는 낄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섹스랑 스킨십을 안 한다고 해서 다들 ‘씹 소리하는 선비 같은 놈’이라고, 씹선비라고 불러.”
‘무성욕자 게이’의 존재가 사적 영역이 아닌 공공재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마음 한구석에 있는 껄끄러움을 털어내고 질문을 이어갔다.
“유명한가 봐?”
“네가 미국에 가고 나타났는데 세상에, 그런 난리도 없더라.”
“왜?”
“못 봤어어?”
“씹선비?”
그는 길을 걷던 두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봤어.”
양원구는 그의 대답에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잘생겼어어.”
“얼마나?”
양원구의 얼굴이 느물거리는 미소에서 흐물거리는 미소로 바뀌자 서도운은 술잔을 들었다. 차마 웃지 말라는 말은 못 하고 독한 술로 메스꺼움을 눌렀다.
“섹스를 안 한다고 해도 사귀자고 하는 놈들이 줄을 설 만큼.”
양원구의 대답에 그는 잘생긴 게이는 다 먹어봤다는 전설적인 게이를 떠올렸다.
“그 정도로 잘생겼으면 원나잇이 바로 먹었겠네. 천국 다녀왔으면 인간 세상이 눈에 안 들어오긴 하지.”
혼자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서도운을 보며 양원구는 혀를 찼다.
“씹선비는 원나잇 얼굴도 모를걸. 걔가 이 바닥 뜬지 좀 됐어.”
“원나잇 이정원이 떠났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미국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원이가 우연히 어떤 남자를…….”
그는 그렇게 한국을 떠나있는 동안 일어난 소식들을 하나둘 뒤늦게 접했다.
* * *
“서 선생, 그만 마셔. 벌써 반병 넘었어어.”
양원구는 새로운 기네스 병을 그의 앞에 놓으며 봄베이 사파이어 병을 치웠다.
“벌써? 어쩐지 알딸딸하더라.”
전설이 사라지게 된 과정을 안주 삼아 마신 술은 취하는 줄 모르고 들어갔다.
마시던 칵테일 잔이 치워지고 그의 앞에 기네스 마크가 찍힌 전용 맥주잔이 놓였다. 그는 기네스 뚜껑을 열어 잔에 따르며 갈색의 액체 사이로 피어오르는 하얀 거품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정원이 미쳐서 쫓아다녔으면 진짜 잘생겼겠네. 근데 우리나라에 정원이랑 섹스 안 한 잘생긴 게이가 남아 있었어?”
“전에 멀리서 한 번 봤는데 미남 같던데.”
“미남이면 미남이지, 같은 건 뭐야?”
“가까이서 못 봤어어.”
“정원이가 형한테 소개 안 시켜줬어?”
서도운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양원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몬드 한 알을 들어 입에 넣고 꾹꾹 씹다가 한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일반인을 꼬신 거 아냐?”
“그렇다는 말도 있고…….”
“일반인만 한 우물 파더니 결국은 성공하는구나. 정원이가 야구도 그렇게 한 우물을 팠잖아. 요즘 레드불스 순위 볼 때마다 정원이 생각이 나서 눈물 나.”
그의 말에 양원구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원은 만년 꼴찌 팀을 20여 년을 응원하고 있는 야구광이었다.
“하긴, 레드불스를 쫓아다니는 거 보면 정원이가 좀…… 그렇지.”
양원구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좀’이라는 단어 뒤에 생략된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정원은 ‘좀, 많이 정신 나간 놈’이었다. 그런 놈이 누군가를 만나 정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잘한대?”
여러 개의 단어가 생략된 물음이었지만 양원구는 서도운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응.”
양원구의 대답에 그는 잔을 들어 천천히 흑맥주의 맛을 음미한 후 내려놨다.
“정원이가 잘한다면 진짜 잘하는 건데……. 형, 정원이 진짜 타고났어. 걘 앞뒤 다 잘해.”
테이블 위에 떨어진 소금가루를 닦아내던 양원구의 손이 서도운의 말에 멈췄다. 잠시 굳어져 있던 양원구는 답을 듣고 싶지 않은 물음을 꺼냈다.
“너, 혹시 정원이랑 잤냐?”
대답 없이 맥주잔을 드는 그를 보며 양원구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아무나 다 건드리네!”
양원구가 들고 있던 행주를 집어던지며 선반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꺼내 들자 서도운은 얼른 일어나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지금 걔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할 건데? 정원이 여기 떠났다며! 다 옛날 일이잖아.”
그의 말에 양원구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신이 던진 행주를 바닥에서 주워들며 혀를 찼다.
“하여간 얼굴 반반한 놈 중에 그 새끼랑 안 잔 놈이 없어어.”
양원구의 한탄 섞인 욕을 들으며 그는 다시 바 체어에 앉았다. 빼앗은 휴대폰을 내밀자 양원구는 떫은 얼굴로 받아들고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내려 감은 눈이 보였다. 눈을 깜박이자 짙은 속눈썹 아래 매달린 그림자가 깃털처럼 살랑였다.
서도운이 눈을 맞추며 웃어주면 게이든 아니든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잘난 외모에 호감 가는 성격과 출중한 능력에 돈까지 모두 가진 남자였지만 양원구의 눈에는 서도운도 이정원 못지않게 정신이 나간 놈이었다.
“도운아, 올해 몇이야?”
“서른셋.”
서른이 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잘 관리된 피부를 가진 남자는 반쯤 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아무리 지랄 같은 놈도 다 짝이 있나 보더라. 정원이 애인이 정원이가 몇 명이랑 잤는지 상관없다고 그랬단다.”
양원구는 아무런 대꾸 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남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제 그 짓 좀 그만해.”
“뭘?”
“폐기물 처리하는 거 말이야.”
서도운은 양원구의 말에 하나같이 끔찍하게 끝난 자신의 연애사를 떠올렸다.
그는 연인들에게 한도 없는 카드를 쥐여주고 무얼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마음껏 그의 돈을 쓰고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돈으로 다른 남자를 만났다. 그의 관대함에 익숙해져 그것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그는 배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걸리는 순간 지금까지 누려온 모든 것을 토해내야 했다. 돈과 자유의 대가는 적지 않았고 처참하게 인생이 망가졌다.
그의 보복에 대해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서도운은 완벽한 남자였다. 사람들은 서도운을 두고 바람을 피운다면 누구와 사귄다고 해도 바람을 피울 ‘쓰레기’라고 욕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누군가 그를 ‘폐기물 처리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나쁜 연애운에 대한 놀림의 의미든 배신한 파트너는 용서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탄의 의미든 그는 악명 높은 연애 상대였다.
양원구는 그의 악명이 우연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서도운은 누구나 사귀고 싶은 멋진 남자였고 양원구는 서도운에게 호감을 보내던 괜찮은 남자를 열 손가락 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도운은 그런 괜찮은 남자가 아닌 하나같이 문제가 있는 남자들을 선택했다.
서도운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내려놨다.
“술이나 더 줘, 진도 같이.”
그는 양원구의 핀잔을 피해 술을 더 주문했다.
양원구는 치워둔 봄베이 사파이어를 기네스와 함께 그에게 내밀었다. 코스터 위에 단단한 얼음 덩어리가 채워진 새로운 잔이 놓였다. 그는 차가운 잔을 만지며 근육만큼이나 배려심이 넘치는 양원구를 향해 사르르 웃었다.
양원구의 배려가 가득한 잔에 맥주를 따르자 맥주 거품 위로 얼음이 떠올랐다. 얼음은 눈 위로 솟은 빙산처럼 보였다. 47도의 진이 빙산을 타고 검은 물속으로 흘러내렸다.
“미국에서는 그 짓 안 했지?”
“잠잘 시간이 모자라서 자위도 못 했어.”
양원구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내가 업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몇 놈 있는데, 정원이부터 시작해서 이제 한 놈, 한 놈 다 치울 거야. 거기 너도 있어어.”
뜬금없는 양원구의 말에 서도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전부 형네 단골 아냐? 치우고 나면 뭐 할 건데?”
“가게 접어야지.”
“형네 가게 없어지면 난 어디 가서 술 마셔?”
“돈도 많은 놈이 뭘 이런 데 집착해. 아무 데나 가아.”
“내가 가게 하나 차려줄 테니까 내가 연락하는 날만 장사할래?”
“헛소리하지 말고, 이정원도 짝이 있는데 너라고 없겠어? 이거다 싶으면 무조건 잡아.”
서도운은 양원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녹을 것 같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